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시베리아 억류자, 일제와 분단과 냉전에 짓밟힌 사람들 김효순 (지은이)
서해문집2009-08-20
332쪽
책소개
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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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인 사람들이 있었다.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목차
들어가는 글
억류, 시련이 시작되다
1. 38선에 나타난 괴청년들
2. 아버지의 발자취
3. 쿠릴 열도에서 소만蘇滿 국경까지
4. 해방의 기쁨은 사라지고
5. 스탈린의 억류 결정
6. 엇갈린 운명_동완과 강영훈, 백선엽
7. 시베리아의 삶
8. 소련의 집요한 전범 추적
관부 연락선 ‘고안마루’
9. 민주운동의 회오리
관동군 참모 출신의 억류자 세지마 류조
귀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0. 귀환, 새로운 고난의 시작
11. 한국전쟁, 다시 전화戰禍에 휘말리다
12.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_류학구와 오웅근
13. 강요된 침묵과 삭풍회
14. 아픔을 나누며 공동 투쟁으로
전억협 회장 데라우치 요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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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인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38선을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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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동양통신> <경향신문>을 거쳐 <한겨레> 창간에 간여해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2007년부터 취재 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직했고,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한일 관계, 동아시아의 평화, 화해, 시민운동 등을 테마로 글을 쓰고 있으며,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에 《조국이 버린 사람들》(2015), 《간도 특설대》(2014), 《역사가에게 묻다》(20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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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인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1.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책이다!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 현대사의 비극을 생생한 취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복원했다!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1945년 8월 초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집에 연락하니 아버지가 평양에서 일부러 찾아왔다. 아버지는 최전방에 가더라도 앞에 나서지 말고,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몇 차례나 당부했다. 끝내 비통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 아버지는 하룻밤 자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을 이병주는 몰랐다. 8월 9일 북만주의 하이라얼에 있는 362부대로 들어갔다. 소련이 만주 주둔 관동군에 대해 총공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역 주위에 대기하면서 이병주는 평생 잊지 못할 참극을 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중위 계급장을 단 인솔 장교가 나타나 “철교가 끊겨 기관차가 올라올 수 없다”고 알렸다. … 장교는 소련군들이 곧 들어와 강간하고 다 죽일 테니 천황 폐하를 위해 함께 죽자며 총과 칼을 나누어 주었다. … 부녀자들이 집단 자결하자 군인들이 화차의 군용물자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역 구내는 폭약들이 터지면서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규철이 배속된 아베 부대는 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최전방 쑨우로 출발했다. 조선인 신병들은 철모도 소총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저 탄약 상자를 교대로 메고 4시간 동안 행군해서 쑨우에 도착했다. 분대별로 흩어져 참호를 팠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돌진하는 전차를 막기 위한 자살 공격 훈련이 시작됐다.
이규철이 소속된 작업 대대는 9월 초 셀레트칸에 도착해 인근 집단농장에서 감자 수확 등 농사일을 하다가 10월 초 산속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삼림 벌채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숲길을 2시간가량 걸어 들어가 이중 철조망이 둘러쳐진 울안에 들어갔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이 수용소는 막사가 아예 없었다. … 포로들의 노동으로 세워진 지하 거처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규철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들은 80여 일 동안 누워서 자지를 못했다고 한다.
1차 탈출에 실패하고 소련 내무부 영창으로 끌려간 나관국 일행 4명은 사흘 동안 취조 없이 수감돼 있다가 나흘째 되는 날 20지구 17분소 수용소 영창으로 옮겨졌다. 모두 정치장교 시모노프의 신문을 받았다. … 시모노프의 제의는 수용소 안에 신분을 감추고 숨어 있는 731부대원을 색출하는 데 협력하면 탈출 사실을 불문에 부치겠다는 것이다.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방역 급수부대’로, 만주나 중국에서 일제의 세균전·화학전 실험을 주도한 특수부대다.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옷차림의 청년들을 보고 놀란 초소 경비병에게 이들의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 전쟁터라는 사지에서 살아남고, 소련에서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 땅에 돌아온 첫날은 이렇게 포로처럼 두 손을 드는 것으로 시작됐다. 박정의는 “소련군에 항복할 때도 손 안 들어 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들었지!”
동완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종전 때 소련군 포로가 돼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소집됐고, 남쪽으로 귀순해 미군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됐다. … 동완은 생전에 시베리아 억류 생활 등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던 모진 경험을 오랫동안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 요소 외에도 냉전과 분단 체제가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소련 억류 생활에서 풀려나 남한이나 북한으로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에 남은 오웅근과 소련에 남아 러시아 사학계의 신화가 된 류학구, 지원병으로 입대했다가 일본으로 간 이창석의 얘기도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생존자뿐만 아니라 일본인 억류자의 증언과 치밀하고 폭넓은 자료 분석으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베리아 억류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민주운동’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일본인 포로 출신들의 증언과 젠다오 특무기관원 출신의 전범 바바 요시미쓰, 마지막 조선군 사령관 아들인 이타가키 다다시 등을 통해 시베리아 억류 생활의 전모가 밝혀진다.
