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4

[제1275호]‘우키시마호 사건’ 특별한 남·북·일 시민연대 : 이연식



[제1275호]‘우키시마호 사건’ 특별한 남·북·일 시민연대 : 표지이야기일반 : 표지이야기 : 뉴스 : 한겨레21



‘우키시마호 사건’ 특별한 남·북·일 시민연대
‘사건 현장과 기록은 일본에, 생환자와 유족은 한국에’ 있는
사건에 종합적으로 접근해온 시민들
제1275호
등록 : 2019-08-12 03:17 수정 : 2019-08-13 16:24


2017년 8월24일 일본 우키시마호순난자모임 회원들과 한국 쪽 관계자들이 희생자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우키시마호순난자모임 제공 동영상 갈무리
보아하니 한-일 관계가 심상치 않다. 게다가 며칠 뒤면 광복절이다. 이쯤 되면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대략 가늠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전화는 부재중 전화 메시지로 가득하다. 전자우편함도 어느새 모르는 사람들 편지로 채워진다. 보나 마나 방송사나 신문사에서 인터뷰나 원고를 요청하는 연락일 터이다. ‘삶의 지혜’가 절실해지는 순간이다.



지독한 인연, 우키시마호 사건



한국의 광복절, 일본의 종전기념일 언저리만 되면 해마다 반복되는 이러한 일상에 이제는 손발이 자동으로 반응한다. 일단 마음을 다스리고 차분히 내 전자우편 주소를 휴면계정으로 돌린다. 그리고 전화기 배터리를 빼거나 해외 로밍 서비스를 중지한다. 그런데 아뿔싸! 며칠 전에는 배터리를 빼려다가 엉겁결에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목소리가 상냥할수록, 서두가 장황할수록 긴장된다. 대개 그 말미에는 ‘독한 주문’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 몇 년 동안 필자에게는 ‘극한 인터뷰’ 요청이 한·일 양국 언론사에서 있었다. 일본군 ‘위안부’, 소녀상 설치와 철거, 사할린 한인 집단학살, 강제징용 피해자, 전범기업의 강제동원 피해자 배상 책임 등 하나같이 쉬운 문제가 없었다. 한·일 양국 언론사는 해당 사안과 관련해 결론과 보도 논조를 이미 정해둔 상황에서 의견을 물어왔다.

내게 그것은 마치 종교법정에 끌려온 자에게 ‘이단아’가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라며 성화와 십자가를 짓밟도록 강요한 중세 유럽이나 도쿠가와 막부 종교재판관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다. 종교법정은 ‘믿음’을 심판하는 곳이므로 이성이 개입될 여지가 없다. 정통과 이단 외에 제3의 선택지도 없는 영역이다.

앞에 열거한 사안들은 이미 학문과 이성의 영역을 넘어 한·일 양국의 내셔널리즘(국가주의)과 현실정치 논리가 전면적으로 지배하는 비슷한 층위의 문제가 아닌가. 연구자의 ‘거리두기’는 그저 ‘비겁한 변명’으로 들릴 터이다. 더욱이 한-일 관계가 험악해질수록 말이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광복절 언저리만 되면 유럽 대학들의 공동 연구에 참여했다. 연구자로서 한·일 양국의 종교재판을 피할 수 있는 제법 쓸 만한 카드였다.


그런데 올해는 어쩌다 전화를 받고야 말았다. 우키시마호 사건에 대해 <한겨레21>에 원고를 기고해달라는 전화였다. 우키시마호 사건이라면 결국 ‘우연인가’ ‘의도된 학살인가’라는 주장 가운데 하나를 택하기를 바랄 것이라는 생각에 후회가 막급했지만 이렇게 펜을 들었다.

