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2

기타지마 기신 - 일본 불교의 평화실현 운동: 조도신슈(淨土眞宗)

일본 불교의 평화실현 운동: 
조도신슈(淨土眞宗)의 반(反)원전 및 반(反)야스쿠니 운동을 중심으로*

49) 기타지마 기신 (욧카이치대학) 

*일본어 원제는 
日本佛敎の平和實現運動: 淨土眞宗の反原發と反靖國運動を中心に” 이고, 
이찬수(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연구교수)가 번역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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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요약 

전후(戰後) 50년이 가까워지면서 일본 내 여러 불교 교단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침략전쟁에 가담했던 사실에 대한 고백과 희생자에 대한 사죄 및 참회의 결의를 공식적 으로 시행했다. 이 결의를 종교 생활 속에서 얼마나 현실화해야 하는지가 모든 불자들에 게 제기되고 있는 질문이다. 이러한 질문이 풍부한 결실을 거두려면 우선 왜 일본의 불 교 교단이 국민국가 형성 과정에서 국가신도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와 협력의 길을 택했 는지 그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 평화의 과제 를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도신슈(淨土眞宗)는 10개의 종파로 이루어져 있고, 2만 개의 사원과 2000만 이상의 신자가 있다. 그런데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와 니시혼간지(西本願寺) 등의 본산(本山)은 신란(親鸞) 성인의 가르침에 반하는 진속이제론(眞俗二諦論)에 근거해 천황제에 적극 협 력했다. 조도신슈에서 진속이제론은 종교적 신앙을 정신세계에만 한정하고 신자로 하여 금 맹목적으로 국가에 따르게 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했다.

13세기 신란 성인은 불교의 가르침을 매도하는 살해범조차 자신의 죄가 크다는 사실 을 깨닫고 불교의 가르침으로 생각을 바꾸면 구제될 수 있다고 설했다. 이 논문에서는 이러한 신란 성인의 가르침에 입각해 조도신슈의 승려와 신자가 참회의 행동으로 참여하고 있는 ‘반(反)원전 운동’과 ‘반(反)야스쿠니 운동’의 의의를 밝히고자 했다. 그들의 평화 운동은 일본국 헌법 제9조 및 제20조와 나눌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는 시민운동이면서 동시에 종교적인 운동이기도 하다. 이들 운동은 ‘죽여서는 안 된다, 죽이게 해서도 안 된 다’는 불교적 원칙에 근거해, 타자를 평등한 인간으로 존중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 조도신슈(淨土眞宗), 신란(親鸞), 진속이제론(眞俗二諦論), 전쟁참회, 반원전 운동, 반야스쿠니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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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메이지 유신으로 구미형 근대 ‘국민국가’를 만들어 아시아에서 제국주 의를 형성하려 했던 세력은 당시까지 국가와 한 몸이었던 불교의 ‘국교 적’ 역할을 부정하고 배제했다. 그러면서도 종교를 벗어나기보다는 모든 종교의 상위에 있는 천황의 신권적 절대성을 내세웠다. 그 이유는 근대 국민국가도 하나의 ‘국가’로서, 절대적인 것에 의한 자기의 정당성과 존 속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구미의 근대국가가 자기 의 절대성을 보증하기 위해 방치되었어야 할 그리스도교로부터 ‘정의’라 는 개념을 도입했던 것에서도 볼 수 있다.

근대 국민국가가 존속하기 위해서는 정치권력만이 아니라, 스스로의 존속과 정당성을 보증해주는 이데올로기도 필요하다. 그 이데올로기는 세속적 측면을 가지면서도 그 세속성을 초월하는 것이어야 한다. 근대 일본의 지배자에게 있어서 ‘국민국가’ 형성에 합치하는 이데올로기는 ‘민 족주의’였다. 식민지의 획득을 전제로 하는 ‘구미 근대화 노선’과 불가분 의 관계에 있는 ‘국민국가’에 필요한 이데올로기는 자기를 절대화한 ‘자 민족 중심주의’이다. 막번(幕藩)체제로부터 권력을 찬탈한 ‘유신정부’의 지도자들은 이것을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신성화하고 절대화함으로써, 자기에 대한 비판을 피하고, 내부의 대립을 넘어, ‘국민’을 끌어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국가신도 체제가 확립되는 과정에 모든 종교는 완전히 그 지배하에 놓 였다. 그것은 종교로부터 사회성을 제거시켜 관심을 마음속에만 한정시 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본래 종교는 사회와 정신을 분리시키지 않고 전 인간적 해방을 추구해야 한다. 하지만 국가신도 체제 하에서의 종교는 사회·정치적 가치와 정신적 가치를 분리시켜, 정치체제에 무비판적으 로 따르고, 정치적 요구에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사회와 정치로부터 분리된 ‘마음 속’만의 안정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변질했다. 일본의 종교 교단은 텐리혼도(天理本道) 등 극히 몇 안 되는 교단을 제외하고, 대부분 제국주의·식민주의로 가는 길을 걸었다.

전후(戰後) 50년을 맞이하던 시기에 일본 불교 교단 상당수는 전쟁의 가해 책임을 고백하고 참회하는 결의를 시행했다. 문제는 그러한 결의를 신앙적 실천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해낼 것인가에 있다. 이 구체화의 열 매를 풍성하게 하려면 근대 국민국가 형성기에 왜 종교가 체제 협력의 길을 걸어갔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해야 하고, 전후 평화 실현의 과제를 어떻게 이어가야 하는지를 보여줄 필요가 있다. 본 논문에서 이 과제를 분명히 해보고자 한다.

Ⅱ. 아시아·태평양전쟁 후 50년과 종교 교단의 자기비판

일본 종교 교단이 침략 전쟁에 협력했던 사실에 대한 고백과 참회 가운데 가장 빠른 것은 1967년 3월에 나온 ‘제2차 대전 당시 일본 기독교 교단의 책임에 대한 고백’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실로 저희 조국이 죄를 범했을 때 저희 교회 또한 그 죄에 빠졌습니다. 저희는 ‘파수꾼’의 사명을 소홀히 했습니다. 마음 속 깊은 아픔으로 이 죄 를 참회하오니, 주님, 용서를 바라옵니다. 아울러 세계, 특히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있는 교회와 형제자매, 그리고 우리나라의 동포에게 마음으 로부터 용서를 청하는 바입니다.”1)

불교 교단의 전쟁 협력에 대한 고백과 참회는 이보다 훨씬 늦게 ‘전후 50년’을 맞이하는 시기에 많이 나왔다. 일본 불교에서는 흔히 연기법요 (年忌法要)를 50회기(50回忌, 사후 50년기)로 매듭짓는 습속이 있어서(실 제로는 49년째에 법요를 행하는 경우가 많다), 전몰자의 50회기 법요와 ‘전후 50년 문제’는 어렵지 않게 일체화할 수 있다.

각 불교 교단에서는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사이에 ‘전쟁 가담 책임에 대한 참회’ 및 ‘평화’의 맹세나 결의가 잇달아 여러 형태로 이루어 졌다. 다음이 그 예들이다.

조도신슈 오오타니파(淨土眞宗 大谷派) 전쟁 책임 고백 ‘전체 전몰자 추도 법회에 맞추어’(1987년 4월) 조도신슈 혼간지(淨土眞宗 本願寺) 종회(宗會) ‘평화에 대한 우리 종문(宗門) 의 강한 염원을 전국과 전 세계에 철저히 전하겠다는 결의’(1991년 2월)

소토슈(曹洞宗) ‘참사문(懺謝文)’(1992년 11월) 텐다이지(天台寺) 문종(門宗) ‘핵 폐기를 요구하는 종문(宗門)의 호소’(1994년 6월) 또 그리스도교 관계로는 아래와 같은 것이 있다.

일본 성공회 ‘8·15 평화에의 호소’(1987년 8월) 일본 침례교 동맹 ‘전쟁 책임 회개’(1992년 8월)



1) 日本宗敎者平和協議會 編, 󰡔宗敎者のw戰爭責任懺悔·告白資料集󰡕 (東京: 白石書店, 1994), p.7.

다음 인용은 전후 46년을 지내며 ‘전쟁 책임·평화에의 염원’을 담은 혼간지(本願寺) 종회(宗會) 최초의 공식 표명문이다. 그 표명문의 특징을 보자.

…쇼와(昭和) 16년(1941년) 12월 8일에 발발한 태평양전쟁은 우리나라와 주변 여러 나라들에 심대한 피해를 남기고, 쇼와 20년(1945년) 8월 우리나라 가 세계 첫 피폭국이 되는 비참함을 동반하며 종결되었다. 이런 쓰라린 역사 를 딛고서 전쟁 후에는 ‘항구적인 평화를 희구’하는 현재의 일본국 헌법을 채 택해 우리나라의 국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중국대륙·한반도·동남아 시아를 중심으로 한 여러 나라 사람들을 전화(戰禍)에 휘말리게 해 막대한 희생자를 낸 전쟁 가운데서도 소화 20년(1945년)에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왔

다. 3년 후인 헤세(平成) 6년(1994년)에는 이들 전몰자 50회기를 맞는다. … 종문(宗門)에서는 이 50회기를 맞이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戰禍)로 쓰러진 사람들과 원폭 피해자 혹은 전쟁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 ‘원수와 친구를 평등히 대하는’[怨親平等]의 마음으로 추도하고 원조의 손길 을 내 어야 할 책무가 있다. 또 비록 군부를 중심으로 한 압력이 있었다고 는 해도, 전쟁 전과 전쟁 중에 결국은 전쟁에 협력했었다는 사실과 진속이제 론(眞俗二諦論)이라는 교학을 교묘하게 이용해 조도신슈(淨土眞宗)의 본질 을 잃어버렸었던 사실에 대해서도 부처님과 조사 앞에서 깊이 참회해야 한 다. 이상의 취지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청한다.