3.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일제 말기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처지와 강대국들의 전후 처리 흥정, 소련의 참전 경위, 오끼나와 전투에서의 자살 특공대, 일본군이 소련 정벌 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관동군의 유래와 실상, 일본군의 시베리아 이송과 억류 결정은 포츠담 선언의 규정과 어긋나는데도 스탈린이 억류를 결정한 배경, 세균전을 수행한 731부대의 만행, 소련의 일본인 전범 재판 등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챙겼다. 또한 관동군 참모 출신의 억류자인 ‘세지마 류조’를 한일 현대사의 증인으로 꼽으면서 한국의 권력 핵심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등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이면을 알려주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4.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가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에서 출간된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회고록 덕분이었다. 책 속에 언급한 조선인 포로들이 그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피해자의 자비 출판본을 포함해 2000여 종이 넘는 책이 나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시베리아 억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조차 거의 없었을 때였다.
저자는 다름 아닌 우리 문제를 일본인들이 10여 년 전에 한국·중국·러시아를 다니며 취재했는데 ‘나는 그때 무엇을 했는지’를 물었다. 우리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을 추적하는 데 일본인들이 오래 전에 세워놓은 이정표를 쫓아가는 겸연쩍은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는 이 나라 언론인, 학자,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무원, 정치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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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막바지 45년, 일제에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은 종전 후 포로 심문으로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포로생활을 했다. 개인에게 잔혹했던 근대, 잔혹한 역사를 맨몸으로 견뎌낸 그들은 아직까지 북쪽의 차가운 바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까치 2020-03-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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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우리 근대사의 해저에 감추어져버린 사람들- 강대국들의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려 짓밟히고, 국가에 의해 버려진 차마 인권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이야기다. 이 책이 나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터면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서 이들의 신원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해방전후사에 감추어진 진실조차도 묻혀버릴 뻔하였다.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사실인가 의심될 정도의 참혹한 삶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달하는데 저자의 취재열정이 느껴진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배경을 이루는데 구체적이고 적절한 구성과 편집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가슴 아픈 역사의 외면당한 진실을 바로 보고 바로 세워야 하는 과제를 던져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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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3524 2009-09-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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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만큼이나 아픈 사람들이 있었다.. 새창으로 보기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는 정말 독특하다 싶었다.
한 사람이 일본군이었다가 인민군이었다가 국군이 되었다니..
한 사람의 인생이 어찌 그리 될 수가 있는건지. 설령 소설 속에서라도 너무 가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있었다. 허구라고 넘기기에도 너무 가혹한 사람들이..
일제치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보내진 사실은 익히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전쟁이 끝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지목되어 시베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아닌, 전쟁으로 피해를 본 나라의 백성이 어찌하여 전쟁 종료 후에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포로 생활을 했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러시아 말이나 일본말을 할 수 있었던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주장했으나 소련 측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이송이 되고 억류 결정이 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미국과 소련의 전후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이 소련에 배상하는 방안의 하나로 노동력 제공을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전억협(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이라는 일본의 단체가 찾아내 공개된 문서에 뚜렷히 나와 있는 사실이었다. 문서로 인해 논란이 되자 아사에다 참모는 "전쟁에 진 일본의 본토 4개 섬에 모든 사람을 밀어넣으면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 일본이 재기하려면 자원이 있는 대륙에 달라붙어 설사 국적이 바뀌더라도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또한 수인노동(죄수에게 과해지는 강제노동)이 1930년대부터 소련에서 국가 계획경제의 한 기둥이었으며, 시베리아 억류는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된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 마지막 세번째 이유였다.
억류, 시련이 시작되다
1948년 12월. 한 밤 중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그 곳을 고국 땅을 밟는다는 기쁨으로 발길을 옮기던 사람들. 그들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종료 후 시베리아에서 몇년 간 포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에 항복 할 때도 손 안들어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 들었지. (P.23)
당시 한반도는 독립을 맞았지만 한반도 내에 하나의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서로 간에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한 밤 중 38선을 넘었던 사람들 중엔 남한 군인의 총에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한 밤 중에 38선을 넘은 이유는 북 쪽에서 그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그들에게 조선의 화폐를 제공하기도 했다.
힘들게 고향 땅을 찾아와 가족을 만났지만 이들에게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포로로서 노동을 했던 시간은 3~4년 정도 였는데 그 사이 고향의 가족들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던 것. 게다가 때는 1948년 12월. 한국전쟁이 터지기 채 2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본군에게 징집될 당시 대부분 젊은 나이였기에 포로 생활을 하고 고국에 돌아왔을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3~40대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다시 그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아니 명령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전쟁에 나가야했다.
귀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단체 중에 "삭풍회"라는 곳이 있다.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말한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름지어진 이 단체는 1991년 12월께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분들이 뜻을 모아 결성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도 훨씬 오래 전인데 왜 그제서야 단체를 조직했을까 싶지만 이 또한 한국이 소련과 수교를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한국 정부에게 삭풍회 회원들은 앞의 상황은 딱 잘라버리고, 단지 그들이 북에서 넘어온 인물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정부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아직까지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삭풍회에선 김영삼 대통령 때와 김대중 대통령 취임 당시 진정서를 제출 했으나 돌아온 것은 수용불가나 해결곤란이란 답변이 전부였다.
