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황대권 최후진술서
황대권
2 hrs
재판정에서 읽었던 최후진술서를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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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진술서
먼저 길어질 수 있었던 재심을 기꺼이 맡아주신 재판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열정을 가지고 변론을 해주신 김형태, 김진영 두 변호사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저는 1974년도 학번으로 학창시절 내내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와 써클활동에 관여했지만 운동권의 변두리에 있었던 평범한 학생이었습니다. 졸업 후 이론적으로나마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기여할 목적으로 유학을 가 미국 뉴욕의 뉴스쿨사회과학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1985년 6월 유학생 신분으로 아기를 갖게 되어 학업기간만이라도 부모님께 아이의 양육을 맡기려고 귀국을 했다가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남산안기부로 끌려갔습니다.
안기부 지하실에서 저는 군사독재정권이 국내민주화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엄청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안기부가 1985년 요원의 불길처럼 타오르기 시작한 학생대중들의 반미반독재투쟁에 찬물을 끼얹기 위해 만든 것입니다. 저희가 검거되기 일주일 전인 1985년 5월 23일 서울시내의 학생들 73명이 서울미문화원을 점거농성하여 전국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의 공범으로 되어있는 김성만씨 등은 당시에 미문화원 점거투쟁 지지 유인물을 만들고 있다가 현장에서 검거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저희를 미문화원점거투쟁을 주도한 ‘삼민투’ 조직의 배후로 만들려고 했으나 여의치 않자 다음에는 ‘통혁당재건위’ 사건으로 포장하려고 했습니다. 그것마저 개연성이 너무 없으니까 그냥 ‘유학생간첩단사건’으로 발표하고만 것입니다.
이 사건의 공범으로 묶인 김성만과 양동화는 유학생활 초기에 만나 국내정치상황을 두고 자주 얘기하던 사이였을 뿐 무슨 운동조직을 만들거나 한 적이 없습니다. 그들에 관한 소식도 안기부에 잡혀 와서 처음 들었습니다. 안기부는 태어난지 한 달도 안 된 아기를 안고 있는 아내를 들먹이며 제가 간첩이었음을 시인하라고 무려 60일에 걸쳐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했습니다. 결국 저는 북에 간 적도, 북한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 해외에서 반정부신문을 발행하는 한 언론인과 교류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간첩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갓 태어난 한 가정이 풍비박산 나버렸고 저는 고문으로 망신창이가 된 몸으로 무기수의 삶을 살아야만 했습니다.
사실 오늘 이 법정에 서 있을 사람은 제가 아니라 한 사람의 가정을 파괴하고 불법구금 상태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자행한 전두환과 그 하수인입니다. 그런 불법행위를 저지른 범죄자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애국’으로 포장한 채 지금도 호위호식하고 있는 반면에 저는 35년이나 흐른 뒤에야 진실을 가려달라고 법정에 서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진정 이 나라가 법치국가이고 정의를 존중하는 민주국가라면 불의한 국가폭력에 희생된 희생자들의 피눈물을 닦아주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저는 아직도 고문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으며 애비도 모르고 자란 아들과의 관계도 회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대합니다.
(2019년 12월 20일 바우 황대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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