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 FELIVIEW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2016년 2월 3일 사진.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 소녀상이 모든 ‘위안부’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동원된 가부장주의적 ‘소녀’의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소 녀상’이 그녀들의 어린 시절, 소녀 시절을 누구에게나 있었던 꿈많은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라 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기억을 생각해 보라. 이것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위안부 상으로 인터 넷에서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임산부 상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사실성 유무를 떠나 보는 내 가 너무나 참혹했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뿌리와이파리, 2013. (2014. 6. 24. 초판 3쇄)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이번에 공개된 삭제판이 아닌, 작년 판금되기 이전 구입 한 무삭제판이다. 언제가 읽어보겠지 싶어 묵여두었던 책이다. 상세한 비평은 하지 않기로 한 다.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이 책은 ‘위안부’ 문제와 위 안소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는 연구서는 아니다. 그다지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 내용은 주로 정 대협에 대한 비판이다. ‘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앞부분의 100여쪽 남짓. 내용이 제목과 살짝 달라 조금 당황했다. 물론 일본의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위안부’ 당사자 및 지원단체의 격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법 적 소송과 절차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어찌되었든 소송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주로 삭제된 부분인 ‘동지애'(애국처녀, 긍지, 동지적 관계 등, 생각보다 훨씬 여러번 나왔다) 가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일본군과 때로 애정을 나누고, 간호법을 배워서 돕기도 하고, 미 군의 폭격을 피해서 곳곳으로 함께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동지애가 싹텄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인’의 지위였다. 일본을 국적으로하는 여러 인종, 민족, 종족 의 사람들 중에서 2등의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인(내지인) 위 안부는 수가 적어 장교만 상대하는 등의 현실에서, 생긴 것과 피부색이 비슷하고, 일본어를 하 는 일종의 대용(substitute)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위안부들이 일본군을 ‘유군(아 군)’이라고 표현하고, 일본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여 자결하기도 했다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장에서 적과의 사랑이 꽃필 수도 있고,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납치된 사 람이 납치범과 공감하는 심리상태를 ‘스톡홀롬 신드롬’이라고 한다든가. 그런 감정이나 상황까 지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위안부’의 얼마 정도 어느 정도가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명시하지 않은채, 그런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 말하며, 논의를 금새 확장하지만, 사실 이 부분 이 중요한 문제다. 특히 패전이 확인된 후 그럼 심정은 얼마나 이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 에게 퍼졌는가? 상대방인 일본군도 그렇게 여겼는가? 그래서 일본으로 함께 갔는가? 전쟁 중 극한 상황에서 비이성적으로 표출한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고 말 하려면, 얼마나 많은 증거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라면 『우국』 보다 훨씬 뛰어난 소설을 만들어 낼수도 있겠지만. 더욱 이 그런 감정을 근거로 ‘위안부’를 피해자이자 협력자라고 단정하는 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위안부’들이 협력해서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마음의 위안, 잠깐 동안 목숨의 연장? 결국 전 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대부분의 ‘위안부’를 버려두고 떠났다. 극적으로 죽이지까진 않았다고 해도, ‘위안부’를 일본군 중에 포함시켜, 일본으로 수송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데려갈때는 군 용시설을 이용하고선. 동지적 연대를 느낀 ‘협력자’이니 이제 ‘위안부’는 어떤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패전의 전장에 한 때의 동지를 버리고 간 ‘도의적 책임’인가. ‘위안부’는 저자가 말하는 제국의 성착취 시스템의 먹이사슬의 최말단의 희생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협력자’ 딱지를 붙여서 모든 사람이 협력자이니, 이제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 그만하자고 할 것인가. 이런 일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서, 이중의 처벌을 가하는 일이다.
