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 간도 특설대 -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김효순 (지은이)서해문집2014-02-25384쪽
책소개
1930년대 만주,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에 관한 역사서.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항일 무장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일제가 괴뢰국가인 만주국에서 소수의 일본인 장교를 제외하고는 전원 조선인만으로 구성한 부대다. 만주국 내 특수부대의 하나로, 1938년 관동군 통제 아래 창설됐다.
이 책은 '친일토벌부대'를 둘러싼 진상이 무엇이었는지 갈증을 느끼는 일반인을 위해 간도특설대를 본격적으로 해부한 최초의 책이다. 또한 항일무장부대와 '친일토벌부대'의 2분법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한때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가 어떻게 등장해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더 넓은 시각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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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친일토벌부대'를 둘러싼 진상이 무엇이었는지 갈증을 느끼는 일반인을 위해 간도특설대를 본격적으로 해부한 최초의 책이다. 또한 항일무장부대와 '친일토벌부대'의 2분법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한때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가 어떻게 등장해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더 넓은 시각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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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프롤로그
1장 1930년대 만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초대 해병대 사령관 신현준
이다 소학교와 일본인 국제주의자 전사들
박지영.박남표 부자
김동한과 간도협조회
반민생단 투쟁
2장 간도특설대 창설과 ‘토벌’ 그리고 …
간도특설대 창설과 모병
‘토벌’과 반토벌
투항, 배신, 변절의 계절
3장 간도특설대의 최후
간도특설대의 러허 성 이동과 철석부대
간도특설대의 최후
일제 유산 청산과 냉전의 장벽
간도특설대, 그 이후
에필로그
참고자료
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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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국내에서 김석범 등의 일방적 주장이 엄밀한 검증 없이 오랜 기간 통용돼온 데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가 작용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우리 민족이 갈라져 독립된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한 데다 냉전의 격화 속에 중국내전, 한국전쟁, 일본의 재무장과 전범 세력의 부활 등이 이어지면서 '반공'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공교롭게도 당시 토벌대에 속했던 사람들이 남에서는 지배 질서의 한 축을 장악했고, 항일 세력의 일부가 북에서 권력을 장악한 것도 감출 수 없는 사실이다. 그 시절의 적대적 대립이 남과 북의 현실에 일정 부분 녹아들어 공론 형성을 오랜 기간 봉쇄했다. (21) 접기 - 베리심플
군부의 발호가 기승을 부리던 1930년대 일본에서 군국주의의 폭주에 맞선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었다. 천황제 절대국가를 추구하는 통치 방침에 이의를 제기하는 일본인은 '비국민'으로 규정돼 철저히 고립되거나 제거됐다. 그러나 아주 소수이기는 하지만 엄혹한 조건 아래서 천황제와 일본 파시즘에 정면으로 저항한 일본인이 있다. 그중에는 만주에서 일본 군대와 맞서 싸운 항일 무장 세력의 투쟁에 죽음으로써 연대감을 표시한 사람도 있었다. (41) 접기 - 베리심플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된 데는[반민생단 투쟁을 말함] 여러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을 것이다. 일제의 민족 이간책으로 만주에 이주한 조선인은 일반 중국인에게 '일본 침략자의 하수인', '두 번째 일본 놈'으로 비처 인상이 좋지 않았다. 일본군 통역을 하거나 일제의 위세를 빌려 활개 치는 친일파 조선인이 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게다가 1931년의 붉은 5월 투쟁에서 조선인이 앞장서 싸운 것이 중국인 유지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켰다는 해석도 있다. 일제의 압제에 맞선 항일투쟁의 차원에서 이해하기보다는 나이 든 조선인이 약탈, 방화를 하며 동3성을 탈취하려 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127) 접기 - 베리심플
1930년대의 반파시즘 투쟁에서 만주의 항일투쟁은 어떤 의미를 가질까? ... 조선인이 먼저 시작한 무장투쟁이 1930년대 전반 만주의 잡다한 세력을 결집시킨 반제 통일전선의 결성으로 이어졌다고 봤다. 중공당 중앙이 1935년 8.1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본토의 통일전선 결성을 촉구한 것은 만주에서 실현된 통일전선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해석했다. 만주의 선도적 투쟁이 중일전쟁 기간 중 국공합작을 이끌어냈다는 것이다. 야마베 겐타로는 나아가 만주와 프랑스에서 같은 해에 통일전선이 결성된 의의가 실로 크다고 평가했다. 1934년 프랑스에서는 파시즘 세력의 대두에 맞서 사회당과 공산당이 통일공동협정을 맺었고 만주 지린에서는 동북항일구국총회가 결성됐다. (186) 접기 - 베리심플
한국과 중국에서 간도특설대에 대한 역사적 청산이 어떻게 진행됐는지는 어찌 보면 비교할 건더기조차 없다. 중국에서는 ... 항일전쟁 기간 중 일제의 편이던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사람들은 너무 심하다 할 정도로 심판을 받았다. 심지어 일본이 항복한지 20여 년이 지난 문화대혁명기에도 간도특설대 복무자들은 거리에 끌려다니며 구타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 중국과 달리 우리 사회에서는 간도특설대가 역사적 청산 대상의 하나라는 공론조차 형성되지 않았다. (370) 접기 - 베리심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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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항일 무장세력 ‘소탕’ 임무를 맡은 특수부대로, 하사관 이하 사병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되어 일본 군인보다 더 철저하게 ‘황국 군인’이 되고자 했던 간도특설대는 그간 주목은 받았지만 알려진 사실이 너무 빈약했다.
