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2-28

Paik Nakchung - "서장.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



(2) Paik Nakchung - 방금 전에 공유한 게시물에 소개된 책 중에 "서장.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가 저의...




Paik Nakchung
15 hrs ·



방금 전에 공유한 게시물에 소개된 책 중에 "서장. 3.1과 한반도식 나라만들기"가 저의 글입니다. 거기 이번에 새로 추가한 '덧글'을 복사하여 여러분의 검토를 받고자 합니다.

덧글: ‘친일잔재 청산’에 관하여

3 · 1은 한반도에서 ‘근대적응과 근대극복의 이중과제’ 수행에 본격적인 시동을 건 혁명적 대사건이었다. 한민족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그것이 지니는 큰 의미는 촛불혁명의 진행에 따라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그러나 3· 1 자체는 당시의 최대 과제인 독립국가 건설을 이루지 못했다. 한반도에 두개의 분단국가가 병립하고 있는 오늘도 그 점은 마찬가지다. 일제의 식민지 통치는 3· 1 이후로도 4반세기 이상 지속되었고, 식민지시대가 곧바로 분단시대로 이어지면서 대한민국의 정부수립 이후에도 일제잔재 청산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아니, 한국전쟁 이후 성립된 분단체제에서는 일제잔재가 체제구성의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100주년 3· 1절 기념사에서 “진정한 국민의 국가를 완성하는” 새로운 100년을 다짐하면서 “너무나 오래 미뤄둔 숙제”로 ‘친일잔재 청산’을 지적한 것은 그런 의미로 당연했다. 연설 당시는 일제하 강제징용에 대한 대법원 판결로 한·일 갈등이 커지고는 있었지만 일본정부에 의한 무역보복이 시작되기 전이었다. 6월 말 남·북·미 정상의 판문점 상봉이 이루어진 직후에 발표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로 가히 ‘경제전쟁’이라 부름직한 사태가 벌어졌다. 대통령의 ‘새로운 100년’ 구상은 중대한 시련을 맞으면서 일제잔재 청산의 절실함도 새롭게 부각되고 있다.
그런데 일본제국주의 통치기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고자 할 때 ‘친일잔재’라는 표현이 적절한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친일’이라고 하면 일제잔재 중에서도 특히 친일행위를 한 인물들에게 초점이 맞춰지고 ‘잔재청산’이 인적 청산에 과도하게 집중되기 십상이다. 예컨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잠시 시도됐던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의한 사법적 응징이라든가 참여정부 시절 대통령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작업, 또는 민간 차원에서 진행된 『친일인명사전』(전3권, 민족문제연구소 2009) 편찬 간행 등이 그러한 인적 청산 작업에 해당한다. 반민특위는 실패했지만 뒤늦게 그만큼이라도 해낸 작업들은 치하해 마땅하다. 그러나 이를 더 큰 범위의 일제잔재 청산작업이라는 맥락 속에 자리매겨 슬기롭게 이어가지 못할 때 기대했던 성과를 올리지 못할 수도 있다.
반민특위 강제 해산으로 친일경력자들의 득세가 오히려 확고해진 것은 물론 이승만 대통령의 적극적인 개입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승만과 친일세력의 이런 결탁이야말로 당시에 이미 ‘일제잔재’는 단순히 ‘친일잔재’로 환원하기 어렵게 되었음을 말해준다. 이승만은 항일독립운동가로서 수많은 비판과 규탄을 받기는 했지만 결코 친일파는 아니었는데, 그런 인물이 왕년의 친일파들과 결합한 것이야말로 새로운 시대에 맞춰 ‘일제잔재’가 ‘친일파’의 국한을 넘어서 변모·진화하는 과정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이승만이 친일파와 손잡을 때의 최대 명분은 반공이요 분단정권 수립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이 3· 1절 기념사에서 지적했듯이 일제가 공산주의자가 아닌 항일인사마저 ‘빨갱이’로 몰아 때려잡은 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의 고질적 병폐로 남아 있다. 하지만 8·15 직후와 6·25전쟁의 와중에서 ‘빨갱이’ 딱지 붙이기는 단순히 ‘친일’을 덮는 수단을 넘어, 각종 기득권세력을 위협하는 모든 비판자를 제거하는 주무기로 ‘업그레이드’되었다. 이어서 전쟁이 휴전 상태로 멈추고 분단체제가 성립하여 60년이 훨씬 넘도록 지속되면서 애초의 반공과 친일의 결합은 더욱 복잡다기한 요소들과 뒤섞여 강고한 분단체제 옹호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이 모두가 ‘토착왜구’라면 일괄 청산하기에 너무 수효가 많고 실제로 그렇게 분류하기에는 구성도 너무 다양하다.
