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보식이 만난 사람]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해결되면 말할 거예요… 내 靑春 보상해달라고" | 조선일보 AMP
[최보식이 만난 사람]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 해결되면 말할 거예요… 내 靑春 보상해달라고"
오피니언최보식 선임기자
입력 2015.07.20 03:00수정 2015.07.20 10:04
[일본에서 위안부 할머니를 위해 싸워온 25년… 우스키 게이코씨]
"할아버지가 무슨 짓 했는지 일본 국민도 알고 반성해야
國民이 반성하지 않으면 정부는 반성하지 않아"
"韓 운동단체 양반 의식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들의 기준만 내세우고 어려운 피해자 입장 몰라"
일본 다카마쓰 공항에 나와 있는 인파 속에서 우스키 게이코(67·臼杵敬子)씨를 단번에 알아봤다. 한 번도 만난 적 없었지만 보는 순간 저 사람이구나 싶었다. 낡은 운동모를 쓴 그녀는 하늘색 셔츠와 바지 차림에 고무 샌들을 신고 있었다.
"우연히 뛰어들었는데 25년이 흘렀어요. 이렇게 오래 끌 줄은 몰랐지요. '위안부 할머니 보상 문제'가 해결되면 할머니들에게 말하겠어요. 이제 내 청춘(靑春)을 보상해달라고(웃음)."
그녀는 일본의 전후(戰後) 책임을 확실히 하는 '핫키리(ハッキリ)회'를 만든 인물이다. 일본 도쿄지방법원에서 13년간 끌어왔던 태평양전쟁 희생자 보상 청구 재판을 뒷바라지했고, 위안부 할머니 문제 해결을 위해 일본 현지에서 온몸으로 싸워왔다.
우스키 게이코씨는“한국 위안부 할머니 문제로 2년간 입국 금지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최보식 기자
"한국 유족은 대부분 시골 노인이었지요. 나리타 공항에 도착해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바닥에 앉아 오징어 안주로 소주를 마셨으니까요(웃음). 우리 회원들이 깃발을 들고 '이쪽으로 오시오 저쪽으로 오시오' 하며 군대 스타일로 했어요."
―서로 문화와 정서가 달라, 일본인 눈에는 이해가 잘 안 되지요?
"우리는 유족회에 '경비 문제가 있으니 가능하면 많이 데리고 오지 말라'고 했지요. 하지만 한국에서는 서로 '내가 가야 해결된다'며 한 번에 50명까지 왔어요. 그때 JAL 항공료가 더 쌌어요. 그걸 타고 오겠다고 해서 그 시간에 기다리고 있으면 '일본과 싸워야 하는데 왜 일본 비행기를 타야 하나. KAL로 바뀌었다'는 전화가 와요(웃음). 골치 아팠지만 재미있었어요."
그녀는 대학 시절 좌파 운동권이었다. 니혼대 예술학부를 중퇴한 뒤 프리랜서와 방송 작가를 했다. 1976년 유학 중인 친구를 방문하기 전까지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한국까지 비행기로 두 시간밖에 안 걸리는 데 놀랐어요. 이렇게 가까운 한국을 왜 전혀 모르고 있었을까 했어요. 그 뒤 일본인의 '기생(妓生) 관광'을 취재하면서 역사적으로 위안부 문제도 있었다는 걸 알게 됐지요. 일본의 TV 방송에서 '일제 36년 전후 36년' 같은 프로를 만들 때는 작가로 참여했지요."
그녀는 서른네 살에 연세대어학당에 입학했고, 그때 사귀었던 한국의 한 여성 주간지 편집장을 통해 위안부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1984년이었어요. 배애자 할머니는 서울 삼각지에 있는 건물의 옥탑방에 살고 있었어요. 위안부로 미얀마까지 끌려갔다가 해방을 맞았다고 해요. 하지만 한국에 돌아오지 않고 사이공(호찌민)으로 넘어가 거기서 한국 남자와 결혼했어요. 하지만 위안부였다는 사실이 드러나 이혼당했어요. 그 뒤 베트남 남자를 만나 살았어요. 베트남전쟁에서 사이공이 함락됐을 때 아이 다섯을 데리고 한국 대사관에 들어갔대요. 베트남 난민들 사이에 끼여 한국으로 돌아온 거예요. 파란만장한 삶이었어요."
