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학원침투 유학생간첩단 개인별 혐의사실 - 중앙일보
학원침투 유학생간첩단 개인별 혐의사실
[중앙일보] 입력 1985.09.09 00:00 | 종합 6면 지면보기
<포섭경위>
▲간첩 양동화는 79년8월 조선대 기계과2년재학시 문제학생으로 제적된 후 82년 8월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대학에 유학차 도미, 동대학 어학과정을 이수중 학업을 중단하고 84년9월 귀국했다.
▲82년8월 미국 웨스턴 일리노이 대학에 재학시 한국인 유학생 김성만·황대권및 현지교포학생 이창신등과 자주 만나 북괴서적 『김일성 주체사상』 『노동신문』등을 탐독, 좌경사상에 심취되어 사회주의혁명가로서 유학생이라는 부르좌적 계급의식을 청산한다는 명목하에 「민중의 적인 양키 학위는 필요없다」면서 83년2월 일리노이대학을 자퇴하고 김성만·황대권등과 같이 뉴욕으로 이주했다.
미국 유학생 간첩단 학원침투 사건|<◇유동화(27·조선대 제적)>
▲84년6월말 황대권의 안내로 이창신과 함께 뉴욕 베이사이드 스프링필드에 있는 반경부지 「해외한민보사」를 찾아가 발행인이며 재미북괴 공작책인 서정균(48)을 접촉한이래 포섭되어 집중교양받았다.
<입북 간첩교육및 공작임무>
▲84년8월23일 서정균과 함께 뉴욕 케네디공항을 출발, 오스트리아빈에서 북괴공작원으로부터 김영호 명의의 북괴공무여권을 제공받아 모스크바·북경을 경유, 동년8월29일 입북했다.
▲84년8월29일∼9월8일(11일간) 평양 대동강변 간첩밀봉초대소에서 세뇌교육을 받고 김일성·김정일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서를 작성, 제출한후 노동당에 입당했다.
▲귀환직전 북괴 노동당 고위간부와 공작담당부부장으로부터
△학생·노동자·농민을 선동, 모든 투쟁을 반미라는 고리에 묶어 미국타도에 앞장설것
△의식화 학생들을 포섭, 반정부·반미감정을 유도하여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할것
△해외유학 사무실을 개설하여 성분이 좋은 학생을 포섭, 미국·오스트리아 등지에 유학 보내 연계시킬것 등의 공작지령을 받고 동년9월8일 평양을 출발, 오스트리아빈에 있는 북괴공작아지트에서 북괴에서 파견된 연락부부부장으로부터 재차 간첩활동시의 주의사항과 공작금 6천달러를 받은후 입북기간중의 알리바이를 조작하기 위해 빈시내를 관광하면서 사진을 촬영하고 9월15일 동경을 경유, 국내에 잠입했다.
<광주지역 운동권학생 포섭등>
▲국내에 잠입한후 간첩 양동화는 포섭대상자로 북괴에 보고한 전남대의예과2년강용주(23·85년2월제적) 전남대의대2년 채영미(21·85년3월휴학), 전한성대 총학생회장안병곤(27)등에게 자신의 입북사실을 고지한후 「남한혁명전략전술」등을 집중교양, 간첩 하부망으로 포섭했다.
▲84년9월 서울 관악구에서 약국을 자영하는 약사 나인숙(25·백승혁과 일시 동거관계) 과 모 항공사 승무원 조봉심(24)을 재미북괴공작책 서정균과의 비밀연락 루트로 활용하여 서정균으로부터 지령서신과 북괴책자 『현대인의 철학』등 13종 31점을 받아 전남대 운동권 학생들의 좌경의식화 학습자료로 활용하라고 강용주에게 제공하고 강용주·안병곤등을 통해 입수한 「광주사태백서」「인식과 전략」외 대학가 불온유인물 총29종 32점및 자신이 직접 작성한 대북 암호보고문을 서정균에게 전달하였다.
<전남대시위방향, 투쟁방법등 배후조종>
▲84년11월 간첩 양동화는 포섭한 강용주에게 「전남대 학생운동을 반미·반정부투쟁으로 유도하고 전남대 투쟁조직을 대남혁명사업에 활용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확대할것」 「전남대 운동권 학생중 성분이 좋은 학생들로 지하조직을 만들어 결정적 시기에 대비, 역량을 축적할것」등의 지령을 주고, 강용주로부터
△총선방해및 반정부 유인물 제작살포 상황
△전남대 총학생회내에 싸움팀 조직인 「민주화 투쟁위원회」 결성상황등을 보고받아 전남대시위방향과 투쟁방법을 배후조종하였다.
<광주 미 문화원 폭파, 제2광주사태유발기도>
▲양동화는 85년3월 간첩 강용주에게 5·18 광주사태 발생일을 전후하여 전남대 삼민투, 오진투등 소위 싸움팀 요원 10명을 동원, 광주 미문화원을 폭파하고 조선대무기고를 습격,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봉기를 일으켜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토록 지시했다.
