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8

06 강남대 이찬수 교수 해직이 드러낸 족벌사학의 문제 - 교수신문



특별기고: 강남대 이찬수 교수 해직이 드러낸 족벌사학의 문제 - 교수신문



특별기고: 강남대 이찬수 교수 해직이 드러낸 족벌사학의 문제

김영호 인하대
승인 2006.05.04 00:00


배타적 종교사학의 위험성, 그리고 비극

이찬수 강남대 교수 해직 사건은 사립학교법안을 두고 대치하는 현정국상황과 맞물려 미묘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이것은 교수 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의 대학의 현실과 이상을 적시해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과연 대학운영주체가 이념이나 종교의 해석을 두고 교수의 자유와 교권을 견제할 수 있는가. 이념은 목하 동국대 강정구 교수와 관련되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정종교 이념이 지배한 이조시대도 아니고, 고전적인 목표인 진리만이 아니고 자유, 민주주의 등의 가치가 바탕을 이루는 현대대학에서 교수의 강의내용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은 한국대학이 안고 있는 구조적인 문제를 들어낸다. 우리대학이 당면한 문제점들을 함축하고 있는 사건이다. 여기에는 대학에서 무엇을 가르쳐야 하느냐 즉 커리큘럼의 문제도 포함된다.


해임의 잣대는 강남대학의 ‘창학이념’인 기독교 교의이다. 특히 학생들에게 타종교, 특히 불교에 대한 존중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보수적인 크리스천에게 우상숭배의 전형처럼 보이는 타종교에 대한 호의적 평가가 기독교를 폄하, 곡해시키고 있다는 이유이다. 이러한 입장은 현대대학의 보편적인 성격을 벗어난 것이다. 우선 대학은 특정종교나 이념을 학생들에게 강제하는 곳일 수 없다. 진리를 한 종교체계나 전통에 묶어놓고 탐구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선택적이어야 한다. 신학대학은 선택해서 들어간 곳이므로 다를 수 있다. ‘창학이념‘이 된 기독교 정신을 깔고 그러한 분위기를 갖는 것은 허용될 수 있겠지만, 공교육기관이 특정 종교 이념을 주입하는 선교교육을 할 수는 없다. 종교과목이 선택과목으로 개설되더라도 그 내용은 교파적인 교리에 입각한 해석이 아니고 엄밀한 객관성이 보장된 학문적인 것이어야 한다.




▲故 함석헌 선생과 故 이호빈 목사 ©




과연 ‘창학이념’이 근거가 될 수 있는가 살펴보자. 강남대학의 전신은 그 출발에서 교파성이 배제된 초교파 신학교였다. 창립자 이호빈 목사는 원래는 감리교 계통이었지만 초교파를 지향하는 중앙신학교를 만들어 그 시대에 지도적인 인물들로 가득한 교수진을 형성하였다. 이 목사가 이사장으로 있었던 60년대 후반 교수진에는 함석헌 같은 종교인, 안병무(당시 학장), 허혁, 박순경 같은 당시 진보적인 초교파신학자들이 포진했다. 특히 씨알, 즉 민중사상을 주창한 함석헌, 민중신학의 주창자 안병무의 신학, 종교관은 민중 신앙자체처럼 폭넓게 다원주의적이었다. 함석헌 선생은 힌두교 경전 『바가밧 기타』와 도교경전 『노자』(도덕경)를 강의했다. 오늘날 서구대학의 공통교양과목인 ‘세계종교’에서 다루는 경전들이다. 안박사는 서구신학과는 다른 한국신학, 민중신학의 정립에 몰두했다. (필자도 학부졸업 후 그곳을 거치면서 두 분의 참 스승들을 만났다. 나중에 나는 신학본령에서는 일탈한 분야로 갔지만 폭넓게 봐서 그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떠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 분들은 그들의 일에 참여시키기도 하면서 필생 나를 이끌어 주었다.) 그들은 그만큼 열린 종교인, 신학자였다. 강남대학이 이번에 보여준 보수주의 크리스천들과 같은 배타주의자는 거리가 멀었다.




▲故 안병무 교수 ©
호방한 성격의 창시자 이호빈 목사도 이들처럼 열린 신학과 관용적인 종교관을 지녔음에 틀림없다. 초교파신학교를 만들고 이들을 임용한 사실이 그 단적인 증거이다. 이 교수의 신학, 종교관도 이러한 전통과 맥락 속에 서 있다고 봐야한다. 다원주의적 시각은 근래의 서구 종교학자들이 자연스레 도달한 상식이다. 적어도 일반대학에서는 당연한 것이 되었다. 다원주의 입장 서지 않고 세계종교, 타종교, 타문화를 가르치는 것은 진리탐구를 표방하는 대학에서는 불가능하다. 다원주의적 입장에서 교육한다고 해서 반드시 개인적으로 자기가 믿는 종교가 우월하다는 주관적인 입장과 신앙을 포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다른 사람도 자기 신앙을 그렇게 볼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다원주의의 함의이다. 이 교수도 개인 신앙 면에서는 누구보다도 충직한 기독교인일 수 있다. 이 여러 가지 점에서 강남대학이 어떤 교파적 교리에 입각하여 이 교수를 해직한 것은 사립학교들이 내세우는 명분인 건학이념에도 맞지 않은 억지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나아가서 이 교수가 결과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대다수 학생들의 흥미를 더 일으켰다는 사실을 무시한 대학의 운영주체는 종교 선교도 궁극적 목표가 아님을 드러내고 있다. 그들의 목표는 딴 데 있을 법하다. 그것은 여타 개인소유 사립대학들처럼 족벌소유와 전횡일 터이다. 이 목사가 어떻게 현재 이사장 일가에게 학교를 맡겼는지 그 과정이 의심스럽게 보인다. 족벌학교로 대물림할 생각이었다면 자기 친족에게 맡겼을 터이다. 초교파를 표방한 그가 족벌에 의한 운영을 구상했을 리가 없다.