이 책의 저자는 일본 중국 측의 여러 증언 등 새 자료를 찾아냈고, 특히 얼마 전 명예원수 추대 문제로 논란이 된 백선엽의 국내 회고록보다 일본에서 나온 회고록이 훨씬 상세하고 ‘긍지’에 차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이 역사서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집요하게 묻고 있다. 곳곳에서 간도특설대·군 인맥과 항일 무장세력·만주 빨치산을 극명히 대조시켜 군의 정체성을 묻고 있으며, 과거 청산이 현대사에서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묻고 있다.
대기자 출신답게 쉽게 재미나게 쓴 것도 이 책의 강점이다. 현장 취재감이 물씬 풍기고 까다로운 자료를 풀어썼다. 읽어감에 따라 진실이 점점 확연하게 드러나는 문장 구성법도 이 책에서 손을 못 떼게 한다. - 서중석 (역사학자, 성균관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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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신문
- 한겨레 신문 2014년 2월 23일자 '한 주를 여는 생각'
저자 및 역자소개
김효순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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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서울대 정치학과를 나왔다. <동양통신> <경향신문>을 거쳐 <한겨레> 창간에 간여해 도쿄 특파원, 편집국장, 편집인을 지냈다. 2007년부터 취재 현장에서 대기자로 활동하다가 퇴직했고, ‘포럼 진실과 정의’ 공동대표 등을 맡고 있다. 한일 관계, 동아시아의 평화, 화해, 시민운동 등을 테마로 글을 쓰고 있으며, 역사에 버림받은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 저서에 《조국이 버린 사람들》(2015), 《간도 특설대》(2014), 《역사가에게 묻다》(2011),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2009), 《가까운 나라 모르는 나라》(1996) 가 있다. 접기
최근작 : <나는 전쟁범죄자입니다>,<인권, 세계를 이해하다>,<리영희를 함께 읽다> … 총 9종 (모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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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1930년대, 한때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
‘친일토벌부대’가 어떻게 등장해 활동할 수 있었을까
간도특설대는 우리 현대사에서 대표적 치부의 하나다. 간도특설대는 조선인 항일 무장 세력을 섬멸하기 위해 일제가 괴뢰국가인 만주국에서 소수의 일본인 장교를 제외하고는 전원 조선인만으로 구성한 부대다. 만주국 내 특수부대의 하나로, 1938년 관동군 통제 아래 창설됐다. 하지만 이런 개략적 사실조차 일반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학계에서의 연구도 지지부진한 편이다. 몇 개의 단편적 논문이 나와 있는 정도다.
일제의 앞잡이부대였던 간도특설대는 왜 이제까지 제대로 조명이 되지 않았을까? 자료 부족 등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가 친일파 청산문제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만 하더라도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이었느니 ‘무적의 상승부대’였느니 하는 친일파의 일방적 주장이 앵무새처럼 되풀이되곤 했다.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했던 한 인사는 “일제 탄압하에서 조국 땅을 떠나 유서 깊은 만주에서 독립정신과 민족의식을 함양하며 무예를 연마했다”는 주장을 공공연히 펴기도 했다.
