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7

16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알라딘: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 동서분당의 프레임에서 리더십을 생각한다
이정철
(지은이)너머북스2016-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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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0쪽
152*220mm



책소개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 선조 8년(1575) ‘동서분당’이 발생한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은 정치적 사건들로 끝없이 변주되다가 선조 23년 기축옥사로 파국을 맞는다. 이 책은 이 과정과 인물들에 밀착하여 생생하게 드러낸다. 크게는 이이와 선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되, 200여명이 넘는 수많은 관련 인물들의 동선을 드러내고 그 동선 아래에 흐르는 의도까지도 밝힌다.

‘동서분당’ 사태를 시작으로 사림은 분열했다.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가?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저자는 올바른 정치적 대의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당쟁은 큰 차이를 낳는다 한다. 동서분당에 대해 “당연히 정치적 욕망을 가장 큰 동력으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의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며 대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목차


프롤로그
전사前史

1부 사림의 분열 _ 사림의 정치화
▄ 리더십
1장 선조 8년~10년 : 분열의 시작
인순왕후 사망
애도의 정치성∣선조, 정치를 시작하다∣“낭천을 폐지하라”
‘동서분당’
미해결 살인사건∣피혐과 처치∣살인사건의 정치적 변주∣이이의 처치∣허봉과 박근원의 결합∣박근원이란 인물∣개성 유수, 경흥 부사∣사건 배후의 구조
2장 선조 11년~13년 : 대립 구도의 성립
이수의 옥사
서인의 짧은 권세∣선조 11년∣같은 사건, 다른 처리∣동인의 새 파트너, 구신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
시비에서 정사로∣시비와 정사의 여러 거리∣“유자가 도를 행함이 이 정도뿐인가∣이이에 대한 동인의 첫 공격∣김우옹이란 인물

2부 이이의 시간 _ 사림의 이상, 정치의 현실
▄ 프레임
3장 선조 13년 말~15년 : 이이의 분투와 좌절
정치의 한복판에 선 정치적이지 않은 이이
선조가 이이를 부른 이유∣이이가 돌아온 이유∣이이에 대한 동인의 시선∣우성전 탄핵 사건∣이경중 탄핵 사건∣순진한 이이, 저돌적인 정인홍, 배후 조정자 이발
심의겸, 정철 탄핵 사건
수면과 저류∣“이는 이발을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이발, 정치를 하다∣정철 문제에 불을 붙인 정인홍의 한마디
윤승훈 사건
정철은 외척인가∣“윤승훈이 무슨 식견을 지녔겠습니까”∣대신의 권위, 언관의 권위
일진일퇴
복상과 처치∣이이, 선조에게 개혁을 호소하다∣“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성혼 눈에 비친 이이
4장 선조 16년 : 계미삼찬
‘이탕개의 난’이 불러온 효과
여진의 성장, 선조의 충격∣이이 개혁안과 선조의 변화∣경안령 이요 사건
공론은 누구에게 있는가
계속되는 북방 상황∣“전천‧만군의 죄”∣이이의 정체성∣이이가 탄핵받은 진짜 이유∣“이이를 공격하는 자가 소인이다”
좌절된 이이의 꿈
성혼의 상소∣송응개의 상소∣송기수라는 인물∣기억의 당파성∣“언관들이 간사한 것은 아닙니다∣동인이 이해한 조제보합론∣김우옹의 뒤늦은 상소∣선조와 동인의 맞대결
대간의 말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또 하나의 공론∣선조와 승정원의 갈등∣“신들 역시 조종조 노신의 후예들입니다”∣“심의겸이라는 함정”

3부 선조의 시간 _ 나는 어느 쪽이 옳다고 말한 적이 없다
▄ 관점의 현재성
5장 선조 17년~22년 : 불안한 평화
계미삼찬 후 조정 풍경
단호한 선조∣“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4월 14일? 4월 17일?∣초조한 이이∣이이의 입장은
조정의 재편
이이의 죽음∣현상 유지∣미묘한 변화∣김우옹과 신응시∣영의정 박순, 탄핵을 받다
선조의 정치
“내 뜻을 말하겠으니 사관은 기록하라”∣선조의 이상한 하문∣조정 밖 목소리∣선조 18년 9월 2일 선조의 전교∣이발의 복귀
6장 선조 22년 : 기축옥사 발발
고변에서 체포까지
고변서 접수 직후∣고변서가 올라오기까지∣정여립 체포에 실패하다∣다복, 10월 14일 저녁에서 밤까지∣온 산을 태워서라도 체포하라∣죽음을 부르는 ‘적가문서’∣주륙과 은택
국면의 전환
전주 생원 양천회의 상소∣선조의 구언∣정철의 복귀∣정집의 진술, 김천일의 상소∣낙안 교생 선홍복
공포의 정치
조정을 지배한 공포∣선조, 사건을 일단락 짓다∣이산해, 용 같은 사람∣성혼의 상소

4부 파국
▄ 책임
7장 정개청 옥사
정암수와 배명의 상소
호남의 중심, 나주∣나사침 부자와 그 가문의 내력∣구절의 대 배절의
투옥 과정과 심문의 쟁점들
홍여순이란 인물∣고발 사유는 사라지고∣「절의청담변」을 둘러싼 오해
정개청과 박순
‘배사론’∣저마다의 기억∣진실은?∣향리 가문 출신 서원 원장
8장 최영경 옥사
기축옥사 이전의 최영경
성혼과의 만남∣스승을 빼닮은 제자∣『심경』이라는 책∣최영경이 진주로 간 이유는∣“미움이 규모를 달리하고”∣“박순과 정철을 반드시 효시한 뒤에야”
‘삼봉즉경영설’의 부상
소문∣알리바이
1차 수감, 정철과의 만남
두 가지 쟁점∣정철의 올리지 않은 차자
2차 수감, 이이에 대한 기억
‘하늘 그물’∣“말의 근거를 자세히 아뢰라”∣“신이 한 말이 아닙니다”∣죽음, 그 주변