(1) 총국(總局)은 과거의 전쟁 협력에 대해 깊은 반성을 표명하고, ‘세상의 안온, 불법의 홍포’라는 종조의 유지에 부합하도록, 평화를 바라는 염 불자(念佛者)의 염원을 전국, 전 세계에 행동으로 보여준다.

(2) 위 항의 행동을 구체화하기 위해 모든 종문(宗門)이 합의할 수 있는 법 요의식과 그 외의 사업계획을 책안한 뒤, 전체 교구에서 실시할 수 있 도록 종교상의 처치를 제시한다.…2)

불충분하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첫째로, 일본이 아시아 여러 나라에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이 가해에 대한 인식은 1992년 11월에 소토슈(曹洞宗) 종무총장(宗務總長) 명의로 나온 ‘소토슈 참사문 (懺謝文)’이 더 구체적이고 명확하다. 거기에는 “일본의 해외 침략에 갈 채를 보내고 그것을 정당화해온 종문 전체의 책임을 물어야 할 것”이라 지적하고 있고, 또한 “석존의 법맥을 이어받는 것을 신앙의 귀추로 하는 우리 종문이 아시아의 다른 민족에 대한 침략 전쟁을 성전(聖戰)으로 긍 정하면서 적극적인 협력을 행했다”는 것, “(일본이) 조선을 속국화해 … 한 국가와 민족을 말소해 버렸는데도, 우리 종문은 그 첨병이 되어 조선 민족을 우리나라로 동화시키는 것을 도모하면서 황민화 정책 추진의 담 당자가 되었다”는 것, “불교를 국책(國策)이라는 세상의 법에 예속시키고, 게다가 다른 민족의 존엄성과 정체성을 빼앗아갔다는 이중의 과오”를 인 정하면서 참회하고 있다. 



2) 위의 책, pp.38~39.


둘째로는, “항구적인 평화를 희구하는” 현재의 일본국 헌법은 메이지

이래 이어져온 일본의 ‘침략 노선’에 대한 부정 위에서 성립되었다는 지 적이 보인다. 셋째는, 혼간지(本願寺) 교단의 전쟁 협력의 사상적 기반이 된 진속이제론(眞俗二諦論)에 대한 지적이다. 혼간지 교단에서 이용한 진속이제론이란 정신적·종교적 세계와 사회적·정치적 세계를 분리해, 전자에 관한 인식을 진제(眞諦)라 부르고, 후자에 관한 인식을 속제(俗諦)라 부르면서, 종교적 진리는 ‘마음 속’에만 담아두고 사회·정치적 차 원에서는 “천황제 국가에 복종하라”라는 요구를 정당화시키는 이데올로 기로 작용해 왔다. “사회·정치적 인식=천황제 국가에 의한 민중 탄압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절대 복종”을 부동의 기준으로 삼으면서 진속이제론 은 전쟁 협력의 사상적 기반이 된 이데올로기가 되었던 것이다. 셋째는 이에 대한 ‘깊은 참회’가 기술되어 있는 것이다. 넷째는, “과거의 전쟁 협 력에 대한 깊은 반성”에 입각해서 신란(親鸞, 일본 조도신슈(淨土眞宗)의 개조–옮긴이 주)의 사상을 현대화함으로써 평화에의 염원을 행동으로 보 여야 한다는 지적이다.

이 성명문에서는 전쟁 후 처음으로 ‘전쟁 책임과 평화에의 염원’을 종 회(宗會)라는 최고 결의 기관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결의했다. 그리고 내 용으로는 “일본국 헌법의 항구평화주의”, “우리나라와 주변 여러 나라에 준 심대한 피해와 교단의 전쟁협력”에 대한 참회, “전쟁 협력의 이데올로 기였던 진속이제에 대한 지적”, “평화를 향한 염불자의 염원을 행동으로 보이는 것”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이런 점들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 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어떤 식으로 서로 분리되기 어렵 도록 결합하고 있는지, 명확한 행동을 제기하는 신앙의 시점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일본 근대의 걸음을 신앙과 유기적·주체적으로 결합 시키는 시각이 희박한 데서 오는 약점이다.

이러한 시각이 희박해진 것은 신앙을 기축으로 하되 종교와 사회·정치의 관계를 분리시키지 않는 자세에 대한 생각을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앙을 인간의 사회 정치적 연대와 해방의 시점에서 주체적으로 파악하거나 실천적으로 풍부하게 만들어가는 이치가 불명확 했기 때문이다. 이런 자세가 사회 정치 인식을 흐리게 하고 행동을 주저 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은 전쟁 이전의 종교 교단에 공통적이었다. 이런 자세의 근저에 있던 것이 조도신슈의 경우는 진속이제론이었다. 진속이 제론이란 무엇인지, 그것이 왜 근대 천황제 국가를 옹호하는 기제가 되 었는지를 분명히 밝히는 것은 전쟁 전 일본에서 종교와 국가의 관계를 밝히는 것과도 연결되는 보편성을 갖고 있다. 또 이러한 진속이제론을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지 보여주는 것은 전쟁 협력에 대한 참회에 기반을 둔 삶의 방식 및 행동과도 연결되어 있다. 


Ⅲ. 진속이제론과 신란의 사상 

1. 진속이제론이란 무엇인가


전술했듯이 조도신슈에서는 근세의 교의 이해에 기초를 두면서 진속 이제론을 교단의 신앙과 천황제의 타협을 도모하는 이데올로기로 삼아 왔다. 니시혼간지(西本願寺) 교단에서는 1886년 1월에 제정된 “종제”(宗制, 니시혼간지의 헌법)에서 조도신슈의 교의를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일종(一宗, 조도신슈 니시혼간지(淨土眞宗 西本願寺)를 지칭–옮긴이 주) 의 교지에서는 부처님의 이름[佛號]을 믿고[聞信] 큰 자비[大悲]를 염보(念報)하는 것을 진제(眞諦)라 하고, 사람의 도[人道]를 이행해 왕법(王法)을 준수하는 것을 속제(俗諦)라 한다. 그런즉 타력의 안심(安心)에 머물면서 보은(報恩)의 경영(經營)을 이루는 것이 이제상자(二諦相資, 진제와 속제의 상호의존–옮긴이 주)의 묘지(妙旨)이다.3) 

3) 信樂峻麿 編, 󰡔近代眞宗思想史硏究󰡕 (京都: 法蔵館, 1988), p.9. 

여기서 진제란 아미타불을 부르는 소리인 ‘나무아미타불’을 믿고, 아미 타불의 대자비의 마음을 기억하면서 그에 보응해가는 것이다. 즉 ‘진’이 란 종교적 세계의 진리를 의미하고, ‘제’란 종교적 세계에서의 진리 인식 을 의미한다. 속제란 사람으로서의 길, 즉 인륜을 실천하며 세속법을 지 켜가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해진 세속 도덕, 정치 질서를 지킨다고 하는, 세속 세계의 진리 인식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일단 ‘종교적 세계’와 ‘세속적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만, 사실상 양자는 상보적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특히 ‘속제’의 내용은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조도신슈 오오타니파(眞宗 大谷派))가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 다. 히가시혼간지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1886년 9월에 제정된 ‘종제사법’ (宗制寺法) 제17조에서 ‘진속이제론’을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 본종(本宗, 東本願寺)의 교지(敎旨)는 일향전념(一向專念)을 종의(宗義) 로 하면서 … 일심(一心)으로 아미타여래 일불에 귀의함으로써 왕생 정토의 안심(安心)을 얻는 것이다. 이 일념(一念)이 피어오를 때 왕생의 업이 이루 어지기[業事成辯] 때문에, 오로지 칭명염불(稱名念佛―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는 염불 행위―역주)이라는 한 가지 행위(一行)로 보사(報謝, 은혜에 보답함―역주)를 이루는(經營) 것을 진제문(眞諦門)이라 한다. 황제(皇上) 를 삼가 받들어 정책[政令]을 준수하고, 세상의 길[世道]을 거역하지 않으 며, 인륜(人倫)을 거스르지 않고, 자기의 본업에 힘써 국가를 이익되게 하는 것을 속제문(俗諦門)이라 한다. 즉, 진제로 속제를 돕고, 속제로 진제를 돕 는, 진제와 속제의 상호 도움[二諦相依]으로 현실세계와 정토세계[現當二世] 를 서로 이익 되게 한다. 이것이 이제상자(二諦相資)의 법문이다.4)
4) 淨土眞宗本願寺派安藝敎區 編, 󰡔淨土眞宗の平和學󰡕 (京都: 同朋舍出版, 1995), p.131.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 종제사법(宗制寺法)의 진속이제론도 내용은 니시혼간지(西本願寺)와 동일하다. 단지 히가시혼간지 쪽이 속제에 대해 더 구체적인데, 그 내용은 “천황을 삼가 받들어, 국가가 정한 법률을 지 키고, 세상에서 사람이 지켜야 할 길을 거역하지 않으며, 천황제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행동하는 것”이다. 또 진제와 속제는 ‘상호도움과 상호의 존’(相資·相依)의 관계에 있다. 진제와 속제는 상호의존의 관계로서, 서 로 힘을 합하는 것이 이제상자(二諦相資)의 내용이 된다.

