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주성하기자 2013-03-11 7:27 am
[북한 국경 답사기]
1편. 대련에서 송강하, 송강하에서 장백
2편. 장백, 장백에서 심양
3편. 심양에서 단동, 단동
3편.
우리가 심양에서 단동까지 가는데 이용한 열차는 새벽3시에 출발해서 아침7시에 도착하는 기차였다. 우리일행은 이번에는 일반 좌석칸을 이용하기로 했다. 4시간정도 가는 여정이었기에 침대칸은 불필요해 보였던 것이다.
좌석칸에 들어서자 새벽시간임에도 모든 좌석에 사람들이 앉아있었고 심지어 입석 손님들도 꽤 되었다. 무엇보다 침대칸에 비해서 이동하는 승객이 많아서 매우 분주했다. 또한 중국 기차의 좌석칸은 의자를 조절할 수 없는 고정식 직각 L자형 좌석이라 조금만 앉아 있어도 매우 불편하다. 역시 중국의 기차는 침대칸이 여행하기에는 편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열차는 어느덧 종착역인 단동역에 다다랐다. 상쾌한 아침햇살이 피곤한 우리 일행을 맞아주었다. 요녕성 단동시는 중국의 국경도시중에서 가장 큰 도시이다. 단동역은 아침이었지만 많은 인파들과 택시들, 자동차들로 붐볐다. 단동역의 상징인 역광장의 마오쩌둥 동상은 흡사 북한의 평양에 있는 김일성광장의 김일성 동상과 포즈가 닮았다.
너무 이른 시간에 도착해서 우리 일행은 역 안에서 일단 조금 대기하면서 안내해주시는 분을 기다리기로 했다. 단동역은 북한 신의주시와 마주보고 있는 국경도시의 역답게 대부분의 안내문에 한글이 동시에 명기되어 있었다. 조선족 자치주나 자치현이 아니면서 공공건물에 한글이 동시에 쓰여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를 단동에서 안내해주실 분은 송선생님이셨다. 송선생님은 단동지역에서 오랫동안 한인회 활동을 하시며 입지를 탄탄히 굳히신 분이시고 지금은 기독교관련 일을 단동에서 하신다고 했다.
송선생님은 우리에게 북한과 무역하는 사람들이 많이 묵는 민박집을 소개해 주셨다. 단동에는 한국식 민박집이 많다. 대부분이 조선족이 운영하면서 한국식 숙식을 제공하며 요금도 호텔에 비해 저렴하다. 무엇보다 말이 통하기 때문에 유용한 정보를 민박집에서 얻기도 수월하다.
새벽기차를 타고 온 탓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우리는 민박집에 가서 쉬기로 했다. 민박집 주인은 예상대로 친절했고 밑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 두분이 계셨다. 우리는 휴식을 취하고 민박집 거실에 나와서 커피를 한잔했다. 민박집 거실에는 큰 티비가 있었고 계속해서 한국의 연속드라마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리고 온종일 드라마를 즐겁게 보고 있는 일하시는 한 아주머니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놀랍게도 그 아주머니는 평양에서 왔다고 했다. 북한을 탈북한 것은 아니고 현재 평양시 시민인데, 중국에 친척방문을 하러 몇 개월 동안 중국에 나와 있다고 했다. 현재 아들 2명과 딸 1명이 평양에서 고위공직에 있다고 했다. 자신은 중국에 친척방문을 한다고 공식적으로 중국으로 나와서 조선족이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일을 해주며 돈도 벌어 간다고 했다.
참고로, 북한에서는 아버지나 어머니쪽의 친척 중에 중국쪽 화교가 있으면 중국으로 친척방문이 허용된다. 대략 3개월 정도 중국방문이 허용되며, 한번 중국에 나왔다 오면 6개월 정도의 시간을 두고 다시 중국에 나갈 수 있다고 한다. 현재 북한에서 중국으로 친척방문을 나오는 경우는 거의 대다수가 중국에서 돈을 벌기위해서 나오고 있다. 따라서 중국 친척방문을 허가해주는 관공서에서는 뇌물을 받고 문건을 “잘” 만들어주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려진다.
