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29

Vladimir Tikhonov [한 반도, 두 개의 민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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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ladimir Tikhonov

tSponfhsored3fh ·

[한 반도, 두 개의 민족?]


만물은 변화무쌍입니다. 지속적인, 쉴 사이 없는 변화야말로 모든 물질의 제일 중요한 특징이죠. '민족 정체성'이랄까, 국가나 종족/민족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의 형태 등 역시 늘, 계속 바뀝니다. 어디에서나 언제나 그렇죠. 1917년 혁명 이전의 러시아 제국 총인구의 80%는 농민이었습니다. 그 농민들의 대다수는 문맹자이었고 대부분은 토속 신앙과 섞인 정교회 신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들의 대가부장이신' 황제가 다스리는 국가를 '정교회 신도들의 구심점'으로 생각하고 무서운 착취자, 억압자라고 인식하기도 했지만, 그들의 기본적 소속 단위는 국가가 아닌 '마을 공동체' ('미르' 공동체)이었습니다. 농민 출신이 대부분인 징집된 병사들이 제1차 대전에서 싸우는 걸 그만두고 혁명에 동참한 이유도 역시 별 소속감도 없는 '국가'를 위해 본인들이 왜 싸워서 죽어야 할지에 대한 '의문'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을, 국가적 소속 의식이 아주 분명한 '소비에트 러시아 민족'으로 만든 건 소비에트 시절의 의무 교육과 문자 보급, 라디오 보급, 나아가서 텔레비전 보급이었습니다. 1917년 이전의 러시아 농민들의 '민족' 소속의 의식 형태와 1980년대 소비에트 러시아인들의 '민족' 의식 형태가 과연 같을 리가 있는가요? 당연히 없죠. '러시아인'이라 하지만, 사실 1917년 이전의 민초 차원의 '러시아 민족'의 자의식과 그 후의 의식은 천양지차죠.

분단이 기초적인 '민족 의식'을 완전히 바꿀 수 있는가요? 혹자 제게 '그러면 독일의 통독이 어떻게 된 거냐'라고 반문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그 철저성에 있어서는 '독일 분단'과 '한반도 분단'은 다릅니다. 독일은 냉전의 최전선이었지만, 한반도에서는 1990년대말까지 저수준의 혈전이 계속 지속돼 왔습니다. 남파된 '공비'나 북파된 '공작원'들이 '이념 투쟁'이 아닌, 죽고 죽이는 혈전을 수행한 거죠. 독일은 분단돼도 그래도 많은 '공통점들', 많은 '접점'들을 계속 보유해왔습니다. 비공산계 정당들은 무력화돼 실권을 잡을 수 없었지만, 동독에서도 적어도 조직 형태로서는 남아 있었죠. 교회 역시 문 열려 있었고 정권의 완전한 통제를 받지 않았습니다. 상호 방문부터 (주로 동에서 서로의) 대량 이주까지, 계속해서 인적 왕래도 빈번히 이루어지고 1972년에 동서독 기본 조약이 체결된 뒤로는 양쪽이 상대방의 국가에 외교 대표부도 갖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겐 지금도 이런 게 안돼 있죠. 동독에서 서독 텔레비전을 쉽게 볼 수 있는 1980년대 초반 동독의 일상을, 북한 주민들로서 아마도 상상하기도 힘들지 않을까 싶습니다.