이 진제와 속제의 ‘상자·상의’ 관계는 결국 궁극성[第一義性]에 대한 물음과 연관이 있다. 불교적 측면에서 보면 궁극성은 ‘진제’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불교적 진리에 근거해야 세속 사회가 인간화하는 길을 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교는 세속을 넘어선 절대 진리에 대해 말하지만, 세 속 권력은 아무리 이상적이라도 절대성을 갖지는 않는다. 따라서 후자가 전자를 궁극적인 것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불법[眞諦]과 세법[俗諦]의 관계에 대해 역사적으로 보면, 10세기의 현 체제(顯密體制, 종교 세력과 세속 권력의 연합 체제)로부터 15세기 무 렵까지는 불법(佛法)의 우위성이 지속되지만, 17세기의 막번 체제(幕藩體制)의 성립을 거쳐 18세기경에는 불법의 우위성이 현실과 이론 모두에 서 완전히 붕괴한다. 그에 따라 시가라키 다카마루(信樂峻麿) 선생이 말 하고 있듯이5) 근세 조도신슈의 교학에는 ‘속제’가 ‘진제’에 대해서 궁극성 을 지니는 권력유착론이 출현한다. 니시혼간지(西本願寺, 조도신슈 혼간 지파)의 학승인 쇼카이(性海, 1765~1838)의 󰡔진속이제십오문(眞俗二諦十五門)󰡕에 나오는 “신국(神國) 안에 불법(佛法)이 있다”라는 말이 그것을 의미한다. 근대의 진속이제론은 이처럼 속제를 근본으로 한 권력 유착을 기반으로 삼은 것으로서, 그것은 ‘국가 총동원 체제’, 사상적으로는 ‘체제 보좌[翼贊] 체제’로 귀결되고, 결국 ‘전시교학’(戰時敎學)에 이르게 된다. 

5) 信樂峻麿, 󰡔宗敎と現代社會󰡕 (京都: 法藏館, 1984), pp.218~219. 信樂峻麿는 전(前) 류코쿠대학(龍谷大學) 학장·명예교수이다. 

6) 大西修, 󰡔戰時敎學と淨土眞宗󰡕 (社會評論社, 1995), p.9. 


전시교학이란 전쟁기에 초국가주의적 색채를 농후하게 띤 혼간지(本願寺) 교단의 교학6)이다. 거기에서는 종교상의 초월자인 아미타불과 세 속 세계의 최고 권력자인 천황과의 중층적(重層的) 이해가 보인다. 오오 니시 오사무(大西修)는 그 구체적인 예로 사사키 요시토쿠(佐々木憲德) 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있다. 조도신슈라는 종교의 특질은 두 마음 없이 아미타불에만 귀의한다는 순수한 마음에 있지만, 일본 국민의 입장에서는 그것이 그대로 천황의 마음 자체 에, 오로지 천황을 믿고 따르는 것에 연결되어 가는 것이다.7)

이 중층화(重層化)는 다음처럼 천황 지배의 근본성으로 귀결된다. “진 종의 신자는 종교적 영역에서는 한 마음 한 뜻으로 수양하고 있기 때문 에, 국가적 영역으로 들어가면 한 마음 한 뜻으로 오직 천황 각하 일인에 절대 순종하며 모신다.”8) 시가라키 선생은 진속이제론의 발생 근거를 다 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다.

신란 사후에 진종의 신심(信心)이 점차 세속과의 유착 속에서 파악되고 이해되어 온 필연적 귀결로 근세, 근대에 들어 진속이제론이라는 주장이 생 겨나고, 마침내 그 필연적 연장으로서 전시교학이 태어난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늘 신란이라는 원점으로 충분하고 정확하게 되돌아가지 못한 채, 오랜 전통적 해석을 그대로 긍정하고 떠맡으면서 쌓여온 그 퇴적 속에서 신란을 파악하는 형태로 조도신슈 교학이 영위되어 오다가, 급기야 이와 같은 전시 교학이 태어나고, 다카마노하라(高天原, 아마테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가 지배하는 천상의 나라)와 정토(淨土)가 동일해졌으며, 천황 귀일과 아미타불 신심이 중복되기에 이르렀습니다.9)

시가라키에 의하면, 진속이제는 신란 사후 교단과 세속 권력의 유착에

의해서 태어났을 만큼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까닭에, 신란으로 되돌 아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럼 신란은 진속이제의 기본이 되는 ‘불법(佛法)과 세법(世法)’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 분명히 해보자.



7) 위의 책, p.12.

8) 日本宗敎者平和協議會 編, 󰡔宗敎者の戰爭責任懺悔·告白資料集󰡕, p.44.

9) 信樂峻麿, 󰡔宗敎と現代社會󰡕, p.223. 

2. 신란이 파악한 불법과 세법의 관계

신란(1173~1262년)이 살았던 12~13세기의 사회는 텐다이(天台)·진곤 (眞言)·남도 6종(南都六宗)·음양도(陰陽道)·신기신앙(神祇信仰)을 포 함해, 교(密敎)를 기축으로 통합된 현 (顯密) 불교 세력과 세속 정치 권력이 서로 의존하고 있는 정치 체제를 이루고 있었다. 이 체제를 현 체제라고 한다. 이 체제 속에서 국가 권력을 지지하는 이데올로기가 된 ‘체제불교’는 인간 구제라는 본래의 역할을 버리고 도리어 민중 억압이 그 본질이 되었다. 그런 식의 불교는 인간을 속이는 외도(外道, 허위의 가르침)이다. 그것은 무엇보다 세속적인 현행 정치 체제의 절대화이며, 이 체제에 무릎을 꿇도록 강제한다. 신란은 󰡔현정토진실교행신증문류 (顯淨土眞實敎行信証文類)󰡕의 「화신토문류(化身土文類)」에서 국왕(국가 권력)과 세속에의 굴종 및 국왕 절대화를 󰡔보살계경(菩薩戒經)󰡕을 인용 해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보살계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출가한 사람의 법은 국왕을 향해 예배하지 않고, 부모를 향해 예배하지 않고, 육친에게 힘쓰지 않고, 귀신에게 절하지 않는다.” [불도 수행을 하는 사람이 지켜야 할 것은, 보살계경에 기술되어 있 듯이, “국왕을 향해 예배하지 않고, 부모를 향해 예배하지 않고, 부모·형 제·처자를 섬기지 않고, 귀신을 예배하지 않는” 것이다.]10) 

10) 淨土眞宗本願寺派日常勤行聖典編纂委員會 編, 󰡔淨土眞宗聖典󰡕 (京都: 本願寺出版社, 1988), p.454. 현대어 번역은 필자. 

신란이 여기서 주장하는 것은 국가 권력을 포함한 세속의 것에 절대적인 것은 무엇 하나 없으니 그런 데서 최종 근거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최종 근거는 불법뿐이니, 국왕도 불법을 근거로 하지 않으면 건 실한 정치 운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신란이 중국 정토교를 수립한 담란(曇鸞, 476~542)을 칭송하면서 “담란 대사에 대해 양나라의 무제가 대사가 계신 곳을 향해 보살로서 예배했다”고 말한 것은 세속 권력으로 서의 ‘왕법’은 ‘불법’에 복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불법을 무력화해 사람들의 현실 비판의 눈을 흐리게 하고, 결국 ‘왕 법·세법’을 절대화하기 위해서는 체제이론가·어용학자가 필요하다. 신 란은 사람들을 속이는 체제파의 사상가·승려를 귀신이라 부르며 비판 하고 있다. 체제이론가가 귀신이라는 말은 그 이론가가 우리 앞에 무서 운 모습으로 나타나서가 아니라, 도리어 신·보살의 모습으로 나타나 교 묘한 말투로 설득력 있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말법(末法)의 세상에서는 불교가 외도가 되고, 불도 수행을 하려는 것 을 방해한다. 신란은 국가 권력과 일체가 되어 현 체제에 대한 긍정을 요 구하고 세속의 명예와 이익에 대한 집착심과 자기중심주의를 키우는 ‘외 도화한 불교’에서 혼탁한 말법 세상의 현실을 보았다. 이러한 외도화한 불교와 일체가 된 국가 권력 및 왕법에 대한 신란의 시각은 명쾌하다. 그 것은 제자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런데 염불과 연관되는 문제로 인해 매우 곤란해 한다고 들었습니다. 두 고두고 마음이 괴롭습니다. … 하지만 염불을 방해하는 일 때문에 한탄해서 는 안 됩니다. 염불을 금지하는 사람은 어떻게든 되겠습니다만, 염불을 드리 는 사람에게는 어떤 장애도 없습니다. 영주[領家]나 장원 관리인[地頭] 등의 지배자에 의지해 염불을 퍼뜨린다며 서로 사안(思案)이나 공부(工夫)를 결정 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그 땅에 염불은 퍼지겠지만, 그것도 부처님의 처 분에 달려있으니까요 … 이 말법오탁(末法五濁)의 세상에 통상 염불을 방해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진작부터 부처님이 말씀하시고 있는 것이니 놀랄 만한 일은 아닙니다.11)



11) 淨土眞宗本願寺派日常勤行聖典編纂委員會 編, 󰡔淨土眞宗聖典󰡕, pp.772~773. 현대어 번역은 필자.

여기서 신란은 전수염불(專修念佛)로 인한 인간 주체화의 길을 국가 권력에서 구하면 안 된다고 하였고, 불법을 퍼뜨린다며 권력자의 힘을 빌리려는 생각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며 경계하고 있다. 전수염불은 인 간의 주체화와 연대를 낳아 불교세력과 정치권력의 연합으로 민중을 억 압하는 체제를 부정한다. 그래서 국가 권력은 전수염불을 정지시켰던 것 이다. 아울러 염불 집단을 형성하고 있던 지도자인 호넨(法然)과 제자 신 란(親鸞) 등은 1207년 체포되어 호넨과 신란은 유배되었고, 서의(西意)·성 원(性願)·주련(住蓮)·안락(安樂) 등 네 명은 참수되었다.