그녀에 의해 위안부 할머니의 존재가 일본 TV 방송에 처음 소개됐다. 배애자 할머니는 1988년 세상을 떴다.
"사회적으로 지원 단체가 없었을 때였죠. 제가 개인적으로 얼마간 도움을 줬을 뿐. 이분이 살아 있었다면 김학순(1994년 도쿄지방법원에서 일본군위안부 존재 사실을 최초로 증언·1997년 별세) 할머니보다 먼저 '1호 할머니'가 됐을 겁니다."
그녀는 1990년 일본 신문에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가 일본 후생성을 찾아 한국인 군인·군속 명단을 요구했다'는 1단짜리 기사가 실린 걸 보고, 한국에도 유족회가 있었구나 하고 놀랐다. 그해 6월경 다른 일로 서울에 가 있었는데 일본의 한 방송국에서 '유족회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도보 행진을 하고 있으니 당신이 취재해달라'고 연락이 왔다. 그는 도보로 올라오는 유족들을 만나러 충청도로 찾아갔다. 도착하니 3명밖에 없었다.
"일본 TV에서 취재한다고 하니 다음 날은 몇 백 명이 됐어요(웃음). 이분들과 인터뷰하니 '우리 아버지가 끌려갔는데 어떻게 됐는지 생사를 모르겠다' '아직도 못 찾고 있다' '보상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고들 했어요. 생사 확인은 전후 처리의 기본이잖아요. 전쟁이 끝난 지가 언제인데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한일협정(1965년)으로 배상 문제가 다 끝났다고 했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오는지 쇼크를 받았어요."
―당시 이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던 한국 정부가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일본 정부가 더 문제가 있었어요. 모든 명단을 갖고 있으면서도 후생성 창고에 처박아놓고 90년대까지 공개하지 않았으니까요. 역사적으로 일본 전쟁 때문에 희생됐는데, 그때까지 생사 확인도 안 해주는 것은 정말 양심이 없는 거죠. "
1990년 말 유족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겠다며 도쿄에 갔다. 그런데 유족들 안에서 이견과 충돌이 생겼다. 변호사를 구하지도 못했다.
"나는 취재를 갔다가 부탁을 받고 유족 몇 명을 우리 집에 재워줘야 했어요. 그러면서 주위 친구들에게 '우리는 전후 보상이 다 끝났다고 했지만 한국은 이제 시작이다. 재판을 위한 변호사 선임과 실태 조사 경비가 필요하다'고 알렸어요. '핫키리회'가 그렇게 만들어진 거죠. 열 명으로 시작해 나중에는 400명쯤 됐어요."
―일본 정부를 상대로 재판하는 한국인을 위해 돕겠다는 것은 국가 이익에 반하는 행위가 아닌가요?
"양심과 인도주의가 더 큰 가치이지요. 지금과는 다르게 한국 유족회에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사람이 많았지요. 일본 정계와 언론계 안에서도 반성 분위기가 있었어요."
태평양전쟁 유족회 대표들은 재판이 열릴 때마다 1년에 4번쯤 도쿄에 갔다. 항공료는 한국에서 부담했고, 일본 체류 비용은 핫키리회에서 맡았다. 그녀가 보여준 회원 자료집 '핫키리 뉴스'에는 유족회 숙박비, 활동 내용, 피해자들 육성 증언, 일본 후생성에 생사 확인을 위해 보낸 질의서와 답변서 등이 꼼꼼하게 나와 있었다. 다섯 권이나 되는 이런 두꺼운 기록을 보면서 '정작 피해자인 한국은 하지 않았던 일을 일본의 보통 사람들이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재판의 원고는 40명이었고 이 중 위안부 할머니 9명이 있었어요. 여성 문제 관점에서 위안부 할머니만 주목받았어요. 하지만 전쟁 피해자 유족회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과 유복자도 있었어요. 한국 운동 단체에 이분들도 공평하게 신경을 써달라고 부탁했어요."
