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열된 ‘함석헌의 외침’ 21년 만에 되찾다
한겨레 | 입력 2009.04.03 21:10
독재정권·권력 나팔수 언론에 내린 일갈
'한민족 고난=인류해방 거름' 가르침 등
"기독교 틀 넘은 새 정신·사상적 아이콘"
< 함석헌 저작집 1~30 >
함석헌 지음/한길사·각권 1만4000원~2만원, 독립 발췌본 1만원
지난 1일 열린 '함석헌 선생 탄신 108돌(서거 20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작가 박태순씨는 1970년 4월에 창간된 < 씨알의 소리 > 에 실린 함석헌의 이 글을 하필 인용했다. "개처럼 짖고, 행동"하는 것들이 날뛰는 세상은 30여년이 지난 지금도 별로 바뀐 게 없지 않으냐고 묻고 있는 것 같다. 어디 신문뿐이랴.
한길사가 < 함석헌 저작집 > 30권을 새로 냈다. 1988년에 낸 20권짜리 < 함석헌 전집 > 을 21년 만에 대폭 보완하고 편집과 디자인도 크게 바꿨다. 지난 5년간 공들여 새로 찾아낸 시 72편과 강연문 26편, 편지 39편, 에세이 11편, 동양고전풀이 17편, 인물론 9편, 대담 6편, 간디 명상집 번역물 등을 추가했다. "거의 70년에 걸쳐 쓴 글들을 다시 읽으면서 확인하고 고칠 것 고치고 주를 달았다. 예전의 수록글 중에서 검열 때문에 잘려나간 부분, 완전히 누락된 것들도 찾아 넣고 찾아보기 쉽게 색인도 만들었다. 그런 작업에만 1년이 걸렸다."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자국 근현대 사상가들의 재해석·재평가 작업을 꾸준히 벌이면서 현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는 일본이나 중국이 부러웠다"며 "우리는 함 선생님 얘기를 하면서도 실은 제대로 읽지도 알지도 못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 틀에 함 선생님을 가둬선 절대 안 된다"며 특히 젊은 세대가 "이 시대의 새로운 정신적·사상적 아이콘" 함석헌에 관심을 가져주기를 기대했다.
권력과 체제에 대한 날선 비판을 담았던 20권짜리 전집 발간은 군사독재 종식 이후 이른바 '87년 체제'의 본격 시작을 알리는 사건일 수 있었다. 20여년 뒤 권력이 다시 87년 체제 이전으로의 회귀를 노골화한 시절에 이뤄지는 30권짜리 저작집 발간은 참으로 공교롭다. 박태순씨도 그걸 의식했으리라.
< 씨알의 소리 > 창간 2년 뒤 '유신헌법'이 선포되고 그 잡지는 폐간과 복간을 오갔으며 주인의 운명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당시에도 '미네르바'와 '촛불' 들이 숱하게 잡혀갔다.
그 몇년 전인 1968년 < 사상계 > 5월호에서 함석헌은 "5·16은 혁명이 아닙니다. 절대 아닙니다" 하고 외친다. 그는 5·16 쿠데타를 한마디로 "강간"이라고 했다. 1958년에 쓴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는 그 뒤 광대무변으로 발전해가는 함석헌 사상의 동력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글이다. 그 글에서 그는 "6·25의 직접적인 원인은 (미국·소련이) 38선을 그어놓은 데 있다"며 "우리는 고래싸움에 등이 터진 새우"라고 단정한다. 그러면 왜 분단당했나? 그것은 우리가 일본 식민지배를 당했기 때문이고 또 그것은 우리가 "꼬부린 새우", 곧 약소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왜 약소민족이 됐나? 씨알이 힘있게 자라지 못했기 때문이다. 왜? 그것은 나라 바깥 이리·호랑이들한테 꼬리치며 퍼주기를 일삼으면서 제 나라 백성을 "사정없이 악착스럽고 더럽게 짜먹었"던 양반 등 사대주의 "정치업자놈들" 때문이었다. "잘못은 애당초 전주 이씨(이성계)에서 시작됐고", 더 거슬러 올라가면 김부식, 그리고 나당연합과 고구려 멸망까지 간다.
"나는 6, 7년 이래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 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가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 …드디어 나는 자기기만을 하지 않고는 유행식 '영휘 있는 조국의 역사'를 가르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참담한 사실 이것을 희망과 자부심에 작약하는 젊은 혼들에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인가 생각할 때 '나는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고' 하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제시대인 1934년 < 성서조선 > 에 실린 이 글은 그의 고뇌의 원형을 보여준다. 민족혼을 고취시킬 '영광의 역사'를 가르치기엔 조선역사는 너무 보잘것없고 고통스러웠다. 나중에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 로, 그리고 다시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로 거듭나는 그의 대표저서를 특징짓는 '고난의 역사'관은 거기서 출발했다.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고난, 특히 영광 없는 한민족의 고난이야말로 진정한 해방, 전 인류적 거듭남에 필수불가결한 요소라는 의미심장한 '뜻'을 읽어낸 함석헌의 놀라운 사고전환은 참담한 고뇌의 소산이었다. 고난에는 분명히 의미가 있고 따지고 보면 세계역사가 모두 고난의 역사였다. 김경재 한신대 교수는 토머스 베리의 지질학적 개념을 빌려 지금까지 6500만년 간 이어지고 있는 신생대 대신 세계가 하나로 되는 인간과 자연 합일의 새 역사시대인 생태대(Ecozoic era)로의 인류진화 개념으로 함석헌 사상의 확장을 설명한다. 다윈과 베르그송, 샤르댕, 웰스 등의 영향을 받아 민족주의·국가주의를 넘어 진화론을 받아들이고 세계주의, 생태주의로 사유영역을 끝없이 밀고 간 함석헌 사상의 출발점은 비참한 민족현실이었다.
분단이 상징하는 그 비참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함석헌 입장에서 본 한국현대사'를 볼 수 없게 된 건 유감스럽지만, 저작집 30권은 함석헌 사상이 그가 타계할 때까지 어떻게 태동하고 변해갔는지, 그 다이너미즘을 날것 그대로, 훨씬 더 체계적으로 보여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민주화 '실천적 대부'…민중신학, 국제적 주목받아
■ 함석헌은 누구
한국 민주화운동의 사상적·실천적 대부 구실을 한 함석헌(1901~1989)은 한때 중남미 해방신학과 더불어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았던 한국 민중신학의 탄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노장사상에 정통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저작집에도 포함돼 있는 < 바가바드 기타 > 나 < 간디 자서전 > 에서 보듯 인도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일본 무교회주의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영향을 받은 그의 기독교는 이런 풍부한 동양 전통사상의 바탕 위에서 자연-인간 합일의 초종파적 변혁의 담지자 '씨알'사상으로 발전했다.
평북 용천군에서 태어난 그의 인생 지침을 돌려 놓은 것은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다니던 1919년 3·1운동에 적극 가담한 일이었다. 그 일로 학교를 나온 그는 2년 뒤 정주 오산학교에 들어가 평생스승이 되는 유영모와 이승훈을 만난다. 1924년 도쿄고등사범학교에 들어가 우치무라 간조의 성서연구회에 참여했고 졸업 뒤 오산학교 교사가 됐다. 1928년부터 38년까지 10년간의 오산학교 역사교사로 여러 과목을 가르쳤던 함석헌이 사상가로서 몸을 일으킨 것은 위험을 무릅쓰고 학생들에게 조선역사를 가르치면서 1934년 무렵 김교신이 주도하던 기독교 소모임에서 그것을 설파하고 잡지 < 성서조선 > 에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연재하면서부터다. 계속된 핍박 속에 그는 결국 일본식 성명 강요(창씨개명)와 일본어 수업을 거부하며 오산학교를 그만뒀고 1940년 평양 대동경찰서에 1년간 갇혀 있었으며, 그 2년 뒤에도 < 성서조선 > 사건으로 다시 1년을 미결수로 복역했다.