평양에서 온 이 아주머니는 요즘 한국 드라마에 푹 빠져서 너무나 행복하다고 한다. 아주머니의 얼굴을 봐도 티비를 볼때는 환하게 미소를 지으시며 웃는 모습이 참 행복해 보였다. 우리는 아주머니와 얘기를 좀더 깊게 해보고 싶어서 드라마를 보는 아주머니 곁을 떠나지 않고 드라마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드라마가 끝나자 오히려 이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먼저 친절하게 얘기를 우리에게 시작하셨다. 아주머니는 한국드라마가 너무 재밌어서 한 편을 보면 계속 보게 된다고 하셨다. 우리가 한국 뉴스도 보시냐고 묻자, 아주머니는 한국 뉴스에서는 우리 조선(북한)을 너무 안좋게만 말해서 보고싶지 않다고 하셨다. 한국에서는 왜 그리 조선을 안좋게만 바라보느냐고 우리에게 따져 물으시기도 했다.
우리는 아주머니와 평양에 대한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평양은 현재 김일성 광장 옆에 창전거리를 멋지게 건설해서 무척이나 활기차게 변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한국전쟁때의 기억부터 해서 북한의 산업화 시절 얘기, 고난의 행군의 기억 등을 계속 말씀해 주셨다.
알고 보니 아주머니는 40년대 생으로 무척 나이가 많으셨다. 한국전쟁때 평양이 쑥대밭이 되어서 평양 근교 산에서 폭격을 피해가며 학교수업을 들었던 얘기와 50년대 전후복구시기와 천리마운동의 경험들을 우리에게 말해주었다. 우리는 북한역사의 산증인을 만난 것이다.
아주머니는 살아오면서 어렸을 때부터 참 많은 고생을 했다고 하시면서 그래도 90년대 고난의 행군때가 제일 어려웠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이제 조선도 강대국이 되었다고 힘주어 말하며 대륙간 탄도미사일을 가지고 되었으니 아무도 조선을 쉽게 여기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아주머니가 말한 대륙간 탄도미사일은 이번에 발사된 광명성 3호 2호기 인공위성을 일컫는 것이었다. 북한에서 조차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정작 북한사람인 아주머니는 대륙간 탄도미사일이 성공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동에서의 첫날을 그렇게 평양에서 온 아주머니와의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보내고 이튿날, 본격적으로 북한 국경지역 답사에 나서기로 했다.
단동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이지만 대부분이 관광지화가 잘 되어 있어서 압록강 유람선을 타고 북한의 신의주시 강변을 구경할 수 있다. 하지만 겨울철에는 관광객의 수가 뚝 끊겨 일정수의 관광객이 모여야 유람선을 운행한다고 했다. 주위를 둘러봐도 유람선을 타려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관광상품화된 압록강 유람선 대신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북한의 황금평지역을 답사하기로 했다.
단동에서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송선생님께서 차를 직접 내주어 중국인 운전기사와 함께 단동 외곽에 있는 황금평지역을 방문했다. 황금평은 북한과 중국이 공동개발하여 상업센터와 정보산업, 관광문화사업, 가공업 등 산업단지를 전문적으로 육성하기로 한 곳이다. 따라서 황금평은 북한 김정은시대의 개혁·개방의 상징으로 불리는 곳이기도 하다. 황금평은 단동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가는 내내 중국쪽에서는 아파트단지와 상가시설들이 많이 건설되고 있었으며, 최신식 실내체육관이 황금평 바로 앞에 지어져 있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황금평은 황량했다. 황금평 입구와 관리사무소 건물만 사람들이 오가고 있을 뿐 나머지 황금평에는 인적이 끊긴채 아무런 개발의 움직임도 포착되지 않았다. 황금평이 개발계획에 놓인 땅이라는 것은 황금평을 알리는 표지판과 대형 개발계획그림을 통해서만 알 수 있었다.