소위 아베 총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강제 연행’은 없었다는 주장과 이 책의 내용이 궤를 같 이하는 부분에 대해서. 즉 식민지체제라는 구조적 강제만 인정하는 부분에 대해. 조선에서 위 안부를 데려갈 때, 실제로는 업자가 사기·납치 등의 방법을 썼을 수는 있으나 군이 직접 들어 가 총을 들이대고 강제 동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거나, 일탈이 라는 주장이다. 지배종속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큰 규모로 진행될 경우, 저항을 포기하거나 시도하지 않고, 순응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순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강제는 ‘직 접적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도 법적 처벌의 대상도 아니고, 직접 강제가 있을 때 만 처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는 것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식민주의 자체는 처벌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형식논리상으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1910년의 합일병합, 제2차 한일신협약에 따라 주권이 양도되었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시, 과거 조약의 무효성을 애매하게 처리(현 시점에서 무효)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일본 의 관료와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자료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주장하고 있고, 1965년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모두 인수했기 때문에 개인은 청구권을 요구할 수 없고, 강제 연행이라는 전쟁범죄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배상은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이 다. 이를 근거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대부분 ‘위안부’가 패소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패소가 실상은 한국정부 때문이고, 냉전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점만은 사실 이다. 그것은 모두 기왕의 법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상황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 지에서 벌어진 오랜 식민화의 결과, 식민지 전체가 국가에 총동원되는 상황에서 업자들과 계약 하고, 업자들의 활동을 방관한 것에 대해서 실제 강제연행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순응된 강제’ 즉,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협상 전략 내지, 법정 전략 상 어리석 어 보인다 할지라도,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 할지라도,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무 의미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합의에 구속되겠지만, 시민 사회가 국가의 일부로 구속되지 않는 이상, 시민사회가 그런 주장을 순순히 수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부장구조(남성우월주의)와 식민지현실(제국주의)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식민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구조에 책임을 더 물으려고 한다. 그러나 가부장구조는 식민지배 를 통해서 강화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식민지야 말로, 여성화되어 피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 점은 사이드가 충분히 지적해 두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할 수 있는 지점들도 있다. 예를 들 어 위와 관련해, 1930년대 말의 오늘날의 초등학교 취학률을 보면, 전체 아동의 약 3분의 1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취학한 학생 중 남학생의 비중이 3배였다. 이 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조선인의 일반적 의식이나 가정 단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구조에 의해 강 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여성교육기회는 다양한 측면으로 봉쇄된다. 1944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제 말기 60%를 넘어가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일제가 교육보 급에 노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는 징병제 실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등교육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서로 말이 다르면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함께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선의 총독부는 서로 의무교육을 먼저 실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 었고, 1943년 대만총독부가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하나 사소한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는 소금과 담배는 물론 아편과 모 르핀을 전매했다. 아편의 부산물인 모르핀은 아편 값이 비싸 사용자가 줄어 재정수입이 적어지 자 새롭게 전매에 포함시켰다. 다른 점령지나 전선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자가 지적한 ‘위안 부’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아편 사용의 이면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생각만큼 2차대전을 종결하는 조약이 아니었다. 미국 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참여했으나, 소련은 마지막에 서명을 거부했다. 소련과 일본은 1956년의 선언으로 국교를 회복한다. 중국은 미국은 중화민국(대만)을 영국은 중화인민공화 국(대륙)을 초청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초대받지 못했다. 실제 중일양국의 국교정상화는 1972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더욱 한일국교정상화가 시급했다. 바야흐로 세계 는 냉전이었다. 일본인, 조선인 등의 범주에 혼란이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명칭이 당시 대일본제국의 내지인, 조선인, 대만인 등을 총칭하는 명칭이 되었다가도, 소위 내지인만 가리키기도 하고, 조선인 범 주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범주혼란은 흔한 사례이므로, 이 책의 저자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며, 걸림돌이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난 90년대만해도 크 지 않았던 우익이 한국과 위안부 등 과거사 갈등을 하는 동안 혐한과 함께 커져났다. 이런 식으 로 일본에 대한 과거사 공격과 피해자이기만한 양 하는 것은 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협력자들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일본의 우경화를 막 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과거사에 입각한 일본 공격을 모두 멈추고 진심으로 화해를 추 구하면, 일본에서 우경화가 멈추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 손잡고, 한일 양국이 미래로 함께 나 아갈 수 있을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의 우익이 등장하는 것이나, 한국에서 다양한 형 태로 우익이 때로 극단적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다 그 나라의 내부 문제 때문이다. 우리가 방향 을 돌린다고, 화해가 되는 것도, 우경화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목표로 그럴 수도 없 다. 마치, 여당 독주를 막기 위해, 야당에게 우클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야당이 막상 우클릭하면서,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여당은 더욱 저멀리 달아나고, 야당은 지지층의 비판 을 받고 허우적 거린다.
이 책은 ‘위안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꺼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양한 목소리를 다양하 게 보여주어야 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스베틀라야나 알렉시예비치가 좋은 예가 아닌가. 이 책에서 나는 일종의 조급증, ‘화해조급증’을 읽었다. 저자는 아마도 잊혀져가는 작은 목소리, 혹은 서발턴(subaltern)안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눌린 섭서발턴(subsubaltern,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을런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러기에 저자가 들려준 목소리는 너무 단순한 한 가지 소리 뿐이었다. 그런 시 도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하위 주체 또는 하위 주체들의 복원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저자가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 그 주체이다. 이 주 체는 위안부로 끌려갈 때까지는 미성숙의 피동성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대초반의 여러 격정 과 전시 상황 탓에, 가해자인 일본군과 연애에 빠지기도하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의 모습을 띈다. 이 주체의 이런 모습은 이 정서 혹은 인식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고수하는 소수에 의해서만 등장하고 발굴되었다. 얼마나 그랬는지 현재로선 알기 어렵지만, 이 모습을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다수의 ‘위안부’가 전쟁이 끝난 후 이 모습을 어떻게 느꼈을까, 기억 을 지우려고 하고, 괴로워도 하고, 그러나 어느 순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 에 연민을 느끼면서. 이들에게 이토록 엄청난 이름 ‘협력자’라는 틀을 뒤짚어 씌워야 하는지 나 는 정말 의문이 든다. 그 해석이 합당한지도. 그냥 비극적 에피소드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 닐까. 저자가 지적하는 업자·포주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상세히 연구되고, 공표되어야 한다. 대부분이 조선인인 (징모)업자와 포주 없이, 위안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다른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보다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 혹시, 이 업 자나 포주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 있으면, 확인해서 환수하는 일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미 그런 소급입법이 있었다. 사실이 확인되면, 인륜에 대한 범죄로 처벌하여, 공개해야 한다. 이런 범죄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비로소 한국에서의 협력자와 협력 (collaboration) 연구를 촉발시키게 될 것이다. ‘친일’이라는 단순하게 단죄하는 명칭이자, 그 들의 행적과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운 명칭보다. 협력자(collaborators)와 동화주의자 (assimilators)와 같이 각자의 행적과 사상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개념을 정립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선도적 연구들을 검토해야 한다. 근현대중국연구자와 일본연구 자, 식민지연구자들이 선도적인 작업을 해두었다.
