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5
[북한은 왜?] 천리마운동
[북한은 왜?] 천리마운동 – ① 북한 대중운동의 표본, 천리마 운동
북한은 왜?, 연재 2019-12-02 Like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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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강제노동이 정말 존재할까? – 대중의 힘을 발동시킨 천리마운동
북한은 나라를 발전시키는 데서 국민의 역할을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김일성 주석은 “사회주의 건설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대중의 창조력을 최대한으로 동원하며 그들의 열성과 창발성과 재능을 전면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입니다”라며 국민의 역할을 강조했다.
어떤 사람들은 북한은 국민들을 동원해 강제노동을 시킨다고 말한다.
북한이 국민들을 강제로 노동시킨다는 말은 사실일까?
북한은 국민들을 어떻게 대했으며 어떻게 동원했을까?
① 북한 대중운동의 표본, 천리마 운동
북한 국민들이 경제발전을 위해 열정적으로 일했던 대표적인 사례로 천리마운동을 꼽을 수 있다.
천리마운동이란 1956년 12월 김일성 주석이 주재한 조선노동당 전원회의에서 결정해 진행한 운동이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통해 경제성장과 공업화에 큰 성과를 거뒀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통해 연평균 공업 성장률 36.6%를 달성하고 공업생산을 3.5배로 늘렸다.
또한, 1956년에 46.5%였던 기계설비 자급률을 1960년에 90.9%로 끌어올렸다.
이 천리마운동은 왜 시작되었을까?
북한은 1957년부터 제1차 5개년계획에 들어가기로 결정했다.
북한이 제1차 5개년 계획을 수행하는 데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강철이었다.
강철은 트랙터 같은 농업기계를 만들거나 공장이나 집을 짓는 등 모든 산업에 필요하기 때문에 많은 양이 필요했다.
그래서 철은 전체 산업에 미치는 영향이 커 ‘산업의 쌀’이라고 비유한다.
북한은 산업 발전에 필요한 강철이 부족했다.
제철소가 철광석을 원료로 선철을 만들면, 제강소에서 선철을 ‘강철’로 만든다.
실생활과 산업에서 쓰는 철은 바로 이 ‘강철’이다.
그런데 당시 북한에는 ‘강철’을 만들 수 있는 제강소는 강선제강소가 유일했다.
강선제강소만으로는 북한에 필요한 강철을 다 생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북한은 부족한 강철을 소련으로부터 수입하고자 했지만, 소련은 북한에 강철을 팔지 않았다.
북한이 제1차 5개년 계획의 경제발전 목표를 낮추지 않으려면 소련에서 수입하려 했던 강철까지 스스로 만들어야만 했다.
당시 강선제강소는 1년에 강철 6만 톤을 만들 수 있는 설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소련에서 수입할 예정이었던 몫까지 합쳐 9만 톤을 생산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일부 사람들은 어떻게 강철 6만 톤을 만들 수 있는 공장에서 9만 톤을 생산할 수 있냐며 불가능하다고 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1957년 강선제강소는 강철 9만 톤을 훌쩍 넘어 12만 톤을 생산해냈다.
북한 전체로 보면 1957년 생산능력이 19만 톤이라던 강철을 27만 톤 생산해냈다.
1957년 한 해 동안 공업은 44% 성장했다.
대성공이었다.
강선제강소의 목표 초과달성 소식은 북한 국민들에게 ‘할 수 있다’는 열의를 북돋아 준 듯하다.
강선제강소의 목표 달성을 계기로 북한 전역에 ‘천리마운동’이 시작되었다.
천리마운동은 하루 만에 천 리를 가는 천리마처럼 빠르게 발전하자는 운동이다.
천리마운동을 통해 북한에서 66명의 노력영웅이 탄생했고, 2만 4천여 명이 각종 훈장과 메달을 받았다.
노력영웅들의 이야기를 보면 북한 국민들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1968년 5월 11일에 열린 2차 천리마작업반 운동 선구자대회에서 김일성 주석은 이화순 노동자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화순 동무는) 72대의 방직기를 혼자서 다루는 세계적 기록을 창조하였습니다. 이 기대들을 다루기 위하여 그는 하루 여덟 시간 동안 180~200리를 달립니다. (중략) 이 동무가 한 해 동안에 짜내는 천만 하여도 100만 미터가 됩니다.”