일본의 경우 "전억협"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지고, 보상 또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적이 "일본"인 자에 한해서였다. 때문에 보상을 받은 일본인 중에 한국의 억류 피해자에게 자신의 보상금을 나눠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음은 2005년 4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우라 외상등 외무성 간부 사이에 오고 간 질의, 응답 중에 곤노 아즈마라는 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P.296)
"삭풍회 사람들은 이미 80세가 넘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성의를 갖고 대응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제 이분들은 나이가 많이 드셨다. 처음 단체를 만들 당시만 해도 50여명이셨던 분들이 현재는 20여명 정도 밖에 남아계시지 않다. 침묵으로 일관한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화합을 통한 발전. 새삼 필요한 일임을 책을 통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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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석과나 2010-02-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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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피해자의 슬픈 사연들 새창으로 보기
1. 너무 늦게 알게된 사실들....
국민 TV를 통해서 이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되었다.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나는 이제서야 이책을 읽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들이 있었는지도 이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너무도 가슴아파 마음이 져려온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원치않는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며,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에서 혹독한 노동을 해야했고, 조국에 귀환할때는 38선을 넘으며 총알세례를 받아야했고, 그후 남북의 이념대립에 따라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했다. 그리고 자신의 한맺힌 사연을 말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안고서..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풀어야할 실타래가 너무도 많다. 그 수많은 실타래중에서 하나가 이들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반드시 풀어야할 실타래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부터 시작해서, 산적해있는 이들 문제들을 안고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할 까? 아니 실타래를 풀려는 생각은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일본은 "만지작거리지 않고 어둠 속에 묻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러한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들게한다.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이름없는 민초들이 사건을 해결한 사례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민초들의 노력에 제대로된 관심과 성의를 보여준다면, 일은 보다 쉽게 해결될 것들이 많다. 시베리아억류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대해서, 이 책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너무도 우리를 슬프게한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존재는 무엇인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3. 식민지에 순응하지 않았다면,
거대한 국가 구조속에서 개인은 너무도 힘이 없다. 그래서 국가가 잘못해도 거기에 휩쓸리면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많다. 이들 시베리아 억류자들도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조국은 없었다. 빼앗긴 조국에서, 남의 국가의 명령을 받아 전쟁터에 나아가야했다. 그리고 한맺힌 삶을 살아야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아쉬운 생각이든다. 만약 그들이 식민지 지배구조에 저항했다면 어떠했을까? 일제의 징병을 피해서 산으로 숨어들어 소극적인 저항이라도 했다면 어떠했을까? 일제의 징병을 피해 도망다니는 소극적이 저항이라도 했다면, 그러다 죽는다해도 이렇게 억울하고 한맺힌 삶을 살지는 않았지 않을까?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누군가가 시켜서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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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5-07-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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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국에 버림받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약탈, 그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노동, 징용, 학살 등을 다룬 <역사가에게 묻다>의 저자인 김효순씨의 또 다른 기록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1940년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이고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공개기록이다.
<역사가에게 묻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 책을 읽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행정부, 국회가 얼마나 자국의 동포들과 시민들에게 무정하고 무책임한지 분노가 치밀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언론사들과 학자들, 대학과 연구소, 지식인들의 미천한 역사의식과 이중성이 역겨워진다. 국가의 존재 이유, 민족을 떠드는 그들의 허울, 민중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개인적으로 미국이 모든 외교정책을 자국과 자본가들 위주로 운영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착취함을 비난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어도 미국 정치인들과 행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자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는 정성과 노력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얼마나 정부관료의 입장이 어려운지, 돈이 많이 드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국민 한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죽은 시체를 자국의 땅으로 데려가 묻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 언론들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한국사회의 공동체가 계속 온존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1945년.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이승만 정부에게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한국이 소련과 수교한 이후인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가 1965년 졸속으로 체결해준 한일회담으로 모든 식민지배상이끝났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정희가 저지른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국내에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이병주, 이규철, 동안 등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저자가 개록해 놓은 기록이 보여주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마추어 학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정부, 정치권, 언론, 학계가 모르는 사실을 저자가 공개했으니 이제 그들이 저자의 기록을 토대로 나머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 억류'가 벌어진지 70여년이 지났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당시의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현실에 없기에 시작하기에 좋은 여건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지와 노력 뿐이라고 생각한다. 국립대학이나 연구소라도 나서서, 개인적인 학자, 교수라도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게된 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모임에서 <역사가에게 묻다>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교재로 선택한 이유가 김효순씨의 활동을 알고자 함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인세를 보태어 그분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마음도 있었다.
[ 2012년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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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구름 2012-03-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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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김효순 새창으로 보기
종전이 임박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 관동군으로 배치되어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힘.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꿈에 그리던 귀환.그러나,한국전쟁 때 남북 모두에게 충성을 요구받음.지금까지 일본도 소련도 대한민국도 피해보상 거부.김광희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시베리아에 끌려갔던 것밖에 없다"고 호소했다.노기자가 묵은 세월을 더듬어 쓴 역사 증언록.
