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6
정민 (지은이)문학동네2014-05-23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양장본720쪽
책소개
정민 교수가 하버드 대학교 옌칭도서관에서 발굴한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의 컬렉션을 바탕으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사를 복원한 책이다. 문예공화국이란 말은 18세기 유럽에서 쓰였던 용어다. 언어가 달라도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통해 글로써 자유롭게 소통하던 인문학자들의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 속의 공화국이다.
같은 시기 동아시아의 지식인들도 한문을 통해 만나서는 필담으로, 헤어져서는 편지로 소통했다. 그 중심에는 조선 지식인이 있었다. 그들은 중국, 일본의 지식인들과 적극적으로 만나며 그 만남을 문화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로 확장시켜나갔다. 이 책은 그중에서도 우리와 중국 지식인의 교류에 초점을 맞춘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20세기 초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자로서 청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를 평생 연구했던 사람이다. 그가 중국과 조선에서 의욕적으로 수집했던 수많은 자료는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곡절 끝에 다시 하버드의 옌칭도서관으로 상당수 흘러들어왔다. 그리고 60여 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정민 교수는 후지쓰카가 소장했던 옛 책들을 발굴해가는 과정을 통해 이제는 희미해진 문예공화국을 복원해냈다.
목차
글을 열며 004
제1화 후지쓰카 컬렉션과의 첫 만남 _망한려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철교전집』 016
‘추사 글씨 귀향전’에서 만난 후지쓰카 | 검색 엔진에서 찾은 엄성이란 이름 | 망한려 전용 원고지 | 『철교전집』에 실린 조선인의 초상화
제2화 『절강향시주권』에 얽힌 사연 027
세 사람의 답안지 모음 | 첫 만남의 광경 | 그림으로 남은 우정 | 『묵림금화』에서 만난 뜻밖의 후일담
제3화 가을바람에 통곡하노라 _엄성과 홍대용의 뒷이야기 045
오늘을 영원히 잊지 말자 | 엄성의 돌연한 죽음 | 10년 만에 도착한 주문조의 편지 | 엄성의 초상화
제4화 조선에만 남은 실물 _항주 세 선비 관련 기록과 서화 작품 060
격렬한 감정의 쏠림 | 새로 찾은 기록과 엄성의 그림 | 육비, 남은 글씨와 그림조차 없다 | 반정균, 불교에 귀의하다
제5화 쏟아지는 자료들 _엄성과 홍대용의 뒷이야기 076
키워드는 망한려! | 하루에 찾은 8종의 책 | 왕용보의 『술학』 원고지에 옮겨 쓴 5종의 책 | 왕용보란 인물
제6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사람 _후지쓰카론 091
하버드 옌칭 강연 | 교실의 후지쓰카, 『논어』 수업의 광경 | 빨간 펜 선생의 메모벽 | 툭하면 샛길로 빠지다
제7화 조선에는 학문이 없다 _후지쓰카의 자료 수집 110
학문 연원과 청대 서적 구입 | 베이징 유학과 경성제국대학 교수 부임 | 조선은 청조학의 우주정거장 |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
제8화 모든 우연은 필연이다 _핫토리 우노키치와 경성제국대학 128
『김완당 인보』에서 만난 핫토리 우노키치 | 고서 속의 은행잎 | 코즈모폴리턴의 지나학 탐구 | 동방문화사업과 핫토리 우노키치
제9화 시절 인연 _추사의 소장인이 찍힌 책과의 해후 146
선본실에 처음 들어가던 날 | 추사의 소장인이 또렷이 찍힌 책 |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 호수 | 한자리에 모으다
제10화 작은 의문에서 뻗은 생각 _조선사편수회의 스탬프 165
책 속 메모와의 대화 | 추사의 말버릇 | 『해객시초』 뒷면의 스탬프 | 또다른 실마리
제11화 기록은 사라지지 않는다 _홍대용과 양혼의 문시종 선물 소동 183
한림대학교박물관 특별전과 『계남척독』 | 문시종 선물 소동 | 『계남척독』에 실린 양혼의 친필 편지 | 귀국 후에 받은 세번째 편지
제12화 스쳐 엇갈린 만남 _홍대용이 만난 슬로베니아 신부 201
서양 신부 두 사람의 친필 | 당대 최고의 천문학자 | 『신대영대의상지』 원본의 감동과 『의상고성』 | 천주당의 파이프오르간
제13화 비판과 비난의 사이 _홍대용과 김종후의 1등인 논쟁 223
회피할 수 없는 전쟁 | 그대는 1등인인가? | 하정투석, 우물 안에서 돌을 맞다 | 자기 검열의 행간
제14화 겉만 보고 판단하는 세상 _사라진 명사를 찾아서 239
논쟁의 뒤끝과 「홍덕보묘지명」 | 사라진 명사의 행방 | 반함을 거부한다 | ‘영맥유’를 조롱함
제15화 알아주는 일의 행복 _유금과 이조원의 만남 256
행장 속에 든 『사가시집』 | 이덕무의 『선귤당농소』 사건 | 석양의 방문객 | 후지쓰카 소장본 『월동황화집』
제16화 의미는 차이에서 나온다 _『월동황화집』 서문과 『고금도서집성』 275
『월동황화집』에 실린 서호수의 편지 | 둘이 처음 만난 날은 언제였나? | 편지도 버전이 다르다 | 『사고전서』와 『고금도서집성』
제17화 본다고 보는 것이 아니다 _아! 『동화필화집』 292
다시 이어지는 인연 | 아! 『동화필화집』 | 쏟아진 친필로 복원되는 사연들 | 기하실 주인의 노래
제18화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다 _유금의 귀국과 『한객건연집』의 청비주비 310
이필대설(以筆代舌), 붓으로 혀를 대신하다 | 이조원 초상화와 유금의 인장 3과 | 아름다운 청비주비(靑批朱批) | 일별십년(一別十年)
제19화 꿈이 심은 꿈 _찬 골짝에 돌아온 봄소식 329
유금이 돌아오던 날 | 마음을 좀체 가라앉힐 수 없습니다 | 마냥 흘린 감격의 눈물 | 왔네 왔어!