어느 댐 건설 공사장에서는 노동자들이 29시간 동안 연속으로 작업해 40일 걸린다는 공사를 5일 만에 마쳤다.
또, 80km 길이의 철길 공사에 나선 노동자들은 원래 4년에 걸쳐 완공할 계획이었지만 75일 만에 공사를 완료했다.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해 북한의 빠른 경제발전을 성공시킨 것이다.
천리마운동은 천리마작업반운동으로 발전했다.
노력영웅은 개인에 대한 표창이지만, 천리마작업반운동은 함께 일하는 집단 전체가 영웅이 되자는 운동이다.
천리마작업반운동의 결과 5만 2,920개의 작업반이 ‘천리마작업반’ 칭호를 받았다.
천리마작업반이 5만 개가 넘으니 북한 국민 전체가 열성적으로 일을 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북한 당국도 생산현장에 현지 연구기지를 세우고 과학자와 기술자들을 보내 노동자들과 함께 기술혁신을 해나갔다.
생산활동의 양만 늘리는 게 아니라 질적 성장을 함께 이루려 한 것이다.
북한 국민들은 왜 이렇게 열심히 일했을까?
어떤 사람들은 북한 정부가 국민들을 억압하고 통제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 사람들이 조선 사람을 아무리 때리고 강제로 일을 시켜도 조선 사람들은 열성적으로 일하지 않았다.
조선 사람들은 일제에 반발해 일부터 태업을 하거나 노동현장에서 도망을 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그렇다면 천리마운동 때 북한은 어떻게 국민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었을까?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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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 천리마운동 – ② 북한이 국민을 대하는 방법 1. 국민을 믿는다
북한은 왜?, 연재 2019-12-16 Like 0
북한은 천리마운동에서 북한 국민들이 열성적으로 일했던 요인은 국민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잘 먹고 잘살길 바라는 것은 어느 사람이나 똑같다.
북한 국민들도 한국전쟁 이후 경제를 빨리 재건해 잘살게 되길 바랐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전쟁피해가 너무 막심하고 서구 선진국에 비해 기술문화 수준도 낮았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북한이 빠른 경제 성장을 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김일성 주석은 “주요 장애물로 된 것은 소극성과 보수주의, 기술에 대한 신비주의였습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일성 주석은 북한 국민이 나서면 제 힘으로 빠른 경제성장과 기술력 향상을 할 수 있다고 여겼다.
김일성 주석은 국민을 믿고 도와주는 경제발전 방식을 구현하기 위해서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북한 당 간부들에게 “당 일꾼들이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 대중의 창발성을 최대한 발동시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기한 내에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이런 북한의 정책은 어떤 효과를 가져왔을까?
전편에 소개한 강선제강소의 사례를 보자.
강선제강소는 당시 북한에서 ‘분괴압연기’를 보유한 유일한 제강소였다.
분괴압연기란 철강생산의 마지막 단계인 ‘압연’ 공정을 담당하는 설비였다.
당시 북한 철강생산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 강선제강소는 애초 1957년에 강재 6만 톤을 생산할 계획이었다.
김일성 주석은 1956년 12월 27일 강선제강소에 가서 소련으로부터 강재를 수입하지 못하게 되었음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김일성 주석은 우리는 제1차 5개년계획을 수정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철강을 더 생산해야 한다며 강선제강소에서 강재 9만 톤을 생산하자고 호소했다.
강선제강소의 일부 간부들은 지금 가진 압연기로는 7만 7천 톤 이상 생산하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강선제강소는 당장 부대설비를 증설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강철 9만 톤을 생산할 수 없다는 말이었다.
‘정말 불가능한 것일까?’ 고민한 김일성 주석은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을 직접 만나 방법을 논의하였다.
이 자리에서 한 노동자가 분괴압연기의 가동률을 높일 방법을 제안하였다.
압연기는 기존에 3일 가동하면 1일 동안 보수를 해야 했다.
즉, 1년에 100일은 보수를 해야 하는데, 보수시간을 100일에서 75일로 단축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이를 시작으로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작업공정의 효율을 높이기 위한 방안, 설비와 작업의 불합리함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 용광로의 수명을 연장하는 방법 등이 나왔다.
노동자들의 의견을 적극 수용한 결과 강선제강소는 9만 톤이 아니라 12만 톤을 생산하는 데 성공한다.