nana35 2013-01-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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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목차
들어가는 글
억류, 시련이 시작되다
1. 38선에 나타난 괴청년들
2. 아버지의 발자취
3. 쿠릴 열도에서 소만蘇滿 국경까지
4. 해방의 기쁨은 사라지고
5. 스탈린의 억류 결정
6. 엇갈린 운명_동완과 강영훈, 백선엽
7. 시베리아의 삶
8. 소련의 집요한 전범 추적
관부 연락선 ‘고안마루’
9. 민주운동의 회오리
관동군 참모 출신의 억류자 세지마 류조
귀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10. 귀환, 새로운 고난의 시작
11. 한국전쟁, 다시 전화戰禍에 휘말리다
12.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_류학구와 오웅근
13. 강요된 침묵과 삭풍회
14. 아픔을 나누며 공동 투쟁으로
전억협 회장 데라우치 요시오
나오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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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인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38선을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 인문사회과학출판인협의회(인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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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09년 8월 14일자
(주)학교도서관저널
- 학교도서관저널 도서추천위원회가 선정한 2010 추천도서 '청소년 인문.사회'
저자 및 역자소개
김효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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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동양통신> <경향신문>을 거쳐 <한겨레> 창간에 간여해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2007년부터 취재 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직했고,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한일 관계, 동아시아의 평화, 화해, 시민운동 등을 테마로 글을 쓰고 있으며,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에 《조국이 버린 사람들》(2015), 《간도 특설대》(2014), 《역사가에게 묻다》(20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 더보기
최근작 :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인권, 세계를 이해하다>,<리영희를 함께 읽다>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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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연필>,<밤에만 문을 여는 마음 상담소>,<평화가 온다>등 총 433종
대표분야 : 역사 8위 (브랜드 지수 293,469점), 고전 13위 (브랜드 지수 212,800점), 청소년 인문/사회 14위 (브랜드 지수 43,250점)
출판사 제공
책소개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패망이 해방이 아니라 새로운 억류의 시작인 사람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1.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책이다!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2. 현대사의 비극을 생생한 취재를 바탕으로 치밀하게 복원했다!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1945년 8월 초 입대하라는 영장이 나왔다. 집에 연락하니 아버지가 평양에서 일부러 찾아왔다. 아버지는 최전방에 가더라도 앞에 나서지 말고, 어떻게 하든 살아남아야 한다고 몇 차례나 당부했다. 끝내 비통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울기 시작한 아버지는 하룻밤 자고 다시 평양으로 돌아갔다. 그것이 마지막 대면이 될 줄을 이병주는 몰랐다. 8월 9일 북만주의 하이라얼에 있는 362부대로 들어갔다. 소련이 만주 주둔 관동군에 대해 총공격을 시작한 바로 그날이었다.
역 주위에 대기하면서 이병주는 평생 잊지 못할 참극을 보았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중위 계급장을 단 인솔 장교가 나타나 “철교가 끊겨 기관차가 올라올 수 없다”고 알렸다. … 장교는 소련군들이 곧 들어와 강간하고 다 죽일 테니 천황 폐하를 위해 함께 죽자며 총과 칼을 나누어 주었다. … 부녀자들이 집단 자결하자 군인들이 화차의 군용물자에 휘발유를 끼얹고 불을 붙였다. 역 구내는 폭약들이 터지면서 아수라장으로 바뀌었다.
이규철이 배속된 아베 부대는 소련군에 대항하기 위해 최전방 쑨우로 출발했다. 조선인 신병들은 철모도 소총도 지급되지 않았다. 그저 탄약 상자를 교대로 메고 4시간 동안 행군해서 쑨우에 도착했다. 분대별로 흩어져 참호를 팠다. 새벽 일찍 건빵으로 배를 채우고 돌진하는 전차를 막기 위한 자살 공격 훈련이 시작됐다.
이규철이 소속된 작업 대대는 9월 초 셀레트칸에 도착해 인근 집단농장에서 감자 수확 등 농사일을 하다가 10월 초 산속으로 들어갔다. 본격적으로 삼림 벌채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숲길을 2시간가량 걸어 들어가 이중 철조망이 둘러쳐진 울안에 들어갔다. 허허벌판에 세워진 이 수용소는 막사가 아예 없었다. … 포로들의 노동으로 세워진 지하 거처에 들어가기 전까지 이규철을 비롯한 조선인 포로들은 80여 일 동안 누워서 자지를 못했다고 한다.
1차 탈출에 실패하고 소련 내무부 영창으로 끌려간 나관국 일행 4명은 사흘 동안 취조 없이 수감돼 있다가 나흘째 되는 날 20지구 17분소 수용소 영창으로 옮겨졌다. 모두 정치장교 시모노프의 신문을 받았다. … 시모노프의 제의는 수용소 안에 신분을 감추고 숨어 있는 731부대원을 색출하는 데 협력하면 탈출 사실을 불문에 부치겠다는 것이다.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 급수부’ 또는 ‘방역 급수부대’로, 만주나 중국에서 일제의 세균전·화학전 실험을 주도한 특수부대다.
갑자기 나타난 이상한 옷차림의 청년들을 보고 놀란 초소 경비병에게 이들의 말이 귀에 들어올 턱이 없었다. … 전쟁터라는 사지에서 살아남고, 소련에서도 몇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기며 고향 땅에 돌아온 첫날은 이렇게 포로처럼 두 손을 드는 것으로 시작됐다. 박정의는 “소련군에 항복할 때도 손 안 들어 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들었지!”