광복 직후 용암포 자치위원장과 용산군 자치위원장을 맡았으며, 1945년 9월에는 평안북도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됐다. 그해 11월 공산당 쪽 발포로 많은 학생들이 숨진 신의주학생사건이 일어났다. 좌익 학생들한테서 폭행을 당하기도 했던 그가 사상자들을 돌보자 소련군 사령부와 조선인 수하들이 그를 사건 책임자로 지목해 50일 동안 구금했다. 다음해 12월 다시 같은 일로 붙잡혀 가 1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그에게 공산당이 스파이 노릇을 시키며 미행까지 하자 위협을 느낀 그는 결국 월남을 결행한다. 전쟁이 나자 부산으로 피란을 간 그가 상경한 것은 1953년. 1956년부터 장준하가 발행하던 < 사상계 > 에 집필활동을 하면서 함석헌은 대중적으로 알려졌고 더불어 한국 민주화를 향한 그의 고난에 찬 대장정이 본격화한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로 20일간 구금당했고, 1965년엔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반대투쟁에 앞장섰다. 1970년 잡지 < 씨알의 소리 > 를 창간해 대정부 비판 수위를 한층 더 높였으며, 전태일 분신사건이 한국 현대사의 기념비적 사건으로 기억되는 데도 그의 구실이 컸다. 1971년 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을 조직해 영구집권을 꾀한 박정희 정권의 삼선개헌 저지운동에 나섰다. '유신헌법' 공포 2년 뒤인 1974년엔 윤보선·김대중씨 등과 민주회복국민회의를 만들어 대표위원이 됐다. 1976년엔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했다가 징역 5년에 자격정지 5년형을 받았다. 1979년 11월 명동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위장결혼사건으로 계엄사에 끌려가 구금당한 뒤 징역 1년을 선고받았으나 형 확정과 함께 형 면제처분을 받았다. 그해와 1985년 두 차례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됐다. 1980년 광주항쟁도 그를 비켜가지 않았다. 가택연금을 당했고 그때 < 씨알의 소리 > 가 두 번째 강제폐간당했다. 한승동 선임기자
2010.4.16일 함석헌학회 출범…사상 재해석 청년세대와 소통 목표
4월 5일 한국프레스센터 19층 기자클럽. 일단의 노학자들이 자리를 함께했다. 4월 16일 발족하는 한 학회의 준비모임이었다. 이들의 공통분모는 함석헌(1901~1989)이다. 이영수 교수신문 발행인(경기대 명예교수)이 입을 열었다. "사실 젊은 사람들이 함석헌 사상을 잘 모릅니다. 함 선생의 뜻이나 사상을 젊은이들에게 알려 보자, 그게 취지입니다." 이 교수는 교수신문에 함석헌의 지근거리에서 함께한 사람들의 '기억'을 모으는 연재를 실었다. 그 결과물은 < 내가 본 함석헌 > 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지난 2006년에 출판됐다.
이 교수는 "일제시대부터 광복을 맞은 시기, 6·25와 4·19, 5·16, 박정희 독재기간까지 함석헌처럼 일관되게 젊은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 사람이 없다"면서 "그런 분들을 기리고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모임의 취지"라고 덧붙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주도한 사상적 뿌리
1960~1970년대의 반독재민주화투쟁 현장에는 함석헌이 선두에 있었다. 두루마기와 고무신, 하얗게 자란 수염. 상징처럼 각인된 그의 외모였다. 그가 가는 곳에는 구름 같이 군중이 모여들었다. 구금과 단식. 서슬 퍼런 독재에 맞선 그의 모습은 두드러졌다. 1980년대, 군사 쿠테타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맞선 재야의 투쟁 현장에도 백발이 성성한 그가 앞장섰다. 그는 단지 운동가만이 아니었다. 사상가였다. 일제강점기, 그가 쓴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 (나중에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라는 제목으로 개작됨)는 문제적 저작이었다. 그가 끊임없이 천착한 '씨알사상'은 1970~198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을 이끈 이념인 민중론의 사상적 뿌리다. 김경재 한국신학대 명예교수는 "오늘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깨어 있는 사회지도자치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21세기. 함석헌의 사상은 잊혀졌다. 도대체 왜일까?
함석헌학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는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다. 그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1965년. "대학을 거의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중앙신학대에 들어갔어요. 안병무 선생에게 배우려고 갔다가 함 선생을 만났어요." 미국 유학시절에 그는 국무부 초빙으로 방문한 함석헌과 다시 조우한다. 함석헌은 유신독재시절, 거의 개인 잡지에 가까운 < 씨알의소리 > 를 창간하지만 폐간당했다. "제가 귀국하니 1988년에 복간한 < 씨알의소리 > 의 편집위원을 맡아 달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가장 젊은 편집위원이었어요. 계훈제, 김동길, 한승헌, 김경재, 김용준, 안병무 박사 등이 그때 함께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복간호에서 함 선생을 인터뷰했는데 그게 생전 마지막 인터뷰였어요." 함석헌은 1989년에 소천했다. 다시 함석헌이 이후세대, 구체적으로 386 이후세대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우리 사회, 민족이 안고 있는 갈등을 레닌주의나 사회주의로 풀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고 풀이했다. 당시 젊은 층이 주창하던 '사상의 과학화'는 곧 마르크시즘적 사고 확립을 의미했는데, 동·서양사상과 기독교사상·톨스토이·아널드 토인비 등을 망라하는 함석헌의 사상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는 것. 김영호 교수는 "당시 내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함 선생은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것도 당시 젊은 층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의 총무를 맡은 황보윤식 선생이 한마디 거든다. "사실 당시 내가 그런 비판에 선두에 섰습니다."
다석 류영모 사사 사상체계 확립
함석헌 사상의 핵심은 흔히 '씨알사상'이라고 말한다. '씨알'의 다른 말은 민중이다. 바닥이자 가장 낮은 곳에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의 요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대골 목사는 "함석헌은 1960년대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을 썼다"면서 "1970년대 들어서 역사의 주인으로 민중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씨알'이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함석헌의 '씨알' 개념은 그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한자 '민(民)'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두고 류영모가 생각 끝에 만들어낸 독창적 개념이다. 함석헌과 류영모의 '씨알' 개념은 미묘하게 서로 다르다. 류영모 사상을 연구해 온 다석의 제자 박영호는 "함석헌의 사상을 민주·평화의 사상이라면 류영모는 진리·신앙의 사상이다"라고 정의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뿌리에 열린 두 열매"로 비유했다. 사실 함석헌·류영모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미묘하게 나뉘어 있다. 김영호 교수는 "류영모의 철학적 입장에 깊이 심취하는 입장도 있고, 두 선생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다"면서 "함석헌의 경우 사회적 행동과 실천을 통한 '함께 살기'를 강조했고, 그런 취지를 따라 평화운동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프로그램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우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은 '씨알'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나 기존의 진보사상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함석헌의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를 보면 고대사에 대한 관심 등에서 오히려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지적된다.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선의를 갖고 독재에 맞서는 민중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민중의 삶과 대치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사는 "오히려 함석헌의 '민중론'보다는 현대사회나 물질문명·사회의 모순이나 억압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을 반독재운동과 결부시키려는 모색이 더 큰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고 부언했다. 성서한국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구교형 목사는 "함석헌은 당시 압제와 핍박을 받는 조국의 현실을 긍정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역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면서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민족주의자이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강대국을 꿈꾸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영호 교수는 "함 선생은 물질주의가 팽배해 가는 현실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강조했다. 학회를 만들고자 한 것은 종교·인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도 함석헌의 재발견을 시도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는 앞으로 대중적으로 함석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잡지도 펴낼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함석헌기념사업회는 4월 23일 잡지 < 씨알의소리 > 창립 40주년 행사를 가지는 한편 8월에는 '전국씨알대회'를 열어 함석헌 사상의 대중화를 꾀할 계획이다. 씨알평화 사무총장 김진 목사는 "지금 당장 내놔도 문명이나 평화·종교·기독교비판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철저하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뿌리에서 사유했다는 점이 함석헌으로부터 가장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 동서양의 사상을 망라해 독특한 자신의 사상을 구축한 함석헌. |경향신문
이 교수는 "일제시대부터 광복을 맞은 시기, 6·25와 4·19, 5·16, 박정희 독재기간까지 함석헌처럼 일관되게 젊은이들에게 나아갈 길을 제시한 사람이 없다"면서 "그런 분들을 기리고 사상을 재조명하는 것이 모임의 취지"라고 덧붙였다.
