2017-02-04

1602 성명서가 아니라 연구가 필요하다 : 표지이야기일반 : 표지이야기 : 뉴스 : 한겨레21

성명서가 아니라 연구가 필요하다 : 표지이야기일반 : 표지이야기 : 뉴스 : 한겨레21

성명서가 아니라 연구가 필요하다

12년간 ‘조선인 위안부’를 본 사람의 증언을 통해 위안부 삶 연구해온 일본 와세다대 교수 홍윤신의 쓴소리… 2008년 오키나와 미야코섬에 위안부 추모비 설립 주도하고 위안소 실증 연구한 첫 책 3월 출간

제1098호
등록 : 2016-02-01 23:37 수정 : 2016-03-09 작게
소녀야,  내  손을  잡아

② 오키나와섬 미야코지마 아리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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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5월 어느 날, 백합이 흐드러진 도카시키섬에서 홍윤신씨는 반나절 동안 나비를 쫓아다녔다. 도카시키섬은 일본 오키나와 본섬에서 서쪽으로 30km 떨어져 있다. 예순다섯 요시카와가 홍씨에게 나비 사진 찍는 법을 일러줬다. “나비가 날아가는 순간을 조용히 기다려요.” “나비의 다음 동작을 생각하며 셔터를 눌러요.” 그는 요시카와가 ‘그날’의 기억을 이야기하길 기다리는 중이었다.
일본 오키나와에서 ‘조선인 위안부를 본 사람들’의 증언을 통해 조선인 위안부의 삶을 추적한 홍윤신 와세다대학 초빙교수. 류우종 기자
스물여섯의 박사과정생 홍윤신씨는 이날 오전 일본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오키나와 나하 공항에 내렸다. 나하에서 오키나와 서쪽 도마리항으로 이동해 다시 1시간20분 동안 쾌속선을 타고서야 섬에 도착했다. 박사과정생에게는 꽤 큰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1945년 3월, 이 섬 주민 329명이 집단자결을 했다. ‘미군 포로가 되면 강간당하고 고문당하는 끔찍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공포와 ‘포로가 돼 일본군의 기밀을 누설하면 안 되니 죽어야 한다’는 협박을 일본군이 주입한 결과였다. 종전을 한 달 앞두고 섬 주민들은 서로를 죽이고 자신을 죽였다.
그 무간지옥 속에서 살아남은 생존자가 당시 6살의 요시카와였다. 요시카와의 이야기를 들으러 그는 섬에 갔다. 그리고 그 방문이 지난 10여 년의 인생을 바꾸었다. 2004년 이후 홍윤신의 삶은 ‘오키나와 조선인 위안부의 삶’을 만나는 일로 채워졌다.
12년 전 첫 만남 떠올리며 촉촉
오키나와 도카시키섬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던 배봉기 할머니. 배 할머니는 도카시키섬을 떠나온 지 30여 년 만에 다시 도카시키섬에 갔다❶. 가와다 후미코 제공
지난 1월26일 도쿄 와세다대학 도서관 앞에서 만나 12년 전 ‘첫 증언’의 기억을 이야기하는 홍윤신(38) 일본 와세다대학 국제언어문화연구소 초빙교수의 목소리가 촉촉했다. 홍윤신 교수는 오키나와 전쟁을 경험한 주민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오키나와섬 현장조사를 다녔다. 여러 섬 가운데 아시아태평양전쟁 당시 ‘지상전’이 없어 크게 주목받지 않았던 미야코섬에서의 ‘위안소’ 개수가 정확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위안소 16곳을 확인했다. 미야코 주민 25명의 증언을 통해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의 삶의 단면들을 포착했다.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한 것으로 보이는 4명의 한국인 실명도 처음 확인했다. 이후 미야코섬의 연구를 확장해 2012년 박사 논문 ‘오키나와 조선인의 성(sex)/성(life)의 정치학-기억의 장으로서의 위안소’를 썼다. 오키나와 전역의 공문서와 오키나와 주민들의 ‘위안소에 대한 증언’을 교직해 오키나와섬에서 조선인 위안부의 삶과 성이 어떻게 ‘관리당했는지’를 확인한 논문이다.