에필로그
부록_1. 이조 및 삼사三司의 관직|사가독서자 일람표|연표: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4. 인물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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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P. 195~196 조선왕조는 건국 당시부터 공론을 중시했다. 성리학을 국가 운영 원리로 삼아 건국한 것이 그 이유이다. 그런데 국가적으로 공론을 중시한다고 하여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오늘날 헌법에 민주주의의 이상(理想)을 담았다고 해도 현실에서 법률적 갈등을 피할 수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 당시 공론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갈등... 더보기
P. 263~264 이윽고 선조에게서 미묘한 태도 변화가 감지되었다. 이이 사후 채 두 달도 안 되서, 홍문관 수찬 심희수는 경연 조강朝講에서 선조의 태도 변화를 언급했다. 그는 “상께서 이이를 대우하시는 것이 살았을 때와 죽은 후가 다르니, 필시 그 뜻이 있으신 듯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어서 “당초 상께서 중론衆論을 물리치고 (이이를) 등용하셨... 더보기


추천글

“아니 그렇게 착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일을? …”개인적으로 알던 사람이 평소의 성품과는 너무 다른 뜻밖의 일을 저질렀을 때 불쑥 튀어나오는 말이다.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는 관용적 표현도 우리 귀에 익지만, 그런 사람이 법을 어기고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뉴스에 등장한다. 평소에는 그렇게 예의바르고 조용하던 청년이 고양이를 잔인하게 죽인다거나, 알고 보니 여성만 노린 연쇄살인자로 드러난 사례도 더러 있다. 그런가 하면, 혼자 있을 때 하는 행동과 어떤 단체의 일원으로서 하는 행동에도 차이가 많다. 어떤 집단이나 군중심리에 휘말리다보면 평소의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하기 힘들었을 과격한 언행도 여반장으로 자행하고 심지어 손에 피 묻히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도덕적 인간들이 만드는 사회가 곧 도덕적 사회를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비도덕적 아비규환의 사회를 건설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날까? 이 책은 바로 왜 착한 사람들이 악한 정치를 할까라는 역설적인 질문에 대하여 조선시대의 역사 경험을 통해 설득력 있는 답을 제공한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유교 덕목을 몸소 실천하는 데 힘쓴 유학자 개개인은 선비처럼 우아하게 보이지만, 그들이 정치무대에서 벌인 당파싸움은 참혹한 살육을 지속적으로 동반한 ‘나쁜 정치’의 좋은 사례이다. 대화와 타협이라는 소통보다는 자기만이 옳고 상대방은 그르다는 독선적 근본주의 경향이 몸에 익은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대한민국에도 상식적인 대화보다는 진영논리와 흑백논리가 편만해 있다. 그래서 더더욱 진지하게 읽어볼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 계승범 (서강대 사학과 교수)

조선시대 당쟁과 인물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은 책이다. 선조 8년~23년,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 사림의 분열 과정과 이 과정에 연루된 인물들을 살폈다. 사림의 지나친 도덕적 확신이 사림의 분열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한다. 저자는 “개인의 선한 신념이나 의도가 아닌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이야말로 정치적 책임의 요체”라면서, 정치인 선조와 이이, 사림을 축으로 하여 리더십, 프레임, 책임정치를 설명한다.
- 이재민 (너머북스 대표)


이 책을 추천한 다른 분들 :
중앙일보
- 중앙일보 2016년 11월 5일자 '책 속으로'
동아일보
- 동아일보 2016년 11월 19일자 '책의 향기/150자 서평'
조선일보
- 조선일보 2016년 11월 4일자 '한줄읽기'
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6년 11월 3일자



저자 및 역자소개
이정철 (지은이)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 주요 저서로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 「반계 유형원의 전제개혁론과 그 함의」 「조선시대 공물분정 방식의 변화와 대동의 어의」 등이 있다.


최근작 : <실학, 조선의 르네상스를 열다>,<쟁점 한국사 : 전근대편>,<쟁점 한국사 세트 - 전3권> … 총 10종 (모두보기)
이정철(지은이)의 말
선조 대에 활약한 인물들의 생각과 행동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개념이 ‘책임’이다. 사실, 그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무엇에 대해 책임감을 느끼는각가 바로 그 사람 청체성의 좌표이고, 그가 맺은 사회적 관계의 액면가이다. 유학에서도 책임은 중심 주제이다.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을 성리학만큼 강조한 사유 체계도 드물다. ‘수기치인’에서 치인은 세상에 대한 사대부의 책임감으로 설명된다.





출판사 제공 책소개

조선시대 당쟁과 인물들에 대한 깊은 성찰
“역사공부는 대의를 찾아가는 과정”

선조 8년~23년,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까지
조선 당쟁의 사실(史實)을 엄밀하게 밝히며
현재적 의미를 탐구한 역작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이정철 박사(국학진흥원 연구원)가『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2010, 역사비평)을 낸 후 받았던 곤혹스런 질문이었다 한다. 이 책은 그 물음에 대한 저자의 치열한 고민의 결과다. 선조 8년(1575) 누구도 상상할 수 없었던 사림 내부의 갈등, 이른바 ‘동서분당’이 발생한다. 이렇게 시작된 당쟁은 정치적 사건들로 끝없이 변주되다가 선조 23년 기축옥사로 파국을 맞는다. 이 책은 이 과정과 인물들에 밀착하여 놀라울 만큼 생생하게 드러낸다. 크게는 이이와 선조의 행적을 중심으로 살피되, 200여명이 넘는 수많은 관련 인물들의 동선을 드러내고 그 동선 아래에 흐르는 의도까지도 밝힌다. 저자는 정치세력의 구조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하지 않았다. 그렇게 상황을 이해하면 개인적 특성이나 가변성, 현실의 생생함을 놓치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즉 귀납적으로 도출되는 구조만이 진짜 현실을 반영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쟁사라면 조선후기가 절정인데 저자는 왜 선조 8년 ~ 23년까지 그 15년에 주목했을까? 한 세대 앞선 퇴계 이황이 살았던 문정왕후 시대에는 물론이고, 16세기 초 등장한 이래로 사림(士林)은 정치의 주체라기보다 사화로 집약되는 탄압을 견디며 스스로를 지키는 것이 우선이었다. 선조 집권 이후 드디어 사림의 정치적 공간이 열렸던 것이다. 조선시대 통틀어 이 시대만큼 도덕적 확신과 정치적 이상(理想)이 드높이 외쳐진 시대도 드물었다.
그런데 곧 ‘동서분당’ 사태를 시작으로 사림은 분열했다. 왜 도덕적, 정치적 이상에 대한 사림의 오랜 집단적 열망이 그들 중 누구도 원치 않았던 거대한 파국으로 귀결되었는가? 훌륭한 개인의 인격과 무관하게, 그들의 진정성에 독립하여 작동하는 정치적 힘의 실체는 무엇이었을까?
이정철 박사는 올바른 정치적 대의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당쟁은 큰 차이를 낳는다 한다. 동서분당에 대해 “당연히 정치적 욕망을 가장 큰 동력으로 움직였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의가 그것을 제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며 대의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과거든 현재든 대의는 비록 수적인 우세를 차지하지 못해도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 사회의 공적 합의를 만드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역사공부는 바로 그것을 찾아내는 과정이다.
이 책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의 2016년 우수출판콘텐츠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이다.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시대가 열렸지만