한국 민주화운동 주도한 사상적 뿌리
1960~1970년대의 반독재민주화투쟁 현장에는 함석헌이 선두에 있었다. 두루마기와 고무신, 하얗게 자란 수염. 상징처럼 각인된 그의 외모였다. 그가 가는 곳에는 구름 같이 군중이 모여들었다. 구금과 단식. 서슬 퍼런 독재에 맞선 그의 모습은 두드러졌다. 1980년대, 군사 쿠테타와 광주학살로 집권한 전두환 정권에 맞선 재야의 투쟁 현장에도 백발이 성성한 그가 앞장섰다. 그는 단지 운동가만이 아니었다. 사상가였다. 일제강점기, 그가 쓴 <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 역사 > (나중에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라는 제목으로 개작됨)는 문제적 저작이었다. 그가 끊임없이 천착한 '씨알사상'은 1970~1980년대 한국민주화운동을 이끈 이념인 민중론의 사상적 뿌리다. 김경재 한국신학대 명예교수는 "오늘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깨어 있는 사회지도자치고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회고했다. 그리고 21세기. 함석헌의 사상은 잊혀졌다. 도대체 왜일까?
함석헌학회를 주도하고 있는 이는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다. 그가 함석헌을 처음 만난 것은 1965년. "대학을 거의 졸업하고 군대를 다녀와서 중앙신학대에 들어갔어요. 안병무 선생에게 배우려고 갔다가 함 선생을 만났어요." 미국 유학시절에 그는 국무부 초빙으로 방문한 함석헌과 다시 조우한다. 함석헌은 유신독재시절, 거의 개인 잡지에 가까운 < 씨알의소리 > 를 창간하지만 폐간당했다. "제가 귀국하니 1988년에 복간한 < 씨알의소리 > 의 편집위원을 맡아 달라는 겁니다. 그때 제가 가장 젊은 편집위원이었어요. 계훈제, 김동길, 한승헌, 김경재, 김용준, 안병무 박사 등이 그때 함께 일하던 분이었습니다. 복간호에서 함 선생을 인터뷰했는데 그게 생전 마지막 인터뷰였어요." 함석헌은 1989년에 소천했다. 다시 함석헌이 이후세대, 구체적으로 386 이후세대로부터 외면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교수는 "1980년대 후반에 이르면 우리 사회, 민족이 안고 있는 갈등을 레닌주의나 사회주의로 풀려는 생각이 팽배해졌다"고 풀이했다. 당시 젊은 층이 주창하던 '사상의 과학화'는 곧 마르크시즘적 사고 확립을 의미했는데, 동·서양사상과 기독교사상·톨스토이·아널드 토인비 등을 망라하는 함석헌의 사상과는 방향이 전혀 달랐다는 것. 김영호 교수는 "당시 내가 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함 선생은 마오쩌둥 사상을 비판했는데, 그것도 당시 젊은 층으로서는 성에 차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의 총무를 맡은 황보윤식 선생이 한마디 거든다. "사실 당시 내가 그런 비판에 선두에 섰습니다."
다석 류영모 사사 사상체계 확립
함석헌 사상의 핵심은 흔히 '씨알사상'이라고 말한다. '씨알'의 다른 말은 민중이다. 바닥이자 가장 낮은 곳에서 고난의 상황에 처해 있는 민중이 역사의 주인이자 주체라는 것이 그의 사상의 요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일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함석헌기념사업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문대골 목사는 "함석헌은 1960년대까지는 민중이라는 말을 썼다"면서 "1970년대 들어서 역사의 주인으로 민중을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가 '씨알'이라는 말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함석헌의 '씨알' 개념은 그의 스승인 다석 류영모로부터 빌려온 것이다. 한자 '민(民)'을 어떻게 옮길 것인가를 두고 류영모가 생각 끝에 만들어낸 독창적 개념이다. 함석헌과 류영모의 '씨알' 개념은 미묘하게 서로 다르다. 류영모 사상을 연구해 온 다석의 제자 박영호는 "함석헌의 사상을 민주·평화의 사상이라면 류영모는 진리·신앙의 사상이다"라고 정의하며 두 사람의 관계를 "한 뿌리에 열린 두 열매"로 비유했다. 사실 함석헌·류영모의 '관계'에 대한 해석은 각자의 입장에 따라 미묘하게 나뉘어 있다. 김영호 교수는 "류영모의 철학적 입장에 깊이 심취하는 입장도 있고, 두 선생을 모두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분도 있다"면서 "함석헌의 경우 사회적 행동과 실천을 통한 '함께 살기'를 강조했고, 그런 취지를 따라 평화운동이나 사회 현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여 프로그램도 만들어 보자는 것이 우리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함석헌의 사상은 '씨알'을 역사의 주체로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나 기존의 진보사상과 큰 차이가 없는 것은 아닐까. 한편으로 함석헌의 < 뜻으로 본 한국역사 > 를 보면 고대사에 대한 관심 등에서 오히려 국수주의로 흐를 위험이 지적된다.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편사연구사는 "선의를 갖고 독재에 맞서는 민중을 상정하는 것 자체가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민중의 삶과 대치되는 것일 수도 있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사는 "오히려 함석헌의 '민중론'보다는 현대사회나 물질문명·사회의 모순이나 억압성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그것을 반독재운동과 결부시키려는 모색이 더 큰 의미를 지닐 수도 있다"고 부언했다. 성서한국의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구교형 목사는 "함석헌은 당시 압제와 핍박을 받는 조국의 현실을 긍정하는 일종의 메시아 사역과 같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 것"이라면서 "김구 선생이 '나의 소원'에서 이야기한 것과 비슷한 맥락인데, 민족주의자이고 항일운동을 했다고 강대국을 꿈꾸지 않은 것과 같은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영호 교수는 "함 선생은 물질주의가 팽배해 가는 현실 속에서 정신적 가치를 강조했다. 학회를 만들고자 한 것은 종교·인문학적 가치뿐만 아니라 사회과학적으로도 함석헌의 재발견을 시도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함석헌학회는 앞으로 대중적으로 함석헌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잡지도 펴낼 계획이다. 이와는 별도로 함석헌기념사업회는 4월 23일 잡지 < 씨알의소리 > 창립 40주년 행사를 가지는 한편 8월에는 '전국씨알대회'를 열어 함석헌 사상의 대중화를 꾀할 계획이다. 씨알평화 사무총장 김진 목사는 "지금 당장 내놔도 문명이나 평화·종교·기독교비판 등에 대한 그의 생각은 통용될 수 있을 만큼 여전히 중요한 시사점을 지니고 있다"면서 "무엇보다 철저하게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뿌리에서 사유했다는 점이 함석헌으로부터 가장 본받아야 할 점"이라고 강조했다.