내가 이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1990년대 중반이었다. 해방 후 외국 동포의 귀환과 미군정 정책에 관한 논문을 수집하다가 발견한 사료들을 읽어보니, 해방 직후 일본 아오모리에서 출항한 첫 귀환선이 ‘1945년 8월24일’ 한반도로 향하던 중 교토 마이즈루만에서 폭발해 ‘수천 명’이 몰살당했다는 내용이었다. 그 원인을 두고 미군이 전쟁 말기 일본 앞바다에 쏟아부었던 기뢰에 부딪혀 폭발했다는 설, 승선한 조선인들을 패전의 화풀이 대상으로 삼고자 일본 해군이 일부러 폭파시켰다는 설이 팽팽히 맞섰다. 양쪽 사료를 읽어봐도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어 논문에서는 제외한 사건이었다.



이끌려 간 조선인 동원 군사시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몇 년이 지나 어느 여행에서 이 사건의 현장을 마주하게 되었다. 1990년대 말 박사과정 진학 후 일본에서 유학 중이던 나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도쿄에서 홋카이도까지 무전여행을 했다. 홋카이도로 넘어가기 직전 아오모리 출신 일본인 후배가 혹시 여름에 시간 되면 자기 집에 들러 ‘집밥’이라도 함께 먹자던 말이 생각났다. 무전여행이라 몰골이 워낙 형편없어 잠시 망설이다가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후배 외에 후배 가족 모두가 역으로 마중을 나온 것이 아닌가. 민망함과 고마움이 교차했다.

그렇게 과분한 대접을 받고 다음날 아침 인사를 나누는 과정에서 후배 아버님이 만약 시간 여유가 있다면 함께 둘러볼 곳이 있다고 하셨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따라간 곳이 오마 철도, 기노푸 터널, 해군 비행장과 군함 잔교 등 오미나토 해군요항부가 아오모리현 시모키타반도 도처에 조선인을 동원해 구축한 군사시설 유적이었다. 그리고 답사 후 들른 곳은 아오모리현에서 평화운동을 주도해온 시민운동단체 시모키타문화연구소의 회장 사이토 사쿠지 선생의 자택이었다.

그분은 우키시마호 사건의 진상과 아오모리 지역 조선인 강제동원의 실상을 고발한 책 <아이고의 바다>(1992)의 저자였다. 이 책이 바로 1996년 처음으로 우키시마호 사건을 대중적으로 알린 <우키시마호 폭침사건 진상>(가람기획)의 일본어 원서이다. 알고 보니 후배의 어머님과 아버님도 이 시민모임의 일원이었다. 사이토 선생과는 같은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시민과 학생들에게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매개로 식민지배와 전쟁의 실상, 그리고 평화의 중요성을 실천해왔던 것이다.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왜 일본인 후배가 한국 근현대사를 전공하게 되었는지.

다음날 나는 후배와 가족분께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후배 부모님은 굳이 역까지 나오셔서 먹을 것을 한 보따리 안겨주시며 한 말씀을 보태셨다. “이군이 며칠 전 주일미군과 항공자위대 에어쇼를 구경했다고 말했던 그 미사와 비행장도 조선인들이 터를 닦은 곳인데 그곳까지 안내하지 못해 아쉽다”고.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인사를 드리고 홋카이도행 열차에 올라보니 내부가 온통 ‘도라에몽’ 캐릭터로 도배되어 있었다. 그 때문일까. 지금도 도라에몽 캐릭터만 보면 아오모리의 후배 가족 얼굴, 그리고 우키시마호 사건이 떠오른다.

그 후 이 사건을 다시 마주하게 된 것은 2004년이었다. 당시 나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국무총리 산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에서 해외 동원 실태를 조사하고 있었다. 전공 분야가 해방 직후 국외 한인과 조선 거류 일본인의 모국 귀환 과정 비교연구라서 자연스레 우키시마호 사건 진상 조사를 담당하게 되었다. 사건을 배당받은 첫날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 책상에 무려 3만 장 넘는 자료가 이관되어 놓여 있었다. 그저 아득할 따름이었다. 이쯤 되면 ‘독한 인연’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듯하다.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을 다룬 책(왼쪽). 2004년 11월10일 서울 광화문 새안빌딩에서 일제강점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현판식 모습. 한겨레 자료