▲자신은 직접 광주 미문화원의 도서관출입을 가장하여 내부구조·경비배치상항등을 도면으로 작성, 폭파방법을 연구하고 사제폭탄 제조기술자를 물색하는 한편 조선대학군단의 무기보유실태와 경비상황등을 직접 탐지한후 강용주와 함께 무기탈취 계획으로
△강용주등 싸움팀 10명에게 대검사용법등을 1개월간 훈련시킨후 85년4월중순 어느날 상오 2∼3시사이에 학군단 당직실을 습격, 대검으로 경비병을 위협, 포박하고 당직장교로부터 무기고 열쇠를 빼앗아 M-16소총 5백정과 실탄을 탈취하여
△조선대학군단보유 2·5t 군용트럭에 탈취한 무기를 적재, 전남나주군다시면가운리에 있는 폐허옥상에 은닉하였다가
△D데이 직전 광주로 무기를 반입, 무장봉기를 일으켜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한다는 내용의 치밀한 계획을 수립, 이의 실행을 모색해 오다가 5월18일을 전후하여 경비가 강화되자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 일시연기하였다.
<◇강용주(23·전남대의예과 제적생)>
<포섭 경위및 임무지령>
▲82년3월 전남대 의예과에 진학후 기독학생회등에서 좌경의식화 학습을 받아 현사회 구조를 사회주의체제로 변혁시켜야한다고 망상해 오던중
▲84년10월 고교선배인 양동화로부터 자신을 가장 혁명성이 투철한 운동권 학생이라고 입북시 북위에 보고하였다는 말을 듣고 남한혁명대열에 동참하겠다고 결의를 표시했다.
▲간첩 양동화로부터 전남대내 삼민투등 소위 싸움팀에 직접 침투하여
△전남대 학생운동을 반미·반정부투쟁으로 유도할것
△전남대운동권 학생중 성분이 좋은 학생들을 엄선, 지하조직을 만들어 결정적 시기에 대비, 역량을 축적할것등의 지령을 받았다.
<전남대싸움팀 「삼민투」등을 조직, 각종 시위 주도>
▲간첩 강용주는 84년11월 하순 전남대총학생회내에 소위 싸움팀 조직인 「민주화투쟁위원화」 (약칭 민투·삼민투전신)를 결성, 동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총학생회대표 임모(22), 단과대학대표 박모(22), 서클대표 심모(21)등과 소위 전남대 싸움팀 지하지도부 (CT)를 구성했다.
▲84년12월부터 「민투」조직원 강기정 (22·현전남대 삼민투위원장)등과 수시 북괴방송을 청취, 사상학습을 하면서 6회에 걸쳐 총선방해등 폭력시위주동및 「5월싸움선언」 「미군철수」 등 불온유인물 5만여장을 제작·살포하는등 전남대총학생회의 시위방향을 결정, 직접지휘했다.
▲85년2월 전남대에서 학점미달로 제적된 후에도 간첩 양동화의 지령에 따라 계속 전남대학생운동지하지도부에서 활동하던중 동년3월 「민투」가 「삼민투」로 확대 개편되어 조직이 강화되자 삼민투위원장 강기정, 오진투위원장 한경(23·전남대사범대4년·국가보안법위반등으로 검찰에 구속)등 극렬 운동권 학생들과 수시 회합, 전남대학생시위 방향을 논의하는등 학원가 폭력시위를 주도했다.
<혁명전위지하서클조직, 학습지도>
▲85년3월 중순 혁명전위세력 확대를 위해 전남대 운동권학생중 사상성이 강한 삼민투위원장 강기정, 전남대 의대 본과2년 김영찬(26), 전남대 농대4년 동근식(25), 전남대인사대4년 김성칠(24), 전남대 인사대4년 오미숙 (21·가명) 등을 규합, 지하이념 서클 「UNDER I」, 「UNDER II」를 결성했다.
▲85년3월 간첩 양동화와 5·18광주사태 발생일을 전후하여 전남대 삼민투등 운동권 학생들을 동원, 광주 미문화원을 폭파하고 조선대 무기고를 습격, 탈취하여 무장봉기로 제2의 광주사태를 유발키로 모의한 후 양동화·채영미등과 함께 상경, 청계천 일대 서점을 돌아다니며 폭발물 제조관계 서적을 찾는 한편 사제폭탄 제조기술자를 물색해 오다가
▲같은해 5월20일 고려대 삼민투위원장 허인회가 『서울에서는 미문화원을 점거 농성한다. 광주에서도 문화원을 점거 농성하라』고 종용하였다는 말을 강기정으로부터 전해듣고 이를 양동화에게 보고후 광주 미문화원을 화염병·최루탄등으로 방화타격키로 결정하고 강기정·한경등 전남대 극렬운동권학생들을 동원, 전남대 대강당옆 쓰레기장을 광주 미문화원 건물로 가정하여 방화예행연습을 실시했다.
▲85년6월 간첩 양동화가 검거되자 애인 채영미와 함께 서울로 도피하여 채영미를 성동구송정동에 있는 J봉제공장에 공원으로 위장취업시킨후 학원·노동 연대투쟁을 전개하기위해 노동자들을 선동, 노사분규를 일으키라고 지시하는등 암약하였다.