논문에 앞서 홍 교수는 2008년 9월7일 미야코섬에 ‘일본군 위안부를 위한 추모비’를 세우는 데도 결정적 역할을 했다. ‘한·일·오키나와 공동조사단’을 꾸리고 2006~2008년 미야코섬 현장조사를 실질적으로 수행했다.
국내 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전공한 홍 교수는 2002년 ‘오키나와’를 테마로 공부하기 위해 와세다대학 아시아평화연구소로 유학했다. 그가 보기에 오키나와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독립된 류큐 왕국이었던 오키나와는 메이지시대 사쓰마번주에게 정복당하면서 일본령에 속하게 된다. 오키나와어를 쓰지 못하는 등 차별적 정책을 통해 지배받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전역에서 가장 격렬한 지상전이 펼쳐진 곳도 오키나와다. 오키나와 주민의 희생을 일본군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전쟁 기간 중에 오키나와어를 쓰는 주민은 스파이로 몰려 처형되기도 했고, ‘집단자결’에 내몰리기도 했다.
“누나들이 <아리랑>을 불렀어”
홍윤신 교수가 미야코섬 현장조사를 하고 있다❷.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석사 논문에서 오키나와 군기지와 한국 군기지를 통해 동아시아의 평화를 이야기했던 홍윤신은 박사 논문에서는 오키나와 전쟁을 겪은 오키나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고 싶었다. 이론에만 치중한 공부를 탈피해 현장조사(필드워크) 방법을 택했다. 2004년 도카시키섬으로 간 이유였다.
섬에서 만난 ‘생존자’ 요시카와는 처음 만난 날의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서야 찬찬히 ‘그 집단자결의 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조선인 위안부’에 대해서도 말했다. 폭격으로 숨진 ‘하루에’라는 이름의 조선인 위안부였다. 하루에의 주검을 그의 어머니 요시에가 거뒀다고 했다. “전쟁이니 너무 서러워하지 마.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렴.” 요시카와의 어머니가 읊었다는 기도문이 홍 교수의 마음을 채웠다.
다른 주민들도 전쟁 체험을 이야기할 때마다 ‘조선인 위안부’를 기억해냈다. 홍 교수의 마음속에 새로운 질문이 생겼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왜 기억하는 걸까? 저 사람들에게 위안부는 무엇일까?’
2006년 어느 봄날, 미야코섬에 도착해 길을 가다가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83)를 만났다. 동행한 미야코섬 안내자가 그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온 연구자야. 혹시 조선인 위안부 본 적 있어?” 그러자 요나하가 답했다.
“조선 여성들은 츠가가라는 우물로 빨래하러 오가고 해서 자주 볼 수 있었어. 빨래하고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여기서 잠깐 쉬었어.” 요나하가 돌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이 돌이 있는 장소에 언제나 앉아 쉬었으니까 그 모습이 여기를 지나갈 때마다 생각나. 그래서 이 자리에 이 돌을 둔 거야.”
그는 <아리랑>도 기억하고 있었다. “의미는 몰랐지만 우리도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어. 군기제인가, 육군기념일에 전통극을 했는데 거기서 위안부들이 <아리랑>을 불렀으니까. 3월인가, 5월께였을 거야. 그 연극에서 이 누나들이 <아리랑>을 불렀어. 무척 아름다운 음이어서 나도 기억해.”
미야코섬 주민들의 ‘조선인 위안부 여성의 생활’에 대한 증언은 다른 섬과는 조금 달랐다. 다른 섬에서는 대부분 위안소가 민가와 격리된 곳에 세워졌다. 주민들과도 격리됐다. 당연히 주민들은 위안소를 이용할 수 없었고 바깥을 자유롭게 오갈 수도 없었다. 미야코섬에서도 민간인이 위안소를 이용할 수는 없었지만, 위안부 여성들은 우물을 중심으로 빨래하러 자주 오갔다. 그만큼 주민과의 접점이 많았다. 군 연회에 위안부들을 연예인처럼 세워 공연을 시키기도 했다.