이 책을 요약하면, 이런 주장이 된다. 정대협이 문제다. 소녀상이 문제다. 정대협이 정보를 왜 곡, 조작했다. 정대협은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위안부’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마치 노사교 섭에서 제3자 개입 금지조항 같다. 정대협은 순수한 ‘위안부’들의 의견을 자신의 권력과 명성 을 위해 왜곡하고, 때로는 억누르면서, 이 문제를 끌고가는 불순세력이다. 그러므로 정대협만 없어지면, ‘위안부’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정대협의 그런 노력의 결정체가 소녀상이다. 소 녀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피해자 흉내내기, 순결한 소녀 아닌 ‘위안부’를 소외시 킨다. 소녀상은 일본을 자극하고, 특히 한국을 이해하려던 사람들과 우익들을 자극한다. 그러 므로 소녀상을 철거하고, 현실적으로 일본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응인 기금 또는 그 후 속조치를 수용하고, 이 문제를 끝내달라. 이것이 요약이다. 이들이 고령이라 곧 돌아가시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은근한 위협(?)까지. 정대협과 북한이 친하다는 식의 내용도 은근 슬쩍 서술한다.
나는 삭제된 34곳이 모두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한겨레」가 공개한 것을 보니, 내가 선을 긋 거나 낙서해 놓은 곳이 꽤 많았다. 일부 제시된 삭제된 부분은 매우 자극적인 부분들이었다. 그 부분들이 삭제됨에 따라 오히려 이 책이 온건하게, 처음 주었던 충격과 달리 읽힐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우려되기도 한다. 덧붙이면, 이 책에 은근히 비속어까지는 아니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 이 ‘조센삐’이다. 이 단어는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삐(ピー) 는 ‘プロスチチュート (prostitute)’즉, 창녀, 매춘부의 약자라고 한다. 그밖에도 책 내용 중간 중간에 반복해서, ‘성욕처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전쟁에 나간 젊은 남성은 성욕을 주체하 지 못해, 기꺼이 강간이라도 일삼는 존재이니, 반드시 성욕처리 시설 혹은 방법이 필요하고, 그래서 미군도, 한국군도 이용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당연히 이런 부분도 연구되어야 한다. 그 래도 ‘성욕처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보기 어려웠다. 가장 충격적인 단어는 ‘공동변 소'(59, 센다 가코 책에서 위안부 증언을 인용하는 부분)였다. 본인들은 그렇게 쓴다고 해도, 어떻게 희생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좀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안될까. 주를 단다든지 해서. 다른 곳에도 ‘위안부’는 ‘군수품’, ‘적 여성(네덜란드 여성)’은 ‘전리품’ 등의 언급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맥락도 알겠으나,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기술하는 것이 마땅하다. 희생자에 대한 존경심, 피해자에 대한 존중을 보였으면 한다. 지난 주 캄캄한 늦은 저녁에 아내와 함께, 소녀상 옆 노숙 현장에 다녀왔다. 그냥 몇 명을 격려 하고 왔다. ‘바위처럼’도 참 오랜만에 박수치면서 부르고. 일본으로선 아플 수 있지. 그렇지만, 식민지 지배만큼 아플까. ‘위안부’ 한 사람의 아픔만큼 아플까. 맺힌 한도 그 자체로 실체인데.