<◇김성만(28·연세대출신)>
<포섭 경위>
▲간첩 김성만은 75년9월 연세대물리학과에 재학시 지하학습서클 「부름독서회」를 조직하여 후배들의 의식화 학습을 지도하다가 81년2월 연세대를 졸업후 82년6월 도미, 미국웨스턴 일리노이대학원 정치학과에 유학타 학업을 중도 포기하고 83년7월 귀국했다.
▲82년8월 미국웨스턴 일리노이대학원에 재학시 한국인유학생 양동화·황대권및 재미교포학생 이창신등과 수시 만나 북괴책자·노동신문등을 탐독, 반미민족해방을 위한 민중혁명투쟁을 전개하기로 모의한후
▲반정부지 「해외한민보」를 구독하면서 반한논조에 공감, 동신문발행인인 재미북괴공작책 서정균에게 국내학생들의 좌경화실태를 적은 서신을 발송한것을 계기로 상호연계되어 수시 서정균집에서 「남한혁명전략전술」 「조직방법」등을 집중교육받고 포섭됐다.
<헝가리 북괴공관수용 간첩교육및 임무지령>
▲83년6월21일 재미북괴공작책 서정균의 지령에 따라 시카고 오헤어 공항을 출발, 오스트리아 빈에서 북괴공작원과 접선, 그로부터 김영길명의의 북괴공무여권을 제공받아 6월25일 헝가리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하여 그곳 북괴대사관에 4일간 수용되어
△세뇌교양과 「남조선 혁명전략전술」 「조직이론」등을 집중 교육받은후
△운동권학생들에게 의식화학습을 시켜 활동기반을 구축하고 반미유인물을 제작·배포하여 반미투쟁을 선동할것
△노동자 계층에 침투, 활동영역을 확대할것
△1년에 한번씩 해외에 나와 남조선정세및 활동사항을 보고할것등의 지령과 공작금 미화 5천달러를 받고 서독 프랑크푸르트에서 간첩교육기간중의 알리바이를 조작한 후 동년 7월4일 김포공항으로 잠입했다.
<서울지역 운동권학생포섭, 반미용공유인물 제작배포>
▲국내에 잠입한 간첩 김성만은 자신이 유학전 조직, 지도해온 의식화학습서클 「부름I」 「부름II」(조국의 부름을 받는다는 뜻) 회원중 좌경성향이 높은 정금택(23·국민대대학원1년), 김창규 (21·성균관대4년)를 선정, 그들에게 영문판 북괴선전책자에서 복사해온「주체사상」등을 교재로 사용하여
△미국에 예속된 한국현실의 제모순
△학생및 노동운동의 필요성과 투쟁방향
△반미민족해방을 위한 민족혁명의 당위성
△남한혁명 전략전술등을 집중교양, 포섭했다.
▲84년4월 서울동대문구용두동 소재 박모씨집의 방1칸을 월세로 빌어 정금택·김창규와 같이 자취생을 가장하여, 불온유인물 「예속과함성」 (84페이지) 3백권을 「전민중」명의로 제작하여 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등 3개대학 이념서클10여개에 20부썩 배포했다.
▲연세대·성균관대 등의 운동권학생들이 「예속과 함성」 내용을 발췌, 대자보로 게시하는등 좋은반응을 보이자 84년8월 정금택·김창규와 함께 비밀아지트를 서울마포구창전동으로 옮겨 1차배포한 「예속과 함성」내용에 6·25당시 미군포로심문기록인 영문책자 『그들자신의 입을 통해 들어본다』 내용중 미군들의 만행부분만을 발췌, 추가하여 「예속과 함성II」 (1백31페이지) 5백권을 제작, 서울대·연세대·고려대·성균관대·이화여대·동국대등 서울지역 6개대학과 부산대·전남대등에 배포했다.
<동베를린 북괴초대소에 수용, 간첩교육및 임무지령>▲84년9월중순 독일 괴테어학원의 기초 독일어과정 연수를 빙자하여 여권을 발급받은후 서정균에게『11월10일 서독도착 예정』 내용의 암호서신을 작성, 발송했다.
▲같은해 11월10일 출국하여 서독에서 서정균을 접선, 그와함께 오스트리아를 경유, 동베를린교외에 있는 북괴공작 아지트에 도착, 5일간 수용되어 북괴에서 직접 파견된 노동당연락부 부부장에게 김일성·김정일에게 영원히 충성할것을 맹세하고 북괴노동당에 입당했다.
▲간첩교육이 끝날무렵 북괴노동당 연락부 부부장으로부터
△학원가에 반미데모를 선동하고 미군에 테러를 가하는등 미군철수분위기를 조성할것
△의식화된 인물을 독일에 유학시켜 중간연락거점을 구축할것
△장래성있는 고등학생을 의식화시킨후 육사에 입교시켜 군부내 혁명일꾼으로 양성할것등의 공작지령과 공작금 미화1만달러를 받아 스위스를 경유, 같은해 12월20일 김포공항으로 잠입했다.
