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3

[책과생활] 옥중사색 ‘야생초 편지’ 저자 황대권씨 - 조선일보 >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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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생활] 옥중사색 ‘야생초 편지’ 저자 황대권씨 - 조선일보 > 문화



[책과생활] 옥중사색 ‘야생초 편지’ 저자 황대권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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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2.09.24 19:44 수정 2002.09.24 21:27
13년의 옥고를 치르면서 ‘들풀 ’에 대해 눈떴던 황대권씨.‘야생초 편지 ’에 썼던 그 많은 들풀과 함께 하는 삶을 드디어 살고 있다.
‘야생초 편지’의 저자 황대권(47)씨는 1985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13년2개월을 안동과 대구, 대전
교도소에서 보냈다. 서른살 청년의 나이에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복역하다 40대 중년의 몸으로 돌아온 그가 옥중에서 쓴 편지를 모은
‘야생초 편지’는 교도소 안에서 피어나는 풀꽃들에게 생명 찬가를
바친다.

옥중에서 만성기관지염을 고치기 위해 들풀을 뜯어먹던 황씨는 그 풀에
빠져 야생초 연구가가 된다. 한 평 짜리 독방 생활 13년이란 얼마나
신산한 것이었을까. 그러나 그는 비탄과 분노가 아닌, 온통 푸르고
싱그럽고 유쾌하며 가슴 찡한 풀 향기 속에 스스로를 드러낸다.
‘교도소를 대표하는 풀’이라고 이름 붙인 중대가리풀이며, ‘가장
완벽한 야생 약초’라고 부른 쇠비름을 비롯, 그가 직접 그린 풀꽃
그림들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온갖 잡초를 긁어 모아 끓는 물에 데치고 교도소 동료들과 둘러앉아
‘들풀모듬’ 잔치를 벌인다. ‘모듬풀 물김치’는 그 맛에 한 번 빠지면
상추, 깻잎 따위 재배 채소는 시시해 못먹는다고 할 정도다. 기상천외한
잡초들을 먹은 끝에 ‘토끼’란 별명을 얻었지만 물 김치로 만족 못하고
‘토끼풀 무침’을 개발해 먹겠다는 포부도 밝힌다.




통혁당 사건으로 투옥돼 20년을 갇혀살았던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88년첫 출간됐을 때 던졌던 충격과는 또다른
감동과 충격이 ‘야생초 편지’에 담겨있다. 서울대 농대를 나와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꿨던 그는 감옥에서 다시 농부의 눈을 되찾은
셈이다. 장기수에게 1년 한 두 차례 주어지는 사회참관이라는 바깥
나들이 때 다른 재소자들은 세상의 신기한 풍물을 정신없이 눈에 담지만
그는 땅만 보며 들풀을 캔다. 그 풀을 교도소에 옮겨 키우고 먹으며
기록한 들풀 편지는 식물관찰기를 넘어 생명에 대한 예찬과 자유에의
갈망, 생태주의 운동에 대한 깊은 사색으로까지 이어진다. 사람 중심의
시각으로 볼 때나 들풀이 ‘잡초’가 되는 것이지 ‘크건 작건 못생겼건
잘생겼건 타고난 제 모습의 꽃을 피워’내는 그들은 잡초가 아니라
야생초라는 그의 말은 다름과 차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 사회를 향한
쓴소리로도 읽힌다.

부드러운 필치지만, 교도 행정에 대한 따끔한 일침도 빼놓을 수 없다.
‘홍콩 영화’란 편지글에서 그는 ‘주로 폭력적인 사건과 관련되어
들어온 젊은 재소자들을 교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는 교도소가 허구한 날
홍콩의 폭력영화를 보여주고 있다’고 나무란다.

언젠가 마당 딸린 집을 갖게 된다면 이렇게 기품어린 야생초를 모두
수집해 근사한 화단을 꾸미겠다’고 꿈꾸던 그는 지난 5월 결혼, 부모,
아내와 함께 사는 집 옥상에 푸른 꿈으로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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