(1901. 3. 13. -1989.2.4.)
평안북도 龍川에서 출생하시고,
1923년 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28년 일본 東京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고평안북도 龍川에서 출생하시고,
1923년 五山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귀국하여 모교에서 교사생활을 시작했다.
1940년 평양 근교의 松山農士學院을 인수하고 원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계우회사건으로 1년간의 옥고를 치른 후 8·15광복 때까지 은둔생활을 하였다.
광복이 되자, 평북 자치위원회 문교부장이 되었으나
같은 해 11월에 발생한 신의주학생의거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북한 당국에 의해 투옥되었다.
1947년 단신으로 월남, 퀘이커교도로서 각 학교·단체에서 성경강론을 하였다.
1956년 《사상계》를 통하여 주로 사회비평적인 글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한국기독교에 할말이 있다>라는 글로 신부 尹孝重과 신랄한 지상논쟁을 펴 큰 화제를 일으켰다.
1958년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라는 글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통렬히 비판하여 투옥되었고,
1960년 이후 퀘이커교 한국대표로서 종교활동도 하였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 직후부터 집권군부세력에 정면으로 도전하여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였다.
1962∼1963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각지를 시찰하고 돌아온 후,
언론수호대책위원회·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민주수호국민협의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70년 《씨알의 소리》를 발간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1976년 명동사건, 1979년의 YMCA 위장결혼식 사건에 연루되어
재판에 회부되는 등 많은 탄압을 받았다.
1980년 《씨알의 소리》가 강제폐간되어 문필생활을 중단하였으며,
1984년 민주통일국민회의 고문을지냈다.
'폭력에 대한 거부', '권위에 대한 저항' 등 평생 일관된 사상과 신념을 바탕으로
항일·반독재에 앞장섰다.
@저서~ 《뜻으로본 한국역사) (수평선넘어) 한길사발행 (함석헌전집)20권이 있다
함석헌의 저항사상
김삼웅(성균관대학 겸임교수)
저항정신의 본바탕
함석헌은 본디 태어나기를 온순한 천성을 갖고 세상에 나왔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끄러움 ․ 수줍음을 많이 타는 겸손과 겸양의 인물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 저항의 인물이 되고 그 저항을 통해서 항일 ․ 반분단 ․ 반독재투쟁의 중심이 되었다. 씨의 올갱이가 되었다. “내가 반항을 좋아한다면 또 그만치 못지않게 순종 ․ 온건 ․ 평화도 좋아한다. 반항은 나의 후천적으로, 의식적으로, 뜻으로, 사상으로 하는 것인지 몰라도 평화는 내 선천적으로, 바탕으로, 감정으로 된 대로 하는 것이다. 나는 태어나기를 온순으로 났다. 인간 세상에 나서부터 나는 우리 집안에서 싸우는 건 보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다.” 1)
함석헌은 영국의 시인 셸리를 좋아했다. 특히 ‘서풍의 노래’를 좋아했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 라는 마지막 구절을 즐겨 인용하면서 셸리를 좋아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들었다. “내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다만 그의 불타는 반항정신 때문이다. 그는 타고난 반항아였다. 학교에서도 사회에서도 가정에서도 그는 온갖 구속 ․ 압박 ․ 묵은 것에 대해 죽기로 반항하는 자유의 혼이었다. 서풍 노래의 셋째 절에서 그가 불어오는 서풍에, 지중해 고요한 물 위에 뜨는 옛 궁전의 꿈이 깨어지고, 대서양의 수평이 흔들려 깨지며, 바다 속의 해조들이 생기를 잃고 떨며 길을 여는 것을 본 그가 어떻게 그때 바야흐로 무르익으려는 문화에 있어서 벌써 그것을 벗어버리고 새 시대를 바라는 혼이 사무쳤던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 반항 ․ 항의 ․ 생명의 바탕이 만일 자유에 있다면, 그 자유는 구속하고 뺏으려는 세력이 밖에서 오고 말라붙으려는 제도, 전통의 때가 안에서 꺼려 할 때, 거기에 대해 일어나 겨루는 정신이야말로 가장 귀한 도덕이라 할 수 밖에 없다. 영어를 나는 모르지만, 그 중에 resist란 말처럼 좋은 것은 없다. resit ․ revolt ․ protest, 다 좋은 말이다. 만일 resist란 말이 없다면 나는 영어를 아니 배울 것이다.”2)
셸리의 저항정신은 함석헌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다. resist(저항), revolt(반항), protest(항의)는 모두 저항정신을 의미한다. 함석헌은 셸리의 ‘서풍의 노래’를 통해 포악한 독재에 시달리는 씨들을 위로하면서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어찌 멀었으리요”의 시구는 분단과 냉전과 정치적 억압으로 신음하는 씨에게 ‘새 봄’ 으로 상징되는 해방과 희망을 불러일으켰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은 ‘저항의 철학’ 3)이란 글에서 보다 명확하게 제시된다. 그는 인격을 저항으로 인식한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고 서슴없이 갈파한다. 직접 그의 육성을 들어보자.
“사람은 저항하는 거다. 저항하는 것이 곧 인간이다. 저항할 줄 모르는 것은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사람은 인격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인격이 무엇인가? 자유하는 것 아닌가? 우선 나는 나다 하는 자아의식을 가지고, 나는 나를 위한 것이다 하는 자주하는 의지로써, 내 뜻대로 내 마음껏, 나를 발전시켜 완전에 까지 이르자는 것이 인격이다.”
함석헌은 저항을 존재론적으로 인식하고 그렇게 실천하였다. 저항에서 인격을 찾고, 인격의 원리로써 저항을 택한다. “인격은 생명진화의 가장 높은 맨 끝이지만, 거기까지 가기 전에 생명의 아주 낮은 원시적인 밑의 단계에 있어서도, 자유의 원리, 따라서 저항의 원리는 그 살림을 지배하고 있다”4)고 주장한다. 함석헌이 ‘저항’에 관해 얼마나 열정적인가를 살펴본다.