<반미 전위조직 「전민중」 결성, 반미유인물 대량제작 기도>▲간첩 김성만은 국내잠입후 정금택·김창규·동국대생 이원중(22)·성대생 최룡식(22·가명)등과 반미전위조직인 「전민중」을 결성하고 동베를린에서 북괴노동당 연락부부부장으로부터 교양받은 「혁명의 주공방향」을 유인물로 제작하여 이를 교재로 그들 조직원에게
△중심고리라는 것은 하나의 고리를 풀면 나머지 고리가 연쇄적으로 풀리는 주된 고리를 말한다
△남한에서 공격을 집중해야할 중심고리는 미제국주의다
△그러나 현단계에서 혁명의 기본계급인 프롤레타리아는 물론 학생·지식인까지도 혁명투쟁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민중」으로, 「사회주의혁명」을 「반미민족해방혁명」이라는 말로 각각 위장해서 사용해야 한다는등 혁명이론을 중점교육하고 연세대동창 김형걸(29·금융회사원)에게는 생활비와 유학자금 지원등을 미끼로 서독베를린대학에 유학수속을 하도록하여 북괴와의 재독연락거점을 확보코자 기도하였다.
▲85년5월 서울 미문화원점거농성사건이 발생하자 북괴공작금으로 전동메모리타자기·복사기·수동식윤전등사기 각 1대및 갱지 17만장을 3백만원에 구입하여 새로 확보한 서울종로구청운동의 비밀아지트로 운반, 「전민중」명의로「우리는 미문화원점거농성을 뜨거운 가슴으로 지지한다」는 제하의 미문화원농성지지및 미군철수를 주장하는 내용의 반미유인물을 다량 제작하는등 암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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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대권(30·서울대출신·미국유학생)>
<포섭된 경위>
▲간첩 황대권은 서울대농대재학때부터 지하이념서클 「 독서회」를 결성, 후배들에게 좌경의식학·학습지도등 혁명의식을 고취하다가 82년2월 서울대농대를 졸업한후 82년8월 미국웨스턴 일리노이대학원에 유학하였으나 83년2월 동대학원을 중퇴하고 83년9월 뉴욕소재 뉴 스쿨 사회과대학원으로 옮겨 정치학과 2년에 재학중인 자로 미국 웨스턴일러노이대학원에 재학시 한국인 유학생 양동화·김성만및 재미교포학생 이창신등과 수시접촉, 북괴책자및 노동신문등을 탐독하던중 83년10월 정기구독하던 「해외한민보」의 반한 친북논조에 공감, 동신문발행인이며 재미 북괴공작책인 서정균에게 자진 접근하여 그로부터 인혁당사건·통혁당사건·남민전사건등 남한의 지하혁명운동 양상과 흐름에 대한 교양및 국내의 좌경 지하운동 노력과 북괴와의 통일전선형성의 필요성등을 집중 교양받고 포섭됐다.
<미국현지간첩 교육및 임무지령>
▲83년12월 뉴욕베이사이드 스프링필드에 있는 서정균집에서『조선의 별』등 40여편의 북괴선전영화를 관람하고, 『혁명을 위하여』등 50여권의 북괴책자를 탐독하는 한편 서정균으로부터 남한혁명을 위한 전략전술및 투쟁방법으로
△무인포스트 운용및 지하당 조직방법
△당원선정요령·당지도·검열및 접선방법
△유인물살포·벽보·낙서·플래카드등 대중선전방법
△시위·방화·파괴및 화염병 제조 사용법
△파업·태업요령및 납치, 암살방법
△주요 건물 점거농성 요령
△시민군 조직및 편성요령등 도시 무장봉기에 필요한 폭력투쟁공작교육을 받았다.
▲84년12월 서정균으로부터
△방학을 이용, 귀국하여 국내 지하혁명조직을 점검 지도할것
△통혁당·남민전과 같은 지하혁명조직 결성의 가능성을 탐지할것
△국내 지하서클의 동향을 파악·보고할것
△학생들의 의식화 학습자료와 최신판 연감을 수집할것등의 간첩활동지령을 받고 83년12월17일 김포공항으로 잠입했다.
<새로운 지하혁명조직 가능성 탐지등 활동>
▲국내에 잠입한 간첩 황대권은 유학전 자신이 조직한 지하이념서클 「 」 독서회원들을 접촉하여 서클운용실태와 투쟁방법, 새로운 지하혁명조직 가능성을 탐지하고「 」회원중 이창훈 (25·가명·S대4년)에게
△불온유인물 살포, 공공장소 스티커부착, 벽보및 플래카드설치방법
△무인포스트 설치및 운용방법등을 교육시킨후 이미 국내에서 간첩활동중인 김성만과 이창훈간에 공중전화박스의 전화번호부를 무인포스트로 이용, 각종 정보와 의식화학습자료를 상호교환토록 연결시켰다.
▲서울시내 각 서점과 이창훈등을 통해 학원가 불온유인물 「야학비판」「삼민」「도시빈민 실태조사서」 등 30여점을 수집, 84년1월10일 도미하여 서정균에게 제공했다.