이 책은 ‘친일토벌부대’를 둘러싼 진상이 무엇이었는지 갈증을 느끼는 일반인을 위해 간도특설대를 본격적으로 해부한 최초의 책이다. 또한 항일무장부대와 ‘친일토벌부대’의 2분법적 대립구도에서 벗어나 한때 독립운동의 성지였던 간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간도특설대가 어떻게 등장해 활동할 수 있었는지를 더 넓은 시각에서 틀에 얽매이지 않고 펼쳐 보인다.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이들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들을 뒤에서 부추기고 조종한 사람이나 세력은 누구였는지, 1930년대 파시즘과 군국주의에 대한 투쟁이 전 세계적 과제로 등장했을 때 그들이 선 자리는 어디였는지, 그들이 집요하게 말살하려 한 ‘공비’의 정체는 무엇이었는지, ‘공비’는 어떤 풍상을 겪었는지, 일제 패망으로 만주국이 붕괴된 후 서로 대립해서 싸우던 이들은 어떤 인생 유전을 겪었는지 그리고 특설대 간부였던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주역으로 자리 잡았는지를 담담하게 전달한다.
저자는 중국 옌볜조선족자치주에서 1950년대 간도특설대 복무자를 대상으로 조사해 정리한 문서를 비롯해 관동군헌병대, 노조에토벌대 자료는 물론이고 간도특설대 창설에 참여한 일본인 장교 고모리야 요시이치의 회고록, 만군에 근무했던 일본인들이 전후 남긴 희귀한 자료집 등을 치밀하게 활용해 간도특설대를 추적하고 있다.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근무한 한국인 가운데 현재 생존자는 백선엽 장군이 유일하다. 그는 국내에서 출간한 여러 종의 회고록에서 간도특설대 복무경력은 짤막하게 언급하면서 구체적 내용은 철저히 함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에서 낸 <대게릴라전> <젊은 장군의 조선전쟁>에서는 국내에서는 일체 발설하지 않고 있는 내용이 제법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백선엽은 ‘게릴라 소탕’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눈 내린 산길에서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게릴라를 며칠씩이나 매복해서 기다리는 것이라고 지적한 뒤 훈련이 철저하고 ‘사명감에 타오르는’ 부대가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사명감이란 과연 무엇인가? 저자는 백선엽 자신의 기술을 토대로 그의 이중적 자세를 추궁하고 있다. 동시에 일제 말기 그의 직속상관이었던 일본인의 증언을 토대로 그가 만군 헌병장교로 활동한 사실도 소개하고 있다.
1930년대 만주,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1930년대 만주는 항일 조선인의 해외 전초기지였다. 저자는 그곳을 거쳐 간, 또 어쩔 수없이 감내해야 했던 여러 인물의 다양한 삶을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창구로 삼았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인 신현준이 어떤 인생 유전을 거쳐 만주군 장교가 됐고, 간도특설대에 복무하게 됐는지를, 또 그가 특별히 위화감을 갖지 않을 수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펼쳐진다. 또한 육군 소장으로 예편한 박남표에게 그의 조부와 부친의 항일투쟁 경력이 장벽이 되었던, 수난의 가족사가 이어진다. 한편 천황제와 일본 파시즘에 정면으로 저항한 일본인의 일화도 소개한다. 탄약 10만 발을 항일 부대에 넘겨주고 자살한 일본군 병사 이다와〈간도 빨치산의 노래>를 남긴 반전시인 마키무라 고 이야기다.
김동한이 만든 친일 주구조직 간도협조회가 있었다. 상황에 따라 정보원, 밀정, 토벌대원의 역할을 수행한 이들에게 체포되거나 투항한 항일 부대원의 수는 최소한 2500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이들의 잔혹한 활약과 더불어 조선인 혁명가가 중국인 공산주의자 또는 조선인 혁명가에 의해 무차별 살해되는 참극이 일어난다. 반만 항일투쟁을 벌인다고 하면서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의 특무조직이나 밀정이 아니라 조선인 항일 혁명가를 주요 투쟁 대상으로 삼은 치명적인 ‘민생단 사건’이 그 시대를 생생히 말해준다.
간도특설대 창설과 ‘토벌’ 그리고 …
간도특설대는 1938년 9월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이듬해 3월 정식으로 발족했다. 주요 임무는 항일 무장 세력의 소탕, 섬멸에 있었다고 봐야 한다. 당시 만주에서 항일 무장 세력의 핵심은 관동군과 만주국 치안기관이 말하는 ‘공비’, ‘토비’였다. 항일 진영 중에서도 간도 지역의 조선인을 중심으로 구성된 동북항일연군 2군이 출범한 것은 1936년 3월이고, 3년 뒤 간도특설대가 본격적으로 이들의 토벌에 나서게 된다.
저자는 간도특설대가 만군산하부대로서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또 일본인 장교와 조선인 장교는 어떤 사람들이었는지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토대로 꼼꼼하게 드러내고 있다. 일제 패망으로 해산되기까지 간도특설대에 입대한 사병 수는 2100명에 이른다. 간도특설대 복무 장교의 절반 정도는 일본인이고 나머지는 조선인 장교다. 크게 세 부류로, 펑톈 군관학교 출신, 신징 군관학교 출신, 그리고 특설대에 사병이나 하사관으로 입대해 단기 교육을 마치고 장교가 된 육군훈련학교 출신으로 나뉜다.