전수염불을 중지하라는 요구는 1205년 고후쿠지(興福寺) 집단에서 나 왔다. 그 요구의 중심점은 전수염불이 ‘국토를 어지럽히는 잘못’이자, 불 법과 왕법의 일체성을 파괴하는 국가 체제 파괴죄에 해당한다는 데 있었 다. 전수염불 중지는 그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조큐(承久)의 난(1221년) 으로 가마쿠라 막부(鎌倉幕府)가 조정에 대해서 우위를 확립한 이후에도 전수염불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실제로 1219년, 1224년, 1227년, 1234년에도 탄압이 행해졌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탄압을 당하 면서도 신란의 전수염불 집단은 결코 굴하지 않았다. 그것은 가마쿠라에 서의 염불 소송이 제기되었을 때, 교토에 있던 신란이 제자 쇼신보(性信房)가 재판에 임하면서 원칙을 왜곡하지 않고 대처한 것을 두고 기뻐하 면서 다음의 편지글을 보낸 데서 알 수 있다.

… 가마쿠라에서 소송하는 모습은 밖에서도 듣고 있었습니다. 일단 각별한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소송의 결말이 내려져 시모우사(下總)로 돌아가시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번 소송이 일어난 것은 당신 한 사람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정토 염불자와 관계되어 있는 일입니다. 또 이 소송사건은 고 인이 된 호넨 상인(法然上人)이 살아계실 때 우리도 여러 차례 들었던 것으 로서 딱히 새로울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당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니, 염 불을 기리는 사람들은 모두 마음을 하나로 연결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12)

전술했듯이 신란은 결코 권력자 힘을 빌려 불법을 넓히려 하지 않았다. 권력자들은 전수염불자의 주체적 삶의 방식과 연대에 공포심이 들어 계속 탄압했지만, 전수염불자들은 거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들은 불법 (佛法)을 세상법에 따르게 하지 않았다. 신란의 정치권력에 대한 시각에 대해서 시가라키 다카마루(信樂峻麿)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신란은 정치권력이라는 것을 늘 엄격하게 상대화해 그로부터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정치권력이라는 것은 늘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에게 적대하는 것은 가차 없이 말살한다는 논리를 담고 있는데다가, 권 력이라는 것도 역사의 흐름 속에서 반드시 쇠퇴하게 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 실을 잘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신란에게 염불, 신심이라는 것은 늘 그러 한 세속의 정치권력, 왕법을 넘어 있었습니다. 이처럼 왕에게 배례하지 않는 다[國王不禮]는 사상은 동시대의 도겐(道元)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13)

신란은 국가권력의 자기중심성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었다. 국가권력 은 자기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 자립적이고 주체적으로 다른 사람과 연대 하는 전수염불자를 체제의 적으로 간주하면서 탄압을 계속 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정권 교체라는 것도 있게 마련이듯이 그러한 정치권력에는 절대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왕법’ 및 ‘세상법’에는 보편성과 절대성이 있 을 수 없다. 그러니 거기서 최종적 거처를 구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상 대적인 것으로 보고서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신란이 보건대 전수염불로 집약되는 불법은 세속 권력을 상대화하고 그것을 넘어선다. 따라서 ‘왕법’은 ‘불법’을 본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불법의 사회적 전개가 왕법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을 보건대 막번 체제 중기에 태어났고 메이지 유신기에 재편성되어 근대 천황제와 합치 
되었던 혼간지 교단의 진속이제론이, 현실과의 투쟁으로 단련된 신란의 사상과는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도 분명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혼간 지 교단은 진속이제론을 근대 일본의 제국주의적 식민지주의 노선에 협 력하는 이데올로기적 근거로 삼았다. 

그렇다면 같은 교단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서 참회하고 고백하기도 한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교의 및 구체적 행동으로 잘못을 극 복하고 인간적 성장을 이루려한다는 뜻일 것이다. 진속이제를 교의적이 고 실천적으로 넘어서는 운동은 1960년대 이후 야스쿠니 문제, 원자력 발 전 문제, 헌법 9조 문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하에서는 원전 반대 운동과 야스쿠니 문제를 중심으로 그 특징에 대해 알아보자 한다. 



12) 위의 책, p.783. 현대어 번역은 필자.

13) 信樂峻麿, 󰡔宗敎と現代社會󰡕, p.42.




Ⅳ. 불자의 전쟁 책임 참회 및 고백과 평화 실현의 길 

1. 진속이제론의 구체적 사례로서의 반원전 운동


조도신슈의 혼간지파와 오오타니파 모두 1886년 교단 헌법에 해당하 는 ‘종제’(宗制) 및 ‘종제사법’(宗制寺法)을 제정하면서 진속이제론을 기축 으로 명기했다. 그런데 종조 신란에게는 존재하지 않았던 진속이제론을 조도신슈 가르침의 요점으로 하는 한, 천황(천황에 체현된 국가)과 아미 타불을 일체화하고, 천황제에 굴복하게 되는 것은 필연적이다. 실제로 일찍이 조도신슈의 학자는 “조도신슈의 신앙 역시 그 신앙을 다 기울여 천황에게 귀일하고 받드는 것이다.”(후겐 다이엔―普賢大圓)라고 말하기 도 하고, “아무쪼록 힘차게 염불하면서, 대군(大君)을 위해, 조국을 위해, 성전(聖戰)의 흰 길을 일심으로 돌진해 주십시오.”(우메하라 신류―梅原眞隆)라고 말하기도 했던 것이다. 천황제 파시즘에 대한 굴복을 합리화 하고 협력했던 이론이 근대의 진속이제론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쟁 이후 조도신슈 교단은 신란의 입장에서 평화 실현의 길을

걸기 위해 진속이제론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질문해야만 했다. 조도신 슈 오오타니파는 1987년에, 혼간지파는 1991년에, 신란의 가르침으로부 터 이탈해 전쟁에 협력했던 범죄를 인정하고서 참회하고 있다. 그렇지만 진속이제론은 지금도 사회 속에 살아남아 있다. 그 구체적인 예 가운데 하나가 원자력발전소 입지 논쟁 가운데 나타나고 있다. 나가타(永田浩昭, 眞宗 大谷派 法傳寺 주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진속이제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귀에 익지 않은 말일지도 모르겠지 만, ‘진제’라고 하는 것은 종교적·관념적인 영역을 가리키고, ‘속제’라고 하는 것은 세속적·현실적 영역을 가리킵니다. 알기 쉬운 말로 말하면, ‘이원론’이 라고 받아들여도 좋습니다. 종교적인 문제와 현실의 생활을 각각 나눈 것입 니다. 그리고는 그 따로 따로 각각의 진리를 세웠습니다. 그렇게 종교 문제 는 마음의 문제이고, 현실의 문제는 현실의 문제라고 했을 때 … 만주 개척 이라는 것을 ‘국책’이라고 말하면 만주를 개척하러 가는 것이 조도신슈 문도 의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가르침(진속이 제론)을 우리의 체계적 교의로 삼았다는 것입니다. … 체계적인 교의로 삼았 다는 것은 분명하게 그러한 의사를 가지고 그 가르침에 대해 말했다는 것입 니다. 즉, 종교적인 문제가 현대 사회의 과제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은, 어떠 한 방향이든지, 교단 입장에서는 나라가 나아갈 방향대로 따라간다고 선언 했다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 그리고 전후 5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 전 쟁하러 가서 아시아인들을 짓밟으라는 그런 가르침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어졌습니다. 또 ‘원자력 발전소의 입지를 결정해 달라’는 것을 가르침으로 하는 일도 없습니다. 하지만 종교적인 문제와 현실의 생활이라는 것을 명확 히 나눈다는 그 기본 구조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14)



14) 原子力行政を問い直す宗敎者の會 編, 󰡔‘國策=核燃サイクル’を問う―今, 宗敎者として󰡕, 第3回 原子力行政を問い直す宗敎者の會 六ケ所 全國集會報告集 (1996), p.19.


조도신슈 교단이 그 교학으로 삼은 진속이제론을 현실 속에서 극복하 는 길은 전쟁 협력을 참회하고 평화 실현을 향해 걷는 것이다. 그 구체적 인 예를 이시카와현(石川縣) 스즈시(珠洲市)의 반원전운동에서 볼 수 있다.

1975년 이시카와현 노토(能登) 반도의 스즈시 시의회는 원전 유치를 결정하고, 간사이(關西)전력·주부(中部)전력은 백만 킬로와트급 원전 4기 건설을 계획했다. 노토반도 지역은 진종(眞宗) 신앙이 독실한 지역으로 서, 일찌기 1490년에 그 지역의 슈고(守護)인 하타케야마 요시무네(畠山義統)를 타도해 조도신슈 문도의 영지(領國)를 만들려 한 잇코잇키(一向一撥, 조도신슈 혼간지 교단이 무사, 농민, 상공업자 등을 조직화하여 형 성한 종교적 자치 조직―옮긴이 주)가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스즈 시 시민의 60% 이상이 조도신슈 오오타니파의 신자들로서, 오오타니파 노토교구 제10조·보슈카이(坊守會, 사찰 주지의 부인 모임)는 원전 반 대 결의를 하고 ‘조도신슈 오오타니파 노토 반원전모임’을 결성했다. ‘나 무아미타불’ 깃발을 세우고 현지에서 싸우는 민중의 반원전 운동이 고조 되자, 간사이전력은 1989년에 입지 조사를 중단했다. 이 새롭고 끈질긴 운동은 2003년 11월에 최종적으로 이 원자력 발전 계획 그 자체를 동결 시켰다.