이 책과 함께, 작년에 사두었던,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읽기로 했다. 그렇지만 집회현장에서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서 참회한 사진이 여러장 걸려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그 행동은 옳은 일이었다. 그 일은 그의 ‘동방정책(Ostpolitik)’에 힘이 되었고, 전쟁과 과오를 반 성하는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낳았다. 당시 독일 시민들 중에는 일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역량의 발현이다. 실제 2차 대전 이후 전쟁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독일과 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분리를 통한 전후 처리’ 방 법을 택하고 있다. 전쟁의 책임을 진 수괴, 그의 하수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 독일에서는 히틀 러가 자살한 후, 나치당 수괴를 처벌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직추방을 당했으나 몇 년 안에 거의 모두 복귀했다. 오늘까지도 떠들썩하게 몇몇 수용소에서 일했던 사 람들을 처벌하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나치당과 제3제국에 있어서 일반의 독일사람들은 묘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열렬하게 나치당을 지지했던 과거와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는 대다수 독일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전체주의 의 길을 열었다. 독일이 사과를 하고, 처벌을 하고, 배상을 한다고 해도, 이 선, 즉 평범한 독일 의 시민과 히틀러 및 나치당의 연결은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도쿄 전범재판 을 통해, 일부 군국주의자 1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벌했다. 그러나 핵심인 히로히토 천황 은 미국의 비호 아래, 그 지위와 생명을 부지했다. 새로운 헌법 하에서 새로운 지위로. 그리고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함께 일본인은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의 입장에 서 보통의 일본인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 왔을 때, 가혹한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전시에 전쟁의 열매를 누렸다. 1905년의 히비야 폭동은 보통의 일본인이 근대 국가에서 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승전 후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는 사실에 격분한 시민들은 공원과 전차를 불태웠다. 아마도 전차표값 4전 중 1전은 전 비였기 때문이리라. 빌리 브란트가 했듯이 일본 천황이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겠 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일본이 식민지배 자체가 오류였음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고, 제국주의 가 잘못이었음을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어떤 방식으로든 동원한 것이 국가범죄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까지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 다. 그렇다고, 국민국가와 전쟁이 지배하는 세계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전쟁은 범죄라고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마음을 달래는 이벤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한국인들이 일본의 굴복을 바란다고 생각할 터인데, 그 또한 원치 않는 오해다. 원하는 것은 일본이 정말로 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이를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성 과 사죄는 포기했다는 증거이고.
2016. 2. 3.
---
사족이 될까 우려하면서도, 일본의 책임과 배상 문제에 관하여. 국가단위의 배상책임 문제는 저자가 정대협을 비판하는 그리고 한국 언론을 비판하는 중요한 논점이기 때문에, 몇자 더한 다. 사실 이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진다. 저자가 정대협을 비판하는 주된 내용 중 하나가 일본 의 성의와 의도를 무시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나름의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만, 아주 미묘한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핵심적 논쟁은 90년대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 돌아간 다. 저자의 논지는 이것이다. 이 ‘기금’은 명목상 민간기금이지만, 내용상은 국고금이라는 것이 다. 실제 기금의 90%가 국고에서 나왔다. 또 총리의 개인자격의 서신을 포함하고 있다. 역대 총리가 계속 서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로금(見舞金)이 아니라 보상금(償い金)인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2016년 2월 3일 사진. 민주언론시민연합 홈페이지. 소녀상이 모든 ‘위안부’를 포괄하지 못한다는 지적, 국가에 의해 동원된 가부장주의적 ‘소녀’의 이미지를 강화한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러나 나는 이 ‘소 녀상’이 그녀들의 어린 시절, 소녀 시절을 누구에게나 있었던 꿈많은 시절을 그리워할 뿐이라 고 생각한다. 그 이후의 기억을 생각해 보라. 이것과 가장 대척점에 있는 위안부 상으로 인터 넷에서 중국에서 만들었다는 임산부 상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그 사실성 유무를 떠나 보는 내 가 너무나 참혹했다.
박유하, 『제국의 위안부: 식민지 지배와 기억의 투쟁』, 뿌리와이파리, 2013. (2014. 6. 24. 초판 3쇄) 박유하의 『제국의 위안부』를 읽었다. 이번에 공개된 삭제판이 아닌, 작년 판금되기 이전 구입 한 무삭제판이다. 언제가 읽어보겠지 싶어 묵여두었던 책이다. 상세한 비평은 하지 않기로 한 다. ‘위안부’에 대한 내용이 궁금한 분들에게는 이 책을 권하지 않는다. 이 책은 ‘위안부’ 문제와 위 안소 문제를 상세하게 다루는 연구서는 아니다. 그다지 분량이 많지 않은 이 책 내용은 주로 정 대협에 대한 비판이다. ‘위안부’에 대한 내용은 앞부분의 100여쪽 남짓. 내용이 제목과 살짝 달라 조금 당황했다. 물론 일본의 지원단체에 대한 비판도 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읽고나서 ‘위안부’ 당사자 및 지원단체의 격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 이후의 법 적 소송과 절차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서. 어찌되었든 소송에는 찬성하지 않는다.
주로 삭제된 부분인 ‘동지애'(애국처녀, 긍지, 동지적 관계 등, 생각보다 훨씬 여러번 나왔다) 가 가장 논쟁적인 부분이다. 일본군과 때로 애정을 나누고, 간호법을 배워서 돕기도 하고, 미 군의 폭격을 피해서 곳곳으로 함께 돌아다니고, 그러다 보니 동지애가 싹텄다는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선인’의 지위였다. 일본을 국적으로하는 여러 인종, 민족, 종족 의 사람들 중에서 2등의 일본인으로서 조선인은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인(내지인) 위 안부는 수가 적어 장교만 상대하는 등의 현실에서, 생긴 것과 피부색이 비슷하고, 일본어를 하 는 일종의 대용(substitute)였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일부 위안부들이 일본군을 ‘유군(아 군)’이라고 표현하고, 일본의 패배를 자신의 패배로 받아들여 자결하기도 했다는 것.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전장에서 적과의 사랑이 꽃필 수도 있고, 원수가 친구가 되기도 한다. 납치된 사 람이 납치범과 공감하는 심리상태를 ‘스톡홀롬 신드롬’이라고 한다든가. 그런 감정이나 상황까 지 부인하려는 것은 아니다.
