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급 없는 세상'은 이미 도래했다
입력2020.08.23.
[오늘날의 책읽기] 산업 구조와 노동 시장의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 '보통 사람들의 전쟁'
[이창희 기자]
"미래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다. 단지 널리 퍼지지 않았을 뿐이다." - 윌리엄 깁슨
2020년은 언젠가 보았던 공상과학 영화의 미래를 닮았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의 공포가 전 세계를 짓누른 채,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들이 제일 먼저 죽어나간다. 정부를 믿지 못하는 세력들은 '믿음'이라는 이름으로 공포에 질린 사람들을 선동하고, 사회는 더 이상 건강한 방식으로 대항할 힘을 찾지 못한다. 영화에서는 결국 인간을 지하로 내몰거나, 인공지능을 위시한 기술의 지배를 받는 이등 시민으로 살게 했다.
영화에서만 상상했던 인류 '종말'이 2020년이라고 말하는 것은 성급하겠지만, 혹시라도 디스토피아를 유토피아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그 길을 함께 고민하는 것은 어떨까? 오늘은 미국 민주당의 신진 정치인인 앤드루 양이 쓴 <보통 사람들의 전쟁>을 소개하려고 한다. 사회의 전환을 준비해야 하는 때, 우리의 선택을 고민해 보았으면 한다. 우리의 미래는, 바로 '지금' 우리의 선택이 결정할 테니 말이다.
우리는 노동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지금보다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서둘러 사회를 바꿔야 한다. 시장이 우리 각자에게 부여한 가치와 상관없이 사회가 돌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월급봉투에 적힌 금액으로 평가받아서는 안 되는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다. 그 사실을 하루빨리 증명해야 한다. - 프롤로그 중
저자가 선택한 '보통 사람들'이라는 용어는,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에 따라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우리 모두를 칭한다. 그들은 세상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세상의 전환에 대한 결정권은 터무니없이 약하고, 엘리트 집단에 의해 결정된 규칙에 의한 이권과도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안타깝지만, 세상은 보통 사람들의 토대 위에서 지어졌으나 그들을 충분히 존중하지 않은 채 성장해왔고, 이는 극단적인 양극화를 초래했다. 책에서 제시한 대부분의 데이터는 미국의 것이지만, 분석의 결과는 현재의 대한민국에서도 그대로 적용 가능하다.
얼마 전 정부는 '디지털 뉴딜'을 제시했다. '4차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하던 디지털 기술을 통한 산업 전환을 다시금 천명하며 '세상의 변화에 대비' 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지만, 산업의 전환은 하루아침에 시작된 것도 아니고,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은 이미 와 있을지도 모른다.
아래의 그래프는 책에서 제시된 데이터를 옮긴 것이다. 우리는 보통 사람에게 허용되었던 노동에 의한 임금 경제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아니, 어쩌면 너무 늦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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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주요 기업의 종업원 수 비교 <보통 사람들의 전쟁>에서 제시한 미국 주요 기업의 종업원 숫자를 그래프로 옮겨 보았습니다. 기존의 산업을 대체한 신진 산업 분야에서 급격한 고용 감소를 명확하게 볼 수 있습니다.
ⓒ 이창희
그래프는 전통적으로 고용을 창출하던 산업에서의 고용자 숫자와 대표적인 전통 산업과 유사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신진 산업에서의 2017년 고용자 숫자를 비교하고 있다.
전통적인 산업 분야의 대표기업 일곱 개에서 고용한 노동자의 숫자가 400만 명을 넘는데, 최근 신진 산업에서의 노동자는 이의 15퍼센트에 불과한 62만 명이다. 게다가, 20세기 이후로 지속적으로 시도되는 산업에서의 자동화는 이마저도 점점 더 줄이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임금 노동에 의한 '보통 사람들'의 경제 기반은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 명확하다. 트럼프가 해외 생산 기지를 자국으로 옮기려는 중요한 이유도 치솟는 실업률에 의한 중산층의 붕괴를 완화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데이터를 한국으로 옮겨보자. 아래의 그래프는 한국거래소의 통계를 기반으로 지난 20년 동안의 시가총액 기준 10대 기업이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10년 간격으로 그려본 것이다. 그래프에서도 볼 수 있듯이, 2000년대 초반에는 시가총액 10위 내에 은행(3), 무선통신(2) 관련 기업이 주도적이었다.
이때에도 주된 고용을 창출하던 제조업은 3개 회사에 불과했고, 중공업 기반 제조업은 포항제철이 유일했다. 1970년대부터 대한민국의 산업을 이끌어왔던 기반 중공업인 조선이나 토건산업의 쇠퇴는 이미 명확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의 대한민국은 일본의 침체를 기회로 삼아, 중공업 기반 제조업의 착실한 성장을 선택했다. 결과적으로 2010년의 통계를 보면, 현대중공업이 10위에 다시 들어왔고, 전통적인 고용을 책임 지던 제조업도 여섯 개나 10위 내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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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내 시가총액 10위 기업의 전환 한국거래소 데이터에 기반하여 국내 시가총액 상위 10개의 기업체를 정리해 보았습니다. 자산의 규모가 급격하게 증가한 반면,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은 점차 사라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 이창희
하지만, 이후 10년 동안 대한민국의 산업은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총액 10위 내에 반도체(2)와 배터리(2)로 상징되는 기업들을 제외하면, 전통적인 제조업은 현대차 하나만 남기고 사라졌다. 상위 10개의 업체에 대한 시가총액은 20년 전에 비해 6배 가까이 증가했으나(738조), 해당 업체들을 통한 고용의 창출은 기업체 가치 증가에 비례하여 늘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제조업 쇠퇴 이후의 미국이 그랬듯이, 대다수의 노동자는 자영업을 포함한 서비스 산업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2020년 대한민국에서 안정적인 일자리를 통한 임금 노동은 더 이상 '보통의 삶'이 아니라는 것의 다른 표현이다.