동완은 일제 말기 학병으로 일본군에 끌려갔다가 종전 때 소련군 포로가 돼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했다.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와 한국전쟁 때 인민군으로 소집됐고, 남쪽으로 귀순해 미군 군속으로 근무하다가 공군사관학교 교수가 됐다. … 동완은 생전에 시베리아 억류 생활 등 자신이 젊은 시절 겪었던 모진 경험을 오랫동안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개인적 요소 외에도 냉전과 분단 체제가 압박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밖에도 소련 억류 생활에서 풀려나 남한이나 북한으로 오지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중국에 남은 오웅근과 소련에 남아 러시아 사학계의 신화가 된 류학구, 지원병으로 입대했다가 일본으로 간 이창석의 얘기도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생존자뿐만 아니라 일본인 억류자의 증언과 치밀하고 폭넓은 자료 분석으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시베리아 억류에서 가장 논란거리가 되는 ‘민주운동’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일본인 포로 출신들의 증언과 젠다오 특무기관원 출신의 전범 바바 요시미쓰, 마지막 조선군 사령관 아들인 이타가키 다다시 등을 통해 시베리아 억류 생활의 전모가 밝혀진다.
3.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일제 말기 징병으로 끌려간 조선 청년들의 처지와 강대국들의 전후 처리 흥정, 소련의 참전 경위, 오끼나와 전투에서의 자살 특공대, 일본군이 소련 정벌 전략의 핵심으로 삼은 관동군의 유래와 실상, 일본군의 시베리아 이송과 억류 결정은 포츠담 선언의 규정과 어긋나는데도 스탈린이 억류를 결정한 배경, 세균전을 수행한 731부대의 만행, 소련의 일본인 전범 재판 등 역사적 사실을 꼼꼼하게 챙겼다. 또한 관동군 참모 출신의 억류자인 ‘세지마 류조’를 한일 현대사의 증인으로 꼽으면서 한국의 권력 핵심과의 관계를 파헤치는 등 이제껏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이면을 알려주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4. 조선인 시베리아 억류 문제는 피해자들의 아픔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현대사의 비극과 모순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현직 기자인 저자가 ‘시베리아 억류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일본에서 출간된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회고록 덕분이었다. 책 속에 언급한 조선인 포로들이 그의 주의를 끌었던 것이다. 일본에는 피해자의 자비 출판본을 포함해 2000여 종이 넘는 책이 나와 있다고 한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유감스럽게도 한국에서는 ‘시베리아 억류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조차 거의 없었을 때였다.
저자는 다름 아닌 우리 문제를 일본인들이 10여 년 전에 한국·중국·러시아를 다니며 취재했는데 ‘나는 그때 무엇을 했는지’를 물었다. 우리 현대사의 주요한 사건을 추적하는 데 일본인들이 오래 전에 세워놓은 이정표를 쫓아가는 겸연쩍은 상황과 맞닥뜨린 것이다. 이는 이 나라 언론인, 학자, 지식인은 말할 것도 없고 공무원, 정치인들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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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막바지 45년, 일제에 강제징용 당한 조선인들은 종전 후 포로 심문으로 시베리아에서 일본군과 포로생활을 했다. 개인에게 잔혹했던 근대, 잔혹한 역사를 맨몸으로 견뎌낸 그들은 아직까지 북쪽의 차가운 바람을 잊지 못하고 있다.
까치 2020-03-1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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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 새창으로 보기
우리 근대사의 해저에 감추어져버린 사람들- 강대국들의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휘둘려 짓밟히고, 국가에 의해 버려진 차마 인권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이야기다. 이 책이 나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하마터면 우리 역사에서 사라져서 이들의 신원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해방전후사에 감추어진 진실조차도 묻혀버릴 뻔하였다.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사실인가 의심될 정도의 참혹한 삶을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전달하는데 저자의 취재열정이 느껴진다. 여기에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배경을 이루는데 구체적이고 적절한 구성과 편집이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하다. 가슴 아픈 역사의 외면당한 진실을 바로 보고 바로 세워야 하는 과제를 던져 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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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ad3524 2009-09-11 공감(3)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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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역사만큼이나 아픈 사람들이 있었다.. 새창으로 보기
처음 책의 제목을 보고는 정말 독특하다 싶었다.
한 사람이 일본군이었다가 인민군이었다가 국군이 되었다니..
한 사람의 인생이 어찌 그리 될 수가 있는건지. 설령 소설 속에서라도 너무 가혹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런데 있었다. 허구라고 넘기기에도 너무 가혹한 사람들이..
일제치하 시절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터로 보내진 사실은 익히 알려져있다. 하지만 그들 중 일부가 전쟁이 끝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일본군으로 지목되어 시베리아에서 포로 생활을 했다는 사실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이 책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전쟁을 일으킨 나라도 아닌, 전쟁으로 피해를 본 나라의 백성이 어찌하여 전쟁 종료 후에 가해자의 입장이 되어 포로 생활을 했었는지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러시아 말이나 일본말을 할 수 있었던 한국 사람들이 자신들은 일본인이 아니라 한국인임을 주장했으나 소련 측에서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무시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시베리아로 이송이 되고 억류 결정이 난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첫째는 미국과 소련의 전후 주도권 장악을 위한 대립 때문이고, 둘째는 일본이 소련에 배상하는 방안의 하나로 노동력 제공을 먼저 제안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전억협(전국억류자보상협의회)이라는 일본의 단체가 찾아내 공개된 문서에 뚜렷히 나와 있는 사실이었다. 문서로 인해 논란이 되자 아사에다 참모는 "전쟁에 진 일본의 본토 4개 섬에 모든 사람을 밀어넣으면 경제를 재건할 수 없다. 일본이 재기하려면 자원이 있는 대륙에 달라붙어 설사 국적이 바뀌더라도 남아있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했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또한 수인노동(죄수에게 과해지는 강제노동)이 1930년대부터 소련에서 국가 계획경제의 한 기둥이었으며, 시베리아 억류는 피폐해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사전에 면밀하게 준비된 정책의 산물이라는 것이 마지막 세번째 이유였다.