제20화 만남은 만남을 부른다 _새롭게 이어지는 인연들 345
천하의 통쾌한 일 | 꿈만 꾸면 언제나 | 신교가 깊습니다 | 백년의 바위 같은 교분을 맺읍시다
제21화 가장 빛났던 순간에 대한 회상 _이조원 생일 시회 362
이조원 초상화의 내력 | 생일잔치 날의 풍경 | 이날을 그저 보낸 적이 없었다 | 나도 그 까닭을 알 수가 없다
제22화 동시대를 함께 살아간다는 것 _상우천고에서 천애지기로 378
동시대성의 의미를 음미함 | 우정의 풍경 | 천고를 벗삼는다는 답답한 그 말! | 소전 속의 정보들과 제2탄 『열상주선집』
제23화 꿈은 이루어진다 _이덕무와 박제가의 연행 394
금잔디밭의 작별 | 이정원과 반정균을 만나다 | 당낙우, 축덕린과의 만남, 그리고 「열상주선집서」 | 반정균이 차려준 이덕무의 생일상
제24화 한 우물을 파라 _오류거 서점 주인 도정상 412
유리창 거리의 두 사람과 서점 내부 풍경 | 이문조의 「유리창서사기」 | 오류거 서점 주인 도생 | 중국 책 속에서 찾은 도정상 관련 글
제25화 질풍노도 _그들이 조금 이상해졌습니다 428
100일 붉은 꽃이 없다 | 유득공의 심양행과 반쪽 연행 | 새벽녘의 그리움 | 어찌 스스로 부끄럽지 않겠는가
제26화 나를 알아줄 단 한 사람 _유리창 거리에 서서 연암이 한 생각 444
둘은 나의 문하생이오 | 선월루 서점 남쪽 골목의 두번째 집 | 유리창 거리의 사념과 급작스런 열하행 | 실낱처럼 이어지는 인연의 사슬
제27화 인간 세상의 이 같은 즐거움 _『열하일기』의 사각지대 460
기막힌 생각 절묘한 기회 | 이 좋은 밤 고운 달빛을 함께 볼 사람이 없다 | 북경에서의 한 달과 육일루 연담회 | 박명과의 만남과 연암의 외면
제28화 대지를 감도는 봄바람 _강세황의 사행과 북경 스케이트 구경 478
두 장의 청 황제 어제시 친필 인본 | 강세황의 눈에 비친 건륭제 | 강세황이 청 황제에게 올린 축하 시편과 화답시 | 빙희연의 광경
제29화 그럴까, 과연 그럴까? _후지쓰카와의 운명적 만남과 박제가의 제2차 연행 498
진전의 『간장문초』에서 만난 박제가 | 옌칭도서관 선본실의 박제가 자료 | 삼총사의 제2차 연행 | 문자당 글씨로 맺은 새 인연
제30화 가는 인연 오는 인연 _반정균의 뒷모습 516
구슬퍼 즐겁지가 않았다 | 누구신지요? | 방종한 소치입니다 | 마지막으로 나눈 반정균과의 필담
제31화 부처님 손바닥 _『호저집』 속의 메모와 〈노주설안도〉 534
『호저집』 속의 메모들 | 〈노주설안도〉 관련 메모들 | 이덕무와 유득공의 제시와 세번째 메모 | 박제가의 발문과 시
제32화 건륭 지성사의 한복판 _박제가와 기윤 551
뜻밖의 진객(珍客) | 기윤의 지우(知遇)와 오랜 교유 | 종횡무진 활약상 | 게를 삶아 먹으며 놀다
제33화 귀신을 보는 남자 _나빙의 〈귀취도권〉에 남은 박제가의 글씨 570
손님 쟁탈전 | 귀신을 보는 남자 | 다채로운 모습의 귀신들 | 〈귀취도권〉에 남은 박제가의 친필
제34화 삼천 리 밖의 사람 _나빙이 그려준 박제가의 초상화 587
나빙과 유득공의 우정 | 『치지회수첩』의 출현 | 나빙이 그려준 매화도와 박제가의 초상화 | 공협의 거처에서 열린 전별연
제35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준 그림 _박제가가 그렸다는 〈연평초령의모도〉에 대하여 607
〈연평초령의모도〉 배관기(拜觀記) | 그림 속 박제가의 글씨 | 초순이 쓴 그림의 제기(題記) | 의문투성이의 결말
제36화 닫히는 한 시대, 열리는 또 한 시대 _박제가의 4차 연행과 죽음 630
기윤과의 재회 | 다시 열린 오류거 사랑방 | 진전과의 회면과 『정유고략』 | 이상한 선물 목록
제37화 벽에 걸린 종이 _후지쓰카 아키나오의 추사 관련 자료 기증기 650
겹쳐 포개지는 풍경 | 아키나오의 기증 장면 | 이제 나도 죽을 수 있다 | 부끄러운 기억
제38화 흩어진 구슬 꿰기 _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와 후지쓰카 구장서 목록 666
후지쓰카 구장서의 형태적 특징 | 추카이밍 아카이브 열람기 | 분큐도 도서 목록과 일본출판무역주식회사 스티커 | 후지쓰카 구장서는 어떻게 들어왔을까?
제39화 기억의 흔적 _〈겸가당아집도〉의 출현 684
〈겸가당아집도〉의 돌연한 출현 | 겐카도 그룹과 연암 그룹의 만남 | 또다른 만남들 | 다시 이어지는 베세토 문화 벨트의 꿈
제40화 미완의 꿈, 문예공화국 _에필로그 703
후손 찾기 | 기록이 있었다 | 접점에서 새로 시작되는 이야기 | 문화는 선이다
주 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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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정민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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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모교 국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조선 지성사의 전방위적 분야를 탐사하며 옛글에 담긴 깊은 사유와 성찰을 우리 사회에 전하고 있다. 연암 박지원의 산문을 다룬 《비슷한 것은 가짜다》 《고전 문장론과 연암 박지원》, 18세기 지식인에 관한 《열여덟 살 이덕무》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과 《다산선생 지식경영법》 《미쳐야 미친다》 《파란》 등을 썼다. 또 청언소품(淸言小品)에 관심을 가져 《일침》 《조심》 《옛사람이 건넨 네 글자》 《석복》 《습정》을 펴냈다. 이 밖에 조... 더보기
수상 : 2007년 간행물문화대상
최근작 : <한국의 다서>,<다산과 강진 용혈>,<습정> … 총 17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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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만남이 만남을 낳고, 책이 책을 부르던
아름다운 문예공화국의 시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찾아낸 18세기 동아시아 지성계의 찬란한 문화지도
문학동네 ‘우리 시대의 명강의’ 시리즈의 여섯번째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이 출간되었다. 이 책은 2013년 3월부터 12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총 40회에 걸쳐 문학동네 네이버 카페(http://cafe.naver.com/mhdn)에서 진행되었던 연재의 결과물이다. 열정적인 자료 탐구와 남다른 지식 생산력을 통해 펴내는 책마다 화제를 모으는 한문학자 정민 교수는 2012년 8월부터 1년간 하버드 옌칭연구소에 방문학자로 머물렀다. 그리고 그곳 옌칭도서관 선본실에서 20세기 초 일본 학자 후지쓰카 지카시(藤塚?, 1879~1948)의 구장(舊藏) 도서를 다수 발견했다.
후지쓰카 지카시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낸 추사 김정희 전문 연구자로서, 자신이 소장하던 추사의 〈세한도歲寒圖〉를 태평양전쟁이 끝나갈 무렵 일본까지 찾아와 100일 가까이 머물며 양도를 간청하던 소전(素?) 손재형(孫在馨)에게 아무런 대가 없이 넘겨준 일화로 유명하다. 그는 청조의 고증학단에 대해 연구하던 중 청조 지식인들과 교유했던 조선의 학자들에게 관심을 가져 청조의 학술과 문예가 어떻게 조선으로 전해졌는지를 평생 연구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아들인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전후 일본에서 생계를 위해 선친이 중국과 조선에서 각고의 노력으로 수집한 책들을 적잖이 처분했고, 그 책들의 일부가 우여곡절 끝에 하버드 옌칭도서관으로 흘러들어왔다. (후지쓰카 아키나오는 2006년 타계 직전 후지쓰카 지카시가 소장했던 추사 관련 자료 1만 4000여 점을 과천시에 일괄 기증했다.) 그리고 그 책들은 60여 년 동안 옌칭도서관 선본실 서가에 말 그대로 잠들어 있었다. 정민 교수는 그곳에서 우연히 후지쓰카의 전용 원고지에 필사된 한 권의 책을 만난 것을 계기로 다른 일은 모두 제쳐두고 본격적으로 그의 컬렉션 발굴에 뛰어들었다. 이 책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자, 청조 문화의 조선 전래(傳來)를 연구했던 후지쓰카의 컬렉션을 통해 세밀하게 복원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사다.