선조 5, 6년. 삼사의 청직에서 최고 요직까지 모두 사림이 차지했는데도 좋은 정치가 이뤄지지 않자 이이는 당황하고 고민했다. 그 결과가 선조 7년 1월에 나온 「만언봉사」였다.

“정치는 시의(時宜)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공(實功)을 힘쓰는 것이 중요합니다. 정치를 하면서 시의를 모르고 일을 당하여 실공을 힘쓰지 않으면, 비록 성군(聖君)과 현신(賢臣)이 서로 만나도 성과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수기’된 군자가 집권을 하면 ‘치인’이 된다는 믿음, 성군과 현신이 만나면 좋은 정치가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선조대 초반을 경과하면서 흔들리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의도와 결과는 다를 수 있다는 것, 의도가 좋다고 반드시 좋을 결과가 온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의도가 아닌 방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이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제 훈척에 대한 도덕적 비판자의 역할이 아닌 국정과 민생을 책임져야 하는, 즉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새로운 상황을 맞았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제 됐다고 생각했을 때 이이는 이 새로운 상황을 정확히 이해했다. 이이가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 대해서 책임져야 하는지에 대해서 분명히 인식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백성에 대해서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이의 그 책임 의식이 상황을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게 했던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하게도 이이만이 그것을 분명히 인식했다. (이이는 다음 시대에 대동법으로 귀결된 개혁의 아이디어를 사실상 처음 공론화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그들 중 국소수가 살아남아 그것을 이해하게 된다.
역사를 좀더 길게 볼 때 광해군, 인조, 효종대가 대동법 등 정책 생산이 가능했던 시대라면, 선조대는 대동법을 만들어갔던 시대의 아버지 세대로 정치세력이 갈등했던 시대였다. 정책 생산은 정치세력의 형성과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우리도 개혁이 절실하고 그것을 위한 정치세력을 어떻게 형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과제로 가지고 있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이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이이의 보합조제론도 이런 맥락이었다. 그는 국정개혁과 정치세력화 둘 다 하려다가 결국 하나도 못 이룬 것이다. 저자는 기존의 당쟁론이나 붕당론이 아닌 이러한 관점에서 선조대의 정치세력의 갈등 양상을 다시 해석한다. 「만언봉사」나 나올 무렵 거의 동시적으로 발발하는 당쟁의 격랑에서 이이에게 국정개혁을 할 정치적 공간과 기회가 과연 있었을까?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으로 분열을 정당화하다