억류, 시련이 시작되다
1948년 12월. 한 밤 중 38선을 넘는 사람들이 있었다. 군인들이 총부리를 겨누고 있는 그 곳을 고국 땅을 밟는다는 기쁨으로 발길을 옮기던 사람들. 그들은 일본군으로 징집되어 전쟁에 참여했다 전쟁 종료 후 시베리아에서 몇년 간 포로 생활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소련군에 항복 할 때도 손 안들어봤고
이북에서도 손들지 않았는데
내 고향 땅에 와서 손들라고 하니
이게 무슨 꼴인가.
결국 손 들었지. (P.23)
당시 한반도는 독립을 맞았지만 한반도 내에 하나의 정부가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각각의 정부가 들어섰고, 서로 간에 마찰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때문에 한 밤 중 38선을 넘었던 사람들 중엔 남한 군인의 총에 맞은 경우도 있었다. 이들이 한 밤 중에 38선을 넘은 이유는 북 쪽에서 그것이 더 안전할 것이라 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은 그들에게 조선의 화폐를 제공하기도 했다.
힘들게 고향 땅을 찾아와 가족을 만났지만 이들에게 행복만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시베리아에서 포로로서 노동을 했던 시간은 3~4년 정도 였는데 그 사이 고향의 가족들이 사망한 경우도 있었던 것. 게다가 때는 1948년 12월. 한국전쟁이 터지기 채 2년도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일본군에게 징집될 당시 대부분 젊은 나이였기에 포로 생활을 하고 고국에 돌아왔을 당시 이들의 대부분이 3~40대였다. 그리하여 한국전쟁이 터지자 정부는 다시 그들에게 전쟁에 참여할 것을 권했다. 아니 명령했다. 운명의 장난이라고 하기엔 너무 가혹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그들은 다시 전쟁에 나가야했다.
귀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국내에 있는 단체 중에 "삭풍회"라는 곳이 있다. 삭풍은 겨울에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을 말한다.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으로 이름지어진 이 단체는 1991년 12월께 시베리아에서 억류 생활을 했던 분들이 뜻을 모아 결성했다.
한국 전쟁이 끝난지도 훨씬 오래 전인데 왜 그제서야 단체를 조직했을까 싶지만 이 또한 한국이 소련과 수교를 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한국 정부에게 삭풍회 회원들은 앞의 상황은 딱 잘라버리고, 단지 그들이 북에서 넘어온 인물이라는 점이 부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수상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그들에 대한 정부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아직까지 그들에게 적절한 보상이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삭풍회에선 김영삼 대통령 때와 김대중 대통령 취임 당시 진정서를 제출 했으나 돌아온 것은 수용불가나 해결곤란이란 답변이 전부였다.
일본의 경우 "전억협"의 활동으로 인해 정부 차원에서 많은 조사가 이루어지고, 보상 또한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국적이 "일본"인 자에 한해서였다. 때문에 보상을 받은 일본인 중에 한국의 억류 피해자에게 자신의 보상금을 나눠준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음은 2005년 4월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 마치우라 외상등 외무성 간부 사이에 오고 간 질의, 응답 중에 곤노 아즈마라는 민주당 의원이 한 말이다. (P.296)
"삭풍회 사람들은 이미 80세가 넘었습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성의를 갖고 대응해주시기 바랍니다. "
이제 이분들은 나이가 많이 드셨다. 처음 단체를 만들 당시만 해도 50여명이셨던 분들이 현재는 20여명 정도 밖에 남아계시지 않다. 침묵으로 일관한 일이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국민을 생각하는 정부라면.
화합을 통한 발전. 새삼 필요한 일임을 책을 통해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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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석과나 2010-02-0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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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피해자의 슬픈 사연들 새창으로 보기
1. 너무 늦게 알게된 사실들....
국민 TV를 통해서 이책의 존재를 처음 알게되었다. 2009년에 초판이 나왔는데, 나는 이제서야 이책을 읽게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들이 있었는지도 이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되었다. 너무도 가슴아파 마음이 져려온다. 식민지 조국에서 태어나 원치않는 일본군에 입대하게 되었으며, 소련군의 포로로 시베리아에서 혹독한 노동을 해야했고, 조국에 귀환할때는 38선을 넘으며 총알세례를 받아야했고, 그후 남북의 이념대립에 따라 죽음의 고비를 넘어야했다. 그리고 자신의 한맺힌 사연을 말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갔다. 그리고 이제야 조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2. 풀리지 않는 실타래를 안고서..
우리의 근현대사에는 풀어야할 실타래가 너무도 많다. 그 수많은 실타래중에서 하나가 이들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이야기이다. 누구도 주목해주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반드시 풀어야할 실타래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부터 시작해서, 산적해있는 이들 문제들을 안고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할 까? 아니 실타래를 풀려는 생각은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 일본은 "만지작거리지 않고 어둠 속에 묻히기를 기대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그러한 일본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들게한다. 정부가 제대로 일을 하지 않아서 이름없는 민초들이 사건을 해결한 사례가 너무도 많다. 그러나, 정부가 이러한 민초들의 노력에 제대로된 관심과 성의를 보여준다면, 일은 보다 쉽게 해결될 것들이 많다. 시베리아억류자들의 피나는 노력에 대해서, 이 책에서 보여준 정부의 모습은 너무도 우리를 슬프게한다. 과연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의 존재는 무엇인가? 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국민을 지키지 못하는 국가는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라는 생각을 들게한다.
