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17)칭기즈칸이 세운 제국은 거대했지만, 그가 파괴한 것은 훨씬 더 컸다 - 경향신문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17)칭기즈칸이 세운 제국은 거대했지만, 그가 파괴한 것은 훨씬 더 컸다공원국 | 역사인류학자
입력 : 2019.06.11 21:49 수정 : 2019.06.11
칭기즈칸, 그 비틀린 신화
소비에트 시절이 끝나자 몽골공화국 수흐바타르 광장에는 칭기즈칸 동상이 세워졌다. 칭기즈칸이 이끈 몽골 제국으로 인해 세계는 더욱 연결되었지만, 제국 자체는 유목문명사의 한 변이에 불과했다.
누군가 ‘칭기즈칸은 얼마나 위대한가’라고 묻는다면 대답하겠다. 그는 강했지만 위대한 인간은 아니었다고. 다시 ‘몽골제국은 얼마나 위대한가’라고 묻는다면 답하겠다. 제국은 거대했지만, 제국이 파괴한 것은 그보다 훨씬 컸다고. 제국이 이룬 수많은 성취를 인정하더라도, 몽골 제국의 역사는 길고 거대한 파괴와 그만큼 더디고 어려웠던 회복의 과정이었다.
몽골 제국, 끝없는 정복 과정에서
호레즘·바그다드부터 중국까지
유목민족으론 유례없는 학살 벌여
손에 핏덩어리를 쥐고 태어났다는 그 사람 테무친(칭기즈칸)이 죽은 지 50년 뒤 무렵의 제국을 상상해보자. 매일 제국 전역에 깔린 역참 사이를 수천 수만 마리의 말이 뛰어다니며 소식을 전했고(역마의 총수는 10만을 훌쩍 뛰어넘었다), 바그다드에서 한반도까지 상인들은 강도나 규정 외의 통행료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고, 잘 정비된 도로에는 일정한 거리마다 나무가 심겨져 여행자들의 땀을 식혀 주었다. 제국 안에는 종교의 차별도 없어서, 칸과 제국의 안녕을 위해 기도만 해준다면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무슬림이든 샤먼이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었다. 이런 규모의 제국은 일찍이 없었으니, 혹자들이 ‘팍스몽골리카’(몽골이 이룬 평화)를 학술 용어로 격상시키려는 것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마르코 폴로는 쿠빌라이 칸을 ‘아담이 생겨난 이래, 여태까지 존재했던 또 현재 존재하는 누구보다도 위대한 군주’라고 치켜세웠다.
그런데도 감히 칸과 그의 제국이 위대하지 않다고 말하는가? 필자는 이 기고를 시작하며 ‘자유, 공유, 환대’를 유목 사회의 유지 원리로 제시하고, ‘당대 인민의 복지’를 모든 통치 행위의 판단 기준으로 내세웠다. 유목문명에 대해 무의식적인 호감을 가지고 있지만, 사료와 고고학에 의거한 필자의 평가는 변함없다. 1206년 칭기즈칸이 몽골 고원을 통합하고 1227년 사망할 때까지, 몽골 부족을 제외한 전 세계 인민은 오로지 죽음과 파괴만을 경험했다. 칭기즈칸 사후 1258년 바그다드가 약탈되었을 때(혹은 1259년 뭉케 칸이 죽었을 때, 혹은 이듬해 훌레구의 서정군이 맘루크 군대에게 패할 때)까지, 대몽골 울루스 밖의 세계는 ‘선별적인’ 파괴와 살육을 경험했다. 그리고 나서야 복구가 시작되었다.
■ 왜 그토록 넓히려 했을까?
기독교 세계에 대한 전쟁을 멈추고 세례를 받으라는 교황의 사절 카르피니에게 구육 칸은 이런 서한을 건넸다(1246년).
(교황)그대는 전갈을 내게 보내 “(몽골이) 마자르와 키리스탄 지방들을 정복했다. 당신에게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라고 했다. 짐은 그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다. 칭기즈칸과 (나) 카안은 주(主)의 명령을 그들에게 보냈다. 그들은 주의 명령을 믿지 않고 사신을 살해했다. 그래서 그 오랜 주께서 죽이고 절멸시킨 것이다. 주의 명령이 아니라면 누가 어떻게 자신의 힘만으로 죽이고 정복할 수 있다는 말인가?(*이하 카르피니, 라시드 앗 딘, 마르코 폴로의 진술은 김호동 역에 의거)
그리고 이렇게 엄포를 놓았다. ‘당장 스스로 무리를 이끌고 어전으로 와서 복속하라.’