“저항! 얼마나 좋은 말인가? 모든 말이 다 늙어 버려 노망을 하다가 죽게 된다 해도, 아마 이 저항이라는 말만은 새파랗게 살아나고 또 살아나 영원의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아마 ‘맨 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하던 그 말씀은 바로 이 말 곧 ‘저항’이었을 것이다. 왜 그러냐고? 말씀은 근본이 반항이다. 가슴속에 갇혀 있지 못해 터지고 나오는 기(氣), 음(陰), 한 주머니 속에 자지 못해 쏘아 나오는 정(精), 맨숭맨숭한 골통 속에 곯고 있지 못해 날개치고 나오는 신, 그것이 곧 말씀이다. 깨끗하라는 동정녀의 탯집도 그냥 있을 수 없어 말구유 안으로라도 박차고 나오는 아들이 곧 말씀이다.”5)
“천지창조하려는 하나님 곧 물 위에 운동하셨다는 그 운동은 무슨 운동이었나? 반항운동이었다. 암탉이 알을 까려 품고 앉은 듯한, 무슨 큰일을 저지르려는 사람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앉은 듯한, 그러한 모양을 표시하는 그 운동이란 말은, 곧 영겁의 침묵을 깨치려는 첫 말씀의 고민이요, 무한 깊음의 혼탁을 뚫고 나오려는 코스모스의 몸부림이요, 원시의 어둠을 한 칼에 쪼개려는 빛의 떨림이었다.”6)
함석헌은 세상이 다 아는 대로 비폭력 저항주의자이다. 이에 따라 반체제 민주화 운동 과정에서 일부 인사들이 함석헌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두고 저항운동에 ‘찬물을 끼얹는 짓’ 이라며 못마땅해 하였다. 역사적 허무주의나 패배주의가 아니냐고 힐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반항은 하지만 미워하지 말고 싸움은 하지만 주먹질을 말라”고 비폭력 저항을 주창하였다. 그렇지만 함석헌은 딱 한 차례 ‘폭력’을 사용한 적이 있다. 성인이 아닌 평범한 인간 함석헌도 구조악 또는 공권력에 의한 현장폭력에는 폭력으로 대항한 것이다. 여성인권운동가 이우정의 말을 들어보자.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저절로 미소를 머금게 하는 일은, 1975년 동아일보 기자들의 언론자유실천을 위한 투쟁을 지원하던 때의 일이다. 농성을 하던 기자들을 깡패와 경찰을 투입해서 끌어내는 과정에서 기자들이 많이 구타를 당하는 아수라장이 벌어졌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의 힘으로 막을 수는 없지만 무자비한 폭력에 항의하고, 부패정권의 포악을 폭로하는 증인이 되고자 해서였다. 우리가 도착해서 항의나 시위를 할 사이도 없이 함선생님과 나 (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와 공덕귀 선생님(당시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장)은 경찰차에 쑤셔넣듯이 떠밀려 태워졌다. 그런데 함선생이 벼락같이 소리를 치시더니 우리를 떠미는 순경의 뺨을 후려치시는 것이었다. 순경도 우리도 갑작스런 함선생의 행동에 잠시 벙벙했다. 나는 경찰차 (4인승의 조그만 차였다) 속에서 공선생님과 함께 함선생님을 놀리면서 실컷 웃었다. 왜냐하면 항상 비폭력투쟁을 강조하시면서 젊은이들이 경찰에 대해 욕을 하거나 폭력으로 대항하는 것을 극구 말리시고 경계하시던 분이 느닷없이 경찰의 뺨을 후려치셨기 때문이다. (…) 나는 함선생님을 그렇게 분노케 한 것은 당신이 경찰에 떠밀렸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공선생님과 나를 그렇게도 거칠게 질질 끌고 가서 차 속에 쑤셔 넣는 것을 보시고 격노하셨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약한 자를 함부로 다루는 권력의 횡포에 참으실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던 것으로 짐작한다. 우리가 왜 그렇게 화를 내셨느냐고 물어도 쑥스러운 듯이 그냥 웃기만 하시던 모습은 꼭 부끄럼 타는 소년과 같았고, 그 인상은 지금도 내게 깊이 새겨져 있다.” 7)
함석헌은 어느 글에서 “이성과 감정이 싸울 때 감정의 편에 서겠다.”고 밝힌 바 있다. 이 말을 액면대로 이성 보다는 감정을 택한 다는 것으로 치부하면 서툰 분석이다. 누구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주의자인 함석헌의 비폭력사상은 폭력으로 무장한 구조악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이다. 일본제국주의, 이승만정권, 박정희정권에 치열하게 저항한 것은 그것이 비인간적인 구조악의 폭력이기 때문이었다. 송기득은 “저항하는 사람이 영웅주의에 빠지면 참 저항자가 되지 못한다.”8)고 했다. 어떤 뜻으로는 지배에의 순응에 이미 말려들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만 함석헌이 경찰관의 뺨을 때린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감정적이거나 권력주의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존재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행동인이었던 그는 스스로 용기를 알았습니다. 그가 가장 싫어하는 것은 비겁이었습니다. 그는 비겁을 첫째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살생 비폭력을 절대 주장했지만, 그러면서도 상대는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죽을 각오로써 싸울 실력이 없거든 차라리 폭력을 써서라도 힘껏 대적해 싸워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죽을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려고 도망하거나 빌붙지 말라고 했습니다”9)
함석헌의 비폭력저항은 간디의 불살생 비폭력사상에서 크게 영향을 받았다. 다음에 인용한 ‘간디의 참모습’에서도 밝혔듯이 간디와 함석헌은 “싸울 실력이 없거든 폭력을 써서라도” 대적할지언정 결코 ‘구차하게’ 살고자 하지는 않았다. 이것이 함석헌 저항사상의 본질이고, 철학이고, 실천윤리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의 저항은 단순히 인간의 개체적 존재와 삶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그것을 사회와 역사의 현장에서 육화(肉化)시켰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이것을 우리는 ‘역사적 저항’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데 그것은 그대로 ‘존재적 저항’의 연장이다. 그는 나와 역사를 따로 떼어서 보지 않는다. 모든 것은 그에게 있어 전체이다.” 10)
신학자 안병무에 따르면 “함석헌은 사상적으로 웰즈에게서 문화적 역사적 낙관주의, 톨스토이에게서 휴머니즘, 우찌무라에게서 성서, 타골 ․ 칼라일 ․ 라스키 ․ 노자 ․ 장자 ․ 바가받 기타에서 최근의 데미아르 샤르뎅에 이르기까지 사상의 편력을 계속했는가 하면 삶과 행동의 면에서는 인도의 간디에 심취해 왔다”.11)
또 역시 신학자 김경재(한신대)는 “함석헌의 문화 종교적 삶의 자리는 계몽주의적 자율적 이성에 대한 신뢰, 자연과학과 종교의 화해, 동양문화와 서구 기독교문명의 지평융합 그리고 세계문명 전체가 영적으로 크게 한번 털갈이를 하려는 진통으로 신음하고 있다는 문명전환기적 카이로스 의식으로 충만해 있었다” 면서 “오산학교 학장시설 다석 류영모와 남강 이승훈 선생을 만나 청년시절 기본사상의 기틀을 닦고, 일본 동경사범학교 유학시절 우치무라 간조, 간디, 톨스토이, 주세페 마치니, H.G.웰츠의 영향을 받아 그의 역사철학의 토양으로 삼았다.” 12)
그렇다면 그의 ‘육화’된 저항사상은 어디서 기원하고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먼저 출생지역을 들 수 있다. 그는 “서북 끄트머리 평북 용천군에서도 바닷가인 부라면 원성목이다. 그는 ‘물 아랫놈들,’ 즉 ‘감탕물 먹는 놈’ 으로 자라났다. 그곳은 일명 사자섬이라고 하는 데 일찍 그리스도가 들어와서 소박한 농민생활에 히브리적 바탕의 신앙이 뿌리를 내린 동리였다.”13)
“내가 난 곳은 평안도, 상놈이 산다는 평안북도, 거기서도 용천, 용천에서도 맨 서쪽 바닷가다. 거기를 ‘사섬’이라 불렀는데 그 뜻은 ‘사자섬’ 이란 말이다. …용천에서도 그 위대로 사는 사람들이 여기를 업신여겨 ‘물 아랫놈들’ ‘감탕물 먹는 놈들’ 하였다. 감탕이란 높은 지대의 흙이 비에 씻겨 흘러 바닷가에 내려가 가라앉아서 생긴 유기물질 많은 까만 충적토이므로 퍽 살찐 흙이나, 진흙이므로 샘물은 늘 흐리고 비가 오면 다니기가 참 불편한 흙이다. 그래 감탕물을 먹는다고 멸시하는 것이다.” 14)
함석헌은 그가 다른 글에서도 밝혔듯이 평안도 용천의 ‘상놈’으로 태어났다. 조선왕조가 지역차별로 소외시킨 데다 가계상으로 한번도 벼슬을 하지 못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이와 같은 태생적인 환경은 생애를 두고 저항정신의 기본바탕을 형성하였다.