일부 간부들이 부대설비를 증설하지 않으면 할 수 없다던 일을 노동자들은 해낸 것이다.
북한은 강선노동자들이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고 적극적인 노동자들의 의견을 지지해주어 성공을 이끌었다고 평가한다.
강선제강소의 성공을 계기로 천리마운동이 북한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강선제강소의 소식이 북한 당국과 국민들에게 자신감과 열의를 갖게 해준 것으로 추측된다.
천리마운동이 시작되고 북한 전역에서 낙후한 경제상황과 기술수준 때문에 할 수 없다고 여겨졌던 과제들이 속속들이 수행되었다.
평양 전기 기관차 공장 노동자의 경우 북한 최초로 기관차 제작에 성공했다.
“우리는 그전 작업에 대한 경험도 설계도도 없었다. 세계에서 전기기관차를 제작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우리는 가파른 언덕과 커브가 많은 우리나라의 특수한 지형적 특징을 고려한 기관차를 설계해야만 했다. 우리는 설계를 끝마치는 데 6개월이 걸렸다. 우리는 엄청난 어려움을 겪었지만 우리가 설계를 마친 때부터 우리가 최초로 우리 손으로 만든 전기기관차를 생산할 때까지는 1년이 채 안 걸렸다.”
기양기계공장 노동자들은 김일성 주석의 지시를 받아 트랙터를 자체 제작하는 데 성공했다.
기양기계공장 노동자들은 소련에서 구해온 트랙터를 분해해 부품설계도를 하나하나 그려가며 트랙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북한의 소설, ‘총서 『불멸의 역사』 인간의 노래’를 보면 기양기계공장 노동자들이 겪은 어려움이 잘 나온다.
수령님께서는 분사구와 연료펌프부란자(플런저)를 찾아쥐시고 문상혁이를 돌아보시였다.
“이것이 허용오차 1천 분의 1미리메터(밀리미터)를 다툰다는 부속품들이요?”
김일성 주석의 물음에 문상혁(기양기계공장 기사장)은 이렇게 답했다.
“예, 이 두 부속품은 만들기 곤란합니다.”
트랙터를 자체 생산하기에 북한의 기술력이 아직 뒤떨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기양기계공장 노동자들은 트랙터 제작에 나섰고 6개월 만에 성공했다.
기양기계공장 노동자들이 처음 만든 트랙터는 시험운전에서 뒤로 움직였다고 한다.
그러자 김일성 주석은 “뒤로 갔으면 앞으로도 갈 수 있다”며 노동자들을 독려해주었다고 한다.
북한은 노동자들이 해낼 것이라고 믿고 과제를 주었고, 실패가 있더라도 끝까지 해낼 수 있도록 독려한 것이 결실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국민들은 자신감과 열의만큼 노동을 더 많이 해나갔다.
소설 ‘인간의 노래’에는 이런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건설지휘부 일군이 자랑삼아 청년 건설자들이 하루 4시간 자기 운동을 한다고 말씀드리자 (김일성) 수상님께서 그를 책망하시었소.
"4시간 자는 운동은 좋은 운동이 아니요. 잠자는 시간을 7~8시간으로 하고 일할 때에 능률을 높이도록 해야 하고. 4시간 자는 운동은 그만두시오."
그랬지만 수상님께서 다녀가신 후 우리들의 기세는 더 높아져 아예 잠을 잊은 듯했소. 그래 지휘부에서는 하루 무조건 7~8시가 자도록 엄격히 통제할 데 대한 지시를 떨구었소. 그래도 잘 집행되지 않고 <도적작업>이 생기자 보초까지 세우게 된 거요.
한은 국민들이 열정적으로 일한 데 대해 북한이 국민의 창조력을 믿고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기 때문에 국민의 열의와 재능이 발양된 결과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북한은 북한 국민에 대한 믿음이 천리마운동을 낳았다고 강조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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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은 왜?]천리마운동 – ③ 북한이 인민을 대하는 방법 2. 민심을 살핀다
북한은 왜? 2019-12-24 Like 0
김일성 주석은 경제발전을 위한 관건은 국민에게 있다고 여겼다.
“우리 인민은 우리 당의 영도 하에 자기의 창발성과 헌신적 노력으로써 모든 난관과 애로들을 극복하여 왔으며…”
– 김일성 주석이 1956년 4월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한 사업보고
그런데 당시 북한 국민들 속에는 풀어야 할 과제가 있었다.