이렇게 논리를 배제한 묵시론적인 명령은 이미 칭기즈칸 시절에 시작되었다. 1218년, 신생 호레즘 제국의 샤는 어리석게도 몽골의 군주가 보낸 상단을 몰살해버렸다. 처절한 서정의 시작이었다. 주베이니는 칭기즈칸이 부하라를 점령한 후 예배장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전한다.
‘그대들은 죄를 지었다. 그대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알라가 나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몽골의 정벌 자체가 신의 의지의 실현인 셈이다. 후대의 칸들은 정복 전에 언제나 사신에게 이런 서한을 들려 보냈다. ‘하늘이 칭기즈칸 가문에 세계를 정복하라는 의무를 부여했다. 반역하는 자는 모두 죽는다.’
정말 이런 예언자적 신념 탓에 세계를 정복하러 나선 것일까? <몽골비사>에는 호레즘을 공격하기 전에 칸의 장남 조치와 차남 차가다이가 칸의 면전에서 멱살질을 하다, 차가다이가 ‘차라리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삼자’고 했다는 일화가 나온다. 조치도 동의했다.
“차가다이와 더불어 힘을 바치겠습니다. 우구데이를 지명합시다.”
그러자 칭기즈칸은 이렇게 두 아들을 달랬다.
“더불어 할 것이 뭐 있느냐? 어머니 대지는 넓다. 강과 물은 많다. 서로 떨어질 만큼 영지를 넓혀라!”(유원수 역)
라시드 앗 딘도 칸이 ‘중심에서 어느 방향으로 가든 1년이나 걸리는 광대한 왕국을 자식들을 위해 정복하여 완성시켰노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의 자식들도 제 자식들을 위해 정복했을까? 그들이 정복을 진지한 의무로 받아들였다는 점 외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
약간의 실리적인 이유를 보태면 출발은 가난이었던 듯하다. 칭기즈칸이 피의 투쟁을 통해 초원을 통합했지만, 초원 세계는 전쟁으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남쪽의 여진 제국은 몽골이 겁을 주거나 회유해서 필요한 물자를 얻어낼 수 있는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배고픈 상태에서 물자를 얻고 싶었으나, 정주 세력들이 완강하게 몽골을 거부하자 더욱 독이 올랐던 듯하다. 마침 호레즘이 상단을 학살하면서 칸의 분노는 정복 에너지로 바뀌었다. 그에게 살인은 이미 익숙한 일이었다. 심지어 탕구트 정벌전에서 부상을 당해 죽어갈 때도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탕구트 사람들의 어머니, 아버지의 자손들을 철저하게 죽여 없애고, 음식을 먹을 때도 ‘죽여 없애겠다’는 말을 하라.”(<몽골비사>)
카라코룸의 거북이 초석, 13세기 몽골 파괴 직전의 키예프 복원 모형(우크라이나 국립박물관), 화약을 넣을 수 있는 몽골 시대의 탄환(북경 수도박물관), 카라호토 출토 원대의 보살상(내몽골 박물관·위 사진부터).
■ 파괴는 유목민의 본성이 아니다
라시드 앗 딘은 호레즘 점령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젊은 여자들과 아이들은 포로로 끌고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처형하기 위해 병사들에게 분배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병사 한 사람에게 24명씩 나누어 주었는데, 몽골의 병사 숫자는 5만이 넘었다고 한다. 간단히 말해 모두 죽였다.”
여럿이 비슷하게 증언하므로 과장이 있더라도 이는 날조가 아니다. 멀리 흉노와 돌궐 위구르는 물론 몽골 출현 직전의 거란과 여진과 셀주크튀르크까지, 그 어떤 유목민도 오아시스 도시를 이렇게 완전한 살육으로 대한 적이 없었다. 몽골이 저지른 살육의 규모와 범위는 방대하다. 카르피니도 이렇게 슬라브 세계의 참상을 전한다.
“우리가 그 지방을 여행했을 때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의 해골과 뼈가 땅에 널려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키예프는 매우 크고 인구가 밀집된 도시였지만 지금은 거의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현재 그곳에는 겨우 200호 정도가 남아 있습니다.”