두 번째는 성장기의 배경이다. 나라가 망하기 시작하는 1901년에 태어나 어린 시절에 망국을 지켜 보고 감수성이 예민한 19살 때 3 ․ 1 운동을 겪었다. 직접 3 ․ 1 항쟁에 참여하여 평양고보 3학년 때 학업을 중단하고, 2년 후 오산학교에 들어가 류영모 ․ 이승훈 ․ 안창호 ․ 조만식을 만나면서 신앙과 민족의식에 눈뜨게 된다. 동경으로 건너가 동경교보 시절에 겪은 대진재와 이 때 잔혹한 조선인학살을 지켜보면서 청년 함석헌은 식민지백성의 참상을 ‘육화’시킨다. 동경유학 시절에 무교주의자 우찌무라를 만나고, 셸리의 ‘서풍의 노래’에 접하게 되고, 김교신 등 동지들을 만난다. 함석헌의 저항사상이 움트기 시작한 정신사적 토양이다.
세 번째는 시대적 배경이다. 식민지, 해방, 분단, 동족상쟁, 이승만 독재, 5 ․ 16쿠데타, 한일굴욕회담, 유신, 5 ․17쿠데타 등 한국근현대사의 모순과 역리를 온 몸으로 겪으면서, 이에 대한 저항을 양심과 정의의 수단가치로 채택하고 이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저항의 방법은 비폭력 평화주의였다. ‘싸우는 평화주의자’라는 닉 네임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 모든 것을 포괄하고도 남는다.
“무저항주의라고, 아는 체 그런 소리를 하지 마라. 그것은 사실은 저항의 보다 높은 한 방법 일 뿐이다. 바로 말한다면 비폭력 저항이다. 악을 대적하지 말라 한 예수가 그렇게 맹렬히 악과 싸운 것을 보아라. 말은 들을 줄 알아야 한다. 하늘에 올라가도 저항, 물속에 들어가도 저항, 허무 속에 가도 거기에 스스로 일으키는 회오리바람 속에 버티고 있는 하나님이 있는데, 너 만이 저항을 모른단 말이냐?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내가 너를 박차 너를 살려내고야 말리라.” 15)
본디 행동인이었다
함석헌은 누가 뭐래도 저항적인 행동주의자이다. 책상머리에만 앉아있는 먹물쟁이가 아니라 치열하게 사유하고 거침없이 행동하는 투사이고 들사람이고 저항인이었다. 그에게서 행동과 실천성을 빼면 사상가이고, 철학자이고, 문명비평가이고 종교인이 된다. 시인이고 역사연구가이고 언론인으로 부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것이 함석헌의 본령은 아니다. 그는 다양한 분야에 걸쳐 식견과 학식을 두루 갖추고 있었지만, 그런 식견과 학식은 행동과 실천을 위한 에너지요 무기요 군량미였을 뿐이다. 학문을 위한 학문, 사상을 위한 사상, 철학을 위한 철학이 아니라 행동을 위한 학문, 실천을 위한 철학이었다. 그에게 행동과 실천을 배제한다면 평범한 저항적 지식인에 불과할 것이다.
함석헌의 생애를 추적하면 젊은 시절부터 투철한 행동인이었음을 알 수 있다.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필두로, 일제식민지 시절에 대부분의 지식인이 침묵할 때 그는 성서조선사건, 계우회사건, 독서회사건으로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실제로 행동하고 그 행동의 결과 일제의 감옥에서 고난을 겪었던 것이다. 해방후 신의주학생운동과 관련하여 북쪽에서 투옥되고 월남하여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체제에서 투옥되었다. 치열하게 저항하고 행동하다가 잡혀들어간 것이다. 그의 고난의 대부분이 말이나 글 때문이라 할지 모르겠지만, 직접 행동하고 저항운동에 나선 적이 한두 차례가 아니었다.
자유당 독재가 극에 이르렀을 때 충남 천안의 씨농장에서 단식하면서 저항하고, 1965년 굴욕적인 한일협정에 반대하여 14일 동안이나 삭발 단식투쟁을 벌이고, 1974년 11월 박정희의 유신독재에 저항하여 한국신학대학생과 교수들이 삭발단식을 할 때, 이들을 격려차 방문했다가 거침없이 머리깎고 단식을 함께 하면서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이런 행동과 저항이 ‘소극적’인 것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사례를 들려드리겠다. 1971년 4월 19일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와 함께 민주수호국민협의회(민수협)를 창립한 것은 함석헌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재야 지식인 연합체로 기록되는 ‘민수협’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박정권에 도전한 이가 다름아닌 함석헌이었던 것이다.
‘민수협’은 70년대말부터 3선개헌의 후유증에서 깨어난 각계 인사들이 1971년 4월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전열을 가다듬기 시작하면서 발아되었다. 이들은 1971년을 ‘민주수호의 해’로 정하고, 공명선거를 통해 1인 장기집권을 막아내고자 1970년 4월8일 서울 YMCA에서 학계, 언론계, 법조계, 종교계, 문화계 등 각계를 망라한 저명인사들이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4・27 대통령 선거와 국회의원선거에서 공명을 다짐하는 ‘민주수호선언’을 채택한데 이어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하기로 합의했다. 이날 모임에서 김재준, 천관우, 이병린, 이병용, 장용, 김정례 등 6인으로 준비소위원회를 구성한데 이어 4월 19일 ‘민수협’을 정식 발족시키고, 함석헌, 김재준, 이병린, 천관우를 대표위원으로 선출했다.
이후 ‘민수협’은 강연회, 좌담회, 성명서발표, 인권탄압 사례 조사, 공명선거를 위한 선거참관인단 구성 등의 활동을 전개했다. 이 단체는 최초의 재야민주세력의 구심점으로서 이후의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등 긴급조치 시대 재야단체의 모태가 되었다. ‘민수협’의 지도자가 바로 함석헌이었고, 그는 모든 재야세력의 대부 역할을 하면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충실히 수행하였다. 해방후 함석헌의 저항적인 실천운동은 1964년 박정희정권의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불을 붙였다. 야당이 주최하는 전국적인 시국강연회에 참석한 것을 비롯하여, 대학생들과 함께 반민족적인 한일회담반대 투쟁을 벌였다. 또한 1969년 박정권이 영구집권 야욕에서 자행한 3선개헌반대투쟁과 그 이후 반유신투쟁의 집회에서 어김없이 함석헌이 참석하여 사자후를 토해냈다.
3.1 선언사건 등 반독재투쟁 앞장
유신체제가 더욱 강고해지면서 긴급조치를 통해 모든 비판세력에 족쇄를 채우고 개헌운동을 폭력으로 봉쇄시킬 때에 함석헌은 분연히 일어나 독재정권에 저항했다. 함석헌 등 재야인사들은 1976년 3월1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개최된 3.1절 기념미사의 마지막 순서로서 ‘3.1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했다.
3.1 명동선언사건으로도 불리는 이 선언문은
①이 나라는 민주주의 기반위에 서야 한다.
②경제입국의 구상과 자세가 근본적으로 재검토되어야 한다.