이 운동의 근간에는 아시아·태평양전쟁과 원전 문제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국책(國策, 世法·王法)이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인식이 있다. 국책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는 국책으로 정한 침략전쟁에 따라야 한다는 논리와 같다. 조도신슈의 전쟁 협력 이론인 진속이제론은 신심 (신앙)을 마음 속에만 두고 세속의 일은 국가 정책에 따르면서 사회정치 에 대해서는 비판을 하지 않는다는, 일종의 이원론이다. 신란이 말하는 신심이란 본래 정신적 세계와 사회 정치적 세계를 하나로 관통하는 것이 다. 신란이 󰡔현정토진실교행신증문류(顯淨土眞實敎行証文類, 약칭 敎行信証)󰡕에서 말하고 있듯이, 조도신슈 신자들은 국왕불례(國王不禮, 진실 의 길을 걸으려면 국왕에 무릎 꿇어서는 안 된다)의 입장, 즉 기본 처소 는 아미타여래·진여이며, 그 외의 것, 즉 세속적 권력에서 절대적 가치 와 의지처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원전의 입지가 강제로 결정된다는 점에서 노토반도 스즈시 사람들은 희생자이다. 그렇지만 원전이 건설되어 이 지역에서부터 방사성 물질이 뿌려진다면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이런 것을 보면 이전 일본의 침략 전 쟁과 원자력 발전 사이에는 공통점도 드러난다. 따라서 진속이제론을 극 복하려면 정치적 해방과 정신적 해방을 일치시켜 원전 입지의 문제를 근 본적으로 물으며 저지해야 한다. 조도신슈의 승려와 신자들에게 원전 반 대 운동은 타력의 신심을 묻는 종교 활동이기도 하다. 진속이제론도 정신 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을 일치시킨 운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운동은 일부의 승려와 신자들에 의해서만 전개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에는 고령자도 참가하고 있었는데, 다음 인용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스즈시에서 일어난 반원전운동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 한 노파가 가능성을 조사하던 작업자 앞으로 뛰쳐나와 차의 앞을 큰대자로 가로막았다. “끌고 가봐라. 내 생명 하나로 원전이 멈추면, 이것으로 아이나 손자들 얼굴을 대 할 수 있거든. 자, 끌고 가봐!” 하면서 생명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또는 작 업자에게 합장하면서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당신들께 정말 감사해요. 당신들이 원전 문제를 가져다준 덕에 이곳에 있던 소중한 보물을 잊고 살았 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나를 키워 준 바다와 산, 이 보물을 있는 그대로 아이 와 손자들에게 전해주는 것이 나의 일이었지. 이제 충분하니까 제발 돌아가 줘요”라는 노인들이 있었다.15)



15) 玉光順正, 󰡔いのちを奪う原發(眞宗ブックレット No. 9)󰡕, (京都: 東本願寺出版部,

2000), pp.17~18.


종교 문제와 사회 문제를 결합시켜서 원전 반대 투쟁에 나선 승려들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 노파도 있었다. “스님들이 오~랫 동안 절의 두꺼운 방석에 앉아 아~무일도 하지 않더니만, 그 오랜 외상값을 지금 여기서 지불하기 시작했구나.”[1]) 이 말은 진속이제론으로 전쟁에 협력했던 조도 신슈 교단 승려들이 같은 논리를 가지고 원전 입지의 문제를 의식하면서 반대 운동에 나서는 모습에서 신자와 시민이 참회의 구체적 행동을 보았 다는 것을 나타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지구화가 진행되면서 뒤쳐졌던 지역에 대한 개발이 풍요와 편리를 실현하는 유일한 길인 양 강행되고 있다. 개발이 실제로는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파괴하고 있지만, 국책으로서 자리매김 되어 있는 까닭에 해당 지역으로부터의 비판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그곳에서 ‘지역’은 전적으로 객체 또는 타자로 인식되며, 스스로 발전하는 힘이 결여된 비 역사적이고 유형적인 존재이다. 또 발전이 지체되면 그 지역은 편협한 공동체로 간주된다. 노토반도 스즈시도 이런 ‘지역’의 전형으로 파악되었 기에 원전 입지의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노토반도 스즈시에서 원전 반대 운동에 참가한 사람들은 원전 입지와 아시아·태평양전쟁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국 민을 복종시켰던 국책이었다. 진속이제론이 사람들의 복종을 강제하는 이데올로기로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전쟁 협력에 대한 참회는 교의에서나 실제 생활의 실천에서나 진속이제론을 넘어 신란 본 래의 사상으로 되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전술했듯이 스즈시 시민의 2/3 이상이 조도신슈 오오타니파의 신자이 며, 승려에 대한 신뢰도 돈독하다. 조도신슈가 이 지역에 문화적으로 뿌 리내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원전 반대 운동이 이 종단에 의지에 일어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물론 원전 입지의 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원 전으로 인해 자신들의 생활이 경제적으로 좋아지리라고 생각한 주민도 결코 적지는 않았다. 확실히 주민에게는 가나자와(金澤)나 오사카(大阪) 등에서처럼 도시적이고 편리하며 물질적으로도 풍부한 생활에 대한 동 경이 컸다. 오사다(長田)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눈앞에는 바다가 있고 가을이 되면 송이버섯을 채취하는 (노토 사람들 의 생활은) 경제적으로는 분명히 빈곤했을지 모르지만 생활 자체는 그렇지 않습니다. 노토 사람들은 대대로 그곳에서 쭉 풍요롭게 살아왔습니다. 그런 데 … 가나자와나 오사카, 교토가 갑자기 눈부시게 보이면서 그런 생활 방식 이 가난하다는 식의 가치관이 어느 새인가 노토 사람들 속에 들어와 버린 것 입니다.17)

하지만 사람들은 이런 경제적으로 풍족한 생활의 환상을 극복하고, 대 지에 뿌리를 둔 생활을 선택했다. 그것은 ‘진종 오오타니파 노토 원전 반 대 모임’의 주장에서 볼 수 있다.

우리는 신란 님에게서 “이 세상에서 생명을 받은 것은 모두 여러 세대에 걸 쳐 마주하고 살아온 부모형제”라고 배워 왔습니다. 맑은 공기, 맛있는 물, 깊 고 푸른 산,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해산물. 파괴와 오염으로 노토에서 이것 들을 잃는다면 무슨 번영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이것들을 자손에게도 남길 수 있는 것은 우리 밖에는 없습니다. 노토에는 원전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18)

원전 문제가 인연이 되어 노토반도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적 풍요를 미 끼로 원전 입지를 실현하려는 세력의 본질을 알게 되었다. 자신들의 생 활이 결코 비참하지 않으며, 자연과 공생하는 데에서 오는 풍요로운 삶 
에 눈뜨고서 원전 반대 운동에 참가했다. 이 운동은 도로에 몸을 뉘어 검 사 차량을 세운 노파의 행동에서 볼 수 있듯이, 비폭력·불복종 운동에 따른 것이었다. 또 원전 조사 작업원에 대해 예를 갖춰 합장한 노인의 행 위에서는 원전 입지를 위해서 일하는 사람을 미움의 대상으로 하지 않 고, 도리어 자신의 눈을 참으로 뜰 수 있게 해준 불·보살로 보는 신앙 체험이 느껴진다. 여기에는 자기 적대자와의 공생의 가능성이 보인다. 노토의 원전 문제는 사람들에게 환경과 생활의 파괴를 일으키는 것에 대 한 자각을 가져왔다. 그래서 반대 운동도 생겨난 것이다. 



17) 위의 책, p.26.

18) 위의 책, p.26.




그러한 인식과 운동이 크게 발전한 것은 승려와 신자들 속에 옛적부터 조도신슈가 뿌리내려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원전 입지 문제에든 전쟁 에든 국민 생활을 파괴하는 국책이라는 공통점이 들어있으니, 전쟁 협력 을 구체적으로 참회하려면 원전 반대 운동을 해야 하며, 이 운동을 고 나가는 것이 진속이제론을 극복하는 길이라는 인식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신란은 잘못을 범한 사람이 바로잡는 모습을 󰡔현정토진실교행신증 문류(顯淨土眞實敎行証文類)󰡕에서 아도세(阿闍世)의 회심 참회를 인용하 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존이시여, 제가 만일 세존을 만나지 못했다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오 랫동안 지옥에 떨어져 한없는 고통을 받아야 했겠지요. 저는 이제 부처를 뵈 었습니다. 부처를 깨달을 수 있는 공덕을 얻었으니, 중생의 번뇌를 끊어 악 한 마음을 타파하고 싶습니다. … 세존이시여, 만일 제가 틀림없이 중생의 온갖 악한 마음을 타파할 수 있다면 저는 무간지옥에서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오랫동안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괴로움을 받아도 괴로워하지 않겠습니다.19)

19) 淨土眞宗敎學硏究所淨土眞宗聖典編纂委員會 編, 󰡔顕淨土眞實敎行信証文類(現代語版)󰡕 (京都: 本願寺出版社, 2000), p.296. 


아도세는 여래의 지혜의 빛에 감싸여 부친을 죽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는 회심·참회했다. 이전 자기의 생명은 끝났고 이제 새롭게 태어나 진 실한 인간으로 변한 아도세는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타파하는 투쟁에 참 가한다고 선언하고 행동한다. 그리고 그가 다스리는 마가다국의 무수한 사람들이 가장 높은 부처의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켰다. 아도세는 어전의 사(소아과 의사)인 기바(耆婆, Jiivaka)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바여, 나는 살아있는 동안 이미 깨끗한 몸이 되었다. 짧은 생명을 버리고 긴 생 명을 얻었고, 무상의 몸을 버리고 불멸의 몸을 얻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 들로 하여금 무상보리심(無上菩提心, 최상의 깨달음의 마음)을 일으키게 했다.”20)

아시아·태평양전쟁에 동조했던 책임을 참회하는 것은 평화와 일상을 파괴하는 상황에 목숨 걸고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참회를 방해하는 진 속이제론은, 노토반도의 반원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운동으로 넘어 서야 한다. 또 그 운동은 적(敵)에게서 여래를 보는 것이고, 공생(共生)의 이치를 여는 것이기도 하다. 원전 입지를 계기로 벌어진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그것은 자기 신심 및 신앙의 심화이고, 더 깊은 인간성의 획득이 기도 하다. 노토반도 스즈시의 원전 반대 운동은 전쟁 협력에 대한 참회 를 좁은 의미의 신앙 차원으로 남겨두지 않고, 현실의 과제를 해결하고 현실 문제와 결합시켰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다.