몽골은 수성자들에게 살려준다고 약속하고는, 투항하면 무장해제한 후 조직적으로 죽여버리거나 포로를 화살받이로 쓰기를 반복했다. 바그다드 학살은 그 정점이었다.
중국에서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금나라 말기 5000만에 이르던 화북인구가, 1935~1936년 몽골의 첫 인구조사에서는 1000만 이하로 나온다. 엄청난 이주와 도주, 그리고 통계에 포함되지 않은 영주의 부속민을 포함하면 최소 2000만은 되었을 테지만, 몽골의 침략이 화북을 처절하게 고갈시켰음은 명백하다. 몽골은 우구데이칸이 세금 도급제를 폐지할 때까지 파괴는 하면서 통치를 방기했다. 수세권을 가진 비한족 무슬림들은 자기 몫을 먼저 챙기고 국고를 채웠다. 유순한 우구데이마저 아예 농민들을 없애고 화북을 초지로 만들자고 해서 야율초재를 기겁하게 만들기도 했다. 중국에서 진정한 통치개념이 회복된 것은 쿠빌라이 시절(1260~1294)이다. 그는 송을 무너뜨릴 때, 선대의 학살 방식을 따르지 않았다. 드디어 농지를 제국의 생산기반으로, 농민을 생산자로 본 것이다.
살육에 집착한 이유는 논쟁거리
소수의 군대론 주둔군 둘 수 없어
철저하게 저항의지 꺾으려 한 듯
몽골이 왜 그렇게 살육에 집착했는지도 여전히 논쟁거리다. 정복이란 기본적으로 권력을 통해 인민과 부를 얻고자 함이 아닌가? 그들은 수가 너무 적었고 통치를 정당화할 유무형의 자산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잔인해졌던 듯하다. 호레즘을 칠 때 칭기즈칸이 탕구트에 병력을 요청하자 이런 답이 왔다. ‘병력도 빌리는 주제에 네가 무슨 칸이냐?’ 소수라 주둔군을 둘 수 없었고, 정주민은 믿을 수 없었다. 헝가리 기사들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공황에 빠져 돌아서려는 전사들에게 바투가 칼을 빼들고 말했다고 한다. ‘도망치면 한 명도 살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머나먼 적진을 가로질러 온 유목군대라 돌아가는 길이 막히면 살아날 길이 없다. 그래서 그들은 저항할 수 있는 이들을 철저하게 죽여 저항 의지를 꺾어놓고 다음 장소로 움직였다. 소수가 다수를 정복할 때 쌍방의 목숨값이 같아서는 안 된다. 일인이 백인을 상대하려면, 양자는 ‘종’ 자체가 달라야 한다. 즉 인간은 몽골과 그 나머지로 구분되어야 한다. 이렇게 ‘몽골’이라는 정체성을 주입하고 단련한 결과 지옥의 용사들이 등장했다.
■ 강함, 자유의 대가
칭기즈칸은 유목적·원시적이기는커녕 오히려 극도로 정주적·인위적인 정치가였다. 어린 시절 씨족의 버림을 받고, 싸움에 패할 때마다 배신당했던 이 떠돌이는 부족 따위의 느슨한 유대를 믿지 않았다. 몽골 군대가 강했던 것은 그가 이 유목 기병대에 정주 보병대의 규율을 입혔기 때문이다. 전략가로서 그와 가장 비슷한 인간은 초원의 선대 칸(카간)들이 아니라 병영 제국의 황제 진시황이다.
스키타이에서 돌궐과 위구르에 이르기까지 유목군대는 전투에서 달아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습격하고, 달아나고, 반격하다, 그마저 여의치 않으면 멀리 퇴각하는 것이 그들의 전법이다. 더 강한 상대와 정면승부하다 한 번 패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달랐다. 1211년 칸은 몽골의 전병력을 동원해서 막상막하의 기병을 보유하고 있으며 강력한 보병의 지원을 받는 금을 공격했다. 중과부적 상황에서 정면대결한 유목 세력은 그때까지 없었다.