홍 교수가 채집한 증언 속에서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자유롭지 않았던 위안부 여성들의 삶이 있다. 미야코섬 주민 시모지 도미(85)의 기억 속에 나타나는 여성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지금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건 어느 날, 우물 주변에 앉아 있는 모습이에요. 이렇게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는, 치마 밑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서 말이죠. 정말로, 그게 다 보여 여자의 그거. 이렇게 강가에 앉아서. (조선에서 데려온 사람들이) 이 근처에 있었다니까…. 멍하게…. 아무 표정도 없이 앉아 있었다니까, 그냥 멍하니…. 그 무표정한 얼굴, 그게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당시 13살 소년이 기억한 것은 ‘훤히 보이는 성기’가 아니라 여자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시모지 도미는 자신의 기억과 체험을 통해 ‘자유롭게’ 오간 듯 보이는 조선인 여성들이 사실은 행복하지도, 자유롭지도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일본 땅에 와서 고추를 허겁지겁 먹는 모습도 주민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매운 고추를 그렇게 허겁지겁 먹었어.” 매운 음식이 좀체 없는 일본 땅에서 매운 고추를 먹으며 향수를 달래는 모습 같아 안타까운 마음이 더하기도 했다. ‘조센삐’(‘삐’는 성기를 뜻하는 중국어)라고 놀렸던 일을 사죄하는 마을 주민도 있었다.
위안부 여성, 군과 함께 사망했을 것
미야코섬 주민 요나하 히로토시가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돌을 가리키고 있다. 이 돌이 2008년 ‘아리랑비’가 됐다❸.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전쟁이 끝난 뒤 오키나와섬의 조선인 위안부들은 무사히 한국으로 귀향할 수 있었을까.
1992년 오키나와 지방사 연구자들이 밝힌 오키나와 제도의 군위안소는 130곳이었다. 위안소는 모두 군 비행장 근처에 세워졌다. 오키나와 지방사 연구자들은 그중 49곳의 위안소에 조선인 일본군 위안부가 있었다고 본다. 다만 그 규모는 정확하지 않아, 700명이라거나 1500명이라는 등 추정치의 편차가 크다. 정확한 수를 밝힐 자료가 없다는 얘기다. 2002년 국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실태조사에 나선 한국정신대연구소는 적어도 700명 이상이 오키나와섬에서 일본군 위안부 생활을 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지상전이 가장 극심했던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상당수는 흔적도, 기억도, 기록도 없이 오키나와 50개 섬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이 가운데 몇 명이나 한국으로 귀향했을까. 1944년 10월10일 오키나와 공습 이후 오키나와 전쟁으로 오키나와 인구 59만 명 가운데 18만 명이 사망했다. 늘 군대와 함께 다녔던 위안부 여성의 생존율은 낮을 수밖에 없다. 지상전이 가장 극심했던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던 여성들의 상당수는 흔적도, 기억도, 기록도 없이 오키나와 50개 섬 어딘가에 묻혔을 것이다.
죽지 않고 살아남은 조선인 위안부 여성들의 자취도 분명치 않다. “성병에 걸려 정신이 이상해진 여자가 황혼이 물든 길을 걷고 있었다”는 오키나와 현민의 증언도 있고, 전쟁이 끝난 뒤 오키나와 나하 근처 유곽 거리에서 조선인 여성들이 모여 살았다는 소문도 있다.
오키나와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온 것이 확인된 여성은 4명에 불과하다. 홍윤신 교수는 ‘공동조사단’ 연구를 하면서 1945년 오키나와에 주둔한 미군이 작성한 군정활동상황보고서에 기록된 ‘조국에 송환 예정인 한국인 여성’ 명부와 한국의 ‘위안부 신고 서류’ 명부를 대조했다.
두 명부에서 이름이 일치하는 4명을 발견했다. 구순희, 전재순, 이춘월, 박재남씨가 그들이다. 이들 이름을 확인했을 때 구순희, 전재순, 이춘월 세 분은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이 가운데 구순희씨는 15살에 경상북도 영양군에서 면직원의 손에 이끌려갔다가 도카시키섬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 한국으로 돌아왔지만 “짐승 취급을 받고 성병까지 걸린 몸은 만신창이”인 상태로 여생을 보냈다. 오키나와의 어느 섬인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이춘월씨는 15살에 끌려가 대만에서 5년간 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다시 오키나와로 이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 한국으로 돌아오던 바다에서 폭격을 받아 손목이 절단됐다.