또한 만주국의 역사를 ‘토벌’과 ‘반토벌’의 기록이라고 하듯이, 저자는 쫓고 쫓기는 항일연군과 본격적으로 토벌에 나선 간도특설대 사이의 처철했던 투쟁 현장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있다. 풀숲에 가려진 다샤허 전투 기념비를 둘러보고, 중국의 ‘항일영웅’ 양징위의 최후와 ‘동양귀’라고 불린 기시타니 류이치로를 통해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들려준다. 특히 조선인 항일 혁명가에게 남은 길은 두 가지밖에 없었음을 얘기한다. 싸우다 죽든가 아니면 변절해서 목숨을 부지하든가, 만주의 무장투쟁을 둘러싼 환경은 그 정도로 엄혹했다. 그리하여 항일혁명에 몸담았던 많은 사람이 여러 이유로 변절, 투항해서 일제의 앞잡이가 됐음을.
한편 간도특설대는 1943년 말께 러허(열하)성으로 이동해 팔로군 등 항일부대 소탕에 투입됐으며 45년초에는 철석부대 산하로 편입됐다. 만군 정예부대로 편성된 철석부대 안에서도 간도특설대는 다른 만군 부대와 달리 정보 수집 기능을 강화해 토벌작전에 대대적으로 활용했다. 간도특설대에서 장교로 복무했던 한국인들이 후에 ‘공비 토벌’을 했을 뿐이라고 주장해도, 일제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전략에 철저하게 이용당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철석부대를 관할한 ‘북지北支특별경비대’의 사령관은 북지파견군 헌병대 사령관인 가토 하쿠지로加藤泊治郞 중장이었다. 그는 일본이 미국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을 때 총리이자 육군대장이었던 도조 히데키東條英機의 심복이었다.
이후 소련 참전과 만주국 붕괴, 일본군 무장해제 그리고 철석부대의 붕괴가 이어졌다. 간도특설대는 1945년 8월 15일 이후에도 일제의 항복 선언을 통보받지 못한 채 팔로군 토벌작업을 계속했다. 우스꽝스럽게도 특설부대에 일제의 항복 소식을 전해준 것은 팔로군이었다.
이 책은 특히 일제 패망 이후 간도특설대 복무 장교들의 다양한 귀환 경로를 추적하고 부대원들의 전후 행적, 하사관에서 출세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등을 자세하게 펼쳐 보인다. 이와 함께 한국전쟁 때 맹활약한 백선엽과 만군 시절 백선엽의 상관인 일본인들이 기억하는 백선엽 등을 중국과 일본에서 발굴해낸 자료를 토대로 기술하고 있다.
지금까지 왜 간도특설대는 드러나지 않았는가
우리 사회에서 간도특설대 문제가 그나마 일반의 관심을 끈 시점도 일제의 강제병합 100년을 맞은 2010년인 듯하다. 그전에도 이런저런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해에는 한국전쟁 발발 60년과 겹쳐 군 일각에서 백선엽 장군을 원수로 추대하려는 움직임이 일면서 관심이 증폭했기 때문이다.
간도특설대 출신 가운데 한국에서 장관, 군사령관, 고위관료 등으로 출세한 사람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자발적으로 당시의 일을 고해한 사람은 없다. 게다가 함구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당시의 행적을 합리화한 사람도 있다.
그동안 일방적 주장이 엄밀한 검증 없이 그대로 받아들여진 데는 복잡한 국내외 정세가 작용했다. 일제가 패망한 뒤 우리 민족이 갈라져 독립된 통일국가를 세우지 못한 데다 냉전의 격화 속에 ‘반공’이 모든 가치를 압도해버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시비비를 논하려 하면 실상을 냉정하게 접근하기보다는 말꼬리잡기식 공방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다. 지금까지 간도특설대가 역사적 청산 대상의 하나라는 공론조차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던 셈이다.
간도특설대에 대한 학계의 연구 또한 지지부진하다. 한국뿐 아니라 중국, 일본에서도 본격적으로 연구된 적이 없다. 그런 탓인지 발굴된 자료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저자는 현재까지 드러난 간도특설대 관련 자료는 주로 중국에 있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특설부대의 작전일지 같은 1차 자료는 거의 없고, 옌볜 조선족자치주 차원에서 특설부대 복무자들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여 부대 조직, 구성원, 토벌 실태 등을 기록해놓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따라 중국 현지 취재와 함께 일본에 남아 있는 노조에 토벌대의 작전 명령 등 한.중.일의 각종 자료들을 수집, 발굴해 면밀하게 검토했다. 특히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관해 얘기한 부분에서 국내 출판물과 일본 출판물 사이에 양이나 질적인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밝혀냈다.