3. 식민지에 순응하지 않았다면,
거대한 국가 구조속에서 개인은 너무도 힘이 없다. 그래서 국가가 잘못해도 거기에 휩쓸리면서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이 많다. 이들 시베리아 억류자들도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태어났을 때, 조국은 없었다. 빼앗긴 조국에서, 남의 국가의 명령을 받아 전쟁터에 나아가야했다. 그리고 한맺힌 삶을 살아야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한가지 아쉬운 생각이든다. 만약 그들이 식민지 지배구조에 저항했다면 어떠했을까? 일제의 징병을 피해서 산으로 숨어들어 소극적인 저항이라도 했다면 어떠했을까? 일제의 징병을 피해 도망다니는 소극적이 저항이라도 했다면, 그러다 죽는다해도 이렇게 억울하고 한맺힌 삶을 살지는 않았지 않을까? 한나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누군가가 시켜서 옳지 않은 일을 하는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이 얼마나 큰 비극을 낳는지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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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5-07-05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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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조국에 버림받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 <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새창으로 보기
이 책은 일제의 식민지 침략과 약탈, 그 과정에서 자행된 강제노동, 징용, 학살 등을 다룬 <역사가에게 묻다>의 저자인 김효순씨의 또 다른 기록작품이다.
그동안 우리나라와 세계 어디에서도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1940년대 한반도와 만주 일대에서 일제 징병으로 만주로 끌려갔던 이들이 해방 뒤에는 소련군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어 수년 간 강제노동에 시달렸다. 고국에 돌아와 38선을 넘을 때는 총알 세례를 받고 엄격한 심문을 받은 사람들. 식민 지배와 조국 분단, 그리고 전쟁으로 이어지는 가혹한 역사의 짐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했던 사람,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시베리아 억류자들이고 이 책은 ‘시베리아 억류자’ 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한 최초의 공개기록이다.
<역사가에게 묻다>를 읽으면서도 느꼈지만, 이 책을 읽게 되면 우리나라의 역대 대통령, 행정부, 국회가 얼마나 자국의 동포들과 시민들에게 무정하고 무책임한지 분노가 치밀게 된다. 뿐 만 아니라 언론사들과 학자들, 대학과 연구소, 지식인들의 미천한 역사의식과 이중성이 역겨워진다. 국가의 존재 이유, 민족을 떠드는 그들의 허울, 민중을 위한다는 사탕발림에 진절머리가 난다.
개인적으로 미국이 모든 외교정책을 자국과 자본가들 위주로 운영하면서 한국을 비롯한 제3세계 국가를 침략하고 착취함을 비난하는 나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적어도 미국 정치인들과 행정부의 존재를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이 자국민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쏟는 정성과 노력 때문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시간이 얼마나 많이 지났는지, 얼마나 정부관료의 입장이 어려운지, 돈이 많이 드는지 상관하지 않고 자국민 한 사람을 위험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 죽은 시체를 자국의 땅으로 데려가 묻어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기 때문이다.
도대체 한국의 정치인들과 정부관료, 언론들은 무엇을 위해, 왜 존재하는 것일까? 그러고도 한국사회의 공동체가 계속 온존하게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1945년. 일제 말기 만주(현재의 동북 3성), 쿠릴 열도, 사할린의 일본군 부대에서 복무하던 조선인들이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일제의 징병 정책으로 인해 끌려간 이들이다.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9일, 소련은 한때 승승장구하던 관동군을 궤멸시키고 만주 등지에서 일본군 60여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스탈린은 8월 하순, 포로들을 시베리아 각지로 이송하라는 극비 지령을 내렸다. 이른바 ‘시베리아 억류’로 알려진 사건이다.
문제는 일본군에 끼여 있는 조선 청년들이었다. 이들은 일본 군인으로 간주돼 혹한의 시베리아 등지에서 중노동을 하고 3, 4년 만에 고국에 돌아왔다. 1948년 12월 말 약 2,200명이 소련 화물선을 타고 흥남항으로 귀환했다. 만주나 북한이 연고지인 사람들은 가족을 찾아 떠났지만, 남한이 고향인 사람 500여 명은 이승만 정부에게 골칫거리로 남았다. 이미 남북에 별도 정부가 수립돼 38선을 경계로 팽팽하게 대치하던 때였다.
북한 당국은 남쪽과 이들의 송환을 공식적으로 협의하지 않고 1949년 1, 2월께 한밤중에 38선을 넘도록 했다. 지긋지긋한 일본 군대와 소련 포로 생활을 이겨내고 마침내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들을 맞이한 것은 38선 경비 부대의 발포와 대공 수사기관의 엄격한 신문이었다. 더구나 조사를 마치고 고향에 돌아가서도 오랜 기간 요시찰로 묶여 감시 받았다. 이어진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목숨을 부지한 억류 귀환자들은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이 엄연히 계속되는 상황에서 소련 체험은 천형 같은 낙인이었다. 1990년 6월 한국과 소련이 수교를 맺기 전까지 이들은 자신들의 기막힌 처지를 내놓고 호소하지도 못했다.