우리를 안내해준 중국인 운전기사는 황금평이 개발되면 중국도 덩달아 국경도시가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여 몇 년전부터 단동 외곽지역, 황금평에 가까운곳에 아파트 건설 붐이 일어나 아파트 가격이 상승했지만, 지금은 도로 아파트 가격이 계속 내리고 있으며 아파트를 분양받아도 이곳에 와서 살지를 않는다고 했다. 북한과의 개발사업이 지지부진하면서 중국쪽도 인프라 구축이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황금평을 둘러보고 다시 단동쪽으로 이동하면서 한창 건설중인 신압록강대교 건설현장을 답사했다. 2010년 착공되어 중국이 거액을 들여 짓고 있는 신압록강대교는 올해 말이면 공사가 끝나야 하지만 준공시기를 가늠하기 힘들다고 한다. 신압록강대교의 중국쪽에는 벌써부터 많은 아파트 단지들이 건설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곳 아파트 단지들에도 실제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어 보였다. 한마디로 텅 빈 아파트 단지인 것이다.
이렇게 황금평과 신압록강대교 등을 답사하고 느낀 것은, 실제로 북한측의 개혁, 개방의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북한이 마음만 먹으면 중국쪽에서 모든 인프라와 필요시설을 구축해주지만 실제로 언론이나 정부 당국끼리 발표한 공동개발은 진척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일행은 다시 단동시내로 돌아와 북한식당에서 식사를 하며 하루를 마무리 했다. 단동시내에는 북한에서 운영하는 북한식당이 몇 군데 있다. 우리는 압록강 강변에 있는 북한식당에 들러 맛있는 저녁을 먹고 식당을 둘러보았다. 겨울철이라 한국 관광객이 없어서 북한식당은 텅 비어 있었다. 북한에서 온 여종업원들도 그다지 신나게 일하는 것 같지가 않았다. 전체적으로 휑한 분위기에서 우리는 저녁식사를 했다.
다음날 우리 일행은 압록강 유람선을 타지 못한 아쉬움 대신에 단동으로부터 좀 더 위쪽에 위치한 보트 선착장에서 출발하여 북한쪽 국경을 답사할 수 있는 보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압록강은 중국과 북한의 국경이지만 강 중간에 국경선이 그어져 있는 것은 아니고 서로가 서로의 땅에 올라가지만 않으면 된다. 즉 압록강에는 자유롭게 중국과 북한의 배가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일행은 중국쪽 보트 선착장에서 보트를 타고 압록강 너머 북한땅 근처까지 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를 태운 보트는 빠른 속도로 북한쪽 땅으로 접근했다. 우리보트가 오는 것을 알았는지 어느새 북한 군인 한명이 강가로 뛰어 나와 우리를 향해 담배가 있는지를 물었다. 우리는 가지고 있던 한국담배 한 개를 던져줬는데, 담배를 받고 미소를 짓던 그 군인은 곧이어 돈이 있냐고 물었다. 우리는 중국돈 20위안을 던져 주었다. 그 군인은 매우 흡족해하며 우리에게 미소를 지었다. 사진촬영은 금지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담을 수 없었다는 것이 아쉬었다. 북한의 군대 역시 배급제가 붕괴되어 부대 자체적인 사업을 벌여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그러한 북한의 현실에 허름한 군복의 열악한 북한 군인을 직접 보니 실제로는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단동은 북한과의 무역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지는 곳이다. 대체로 단동에 있는 중국해관을 통해 북한과의 무역이 이루어진다. 따라서 중국해관 주변에는 북한쪽 무역일군들이 대량으로 구입해가는 물품들을 파는 도매상들이 매우 많이 있다. 우리가 둘러본 날은 마침 토요일이라 대부분의 도매상들이 문을 닫았지만, 상점들의 외부에 적혀있는 물품들 목록을 보면 현재 북한에서 어떤 상품들의 수요가 많은지를 금방 알 수 있다. 많은 상점들이 타이어, 자가발전기, 차량부품들을 다루고 있었다.