<지하혁명 잡지 발간, 국내배포기도등 활동>
▲간첩 황대권은 서정균과 함께 남북통일논리의 허구성, 반미·반정부 의식 고취등을 내용으로한 지하혁명 잡지를 발간, 국내운동조직에 배포키로 모의하고 84년8월 국내에서 수집해간 학원가 불온인쇄물「삼민」을 「해외한민보」에 게재한후「한국민중민주주의 민족혁명론」으로 제목을 바꾸어 단행본 (28페이지)으로 발간, 비밀연락조직인 조봉심을 통해 간첩 양동화에게 전달했다.
▲84년10월 「해외한민보」에 게재된 미국노포크대학 김모교수의 북한방문기중 「북한의 통일론이 지나치게 교조적」이라는 등 북한의 통일론을 비판하는 내용을 읽고 한국의 단계론적 통일론을 허구로 매도하고 북괴통일론을 찬양하는 내용의 반박문을 작성, 익명으로 「해외한민보」에 게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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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원침투 유학생간첩단 개인별 혐의사실 - 중앙일보 198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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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미(21·전남대의대휴학생)>
▲82년3월 전남대의예과에 입학, 교내지하서클「독서잔디」에 가입하여 현실비판이념서적을 탐독, 학습하면서 반정부의식을 포지, 학생운동을 하다가 제적되거나 구속되는것은 삶의 일보전진이라고 망상하고 학생시위에 적극 가담해왔다.
▲84년9월 지하학생운동을 하던 애인 강용주와 함께 이념서클 「농촌의료연구회」를 조직하고 후배들에게 좌경의식화학습을 지도하다가 84년12월 강용주의 지시로 전남대자연과학대학 학생운동조직을 맡은후 좌경이념서클을 지도하면서 총선반대유인물 살포및 「5·18진상규명」 가두시위등을 적극전개했다.
▲85년3월 강용주로부터 「북한의 사상적 지도와 김일성주체사상을 접목시켜 이땅에 사회주의혁명을 달성해야 한다」는 등의 사상세뇌교양을 받고 고무되어 강용주의 소개로 간첩 양동화를 접선, 그로부터 북괴선전교양과 함께 공작지령을 받고 사회주의 혁명투쟁에 헌신할것을 결의했다.
▲그후 채영미는 85년4월22일 간첩 양동화와 재미북괴공작조직간에 연락을 맡고 있는 나인숙을 소개받아 비밀접선방법등을 상호 약정하고 불온유인물인 「84민중언론 총목록」등 4점을 수집, 나인숙을 통해 재미 북괴공작조직에 전달하였으며
▲간첩 채영미가 피검되자 강용주와 함께 서울로 잠입, 학력을 속여 서울성동구에 있는 J봉제공장에 여공으로 위장취업후 학원·노동연대투쟁을 위해 여공을 대상으로 의식화 교육을 기도하였다.
<◇안병곤(27·한성대4년)>
▲78년3월한성대무역학과에 입학후 총학생회장에 선출되어 각종 학원시위를 주동하다 동교 4년 재학중 휴학하고 광주지역 운동권학생들이 자주 출입하는 카페「꾜두메」 종업원으로 종사하면서 고교후배인 강용주등과 수시 의식화학습토론을 통해 사상무장을 다져오다가 85년2월 동대학 야간부4학년에 복학했다.
▲84년9월20일 고교동창인 간첩양동화에게 포섭되어
△양동화가 입북시받은 공작금중 1천3백달러를 한화 1백14만원으로 환전, 제공하고
△자기 명의로 국민은행 광주지점예금구좌를 개설, 양동화에게 제공해 양동화로 하여금 재미 북괴공작책 서정균으로부터 공작금을 받을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하고
△양동화의 지시로 「신민당 학원사태 조사보고서」등 유인물 5종13점을 수집, 제공했다.
▲85년5월13일 한성대학의 광주사태 추모제때 양동화로부터 제공받은 「광주사태백서」를 인용하여 과격한 반미·반정부 결의문을 작성, 한성대초대총학생회장 자격으로 낭독하여 반미·반정부 시위를 선동했다.
<◇김형걸(29·연세대출신·금융회사원)>
▲77년1월 연세대정외과 2년재학시 김성만의 권유로 지하이념서클 「얼골회」에가입, 의식화학습을 통해 우리사회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체제로 변혁되어야 한다고 망상하여 오던중
▲83년9월이후 미국에서 귀국한 간첩 김성만으로부터 남한사회주의혁명의 필연성등 사상 세뇌교육을 받고 김일성주체 사상에 입각한 혁명 투쟁에 동참할것을 결의, 포섭됨.
▲그후 85년1월 김성만으로부터『유학자금과 국내가족 생계비를 부담할테니 독일에 유학하여 북한의 혁명지원자금및 좌경의식화 학습자료 반입역할을 담당하라』는 지시를 받고
△김성만의 주선으로 서독베를린대학등 4개대학의 입학안내장을 받아 유학수속을 밟는 한편
△자신이 군복무시 지득한 ○○사단의 위치·편제·병력및 장비등 군사기밀을 누설했다.