저자는 ‘위안부’의 얼마 정도 어느 정도가 그런 마음을 느꼈는지 명시하지 않은채, 그런 마음을 느꼈을 것이라 말하며, 논의를 금새 확장하지만, 사실 이 부분 이 중요한 문제다. 특히 패전이 확인된 후 그럼 심정은 얼마나 이어졌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 에게 퍼졌는가? 상대방인 일본군도 그렇게 여겼는가? 그래서 일본으로 함께 갔는가? 전쟁 중 극한 상황에서 비이성적으로 표출한 감정이나 심리상태를 그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다고 말 하려면, 얼마나 많은 증거가 필요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제국의 위안부』는 소설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시마 유키오라면 『우국』 보다 훨씬 뛰어난 소설을 만들어 낼수도 있겠지만. 더욱 이 그런 감정을 근거로 ‘위안부’를 피해자이자 협력자라고 단정하는 데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위안부’들이 협력해서 무엇을 얻었다는 것인가? 마음의 위안, 잠깐 동안 목숨의 연장? 결국 전 쟁이 끝나자 일본군은 대부분의 ‘위안부’를 버려두고 떠났다. 극적으로 죽이지까진 않았다고 해도, ‘위안부’를 일본군 중에 포함시켜, 일본으로 수송하지는 않지 않았는가? 데려갈때는 군 용시설을 이용하고선. 동지적 연대를 느낀 ‘협력자’이니 이제 ‘위안부’는 어떤 사과를 받아야 하는가. 패전의 전장에 한 때의 동지를 버리고 간 ‘도의적 책임’인가. ‘위안부’는 저자가 말하는 제국의 성착취 시스템의 먹이사슬의 최말단의 희생자들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협력자’ 딱지를 붙여서 모든 사람이 협력자이니, 이제 우리 모두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주고, 다 그만하자고 할 것인가. 이런 일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들어서, 이중의 처벌을 가하는 일이다.
소위 아베 총리가 말하는 좁은 의미의 ‘강제 연행’은 없었다는 주장과 이 책의 내용이 궤를 같 이하는 부분에 대해서. 즉 식민지체제라는 구조적 강제만 인정하는 부분에 대해. 조선에서 위 안부를 데려갈 때, 실제로는 업자가 사기·납치 등의 방법을 썼을 수는 있으나 군이 직접 들어 가 총을 들이대고 강제 동원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거나, 일탈이 라는 주장이다. 지배종속 관계가 오래 지속되고, 큰 규모로 진행될 경우, 저항을 포기하거나 시도하지 않고, 순응하는 경우가 발생하는데, 이렇게 순응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한 강제는 ‘직 접적 강제’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도 법적 처벌의 대상도 아니고, 직접 강제가 있을 때 만 처벌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식민주의 자체를 처벌해야 하는데, 그건 불가능하다 는 것이다. 당시는 제국주의 시스템이기 때문에 식민주의 자체는 처벌할 수 없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형식논리상으로 그럴 수 있을 것이다. 1910년의 합일병합, 제2차 한일신협약에 따라 주권이 양도되었고,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시, 과거 조약의 무효성을 애매하게 처리(현 시점에서 무효)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니 일본 의 관료와 정치인들이 계속해서 자료를 축적하고, 자신들의 입장을 고수하고 주장하고 있고, 1965년 한국정부가 개인의 청구권을 모두 인수했기 때문에 개인은 청구권을 요구할 수 없고, 강제 연행이라는 전쟁범죄가 확인되지 않기 때문에, 개인배상은 요구할 수 없다는 것이 논리이 다. 이를 근거로 배상을 요구하는 소송에서 대부분 ‘위안부’가 패소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런 패소가 실상은 한국정부 때문이고, 냉전구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그점만은 사실 이다. 그것은 모두 기왕의 법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상황을 전개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 지에서 벌어진 오랜 식민화의 결과, 식민지 전체가 국가에 총동원되는 상황에서 업자들과 계약 하고, 업자들의 활동을 방관한 것에 대해서 실제 강제연행 행위를 하지 않았다고 면죄부를 줄 수 없다. ‘순응된 강제’ 즉, 식민지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협상 전략 내지, 법정 전략 상 어리석 어 보인다 할지라도, 승소할 가능성이 없다 할지라도, 이 문제를 반복적으로 제기하는 것이 무 의미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국가 간의 관계에서는 이미 이루어진 합의에 구속되겠지만, 시민 사회가 국가의 일부로 구속되지 않는 이상, 시민사회가 그런 주장을 순순히 수용해야 할 어떤 이유도 없다. 가부장구조(남성우월주의)와 식민지현실(제국주의)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여, 식민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가부장구조에 책임을 더 물으려고 한다. 그러나 가부장구조는 식민지배 를 통해서 강화된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식민지야 말로, 여성화되어 피착취의 대상이 된다. 이 점은 사이드가 충분히 지적해 두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할 수 있는 지점들도 있다. 예를 들 어 위와 관련해, 1930년대 말의 오늘날의 초등학교 취학률을 보면, 전체 아동의 약 3분의 1이 학교에 다니고 있고, 취학한 학생 중 남학생의 비중이 3배였다. 이 점은 여성에 대한 차별이, 조선인의 일반적 의식이나 가정 단위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식민지 지배구조에 의해 강 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상급학교로 올라갈수록 여성교육기회는 다양한 측면으로 봉쇄된다. 1944년에 초등학교 취학률은 일제 말기 60%를 넘어가므로, 보기에 따라서는 일제가 교육보 급에 노력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 총독부는 징병제 실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초등교육 의무화를 추진하고 있었다. 전장에서 서로 말이 다르면 명령이 통하지 않는다. 함께 일본의 식민지였던 대만과 조선의 총독부는 서로 의무교육을 먼저 실시하기 위해 경쟁하고 있 었고, 1943년 대만총독부가 초등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또 하나 사소한 것이지만,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조선총독부는 소금과 담배는 물론 아편과 모 르핀을 전매했다. 아편의 부산물인 모르핀은 아편 값이 비싸 사용자가 줄어 재정수입이 적어지 자 새롭게 전매에 포함시켰다. 다른 점령지나 전선은 어땠는지 모르지만. 저자가 지적한 ‘위안 부’들의 고통을 덜기 위한 아편 사용의 이면에도 일본 제국주의가 도사리고 있었다.