문예공화국, 상상 속의 지적 커뮤니티
문예공화국(Republic of Letters)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에 유럽의 지식 사회에서 사용되었던 용어다. 문화와 언어의 차이를 뛰어넘어 인문학자들이 공통 문어인 라틴어를 매개로 편지와 책을 통해 소통하던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의 공화국이라 할 수 있다. 이 문예공화국 안에서 글이 오가며 지식인들 사이에 끈끈한 연대가 싹텄고 이는 계몽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18세기 동아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통용되던 공통 문어는 고전 중국어, 즉 한문이었다. 집적 만나서는 필담을, 떨어져 있을 때는 편지로써 한중일 세 나라의 지식인들은 지속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 그리고 18세기 동아시아 문예공화국의 중심에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행사와 통신사로 중국과 일본을 방문하여 그곳 지식인 그룹과 소통하며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나갔다. 이 책에서 다루는 한중 지식인 네트워크의 시초를 연 사람은 바로 담헌(湛軒) 홍대용(1731~1783)이다.
홍대용, 문예공화국의 초석을 놓다
홍대용이 숙부 홍억(洪檍)의 자제군관 자격으로 북경에 간 것은 1765년의 일이다. 그가 그곳에서 한족 지식인인 엄성(嚴誠, 1732~1767), 육비(陸飛, 1719~?), 반정균(潘庭筠, 1742~?) 등과 우연히 만나 사귀며 ‘천애지기(天涯知己)’를 맺은 유명한 일화는 「건정동필담乾淨?筆談」을 통해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특히 홍대용과 엄성의 우정은 엄성이 홍대용과 만나고 불과 몇 년 후 풍토병에 걸려 홍대용이 선물한 먹을 가슴에 품고 그 향을 맡으며 죽었다고 하여 무척 유명하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 지카시가 자신의 전용 원고지에 베껴 쓴 엄성의 『철교전집鐵橋全集』과 엄성, 육비, 반정균 세 사람의 향시(鄕試) 답안지를 따로 모아 묶은 『절강향시주권浙江?試?卷』을 우연히 발견하며 조선과 청조 지식인의 교류사를 본격적으로 파고들기 시작한다.
홍대용은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의 연행 기록은 『담헌일기湛軒日記』 『을병연행록乙丙燕行錄』 『항전척독抗傳尺讀』 등 이른바 ‘연행 3부작’으로 남았다. 홍대용이 연행에서 돌아와 내놓은 연행 기록은 조선 지식인 사회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덕무, 박제가 등 연암 그룹의 후배들은 홍대용이 북경에서 그곳 문인들과 천애지기를 맺고 돌아온 일에 큰 감동을 받고 자신들도 언젠가 중국의 지식인들과 만나 역량을 펼쳐 보이고 그들과 우정을 맺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당시 조선의 엄연한 국시(國是)는 북벌(北伐)이었다. 명나라가 망하고 들어선 청나라에 대한 조선 주류 지식인들의 반감은 청이 들어선 지 100년 넘은 당시에도 여전히 완고했다. 홍대용이 선배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더러운 오랑캐의 나라’에 가서 ‘빡빡머리’ 한족 거인(擧人)들과 친교를 맺고 돌아와 글로 써내기까지 한 데 대해 노장 학자들은 격렬하게 비판했다.
홍대용은 특히 스승 김원행(金元行)의 동문인 김종후(金鍾厚, 1721~1780)의 날선 비판을 받아야 했다. 김종후는 청나라를 “비린내 나는 더러운 원수의 땅”이라 일컬으며 애초부터 홍대용의 연행을 반대했었다. 홍대용은 망한 지 100년이 넘은 명에 대한 의리를 들어 새로운 왕조를 더러운 원수라 배척하는 춘추의리론(春秋義理論)에 숨막혀했다. 그는 청조의 한족 지식인들이 “도량이 넓고 기운이 시원스러워” 자신은 그들과 사귄 일이 부끄럽지 않으며, 더구나 청은 100년간 태평을 누리고 있다며 김종후의 예봉에 맞섰다. 논쟁은 도를 넘지 않는 수준에서 주위의 중재로 마무리되었지만 김종후와 홍대용 두 사람은 끝내 상대의 주장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홍대용의 이러한 의지는 박제가 등에게로 이어지며 북학(北學)의 기틀이 되었다.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 퍼져나가는 만남
1776년 11월 유금(柳琴, 1741~1788)이 연행길에 올랐다. 그는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네 사람의 시를 모은 『건연집巾衍集』을 들고 나섰다. 이들은 연암 그룹의 문인들로 ‘백탑시파(白塔詩派)’로 불렸다. 북경에 도착한 유금은 청 조정의 이부원외랑 이조원(李調元, 1734~1803)을 만나 『건연집』을 소개하며 서문과 비평을 부탁한다. 이조원은 홍대용이 우정을 맺은 반정균과 가까운 사이였고, 두 사람은 기꺼이 조선 문인 네 사람의 시집에 『한객건연집韓客巾衍集』이라는 제목을 붙여주고 각각의 시에 정성껏 비평을 써주었다. 그런데 유금이 이조원에게 접근해 만남을 가졌던 데에는 『건연집』 건 외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것은 바로 『흠정고금도서집성欽定古今圖書集成』 5020책을 입수해오라는 정조의 명을 받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는 이조원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흠정고금도서집성』 거질을 조선으로 들여오는 데 성공한다.
유금이 『건연집』에 이조원과 선배 홍대용의 벗인 반정균의 비평까지 받아서 돌아오자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이서구 등은 감격에 겨워 어쩔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의 신실하고 높은 평가를 받은 이들은 북경의 명사들에게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에 조선에서 느꼈던 그동안의 소외감과 답답함을 훌훌 털고 커다란 자신감을 얻었다. 특히 박제가는 이조원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객건연집』에 평점한 말을 보니 폐부를 찌르는 합당한 말뿐이어서 곧장 넋이 연경으로 날아가 얼굴을 뵙고 향을 사른 후 큰절을 하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토로했”을 정도였다. 그리고 1778년 3월 드디어 이덕무와 박제가가 연행에 오르면서 박제가와 이조원의 만남이 성사된다. 물론 그때까지 이들은 이조원, 반정균과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소통을 이어가고 있었다.