억눌렸던 이들이 시베리아에서 당한 고초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시베리아 삭풍회]라는 모임을 결성한 것은 한국이 소련과 수교한 이후인 1991년이었다. 초창기에는 러시아 정부로부터 노동증명서를 발급받는 일에 주력하면서 정부에 시베리아 억류의 억울함을 호소하고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그러나 되돌아 온 것은 성의 없는 회신뿐이었고, 그것은 정권이 바뀌어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정부가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들은 일본 총리에게도 피해 보상을 요구했지만, 일본 정부의 태도 역시 변함없었다. 일본 정부는 박정희가 1965년 졸속으로 체결해준 한일회담으로 모든 식민지배상이끝났다고 큰소리치고 있다. 일본에서는 박정희가 저지른 지금은 일본 군국주의의 피해자이면서 시베리아 포로 생활을 같이 했던 일본 억류자 단체와 교류하면서 서울, 모스크바, 도쿄를 오가면서 보상 촉구 운동을 함께 하고 있다.
이들의 삶은 한국 현대사에서 최대 피해자의 하나로 꼽힌다. 그러나 당한 서러움과 고난에 비하면 이들의 삶은 의외라고 할 정도로 우리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들의 인생에 정부와 권력기관의 위로와 보살핌은 없었다. 전쟁의 사지로 끌고 간 일본이나 시베리아에서 노예 노동을 시킨 러시아는 이제까지 사죄와 보상 요구를 외면했다. 우리 정부도 이들의 하소연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인 적이 없다.”
국내에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한 남쪽 피해자는 이제 30여 명 정도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저자는 그동안 억류 피해자들뿐만 아니라 유족, 관련 단체 관계자, 학자, 국가기록원, 경찰국 등 정부기관의 관료, 정치인 등 한국과 일본 인사 수십 명을 만나 취재했다. 이들의 증언과 인터뷰를 바탕으로 우리 현대사에서 큰 공백으로 남아 있는 시베리아 억류 문제를 하나하나씩 풀어헤쳤다. 이병주, 이규철, 동안 등 생존자들의 육성과 치밀한 자료 분석으로 되살아난 역사의 현장은 참으로 생생하다..
저자가 개록해 놓은 기록이 보여주는 시베리아 억류자들의 고난어린 역정 속에는 해방 전후에 복잡했던 남북한-소련-일본 관계가 농축되어 있다. "1949년 초 갑자기 38선을 넘어 내려와 소련에서 왔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일제가 패망한 후 소련으로 끌려가 노예 노동을 했을까? 일제의 식민 통치 피해자인 조선 청년이 왜 종전이 됐는데도 오히려 가해자 취급을 받아야만 했을까? 냉전이 격화되면서 침략 전쟁의 소모품으로 동원된 이들은 어떻게 버려졌을까? 이들의 억울한 사연이 이제껏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저자는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고 개인의 피해 사례만 나열하면, 야만의 시대에 짓밟힌 수많은 사람들이 털어놓는 또 하나의 넋두리 정도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저자는 어떤 역사적 맥락에서 이들의 기구한 삶이 전개됐는지에 주목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뿐만 아니라 일본·러시아·중국·만주·미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20세기 현대사를 폭넓게 이해하는 게 필요했다. 그렇게 해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한반도를 둘러싼 동아시아의 현대사,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무관심 속에 묻혀있던 근현대사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마추어 학자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시베리아 억류는 한 개인이 조사·연구해서 전모를 밝히기에는 너무 과제가 방대하다. 그러나 한참 늦었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으면 이들의 역사는 영원히 어둠 속에 묻힐 것이다. 정부, 정치권, 언론, 학계가 모르는 사실을 저자가 공개했으니 이제 그들이 저자의 기록을 토대로 나머지 역할과 책임을 다해야 할 것이다.
'시베리아 억류'가 벌어진지 70여년이 지났다, 시간이 오래된 것을 관련 사실을 조사하고 연구하기 어렵다는 단점도 있지만, 당시의 책임을 추궁당할까 두려워하는 이들이 현실에 없기에 시작하기에 좋은 여건이라는 장점도 있는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의지와 노력 뿐이라고 생각한다. 국립대학이나 연구소라도 나서서, 개인적인 학자, 교수라도 나서서 추진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그 사실을 알게된 이들은 각자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공부모임에서 <역사가에게 묻다>와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를 교재로 선택한 이유가 김효순씨의 활동을 알고자 함도 있지만, 조금이라도 인세를 보태어 그분의 활동에 도움이 되고자하는 마음도 있었다.
[ 2012년 3월 2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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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구름 2012-03-27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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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 김효순 새창으로 보기
종전이 임박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징집. 관동군으로 배치되어 소련군에게 포로로 잡힘.시베리아에서 강제 노역.꿈에 그리던 귀환.그러나,한국전쟁 때 남북 모두에게 충성을 요구받음.지금까지 일본도 소련도 대한민국도 피해보상 거부.김광희는 "아무 죄도 저지르지 않았다. 단지 시베리아에 끌려갔던 것밖에 없다"고 호소했다.노기자가 묵은 세월을 더듬어 쓴 역사 증언록.
nana35 2013-01-18 공감(0)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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