또 저자가 자주 언급하는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은 생각만큼 2차대전을 종결하는 조약이 아니었다. 미국 과 영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은 참여했으나, 소련은 마지막에 서명을 거부했다. 소련과 일본은 1956년의 선언으로 국교를 회복한다. 중국은 미국은 중화민국(대만)을 영국은 중화인민공화 국(대륙)을 초청할 것을 주장하는 바람에 초대받지 못했다. 실제 중일양국의 국교정상화는 1972년에 이루어진다. 그래서 미국으로서는 더욱 한일국교정상화가 시급했다. 바야흐로 세계 는 냉전이었다. 일본인, 조선인 등의 범주에 혼란이 보인다. 일본인이라는 명칭이 당시 대일본제국의 내지인, 조선인, 대만인 등을 총칭하는 명칭이 되었다가도, 소위 내지인만 가리키기도 하고, 조선인 범 주도 마찬가지다. 다만, 이 부분에 있어서 범주혼란은 흔한 사례이므로, 이 책의 저자만 비판 받을 일은 아니다.
이 책의 후반부에서 저자는 화해를 강조한다. 화해를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 양쪽에서 서로를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 많아져야 하며, 걸림돌이 없어져야 한다. 그런데 지난 90년대만해도 크 지 않았던 우익이 한국과 위안부 등 과거사 갈등을 하는 동안 혐한과 함께 커져났다. 이런 식으 로 일본에 대한 과거사 공격과 피해자이기만한 양 하는 것은 큰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나는 물론 협력자들의 역사를 복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다고 해서 일본의 우경화를 막 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이 과거사에 입각한 일본 공격을 모두 멈추고 진심으로 화해를 추 구하면, 일본에서 우경화가 멈추고, 그들이 다시 돌아와 손잡고, 한일 양국이 미래로 함께 나 아갈 수 있을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일본의 우익이 등장하는 것이나, 한국에서 다양한 형 태로 우익이 때로 극단적 형태로 등장하는 것은 다 그 나라의 내부 문제 때문이다. 우리가 방향 을 돌린다고, 화해가 되는 것도, 우경화가 멈추는 것도 아니다. 그런 것을 목표로 그럴 수도 없 다. 마치, 여당 독주를 막기 위해, 야당에게 우클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다. 야당이 막상 우클릭하면서, 협조적인 태도를 보이면, 여당은 더욱 저멀리 달아나고, 야당은 지지층의 비판 을 받고 허우적 거린다.
이 책은 ‘위안부’의 다양한 목소리를 꺼내고 싶어했다. 그렇다면, 정말 다양한 목소리를 다양하 게 보여주어야 했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스베틀라야나 알렉시예비치가 좋은 예가 아닌가. 이 책에서 나는 일종의 조급증, ‘화해조급증’을 읽었다. 저자는 아마도 잊혀져가는 작은 목소리, 혹은 서발턴(subaltern)안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눌린 섭서발턴(subsubaltern,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을런지도 모 른다. 그러나 그러기에 저자가 들려준 목소리는 너무 단순한 한 가지 소리 뿐이었다. 그런 시 도는 더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어야 한다. 그렇다면, 일종의 하위 주체 또는 하위 주체들의 복원이 이루어졌을지도 모르겠다.