반세기도 채 안되고 불완전한 독일의 분단과 달리, 서로 혈전을 수행하는 두 개의 병영 국가가 생긴 한반도에서는 분단은....거의 완벽했습니다. 물론 두 개의 분단 국가들의 개발 전략은, 사실 생각보다 어떤 면에선 굉장히 서로 비슷하기도 했죠. 두 국가 다 국가 주도의 중공업 중심의 공업화를 매우 빨리 수행했으며, 동시에 의무 교육과 징병제 등으로 주민 동원의 효과를 극대화시켰습니다. 그런데 개발 전략은 사실 서로 닮았지만, 양쪽 국가의 지정학적 소속이 다른 만큼 개발의 구체적인 형태도 판이하게 다르고, 정치적으로도 하등의 접점이 없었던 것이죠. 서독에서는 (아무 힘도 없었지만) 명목상의 독일 공산당은 잔존하고, 동독에서는 (실권 없는) 비공산계 정당들이 기능해왔지만, 한반도에선 이런 걸...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공민은 태생적으로 '경애하는 최고령도자 김정은 동지'를 정점으로 하는 서열 체제에 사회화돼 편입되게 돼 있습니다. 그 서열 체제에 대해 '생명을 바칠 각오로' 높은 충성심을 가져야 하는 반면에, 그 서열 체제 역시 공민들의 교육이나 (원칙적으로는) 의료, 그리고 주택 복지나 노후 등을 책임지게 돼 있습니다 (물론 이미 혼합 경제가 된 오늘날의 현실에서는 이 원칙은 어디까지 현실적인가는 또 다른 문제죠). 선대의 충성심 ('국가에 대한 공훈')은 그 자녀들의 서열적 위치를 상향 조절할 수 있습니다. 즉, 그 서열 체제 속에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 가족 단위로도 몇 대에 걸쳐 신분 상승 (내지 신분 하강) 운동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대한민국은 병영 국가로서의 '본바탕'을 가진 신자유주의적 재벌 국가입니다. 한 가족은 몇 대에 걸쳐 '국가에 대한 공훈'같은 정치 자본 (political capital)이 아니고 '그냥' 자본을 축적합니다. 지금 같으면 국가는 그 어떤 사회적 '중심'이라기보다는 자본 축적의 도구 정도 됩니다. 대한민국에서도 각종의 (일부분 세습적인) 서열 체제 - 재벌, 거대 교회 등등 - 들이 많지만, 그 소유자 가문 이외에는 거기에서의 편입은 태생적인 건 아닙니다. 물론 편입해서 그 소유자 가문에 대해 전전긍긍하고 최상위의 "깍듯한 예의'를 다하고 충성하는 척 해야 하지만, 때가 되면 본전을 뽑고 그냥 나가도 되는 것입니다. 비록 시장화돼 돈주 등 일종의 초기 자본가 계층도 생겼지만,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의 각 개인의 신분을 결정짓는 것은 '나라의 중심'인 '경애하는 최고 령도자'와의 '거리'입니다. 단거리일 수록 유리하고 (자본 축적에도 엄청 유리하고) 원거리일 수록 불리하죠. 대한민국에서의 신분 고하의 유일무이한 척도는 딱 하나, 은행 통장에 적힌 숫자와 부동산 소유 문서입니다. 물론 '네트워크'도 필요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재력이 '관계 자본' (relational capital)을 만드는 겁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우에는, 반대로 권력의 중심에 줄을 대거나, 줄을 댄/그 중심에 서 있는 후견인이 있어야, 즉 '관계 자본'이 있어야 돈주 노릇하기가 가능해지죠.

두 가지 단서를 달고자 합니다. 하나는, 저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식의 국가 관료 자본주의와 대한민국의 재벌 자본주의 사이에서의 그 어떤 '우열'도 가릴 생각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공부'하는 입장에서 '중립적'이어야 한다고 보고, 또 사회주의자로서는 이북의 방식이든 이남의 방식이든 그 어떤 형태에 자본주의에 대해서도 전혀 애착을 느끼지 못합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저는 기본적으로 통일논자입니다. 한반도에서의 전쟁 방지, 평화 수호는 제게 중심적인 관심사인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느슨한 형태라 하더라도 한반도에서는 하나의 정치체가 존재하는 게 유리하죠. 서로 당분간 정치.경제 체제의 차이를 유보하더라도, 남북이 함깨 감군하면서 궁극에 가서 군사/외교를 공동 운영하면서 하나의 대외적으로 중립적인 <한반도 공동체>를 이루는 것은 저의 숙원입니다. 그건 그렇지만, 그 숙원을 이루는 과정이 아주 길 것이라는 걸 전 스스로 인식하기도 하죠. 오랜 평화, 경헙, 공존의 기간이 필요할테고, 그 과정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가 분단의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현실'의 중요한 일부분은, 70년 넘은 서로 상이한 체제에의 순응의 결과, 현재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민과 대한민국의 주민들이 '국민/인민' 소속뿐만 아니라 '민족적' 존재 형태 자체가 이미 거의 다르다고 봐야 하지 않는가, 싶은 것입니다.

이남에서 태어났는가 이북에서 태어났는가에 따라 서로 인생의 전략이나 대인 관계를 맺는 형태, 사회와 자기 자신을 보는 눈까지 다릅니다. 탈북해서 남한에 오신 분들이 남한인들에 대해 '매정하고 계산적'이라고 혹평하는 것은, 그 엄청난 '거리'를 표현하는 거죠. 언어도 이미 상당 부분 서로 이질화됐고, 심지어 평균 신장도 서로 다릅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20대 남성의 평균 신장은 대한민국의 20대 남성에 비해 약 8-9센티 작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다 성공적인 평화 공동체 구축, 그리고 궁극적인 통일을 위해서는 일단 현재의 엄청난 '차이'부터 제대로 인식하고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일제말기, 해방초기에 존재했던 하나의 '조선 민족' 대신에 지금 두 개의 서로 다른 분단 국가가 길러낸 새로운 남북한 양 민족이 존재한다는 점을 바르게 인식하면, 앞으로 이 두 민족이 어떻게 평화로운 하나의 한반도를 만들어나갈 것인지 우리가 훨씬 더 현실적으로 계획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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