진속이제론을 그 근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극복하기 위해서는, 원전 문제만이 아니라 국책으로 정해졌던 전쟁 자체를 물을 필요가 있다. 왜 냐하면 정부의 각료가 야스쿠니신사를 공식 참배하고 헌법 9조를 부정 하려는 방향성이 강해지고 있는 오늘날 전쟁은 더 이상 과거의 일이 아 니기 때문이다.



20) 위의 책, p.297. 


2. 진속이제론과 야스쿠니신사 문제

사람들을 전쟁으로 몰아세워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침략했던 국가신도 체제는 1945년 12월의 신도지령(神道指令)으로 해체되었다. 1946년에 공포된 헌법 20조에서는 정교분리(政敎分離) 원칙이 정해졌고, 제9조에 서는 전쟁포기[戰爭放棄]가 선언되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후 국가신도 체제가 해체되고 ‘대일본제국헌법’이 부정되었으며 새로 ‘일본국 헌법’이 공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신도의 근본적 종교시설인 야스쿠니신사 (靖國神社)는 존속하고 있을 뿐더러, 다시 사람들을 전쟁으로 이끄는 역 할을 계속 하고 있다. 따라서 승려와 신자들이 진속이제론을 극복하고 조도신슈를 인간 해방의 종교로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야스쿠니 문제와 정면으로 마주쳐야 한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고도경제성장의 시대인 1960년대에 일본의 국민 총생산은 세계 제2위 가 되었고, 자본주의 경제는 국제화를 향해 갔다. 60년대부터 70년대 즈 음에는 전쟁 책임의식이 희박해졌고 방위력은 증강되어 갔다. 그런 현실 속에서 열린 제1회 전국 전몰자 추도식(1963년 8월 15일) 때 이케다 하야 토(池田勇人) 수상으로부터 일본의 “평화와 발전 및 성장은 전몰자의 희 생 덕분”이라는 발설이 나왔다. 여기서는 국가가 전몰자와 유족에 대해 사죄한다거나 “두 번 다시 불합리한 죽음을 일으키지 않겠다”는 약속의 말은 결코 들려오지 않았다.21)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 야스쿠니 문제가 커지기 시작했다. 고도 경제 성장기였던 1960년대 후반은 전쟁 책임과 침략의 역사를 망각하면서 방 위력을 증대해가던 때였다. 1969년 6월 30일 자민당은 ‘야스쿠니신사 법안’을 제61대 국회에 처음으로 제출했다. 다나카 신죠(田中伸尙)에 의



21) 田中伸尙, 󰡔靖國の戰後史󰡕 (東京: 岩波書店, 2007), p.87.

하면, 이 법안의 목적은 “야스쿠니신사를 별도의 법인으로 만들어 내각 총리대신이 관할한다는 데 있었다.” 그 내용은 “국가와 천황을 위해서 전 몰한 사람들을 신(神)으로 기리면서 야스쿠니신사가 가지는 영령현창(英靈顯彰)이라는 국가적 이데올로기의 핵심을 관철시키는 것이었다.”[2][3]) 법 안의 제1조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하게 기술되어 있다.

야스쿠니신사는 전몰자 및 국사(國事)로 순직한 사람들의 영령에 대한 국 민의 존숭의 뜻을 나타내고자, 그 유덕(遺德)을 사모하고 위로하며 그 사적 (事績)을 기리는 의식 행사 등을 열어 그 위업을 영원히 전하는 것을 목적으

로 한다.23)

이러한 목적에는 메이지 유신 이래의 일본의 침략 전쟁에 대한 반성은 없고, 도리어 전쟁이 정당하다는 전제가 들어있다. 그런 까닭에 전투에 참가했다가 전사한 사람들은 영령=신으로 모셔지고 영령으로 칭해진다. 그들의 사적(事績)은 의식행사(국가신도의 종교의식)를 통해 칭송되고 현창되어 그 위업이 영원히 전해진다. 그래서 그 영령=신을 본받아 그것 을 계속해 가도록 사람들에게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히시키 마사하루 (菱木政晴)는 국가 신도의 교의를 ① 성전(聖戰, 자국의 전투 행위는 항 상 올바르니 그에 참가하는 것은 숭고한 의무이다), ② 영령(英靈, 그러 한 전투에 종사하다 죽으면 신이 되니, 그 때문에 죽은 이를 제사지낸

다), ③ 현창(顯彰, 영령을 모범으로 하고 그것을 본받아 이후에도 이어 간다[4])는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는데, 법안은 바로 이것에 해당한다.

조도신슈가 일본의 전쟁에 책임이 있다는 말은 종단 스스로 이 국가신도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데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베 오사무(神戸修)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25) 

25) 神戸修, “佛敎徒にとって日本國憲法9條とは何か,” 󰡔念佛者9條の會ニュースレター󰡕 No. 16 (2013년 11월 15일), p.14. 

국가 신도란 내용 면에서 “천황은 신이다=신이 통치하는 일본은 신국이다 =신국이 벌이는 전쟁은 성전이다=성전의 희생자는 영령이다”라고 할 수 있 을 것이다. 전반부를 국체사상(國體思想), 후반부를 야스쿠니사상(靖國思想) 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상과 조도신슈 교학의 모순을 유사하 게 지양시킨 것이 소위 ‘전시교학’(戰時敎學)이다.

우선 ‘천황은 신이다’라는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주장했다(고베 요 약, 이하도 고베의 요약을 따랐다). “조도신슈에서 말하는 신(信)과 행 (行)은 아미타불을 대상으로 일으킨 것이자 동시에 천황에게 바친 것이 기도 하다.”(普賢大圓, 󰡔眞宗の護國性󰡕, 1943年). 다음에 ‘일본은 신국이 다’라는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처럼 주장했다. “일본 국가란 추상적인 전 체가 아니고, 일본 신화의 중심인 현신인(現神人) 천황을 받들어 하나에 이르는 구현이다.”(위와 같음). … 또 ‘일본이 벌인 전쟁은 성전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일본의 전쟁은 천황의 이름으 로 벌인 것이기에 성스러운 전쟁이다. 이 싸움에 참가하는 것은 자타 모 두 생명을 살리려는 대승불교의 정신과 일치한다.”(梅原眞隆, 󰡔興亞精神と佛敎󰡕, 1939年). 게다가 ‘성전의 희생자는 영령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 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환상섭화(還相攝化, 정토에 태어난 자가 현실 세계로 되돌아와 사람을 구제하는 일)란 칠생보국(七生報國, 일곱 번 태 어나고 변화해 국가와 천황에 봉사)하는 것이다.”(戰時敎學指導本部, 󰡔皇國宗敎としての淨土眞宗󰡕, 1944年) 이 야스쿠니신사 법안에 대해서 1967년 7월에는 그리스도교 교단이 반대 성명을 내었고, 1968년에는 전일본불교회에서도 법안을 반대하는 성명서를 내었다. 1969년 2월에는 조도신슈 혼간지종회가 전 회원 만장 일치로 ‘야스쿠니신사 국가호지 반대결의(靖國神社國家護持反對決議)’를 했고, 3월에는 혼간지파 총장이 반대했으며, 조도신슈 오오타니파 총장 은 국가호지 법안 반대 의사를 정부에 표명하는 요청을 했다. 1969년에 는 전국 30곳에서 야스쿠니 법안 반대 집회가 열렸다. 이 법안은 1969년 8월 5일에 폐안이 되지만, 이후 1970년, 1971년, 1972년, 1973년 합계 5회에 걸쳐 다시 제안되었고, 다시 폐안이 되었다. 자민당은 국민의 비판이 강해지자 1975년에 법제화를 단념하기에 이른다. 야스쿠니신사 법안이 실현될 수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 다나카 신조(田中伸尙)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야스쿠니신사의 국가호지 법안은 네 가지 벽에 막혀 실현되지 않았다. 첫 째는 그리스도교인, 불자 등 종교인을 중심으로 한 끈질긴 반대 운동이 고조 됐기 때문이고, 둘째는 나고야 고등법원이 처음으로 정교분리 소송에 대해 위헌 판결했기 때문이며, 셋째는 모든 야당의 반대까지 더해져 74년 여름 참 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대패함으로써 참의원의 보수와 혁신이 백중세가 되 자 그 영향으로 야스쿠니 법안을 심리하는 내각위원회가 ‘보혁역전’(자민 9, 야당 10)된 정치 상황의 변화 때문이었다. 그리고 넷째 벽은 참의원 법제국 의 견해였다.26) 

26) , p.139


야스쿠니 법안의 좌절 후 야스쿠니 추진파는 공식 참배(公式參拜) 노 선으로 전략을 변경했다. 이런 분위기를 축적시켜 최종적으로는 야스쿠 니 국가호지를 실현하려고 했던 것이다. 전쟁 전에도 황족이나 공적 신 분을 가진 이가 그 신분을 가지고 참배하는 경우를 정식 참배(正式參拜) 라고 부르면서, 일반 참배와는 구별해왔다. 이 정식 참배를 ‘공식 참배’라는 말로 바꾸었던 것이다. 여기서는 참배할 때의 지위와 신분이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것을 철저히 시도한 것이 1985년 8월 15일에 행해진 나카소네(中曾根) 수상의 ‘공식 참배’였다. 나카소네 수상은 수상이라는 자격으로 참 배했고, “다마쿠시료(玉串料)와 교카료(供花料)의 실비를 공비로 지출 했다”고 기자단에게 말했다. 나카소네 수상의 ‘공식 참배’는 식민지 지배 와 침략 전쟁을 긍정하는 ‘전후 정치의 총결산’이라는 정치·사상적 배경 속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그 의도는 1985년 7월에 개최된 가루이자와 세미나(輕井澤セミナ)에서 했던 연설에 나타나 있다. 거기서 나카소네 수상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느 국가에서든, 가령 미국에는 알링턴 국립묘지가 있고, 소련에 가도 무명전사의 무덤이라든가, 나라를 위해 쓰러진 사람에 대해서 국민이 감사를 바치는 장소가 있다. 당연한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가 나라에 목숨을 바 치겠는가. 그런 것도 생각하고, 게다가 헌법에 위반이 되지 않게, 바꾸어 말 하면 정교분리, 즉 종교와 정치의 분리의 문제에 저촉되지 않도록 주의해서 (야스쿠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27)

27) 菱木政晴 󰡔淨土眞宗の戰爭責任(岩波ブックレット)󰡕 (東京: 岩波書店, 1993), p.28. 