이처럼 사립대학들이 새 법안을 거부하는 이유로 곧잘 내세우는 ‘건학이념’이란 것도 파헤쳐보면 한낮 소유권유지를 위한 허울에 불과하다. 창립당시에는 선의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대물림하면서 소유가 숨어있는 목표로 되어버렸다. ‘건학이념’이 있다하더라도, 공립이건 사립이건, 건전한 사회인을 양성하는 공교육의 목표 아래 놓여야 한다. 그 목표는 다원적인 가치관이 공존하는 사회 속에서 갈등을 해소하고 조화와 평화를 추구하는 것이라야 한다.

이를 위해서 선진국 대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세계종교’ 과목을 개설하여 지구촌 시대에 타문화의 이해를 강조하고 있다. 문명충돌을 극복하기 위한 교육을 강화하고 있다. 종교를 선악으로 구분하면서 세계갈등을 부추기고 있는 부시 같은 사람은 이러한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나라 대학들도 이러한 과목을 필수교양으로 채택할 때가 왔다. 학생시대에 종교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교육을 받지 못하면 사회에 나가서 맹신과 광신에 빠져 일생을 허비할 위험성이 있다. 자기 종교를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도 타종교에 대한 지식은 필요하다. ‘한 가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것도 모른다’(He who knows one knows none)는 근대 종교학의 창시자 막스 뮬러의 말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강남대가 해직의 빌미로 삼은 종교로서의 불교존중은 다른 나라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불교에 대한 관심은 신학전통이 강한 미국대학에서 제고되고 있다. 하버드 신학대는 한국승려들이 학위를 할 정도로 개방되어 있고 불교참선 법회 모임이 대학교회 안에서 정기적으로 개최된다. 대학 교목이 있듯 그에 해당하는 하버드대 불교지도법사도 임명된다. 신학대 안에는 ‘세계종교연구소’가 있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종교인과 학자들이 1년씩 거주하면서 연구하고 교류한다. 많은 현재 불교학자가 소장을 맡고 있다. 동서양의 종교전통을 대표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변혁이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다.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두 종교 간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동서양의 종교전통을 대표하는 불교와 기독교의 상호변혁이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된다.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두 종교 간의 교류가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하버드에서 공부하다가 한국불교에 접하고 승려가 된 화계사의 미국인 현각스님은 기독교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이다.


기독교에 대한 해석도 폭넓어지고 있다. 하버드 신학교에 개설된 강좌 중에는 유명한 신학자 하비 콕스의 ‘예수’강좌가 있는데 여기서는 예수의 전기를 놓고 해방신학, 민중신학까지 다루고, 예수에 관한 각종 영화들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는 캐나다 영화 ‘몬트리올 예수’ 그리고 예수의 결혼생활을 주제로 한 카잔자키스 원작의 ‘그리스도의 마지막 유혹’이 들어있다. 예수에 대한 모든 해석을 다 다룬다.


이제 신학은 어느 한 종교나 문화전통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신, 하느님을 하늘이나 우주의 한 부분에 경계를 긋고 그 울타리에 가두는 격이 된다. 연 전에 하버드 신학교에서는 ‘신 개념의 확대’를 주제로 한 학술회의가 각 종교, 문화를 전공한 학자들을 동원하여 여러날 수일동안 열릴 정도로 서구학자들은 타종교에 눈을 돌리고 있다. ‘민중신학,’ ‘한국신학’도 신 지평의 확대를 의미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과정에 참여하고 있는 새 세대 학자이다. 그는 최근 전남대를 중심으로 결성되어 큰 호응을 얻고 있는 ‘한국종교간 대화 학회’의 감사이기도 하다. 사회통합을 위한 일로서 높은 봉사점수를 줄 수 있는 역할이다.


개인소유의 사립학교는 기독교 또는 종교 정신에 부합하지 않는다. 연세대, 이화여대, 동국대, 원광대 같은 종교관련 학교들은 족벌소유가 아니고 교단이나 공동체(승가)에 속하므로 그만큼 안전하다. 개인소유 학교가 어떤 신앙을 표방할 때 더 복합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신앙은 소유에 덧붙여 또 하나의 전횡 요인이 된다. 배타주의적 종교관을 가진 개인소유의 사립대는 양 날의 칼 같은 위험성을 지니고 있다. (강남대학과 유사한 길을 걸어온 계명대학도 이러한 중대한 문제를 안고 있다.) 이교수 사건은 잠재된 거대한 문제덩어리 일각의 노출에 불과하다. 공정한 사립학교법이 되려면 이러한 문제점까지 반영한 것이어야 마땅하다. 기독교전통이 강한 미국 같은 나라에도 개인소유의 사립학교는 없다. 하버드, 프린스턴, 예일은 원래 신학교에서 출발했지만 공교육 이념에 충실한 주인 없는 공익법인체 사립대학들이다. 신앙(신학)과 학문(종교학, 철학)은 엄격히 구분된다.


이교수 사건은 한국대학의 구조와 커리큘럼뿐만 아니라 종교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과 관련된 현안문제와 쟁점들을 노출시킨 다면적인 사례가 된다. 따라서 그 해결은 법원의 판례와 같이 앞으로 하나의 전례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 교육의 발목을 붙잡고 있는 학교의 족벌사유화가 야기시킨 문제이다. 이 땅 족벌학교는 족벌언론에 못지않은 문제의 소지이다. 한국의 공교육은 세계에 유례없이 높은 사립비중(대학의 83%) 때문에 큰 문제를 안고 있다. 온전한 사립학교법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영호 인하대 교수, 동양철학 전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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