평일에는 중국해관쪽의 큰길에 북한에서 건너온 화물트럭들이 일렬로 줄을 서서 주차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를 안내해준 중국기사는 그 트럭들이 대부분 운전대가 오른쪽에 있다고 말해 주었다. 즉 일제 트럭차량인 것이다.
현재 단동에서 북한과의 무역, 사업을 하는 비율은 상당히 줄었다고 한다. 민박집에서 만난 북한무역전문 사장님은 우리에게 5.24조치 이후 이곳 단동에서의 북한과의 무역과 사업은 모두 멈춰서 기존에 북한과의 무역을 하던 사업가들이 다들 사업을 접고 떠났다고 알려줬다. 그러면서 5.24조치가 어서 해제되기를 바라며 그런 의미에서 단동에서 사업하는 사업가들은 모두가 다 대선때 특정후보에게 투표를 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대북사업의 일선에서 뛰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한국에서는 잘 체감하지 못했던 5.24조치의 영향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묵은 민박집에서는 압록강 건너 신의주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매우 경치가 좋은 건물이었다. 밤이 되자 화려한 단동의 빌딩, 아파트 조명과는 달리 바로 건너편의 신의주시는 그야말로 암흑으로 변했다. 신의주시 강변의 딱 한 건물이 조명을 건물 선에 따라 해놓았는데, 그 때문인지 더 을씨년스럽게 밤 풍경이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의 북한 국경답사는 마무리 되고 있었다.
(3편 끝)
중국이 남한처럼 헌신적으로 모든 여건을 조성해줄 것이라고 여겼다면 그런 착각도 없죠.
북한의 경제개발이 인접한 중국이나 남한에 의존하지 않으면 부지 하세월이라는 것을 모를리
없을 것입니다. 인프라 부터 전적으로 인접국에 의존하지 않으면 공단 하나 제대로 가동이 되지
않는 체제로는 인민의 삶을 개선할 능력이 전무한 지경이 된 것이지요.
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가 저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킨 절대 빈곤의 바닥점이었다면
그 때로 부터도 2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더구나 10년 동안은 남한에서 햇볕 정책으로 막대한 자금이 흘러들었고 그 여파로 개성공단이
벌어준 외화도 지금까지 정권 유지에 든든한 자금줄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희천 발전소 하나 제대로 건설하지 못해 부실 공사가 되고 여전히 북한은 깜깜한 밤을
보내고 있습니다.
남북한의 차이는 바로 그 자원을 어디에 썼느냐에서 극명하게 갈립니다.
60년대 경제개발 초기 단계의 우리는 한푼의 외화도 함부로 쓰기 아까워 당시 박대통령 부터
일반 국민에 이르기까지 내핍과 근검절약으로 공장과 고속도로를 건설했었습니다.
그로 부터 20년이 흘렀을 때 우리는 포니 자동차를 국산화하여 수출하는 단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북한은 지난 20년 동안 우리가 준 돈으로 무엇을 했습니까?
김정일이 꼬냑과 캐비아를 먹는 식탁을 걷어 치우고 인민들의 고통을 같이 아파하는 것을 보고
자란 자식이라면 김정은이라도 앞장서서 개혁을 추진하려 했을 겁니다.
보고 배운 것이라고는 핵과 미사일이 겁주는 무기로 알고 자란 애송이라 작금의 북한이 더욱
절망적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대로 또 10년이나 20년을 보낸다면 어떤 모습의 북한이 될런지 상상하기 조차 끔찍합니다.
북한 간부들이라는 게 인민들의 피를 빨아 인민과 동떨어진 안락한 삶을 사는 집단이라는 게 여실히 드러나는 글입니다.
우리도 북한 주민에 대해 환상에 빠져 있었지요.
많은 사람들이 원하던 장미빛통일은 없습니다. 포률리스트의 선동에 놀아날 듯 합니다.
다들 부상을 핑계로 빠지는데 누가 몸바쳐 게이에 임하겠습니까?
명예요? 그깟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