한국전쟁 때 입은 마음의 상처가 아직 다 가셔지지 않았던 것이다.
북한 국민 중에는 한국전쟁 당시 치안대라는 조직에 가담해 미군을 도운 사람도 있었는데, 북한 국민들 중 일부는 이 치안대 가담자들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었다.
그리고 남과 북이 나뉘어 있던 상황에서 남한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돌아온 귀환병과 월남한 사람들의 가족들도 있었다.
일부 북한 국민들은 이런 귀환병과 월남자의 가족들을 미국의 간첩 등으로 의심하기도 했다.
실제로 당시 북한에서는 한국군과 미군이 후퇴할 때 함께 월남하려다가 실패한 사람이 북한에 숨어 지내다가 발각되는 경우도 있었고, 미국의 지시를 받아 공장 설비를 파괴하는 일도 일어나곤 했다.
그런데, 귀환병, 월남자 가족 중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도 편견과 차별을 받게 되었다.
강선제강소의 노동자 진응원은 귀환병 출신이라서 의심을 받았던 사례이다.
소설 ‘인간의 노래’에는 강선제강소의 책임자가 노동자 진응원을 교대반장에 임명하려 하자 한 간부가 이렇게 대꾸하는 장면이 나온다.
“교대반장이 큰 자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심사숙고해서 사람을 골라 그 자리에 앉혀야지요. 진응원이는 귀환병이 아닙니까. 귀환병이라 해서 못 믿을 건 없지만 안기호 같은 좋은 당원을 떼고 귀환병 출신을 대신 교대반장 시키는 건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이 고쳐지지 않으면 진응원 같은 사람은 북한 정부에 반발심을 갖고 경제발전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게 될 것이다.
북한은 국민들을 화합하고 융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일성 주석은 간부들에게 출신이 나쁘거나 과거에 죄를 지었더라도 오늘날 성실하게 일한다면 문제 삼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과거의 성분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실지 사업에서 검열되었으며 현재 자기 맡은 사업을 성실하게 집행한다면 그들에게 또 무엇을 요구하며 추구할 것이 있겠습니까?
– 김일성 주석이 1956년 조선노동당 제3차 대회에서 한 보고
‘출신’이나 ‘과거의 죄’는 월남자의 가족, 귀환병, 그리고 과거 지주였던 사람이나 자본가까지도 포함되었다.
김일성 주석의 지시에 따라 조선노동당은 각 군의 당위원회가 치안대에 가담했던 사람, 월남자 가족, 포로 귀환자를 조사해 포용 방안을 마련하고 실행하도록 했다.
리당위원회와 인민위원회 간부들이 나서서 가가호호 방문하고 국민들 사이에 있는 갈등과 감정을 풀어주었다.
김일성 주석의 정책은 북한 국민의 호응을 얻은 듯하다.
1948년 73만 명가량이었던 조선노동당 당원은 1956년 1월 1일 116만여 명, 천리마운동 후인 1961년에는 131만여 3명으로 확대되었다.
북한이 민심을 살펴 갈등을 적극적으로 해소하니 북한 국민들 사이에서 조선노동당에 대한 신뢰가 높아진 것이다.
조선노동당에 대한 신뢰가 높아지자 국민들은 조선노동당이 호소하는 일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앞서 소개했던 진응원 역시 일부 사람들의 의심에도 교대반장으로 임명되었고 훗날 노력영웅 칭호를 받는다.
더 나아가 진응원은 천리마작업반운동을 직접 제안한다.
천리마운동을 거치며 북한은 “어떤 복잡한 계층이라도 능히 포섭하고 교양 개조할 수 있는 강유력한(강력한) 당”이 되었다며 앞으로 “전체 인민의 단결을 일층 강화할 것이며 전 사회에 신뢰와 화목의 분위기가 지배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북한은 민심을 적극 헤아렸던 것이 좋은 결과를 낳았다고 본 것이다.
김일성 주석은 이후로도 북한의 간부들에게 민심을 얻고 국민들과 더 가까이에서 일하도록 늘 현지에 내려가라고 강조했다.
국민과 가깝게 지내며 나라를 이끄는 북한 특유의 ‘현지지도’ 정치가 본격화된 것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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