당쟁은 이듬해인 선조 8년에 발생했다. 1월 명종비 인순왕후가 죽자 선조는 비로소 자신의 정치를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한 미해결 살인사건에서 시작된 ‘동서분당’ 사태는 김효원과 심의겸을 지방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사림이 무리지어 공개적으로 갈등하는 양상은 이후 국면을 바뀌며 계속해서 이어졌다. 일시적으로 서인이 승리한 듯했으나 동인세력은 계속해서 확대되고 강해졌다.
선조 11년, 12년은 동서 갈등의 진정한 전환점이었다. 이른바 ‘이수의 옥사’와 ‘백인걸 상소 대필 사건’을 거치면서 동인과 서인은 각각 인적 구성과 그에 상응하는 정치적 신념 혹은 대의명분을 갖추었다. 구신과 결합하기 시작한 동인은 자신들과 서인을 선과 악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당시의 조정이 ‘외척세력 서인’ 대 ‘진정한 사림 동인’으로 대립한다고 인식했다. 즉 서인 전부를 외척 심의겸의 당여라고 주장했으며 나중에는 이이까지도 심의겸의 당여로 보고 또 그렇게 공격했다. 서인을 ‘친심’세력으로 규정하는 것이야말로 동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공격 방식이었다.
저자는 동서분당 사태 이후 잇달아 벌어지는 사건들과 인물들의 움직임이 만든 당쟁의 사실(史實)을 엄밀하고도 깨알같이 적시해간다. 이이와 선조는 한순간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김효원과 심의겸은 갈등의 언설 속에 있을 뿐 현실에서는 비중이 없다. 대신에 김우옹, 이발, 성혼, 류성룡, 이산해 등이 중요한 인물이었다.
사림은 왜 분열했을까? 물론 어떤 시대의 정치에도 나타나기 마련인 정치권력에 대한 욕망이 원인일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 한다. 사림의 분열은 스스로에 대한 강력한 도덕적 확신에 기인했다고 한다. 사림(동인)의 강력한 힘은 그들이 가진 도덕성에 있었다. 그 도덕성은 적어도 두 세대에 걸친 사화의 시대를 이겨낸 힘이었다.
이 책의 제목처럼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고 분열을 정당화 하는 기제는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었다. 젊은 사림이 가졌던 도덕적 확신은 역설적이지만 앞 시대 훈척정치가 물려준 유산이었다. 그들이 가진 도덕적 신념은 그 자체로 정당할 뿐 아니라, 불의하고 강력했던 권력을 물리친 정치적 참호이자 무기였다. 도덕적 신념은 고유한 인간형을 만들어냈다. 예를 들어 정철과 최영경은 서로를 미워했지만, 흥미롭게도 그들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는 비슷했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치고, 다른 사람 의견을 구차히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두 사람만의 특징이 아니었다. 도덕적 확신에 찬 사림은 결국 그것보다 더 강력했던 권력에 대한 욕망의 자장(磁場)으로 빨려들고 마침내 함몰되었다.
이 책은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며 역사적 사고를 하게 한다. 가장 치열했던 진정성조차 시대적 상황에 지배된다는 것, 앞 시대의 ‘정치적 올바름’이 뒷시대까지 지속되지 않는다는 것, 같은 신념으로 뭉쳤다고 해서 그것이 객관적인 진실이 되지는 않는다는 것, 공동체 다수의 객관적 요구가 중요하다는 것, 대의를 잊으면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 등이다. 과거는 쉽게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이이는 개인이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선조 8년 인순왕후 사망이 촉발시킨 두 가지 현상, 즉 선조가 자신의 정치를 시작하고 사림이 분열하기 시작한 가운데 이이의 입지가 좁아진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사림이 분열할수록 선조의 주도권은 강해졌고, 사림은 권력에 대한 욕망의 소용돌이로 끌려들어갔다. 선조 8년부터 이이가 사망한 선조 17년까지, 이 구조는 몇 차례 무게중심을 옮기며 유동했지만 계속 유지되었다. 이 책에서 그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조에서 이이는 마치 덫에 걸린 것과 비슷한 상황에 처했다. 이때 이이가 요구한 국정개혁의 핵심은 공안(貢案)개정, 수령 숫자감축, 감사 구임 등이었고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우선은 사림의 대동단결 즉 당파간 조제·보합이 필요했다. 사림이 힘을 합해도 개혁이 어려운데 분열되어서는 가망이 없다는 인식이었다. 다음은 대신이 실제 국정운영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언관들을 중심으로 공론이 독점되었고, 조정의 의사결정과정에서 삼사의 내부에서 이루어지던 ‘처치’의 힘이 지나치게 비대해지면서 국가경영을 할 대신들의 힘이 현저히 약화된 것이 문제라 여겼던 것이다.
이이의 국정 개혁안은 선조와 동료의 외면으로 결국 실패한다. 두 가지 중에서 더 중요한 것은 동료의 외면이었다. 이이는 믿었던 이발, 류성룡, 김우옹, 이산해 등에게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류성룡은 “개혁하는 것은 옳은 일이지만, 이 일을 이이와 함께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이가 특히 기대했던 김우옹은 계미삼찬 직후 상소에 “이이를 그르다고 한 것은 온 나라의 공론입니다.”라고 썼다. 실낱 같은 개혁의 가능성은 지워졌다. 이들은 우선순위 면에서 국정개혁이 당파 간 시비(是非, 옮고 그름)와 정사(正邪, 바르고 삿된)를 가리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정치세력 간의 시비가 아닌 민생개혁에 대한 추구가 자신들도 보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결과 사림은 분열했고, 그것은 선조의 독재로 이어졌다.
선조 대 조정에서 여러 정치적 행위자들은 정치적 책임을 지는 데 결국은 모두 실패했다. 이이는 개인으로는 책임질 수 없는 것을 책임지려 했고, 대간들은 사회적 결과가 아닌 자신의 신념에 충실했다.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던 사람은 선조였다.

선조는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에 있었음에도
그래야 한다는 의식이 부족했다

이 책에서 동과 서의 갈등과 분열의 현장에서 수많은 인물들과 함께 가장 주목되는 인물이 선조다. 아이러니하게도 선조는 양 진영이 극단으로 치솟는 갈등의 상황에서 정국의 주도권자가 되었다. 특히 정여립의 난으로 촉발되어 수많은 희생자를 내었던 기축옥사 과정에서 선조는 거의 완전하게 조정을 장악하고 관료들에게 거의 제한받지 않은 독재에 가까운 권력 구축에 성공했다.
선조는 서인과 동인 사이에서 무게중심을 이쪽저쪽으로 옮겨가며 명망 있는 인물을 정치적으로 소비했다. 이이, 박순, 이산해, 류성룡, 정철, 성혼, 이원익, 노수신 등이다. 그들은 정치적 용도가 다했다고 판단되면 버려졌다. 이이는 그렇게 되기 전에 갑자기 사망했지만, 더 오래 살았어도 다른 사람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선조는 정여립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철에게 위관을 맡도록 강제했다. 이것이 가져올 당파적 갈등과 그 결과가 어떠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고 이를 통해서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에만 관심을 쏟은 것이다. 그는 왕이라는 제도가 자신에게 제공한 것을 최대한 이용했고 또 누렸다. 하지만 그것을 토대로 가능한 공적 이상(理想)의 정책적 구현에 무관심했다. 선조는 정치 상황 및 그 결과에 대한 궁극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는 의식이 거의 없었다. 선조를 통해 정치적 힘과 정치적 책임은 분리되었고, 자연스럽게도 그것은 국정의 무정부적 상태를 초래했다. 접기



8.6




정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이 중요하고, 정치적 책임은 개인의 신념이나 선한 의도가 아니라 사회적 결과에 대한 책임이 요체인데 , 대개의 선한 지식인들이 개인적 신념에 대해 책임을 지려하기 때문에 나쁜 정치를 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선조와 이이를 필두로 한 당대의 사림들이 펼친 정치
독서중 2017-05-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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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시대건 정치는 의도보다는 결과이며 책임이라는걸 잘 보여준 책
얄리 2018-07-3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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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당쟁의 기원



몇 년 전 어느 인터넷 유머 사이트에서 "탕수육으로 본 붕당의 이해"라는 글이 올라와 화제가 되었다. 탕수육 부먹-찍먹 논쟁에 조선시대 당쟁을 비유한 이 글에는, 탕수육에 소스를 부어먹는 사람들은 동인,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먹는 사람들은 서인, 동인 중에서도 붓기 전에 양해는 구하는 사람들이 남인, 양해 없이 붓는 사람들은 북인, 서인 중에서 살짝만 찍어먹는 사람들이 노론, 푹 찍어 먹는 사람들이 소론, 반은 찍어먹고 반만 붓는 것이 탕평책, 소스 없이 먹는 사람은 서학 등, 절묘한 비유가 있어 많은 패러디를 낳는 등 화제가 되었다.