노무현 정부, 건국 이후 처음 사건 조사



나는 이 과제를 담당하기 10년 전에 이미 이 사건은 좀처럼 해명할 수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이 사건을 밝히기 위해서는 미군 점령기 일본 인근해의 기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작성한 위성항법장치(GPS)로 기록된 소해도(바다에 설치한 기뢰 등 위험물 제거를 표시한 지도)와 사건 전후 우키시마호의 변침기록부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세월호 사건에서 보듯 우리 영해에서 한국인들이 벌인 사건의 진상조차 제대로 못 밝히고 있지 않은가. 반세기가 지난 시점에, 그것도 한·미·일 3국의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는 이 대규모 사건을 앞에 든 자료로 밝힌다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먼저 핵심 자료가 있는지 확인하기도 어렵거니와, 있다고 하더라도 사후에 파기했거나 영구히 ‘엠바고’(비보도)를 걸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 주체는 독자들의 상상에 맡긴다.

정부기관의 공적 활동으로서 조사에 임한다면 적어도 사건을 둘러싼 좀더 다양한 조건이라든가, 이 사건을 매개로 강제동원과 관련한 더 큰 사실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전망을 품고자 했다. 그래서 먼저 개인 연구자로서는 접근할 수 없는 자료를 한·일 학계와 시민운동단체, 그리고 국내외 유관기관의 도움을 얻어 최대한 수집하고자 했다.

가령 통일부를 통한 북한의 연구 성과와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의 제작 배경 등에 관한 정보 입수라든가, 해군사령부 기뢰전문가의 자문 등은 국가기관의 공적 조사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욱이 당시는 노무현 정부 시절이라 외교부와 국가정보원을 통해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외에 조선총련 관련 인사들로부터 폭넓은 자료를 입수할 수 있었다. 덕분에 이 사건이 의도적 폭살인지 단순한 사고였는지 밝힐 수는 없었으나, 이 사건을 둘러싼 큰 그림을 파악할 수 있었다.

사건 발생 후 재일조선인연맹(조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의 전신)은 1945년 9월10일 일본 정부에 진상 조사를 공식 요청했다. 이렇다 할 반응이 없자 1945년 12월 재차 연합국 총사령부에 조사를 요청한 사실이 확인됐다.(GHQ/SCAP RECORDS RG-331 BOX NO. 1765) 이에 따르면 맥아더 사령부는 이것을 전쟁범죄라는 맥락에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조련 쪽 근거 자료가 빈약해 이것을 ‘참고자료’ 정도로 간주하다가 결국 기각했다. 즉 일본 정부는 이 사건을 축소 은폐하려 했고, 미군 점령 당국은 관여하지 않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조련의 노력은 계속됐다. 1950년대 초 선체 인양이 시작되자 이들은 다시 진상 규명을 요구했고, 1970년대 신원이 확인된 유골 일부가 한국으로 봉환되자 승선자들이 동원됐던 일본 동북 지방 일대를 돌며 폭침설을 뒷받침할 증언을 수집했다. 그 후로도 도쿄 유텐지 사찰에 이관된 사망자 유골 봉환 문제를 2000년대까지 계속 제기했다.



아직 발간 못한 최종 보고서



한국 정부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출항지인 아오모리 지역의 시민단체 외에 침몰지 교토의 시민그룹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그리고 우키시마호 사건 소송을 주도한 ‘일본국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모임’이 큰 도움을 주었다.

우키시마호 선체 제2차 인양이 이루어진 1954년에 결성된 교토의 시민그룹은 지금까지 해마다 8월24일에 추도제를 지낸다. 1989년에는 <우키시마호 사건의 기록>을 발간했으며, 지방 유력지 <교토신문>에 이 사건을 기획 연재함으로써 일본인에게 사건의 진상을 알리려 노력했다. 특히 이들이 발굴한 우키시마호 사건 사몰자 명부, 당시 우키시마호의 급속한 변침 과정을 시사하는 ‘대해령’ 등의 원사료는 매우 귀중한 사료였다. 1995년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아시안 블루>가 제작되자, 촬영 협조는 물론이고 홍보에 주력한 것도 이들 단체였다.