③민족통일은 오늘 이 겨레가 짊어진 최대과업이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박정권은 이 일을 정부전복선동사건으로 몰아가면서 재야 지도급 인사들을 속속 구속했다. 구속자가 함석헌을 비롯, 김대중, 윤보선, 윤반웅, 문익환, 함세웅, 신현봉, 김승훈, 이문영, 서남동 등 18명에 이르렀다. 이 사건으로 함석헌은 징역5년, 자격정지 5년을 선고받았다. 3.1 민주구국선언사건에 이어 1979년 3월 1일에는 범민주진영의 연대투쟁기구로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국민연합)이 결성되었다.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등 재야 지도급 인사들은 ‘3.1 운동 60주년에 즈음한 민주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이 땅에 민주주의를 평화적으로 재건, 확립하고 나아가 민족통일의 역사적 대업을 민주적으로 이룩하기 위한 자발적이며 초당적인 전체국민의 조직”으로서 ‘국민연합’을 결성했다. 함석헌은 김대중, 윤보선과 함께 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국민연합’의 산하에는 한국인권운동협의회, 천주교정의구현 사제단, 해직교수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NCC 인권위원회, 민주청년협의회 등 13개 단체가 가입할만큼 반유신 저항운동의 모태 역할을 했다. 함석헌의 반유신 저항운동은 지칠줄을 몰랐다. 1979년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암살되었지만 유신권력을 둘러싸고 권력내부에서는 치열한 음모와 권력 쟁탈전이 전개되었다. 12.12 사태도 그 중의 하나이다. 이른바 ‘안개정국’이란 표현이 언론에 공공연하게 쓰일 만큼 정국은 안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 해 11월 24일 함석헌을 비롯한 재야인사들은 결혼식을 가장하여 서울명동 YWCA 강당에 모여 ‘통일주체국민회의에 의한 잠정 대통령 선출 저지 국민대회’를 개최하고 유신철폐와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날 ‘국민연합’, 해직교수협의회, 민주청년협의회 회원 5백여 명은
△유신정권 퇴진 및 건국민주내각 조직
△공화당, 유신정우회, 통일주체국민회의 해산을 요구했다.
△유신 대통령을 다시 선출하는 것은 국민에 대한 반역이며
△우리나라의 민주화에 대한 외부세력 개입을 일체 거부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가두시위를 벌였다.
10.26사태로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최초의 가두시위였다. 검찰은 함석헌을 비롯 박종태, 양순직, 김병걸 등 96명을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구속했다.
저항으로 일관한 생애
함석헌의 생애는 저항과 투쟁으로 일관했다. 일제에 대한 저항으로 3.1 만세시위 참여, 계우회사건, 성서조선사건, 독서회사건 등으로 구속되고, 해방후 신의주 학생사건으로 북한에 의해 구속되고, 월남해서는 이승만 정권과 박정희, 전두환 세력에 의해 구속되는 등 온갖 고난을 겪어야 했다.
그는 펜이 요구될 때는 진짜 할 말을 하고, 제도 언론이 봉쇄당할 때는 온몸을 던져 행동으로 독재권력에 맞서 싸웠다. 언론이 압제자의 편이 되어 왜곡과 곡필을 서슴지 않을 때 ‘언론의 게릴라전’을 제창하면서 직접 월간 ‘씨의 소리’를 창간하여 독재세력과 싸웠다. 그의 사상적 근저에는 노자와 장자의 무위사상, 기독교의 박애정신, 간디의 비폭력 평화주의가 뿌리깊게 자리잡고,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자연주의와 비노바바베의 초월사상이 삭여들었지만, 본바탕의 정신은 기독교 사상에 뿌리를 둔 비폭력 사상은 저항이고 투쟁이었다. 휘트맨의 ‘풀잎’이나 쉘리의 ‘서풍’에서 보이듯이, 치열한 저항정신과 도전의식에서 삶의 본질을 찾고 고난의 가치를 일깨웠다. 그는 결코 유약한 선비나 종교인, 사상가가 아니고 ‘정신의 순례자’는 더욱 아니었다. 이 세상의 모든 단어가 사라져도 저항이라는 말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가르치지 않았던가.
평안도 호랑이, 아니 조선의 호랑이에게서 어금니와 발톱과 날램과 용기를 빼버려서는 안된다. 옛글에 ‘화호불성반위구(畵虎不成反爲狗)’라는 말이 있다. “호랑이를 그리려다 잘못하여 개를 그리게 된다”는 뜻이다. 함석헌의 모든 연구ㆍ평가ㆍ분석은 마땅히 그의 투철한 저항사상 즉 비폭력 저항정신에서 출발해야 한다. 함석헌 사상의 알파와 오메가는 ‘저항’ 바로 그것이다.
각주----------------------------------------------
1)「겨울이 만일 온다면」, 『함석헌전집 4』, 한길사.
2)「겨울이 만일 온다면」, 앞의 책.
3) 함석헌, 「저항의 철학」,『씨알은 외롭지 않다』, 휘문출판사.
4) 앞의 글, 『씨알은 외롭지 않다』
5) 앞의 글.
6) 앞의 글.
7) 이우정, 「민주화투쟁의 현장에서」, 『나의 스승 함석헌』, 김용준 엮음, 해동문화사.
8) 송기득, 「함석헌의 저항론」, 『씨 인간 역사 - 함석헌선생 8순기념문집』, 한길사.
9)「간디의 참모습」, 『함석헌수상록, 바보새』, 동광출판사.
10) 송기득, 앞의 글.
11) 안병무, 「순수와 저항의 길」, 『씨 인간 역사』.
12) 김경재, 「함석헌의 ‘역사철학’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교수신문』, 2003. 1. 1.
13) 안병무 , 앞의『씨 인간 역사』.
14)「물 아래서 올라와서」, 『죽을 때까지 이 걸음으로』, 함석헌 전집 4, 한길사.
15) 함석헌, 앞의 글「저항의 철학」.
다석(多夕) 유영모(柳永模ㆍ1890~1981)는 일제 때 오산학교 교장으로 있으면서 남강 이승훈에게 기독교를 전했고, 북한산 기슭에서 농사를 지으며 동서양의 종교를 깊이 연구한 사상가이다.
그는 52세 때 개체의식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깨달음을 경험한 것으로 전해진다.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사상가 함석헌(咸錫憲ㆍ1901~1989)은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사제 관계를 맺은 후 그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했다.
씨알이라는 말은 함석헌에 의해 1970년 창간된 < 씨알의 소리 > 등을 통해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투쟁과정에서 친숙해졌다. 함석헌은 유영모에게서 유교의 고전인 < 대학 > 을 공부하면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배웠다고 한다. 씨알사상에 대해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은 "유영모는 사람을 가리키는 씨알을 두 가지 뜻으로 썼다.
하나는 하느님의 씨(아들)이고, 또 하나는 평민(서민)의 뜻이다. 함석헌은 주로 후자의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영모의 핵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씨에 있었다"고 밝혔다. 진리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일치시킨 것이 씨알정신이고 씨알사상의 핵심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씨알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창립한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에 따르면 '동서문명의 만남과 철학'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세계철학대회에서 20여명의 국내 학자들이 이틀에 걸쳐 사상, 종교, 생명ㆍ평화ㆍ교육 등 세 분야로 나눠 유영모와 함석헌에 대해 발표한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씨알:誠的 지향성의 주체', 영국에서 유영모의 철학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정현 성공회대 교수가 '다석 유영모의 그리스도 이해', 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천부경을 통해본 동학과 다석의 기독교 이해'를 발표한다. 이외에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 김혜암 코넬대 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도 씨알사상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씨알사상을 세계에 소개하는 의미에 대해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재순 목사는 '씨알사상은 서구문화의 핵심인 기독교정신과 과학정신이 동양의 정신문화와 만나서 형성된 세계평화철학이며 그 사상은 유영모ㆍ함석헌 두 사람의 삶과 정신으로 표현됐다"면서 "동양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를 통해 두 사람의 사상을 소개, 세계의 정신, 사상계에서 두고두고 연구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에서 철학자들은 대개 칸트, 헤겔 등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한국철학사에는 우리말로 철학을 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 이후에는 없는 것으로 돼 있다"면서 "유영모 선생처럼 우리말로 철학을 한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라고 말했다.