조선시대 당쟁의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겠지만, 당쟁이 정치적, 사상적 내용과 유리되어 그저 당쟁을 위한 당쟁으로 변질되었다는 것이 문제점이라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조선시대 당쟁의 최대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예송논쟁은 효종이 사망했을 때, 인조의 계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에 관한 논쟁이었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1년으로 충분하다고 주장했고, 남인은 3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인들이 보기에는 "그게 뭣이 중헌디!"라고 생각되기에, 오늘날 예송논쟁은 허례허식 때문에 일어난 소모적 논쟁의 대명사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당대에는 신권을 중시하는 서인(이후, 노론)과 왕권을 중시하는 남인의 입장이 반영된 정치사상적 내용을 담고 있는 심각한 논쟁이었다 할 수 있다.(여담이지만, 소설가 이인화가 <영원한 제국>을 출판한 이후, 남인과 정조에 우호적이고, 서인 노론을 악의 축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대중매체에 자주 등장한다.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나 <비밀의 문>, 영화 <역린> 등이 대표적이다.)


이는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 정치인과 관료를 선발하는 과거시험은 사서오경을 비롯한 유교 고전들을 시험 문제로 제출했었고, 공자왈 맹자왈을 잘 외우는 것이 정치인의 조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즉, 조선의 정치인들은 정치인인 동시에 학자였고, 지식인이었다. 조광조 이후의 성리학자들은 말 그대로 유교의 성인군자를 이상적인 정치인의 모델로 삼고 있었고, 정치를 통해 유교 이상사회를 실현하는 것을 궁극적 목표로 삼고 있었다. 따라서 유교 경전을 어떻게 해석해서 상복을 얼마나 입을지 결정하는 것이 중요한 정치사상 논쟁이 되었던 것이다.(반면에 서양에서는 정교분리와 정교통합이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대립의 축이라 할 수 있는데, 기본적으로는 성경에 나온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말이 나타내듯이 정교분리가 원칙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는 선조가 친정을 시작한 선조 8년부터 임진왜란 직전의 선조 23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문정왕후와 윤원형을 비롯한 소윤 세력이 몰락하면서, 외척과 훈구파를 대신하여 사림파가 집권하게 된 선조 시대. 우연한 계기로 사림은 노장 그룹인 서인과 신진 그룹인 동인으로 분열하게 된다. 이는 서인의 영수 심의겸의 집이 한양 서쪽에, 동인의 영수 김효원의 집이 한양 동쪽에 위치했던 데서 기인한 명명이다.(참고로 오늘날 통용되는 우파, 좌파는 프랑스혁명 직후, 보수파가 국회의장 오른쪽에, 혁명파가 국회의장 왼쪽에 앉았던 데서 유래했다.)


동인들은 인순왕후의 동생이었던 심의겸을 외척으로 보고 배척했다. 율곡 이이는 동인과 서인 사이에서 이들을 화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동인들에게 배척 당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된다. 이후 동인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양자의 균형자 역할을 하던 선조는 정여립의 난 직후에 일어난 기축옥사를 통해 서인의 정철을 앞세워 동인(특히 강경파였던 북인)을 숙청한다.


저자는 조선 중기를 지배했던 당쟁의 기원을 분석하면서, 동서분당의 원인이 권력에 대한 욕망과 도덕적 확신에 있었다고 말한다. 동인은 심의겸과 서인을 사파로 규정하고, 자신들이 도덕적으로 옳다고 확신했다는 것이다. 정치의 세계에서 상대방을 악으로 규정하고 배척하게 될 때의 위험성은 오늘날의 정치현실을 생각할 때도 참조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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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짱짱맨 2017-07-03 공감(9)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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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구조




이 책은 흥미롭지 않은 것을 다루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흥미로운 책이 되었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 책은 동서분당에서 기축옥사에 이르는 시간 동안 실제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추적하는 책이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결코 쉽지 않았을 작업이다. 흥미롭지 않다고 한 것은 저자의 작업이 선악의 이분법이 아닌 각 정파와 논객들이 저마다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성을 지르는 등장인물의 얼굴을 극단적으로 클로즈업하는 사극의 그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제목에 '왜'가 아니라 '어떻게'를 넣는 것이 더 자연스럽게 느껴질 만큼 당시의 정치 현안과 인물 사이의 관계가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전문가로서 따라가기에 어려움이 많았다. 하나의 사건이 종결되었나 싶으면 비슷한 성격의 다른 사건이 꼬리를 물었고, 인물들에 익숙해질 무렵이면 또 다른 인물들이 등장해 그 관계가 얽히고설켰다. 하지만 나는 당쟁을 이토록 건조하게 다룬 글을 처음 보기에 이 책을 흥미롭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관심을 끌었던 점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사림의 분열을 사헌부와 사간원의 언관들이 주도했다는 점이었고, 또 하나는 그 과정에 국왕 선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책에 따르면 조선 정치의 두 축은 대신과 언관이다. 대신은 국정의 현안을 해결하는 것이 임무이고, 언관은 관리의 부패를 막는 것이 주 임무라고 되어있다. 사실 내게는 언관이 대신과 나란히 정치운영의 축으로 언급되는 것마저도 생경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시기에 이르면 언관이 스스로의 권위를 대신의 그것보다 위에 두었다는 대목에서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대신의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을 대신의 임무인 국정현안 해결이 불가능해졌다고 이해했기 때문이다. 왕조국가에서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 신하들이 분열하게 된다. 그리고 그 분열을 이끈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서로의 부패혐의에 대한 탄핵이다. 이것이 파국으로 가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거칠게 말해서 언관은 정책이 아니라 사람을 다루는 집단이다. 오늘날로 치면 민정수석실이나, 감사원, 검찰청의 임무 정도가 될 것이다. 조정의 인사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중앙과 지방의 관리들이 부패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따라서 그들이 하는 일의 최후는 늘 어떤 자리에 있는 사람을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언관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언관들에게 주어진 임무가 그러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 이 책에 설명된 그들 집단의 의사결정 방법은 또 어떠한가? 사헌부와 사간원은 전원합의 방식으로 의사결정을 했다. 당연히 전원합의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비일비재했고, 그때마다 피혐과 처치라는 (내가 보기에) 극단적인 방법이 동원되었다. 결국 언관이 누군가를 탄핵하면, 탄핵을 당한 관리, 그를 탄핵한 언관, 그 언관의 탄핵에 동조한 언관과 반대한 언관 중 누군가는 자리를 떠나야 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상황이 악화될 경우 홍문관 관원까지도 옷을 벗어야 했다. 한마디로 누군가는 자리에서 물러나야 끝나는 게임이다. 이 역시 개개인의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의사결정 시스템의 문제이다.