<◇정금택(23·국민대경영대학원1년)>
▲80년11월고교재학시 과외교사 김성만이 조직한이념서클 「부름독서회」에 가입, 좌경의식화 교육을 받은후, 『핵심요원 1명을 선정, 점조직 형태로 의식화 학습을 지도하라』는 김성만의 지시에 따라 「부름독서회」 회원인 김창규를 선정하여 종속이론, 사회주의 도래의 필연성등을 지도하다가
▲83년7월 미국에서 귀국한 간첩 김성만으로부터 북괴 선전교양과 사상세뇌교육을 받고 포섭되어
△84년4월 간첩 김성만·김창규등과 반미 전위조직 「전민중」을 결성하고
△김성만·김창규등과 함께 서울용두동및 창전동 비밀아지트등지에서 반미용공유인물 『예속과 함성』 8백권을 제작, 서울 지역 6개대학과 부산대·전남대등에 배포하였으며
▲84년12월 동베를린에서 간첩교육을 받고 귀국한 김성만으로부터
△「인전대」 조직이론과 도시무장봉기에 의한 남한혁명전술
△대남혁명지침서인 「혁명의 주공방향」 등을 집중교육받고
▲85년5월 서울미문화원 점거 농성사건이 발생하자 간첩 김성만·김창규등과 반미유인물을 제작·살포키로 모의하고 서울청운동 비밀아지트에서 「미문화원점거지지」내용의 반미유인물을 대량제작했다.
<◇김창규(21·성균관대4년)>
▲82년2월 성균관대한국철학과에 입학후 정금택의 권유로 지하이념서클 「부름독서회」 에 가입, 의식화교육을 받고 고무되어 독자적으로 「씨 독서회」를 조직, 좌경의식화 학습을 지도하다가
▲83년7월 미국에서 귀국한 간첩 김성만으로부터 북괴및 사회주의 우월성 선전교양을 받고 포섭되어
▲84년4월 간첩 김성만·정금택등과 반미 전위조직 「전민중」을 결성하고 「예속과 함성」 제하의 반미용공유인물 8백권을 제작, 서울및 지방등 8개대학에 배포하고
▲84년12월 김성만의 지시로 「씨 독서회」 회원인 이원중 (22), 최용식 (23·가명)을 「전민중」에 가입시켜 노동운동권과의 연결및 「예속과 함성」책자를 배포케 하는등 실천적투쟁을 지도하던 중
▲85년5월 서울미문화원 점거농성사건이 발생하자 간첩 김성만·정금택등과 반미유인물을 제작 살포키로 모의하고 「미문학원 점거지지」 내용의 반미유인물을 대량 제작했다.
<◇조봉심(35·모항공사승무원)>
▲83년2월 이화녀대 약학과를 졸업한후 모 항공사에 입사하여 승무원으로 종사하는 자로서
▲84년9월23일 대학선배인 나인숙의 부탁으로 양동화의 서신을 「해외한민보」 발행인 서정균에게 전달한것을 계기로 재미간첩 백승혁·이창신등과 밀착되어 그들이 제공한 자본주의 모순을 풍자한 모노드라머 『각설이타령』테이프를 청취하고 북괴선전 비디오 『오! 광주』를 관람하는등 북괴우월성 선전교양을 받고 동조, 적극 협조키로 한후
▲84년11월∼85년5월간 5차에 걸쳐
△재미 북괴공작책 서정균으로부터 지령서신 2통, 북괴책자 『현대인의 철학』등 13종 31점을 받아 나인숙을 통해 간첩 양동화에게 전달하고
△간첩 양동화가 서정균에게 보내는 대북보고용 암호서신 2통, 학원가 불온유인물 「고문백서」등 29종 32점을 서정균에게 전달했다.
<◇김재민(26·순천공전1년)>
▲84년9월20일 광주D고교선배인 간첩 양동화로 부터 입북사실및 북괴선전교양을 받고 양동화의 신분이 노출되면 자신의 집을 피신처로 제공할 것을 약속, 피신시 비상금조로 4만원을 수수.
▲85년5월 양동화로부터 미국에 유학, 재미공작조직과 연계활동할것을 지시받고 성적증명서를 위조하여 미국인디애나대학에 유학코자 수속중 점거됐다.
<◇이원중(22·동국대3년)>
▲83년3월 김창규가 조직지도하던 이념서클 「씨 독서회」에 가입, 의식화 학습을 받고 고무되어 노동자·농민의 투쟁의식을 선동하는 불온유인물 20부를 제작, 배포하는등 활동해오다가
▲84년12윌 김창규의 권유로 반미전위조직인 「전민중」에 가입후 김창규의 지시에 따라 반미 용공유인물 『예속과 함성II』 책자를 H대교수 이모와 이화여대생들에게 배포하였으며
▲85년5월 간첩 김성만등 「전민중」 회원들과 학생들에게 반미의식을 확산시킬 목적으로 『우리는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뜨거운 가슴으로 지지한다』는 제하의 반미유인물 7천장을 등사, 제작했다.