그러므로 ‘일제잔재의 청산’은 ‘친일잔재의 청산’보다 한층 복합적이고 정교한 개념을 요한다. 가령 본문에서 거론한 ‘분단체제’라는 틀 안에서 남한 내의 그 수호세력, 북한 내의 수호세력, 그리고 미국과 일본 내의 분단기득권 세력을 정확히 식별하고 그 책임의 경중을 가리며 국내외 세력들 간의 결탁 양상을 인지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 최근의 한·일 경제전쟁에서 현실정치에 몸담은 수많은 인사들이 ‘친일파’ 또는 ‘토착왜구’의 낙인을 무릅쓰고 아베 정권 편들기에 나서는 것도, 촛불혁명에 반대하는 한·일 수구세력의 연대행동으로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왕년의 친일세력이 8·15해방과 더불어 친미를 앞세운 새로운 복합체로 변모·진화했음을 지적했지만, 식민지시대의 친일행위 자체도 식민지 조선의 독특한 역사적 성격에 비추어 이해할 필요가 있다.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독특한 식민지, 한국: 식민화는 가장 늦게, 봉기는 가장 먼저」(『창작과비평』 2019년 여름호)에서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벨기에와 자이르, 혹은 뽀르뚜갈과 모잠비끄의 관계보다는 독일과 프랑스, 혹은 영국과 아일랜드의 관계와 훨씬 더 비슷”(324면; 본서 73면)함을 상기시킨 바 있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친일잔재 청산 논의에서 가장 흔히 거론되는 것은 2차대전 이후 프랑스가 나치부역자를 처단한 사례다. 저들은 불과 몇해의 점령을 겪고도 그처럼 단호하고 철저했는데 우리는 몇배나 긴 종살이를 하고도 왜 거의 아무것도 못했냐고 개탄하기 일쑤다. 하지만 점령기간이 길어질수록 부역자 수가 늘어나게 마련이고 그들을 처단하고 청산하는 작업이 그만큼 더 어려워지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더구나 프랑스·독일의 사례와 결정적인 차이는, 1940년 당시 프랑스는 국민국가가 확립된 지 오래된 상태로 적국과 협력하는 반국가행위에 대한 형법상의 처벌조항을 완비하고 있었다. 반면에 1905년 또는 1910년 당시의 대한제국은 그러한 근대국가가 아니었기에 황제를 배반한 대신과 지도급 인사들은 ‘역적’으로 규정되었지만 일단 일본이 점령한 뒤의 행위를 처벌할 형법 조항은 없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의 친일청산이 ‘반국가’ 아닌 ‘반민족’ 행위를 대상으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다.
특히 국권상실 이후 태어나서 줄곧 총독부의 법질서 아래 산 인물들의 친일행위 판정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법적 기준은 없고 3· 1의 기억과 민족정신을 배반했다는 잘못을 따져야 하는데, 독립운동가들은 예우받아야 하고 명백히 악질적인 친일부역자는 사후적으로라도 처벌·단죄해야 마땅하지만 간명한 판단이 힘든 그 중간의 회색지대가 꽤나 넓게 마련이다. 또한 국권상실 이전에 성장한 세대라 해도 3· 1의 성과로 열린 민족적 자력양성의 공간을 적극 활용하면서 더러 친일의 방편 을 구사하기도 한 경우가 있다면 그 공과와 세정(細情)을 살펴 종합적으 로 판단할 일이지 해외운동가의 순정한 기준이나 유교의 전통적 의리론을 그대로 적용하는 것이 상책은 아닐 것이다.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와 다른 식민지 조선의 이런 현실을 감안할 때, 대한민국 초기의 반민특위가 한결 순탄한 환경에서 활동을 더 오래 지속했더라면 일종의 혁명검찰 역할에 머물지 않고 오랜 백인통치 이후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시도한 ‘진실과 화해’ 위원회 같은 역할을 한국의 실정에 맞게 창의적으로 배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으리라 상상해볼 수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창의적 진화는커녕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청산했어야 할 친일파한테 도리어 청산당하고 말았다. 그 결과로 친일청산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나 지혜로운 대응이 오늘날까지도 힘들어졌는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일제통치가 남긴 최악의 유산 가운데
하나이자 분단으로 인한 최대의 피해에 속하지 않을까 한다.
애초에 친일보다 반공·친미 분단국가의 깃발 아래 살아남은 일제잔재는 이후 자유민주주의, 지역주의, 기독교적 가치 등 다양한 깃발을 활용하면서 남녘에서 분단체제를 지탱하는 큰 기둥으로 남았다. 다만 공공연한 친일은 대체로 삼가왔는데, 최근의 한·일 경제전쟁에서 명시적 또는 묵시적으로 일본정부를 두둔하는 행태를 드러낸 것은 어쩌면 초유의 현상일 듯하다. 하필이면 왜 다수 국민이 자발적으로 일본상품 불매운동마저 벌이는 이 판국에 저들이 그러는 것일까? 앞서도 비쳤듯이 이는 촛불혁명을 빼고는 설명하기 힘들다.