이렇듯 언관의 임무와 의사결정 방식은 언제나 'All or Nothing'이었다. 정책 현안이라면 토론을 통해 조정하고 양보하는 것이 가능하겠지만, 인사문제는 쓰지 않으면 버리는 것뿐이다. 거기에 언관들의 피혐과 처치는 심하게 말해서 함께 일할 수 없는 사람을 합법적으로 배제할 수 있는 절차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언관의 지위가 대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을 넘어서 대신의 권위를 넘어섰다는 점이었고, 이런 상황을 통제해야할 국왕의 힘이 약했다는 점이었다. 대신의 권위의 부재는 국정공백의 다름 아니고, 왕권이 약하다는 말은 브레이크가 없다는 말과 같다. 이러니 선조 재임 초 사림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정책을 두고 싸우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으며, 그 싸움을 그만두고 싶어도 쉽게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상대방의 비리혐의(그마저도 대개는 과거의 혐의)를 두고 싸우는 것이었다. 물론 여기에는 부패한 구세력이 앞선 시대를 망쳐놓았다는 진단과 그들에 의해 선배 사림이 도륙을 당했던 뼈아픈 기억도 한몫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사실은 그 시기 사림이 놓인 정치 지형 자체일 것이다.




언관이 속한 사헌부, 사간원에 홍문관을 더해 삼사라고 한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라면 중앙정치에 사림이 진출하고 삼사의 기능이 강화되기 시작한 것은 성종 대부터다. 동서분당의 시점에서 볼 때 이미 오래 진행되어 온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서 사림이 스스로 만든 시스템의 함정에 빠지는 일종의 자승자박을 본다. 삼사를 장악한 사림이 부패한 구세력과 한판 겨룬다. 물론 많은 피를 흘렸지만 사림은 승자가 된다. 이제 삼사의 사림이 그 칼을 내부로 향할 수밖에 없게 된 형국, 그 형국에서 분당과 당쟁은 필연이지 않았을까? 구세력이 몰락했다고 해서 삼사의 관원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리만 지키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더구나 스스로 그 권위가 대신을 능가한다고 여기는 그들이 말이다. 이 대목에서 국정현안을 주도할 대신의 권위의 부재와 약한 왕권이 아쉬움(이것은 추후의 비극을 알고 있는 나의 현재적 평가이자 감정이다.)으로 남는다. 물론 이 역시 사림의 업보라고 할 수 있다. 사림은 부패한 선배 대신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사림을 포함한) 사대부들 전체는 국왕을 조선의 단독 주권자로 여기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선조의 경우 방계라는 콤플렉스와 인순왕후의 그늘, 세자 수업을 받지 못하고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점 등을 생각하면, 동서분당이 이루어진 재임 초반에 이렇다 할 정치를 하지 못한 것을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선조가 재임 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개혁이든 수구든) 국정운영에 임했다면 사림이 분열하고 비정상적인 당쟁으로 이어지는 일은 없었을까? 이것은 아마도 어리석은 가정일 것이다. 선조 이후의 군주들은 모두 붕당을 혁파하지 못했고, 결국 그것에 휘둘리거나 이용하거나 둘 중 하나일 뿐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 문명의 지척에서 좋든 싫든 그 영향을 피할 수 없었던 한반도처럼, 성리학적 명분론으로 똘똘 뭉친 사림이라는 신세력을 받아들인 조선의 중앙정치가 분열과 파국으로 치달은 것은 어쩌면 같은 운명인지도 모른다. 다만 그 과정에서 민생이라는 현안이 외면된 것이 아쉽고, (먼 훗날의 일이지만) 인조반정이나 세도정치처럼 왕권이 어이없이 추락한 것이 놀라울 뿐이다.




여기서 저자의 결론인 '도덕적 확신'에 대해 반론 아닌 반론을 제기해야겠다. '도덕적 확신'이 사림의 분열과 대립을 증폭했다는 저자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저자는 선조 초의 사림을 '시비와 원칙에 민감한 젊고 비타협적인 지식인들'이라고 평했다. 이 역시 동의한다. 그런데 이런 인간형이 과연 조선의 선조 대에만 존재했는가? 이러한 인간형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언제나 존재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선조 대에 동서분당이 되었고, 그 이후의 당쟁이 기형적인 모습으로 전개되었을까? 다른 인간형의 무리가 집권했다면 선조 대에 분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가 집권했다 하더라도 정치의 중심은 이미 대신이 아니라 언관이었고, 언관이 만들어내는 담론은 국정현안이 아니라 부패한 상대에 대한 탄핵이었다. 탄핵안 처리 역시 피혐과 처치라는 의사결정 방법이 고착화되어 있었으며, 국왕이 할 수 있는 일은 마지막에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느냐는 것뿐이었다.




