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2 “비겁한 사회보다 정의로워진 사회가 훨씬 두렵다”
조철│문화 칼럼니스트 ()
승인 2013.12.31 14:52
<인천상륙작전> 펴낸 웹툰 작가 윤태호
광복이 되고, 전쟁이 터졌다. 정권이 여러 번 바뀌면서 세상은 변했다. 하지만 바뀌지 않은 게 있다. 사람이다. 여전히 ‘빨갱이’를 쫓고 있고, 여전히 ‘앞잡이’들이 설쳐댄다. 부정 축재와 이권 다툼을 하는 배부른 사람들과 그들에 치여 찍소리 못하고 사는 민중이 있다. 진보인가 했는데 퇴행하는 역사를 반복하고 있다.
인기 만화 <미생>과 <이끼>로 유명한 윤태호 작가가 새로 <인천상륙작전>을 기획한 배경이 이런 것인가 보다. 이 만화는 한국전쟁 등 우리 현대사를 다루고 있다. 윤 작가는 “한국전쟁과 분단 상황은 지금의 우리가 감당하고 있는 부조리의 시작이고 우리를 옥죄는 실체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13년 봄, 윤 작가는 직장인 만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고 평가받은 <미생>으로 주가를 올렸다. 주로 20~30대에게 호응을 얻었다. 그런 작가가 어떻게 ‘환갑’도 지난 소재를 선택했을까. 전쟁을 겪은 세대도 아닌데, 한국전쟁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입체적으로 분석해 창작까지 했을까. 아버지뻘 작가들이 많은 작품을 쏟아냈고, 이제는 그런 소재나 주제로는 만화 독자들에게 주목받기 힘들 텐데 말이다.
그런 우려가 나오기도 전에 <인천상륙작전>은 성공한 듯하다. 이미 웹툰 연재로 화제를 모으며 독자들의 호평을 기대 이상으로 받았다. 초반 연재 분량을 모아 두 권으로 출간했다. 8~9권짜리로 만들 계획이다.
ⓒ 시사저널 전영기한국전쟁은 지금도 진행 중
만화는 1945년 8·15 광복부터 시작한다. 해방 후 혼란기를 거쳐 한국전쟁 발발, 낙동강전투와 인천상륙작전을 거쳐 서울 수복까지 다룬다. 주인공은 철구네 가족이다. 늘 배가 고파도 씩씩한 철구, 글을 일찍 깨쳐 집안의 기대를 모았지만 시대에 적응하지 못한 철구 아버지, 일제강점기 때 일본 순사였다가 해방 이후 재빠르게 살길을 모색하는 삼촌…. 이들이 만나는 사람들과 맞닥뜨리는 상황들은 한국 현대사와 오버랩된다.
윤 작가는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살피기 위해 많은 자료 서적을 탐독했다. 역사적 사건을 재구성하면서 근거로 제시한 장면에 출처를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를 참고하고,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현대사 산책>을 들추고,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을 살폈다. 일본을 이해하려 이연식의 <조선을 떠나며>를 참고하고, 삼팔선을 알기 위해 신복룡의 <한국사 새로 보기>를 뒤졌다. 작가의 애쓴 흔적에 네티즌들은 댓글로 답례하기도 했다. 한때 교과과정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던 국사를 다시 배우는 기분이라며. 어떤 대목에서는 좌우 대결을 벌이듯 댓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한 네티즌은 “일본이 졌는데 모든 형벌은 우리가 받았네”라고 개탄하면서, “젠장 그만 싸워요. 또 그 꼴 날까 두렵소”라는 의미심장한 댓글을 남겼다. 당시와 지금의 상황이 다를 것 없다는 것이다.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자. 만화는 철구의 독백으로 시작한다. “먹을 것이 귀했다. 아니, 나에게만 귀했다. 아직 세상엔 많은 음식이 있었고, 내 것이 아닌 것뿐이었다.”
일제 앞잡이였던 철구 삼촌은 해방이 되자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만, 곧 살길을 찾아낸다. 자신을 알아보고 건들면 죽여버리면 된다는 식이다. 건들지 못할 사람이 되어 살인을 저지른 그는, 세상이 바뀌었다며 그를 제지하는 형에게 “세상만 바뀌었지, 사람은 그대로 아니냐고!”라고 소리친다.
앞으로는 일제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뒤로는 독립군을 지원했던 인물은 해방 후에도 갈팡질팡한다. 이 인물은 “좌파 세상이 될지, 우파 세상이 될지…. 어찌 되었건 힘 있는 놈이 장땡이다만…”이라며 어디 붙어야 할지를 고민한다.
이 만화의 메시지가 작품의 전반부에 응집돼 있다는 생각이 드는 대목들이다. 2013년은 정전협정 60주년이었다. ‘종전이 아니라 휴전’을 강조하는 목소리도 커진 한 해였다. 한국전쟁은 진행 중이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한 해였다. 때때로 남북 긴장이 고조됐고, 정치권에서는 사상 검증이 고개를 들었다. 이념 대립과 세대 갈등 등 현재 겪는 모든 문제의 시작이 해방 전후사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윤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을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다. 한국전쟁을 잊힌 과거 정도로 생각하는 젊은 독자들에게 한국전쟁은 아직 진행 중임을 보여줄 생각이다. 세대 간 갈등 역시 최근 나타난 새로운 사건이 아니라, 과거 청산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해방 이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것이란 점을 이야기하고 싶다.”
오늘의 대립과 갈등의 기원 탐구
이런 기획 의도는 철구 아버지의 대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해방을 상상이나 했었는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나무와 바위가 마땅하듯 일본인의 존재도 마땅했다. 그것이 사라진 지금 남은 것은 혼돈과 광기 그리고 불확실성이다. 모두가 비겁했던 사회보다 모두가 정의로워진 사회가 훨씬 두렵다. 천지가 욕망에 싸여 있다.”
‘빨갱이’란 말이 유행하며 서로를 불신하고 몰아세웠던 시절…. 눈치 빠르고 수완 좋은 이들은 한몫 챙겼지만 어려웠던 사람들은 하루하루 끼니 잇기가 힘들었다. 남북이 막히고 좌우가 갈린 시발점인 그 시절 사람들의 생활상과 지금 이 사회의 그늘진 모습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윤 작가는 2013년 12월12일 남극으로 떠났다. 여행 아니면 새 작품 구상 때문일 것이다. 작품을 위해 극한 상황까지 가보겠다는 것으로 읽힌다.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한 그에게 소재는 문제가 되지 않을 듯하다. 다만 그 전개가 아슬아슬해 보인다. 그가 사는 시대가 만화의 배경이 된 시대처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해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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