“조선의 해묵은 물건이 중국으로 보내지고 시집들이 엮이고 책과 서신이 건네지고 건너왔다. 한 사람의 만남이 동심원을 그리며 널리 퍼져나갔다. 만남이 만남을 부르고, 우정이 우정을 낳았다. 이렇게 터진 물꼬가 19세기 후반까지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끊임없이 이어졌다.” (361쪽)
박제가, 문예공화국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다
1778년 이덕무와 박제가는 북경에서 이조원의 동생 이정원(李鼎元)과 반정균을 만났다. 그리고 그들의 주선으로 두 사람은 당대 북경 문단의 명류들과 연이어 만남을 가졌다. 반정균이 이덕무의 생일상을 차려주었을 만큼 이들은 무척 가깝고 깊게 교유하고 있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우연히 북경 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오가다 흔히 마주치는 장삼이사(張三李四)가 아닌 당대 톱클래스의 명류였고, 그들이 단골로 거래한 서점은 많은 서점들 중 하나가 아니라 중국 서적사에서 손꼽는 양심적 신상(紳商)의 서점이었다. 알게 모르게 이들은 당대 문화의 핵심부에 접근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축적된 에너지가 북학의 뜨거운 열기와 만나 새로운 시대를 견인하는 힘이 되었다.” (427쪽)
두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이후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등은 외규장각 검서관(檢書官)에 임명되어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자신감이 더욱 높아만 갔다. 특히 박제가의 경우 정도가 지나쳐 오만하다는 인상까지 풍기는 바람에 선배인 연암 박지원이 그에게 자중을 요청하는 편지를 썼을 정도였다. 1790년 박제가와 유득공은 2차 연행을 떠난다. 이 두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50여 명의 중국 문인들과 교류했는데 특히 뛰어난 시와 글씨로 북경 문인들 사이에서 금세 명성을 얻었다. 박제가에게 시 한 수쯤 받지 못하고는 학계와 예단(藝壇)에 발조차 들이밀지 못할 정도였다. 두번째, 세번째 연행에서 박제가는 중국의 유명 지식인들과 폭넓은 지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말 그대로 북경의 명사가 되었다. 기윤(紀?, 1724~1805), 옹방강(翁方綱, 1733~1818), 완원(阮元, 1764~1849) 등 청대 학술계의 거목들과 만남이 이루어진 것도 이때다. 특히 1790년 8월에는 북경에서 당대 사림의 종장(宗匠)이자 예부상서였던 기윤과 박제가의 만남이 이루어졌다. 기윤과 박제가, 유득공 두 사람의의 교류는 두 사람의 귀국 후에도 이어졌다. 심지어 기윤은 조선 사신 편에 정조에게 편지를 보내 박제가를 “화국(華國)의 인재”라 칭찬하며 그를 다시 북경으로 파견해달라고 부탁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 청이 받아들여졌는지 1801년에 박제가와 유득공은 네번째 연행을 떠나 78세의 기윤과 해후한다. 특히 기억할 만한 것은 박제가와 화가 나빙(羅聘, 1733~1799)의 만남이었다. 박제가는 나빙의 대표작 〈귀취도권鬼趣圖卷〉에 두 차례나 제발(題跋)을 남길 만큼 그와 가깝게 지냈고, 나빙 또한 박제가와 유득공에게 초상화를 그려주었을 만큼 그들을 마음속 깊이 좋아했다. 이 책의 표지 그림과 글씨가 바로 나빙이 박제가를 위해 그리고 써준 초상화와 시다.
삼천 리 밖의 사람 서로 마주하여서 相對三千里外人
좋은 선비 만남 기뻐 그 모습을 그려보네. 欣逢佳士寫來?
그대의 미쁜 운치 무엇에다 비할거나 愛君??將何比
매화 변해 그대가 되었음을 알겠네. 知是梅花化作身
어인 일 그댈 만나 문득 친해졌더니 何事逢君便與親
날 떠난단 말 들으니 그 얘기 시고 맵다. 忽聞別我話酸辛
이제부턴 가사(佳士) 봐도 그저 담담하리니 從今淡漠看佳士
이별 정이 마음을 슬프게 하기 때문일세. 唯有離情最愴神
이 초상화와 시의 원본은 후지쓰가 지카시가 소장했었으나 지금은 중국의 개인 수장가가 소유하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것은 후지쓰카가 촬영해둔 유리 건판 사진이다. 18세기 한중 문예공화국의 실질적인 주인공 박제가는 네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뒤 대비 김씨와 심환지(沈煥之) 비방 벽보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형장을 받고 함경도로 유배되었다. 그리고 1805년 한양으로 돌아오고 얼마 후인 4월 25일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홍대용이 기틀을 다지고 박제가가 선봉에 서서 이룩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그렇게 마감되고 19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넘어가게 된다.
“1791년 박제가가 나빙에게 선물한 갓을 쓰고 반정균이 낙향할 때 한 시대의 문이 스르르 닫혔다. 1801년 진전이 오류거 서점의 안뜰에서 박제가의 갓을 빌려 쓰고 기뻐하며 서성일 때 한 시대의 문이 다시 열렸다. 박제가가 네 차례의 연행에서 쌓았던 인맥은 8년 뒤인 1809년 10월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길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을 수행한 24세의 청년 김정희(金正喜)에게 고스란히 인계되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가 마감되고 19세기 문예공화국의 화려한 서막이 열렸다.” (649쪽)
후지쓰카 지카시, 몸으로 하는 공부
이 책이 탄생하는 계기가 된 인물 후지쓰카 지카시는 일본에서는 주로 우편을 통해 북경 유리창의 서점에서 책을 구입했다. 그러다가 1921~1923년 북경 주재 해외 연구자로 파견 생활을 하게 된 것을 계기로 유리창의 고서점에서 본격적으로 청대의 원간본(原刊本) 서적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가 당시 북경에서 수집한 청대 원간본은 수만 권에 달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후지쓰카는 조선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또한 당시 일본 학자들은 “송명(宋明)의 찌꺼기 같은 학문”을 빼고 나면 조선 500년 문화에는 남는 게 없다며 대놓고 조선을 무시했다. 하지만 북경으로 가는 길에 잠시 서울에 들러 경학원(經學院)과 규장각 도서관, 총독부와 고서점 한남서림(翰南書林) 등을 둘러본 그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조선을 청조학의 본질로 들어가는 우주정거장과 같은 위치로 규정”했다. 1926년 경성제국대학 교수로 부임한 후지쓰카가 1940년 정년퇴임할 때까지 조선에서 수집한 것은 서적 수천 권, 서간, 서화, 탁본 1000여 점이나 된다. 그는 “생쥐를 노리는 고양이의 집요함”으로 청조 문화가 조선으로 흘러들어온 과정을 규명할 수 있는 자료를 악착같이 모아나갔다. 그 가운데엔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같은 국보급 문화재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렇게 수집한 자료들은 그가 일본으로 돌아간 후 한 대학의 도서관에 기증되었고,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도쿄 폭격으로 대부분 소실되었다. 그의 자택 방공호(이 방공호는 〈세한도〉를 되찾아온 소전 손재형이 만들어주고 온 것이다)에 보관되어 있던 자료들만 천행으로 살아남았다. 후지쓰카는 “쓰기보다 읽기를 사랑한 사람”이었다.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서 그의 컬렉션을 한 권 한 권 발견하여 검토할 때마다 그의 방대한 독서와 꼼꼼한 메모에 감탄을 거듭했다. 후지쓰카는 머리나 가슴이 아니라 몸으로 공부한 학자였다.