“일제의 폭압적 통치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 항일의 잣대를 일률적으로 들이밀어서는 안 된다. 항일 행위는 당사자의 목숨은 말할 것도 없고 집안의 몰락을 초래했던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그런 고난의 길을 걷지 않았다고 모든 사람에게 따질 수는 없다. 그렇지만 항일운동의 반대쪽에 섰던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고 정당화하는 파렴치한 짓은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된다. 어떤 경우에도 항일 무장부대와 간도특설대를 같은 반열에 놓고 논할 수는 없다. 간도특설대가 민족의 자랑거리였느니, 민중의 편이었느니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돌아다니게 해서는 안 된다.”_에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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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책은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구매
빅피시 2014-09-02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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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 지배는 길기만 하다. 아직도 청산되지 않은 식민지 잔재, 그 핵심에 간도특설대가 있다.아프지만 상처는 드러내야 한다. 후속의 깊은 연구를 기대한다 구매
우암거사 2014-12-14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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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 특설대> 간도 특설대에 대하여 새창으로 보기
일제청산은 어느 정도 되었을까?
'독립운동가의 자식들은 끼니 조차 걱정할 정도로 빈곤하게 살고, 친일파 자식들은 대를 이어 부를 누리고 산다'는 말을 많이들 들어 보았을 것이다. 요즘도 친일파 자손들이 나라를 팔아 가면서 얻은 토지 등에 대해서 소송을 하는 경우에 대한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럴 때마다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간도특설대>를 읽는 순간 독자들은 그런 마음이 또다시 살아날 것이다. 역사를 바로 잡지 못한 것도 문제이지만, 우리는 우리의 역사를 너무도 모르고 있다는 생각에 잠기게 된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간도특설대'라는 명칭을 처음 들었다. 만주를 중심으로 독립군들을 섬멸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계획적으로 구성된 부대가 있었다는 것도, 그리고 소속 부대원들의 이름 중에 너무도 잘 알려진 인물들이 있었음도 알지를 못했다.
다만, 알고 있었던 사실은 일본군 소속의 만주 군관학교에 대한 단편적인 지식 뿐이었다. 지난 대통령 선거 때도 만주군관학교가 많이 거론되었다.
이 책의 저자는 '간도특설대'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백선엽에게 명예원수 추대를 하려는 문제를 계기로 그의 회고록을 살펴보게 된다.
그런데, 백선엽의 회고록은 국내 회고록 보다는 일본에서 나온 회고록에 더 자세한 내용들이 있었으며, 그는 이 회고록에서 '긍지에 찬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자는 간도특설대에 대한 많은 자료를 토대로 이 책을 쓰게 된다.
저자가 이 책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내용은,
* 독립운동의 성지인 간도에 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 토벌부대가 등장하게 된 배경.
* 간도특설대에 복무한 사람은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
* 간도특설대는 어떤 세력의 조종을 받았는가
* 간도특설대가 토벌한 공비의 정체는 무엇인가
* 간도특설대의 구성원들의 인생유전 이야기
* 간도특설대의 간부였던 사람들은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주역이 되었는가를 알아본다.
간도는 지린 성[吉林省]을 중심으로 랴오닝 성[遼寧省]을 포함한 창바이 산맥[長白山脈] 일대의 서간도와 두만강 북부의 북간도(혹은 동간도)를 함께 지칭하며, 좁게는 연변조선족자치주(延邊朝鮮族自治州)가 있는 북간도 만을 말한다.
간도에 조선인들이 들어가게 된 것은 철종말에서 고종초에 대흉년으로 먹을 것도 없는 농민들이 세도정치의 수탈과 학정에 견딜 수 없어서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이 곳에 가게 된다.
그후 일제강점기에는 토지를 탈취당한 농민과 항일운동가와 일제의 대륙침략과 만주건설을 위한 강제이주자 등이 간도에 들어가게 되니 조선인들의 이주민들이 대폭 증가하였다.
그 유명한 윤동주 시인의 '별을 헤는 밤'에도 나오지 않던가.
조선땅에서 살 수가 없어서 간도로 떠난 농민들과 항일운동가들의 한이 서린 이곳에 간도특설대가 만들어졌으니 이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간도특설대는 1938년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 중의 하나로 창설된다. 일제가 조선인만으로 구성한 부대이다. 목적은 무장세력을 섬멸하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여기에서 무장세력은 어떤 세력인가?