당연한 일이지만, 나카소네 수상의 ‘공식 참배’는 아시아 지역으로부터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나카소네 수상의 공식 참배에 대해 자민당을 제외한 모든 정당에서 항의와 유감의 성명 등이 나왔고, 종교계에서는 전일본불교회, 신슈(眞宗)교단연합, 일본그리스도교협의회, 일본가톨릭 주교협의회, 일본침례교연맹, 신일본종교단체연합 등에서 항의, 반대, 요 망사항 등이 나왔다. 그 내용은 다양하지만 ‘공식 참배’는 일본국 헌법에 위반하는 것이기에 반대한다는 취지에서는 일치하고 있었다. 또 여러 지방 법원에 이 ‘공식 참배’는 위헌이라는 취지의 손해 배상 소송이 제기되 었고, 오사카 고등법원의 공소심에서는 “동(同) 참배는 헌법 20조 3항에 서 규정하고 있는 종교 활동 부분에 저촉된다는 혐의가 강하고, 동(同) 조항에 위반하는 혐의가 있다”는 취지로 판시했다.[5][6]) 후쿠오카 고등법원 의 공소심에서도 “수상의 참배가 제도적으로 계속되면 위헌의 혐의가 있 다”는 취지로 판시했다.29)

나카소네 수상의 야스쿠니 공식 참배를 계기로 혼간지파에서는 1984년에 결성된 ‘반야스쿠니연대회의’가 본격적으로 활동했고, 혼간지파의 승려 스가와라 류켄(菅原龍憲) 선생은 1986년 1월 ‘신슈유족회’(眞宗遺族會)를 결성했다.

야스쿠니 문제의 큰 고비는 세 가지였다. 첫째는 야스쿠니신사 법안을 둘러싼 투쟁(1969~1975년)이고, 둘째는 1985년 나카소네 수상의 야스쿠 니 ‘공식 참배’이며, 셋째는 2001년 여름 고이즈미(小泉)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이다. 이 해 6월에는 신슈(眞宗)교단연합, 신슈(眞宗)유족회, 일본그 리스도교협의회, 일본성공회, 일본가톨릭정의와평화협의회 등에서 수상 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반대 성명서와 그와 관련한 요망서가 나왔다. 고 이즈미 수상의 참배의 특징은 ① 이미 1991년 1월의 ‘수상의 공식 참배는 위헌’이라는 센다이(仙台) 고등법원의 판단 및 1992년 7월의 오사카 고등 법원의 판단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 ② 아시아 각국에서 반복해서 일어 나고 있는 반발을 무시하고 있다는 것이다.[7])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참배는 종래와는 다른 매우 중요한 운동을 일으켰다. 이 점에 대해서 다 나카 노부마사(田中伸尙)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세 번째의 ‘야스쿠니 문제’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 것은 민중 차원에서 국민 국가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질문의 단편이 나왔다는 점이다. 2002년 9월 까지 재일 외국인이나 재한·재미 전몰자 유족들을 포함한 약 2000명이 국 가·고이즈미 수상·야스쿠니신사 등을 피고로 전국 6개의 법원에 ‘고이즈미 수상 야스쿠니 참배 위헌 소송(小泉首相靖國參拜違憲訴訟)’을 제기했다. 야 스쿠니 문제로 민중이 ‘국민’의 경계를 넘어, 공동원고가 되어 위헌 소송을 일으킨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스가와라 류켄(菅原龍憲, 2001년 8월 부친의 합사 철회를 야스쿠니신사 측에 요구한 조도신슈 혼간지파의 승려) 씨도 원 고로 참여해 오사카 지방법원에 제기했던 야스쿠니소송이 ‘아시아소송(アジア訴訟)’이라고 명명된 것은 상징적이다. 이런 식으로 야스쿠니 문제를 통해 서 일본 정부가 계속 방치해 온 전쟁 책임·전후 책임이 추궁당할 수 있게 된 것이다.31)

31) 小泉首相靖國神社參拜違憲九州·山口訴訟團 編, 󰡔參拜したら違憲󰡕, p.199. 

이 가운데 후쿠오카 지방법원에 ‘고이즈미 수상 야스쿠니 참배 위헌소송’을 제기한 원고는 모두 211명으로, 불교의 승려 또는 신도(55명, 유 족 6명 포함), 그리스도교 신부, 목사 또는 신도(74명, 유족 2명 포함), 특 정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80명, 유족 2명 포함), 재일한국인(2명) 등 다양하다. 원고 가운데는 전후 태생도 있었다. 1955년 태어난 정토진종 승려 소토메 다쿠야(外海卓也) 선생은 다음과 같은 진술서를 제출했다. “(석존께서는) 모든 생명이 살 수 있는 평화의 실현, 각자의 마음의 평화 (안심)를 확립하는 길을 걷는 것이 불교도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나 혼간지 교단도 적극적으로 전쟁에 가담했다는 사실을 배웠다. 나는 불교 의 정신으로 돌아가려고 문법전도(聞法傳道)를 계속하면서 가을의 피안 회[秋の彼岸會]에 모든 전몰자 추도 법요를 권유하고 있다. 피고인 고이 즈미의 야스쿠니 참배는 그러한 나의 노력을 모욕하고 방해하는 것이다. 불교의 평화 정신을 폄훼할 뿐만 아니라, 불도를 살아내려는 나의 신심 도 손상시켰다.”32) 원고인 조도신슈 다이호지(淨土眞宗 大法寺)의 주지 인 오마츠 류쇼(大松龍昭) 선생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석존은 ‘모든 생명은 존귀하고 평등하니’ ‘불살생’하라고 가르치신다. 그것이 전쟁을 부정하는 원리이다. 신란은 ‘살생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어리석음 을 자각하고서 그 어리석은 나를 반드시 구제하려는 원을 세우신 아미타 불의 본원에 귀의했다. 그런 가르침을 거역하고 전쟁에 협력한 것을 부 끄럽게 여긴다[斬鬼する]. 대학원에 진학해 ‘야스쿠니 문제 학습회’에 입 회해 이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 이것은 야스쿠니의 주술적 속박(呪縛縛 으로부터 해방되는 ‘신앙의 회복’이었다. … 나카소네는 헌법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고이즈미는 감정론으로 강행했다. 국민에게는 헌법보다는 감 정 쪽이 이해하기 쉬운 만큼 악질이다.”33) 이러한 진술서에는 분명히 신앙에 기초를 두고서 조도신슈의 전쟁 책임을 묻고 참회하는 방식으로 야스쿠니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이 보인다. 또 불자로서 평화를 목표로 하는 운동은 결코 종파에 머무는 것이 아니 고, 다른 종교인, 특정 신앙을 갖지 않는 사람들, 재일한국인도 포함해, 타자와의 연대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사실도 담고 있다. 거기서 아시아 의 평화 실현으로 향하는 새로운 방향성이 생겨나고 있다. 2001년 11월 부터 2002년 9월에 걸쳐 후쿠오카, 마츠야마, 오사카, 도쿄, 지바, 나하 등 6개의 지방 법원에서 제기된 ‘고이즈미 야스쿠니 참배 위헌 소송’에는 “원고가 일본인만이 아니라, 재일외국인, 그리고 이희자(李熙子, 1959년 에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부친의 합사 취소를 요구했다)씨와 김경석 (金景錫, 태평양전쟁 한국인 희생자 유족회 회장)씨 등 UNGUN 재판의 원고를 포함한 한국의 유족들 수백 명이 경계를 넘어 합류했다. 지금까 지의 정교분리 소송의 스타일을 완전히 넘어섰다.”34)



32) 위의 책, p.126.

33) 위의 책, p.132.

34) , , p.229.