제국으로 인해 세계는 연결됐지만
배제된 계층 희생 기반으로 성립
성취는 파괴 뒤 복구의 결과일 뿐
칸은 부족 연합체 대신 대몽골이라는 거대 단위를 만들어냈다. 전사들은 십·백·천·만호 단위로 조직되었고, 이 조직은 기존의 씨족·부족 체제를 가로질렀다. 누구도 자신이 속한 만호 밖을 벗어나 다른 만호로 들어갈 수 없었고, 만호의 지휘관들을 자신의 친위대에서 뽑아 썼다. 이것은 전국시대 진(秦)의 법가 군주들이 처절한 상쟁의 과정에서 관철한 병농(兵農)일치제(군산일치제)를 초원에서 병목(兵牧)일치로 재현한 것이다. 카르피니는 명령 없이 퇴각하는 자, 약탈을 위해 대오를 이탈한 자를 “가차 없이 사형시킨다”고 전한다. 그들은 보병처럼 십진법 단위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함께 전진하고 퇴각했다. 말에서 떨어진 동료를 되찾지 않는 자 역시 군법에 따라 처단된다. 심지어 군대의 질서를 유지하지 못한 호장들의 아내와 자식까지 죄인으로 간주했다. 이것이 글자 하나도 다르지 않은 진시황의 군법이다. 그때까지 이런 군법으로 움직이는 그런 규모의 기마군단은 없었다.
몽골은 선배들의 행적을 극단으로 밀고 나갔다. 거란은 확고한 대형을 가진 10만 기병을 길렀지만 여전히 부족 중심의 동원체제를 유지했다. 초원에서 만호(투멘)를 최고 단위로 하는 군제 역시 역사가 길지만 그것은 부족의 전투 시 명칭일 뿐이었다. 그러나 칭기즈칸은 전투 대형인 만호를 방목단위로 만들어냈다. 친위대(케식)는 여러 부족(씨족)에서 뽑은 용사들인 동시에 인질이었다. 결국 그가 만들어낸 제국의 핵심은 거대한 병영이었다.
그러나 병영은 병사들 자신은 물론 천하고 배제된 계층의 자유를 희생하지 않고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 제국의 말단 관료였던 마르코 폴로마저 쿠빌라이 시대를 이렇게 묘사한다. ‘키타이(중국, 특히 화북) 사람들은 대칸의 통치를 증오했는데, 그것은 그가 타타르들(몽골), 아니 대부분 사라센들은 통치자로 임명해서 보냈고, 키타이인들은 마치 노예처럼 취급해서…또한 대칸의 키타이 지방에 대한 지배권은 마땅한 권리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력에 의해서 장악한 것이었기 때문에 칸 또한 그들을 믿지 못했다.’
그가 쿠빌라이 이전의 시대를 보았다면 진술은 더 나빴을 것이다. 이전에 카르피니는 여행 중에 몽골에 복속된 여러 민족들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속박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보고했다.
칭기즈칸은 정주적·인위적 정치가
진시황 연상케 하는 거대 병영 제국
유목민의 본성 벗어난 변이에 불과
몽골 제국으로 인해 세계는 더욱 연결되었지만, 그 성취는 파괴가 아니라 지난한 복구의 결과였고, 제국 자체는 유목문명사의 한 변이에 불과했다. 소비에트 시절이 끝나자, 몽골공화국의 수흐바타르광장으로 그가 돌아왔다. 칸의 이름도 마음대로 부르지 못하던 몽골인의 심정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일제가 대동아주의(大東亞主義)의 상징으로 그를 떠받들던 행태를 21세기의 우리들이 모방할 필요가 있을까? 모택동이 말한 대로 그는 “하늘이 내린 일세의 준마(一代天驕)”였다. 하지만 말이란 원래 축생이라, 올라타려고 기르는 것이지 그 발굽에 짓밟히려고 키우는 것이 아니다.
■ 필자 공원국
<춘추전국이야기>(11권) <여행하는 인문학자> 등을 쓰고, <말, 바퀴, 언어> 등 다수를 번역했다. 유라시아 유목문명에 관한 저술을 준비하는 동시에 파미르 고원에 장기 거주하며 현지 환경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호텔스닷컴 공식 할인쿠폰
관련연재
공원국의 세계의 절반, 유목문명사
(16)‘고려 사나이’ 함보가 만든 배상법, 부족 간 ‘복수혈전’을 멈추다
(15)당이 위구르와 거래한 ‘견마무역’, 피로 바꾼 북방 평화체제였다
(14)알타이를 동서로 장악한 ‘돌궐 제국’도 백성이 떠나면…
페이스북 공유하기
트위터 공유하기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906112149005&code=960100&utm_source=facebook&utm_medium=social_share#csidxbb065645a0a0ac5937eb1f14cc9f5cd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