독립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간도특설대가 창설될 당시에 동아일보에 기사화된 자료를 보면, 지원병 모집, 자격요건, 대우, 지방 유력자에 대한 참여 독려 등에 관한 내용이 있다.
'만 20 세 이상 22 세 미만된 간도성 내 거주 조선인 남자'라고 명기하고 있다. 공용어는 일본어를 사용한다. 더욱 어처구니 없는 것은 애국정신 운운하면서 '만주 거주 조선인의 영예이자 자랑'이라고 선전한다.
"(...) 조선 내에서는 내선일체 황도(皇道) 정신의 파악이 정치적 견지에서 요청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 (p. 139)
시대적으로 볼 때에 간도특설대가 창설될 당시에 만주는 반일 무장세력의 끝없는 저항이 있었다. 일본은 군경을 총동원하여 치안 숙정에 나서게 되고 이 과정에서 간도특설대가 만들어 진다.
창성을 주동적으로 건의한 인물은 만주 거주 조선인 이범익 등인데 이들은 친일파 우두머리격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주도적으로 간도특설대를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고, 관동군과 총독부, 일본 군부가 긴밀하게 사전 논의를 하여 창설되었다고 봐야 한다.
군관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낸 사람들을 보면, 송석하, 백선엽, 박임항, 박정희, 장은산, 강문봉 등인데, 이들이 해방후에 대한민국에서 어떤 위치에서 어떤 활동을 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친일파 문인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이광수, 최정희, 모윤숙, 정비석, 김동환 등 38명은 간도특설대 훈련소에 하루 입소하고 난 후에 감상문을 써서 간도특설대를 홍보, 찬양했는데, 그 내용이 책 속에 담겨 있다.
저자는 그 밖에도 신문을 비롯한 관련자료와 문헌을 중심으로 간도특설대를 치밀하게 분석하여 이 책을 썼다.
그러나 아직까지 간도특설대에 대한 연구는 잘 이루어져 있지 않고, 오히려 간도특설대에 속했던 사람들에 의해서 이 부대가 항일 토벌부대가 아닌 공비나 팔로군 토벌을 위한 부대인 것처럼 미화되기도 한다.
이 책을 읽는다면 해방후에 일제 청산을 제대로 하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 잘못된 역사를 갖고 가는 것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과거의 불편한 역사를 감추거나 묻고 가려는 것 보다는 역사를 바로 알고 하는 일이 우리가 앞으로 올바른 역사의식을 갖는데 큰 역할을 할 것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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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5-08-16 공감(8) 댓글(0)
1930년대의 만주,조선인으로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언젠가 신문서평에서 보고나서 읽을목록에 올려놓았던 책이다.백선엽에 대해서 한창 시끄러웠을때 간도특설대 복무경력이 문제시 되었던것 같고,그때 간도특설대에 관심을 가졌던듯 하다.이책은 한겨레의 편집국장을 지낸 김효순씨가 쓴것으로 언론인답게 철저한 자료조사와 더불어 읽기쉽고 재미있게 써서 소설보다 더 흥미진진하게 읽었다.잠이 잘 안오던 더운 여름밤에 책을 잡았다가 끝까지 다 읽고 말았다.이책에는 단순히 "간도특설대"만 따로 떼서 다룬것이 아니라 1930~40년대 만주에서의 항일빨치산 운동과 그 영웅들 이야기,민생단이야기,간도협조회 이야기등 당시 만주의 상황에 대해서도 잘 그리고 있다.간도특설대는 일제의 "이이제이"전략의 하나로 만주에서 가장 치열하고 끈질지게 저항하던 조선출신 항일빨치산을 제압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한마디로 일제의 사냥개조직인 것이다,이렇게 만주에서 가장 악랄하게 개노릇하던 작자들이 해방후 한국군의 중추가 되어 모두 입신출세하였으니 오호 통재라,대한민국 건국의 역사는 개들의 역사다.
또한,이책을 읽으며 선명하게 드러나는 인물이 있었으니 김일성이다.일제의 본격적인 토벌이 대대적으로 시작되며 지도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변절하는 사이,소련으로 도망쳐 목숨을 부지한 김일성세력은 해방후 북한정권의 핵심세력이 된다.그후 벌어진 한국전쟁에서 북한은 항일빨치산출신들이 중심이 되고 남한은 일제의 사냥개 노릇을 하던 일본군출신들이 중심이 되었으니 참으로 우습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다.