유일한 생존자, 추모비 제막식 앞두고
2006년 9월, 박순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가 일본에서 증언하고 있다. 맨 왼쪽이 홍윤신 교수❹. <전장의 미야코섬과 ‘위안소’>
2007년 확인 당시 박재남 할머니가 유일하게 생존해 있었다. 박 할머니는 대구의 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 공동조사단의 한국 단장인 윤정옥 당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대표가 박 할머니를 뵈러 갔다. 박 할머니는 미야코섬에서 위안부 생활을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당시 생활, 돌아올 때의 상황 등에 대해서는 굳게 입을 다문 채 말하지 않았다.
할머니는 “돌아올 당시의 상황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전혀 없다. 다만 죽을힘으로 저항했다”는 말만 반복했다. 윤정옥 전 대표는 미야코섬에 ‘위안부를 위한 추모비’를 세우려 한다는 말을 전했다. 건강해지면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미야코섬 추모비 제막식 꼭 한 달 전인 2008년 8월5일 돌아가셨다. 박재남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에야 할머니가 지인 편에 건넨 ‘미야코비 건립 기부금’ 5만원이 미야코비 건립 실행위원회 손에 전해졌다.
윤신 교수는 미야코비를 건립하는 과정에서 학문과 운동을 병행했다. 2007년 9월29일 오키나와 현민 12만 명이 모여 ‘일본 문부성의 검정교과서 개입’에 반대하는 궐기대회에 가서는 ‘미야코섬 위안부를 추모하는 비 설립’을 알리는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다. 추모비 제막식을 앞두고는 박순희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일본에 모셔 증언대회를 열기도 했다❹.
홍 교수에게 ‘미야코섬 추모비’는 연구와 운동이 만나는 지점이었다. ‘추모비’는 기억이 기억에게 말을 건네는 ‘오늘’의 장소다. 미야코섬 주민들은 1945년 전쟁에서 살아남은 뒤, 그때 그 전쟁이 어떤 의미였는지, 전쟁에 상처 입은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이야기를 들은 연구자는 그 질문의 의미를 현재화하면서 역사적 기억을 과거에서 해방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런 그가 보기에 한·일 정부의 12·28 합의에 대해선 한·일 양국 지식인들의 자기반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일본 정부가 12·28 합의를 도모한 배경에는 ‘위안부 모집에 강제성이 없었고 따라서 정부 책임이 없다’는 인식이 놓여 있다. 그런데 한국 학자들 가운데 이를 부정할 수 있는 연구를 실증적 방식을 통해 본격적으로 한 학자는 없다.
일본군이 위안소 운영·설계·관리의 주체임을 보여주는 일본군의 문서가 많지만, 그 원본을 보고 체계적으로 연구한 국내 학자도 없다. 특히 오키나와는, 미국이 몰수해갔던 당시 문서를 1972년 이후 반환하면서 일본군의 내무 규정, 진중일지 등 군 내부 문서와 일지가 많이 남아 있는데도 이를 들여다본 학문 작업이 없었다. 오는 3월 출간되는 홍 교수의 책 <오키나와 전장의 기억과 위안소>(일본어판)가 한국인 학자로서는 그 첫 작업이 될 것이다.
“한·일 지식인, 자기반성 필요하다”
일본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홍 교수는 외롭다. 일본 젠더학회에서 ‘조선’과 관련한 공부를 하는 학자는 7명 안팎이다. 그중 한명이 홍 교수고, 나머지는 재일조선인 등 한국 계열의 연구자다. 일본 정부를 비판하는 수많은 성명서를 낸 일본 학자들 가운데서도 학문 영역에서 ‘조선인 위안부’ 문제를 연구하는 경우는 드물다. “지식인들이 성명서를 내는 편안한 위치에서만 발언하는 게 아닌지 자성했으면 좋겠습니다.” 위안부 문제를 실증적으로 파헤쳐온 홍 교수가 두 나라 학계에 던지는 쓴소리다.
도쿄(일본)=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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