“그의 소장서를 보면서 느낀 것은 그가 확실히 쓰기보다는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는 사실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그는 읽기만도 너무 바빠서 자신이 읽은 모든 것에 대해 미처 글로 쓸 겨를이 없었다. 한 권 한 권,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대조하고 메모해가며 그는 철저하게 읽고 꼼꼼하게 표시했다. (…) 책 속에 남은 후지쓰카의 메모는 모두 한 방향을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다. 한중 지식인의 문화 학술 교류의 현장이었다. 그의 그 많은 메모를 살펴보니 실제 그가 자신의 연구에서 직접 활용한 것보다는 정리만 해놓고 미처 글로 쓰지 못한 내용이 훨씬 더 많았다. 같은 주제를 가지고 쓴 최근 우리 쪽의 논문을 읽어보면 그의 메모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가 80년 전에 이미 줄긋고 메모하고 정리해둔 내용을 최근의 논문들이 오히려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책은 보면 볼수록 읽는 사람을 왜소하게 만들었다. 마치 부처님 손바닥 안에 든 손오공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102~103쪽)
1년간 후지쓰카 지카시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한 정민 교수는 옌칭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그의 컬렉션을 통해 18세기에 우리와 중국의 지식인들이 마음을 열고 소통하며 대를 이어 문화와 학술 교류의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던 아름다운 광경들을 이 책에서 되살려냈다. 사방이 분쟁과 갈등뿐인 이 시대에 이 책이 동아시아 지식인들의 폭넓은 소통과 “고등한 문화 교류” 나아가 상생과 화해의 한 발판이 되기를 바란다.
100자평
하버드 옌칭(延慶)도서관에서, 정민작가가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의 속살은 18세기 한.중 실학자들의 작품들이 후지쓰카에 의해 수집이 되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홍대용,이덕무,유득공,박제가 등의 진귀한 문집들이 정민작가에 정교한 해설과 함께 문예전성기를 음미해 보려고 합니다. 구매
우보 2014-07-10 공감 (4)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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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 "백과사전"을 열어놓고 읽는중이다. 내용은 모르는 것 투성이지만 한 학자의 열정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작가와 함께 옌칭도서관을 드나들며 공부의 참맛과 환희를 느낀다. 구매
夏林 2014-05-24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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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활발하게 이어졌던 한중 지식인들의 이야기가 생동감 있게 전달되었습니다. 특히 '한자'를 매개로 한 양국의 지식인들의 교류는 지금 영어를 통한 교류보다 더 진솔하고 정감있다 구매
슈퍼작살 2014-12-12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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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과 문화를 즐기는 방법을 배우는 책 구매
참매 2014-12-06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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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문화적 교류의 현장을 따라가는 과정 그 자체가 흥미진진한 한 편의 소설 같다. 또한 이러한 연구를 일제강점기 때 깊이 해 놓은 한 일본인의 모습과, 그 일본인의 자취를 다시 재발굴하고 재편성하는 지금의 한국인 교수의 모습들이 겹쳐지면서, 이 책은 단순한 역사책이 아니라 지금과 과거를 다양하게 꿰어 맞추는 흥미로운 질감을 가진다. 구매
무경 2014-12-08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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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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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영희 재단에서 전화가 온다면 새창으로 보기 구매
“너는 그런 책 어디에서 찾아?”
한창 아내와 연애 중이던 당시, 매번 절판되거나 아무도 읽지 않을 것 같은 표지 디자인에 가뿐히 500페이지가 넘어가는 책만 골라 읽던 나를 보며 아내가 정말 신기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내 대답은 이랬다.
“책을 읽다보면 그 속에 찾아볼 책이 무지하게 많아.”
그랬다. 대학교 2학년 초겨울, 고(故) 리영희 선생님의 「반세기의 신화」를 읽은 것이 지금 내 독서 패턴과 삶의 방향성을 좌우하는 8할이 되었다. 온통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로 가득한 그 책을 줄을 긋고, 메모를 해가며 읽었다. 대입 수능 시험 성적표를 받아들었던 그 때의 충격파가 100이었다면, 「반세기의 신화」는 120은 족히 되었을 것이다. 이후 리영희 선생님의 책을 있는 대로 구입했다. 그리고 그 책들을 읽으면서 책 속에 언급되어 있거나 책의 하단 각주, 책의 마지막에 언급된 참고서적들에 눈이 갔다. 그러고 나서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그 책들의 제목을 입력했다. 절판되거나 일시품절 된 책이 많아서 중고 인터넷 서점과 오프라인 중고서점을 뒤졌다. 어렵게 찾아 읽게 된 책들은 그대로 보물이 되었다. 리영희 선생님이 참고하고 발췌하고 공부한 책이라 생각하니 마치 「반세기의 신화」를 쓰시는 집필실 한 구석에 나도 한 자리 꿰차고 앉아 선생님의 잔심부름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었다. 유용하고 도움도 되었다.
지금도 내가 책을 고르고 구입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내가 지금 읽는 책 속에 있다.
“이곳에서는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내고, 그것이 줄줄이 이어져서 금세 하나의 장대한 서사를 만들어내곤 한다. 이 모든 과정이 논스톱으로 이뤄지는 꿈의 도서관 속에서 나는 유영하고 있었다.” (p.109)
정민 교수는 1년 동안 하버드 옌칭연구소에서 책 속에 빠져들었다. 추사 김정희 연구가로 알려진 후지쓰카 지카시의 컬렉션을 발견하고 18세기 한중 지식인이 나눴던 문예교류를 발견해 냈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의 책 한권에서 완전한 가치판단의 전복을 경험하고 그 한 권의 책으로부터 지금의 책세계로 빠져든 것처럼, 정민 교수도 옌칭해(海) 속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던 것 같다.
“집에 돌아와 피곤한 잠을 몇 십 분자고, 라면 하나를 끓여 먹은 후 날이 캄캄해진 뒤에 다시 학교로 올라왔다. 빌려 쌓아둔 책을 급한 대로 복사하고, 인터넷으로 신청한 책 세 권을 다운로드하여 갈무리해 두었다. 밀린 글을 쓰고 일기를 적은 후 책상을 정리하고 나니 밤 12시가 다 되어 있었다." (p.156)
이 책을 읽으며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정민 교수의 태도다. 정말 신나서 책을 찾고 연구하고 기록하고 정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몸은 피곤하고 찾으면 찾을수록 더 많은 자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다는 엄살도 부리지만, 이 두꺼운 책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는 것은 ‘행복함’이다.
“1766년 2월 한 달 사이에 홍대용과 엄성 두 사람은 북경에서 일곱 차례 만났다.” (p.45)
“1801년 1월 28일, 박제가는 주자서를 구매해오라는 왕명을 받고 사은사를 따라 생애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연행길에 올랐다.” (p.630)
책의 배경이 되는 시기는 조선의 마지막 중흥기 정조시대다. 주지의 사실이다시피 정조는 문장가요 예술가였다. 홍대용으로부터 박제가, 박지원, 김정희에 이르기까지 정조의 안목이 아니었다면 이들의 북경행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여전히 당시 지배계급은 명나라를 숭상하고 이미 패권을 쥐고 대륙의 주인이던 청나라를 무시하고 있었다. 가당치도 않을 북벌론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 혈안이었다. 정조로서는 그들을 적절히 견제하면서 신진문물을 받아들이는 데, 젊은 학자들을 유용한 것 같다.