이책을 읽으며 일제 토벌대에 쫓기던 만주의 항일빨치산과 해방후 지리산을 중심으로 활약했던 남한빨치산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겹쳐졌다.둘다 후방기지의 도움 하나없이 홀로 버텨내야 했고,우수한 무기와 병력을 동원한 토벌대에게 끝내 와해되었다.만주에서의 이런 경험이 김일성에게 지리산빨치산을 그냥 내팽겨둔 이유가 아닐까 생각들었다.어차피 후방기지의 도움을 못받는 고립된 지역에서의 빨치산활동은 와해될것이고,그냥 후방교란이나 해주고 말라는..,그리고 남한 빨치산들이 북으로 올라오면 어차피 정적이 될수도 있을테니..,
해방후 일제의 사냥개들의 운명은 크게 갈렸다.사회주의 중국이나 북한에 남은 개들은 어떤 형태로든 처단되었다.그러나 남한으로 몰려든 개들은 반공투사로 변신하여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중국에서도 장개석정권이 통일하였다면 비슷한 모습이었을것이라 생각든다.일제 패망후 빨치산활동하다 변절한 자들이 중국통일전까지 대거 국민당군대로 기어들어가 높은 자리에 올랐으니 말이다.
올해가 광복 70주년이고 임시공휴일까지 지정하고 야단법석을 떨지만 그리 기쁘지 않다.아직도 혈서를 써서 일본천황께 충성맹세를 하던 다까끼 마사오 중위의 딸이 여왕처럼 나라를 다스리는 나라에서 무슨 정의를 찾을수 있겠는가?
해방후 이광수가 그랬다던가.평생 일본인으로 살줄 알았지.이렇게 빨리 해방될줄 몰랐다고..,설령 어떤 이유로든 일본의 개노릇을 했다면,해방된 조국에서는 죗값을 제대로 받고 역사의 전면에서 사라져야할 작자들이 이 나라를 이끌어 왔다는 것이 이 나라의 비극이다.
앞으로 일본이 다시한번 이나라를 침략해 통치한다면 역사를 아는 사람치고 그 누구도 독립투쟁같은짓은 안할것이다.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하고,친일을 하면 3대가 흥하는세상에서 누가 나설것인가? 이런것이 반민족배반자들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나라에게 던지는 교훈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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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토피아 2015-08-20 공감(4)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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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리뷰] 간도 특설대
애도의 시간이 지나면 성찰의 시간이...
박원순 시장과 백선엽의 죽음 ..
박원순 시장의 영결식을 보고 있으려니.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개인적으로 마음아프나 역사의 시간속에 과오를 덮을수만은 없다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간도특설대 간부로 있으면서 독립군을 잡았던 백선엽과는 다르다는 것.
문득 둘의 가장 큰 차이는 부끄러움을 아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 간도특설대의 활동에 대해 아무런 반성도 사죄도 없었던 백선엽은 전쟁영웅이 되었다지만 그것이 애국인지 개인의 영달을 위한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짐작되는 것 아니겠는가.
흠없이 완벽한 사람이 위인인가, 생각해 볼 일이다.
병원에 있으니 종일 멍...할뿐. 아이구야. 운동해야것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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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ka 2020-07-13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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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진실을 알다. 새창으로 보기
국민티비를 통해서 '간도특설대'에 대해서 처음알게 되었다. 조선인들 구성된 친일토벌부대! 그 존재를 대학에서 역사를 전공하면서도 알지 못했다. 단순히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일본군에서 몇명이 있는 정도로만 생각했던 나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중에서 너무도 충격적인 것은, 간도특설대라는 친일부대의 존재만이 아니었다. 일본인이면서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중국의 항일부대를 위해서 탄약 10만발을 차에 실고 위험을 무릎쓰고 중국항일부대를 찾아왔다가 결국 자결을 해야했던 이다 스케오의 삶과 간도협조회의 김동환의 삶이 너무도 대비되었다. 누구는 평화를 위해서 조국 일본을 등지고 목숨을 걸고 항일부대를 찾아오다 죽었는데, 누구는 변절하여 자신의 조국은 일본이라며, 목숨걸고 항일부대에 침투하여 그들을 와해시키려다 죽었다. 한국민족 대 일본민족의 싸움으로 항일운동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되는 두사람의 삶이었다.
