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이 책은 간단하게 정리하면 이렇다. 위안부 문제의 중층성을 지적하기 위함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저자 자신이 조망한 지점에 과도한 의미부여를 함으로써 중층성보다는 '밑돌 빼어 위에 포개기' 식의 치환으로 끝나버린 책이다.
나는 이 책이 학술적인 책임을 기대하고 읽었으나 기실 정치적인 책이었으므로 그 학술적 가치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하기 어렵다. 논증의 타당성 이전에 정치적 욕망의 중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마치 볼록거울 위에 비춘 상인 것 같다. 거울에 비춘 것이지만, 과연 이것이 실제 모습일까 의아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저자는 끊임없이 위안부 여성들의 부분적 자발성과 위안소에서 일본군과의 관계를 통해 형성되는 동지적 감정, 그리고 이런 여성들을 위안부로 넘긴 '업자'들의 불법성에 대해 지적한다. 저자가 비판하려는 지점이 무엇인지는 알겠다. '조선인 여성 대 일본 제국'이라는 간단한 도식에 근거한 위안부 문제 인식을 비판하고 그 중층성을 보여주고 싶은 바가 아니겠는가.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자꾸만 '조선인 여성 대 일본 제국'의 대립항을 중층화시키는 대신, 후자에 해당하는 '일본 제국'을 '업자'로 바꾸려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어한다.
이런 관계를 생각해보자. 식민지 시대 소작농 문제에서 실제로 소작농들을 '괴롭혔던' 것은 마름이다. 대지주가 직접 나서서 소작농을 '물리적으로' 괴롭히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소작농 문제를 접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이미지, 즉 지주에게 학대당하는 소작농의 모습이란 당시의 실제 모습과는 좀 거리가 있다. 가시적인 장면을 그대로 이미지화한다고 하면 소작농을 괴롭히는 것은 지주가 아니라 마름이어야 하고, 괴롭힘의 방식 역시 회초리를 들고 때리거나 소작농의 간절한 애원을 뿌리치고 쌀 한 톨 남김없이 들고 가 버리는 따위의 장면이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비가시적이고 비자극적이되, 더 교묘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이런 점이 소작농 문제의 본질을 바꾸지는 않는다. 식민지 시대의 소작농 제도가 어떤 형태로든 소작농에게 빈궁함을 강요했던 것은 사실이며, 그 배후에는 조선 내의 쌀 생산량을 늘리고 이를 일본으로 반출시키는 데 힘을 쏟았던 제국의 경제정책이 도사리고 있다는 본질은 뒤바뀌지 않는다. 소작농 제도의 중층성을 조망하는 일과, 소작농이 당한 억압의 책임을 '마름'에게 전가하는 일은 별개의 문제다. <제국의 위안부>는 말하자면 전자를 앞에 내세우고 시작했으면서 정작 결과는 후자로 치달은 격이라고 하겠다.
물론 저자 자신은 끊임없이 자신이 제국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책임을 완화시키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저자 자신의 의도 자체는 분명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저자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제국의 위안부>는 결국 위안부 문제의 본질에 대한 조망보다는, 이 문제의 책임을 (조선인) 업자에게 분담시킴으로써 일본 제국의 책임을 경감시키는 방향으로 와전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저자 자신이 이 <제국의 위안부>를 기점으로 자꾸만 한일 간의 화해라는 지점으로 나아가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위안부 문제의 중층성을 살피는 일이란 곧 일본과의 화해 협력을 기하는 일이 될 수는 없다. 또한 이것이 정대협을 비판하는 유효한 근거가 되리라고 기대하기도 어렵다.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은, 그리고 그 갈등을 해결하는 길은, 어디까지나 일본 '제국'이 조선인 여성을 강제로 동원하여 성노예로 삼았다는 사실을 수긍하고 피해자에 대한 사과와 보상을 하는 일 이외에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정부 간 합의에 의해서 해결될 바도 아니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란 존재하지도 않았고, 조선인 여성을 동원했던 체계가 조선인 내부의 자치적 조직에 의한 바도 아니었으니, 현재의 대한민국 정부는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입장은 취할 수 있으되, 위안부 피해자들의 의견을 앞질러서 그들이 동의하지 않는 화해를 일방적으로 '결정'할 권한은 없기 때문이다.
만일 <제국의 위안부>가 위안부 문제의 중층성을 면밀하게 검토하자는 선에서 많은 자료와 그에 대한 분석을 바탕으로 위안부 문제 전반을 조감했다면 나는 이 책에 꽤나 호감을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제국의 위안부>는 그런 학문적 철저함 대신, 몇몇 유관자의 자기기술이라는 '빈약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저자 자신의 '한일간 화해협력에 대한 욕망'을 충족하고 표출하는 방향으로 거침없이 나아가는 쪽을 택했다. 이 성큼성큼 내딛는 발걸음 와중에 위안부 피해자들은 종종 '짓밟히거나', 혹은 '발 뒤꿈치를 밟히거나' 아니면 '뒷정강이를 걷어채였다'. 물론 이것은 <제국의 위안부>가 의도한 바는 아니나, 적어도 <제국의 위안부>가 선택한 '화해에의 강박'을 충족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피해였다. 말하자면 Collateral Damage라고 해야 할까.
물론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위안부>를 사법재판의 대상으로 처리하는 데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다만 콜래트럴 데미지를 일으킨 데 대한 위안부 피해자들의 분노가 어떤 것인지는 십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한-일간의 화해 협력이 마치 <제국의 위안부>가 택한 것과 같은 형상으로 전격 돌진하여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제국의 위안부>가 진정한 의미에서 위안부 문제에 대한 화해와 협력을 추구한다면, 이 책은 최소한 4~5권 분량의 연구서를 먼저 전제에 깔고 있어야 했다. 말하자면 박사논문으로 썼어야 할 내용의 글을 아침마당 프로그램의 10분짜리 강연 분량으로 줄인 격이랄까.
다소 과격한 표현을 쓰자면, 나는 <제국의 위안부>가 일종의 '집속탄(Cluster Bomb)'이라고 생각한다. 그 위력만큼은 확실하지만, 대신 그만큼 많은 피해를 낳기 때문에 현 시점에서는 비인도적인 무기로 비판받고 있는 그런 무기체계 말이다.
<제국의 위안부>를 무비판적으로 따른다면 우리는 저자가 주장하는 그 '화해-협력'이라는 것에 손쉽게 도달할 수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댓가로, 우리는 위안부 피해자를 비롯하여 식민지 역사에서 엄연한 '사실'로 존재하는 여러 '그늘'들을 짓뭉개고 지나가야 한다. 물론 이런 짓뭉갬을 처음부터 의도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말이다. 과연 이러한 부수적인 피해를 적당히 감내하고 효율적인 화해협력을 도모할 것인지, 아니면 비효율적이고 때로는 평행선마저 그리게 된다 할지라도 발 밑의 그늘
하나하나를 확인해가면서 천천히 나아갈지, 한번 고민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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