2004년 4월의 후쿠오카 지방법원에서는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 사 참배가 “헌법 20조 제3항에 반한다”라고 판결했다. 조도신슈의 전쟁 책임·참회의 구체적 행동은 이처럼 평화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본인의 운동을 넘어서 아시아 사람들과의 연대로 발전해 가고 있다. 조도신슈의 반원전을 위한 대응도 이러한 아시아의 평화 실현과 연계될 수 있을 것 이다. 신앙의 실천을 통해 이 싹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가야 한다는 질문 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3. 반원전 운동과 야스쿠니 문제 대응 방식의 공통점

평화 실현을 목표로 하는 운동은 조도신슈의 근본경전인 󰡔불설무량수


경(佛說無量壽經)󰡕에서 법장보살이 아미타불이 되기 위해 세웠던 48가지 서원과 통한다. 법장보살의 서원 가운데 첫 번째 것은 ‘무삼악취(無三惡趣)의 원(願)’이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이 진술되어 있다. “내(법장보살) 가 부처가 될 때, 나의 나라에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 있다면, 나는 결 단코 성불하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지옥’은 전쟁, ‘아귀’는 기아, ‘축생’은 반성 없는 자기중심주의자를 가리킨다. 그리고 여기서 세 운 서원은 전쟁으로 인한 살인과 기아를 없애고 반성 없는 인간을 가려 냄으로써[糾す] 평화가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실현하는 법적 기반은 “전쟁 포기(戰爭放棄)·전력 불보지(戰力不保持)·교전권(交戰權) 의 부인(否認)”이라는 헌법 9조에 있다. 두 번째의 서원은 ‘불갱악취(不更惡趣)의 원(願)’(두 번 다시 위 세 가지의 악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서원)으로서, 항구적 평화의 실현을 의미한다. 세 번째의 서원은 ‘실개금 색(悉皆金色)의 원(願)’(모든 사람을 금색, 즉 최고의 평등한 존재가 되 게 하겠다는 서원)으로서, 기본적 인권의 실현을 의미한다. 네 번째의  서원은 ‘무유호추(無有好醜)의 원(願)’(모든 사람을 기쁨으로 충만한 모 습이 되게 하겠다는 서원)으로서, 평화가 실현되었을 때에 나타나는 인 간의 모습을 말한 것이다. 이것들은 일본국 헌법과 아주 유사한 내용들 로서 평화 실현의 법적 조건을 말한 것이다. 이것들의 법적 조건을 실현 하고자 할 때 필요한 것은 역사인식과 윤리이다. 그것은 ‘육신통’(六神通, 불보살이 가진 불가사의한 여섯 가지 힘)에서 잘 드러난다.

육신통의 첫째는 ‘영식숙명(令識宿命) 원(願)’(역사적 과거를 다 아는 서원)이다. 이것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전쟁으로 생겨난 역사적 과거를 다 아는 서원으로서, 헌법 9조와 20조를 생각하는 기반이 된다. 둘째는 ‘영득천안(令得天眼)의 원’(보통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약자와 타 자를 분명히 볼 수 있는 눈을 가지는 서원)이고, 셋째는 ‘천이요문(天耳遙聞)의 원(願)’(보통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약자의 소리 없는 소리를 들 을 수 있는 귀를 가지는 서원), 넷째는 ‘타심실지(他心悉知)의 원(願)’(다 른 사람의 마음을 다 아는 서원), 다섯째는 ‘신족여의(神足如意)의 원 (願)’(고뇌하는 사람을 구제하기 위해서 순식간에 그곳으로 갈 수 있는 다리를 가지는 서원)이다. 여섯째는 ‘불빈계심(不貧計心)의 원(願)’(자기 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는 서원)이다.

여기까지 제시된 열 가지의 서원에는 법적 정비, 역사 인식과 윤리, 다 른 문화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의 필요성이 진술되고 있으며, 마지막 으로 자기중심주의로부터 해방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이후의 서원에 기술되어 있지만, 그 해방의 존재 방식은 열 가지의 서원이 헌법 9조 및 그것과 유기적으로 결합한 헌법 20조―신교(信敎)의 자유·국가신도와 국가의 유착에 대한 부정―의 기반이 되는 것이기도 하다. 전쟁 협력에 대한 참회를 기초로 한 조도신슈 승려와 신도의 반원 전 운동과 반야스쿠니 운동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러한 서 원의 실천이다. 그뿐만 아니라 열 가지 서원의 정신을 타종교는 물론 특 정 종교를 가지지 않는 사람들의 평화 운동에서도 공통적으로 볼 수 있 다는 점은 흥미롭다. 


Ⅴ. 결론

조도신슈가 침략전쟁에 가담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패전 당시


한반도에는 132개의 혼간지파 절이 있었고, 중국에는 115개의 절이 있었 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사원은 패전과 함께 모두 폐사되었다.[8]) 이 것이 침략전쟁과 하나가 되었던 비불교적인 조도신슈의 모습이었다. 근 대의 조도신슈는 신란의 가르침에 반하는 진속이제론을 기초로 불교 본 연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식민지주의와 일체가 되어 아시아 침략에 적극 적으로 협력해 왔다.

본 논문에서는 전쟁 협력에 대한 반성적 실천의 구체적인 예로서 조도 신슈 승려와 신도가 참가한 반원전운동과 야스쿠니 문제에 대한 대응 양 상을 제시했다. 이러한 대응은 헌법 9조와 20조를 시민의 생활 속에 살게 해주는 운동이기도 하다. 헌법 9조의 ‘전쟁 포기·전력 불보지·교전권 부인’은 불교의 ‘불살생’과 직결되는 것이다. 석존은 불살생을 추상적으로 설한 것이 아니다. 자기의 살생 행위를 금지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행하는 살생 행위(전쟁)도 멈추게 하는 실천적 행위를 중시한 것이다. “죽 여서는 안 된다. 죽이게 해서도 안 된다”(「ダンマパダ(Dhammapada, 法句經)」 129)라는 석존의 요청은 비상한 현실성을 가지고 지금 우리를 압박 해온다.

진속이제론을 극복하는 길은, 13세기 일본에서 신란이 보여준 정신적 이고 사회적인 민중 해방의 길을 현대라는 상황 속에서 어떻게 주체적으 로 파악해야 하는지, 만일 신란이 현대 사회에 살고 있다면 무엇을 했겠 는지 파악하는 일일 것이다. 그 속에서 경전이 말을 걸어오고 있다면, 그 것을 결코 과거의 일로 두지 않고, 현실의 문을 열어가라는 요청으로 받 아들이는 바일 것이다. 남아프리카에서 아파르트헤이트와 투쟁하며 태 어난 상황신학(Contextual Theology)은, 모든 인종이 공생하는 민주적 남

아프리카 공화국의 건설에 큰 역할을 감당해 왔다. 이처럼 조도신슈도 반원전 운동이나 반야스쿠니 운동을 통해 타자와 연대하고 공생하면서 자신의 신앙과 평화 실현을 결합시켜 진속이제론을 불식시키는 길을 걷 고 있다. 조도신슈는 이후에도 아시아의 평화 실현에 적극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접수: 2013년 12월 11일 / 심사: 2013년 12월 20일 / 게재확정: 2013년 12월 2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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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ese Buddhism and Its Peace Realizing Movement, Focusing on Shin Buddhism(淨土眞宗)

Rev. Kitajima, Gishin (Professor Emeritus at Yokkaichi University)

Abstract

As Fifty Years Post-war came near, many Buddhist Orders resolved to admit the cooperative responsibility for the aggressive War against the Asia and Pacific areas and to confess their sins to the victims. It is up to us, as Buddhists, to decide how to actualize these resolutions in our religious lives. At first, in order to enrich the realization, it is necessary to clarify the reasons why Japanese Buddhist Orders collaborated with the political system based on the State Shintoism in the process of nation state building. Through this, it will be possible to grasp explicitly the present issue of peace realization that we are facing.

In Shin Buddhism(淨土眞宗), with ten factions, more than 20,000 temples and over 20 million followers, all Religious Orders cooperated with the Imperial System on the Combined Theory of Religious and Secular Truth (眞俗二諦論) that was against St. Shinran (親鸞聖人), forcing followers to obey blindly the State, and to confine religious faith to their minds only. In the 13th century, St. Shinran once said that even those who have committed homicide and reviled the Buddhist teaching shall be saved if they realize their sinfulness and turn their thought towards Buddhist goals.

In this essay, I explain Anti-Atomic Power Generation Movement in Suzu City (珠洲市) and Anti-Yasukuni Shrine Movement in which priests and followers of Shin Buddhism have participated to practice repentance for their sins. Their peace movement is not only a religious one but also a citizens’ campaign that is inseparably connected to Article 9 and 20 of the Constitution. This is because they have based their movement on the Buddhist principle that says, “You shall not slay, you shall not cause to slay,” to respect others as human beings.

Key words: Shin Buddhism(淨土眞宗), St. Shinran(親鸞聖人), Combined Theory of Religious and Secular Truth (眞俗二諦論), Confession to War, Anti-Atomic Power Generation Movement, Anti-Yasukuni Shrine Movement 기타지마 기신(北島義信. Kitajima, Gishin)

오사카(大阪) 시립대학 대학원에서 문학연구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신슈(眞宗) 다카 다파(高田派) 정천사(正泉寺) 주지를 맡았고, 현재 일본 욧카이치(四日市) 대학의 명예교 수이다. 주요 저서로는 󰡔淨土眞宗と平和󰡕 (2003), 󰡔親鸞復興―自己中心的世界を超えて󰡕

(2004) 등이 있다.

역자: 이찬수(Yi, Chan-Su)

서강대학교 화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 종교학과에서 불교학과 신학으로 각각 석사학 위를, 비교종교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남대 교수, (일본) WCRP평화연구소, 중앙학술 연구소 객원연구원 등을 지냈고,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

다. 󰡔종교로 세계 읽기󰡕, 󰡔한국 그리스도교 비평󰡕, 󰡔일본정신󰡕, 󰡔불교와 그리스도교 깊이에서 만나다󰡕, 󰡔종교근본주의󰡕(공저) 외 다수의 책을 썼다.




[1] ) 위의 책, p.21.


[2] ) 위의 책, pp.101~102.


[3] ) 위의 책, p.102.


[4] ) 淨土眞宗本願寺派安藝敎區 編, 󰡔淨土眞宗の平和學󰡕, p.98.


[5] ) 小泉首相靖國神社參拜違憲九州·山口訴訟團 編, 󰡔參拜したら違憲󰡕 (東京: 明石書店, 2004), p.197.


[6] ) 위의 책, p.241.


[7] ) , ‘はじめに’.


[8] ) 󰡔憲法9條は佛のお願い󰡕,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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