이러한 대비는 상당부분 베일에 싸인 간도특설대의 며면에서 드러난다. 다른 소수민족으로 구성된 부대들이 일제의 패망이 눈에 보이자, 일본인 상관을 죽이는 반란을 일으켰는데, 간도특설대의 조선인들은 그러지 않았다. 질서정연하게 후퇴하였고, 자신의 상관인 일본인에 대한 예우를 깍듯이 하면서 해산하였다. 특히 백선엽은 소네하라 분단장이 한푼의 돈도 없는 것을 알고는 모친이 준돈이라며 300원이라는 큰돈을 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창씨개명을 시라카와 요시노리로 정한 백선엽은 뼈속까지 일본인이었던 것인가?
우리에게 가장충격적이고 가장 비극적인 일은 간도특설대의 이들 간부들이 우리군의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광복군의 정통성을 이어야하는 한국군이 이들에 의해서 더럽혀진 것이다. 백선엽은 대한민국 육군 참모총장이 되고, 신현준은 해병대를 창설한다. 그밖에 정일권 김백일등의 친일 전력자들이 우리군에 있었다. 지하에 계신 김좌진장군, 홍범도 장군은 이러한 우리의 현실을 어떻게 받이실 것인가!
역사쿠데타가 일어나는 현실속에서 과연 우리는 삐뚤어진 현실을 어떻게 바로잡을 것인지, 많은 과제를 우리에게 안겨준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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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나루 2015-11-06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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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도특설대 / 김효순 새창으로 보기 구매
"일제에 대한 저항, 조선인 자치 추구, 사회주의혁명 노선의 수용 여부를 놓고 다양한 흐름이 존재"하던 만주의 조선인 사회는 1931년 9월 18일에 벌어진 만주사변을 계기로 "친일과 반일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몰렸다."(158) 조선인 항일 운동가들은 코민테른의 1국 1당제에 따른 중국공산당 입당 지시와 친일파 모임인 '간도협조회'의 회유와 모략이라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설상가상으로 중국 공산당 내부의 친일 첩자를 둘러싸고 벌어진 반민생단 투쟁은 "어처구니없게도 일본의 특무조직이나 밀정이 아니라 조선인 항일 혁명가를 주요 투쟁 대상으로 삼았다."(117) 분파 숙청이 외부 투쟁을 압도한 상황에서 "민생단 혐의를 뒤집어쓴 사람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죽음, 변절, 은신 같은 몇 가지 방법밖에 없었다."(118)
"동만주 지역에서 작전을 펴다가 1943년 말 러허 성으로 이동해 팔로군을 비롯한 중국인 항일 부대 토벌에 투입됐고, 나중에는 철석부대 산하로 편입돼 독립보병대로 활동"(18)한 간도특설대는 이러한 배경 위에서 탄생했다. 조선인들이 본격적으로 간도특설대에 배치된 시기는 '빗질 작전'이나 '말파리 작전'으로 불린 노조에 부대의 대토벌로 간도 지역의 무장 항일운동이 사실상 막을 내린 뒤였다. 그러나 현장지휘관의 즉결처분권을 뜻하는 임진격살(臨陣格殺) 제도를 패망까지 유지한 만주국은 설립부터 해체까지 줄곧 전시 상태였다. "만주국의 역사는 바로 항일 무장 세력에 대한 '토벌'의 기록임과 동시에, 그것에 맞서 투쟁한 '반토벌'의 기록"(183)인 것이다.
초대 해병대 사령관을 지낸 신현준에게는 "일본군 부대에 통역으로 들어갈 때나, 펑텐 군관학교에 들어갈 때나, 간도특설대 창설에 몸담을 때나 심적인 부담을 느낀 흔적"(38)이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펑톈 군관학교 5기 출신인 정일권은 "만주국에서 옌지 헌병대장 등을 지냈고 일제 패망 때 소련군에 체포돼 시베리아로 이송되던 중 탈주해 남한으로 왔다.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박정희 정권에서 국무총리, 국회의장 등을 역임한다."(162) 백선엽이 간도특설대에 부임한 것은 1943년 2월이었으며, 그는 "항일연군이란 표현을 거의 쓰지 않고 게릴라라는 용어를 고집했다.'(228) 그의 창씨명인 시리키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우연인지 모르지만,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폭탄투척 의거 때 중상을 입고 26일 뒤 숨진 상하이파견군 사령관의 이름"(363)이었다.
간도특설대에서 복무한 조선인들은 "일본군이나 만군 장교로 가는 길에 위화감을 갖지 않았다." "일제 군국주의 체제 아래서 군 장교의 위상과 권한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높았"으며(38) 장교 임관은 입신양명의 보증수표였다. 간도특설대 대원 중에 만주의 치안 숙정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훈장을 받은 이들은 175명에 달하며, "그중 조선인이 167명, 일본인이 8명이었다."(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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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na35 2016-04-08 공감(2)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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