힘들게 이 문제를 파고든 저자가 '도덕적 확신'이라는 개인적 신념의 차원에서 한걸음 더 들어가지 않은 것이 아쉽기만 하다. 아니, 저자의 작업으로 당시의 구조적 문제가 낱낱이 드러났음에도 결론에서 명확하게 언급해주지 않은 것이 아쉽다고 말해야겠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물음에 '도덕적 확신'이라는 답은 왠지 문제의 성격 자체를 개인 차원으로 변질시키는 것 같아 수긍하기 어렵다. 나는 역사와 정치를 모르기에 조심스럽지만, 역사적 사건은 대개 인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고 믿기에 그러하다. 사림의 '도덕적 확신'이 어떤 정치 구조를 만들었다면, 반대로 그 구조가 사림의 정치 행위를 어떤 식으로든 구속했을 터이다. 그것이 규명되지 않았기에 나는 저자의 물음을 다시 되물을 수밖에 없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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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속밖 2017-02-2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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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 진보 진영 실패에 대한 은유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정철, 너머북스, 2016.
: 민주 진보 진영의 집권 실패에 대한 은유

위 책은 조선 중기 동인과 서인의 분당에 관한 장편의 논픽션이다. 1575년부터 1590년 동인이 몰락하는 경과 과정을 담고 있다. 어떤 부분은 지나치게 소략하고, 어떤 부분은 반대로 지나치게 세심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분당의 원인과 누군가의 그릇침인지에 대해서는 거칠게 본의를 알 수 없도록 하였고, 사건의 전개에 관해서는 인과과정을 독자가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이, 선조, 김우옹, 류성용 등등 1차 사료가 된 <경연일기>, <조선왕조실록>, 각각 문집 자료 등을 통해 각 사건을 이끄는 인물의 행동을 입체감 있게 보여주고 있다. 이덕일처럼 서인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의 서술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권력의 욕망에 휩쓸리는 것을 애초부터 잘잘못의 범주로 두고 있지 않다. 요즘 시대엔 이런 서술이 인기가 없다. msg를 팍팍 쳐서 ‘책임감 없는 막장 임금 선조’와 망나니칼 휘두르는 독한 정철에 의해 무조건 희생 당한 어떤 이들이 소재가 인기임을 개탄하는 한편, 진지한 저술을 만나 흥미로운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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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을 엄밀하게 밝힘으로써 현 시대의 의미를 탐구하였다고 하는 출판사의 자화자찬이 과언은 아닌 듯, 조선 시대 중종-명종-선조로 이어지는 파란과 정치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승리를 쟁취한 사림 세력이 다시 동인과 서인이라는 붕당을 이뤄 권력을 분할하는 모습과 박정희-신군부 시대 정치 개혁을 주도, 김대중-노무현 시대의 정권 교체를 이룩하였지만 마침내 이명박-박근혜에게 정권을 탈취 당한 진보정치 세대와의 모습은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들이 승리에 도취되어 붕당으로 나뉘어지고 정권을 빼앗겼는가? 그렇지만도 않다. 조선의 사림들은 혁명 뒤엔 정치 지도자 그룹으로써 민생을 책임지고 국정을 운영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그렇다면 김대중과 노무현 정권 하 386세대들은 집권 후 민생은 제쳐두고 개인의 도덕적 신념에 따라 국정을 운영하는 바람에 민생을 그르쳤다는 말인가? 역시 그렇지만도 않은 듯 하다. 정권이 수구 세력에게 돌아간 것은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이고, 현재 그것을 되찾기 위해 절치부심하는 오늘날 야당들의 모습을 비추어 보자면 정치 교체의 주역이자, 지식분자를 대변한다는 자신들 스스로가 변화시켜 온 정치 환경에 그들 역시 적응을 하지 못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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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나쁜 정치’로 신자유주의니 FTA니 들여오고 재벌 제한 풀어주고… 나름대로 고민으로 격동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한편, 지나치게 ‘사상적 지향점으로서의 진보’에 얽매인 것일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천견이지만 진보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사상적 지향으로서의 진보가 아니라 그것을 ‘생활 목표로서의 진보’로 가지고 내려와야했다. 진보 정당의 실패는 민노당과 통진당의 좌충우돌과 정의당의 지지부진함으로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거대담론으로서의 진보는 이상으로 충분히 지켜내야 하겠지만 그것을 기층민의 삶 속에서 구현해내지 못한 것이 선한 진보 정치인들의 ‘나쁜 정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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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지금껏 수구 세력과 더불어 국정을 운영해 온 여당 또한 자신들이 만들어나갈 국가의 100년 대계 보다는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만을 생각하며 민생은 딴전이었다는 것이 오늘날 탄핵사태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나쁜 지식인의 나쁜 정치이다.
나쁜 정치는 민생을 위험하게 한다. 듣기에 “꽉 찬 창고에서 인심 난다”고 하듯이 지갑과 통장이 텅텅비어서 쥐약 먹고 죽을 시간도 없는 사람들은 촛불 집회인지 문화제인지 나가지도 못한다. 기층민의 생활고를 해결하지 못하면 정권이 망할 뿐만 아니라 실패한 정치, 나쁜 정치라는 낙인까지 찍힌다. 역설적이게도 노태우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가장 합리적이었다는 평가를 얻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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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왕조 시대의 역사적 사건의 결론이 현재에 꼭 맞아들 수는 없을 것이다. 사고가 훨씬 유연해졌고, 다양한 사람들이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고 감시 인력도 훨씬 많아졌다. 그러나 정치의 기본은 바뀌지 않는다. 동인과 서인의 사림 세포 분열에서 오늘날 한국의 리더십은 어디 있는가 고민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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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온라인뉴스 승인 2016.11.16

선조 8년 사림 내부의 갈등인 동서분당으로부터 선조 23년 기축옥사에 이르기까지의 사림의 분열 과정과 이 과정에 연루된 인물들을 살폈다. 그 이전까지 사화에 시달리던 사림은 선조 시기에 이르러 정치적 공간을 획득했으나 곧 분열하고 만다. 저자는 사림의 지나친 도덕적 확신이 사림의 분열로 이어졌다는 점을 지적하며 정치의 본질을 묻는다.  유학에서 지식인의 바람직한 삶은 수기치인(修己治人)으로 요약된다. 수기의 목적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치인은 다수에게 유익한 정치를 이상으로 삼는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수기가 곧 치인으로 이어진다고 생각했다. 좋은 사람이 유익한 정치를 펼치리라는 믿음은 오늘날 투표에 나서는 우리들의 마음 한구석에도 존재하는 듯하다. 그러나 한국국학진흥원 이정철 연구원은 그의 저서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를 통해 선한 의도가 반드시 유익한 정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임진왜란 이전의 선조 대를 조명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이 시기만큼 정치적 이상이 높았던 시대도 드물었다. 이이, 류성룡, 정철, 성혼 등 명망 있는 인물들이 포진해있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귀결은 기축옥사라는 거대한 정치적 파국과 임진왜란이라는 국가적 파국이었다. 저자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조정에 진출한 사림이 왜 당쟁에 몰두했고 파국을 맞이하게 됐는지를, 앞선 중종, 명종 대의 훈척정치라는 구조적 이유에서부터 설명한다.
 