보통 사람들이 택할 수 있는 것
정부는 새로운 일자리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하지만 산업의 전환은 이미 상당 부분 현실화 됐고, 20세기 이후로 급격하게 진행된 제조업 자동화의 결과로 남아있는 제조기반이 수용할 수 있는 노동자의 숫자는 현저히 줄어들었다. 저자가 이 책을 통해 하고 싶은 이야기도 이 지점에서 명확해진다. 임금노동에 의한 삶을 지속할 수 없다면, '보통 사람들'은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 말이다.
결핍의 문화는 부정의 문화다.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만 생각한다. 서로를 공격한다. 패거리 문화와 분열의 문화가 기승을 부린다. 이성은 설자리를 잃는다. 체계적 의사결정은 갈수록 힘들어진다. 결혼이나 창업, 새 일자리를 찾아 이사하기 등 낙관적인 시각에 바탕을 둔 행위는 모두 줄어든다. 이런 말이 익숙하게 들리는가? 오늘날 미국에서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풍요로운 땅에서 '네 몫은 네가 챙기고 내 몫은 내가 챙기는' 땅으로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풍요의 마음가짐을 갖느냐 결핍의 마음가짐을 갖느냐는 자기가 사는 지역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 지역에 따라 경제적 역동성에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거기 사는 사람들의 미래관도 확연히 다른 경우가 많다. 사람의 삶의 방식은 크게 보아 자기가 사는 곳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 163~164쪽
노동에 의해 고용이 보장되고, 임금으로 생활이 안정된다고 믿었던 세상이 끝나가고 있다. 생활의 기반이 흔들리기 시작하면, 결핍에 의한 불안과 공포가 무럭무럭 자라난다. 2020년의 대한민국에서 빈번하게 목격하는, 보통 사람들끼리의 반목과 집단 이기심의 원인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전통적인 임금 생활을 지탱하던 노동시장이 쪼그라들고 있는 현실 속에서, 그 작아진 파이를 나눠먹겠다며 '보통 사람들'끼리 전쟁을 벌이는 동안 우리가 놓치는 게 무엇인지 집중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기업 가치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늘어났는데, 그 가치가 사회로 환원되지 않는 지금의 구조를 그대로 둔 채로는, 사회의 미래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산업의 전환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고용 없는 산업이 창출해 낸 이익을 사회로 환원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몇 년 전, 4차 산업혁명을 얘기하며 '노동 없는 미래'에 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관련 기사 : "내 조카는 20년 후 무슨 일을 하게 될까") 이 글을 마무리하며, 노동 없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사회시스템의 개혁 및 부의 재분배에 대한 문제 제기는 시기 상조라며 급하게 끝냈었다. 하지만, 2020년은 다르다.
코로나19의 재앙은 공상과학 영화에서만 가능했던 미래를, 성큼 큰 발자국으로 우리 곁에 데려다 놓았다. 대한민국 정부가 산업의 전환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다며 제시한 '디지털 뉴딜'은 단순히 산업의 전환만으로는 성공할 수 없는 명제이다. '보통 사람들'끼리의 전쟁을 벌이는 게 아니라, 기존의 거대한 시스템을 바꿔나가야만 간신히 성공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이 책에서 저자가 제시한 가장 시급한 방법은 '보편적 기본소득 (UBI: Universal Basic Income)'의 시행이다. 부족한 예산은 고용 없이 창출된 부를 통해 충당해야 할 것이다. 지난 코로나19를 통해 증명된 바와 같이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지급되는 소득은 삶의 안정과 함께 미래에 대한 역동성을 보장할 것이다. 돈이 풀리는 것으로 물가의 급격한 상승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이것조차 양극화가 어느 정도 완화된 후에야 고민해야 할 이슈이다.
그리고, 긴급 재난 지원금의 지급 사례에서도 본 것처럼, 주어진 자금이 아무 데나 엉뚱한 곳에 쓰일 것이라는 걱정도 이제는 쓸데없다는 것을 잘 안다. 기본소득 이후로 진행되고 있는 기본 주택이나, 교육이나 의료시스템의 재정비에 대한 논의도 이제는 놀랍지 않다. 코로나19의 위기 상황을 힘겹게 거쳐온 대한민국은, 이제서야 제대로 된 '산업의 전환'을 시도할 수 있을 모양이다. 지금이야말로 보통 사람들의 힘을 모아, 함께 싸울 때다.
우리는 모든 의심, 냉소, 조롱, 증오, 분노를 이겨내고, 아직 여지가 있을 때 이 세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 새로운 세상을 마음속에 떠올리며 온 마음을 다해 싸워야 한다. 손을 내밀어 서로의 팔을 움켜잡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이기심과 절망과 체념의 장애물을 헤치고 나아가야 한다. 자신의 목숨이 달린 것처럼 서로를 위해 싸워야 한다. 언덕에 오르면 눈에 보이는 모습을 뒤따르는 사람들에게 말해주라.
무엇이 보이는가? 그런 다음 언덕 저편에 우리가 원하는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 일어서야 한다. 이제 행동할 때가 되었다. 무엇이 우리를 사람답게 만드는가? 아직도 더 나은 세상은 가능하다. 함께 힘을 모아 싸우자. - 333~334쪽
덧붙이는 글 | 책 정보: <보통 사람들의 전쟁> 앤드루 양 지음/장용원 옮김, 흐름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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