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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면적 관계와 직설화법 2012.06.26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
소개팅(blind date)에 적용되는 이 원리는 남북관계에도 통하는데, 2000년대 중반 통일운동이 급격히 그 동력을 상실한 까닭과도 관련이 있다.
정치권에서는 ‘국민적 합의’라는 표현을 쓴다. 대북지원과 유화적인 대북정책에 대한 국민의 지지와 동조를 뜻하는 말이다. 2000년 6․15공동선언 직후에는 국민적 합의 정도가 높았다. 퍼주기 논란도 적었다. 곧 다가올 통일의 감동이 물결치던 때였다.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민족적 동질성’이 돋보기로 확대한 것처럼 눈에 들어오던 때였다.
하지만 곧 실망의 계절이 찾아왔다. 2002년 제2차 연평해전으로 싸늘해진 마음은 2006년 북의 핵실험으로 굳게 닫혀갔다. 2003년 대구 유니버시아드경기대회에 응원단으로 참석한 북의 여대생들이 빗물에 젖은 현수막(김정일 위원장의 사진이 찍힌)을 보호하겠다며 철거했을 때에도 남쪽의 국민들은 당혹해 했다. 결국 남쪽 국민들 마음속에는 종양과도 같은 의혹이 커져갔다.
‘저들은 변하지 않는구나.’
북이 변해야 통일이 된다고 생각하던 남쪽 사람들로서는 당연한 반응이었다. 남쪽이 변해야 통일이 된다고 생각하던 북쪽 사람들도 아마 비슷한 실망감을 느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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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과감하게 역사를 긍정하는 차원에서, 2000년 이후 12년간의 남북관계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줬다고 치자. 그 교훈은 남과 북이 서로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 그러면서도 서로를 무척이나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민족21》 6월호에는 빠르게 진행되는 북 젊은 세대의 의식변화를 다룬 기사와 함께 ‘남북의 다름과 이해’라는 제목의 기획 기사를 실었다. 북은 변한다 해도 우리와 다른 바탕에서 다르게 변화한다. 그러므로 기본은 한결같다.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
북의 문화와 영화 전문가인 건국대 전영선 교수를 인터뷰하기 전, 《민족21》에 글을 보내주시는 문화기획자 김지은 씨를 만났다. 기획 기사와는 전혀 무관한 만남이었다. 하지만 전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그날의 만남은 중요한 이야깃거리가 됐다.
필자가 김지은 씨와 만난 이유는 불편함 때문이었다. 한 번도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관계여서 전화나 이메일로 원고를 부탁드릴 때마다 조심스럽고 힘들었다. 혹시 무례를 범하여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는 않을까 싶어 표현 하나하나에 신경을 기울였다. 친분이 있는 다른 필진(쌀집아저씨 장형준 선배 같은)에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내 말을 곡해하거나 오해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에 편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김지은 씨와 만나 점심을 먹은 다음부터는 훨씬 편하게 전화 통화를 나눌 수 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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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선 교수와의 인터뷰에서 김지은 씨를 만난 이야기가 나온 이유는 북쪽 사람들의 화법 때문이었다. 전 교수의 설명에 의하면 북쪽 사람들은 돌려서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듣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예의상 ‘전화 드리겠습니다.’고 하면 진짜로 연락을 할 줄 알고 전화를 기다린다. 또 ‘언제 한 번 찾아오십시오.’라는 말도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찾아간다. 우리가 의례적으로 의미 없이 건네는 무수한 말들, 북쪽 사람들은 그 말들의 진위여부를 알지 못해 당황스러워 한다고 한다.
그것은 주되게 맺고 있는 관계의 성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남쪽 사람들은 직접 대면하지 않는 사람들과 폭넓게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직접 대면보다는 간접 대면이 더 많다고도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북쪽 사람들의 생활은 비교적 대면적인 관계에 한정되어 있다. 대면적인 관계에서는 무례를 범할까 조심하는(필자가 김지은 씨에게 그러했듯) 의례적 화법보다는 직설적 화법이 자연스럽다. 자기비판과 상호비판, 총화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북쪽 사회에서 빙빙 돌려서 말하는 남쪽 사람들의 화법이 통용될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 막 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김이경 겨레하나 총장님의 「좌충우돌 북한경험담 (8) - 같은 말 다른 이해, 북의 ‘긍정적 검토’란?」을 봤다. 우연의 일치인지 북 사람들의 화법과 관련된 내용이었다. 총장님의 글을 읽으며 필자의 글과 내용적으로 배치되는 것은 아닌지 한참을 생각했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걱정스러웠다. 이거 혹시 내가 북을 잘 모르고 떠드는 것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오해와 억측으로 몇 년의 세월을 보냈다. 계속 만나가며 이해해도 한참을 이해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빨리 다시 만나서 ‘여전하시구만’ ‘조금 달라졌는데’ 라는 식의 농담을 주고받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는 들뜬 기대감보다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관용과 차분함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출처: http://blog.krhana.org/tag/전영선 교수 [우리겨레하나되기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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