친일잔재를 대거 함유한 수구정당은 촛불혁명으로 정권을 빼앗겼을 뿐 아니라 정상적인 방법으로 다시 집권할 수 있다는 희망과 그럴 의지를 상실했다. 과거에는 자신의 민낯을 가리고 국민을 속여서 정권을 잡거나 집권에 근접했었지만 지금은 그런 여유가 없게 된 것이다. 게다가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계속하고 험악한 언사를 토해내어 그들의 권력유지에 도움을 주던 북측이 남북화해에 응함으로써 먼저 배신을 했고, 다음으로 믿던 미국이 북과의 대결을 지속하는 대신 북미정상회담을 엶으로써 또 배신했다. 이제 그나마 남은 것이 일본인데, 아베 수상마저 북일화해를 모색하며 배신자의 행렬에 가담할까 걱정하던 참에, 촛불정부라서 국민이 동의할 수 없는 한일합의의 이행을 거부하고 삼권분립의 원칙에 따라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며 ‘신한반도체제’를 주도하겠다고 나서는 문재인 대통령을 혼내주려고 아베가 나섰으니 촛불혁 명 반대세력으로서는 천우신조(天佑神助)인 셈이다. 어차피 집권을 하려면 현 정부를 철저히 망가뜨려서 반사이익을 보는 길밖에 없는데 문재인정부를 상대 않겠다는 일본을 돕지 않고 어쩔 것인가.
그러므로 3· 1 백주년을 맞아 새로운 백년의 시급한 과제로 ‘친
재 청산’을 꼽은 대통령은 방향을 제대로 잡은 것이다. 다만 ‘친일잔재’보다는 ‘일제잔재’라는 한층 큰 틀로 접근할 일이며, ‘일제잔재’ 또한 분단체제에서 그것이 어떻게 진화·온존해왔고 분단체제의 재생산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인식하고 대응할 일이다.
금년 들어 분단기득권 세력은 세차례의 대공세를 벌였다. 첫번째는 선거법 개정과 검찰개혁안의 신속처리법안(이른바 패스트트랙) 상정을 폭력적으로 저지하려 한 것이었는데 결국 실패했다. 게다가 상당수 의원들이 국회선진화법을 어긴 행위로 피선거권 박탈 가능성도 높아진 상태라 그야말로 ‘쎌프청산’을 해주는 꼴이 될 것 같다. 두번째로는 추가경정예산 심의를 거부하고 장외투쟁에 나서서 거의 100일 동안 발목잡기를 했다. 이 또한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은 처리에 응하고 말았다. 세번째는 조국(曺國) 전 민정수석의 법무부 장관 지명, 이어서 그의 임명에 반대하는 문자 그대로의 대전(大戰)이었다. 이번에는 후보자 본 인의—법적 혐의 여부를 떠나—정치적·도덕적 약점이 상당수 드러남으로써 많은 사람들의 분노와 좌절감을 야기했고 거의 모든 언론기관이 야당의 공세에 합류한데다 검찰마저 개입함으로써 문재인정부의 검찰개혁 시도 자체가 좌절될 위험마저 닥쳤다. 그리고 이 세번째 대공세가 성공한다면 곧 분단기득권 세력의 기사회생과 정국주도로 이어질 판이었다.
이때 다시 한번 대세를 결정한 것이 촛불시민이었다. 9월 28일, 10월 5일 그리고 12일의 대규모 촛불집회는 촛불혁명이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역력한 증거다. 집회 주최자와 참가자들 대다수가 군중의 규모에 스스로 놀랐는데, 과거의 촛불시위들은 (2016년 가을의 국정농단 규탄시위를 포함하여) 모두가 일정한 ‘예열기간’을 거치면서 점차 그 규모가 늘어났지만 이번에는 불과 수천명에서 수만명이 모이던 사법적폐청산 촉구 집회가 9월 28일에 갑자기 백만명 인파로 늘어났기 때문이다. 이는 2016~17년의 촛불시위가 일회성 항쟁으로 끝난 게 아니고 정권교체를 넘어 우리 사회의 체질을 바꾸는 촛불혁명의 시작이었음을 웅변한다. 일단 촛불정부를 탄생시킨 시민들은 정부의 개혁작업과 분단체제 극복노력을 지켜보면서 광장을 성조기와 태극기를 휘두르는 반촛불세력에 내맡기는 듯도 했지만, 촛불혁명 자체가 좌절의 위기에 처했음을 직감했을 때 ‘느닷없이’ 거리로 쏟아져나와 적폐세력의 공세를 막아내고 검찰개혁의 동력을 되살렸던 것이다.
한마디 덧붙이자면 촛불시민들에 맞선 대규모 반정부시위도 진행 중인 촛불혁명의 또다른 반증이라는 점이다. 한편으로 그것은 최후의 결전을 맞았다는 기득권세력의 절박함을 반영한 군중동원이지만, 다른 한편 참가군중의 절대다수가 동원되고 오도된 것만은 아니고 촛불시대의 주권의식을 다른 방향으로 표출하는 시민들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주권시민들의 이런 적극적 개입에 정부가 어떻게 반응하여 당면한 개혁과제들을 완수하고 분단기득권 세력의 한 중심축에 다름 아닌 ‘일제잔재’의 청산작업으로 이어갈지는 지켜볼 일이다. 다만 3· 1에서 시작하여 우리 시대의 촛불혁명에 이르는 경험과 경력을 자랑하는 시민들이 ‘촛불정부’가 얼마나 ‘촛불’다운가에 대한 감시도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다.




40Paik Yonjae, 박걸 and 38 oth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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