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4

한국의 사회운동을 치유의 면에서 보기시작한 위안부문제 연구가 박유하 교수



[마음공부] [한국의 사회운동을 치유의 면에서 보기시작한 위안부문제 연구가 박유하 교수] - 2013년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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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밑의 글을 읽어보면 박유하교수의 아픔이 느껴진다. 위안부문제의 해결운동을 해온 자기 자신의 아픔뿐이아니라 한국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보운동들의 일종의 노선싸움에서 만들어지는 상처들을 안타깝게 느끼는 모습이 전달된다.
- 사회운동을 하자면 "자그마한" 노선의 차이에서 "적"으로 보다 "친구/동지"들로 부터 받는 상처가 더 크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운동의 목표를 달성하기는 커녕 과거의 동지들이 새로운 "적"이 되어 사회적인 에너지가 분산되고 운동가로서의 개인들은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계속 살게 된다. 적지 않은 경우에 운동가들의 "신념에 따르는" 생활은 평화와 행복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동지들 만이 아니라 가족관계에서 상처를 만들어 간다. 사회운동을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그런 일이 일어 나지 않을까. 나는 개인과 사회의 영적성장이 동반되는 사회운동이어야 상처를 더 만들지 안는 운동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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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Yuha
24 December 2013 ·



치유에 대해서

80년대의 대부분을 한국에서 보내지 못했다. 일본으로 유학가 있었던 탓이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민주화투쟁'이라는 것에 함께 할 기회가 없었고 '후일담소설'이라는 것도 나의 이야기일 수는 없었다. 당연히 NL이니 PD니 하는 구분도 아주 나중에 '지식'으로 알게 된 이야기다.
철도민영화를 둘러싸고 보이는 진보안의 갈등이(비판자들은 다른 한쪽을 '진보연할 뿐'이라고 말하지만) 과거의 갈등과 관계있는지는 나로서는 알 수가 없다. 그리고 사실 어느쪽이 옳은지에 대한 판단도 나로서는 아직 분명히 서지 않는다( 양쪽이 다 싫어할 소리.). 다만 어떤 이유가 되었건 일요일의 진압은 정부의 '잘못한 선택'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아무튼 그런 갈등을 보면서 기시감이 드는 건 '화해를 위해서'라는 책을 냈을 때 내가 받은 비난에도 비슷한 구조가 있었기 때문이다.(아직 현재형이지만)
사실 예상밖으로 몇몇 일간지가 호의적으로 언급해주었음에도 결국 거의 영향력이 없었기 때문일텐데 내가 비판했던 정대협관련자들은 특별히 비판을 하지 않았다. 무시로 일관했을 뿐이다( 이역시 현재형이지만) .
그런 구도가 바뀐 건 일본에서 번역판이 나오면서 예상밖의 평가를 받고 책이 팔리면서 내 책의 논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을 때 부터였다. 책의 반은 우익비판이었는데도 그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은 채 위안부문제해결운동에 대한 비판만을 들어'일본우익에 친화적'이라던 비난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샌가 '일본우익들이 높이 평가'했다는 근거없는 말로 바뀌어 있었다.
그런 비판들이 아팠던 건 그들이 나의 가까이에 있었던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혐한 스피치'가 과도화되면서 시작한 일본어 트윗에서 혐한파들에게 '죽어라'소리도 들은 적이 있지만 사실 그런 소리는 전혀 아프지 않다. 위안부문제를 둘러싼 생각에 대해 대립중인 양쪽의 생각을 함께 비판했는데 나를 상처준 이들은 나도 그 안에 있다고 생각했던 진보쪽이었다.
그래도 그런 상황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진짜 존경했던 이들이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과거청산의 한계'같은 걸 치밀하게 알지 못해도 그저 식민지배는 잘못된 일이었다고 생각하고 위안부할머니들의 증언에 눈물쏟는 그저 마음여린 이들이 응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일본의 교통비가 비싼 이유가 '국철'이 민영화되어 'JR'이 되었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이 논란에서 눈에 띄는 건 '진보연'한다고 비난받는 이들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더' 격하고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혹은 상대방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지는 비판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그 논리들이 맞고 아니고를 떠나 나는 그 점이 안타깝다. 그런 식의 공격은 비판받는 이들을 귀기울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등돌리게 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나자신, 나를 논리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일본우익'과의 거리로(즉 편가르기로) 비난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런 것이 진보라면 '진보'이기를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여러번이다.
그러나 '운동'이란 같은 생각을 갖는 이들을 늘리는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위안부문제 해결운동은 '접점'을 찾아 토대를 굳건히 하는 것이 아니라 미세한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잘라내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의 일본의 '혐한'은 그 결과이기도 하다. 그런 정황을 모르는 한국정부의 외교가 일본에서는 '고자질외교'로 불리고 정작 미국에게도 야단맞고(그것이 고작 '국가안보'를 위한 것이라는 것도 문제지만), 슬그머니 '정치와 역사의 분리'를 말하게 된 것이 최근의 형국이기도 하다. 자존심이란,자신의 생각을 무조건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늘 자기생각을 음미하고 후에 부끄러울 일이 없도록 검증하는 일이어야 하지 않을까.
'현장'이며 '속살'을 보았는가고 '진보연'한다고 비판받는 이들은 말한다( 사실 이들의 존재를 나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다른 문제는 몰라도 위안부문제 역시 '현장'이며 '속살'이라 할 만한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그런 모순까지도 끌어안는 방식으로 이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가,위안부 개개인의 체험이 많이 다른데도 '하나의 방식'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는 정치/국가문제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국가정보원의 대선개입에 분노하지만
그에 대한 분노가 철도민영화나 의료민영화반대와 결부되는 걸 우려한다. 그건 마치 대선에서 그랬던 것처럼 보다 많은 찬동자를 얻을 수 있는 길을 차단하는 일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좌우 갈등은 식민지배가 남긴 것이기도 하다. 그 때 '제국'에 어떤 태도를 취했는가로 조선인들은 심리적인 분열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때 저항한 이들(진보좌파)이나 그들의 계보가 이른바 '친일파'에 대한 비난을 더 격하게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 비판과 청산방식에 대해서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해 나갈 문제지만 그런 분열로 쪼개져서 갈등하는 일은 언제까지고 우리가 '식민지배'의 후유증을 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체제가 다른 북한과의 화해와 통일을 생각하는 이들이, 그에 비하면 미세한 차이인 '진보안의 차이'를 견디지 못하는 건 내 경험에 의하면 자신의 생각과 방식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다. 그러나 일본이 지배한 시대의 후유증으로부터 벗어나려면(진정한 일본극복?), 우리안의 갈등이 식민지시대의 유산이라는 것에 더 자각적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생각이 다르더라도 비난과 배척보다 설득과 접점을 찾는 방식이었으면 좋겠다. 일본에선 진보안의 사상대립의 시기에 서로 죽고 죽이는 일까지 벌어졌었다...'말이 안통하네트'와 그의 추종자들을 설득할 수 있는 것도, 아마도 그들의 상처까지 볼 수 있는 날이 아닐까.
갈기갈기 찢겨 불행한 우리자신의 '치유'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날,크리스마스이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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