아울러 재일동포 송두회를 중심으로 모인 시민단체 우키시마호 소송 지원단의 활동은 특기할 만하다. 아오야기 아쓰코 원고단 사무국장과 야마모토 세이타 원고 쪽 변호사는 사재까지 털어가며 재판 활동을 도왔다. 이들이 재판을 추진함으로써 출항지와 침몰지, 그리고 한국에서 따로 활동하던 한·일 시민운동단체가 비로소 연대할 수 있었다. 또한 10여 년에 걸친 소송 공방으로 일본 정부의 대응 논리를 파악할 수 있었기에 새로운 근거 자료 발굴과 반박을 위한 법리 검토를 치밀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이 재판은 우키시마호 사건뿐만 아니라 여타 전후 보상 소송을 촉발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또한 이 재판 과정은 조선인의 동원, 승선, 침몰, 사후 처리 등 파편화된 자료를 종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구 식민지 출신자들의 전후 보상 요구에 ‘국가 무답책’ ‘시효’ 등을 내세워 스스로 법리적 모순과 한계를 드러낸 일본 정부를 정면으로 공박한 소송이었다는 점에 큰 의의가 있다.

일본 시민운동 덕분에 1990년대 한국에서도 우키시마호폭침진상규명위원회, 우키시마호사건피해자배상추진위원회, 희생자 유족회 등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일본 시민단체가 접근하기 어려운 국내 생존자 조사를 통해 일본에서의 노동 실태와 처우, 승선일과 장소, 선내 승선 위치, 전체 승선 규모, 사고 후 구조 경위 등을 꼼꼼히 채록했고 개인 소장 자료를 대대적으로 수집했다. 이로써 “사건 현장과 기록은 일본에, 생환자와 유족은 한국에” 있는 기묘한 초국가적 사건에 종합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한·일 시민 연대가 이루어졌다.

그럼에도 정부 차원의 조사 성과는 2007년 위원회에서 발간한 <우키시마호 사건 소송자료집>과 2008년 우키시마호 사건 전문가 포럼 자료집, 그리고 국내 생존자 조사 과정에서 수집한 구술 자료가 전부다. 끝내 이 사건의 최종 보고서는 발간하지 못한 상황이다. 주지하듯이 이명박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사 관련 위원회의 활동이 크게 위축돼 후속 조사를 하지 못했다.



다시 국가가 나서야 할 때



국내 피해자 유족들은 지금도 주장한다. 우키시마호 사건 희생자들은 ‘1945년 8월15일’ 이후 피해자라는 이유로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다고. 아울러 이들은 왜 자신의 가족이 사망했는지 여전히 진상을 알 수 없다고. 이명박 정부 집권 시점에 멈추어버린 한국 정부의 대응이 아쉬울 따름이다. 보상이나 배상은커녕 가족의 죽음을 납득할 수 없는 생존자와 유족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한국 정부도 결은 다르지만 그 책임에서 무관할 수 없다. 다시 국가가 나서야 할 때다.



이연식 일본소피아대 외국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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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대표계정 입니다.
귀여운다람쥐
2019.08.14 04:44



1991년 8월 27일 야나이 순지(柳井俊二) 당시 외무성 조약국장은 참의원 예산위원회에서 `청구권협정은 한일 양국이 국가가 가지는 외교보호권을 서로 포기한 것`이라며 `개인 청구권 자체를 국내법적 의미로 소멸시킨 것이 아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다.

2000년 3월 14일 호소카와 일본 법무성 민사국장도 “야나이 전 외무성 조약국장이 일한 양국 정부가 국가로서 가지고 있는 외교권을 상호 포기한 것이며 개인의 청구권을 소멸시킨 것이 아니라고 답했는데 어떻냐”라고 묻는 후쿠시마 의원의 질문에 “잘 알고 있으며 저희도 바로 그대로라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965년 11월 5일 시이나 당시 외무대신은 “청구권협정 제2조 1항이 외교적 보호권의 포기뿐 아니라 개인 청구권마저 소멸시켰느냐”는 이시바시 의원의 질문에 “개인 청구권을 포기했다고 하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1993년 5월 26일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탄바 외무성 조약국장은 "청구권에 대해서는, 그 외교적 보호의 포기에 머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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