<◇김성칠(24·전남대3년)>
▲80년3월 전남대 독어독문학과에 입학후 공산주의서적 「철학문답」 「변증법적유물론」등을 탐독,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84년2월 일본 동경소재 대월서점에 「국가와 혁명」등 공산주의서적 12권을 주문, 반입하여 운동권 학생들의 좌경의식화 자료로 강용주·동근직에게 제공하고
▲운동권 학생들의 공산주의사상무장을 위한 자료로 제공하기 위해 다시 84년6월및 85년4월 2차에 걸쳐 대월서점과 신일본출판사에 「마르크스경제학 강좌」 등 공산주의서적 1백17권을 주문했다.
▲85년6월22일에는 공산주의이론을 행동으로 실천키 위해
△전남대 운동권학생 동근식등 8명을 규합, 지하서클 「민주과학학습회」를 조직하고
△광주시 월산동 학습아지트에서 서클회원들에게 「공산당선언」 등 공산주의서적을 교재로 사상학습 지도를 했다.
<◇김영찬(26·전남대의대본과2년)>
▲80년3월 전남대의대내 지하이념서클인 「사회과학독서회」에 가입하여 좌경의식화학습을 하는 한편 10여차례에 걸쳐 북괴방송을 청취, 북괴의 선전선동에 공감하고
▲83년12월30일 광주미문화원에 단신난입하여 기물을 파괴하고 반미구호를 외치는등 반미투쟁을 전개해 오던중
▲85년3월 간첩 강용주가 조직한 김일성주체사상 학습지하서클에 가입, 강용주로부터 광주미문화원을 방화하기 위해 문화원내부및 주변약도·경비상황등을 탐지하라는 지시를 받고 직접현장을 답사, 상새한 약도를 작성, 제공했다.
<◇동근식(25·전남대4년)>
▲85년4월하순 강용주가 조직한 김일성주체사상학습 지하서클에 가입, 북괴책자 『현대인의 철학』 『미국과 한국』 등을 탐독하고 사상적으로 세뇌되어
△그후북괴 「통혁당목소리」 방송을 10여차례 청취, 사상무강을 다지면서
△전남대생 김성칠(24)로부터 『공산당선언』 『철학문답』 등 공산주의서적 9권을 받아 복사제본하여 서클회원들에게 학습교재로 제공하고
△85년6월22일 김성칠이 조직한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습서클 「민주과학학습회」에 가입하여 『칼 마르크스』 『포이에르 바하론』등 공산주의책자를 교재로 좌경의식화 학습했다.
<◇강기정(21·전남대4년)>
▲82년3월 전남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후 전남대 삼민투위원장으로 선출되어 신민당사 점거농성등 각종 학원시위를 주동하다 검거되어 현재 광주교드소에 수감중인 자로
▲84년11월 광주시지산동 자취방에서 전남대운동권학생 강용주등과 전남대 「민주화투쟁워원회 (민투)」를 결성, 강용주를 위원장으로 선출하고, 동민투조직원으로서 「총선반대」등 시위와 반정부유인물을 살포하는등 전남대생들의 시위를 주도하고
▲85년3월 민투조직을 삼민투로 확대 개편하여 전남대 삼민투위원장으로 선출된 후 고려대 총학생회장겸 삼민투위원장 허인회의 지원을 받아 「양키들아 물러가라」 「미제국주의 타도」 등 반미유인물을 제작, 살포하고 경찰관납치·감금·폭행및 시위진압경찰관에 화염병 투척등 10여차례 극렬한 폭력시위를 주동했다.
△같은해 5월30일 22시쯤 강용주·한경등과 전남대대강당옆 쓰레기장을 광주미문화원건물로 가정, 화염병투척등 방화예행연습까지 실시하였으나
△5월31일 한경으로부터 광주미문화원 타격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결행일자를 보류했다.
<◇오미숙(21·가명·전남대4년)>
▲84년8월부터 강기정의 소개로 강용주와 수시 만나 그로부터 북괴우월성을 선전교양받고 「고문백서」 「인식과 전략」 등 학원가 불온유인물 7종7점을 수집, 강용주에게 제공하고
▲85년4월하순 강용주가 조직한 김일성주체사상 학습지하서클에 가입하여 의식화학습을 통해 사상무장을 다지면서 전남대인문사회과학대학생을 대상으로 좌경의식화학습을 지도했다.