한편 씨알재단은 세계철학대회 외에도 올 한해 다양한 행사를 통해 씨알사상을 일반에 얼릴 계획이다. 3월 11일에는 종교계 생명평화운동 활동가와 문예인들이 함께 하는 '씨알생명평화 문화제', 5월에는 '씨알사상포럼' 을 개최한다. 7월에는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하는 '유영모ㆍ함석헌 생명평화축제'를 열고, 12월에는 씨알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을 발굴해 시상하는 씨알상을 제정할 예정이다.
■ 씨알사상 - 서구문화의 핵심인 기독교정신과 과학정신이 동양의 정신문화와 만나서 형성된 세계평화철학이며 그 사상은 사제지간인 유영모^함석헌의 삶과 정신으로 표현됐다. 진리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일치시킨 것이 씨알정신이고 씨알사상의 핵심이다. 씨알은'하느님의 아들''평민'을 말하는데 함석헌은 주로 후자의 뜻으로 썼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그는 52세 때 개체의식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뜻을 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깨달음을 경험한 것으로 전해진다. 권위주의 시절 민주화운동으로 널리 알려진 사상가 함석헌(咸錫憲ㆍ1901~1989)은 오산학교에서 유영모와 사제 관계를 맺은 후 그의 사상을 배우고 실천했다.
씨알이라는 말은 함석헌에 의해 1970년 창간된 < 씨알의 소리 > 등을 통해 70년대와 80년대 민주화투쟁과정에서 친숙해졌다. 함석헌은 유영모에게서 유교의 고전인 < 대학 > 을 공부하면서 씨알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배웠다고 한다. 씨알사상에 대해 박영호 다석학회 고문은 "유영모는 사람을 가리키는 씨알을 두 가지 뜻으로 썼다.
하나는 하느님의 씨(아들)이고, 또 하나는 평민(서민)의 뜻이다. 함석헌은 주로 후자의 뜻으로 쓴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영모의 핵심은 오히려 하나님의 씨에 있었다"고 밝혔다. 진리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일치시킨 것이 씨알정신이고 씨알사상의 핵심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씨알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지난해 10월 창립한 재단법인 씨알(이사장 김원호)에 따르면 '동서문명의 만남과 철학'을 주제로 열리는 이번 세계철학대회에서 20여명의 국내 학자들이 이틀에 걸쳐 사상, 종교, 생명ㆍ평화ㆍ교육 등 세 분야로 나눠 유영모와 함석헌에 대해 발표한다.
정대현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씨알:誠的 지향성의 주체', 영국에서 유영모의 철학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윤정현 성공회대 교수가 '다석 유영모의 그리스도 이해', 이정배 감신대 교수가 '천부경을 통해본 동학과 다석의 기독교 이해'를 발표한다. 이외에 김영호 인하대 명예교수, 김혜암 코넬대 교수,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도 씨알사상에 대해 발표할 예정이다.
씨알사상을 세계에 소개하는 의미에 대해 씨알사상연구소 소장 박재순 목사는 '씨알사상은 서구문화의 핵심인 기독교정신과 과학정신이 동양의 정신문화와 만나서 형성된 세계평화철학이며 그 사상은 유영모ㆍ함석헌 두 사람의 삶과 정신으로 표현됐다"면서 "동양에서 처음 열리는 세계철학대회를 통해 두 사람의 사상을 소개, 세계의 정신, 사상계에서 두고두고 연구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기상 한국외대 교수는 "한국에서 철학자들은 대개 칸트, 헤겔 등 서양 철학자들의 사상을 소개하는 데 그치는 것이 일반적이며, 한국철학사에는 우리말로 철학을 한 사람이 다산 정약용 이후에는 없는 것으로 돼 있다"면서 "유영모 선생처럼 우리말로 철학을 한 사람이 진정한 철학자"라고 말했다.
한편 씨알재단은 세계철학대회 외에도 올 한해 다양한 행사를 통해 씨알사상을 일반에 얼릴 계획이다. 3월 11일에는 종교계 생명평화운동 활동가와 문예인들이 함께 하는 '씨알생명평화 문화제', 5월에는 '씨알사상포럼' 을 개최한다. 7월에는 국내외 학자들이 참여하는 '유영모ㆍ함석헌 생명평화축제'를 열고, 12월에는 씨알사상을 실천하고 있는 이들을 발굴해 시상하는 씨알상을 제정할 예정이다.
■ 씨알사상 - 서구문화의 핵심인 기독교정신과 과학정신이 동양의 정신문화와 만나서 형성된 세계평화철학이며 그 사상은 사제지간인 유영모^함석헌의 삶과 정신으로 표현됐다. 진리와 사랑, 자유와 평등을 일치시킨 것이 씨알정신이고 씨알사상의 핵심이다. 씨알은'하느님의 아들''평민'을 말하는데 함석헌은 주로 후자의 뜻으로 썼다
남경욱기자 kwnam@hk.co.kr
유영모-함석헌 선생 생명-평화사상 담은 책 2권 나란히 출간
‘다석강의’는 다석이 1927년부터 월남 이상재의 뒤를 이어 서울 YMCA에서 무려 35년간(1928∼63년) 펼친 연경반(硏經班·경전연구반) 강의 중 1956년 10월 17일∼1957년 9월 13일의 약 1년치 내용을 속기한 것이다. 다석은 자신이 쓴 다석일지를 제외하고는 저술을 남기지 않았고, 자신의 죽음을 예언해 제자들이 부랴부랴 속기록을 만든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1년 치 강의 속기록은 그의 사상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육성기록으로 꼽힌다. 다석은 무엇보다 기독교 사상을 우리 것으로 내면화한 대표적 사상가였다. 하느님-예수의 관계를 유교적 부자유친(父子有親)의 완성으로 해석했고, 도덕경의 도(道)자를 하느님이 계시는 저 높은 곳으로 머리(首)를 향하여 달려가는(走) 것을 나타낸 것으로 새겼다.
다석은 또한 한글은 하느님이 세종대왕을 통해 우리 민족에게 보낸 계시라며 우리말 단어 하나하나를 새롭게 새겼다. 그는 하느님을 우리말로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분이라는 뜻에서 ‘없이 계신 분’이라고 풀었고 ‘오늘’은 하루가 늘, 곧 영원이라는 의미에서 ‘오! 늘’로 새겼다. 훗날 함석헌의 대표적 사상으로 알려진 씨ㅱ(백성) 사상에 담긴 생명과 평화의 사상도 그 원류는 다석이었다.
‘내가 본 함석헌’에는 1955년 12월 14일 함석헌이 태어난 지 2만 일 되던 날 밤의 이야기가 적혀 있다. 함석헌은 이날 스승인 다석과 만둣국을 나눠 먹고 제자들에게 자신의 성장과정을 그래프로 그려 설명했다. 포물선 형태로 완만히 상승해 간 그 그래프는 다석을 만난 1921년과 우치무라를 만난 1924년에는 수직 상승이 이뤄졌다.
저자인 김용준 교수의 성장과정에도 그런 수직 상승이 있었다. 1949년 서울 YMCA에서 우연히 함석헌의 강연을 들은 바로 그날이었다. 그런 김 교수가 그려낸 함석헌의 모습은 시 아닌 시라도 읊어야 하는 ‘어쩔 수 없는 낭만주의자’이며, 이승만의 반공독재와 박정희의 군부독재에 목숨을 걸고 항거하면서도 외국에서는 결코 한국에 대한 비판을 입에 담지 않는 진정한 애국자이며, 무엇보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을 평생 실천한 ‘기다림의 신학자’였다.
‘끊임없이 성취하고 계속 추구하면서 수고함과 기다림을 배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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