개혁이라는 착각
 
저자는 선조 즉위 전후로 조정에 진출한 신진사림을 통해 리더십의 문제를 고민한다. 여기서 리더십은 리더 개인의 인간적 특성이라기보다는 집단 내에서 당연시되는 의사결정 방식을 의미한다. 국가 운영에 있어 저자가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리더십은 국정 문제 해결과 부패 방지 기능의 조화다. 당대에 이 두 기능은 각각 대신과 언관에게 맡겨져 있었다. 대신에게 권력이 쏠려 균형이 무너져 있던 중종, 명종 대의 훈척정치는 합리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국왕의 인척이 권신으로서 권력을 휘둘렀고 부정부패가 만연했다. 이를 목격한 사림은 대신의 기능을 부정하는 것을 정치개혁의 핵심으로 착각했다. 이에 언관 기능이 비대화돼 탄핵과 비판이 반복되며 당쟁이 격화됐다. 저자는 사림이 리더십의 변화를 꾀했지만 사림 역시 대신의 기능 자체를 억압해 균형을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이전 시대와 다를 바가 없었다고 꼬집는다.
 
시대 변화 과정에서 사림이 맞닥뜨렸던 새로운 리더십 설정의 문제는 정치의 보편적 과제다. 단기간에 커다란 사회, 경제적 변화를 경험한 한국은 기성세대의 권위주의와 젊은 세대의 수평적 리더십이 공존하는 과도기의 양상을 보인다. 두 종류의 리더십은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의 경험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 다른 호소력을 갖는다. 사림의 정치는 이전 세대가 보였던 문제점을 개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전 세대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극단적 선택의 결과로 실패했다. 사림의 모습은 세대로 구분되는 리더십의 충돌을 겪고 있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 대립이 아닌 통합에 바탕을 둔 새로운 리더십이 필요함을 시사한다.
 
프레임, 정치를 옥죄다
 
선조 8년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화되며 시작된 당쟁의 전개 과정은 정치 프레임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당쟁의 초기에는 특정한 상황이나 문제에 대한 판단의 차이만을 의미하는 시비(是非)가 동서인을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그러나 사림이 시비 판단에 매몰돼 당쟁이 격화되며 동서인을 구분하는 기준은 정사(正邪)로 바뀐다. 정사는 정체성에 대한 규정으로 정치적 프레임의 성격을 갖는다. 동인은 서인을 사당으로, 서인의 일원을 소인으로 칭했는데 소인은 정치적 대화나 타협의 대상이 아닌, 싸워서 격퇴해야 할 대상을 이르는 말이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정치적 프레임 형성의 원인을 훈척정치 속에서 만들어진 시비와 원칙에 민감한 사림 고유의 인간형에서 찾는다. 이 시기 인물들에 대한 평가에는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지나쳤다’는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저자는 프레임 논쟁이 역사 논쟁으로 이어졌다고 설명한다. 서인이 사당으로 규정됨에 따라 서인이 주도한 명종 말에서 선조 초에 걸친 사림의 개혁은 부정되고 말았다.
 
프레임 논쟁으로 격화된 당쟁이 선조에게는 오히려 권력을 불리는 기회가 됐다. 이 시기 선조의 모습은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저자는 선조가 조선 최초의 군(君) 출신 왕으로서 허약한 정통성 탓에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였다고 설명한다.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갈등을 적극 활용해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며 독재에 가까운 권력을 구축했다. 이로써 국왕과 신하가 함께 국가를 다스린다는 군신동치의 관념은 손상되고 사림의 이상 정치는 파행적 정치로 대체됐다.
 
정치적 프레임 설정에 따른 갈등과 여기서 파생되는 견제 기능의 상실은 보편적인 정치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 정치에서도 ‘종북’이나 ‘보수꼴통’과 같은 상대 당에 대한 정치적 프레임은 타협의 여지를 없애고 정치를 끝나지 않는 쟁투의 장으로 만든다. 이런 프레임 속에서 진보, 보수의 공과에 대한 평가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 전후 경제 성장을 가능하게 했던 보수 정권의 업적이 부정되고 민주주의의 수준을 끌어올린 진보 정권의 성과는 퇴색된다. 그러나 사림의 역사는 정치의 요체가 시비와 원칙의 분별이 아닌 소통에 존재함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 시기 정치 행위자들의 문제를 정치적 결과에 대한 책임의식의 부재로 요약한다. 자신의 신념을 맹목적으로 중시했던 사림은 당파 간 시비와 정사의 판단을 정치 개혁보다 우선에 뒀다. 선조 역시 조정을 책임져야 하는 의무와 지위를 가졌음에도 자신의 힘을 최대화하는 데만 치중한 나머지 공적 이상의 정책적 구현에는 무관심했다. 정치적 책임의 실종은 국정의 무정부적 사태를 초래했다. 이 같은 선조 시대 정치의 모습은 오늘날 한국 정치에 반성적 성찰의 기회를 준다.
 
조선 선조 때 벌어진 당쟁을 분석해 ‘스스로 확신한 도덕적 정당성’이 분열을 정당화하는 기제로 작용했다고 말한다. 진정성도 시대적 상황에 지배되고 대의를 잊으면 욕망의 지배를 받는다고 경고한다. ‘왜 선한 지식인이 나쁜 정치를 할까’. 이정철 한국국학진흥원 책임연구위원이 지난해 11월 출간한 책의 제목이다. 선조 8~23년(1575~1590년) 당쟁이 격화되는 과정을 상세하게 담았다. 책이 나올 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의 전모가 구체적으로 밝혀지고 있었다. 조선의 당파싸움이라는 부정적 소재를 다룬 책을, 지식인이 아닌 나쁜 사람이 나쁜 정치를 한 것에 대한 전 국민적 분노가 끓어오를 때 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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