문제는 저자가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준, 그 주체이다. 이 주 체는 위안부로 끌려갈 때까지는 미성숙의 피동성을 벗어나지 못하다가, 20대초반의 여러 격정 과 전시 상황 탓에, 가해자인 일본군과 연애에 빠지기도하고,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협력자의 모습을 띈다. 이 주체의 이런 모습은 이 정서 혹은 인식을 아직까지 간직하고 고수하는 소수에 의해서만 등장하고 발굴되었다. 얼마나 그랬는지 현재로선 알기 어렵지만, 이 모습을 없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문제는 다수의 ‘위안부’가 전쟁이 끝난 후 이 모습을 어떻게 느꼈을까, 기억 을 지우려고 하고, 괴로워도 하고, 그러나 어느 순간 떠올리기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젊은 날 에 연민을 느끼면서. 이들에게 이토록 엄청난 이름 ‘협력자’라는 틀을 뒤짚어 씌워야 하는지 나 는 정말 의문이 든다. 그 해석이 합당한지도. 그냥 비극적 에피소드로 기억해야 하는 것이 아 닐까. 저자가 지적하는 업자·포주에 대한 부분은 지금까지 보다 훨씬 상세히 연구되고, 공표되어야 한다. 대부분이 조선인인 (징모)업자와 포주 없이, 위안소가 원활하게 돌아가기 어려웠다. 이 부분은 다른 연구에서도 지적되고 있는 부분이다. 보다 공개적으로 알려야 한다. 혹시, 이 업 자나 포주로 재산을 축적한 사람이 있으면, 확인해서 환수하는 일까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 미 그런 소급입법이 있었다. 사실이 확인되면, 인륜에 대한 범죄로 처벌하여, 공개해야 한다. 이런 범죄에는 시효가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이 부분은 비로소 한국에서의 협력자와 협력 (collaboration) 연구를 촉발시키게 될 것이다. ‘친일’이라는 단순하게 단죄하는 명칭이자, 그 들의 행적과 상황을 설명하기 어려운 명칭보다. 협력자(collaborators)와 동화주의자 (assimilators)와 같이 각자의 행적과 사상적 지향을 분명히 드러내는 방식으로 개념을 정립 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선도적 연구들을 검토해야 한다. 근현대중국연구자와 일본연구 자, 식민지연구자들이 선도적인 작업을 해두었다.
이 책을 요약하면, 이런 주장이 된다. 정대협이 문제다. 소녀상이 문제다. 정대협이 정보를 왜 곡, 조작했다. 정대협은 권력이 되었다. 그래서 ‘위안부’의 목소리가 묻히고 있다. 마치 노사교 섭에서 제3자 개입 금지조항 같다. 정대협은 순수한 ‘위안부’들의 의견을 자신의 권력과 명성 을 위해 왜곡하고, 때로는 억누르면서, 이 문제를 끌고가는 불순세력이다. 그러므로 정대협만 없어지면, ‘위안부’들의 목소리가 들릴 것이다. 정대협의 그런 노력의 결정체가 소녀상이다. 소 녀상은 국가주의, 민족주의 이데올로기, 피해자 흉내내기, 순결한 소녀 아닌 ‘위안부’를 소외시 킨다. 소녀상은 일본을 자극하고, 특히 한국을 이해하려던 사람들과 우익들을 자극한다. 그러 므로 소녀상을 철거하고, 현실적으로 일본이 제시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응인 기금 또는 그 후 속조치를 수용하고, 이 문제를 끝내달라. 이것이 요약이다. 이들이 고령이라 곧 돌아가시면, 영원히 해결하지 못한다는 은근한 위협(?)까지. 정대협과 북한이 친하다는 식의 내용도 은근 슬쩍 서술한다.
나는 삭제된 34곳이 모두 어디인지 알지 못한다. 「한겨레」가 공개한 것을 보니, 내가 선을 긋 거나 낙서해 놓은 곳이 꽤 많았다. 일부 제시된 삭제된 부분은 매우 자극적인 부분들이었다. 그 부분들이 삭제됨에 따라 오히려 이 책이 온건하게, 처음 주었던 충격과 달리 읽힐 가능성도 있다. 그것이 우려되기도 한다. 덧붙이면, 이 책에 은근히 비속어까지는 아니나, 적절하지 않은 표현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 이 ‘조센삐’이다. 이 단어는 영화 ‘에미 이름은 조센삐였다’로 잘 알려져 있다. 여기서 삐(ピー) 는 ‘プロスチチュート (prostitute)’즉, 창녀, 매춘부의 약자라고 한다. 그밖에도 책 내용 중간 중간에 반복해서, ‘성욕처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데. 전쟁에 나간 젊은 남성은 성욕을 주체하 지 못해, 기꺼이 강간이라도 일삼는 존재이니, 반드시 성욕처리 시설 혹은 방법이 필요하고, 그래서 미군도, 한국군도 이용했다는 식으로 말한다.
당연히 이런 부분도 연구되어야 한다. 그 래도 ‘성욕처리’라는 단어가 반복되는 것은 보기 어려웠다. 가장 충격적인 단어는 ‘공동변 소'(59, 센다 가코 책에서 위안부 증언을 인용하는 부분)였다. 본인들은 그렇게 쓴다고 해도, 어떻게 희생자들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좀 조심스럽게 사용하면 안될까. 주를 단다든지 해서. 다른 곳에도 ‘위안부’는 ‘군수품’, ‘적 여성(네덜란드 여성)’은 ‘전리품’ 등의 언급이 나오는데, 무슨 뜻인지 이해하고, 맥락도 알겠으나, 지금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기술하는 것이 마땅하다. 희생자에 대한 존경심, 피해자에 대한 존중을 보였으면 한다. 지난 주 캄캄한 늦은 저녁에 아내와 함께, 소녀상 옆 노숙 현장에 다녀왔다. 그냥 몇 명을 격려 하고 왔다. ‘바위처럼’도 참 오랜만에 박수치면서 부르고. 일본으로선 아플 수 있지. 그렇지만, 식민지 지배만큼 아플까. ‘위안부’ 한 사람의 아픔만큼 아플까. 맺힌 한도 그 자체로 실체인데.