“조선의 지식인들이 우연히 북경 거리에서 만난 사람은 오가다 흔히 마주치는 장삼이사가 아닌 당대 톱클래스의 명류였고, 그들이 단골로 거래한 서점은 중국 서적사에서 손꼽는 양심적 신상의 서점이었다.” (p.427)
유리창 거리(류리창, 琉璃厂)는 당대 최고의 서점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구글을 찾아보니 보니 지금도 고서적들이 즐비한 관광명소다. 주군인 임금이 자신들을 보낸 목적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만 젊은 조선의 학자들의 눈에 비친 유리창 거리의 서점들은 신세계였을 것이다. 내가 리영희 선생님의 책 속에서,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 안에서 만난 신세계와 일맥으로 상통한다.
조선에서는 여전히 명을 숭앙하는 꼰대들로 인해 제대로 기를 펴보지 못했지만 당대 최고의 문예가와 학자들을 북경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매번 연행길에 당대의 명사들을 만날 수는 없어 서신을 주고받으며 조선에서도 받지 못했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었다.
이것은, 어느 날 <리영희 재단>으로부터 내게 전화가 와서
“OO께서 블로그에 올리신 리영희 선생님 책리뷰를 읽었는데요. 너무 감동을 받고 흡족해서 재단 관계자분들의 칭찬이 자자합니다. 그래서 그간 쓰신 리뷰를 엮어 책을 출간해 드리고 재단 후원금도 지급할 예정이니, 한번 재단에 내방하시죠.”
라고 하는 것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이런 전화를 받는다면 나는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기쁨과 희열에 정신을 못 차리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며 자랑을 할 것이다.
정민 교수가 옌칭도서관의 책바다에서 연거푸 진귀한 보물을 발견해 낸 것처럼.
“박제가가 네 차례의 연행에서 쌓였던 인맥은 8년 뒤 동지사의 부사로 연행길에 오른 아버지 김노경을 수행한 24세의 청년 김정희에게 고스란히 인계되었다. 이렇게 해서 18세기가 마감되고, 19세기 문예공화국의 화려한 서막이 열렸다.” (p.649)
“박제가의 그늘 덕분에 김정희는 단번에 북경 지식인들의 주목을 받았다.” (p.703)
“한문은 18세기 문예공화국의 당당한 공용어였고” (p.315)
더 중요한 것은 한문을 매개로 한 과거 한중 지식인들의 만남이다. 당대 최고의 명사였지만 청나라 시절 비주류였던 한족 학자와 서얼 출신에 망상에 빠진 기득 보수층에 의해 밀려난 조선의 젊은 학자들의 처지가 만나 시너지를 일으켰다. 시와 편지, 그림을 주고받으며 계속된 교류는 책 속에 즐비하게 소개된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시를 보다 보면 흡사 여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에 비견될 만큼 애틋하다. 말을 타고 오가는 길이 수개월이 걸리는 그 시대, 그들은 서로를 통해 자신을 발견하고 나 자신과 상대를 위로했다. 할아버지의 대를 이어 손자들의 대에까지 교류했다고 하니 인연의 깊이와 정도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에서는 18세기에는 개인 간 왕래와 교류를 통해 한중간 문예공화국의 서막이 열렸고, 19세기에는 단체 간 교류가 활발해지고 다양한 분야로 그것이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 중심에 완당 혹은 추사 김정희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제목에서도 분명히 말하지만 18세기까지의 이야기다. 영화 <반지의 제왕>의 후속편을 기다리던 그때의 초조함과 설렘이 다시 발로한다.
“내가 <세한도>를 다시 조선으로 보내는 것은 첫째 소전이 조선의 문화재를 사랑하는 성심에 감탄함이며, 둘째로는 그대가 이것을 오래오래 간직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내가 돈을 받고 <세한도>를 내놓는다면 지하의 완장 선생이 나를 뭘로 치부하겠소? 더구나 우리는 그분을 사숙하는 동문 아닙니까?” (p.664)
이 책이 탄생하게 되는데 가장 주요한 역할을 한 사람은 후지쓰카씨다. 그는 경성제국대학에서 청을 고증하는 연구를 했다. 당시 조선에 있는 대학에 간다는 것은 하버드에 임용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교수가 이름 없는 한국의 ‘OUT서울’ 대학교로 자원해 취직한 것과 다르지 않다. 많은 주변인들이 안타까워하며 비난했지만 후지쓰카는 성실하고 꼼꼼한 연구와 취재, 고증과 수집을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아름다운 교류와 풍성한 문예기를 발견한다. 일제의 패전 후 도쿄에 보관 중이던 자료가 대부분 불타고 남아 있던 자료를 그의 아들이 기증하고 팔면서 옌칭도서관에 초빙되어 있던 정민 교수를 만나게 된다. 책에서 정민 교수가 여러 번 언급하듯이, 후지쓰카는 대단한 연구가이자 기록가였다. 메모하고 수정하고 기록했던 성실함이 정민 교수의 연구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래서 컵라면을 먹으며 시간을 아껴가며 연구 해 세상에 내보인 이 책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을 내가 읽게 되었다.
아마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정민교수가 말을 아낀 듯하지만 19세기 한중의 문예공화국은 일본에까지 닿아있던 것으로 읽힌다. 그만큼 한중일 3국이 가까웠다는 것이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 3개국의 관계가 아슬아슬하다 못해 위험해 보인다. 3국이 공히 영토문제로 뒤엉켜 있고, 경제·역사·문화 모든 분야에서 긴장관계에 놓여 있다. 활시위가 최대로 당겨져 있고 방아쇠에 검지는 오므려져 있다. 슬기롭고 지혜롭게 이 위기와 긴장 상황을 헤쳐 나가지 못한다면 발칸반도, 크림반도, 팔레스탄인에 버금가는 국제적인 긴장지대가 될 지도 모르겠다.
18세기와 19세기까지 자유롭고 아름답게 이어졌던 문예의 흐름이 끊겼던 것도 결국은 전쟁 때문이었다. 이후 100년 동안 각자의 길을 가다가 다시 병목구간에 다다른 것이다. 저자의 바람대로 100년 이전 3국의 문예공화국이 부활하려면 진짜 지혜가 필요하다. 가짜 정책과 외교 전략은 필요 없다. 도움도 되지 않는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것으로는 3국이 함께 갈 수 없다.
만약 <리영희 재단>에서 진짜로 전화가 온다면 내가 정민 교수의 뒤를 이어 이것에 대한 연구를 해봐야겠다. 로또 당첨되는 확률보다야 조금은 높겠지^^
연구 제목은 『21세기 한중일이 만들어 가야만 할 문예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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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작살 2014-07-18 공감(6)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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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새창으로 보기
다 읽었다! 이렇게 재미있는 것을 오래 묵혀둔걸까. 부제에도 보이듯 저자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후지쓰카 컬렉션을 발굴(?)하여 한중 지식인간에 있었던 만남들을 여러 장면으로 보여준 것이다. 홍대용이 연행으로 엄성 반정균 육비 이라는 중국선비와 나눈 우정과 그 이후 연암그룹의 이들이 다시 한번 중국 지식인들과 이어지는 모습을 보면 흥미롭고 감탄 스럽다. 다만 저자도 초반에 느낀 것처럼 개인적으로도 참으로 호들갑스럽긴 하다.