1991년 유족들이 도쿄지방법원으로 가는 장면. /가쓰야마 히로스케 제공
―그 재판에서 패소(敗訴)했지요? 제가 알기로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끌었는데.
"한일협정에서 정부 간 보상이 끝난 마당에 이길 수 있다고 애초 생각하지 않았어요. 재판 동안 우리는 전후 처리 보상에 대해 일본 정계에 로비하고 사회적으로 알리는 일을 진행했어요. 그 과정에서 일본 정부가 태평양전쟁 희생자 명단을 공개하겠다고 밝혔고, 위안부 할머니 보상을 위해 '아시아여성기금'도 설립됐으니까요."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은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속임수"라고들 했지요?
"일본 정부는 직접 할머니들에게는 1엔이라도 보상금을 줄 수 없다는 입장이었어요. 당시 나는 국회 앞에서 보름간 시위했어요. 결국 정부는 할머니들의 의료·복지 지원 사업비 명목으로 '아시아여성기금'에 300억엔을 내놓았어요. 국민 모금 200억엔보다 많은 액수였죠. 사실상 정부 돈이 할머니 보상금에 들어갔던 셈이지요. 당시 하시모토(橋本龍太郞) 총리도 성금을 냈고 보상금을 받은 할머니들에게 사과 편지를 전했어요."
―일본 정부는 '군(軍) 위안소는 민간 업자가 상업적으로 운영한 것'이라는 입장이지요. 그래서 법적 책임을 질 수 없다는 것인데.
"설령 민간 업체를 통해 모집했다 해도 사용자는 일본 군대였습니다. 일본 정부와 국민의 책임은 피할 수 없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 정부가 '아시아여성기금'을 앞세운 것을 어떻게 봅니까?
"살아 있는 일본 노인 중에는 전쟁에 참전해 위안부와 관계있는 분들이 있어요. '우리 아버지·할아버지가 무슨 짓 했느냐'를 국민도 알고 반성해야 한다는 거죠. 국민 한 명 한 명 반성하지 않으면 정부가 반성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모금에 찬성했어요.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알려진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도 아시아여성기금 위원이었어요."
―얼마를 지급했나요?
"한국·대만 할머니에게 200만엔(당시 1400만원)이 지급됐어요.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살다가 끌려간 네덜란드 위안부 할머니는 대부분 받았어요. 한국 할머니는 61명만 받았어요."
―한국의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에서는 아시아여성기금의 돈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지요?
"그 돈을 받으면 당신들은 정말 매춘부라는 걸 인정하게 된다는 식으로 말했지요. 저는 한국 운동 단체가 양반 의식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양반 의식이라면?
"프라이드(명분)가 강하다고 할까. 자신들의 기준으로 볼 뿐, 그동안 어렵게 살아왔던 피해자 입장을 모르는 것 같았어요. 할머니들은 언제 죽을지도 모르니 빨리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쪽이었어요. 우리가 이분들을 돕는다 해도 '받아라 받지 말아라' 할 권리가 없어요."
―선생이 할머니들에게 그 돈을 받으라고 회유했다는 주장도 있던데요?
"저는 '받으세요'라고 한 적이 없어요. 일본 정부에 돈을 더 많이 내놓으라고 압박하는 게 제 역할이었어요."
―이 문제로 정신대대책협의회 측에서 법무부를 통해 선생을 2년간 입국 금지시켰다고 들었습니다.
"관광 목적인 무(無)비자로 한국에 들어와 할머니를 만난 게 비자 규정을 어겼다는 통보를 받았지요. 참담한 기분이었어요. 보조를 맞췄던 한국 운동 단체와는 결별했어요. 하지만 제가 해야 할 몫이 남아 있어 이 일을 그만둘 수는 없었어요. 무슨 인연인지 모르나 이 일에 매달려 제 청춘은 다 흘러가버렸어요."
땀이 흘렀다. 습하고 더운 날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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