이 책과 함께, 작년에 사두었던, 윤명숙의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 제도』를 읽기로 했다. 그렇지만 집회현장에서 한 가지 눈에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빌리 브란트가 폴란드를 방문했을 때, 바르샤바의 전쟁희생자 비석 앞에서 참회한 사진이 여러장 걸려 있었다. 빌리 브란트의 그 행동은 옳은 일이었다. 그 일은 그의 ‘동방정책(Ostpolitik)’에 힘이 되었고, 전쟁과 과오를 반 성하는 독일이라는 이미지를 낳았다. 당시 독일 시민들 중에는 일부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개인적인 역량의 발현이다. 실제 2차 대전 이후 전쟁을 처리하는 방식에서 독일과 일본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분리를 통한 전후 처리’ 방 법을 택하고 있다. 전쟁의 책임을 진 수괴, 그의 하수인들, 그리고 일반 시민. 독일에서는 히틀 러가 자살한 후, 나치당 수괴를 처벌하는 일이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공직추방을 당했으나 몇 년 안에 거의 모두 복귀했다. 오늘까지도 떠들썩하게 몇몇 수용소에서 일했던 사 람들을 처벌하고 있지만, 그것 뿐이다. 나치당과 제3제국에 있어서 일반의 독일사람들은 묘한 심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열렬하게 나치당을 지지했던 과거와 선을 긋고 있다. 그러나 실상 은 그렇지 않다. 히틀러는 대다수 독일 시민들의 지지와 후원으로 정권을 장악하고, 전체주의 의 길을 열었다. 독일이 사과를 하고, 처벌을 하고, 배상을 한다고 해도, 이 선, 즉 평범한 독일 의 시민과 히틀러 및 나치당의 연결은 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 일본은 도쿄 전범재판 을 통해, 일부 군국주의자 13명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처벌했다. 그러나 핵심인 히로히토 천황 은 미국의 비호 아래, 그 지위와 생명을 부지했다. 새로운 헌법 하에서 새로운 지위로. 그리고 두 개의 원자폭탄과 함께 일본인은 피해자가 되었다. 그러나 식민지를 경험한 한국인의 입장에 서 보통의 일본인은 피해자가 아니다. 그들은 이 땅에 왔을 때, 가혹한 통치의 수단이 되었다. 실제로 그들은 전시에 전쟁의 열매를 누렸다. 1905년의 히비야 폭동은 보통의 일본인이 근대 국가에서 전쟁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승전 후 전리품이 얼마 되지 않는 사실에 격분한 시민들은 공원과 전차를 불태웠다. 아마도 전차표값 4전 중 1전은 전 비였기 때문이리라. 빌리 브란트가 했듯이 일본 천황이 무릎을 꿇는 것을 바라는 사람도 있겠 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일본이 식민지배 자체가 오류였음을 국가적으로 인정하고, 제국주의 가 잘못이었음을 식민지인들은 전쟁에 어떤 방식으로든 동원한 것이 국가범죄임을 인정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물론, 지금까지의 세계에서는 아직도 그 누구도 인정하지 않고 있 다. 그렇다고, 국민국가와 전쟁이 지배하는 세계를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면, 전쟁은 범죄라고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 마음을 달래는 이벤트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특히 일본 사람들은 그 사진을 보고, 한국인들이 일본의 굴복을 바란다고 생각할 터인데, 그 또한 원치 않는 오해다. 원하는 것은 일본이 정말로 전쟁과 식민지배를 반성하고, 이를 영구히 포기하는 것이다. 반성 과 사죄는 포기했다는 증거이고.
2016. 2. 3.
---
사족이 될까 우려하면서도, 일본의 책임과 배상 문제에 관하여. 국가단위의 배상책임 문제는 저자가 정대협을 비판하는 그리고 한국 언론을 비판하는 중요한 논점이기 때문에, 몇자 더한 다. 사실 이 부분에서 서로 의견이 달라진다. 저자가 정대협을 비판하는 주된 내용 중 하나가 일본 의 성의와 의도를 무시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나름의 논리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 만, 아주 미묘한 부분들이 있다. 그리고 핵심적 논쟁은 90년대의 ‘아시아여성기금’으로 돌아간 다. 저자의 논지는 이것이다. 이 ‘기금’은 명목상 민간기금이지만, 내용상은 국고금이라는 것이 다. 실제 기금의 90%가 국고에서 나왔다. 또 총리의 개인자격의 서신을 포함하고 있다. 역대 총리가 계속 서명하고 있다. 그리고 위로금(見舞金)이 아니라 보상금(償い金)인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