저자의 연구과정도 매우 흥미롭긴 마찬가지다. 여러모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야(학자이라 그런지 자신의 연구 외에는 나이브 하단 생각이 들었다) 있긴 하지만 역시 학자는 이래야 된다고 느꼈다. 대단하다. 책의 말미에 약속한 이후로 미뤄둔 저자의 결과물도 볼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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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8-08-11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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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그대가 날 알았으니 -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새창으로 보기
어떤 연구를 '연재'하는 것이 가능한가? 이것은 연구의 연재가 쉬운지 혹은 어려운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완성되지 않고 부분적으로는 완성인 연구를 공개 할 수 있는 '결백한 믿음'이 있는지 묻는 것이다. 연구자가 자신이 해야 할 말과 할 수 있는 말 사이를 얼마나 상세하게 눈금 해야 가능한 일인지 짐작이 어렵다. 연재를 올리는 부분은 ‘완성된 연구’여야 하며 이후의 연구와 맞물려야 한다. 하여, 발간된 책은 715쪽이다. 일반 소설이 200페이지 내외인 것을 떠올리면 세 권 분량의 소설의 완성이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 두 손으로도 쉽지 않다.
연재란 책이 되기 전의 상태를 미리 보는 점이 제일 장점이었지만 챙겨 보지 않았다. 만질 수 없는 글씨와 눈 맞추는 것이 어색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몇 개 에피소드는 기억에 남았는데, 대체 책과 무슨 상관인지 묻고 싶은 대목뿐이었다. 이 책은18세기 한중 지식인, 엄성과 홍대용부터 박제가와 기윤에 이르기까지 이들이 이 언어와 거리의 불가능성을 뛰어넘어 했던 소통의 재현이다. 이들의 대화는 죽음 이후에도 대를 잇고, 친구의 친구를 소개하며 진실하고 절절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가기도 전에 이미 저자의 '자료를 대하는 태도'에 몇 번이나 한숨을 쉬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연재를 보고 남는 몇 개의 장면. 정민 선생이 대여한 자료를 복사하고 딱풀로 붙여 제본집을 만드는 풍경. 만드는 게 즐겁고 나중에는 요령도 생겨서 한 권 만드는 것이 금방이었다는 말씀. 딱풀을 곽 째로 사서 놓고 써도 금새 닳았다는 이야기가 책을 보기 전에 있었다.
자료를 읽을 수 있도록 가공하는 일은 길고 무료하다. 그것은 길고 성과도 없고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초 작업을 진지하고 기쁘게 대하는 얼굴이 보였다. 프린트 물이 탑으로 쌓였던 지저분한 책상. 모으기는 쉬워도 흐트러지기 쉬웠던. 자료 정리를 낮게 여기고 힘겨워 했던 언젠가가 떠올라 부끄러웠다. 2단으로 인쇄해 더 많이, 더 작게 박힌 글씨들이 우르르 쏟아지면서 부끄러웠다. 그것은 왜 어려운가,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어떤 그림도 그리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는 염려와 고통에 지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청조학을 연구하던 후지쓰카는 조선이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적인 공간적 위치로 여겼다고 한다. 그는 경성대학 재직시 평생을 걸쳐 자료를 수집했고 그 결과 정년퇴임 후 일본으로 떠날 때 기차 몇 량에 청대 원간본과 수만 권과 조선 전적 수천 권을 실었다고 한다. 그리고 후에 그 대부분 미국의 도쿄 폭격으로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 자신 이후 다른 세대의 연구로 밝혀질 수 있는 일에 일생을 놓은 셈이고 그 대부분이 먼지가 되었다. 나는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한 문예공화국을 너무 쉽게 무릎 위에서 넘겼고, 그마저도 무거워서 잠시 덮고 있었다. 부제가 들어왔다.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컬렉션’, 그 밑에 저자 이름 '정민'. 미국에 있는 중국저서를 보관한 도서관에서 일본인의 컬렉션을 발굴한 한국인의 학자가 한중 지식인의 교류의 장을 복원하기 시작했다.
후지쓰카가 어떤 말씀이라도 남겼는가, 지속해 연구해 달라고. 그런 전언은 '없었다'. 다만 어떤 이가 묵묵히 했던 일을 후대의 사람이 밝은 눈으로 발견한 일이 있었을 뿐이었다. 18세기, 이국의 사람들이 서신에 기대 고된 거리를 걸어가 서로를 알아보며 "바다가 마르고 바위가 문드러져도, 오늘을 잊지는 말자"던 일은 과연 뭉클했거니와, 세대와 국적을 건너 이룩될 어떤 연구의 한 장을 보았다는 기쁨에 또 뭉클해졌다. “옛날엔 내 눈앞에/오늘은 꿈속에만.”588p 시를 읊어 서로를 그린 아득함을 한 입도 떼지 못했으나, 그러나 이것으로도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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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2014-07-1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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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리듬이다 새창으로 보기
우리는 하나의 해결책만이 있는 양 이 문제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내가 아래에서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가장 최근에 가진 경험과 공포를 고려하여 인간 조건을 다시 사유해보자는 것이다. 이것은 명백히 사유의 문제이다. 사유하지 않음, 즉 무분별하며 혼란에 빠져 하찮고 공허한 ‘진리들’을 반복하는 것은 우리 시대의 뚜렷한 특징이라 생각된다.
한나 아렌트,『인간의 조건』
정민의『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공허한 진리를 반복하지 않았다. 18세기 한(朝鮮) 지식인이라고 하면 우리는 북학파(北學派)로 불리는 몇몇을 아는 정도라고 답할 수 있다. 화이(華夷)의 명분론에 맞서 북학은 실학(實學)이었다. 하지만 18세기 한중 지식인이라고 한다면 이야기가 상당히 멀어져 허학(虛學)에 가까워진다. 18세기 중(靑代) 지식인에 관해서는 제대로 된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의 필담(筆談)과 편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이 책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저자는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드넓은 세계를 담론이 아닌 팩트(fact)로 다양하게 쏟아내면서 접근하고 있다. 이유인즉 팩트의 학문은 어느 순간 비월(飛越)하기 때문이다.
문예공화국(Republic Letters)의 운명! 저자가 보여주는 이러한 학문적 결실은 몸으로 쓴 결과다. ‘무엇을 말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보았는가’에 있었다. 저자에 따르면 문예공화국이란 ‘라틴어를 공통 문어로 나라와 언어의 차이를 넘어 인문학자들이 편지와 책으로 소통하던 아름다운 지적 커뮤니티를 일컫는 상상 속의 공화국’(p5)이다. 저자는 한문을 공통 문어로 쓰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 1년간 하버드 옌칭도서관에 머물렀다. 그곳에서 저자는 후지쓰카 지카시의 구장(舊藏) 도서를 두루 섭렵하였다.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18세기 한중 지식인 문예공화국을 볼 수 있는 매력적인 출발점이었다. 당시 조선의 학문이 송명의 찌꺼기에 불과하다는 편견에 맞서 그는 ‘청조학으로 가는 우주정거장’이라는 학문적 엄정함으로 반론을 제기했다.