<서독 유학생 간첩 학원침투 사건>
<◇안상근 (35·재독교포)>
▲82년6월 서독에서 반정부단체인 「기독교 통일연합회」 (약칭기통회) 회계직을 맡아 반정부활동중이던 모 김영희(56·간호원출신)의 초청으로 서독을 방문, 현지 반체제 인물들과 연계되어 82년9윌 이들의 소개로 오스트리아빈주재 북괴공관을 찾아가 북괴공작책 백모과장으로부터 대남적화혁명의 필요성등 세뇌교양을 받고 포섭되어 『서독에 망명, 대남혁명사업에 동참하라』는 지령을 받고 서독으로 귀환한후 82년10월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반정부지 「우리나라」의 편집국장으로 취업, 동지에 북괴선전및 반정부 내용의 기사를 게재, 재독교포사회에 반정부의식을 주입시키는등 간첩활동을 하면서 82년12월 북괴의 지령에 따라 서독정부에 정치망명을 신청, 반체제 인물들의 신원보증을 받아 서독영주권을 취득하고
▲84년7월및 84년10월 2차에 걸쳐 오스트리아 북괴공관에서 안명철명의의 북괴공무여권을 발급받은후 동베를린에 들어가 그곳 북괴공작아지트에 15일간 수용되어 있으면서 사상교양등을 집중적으로 받은후 임무및 지령으로
△서독유학생을 포섭, 인계할것△재독 「우리나라」 신문에 남한학생및 근로자들의 민주화투쟁내용을 중점 반복해서 게재할것등의 지시와 공작금서독화 7천마르크 (한화2백만원상당)를 받고 귀환했다.
▲84년11월에는 당시 프랑크푸르트 요한 볼프강 괴테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있던 유학생 이진숙(35)에게 북괴우윌성을 선전 교양, 포섭한 후
△84년12월16일 이진숙의 사회학박사논문이 통과되자 이진숙과 함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그곳 북괴공작원 이철민이 준비한 안명철명의의 북괴공무여권을 소지하고 동베를린에 도착
△동베를린 북괴공작아지트에 수용되어 북괴공작지도원 백명준·홍모박사등으로부터 사상세뇌교양 및 입북지령을 받고 서독에 일시 귀환하였다가
▲85년2월3일 이진숙과 함께 네덜란드로 가서 북괴공작원 이철민의 안내로 동베를린·모스크바를 거쳐 입북, 평양 대성동초대소에 25일간 수용되어 북괴공작지도원 백명준과 김일성대학 철학교수라고 자칭하는 최모등으로부터 세뇌교양을 받았다.
▲수용기간이 끝날무렵 북괴공작지도원으로부터
△재독 「우리나라」 신문사를 공작거점으로 이용, 반한활동을 적극 전개할것
△프랑크푸르트 유학생을 포섭, 인계할것
△이진숙의 공작사업을 지도하고 중간역할을 담당할것
△국내 모일간지 기자로 있는 임진형(가명·24세·안상근의 친척)을 포섭, 인계할것등의 공작지령을 받고 동년2월28일 서독에 귀환했다.
▲그후 85년3월∼85년5월간 국내에 침투한 간첩 이진숙으로부터 대구 모대학 조교수로 취업, 합법토대구축등 간첩활동사항을 보고받고
▲85년6월12일 동베를린북괴공작책 백모과장과 접선, 이진숙의 대학침투 사실과 친척 임진형 포섭공작 계획을 보고하고, 임진형 포섭자금으로 미화 5천달러를 받아 국내에 잠입했다.
▲이미 국내에 침투, 활동중인 이진숙의 활동상황을 점검하면서 학원가 데모상황, 광주사태에 대한 국민여론을 채집했다.
<◇이진숙(35·대저 모대학조교수)>
▲84년11월 서독 프랑크푸르트소재 요한 볼프강 괴테대학에서 박사과정을 이수중 동료유학생의 소개로 안상근(35·반정부지 「우리나라」편집국장)을 알게된 후 수시북괴 우월성 선전교양을 받고 동조, 포섭되어
▲84년12월16일 사회학박사학위논문이 통과된후 안상근과 함께 여행을 가장,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가서 그곳 북괴공작원 이철민으로부터 김영숙명의의 북괴공무여권을 발급받아 동베를린에 도착, 북괴공작아지트에 수용되어 북괴공작지도원 홍모박사·백명준등으로부터고려연방제 통일방안등 사상세뇌교육과 입북지령을 받고 서독에 일시 귀환하였다가
▲85년2월3일 북괴공작원 이철민의 안내를 받아 안상근과 함께 네덜란드·동베를린·모스크바를 경유, 입북해 평양 대성동 초대소에 25일간 수용되어 간첩교육을 받고
▲수용기간이 끝날무렵 북괴공작지도원으로부터 △국내 연구소 또는 대학에 침투하여 운동권 학생들을 포섭, 지하조직을 구축할것
△학생데모를 배후 조종하고 데모상황을 탐지, 보고할것
△포섭학생가운데 사상성향이 강한 학생을 선정, 유학을 보내 인계할것등 공작지령을 받고 대남혁명사업을 위해 충성을 다할것을 맹세한후 동년 2월28일 서독으로 귀환했다.
▲85년3월9일 간첩안상근과 암호통신 연락조직을 상호 약정한후 국내에 잠입하여 대구 모대학 조교수로 취업, 2학기부터 사회복지학과에 출장키로 하는등 합법거점을 구축하고
▲북괴에 보고할 목적으로 대구 모대학의 학생수·학과·교수등의 현황및 서울과 춘천간 검문소 실태등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했다.
[출처: 중앙일보] 학원침투 유학생간첩단 개인별 혐의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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