이 책을 통해 후지쓰카의 학문적 자존감을 엿볼 수 있었다. 저자도 고백하고 있듯이 그는 쓰기보다는 읽기를 사랑한 학자였다. 어디 그뿐인가? 빨간 펜 선생으로 불렸던 그의 메모벽은 미련할 정도여서 일종의 책속의 지휘관이라는 범례를 제시하기도 했다. 그래서 잘 정리된 그의 방대한 소장서를 빌려보는 것이 감동스럽다는 저자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오죽 했으면 독서망양(讀書亡羊)을 깨닫는다고 말했을까? 하지만 이 책을 좀 더 읽으면 책이 책을 부른다고 해야 할 것 같다. 한 권의 책이 다른 책을 불러내는 그 풍요로움과 다채로움을 알았을 때, 화려한 학문의 꽃을 빨리 피우기보다는 지루한 학문의 뿌리를 오래 다지려고 했을 때, 그의 붓끝은 특별한 진실을 담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저자에게 후지쓰카는 끊임없이 살아있는 지식인이었다. 후지쓰카를 말하면서 과거와 현재라는 구분은 무의미해 보인다. 저자에게 그는 언제나 현재이다. 그래서 그들의 학문적 인연은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문예공화국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들이 필담과 편지를 통해 서로 간의 그리움과 애틋함, 안타까움을 남겼다. 그들의 사귐은 단순한 우정이 아니었다. 한 마디로 천애지기(天涯知己)였다. 지기는 ‘비아관아(非我觀我)’였다. 즉 나를 넘어서 안목으로 나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만약에 그들에게 지(知)라는 마음이 없었다면 문벌(文伐)공화국이라는 함정에 빠졌을 것이다. 그래서 북학(北學)이 아니라 북벌(北伐)로 첨예하게 대립했을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소통망 즉 문예공화국을 복원하면서 ‘문화는 선(線)’이라고 표현한다. 저자의 문화관은 간결하면서도 명쾌하다. 하지만 결코 단순하지는 않다는 것을 되새기게 한다. 문화가 선이라고 하면 방향성을 있을 것인데 단선적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문화는 소통되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화는 그들만의 문화가 아니라는 것이다. 문화는 모든 방향에서 선이 교차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문화는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교차하는 리듬 속에서 작동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19세기 문예공화국이 어떤 리듬인지 더욱 기다려진다. 그 기다림 동안에 이 책을 몇 백 년 소장하기 위해서 책 속에다 은행잎을 넣어두는 것도 같은 맥락이지 싶다. 충분히 사유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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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우아 2014-07-20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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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쳐야 미치는 문예의 세계 새창으로 보기 구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콜렉션' 이란 부제가 붙어 있는만큼, 책을 읽는 내내 지적유희가 어떤 것인가 제대로 보여주었다.
지식 캐기의 즐거움.
감자 한알을 당기면 줄줄이 이어지는 탐스런 감자들. 그 쾌감은 밭에서 감자를 캐 본 사람이라면 박수를 치며 공감을 할 것이다.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길 때마다 새로운 인물, 새로운 이야기가 줄줄이 펼쳐지는 글에서 난 감자밭의 감탄을 연발한다. .
한명의 인물 따라 관련있는 인물들이 그물망 처럼 얽혀 있고, 이야기 거리가 그믈망 한가득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을 좋아한다.
나도 여행을 좋아한다. 여행은 그 곳이 존재하고 인간이 존재하는 동안은 멈출 수 없는 매력임엔 틀림없으리라.
다분히 방랑자 기질인 나는 홍대용, 박제가를 따라 18세기의 문물과 지식인을 만나는 여행에 기꺼이 뛰어든다.
그리고 같은 만남에서, 각자의 느낌을, 각자의 책으로 만들었던, 선조들의 지적 유희에 흠뻑젖어들었다.
여행하는 것 보다는 적은 돈으로 이런 엄청난 즐거움을 선사해 준 인물은 '정민 교수'.
저자는 2012년 7월 18일 1년간 하버드 대학 옌칭연구소의 방문학자로 초청을 받아 그 곳에 머무는 동안 옌칭도서관에서 사료를 살펴 연구했고, 18세기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 박제가 등이 연행길에서 만난 중국학자와의 교류에 관한 책을 만들었다.
<18세기 한중 지식인의 문예공화국>은 연구서는 아니다.
연구서를 만들기 위해 주제에 관련된 인물의자료를 수집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인물과 자료에 관련된, 40화나 되는 방대한 이야기이며 연구서의 밑그림이다.
그렇지만 그의 탁월한 해석력이 그것만으로도 무척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 책에서 인용되는 자료의 일등공신은 일본인 학자 후지쓰카다. 그래서 '하버드 옌칭도서관에서 만난 후지쓰카 콜렉션'이란 부제가 붙은 모양이다.
후지쓰카는 경성제국 대학 교수로 있었으며 한국 중국의 문화 교류 자료를 수집, 연구하다 조선의 대학자, 김정희를 만난다.
김정희의 학문에 매료된 그는 추사에 관련된 많은 자료를 수집하였고, 1940년 정년퇴직하여 일본으로 돌아갈 때 우리나라에서 수집한 방대한 자료를 가지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 많은 자료는 1945년 3월 10일에 이루어진 미국의 도쿄 폭격으로 잿더미로 변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방공호에 있었던 일부의 자료가 미국 옌칭도서관으로 들어갔고, 나머지는 후치스카의 아들에 의해 추사가 마지막 살았던 과천 시청에 기증되어 추사 박물관이 만들어졌다.
정민교수의 옌칭 박물관의 감자캐기는 그러니까 후지쓰카의 자료 였다.
일본인들이 자료 수집과 정리의 귀재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정민교수도 그의 자료를 보면서 매우 부러워했고 나는 우리 것이라는 것에 집착해 속이 상했다.
그러나 한일 병합시절의 한국에서 그 자료가 안전했으리란 보장이 없고 그런 의미에서 순수한 학자적 관심과 열정에서 후지쓰카란 학자가홍대용, 박제가 등의 지식인들의 자료를 정리해 둔 것이 다행일수도 있다는 생각도 든다.
저자도 우리가 자료를 수집하고 정리를 못했던 것이 아니라, 많은 전란으로 소실되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책을 읽는 내내 옌칭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내즐거워 하는 저자를 상상하면서 같이 즐거웠고,
'열하일기' 속에서만 알고 있었던 18세기의 중국과의 교류의 대략적 모습을 볼 수 있었고,
특히 홍대용이란 인물이 대학자로 내게 새롭게 다가왔다.
아직 저자는 갈길이 많이 남아 있을 것이다.
독자는 저자 덕분에 앉아서 책장 넘기는 것으로 지식을 즐기는 기쁨을 누렸다. 쉽게 누리긴 했지만, 도서관에서 원하는 자료를 찾아내는 저자의 즐거움과 그런 자료를 알아볼 수 있는 저자의 지식이 한없이 부럽기도 했다.
그리고,
후대에 남길 유산으로서의, 연구물의 성과가 기다려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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