希修 < '영성'? '깨달음'? '道'? >
'영성', '깨달음', '道' 같은 단어들은 그야말로 텅 빈 기표가 된 것 같다. 말하는 이마다 뜻하는 바가 각기 다르고, 때로는 그저 신비주의만 풍길 뿐 자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본인 스스로도 설명을 못 하니. 그런 것들이 상식이나 논리의 차원을 초월하기에 언어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해도 설명이 아예 불가능하다면, '벌거벗은 임금님의 멋진 옷' 같은 詐欺나 환상/망상과 어떻게 구분하겠는지. 그래서, 어디까지나 나의 현재 이해 수준에서의 초기불교 관점을 소개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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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은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지혜 계발의 조건이지 지혜 자체는 아님)에 수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side effect일 뿐이고 지혜와는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는 초기불교와 달리, 타인의 심리가 어떤 상태인지, 기가 몸안 어디서 어떻게 막혀 있는지, 어디에 어떤 龍 혹은 귀신이 있는지 등을 보는 것, 특수한 감각이나 질병 치유 능력을 '영성', '깨달음', '道'라고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한 번 재배하고 나면 땅의 힘을 소진시켜 몇 년간 땅을 쉬게 해야 한다는 인삼을 매일 먹어 가며 건강/젊음에 집착하는, 마치 보톡스 중독자의 젊음 집착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그 이기적 욕심 ('無爲', '無心', '대자연의 섭리'에 모두 거스르는)은 보지 못 한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조차 보지 못 하는 수련법이라면, 그 어떤 신통력/특이공이 가능한들 그걸 '기술' 아닌 '영성', '깨달음', '道'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런지 나는 회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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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들은 자기 내부의 '참 나 (true self)'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데, 결국 인도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이 그 뿌리.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佛性'이라고 단어만 바꿨고. 각 존재 하나 하나가 神 (Consciousness)의 일부 (프랙탈 개념)인데 '자신이 神이라는 사실' (혹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에 그 망각만 일깨우면 된다는 얘기. 그렇기에 Advaita 혹은 Nondualism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통에서의 수행이라는 것은 '이승에 국한된 자아인 ego'가 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I am'을 되뇌임으로써 잠자고 있는 神性/佛性을 깨우는 것. 그리고 이런 철학을 이어 받은 뉴에이지는 미국에서 자기계발과 결합하여 "너는 신이기 때문에 너 자신의 감정을 신뢰해야 하고, 너는 신이기 때문에 니가 스스로를 믿기만 하면 며칠만에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라는 현대판 기복신앙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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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처님은, self의 관점이나 no self의 관점에서 매사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직 skillful-unskillful과 cause-effect의 두 관점에서만 생각하라고 하셨다.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팔정도 (초기불교에서 '道'는 팔정도를 가리킬 뿐 '대자연의 신비/섭리'가 아님)의 전체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은 이렇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어디 한 번 보자'의 단계를 거쳐 '아~ 이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구나! 그게 바로 이 얘기였구나! 이제 보니 진짜네!'하고 direct knowledge를 얻는 것을 말한다. 45년간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사성제라는 단어로 대표하기도 하고, 그러나 핵심 교리는 12연기이기에, "사성제를 깨닫는다", "12연기를 깨닫는다"고 표현해도 틀린 얘기는 아닌데, 암튼 중요한 것은 현상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발견 혹은 확인하는 것 - 단순히 논리적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말해, 신비적인 게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신의 가르침은 "쥔 주먹"이 아니라 "편 손바닥" 같은 것이어서, 비밀스러운 것도 신비적인 것도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Direct knowledge까지 얻고 난 후! 모든 관념과 노력마저도 놓는 것은 '윤회라고 불리는 강의 건너편=해탈에 다다랐으니 이제 뗏목에서 내림'인 것이고. (무조건 생각/이성을 버리라고 말하는 다른 전통들과 달리,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하기 전에 생각/분별을 포기하면 평범한 인간보다도 의식수준이 오히려 더 낮아져 축생으로 윤회할 뿐이라고 아비담마는 가르친다.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정심은 동물의 마인드일 뿐 '영적인' 것이 아님.) 요약하여, 선정의 도움을 받아 지혜를 계발( =탐진치 제거)해 나가다 보면 direct knowledge를 거쳐 해탈하는 것이고, 신통력은 지혜나 해탈과는 별개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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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깨달음'을 초기불교에선 4수준으로 나누는데, 첫번째 수준의 깨달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 이해가 필수) 없이 선정만 닦아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 무색계에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몸이 없어 영원에 가까운 그 세계의 미아가 되는 형국이 됨. 그 이후로는 아래 차원으로 떨어질 테고. 지적 이해나 분별력/통찰력 계발 없이 선정만 닦는 어리석음에 동반되는 첫째 위험. 둘째 위험은 走火入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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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facebook.com/photo.php?fbid=938130396559044&id=100010862771229&set=a.906304756408275&source=48&ref=bookmar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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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통력은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지혜 계발의 조건이지 지혜 자체는 아님)에 수반될 수도 안 될 수도 있는 side effect일 뿐이고 지혜와는 무관하다고 분명하게 못을 박고 있는 초기불교와 달리, 타인의 심리가 어떤 상태인지, 기가 몸안 어디서 어떻게 막혀 있는지, 어디에 어떤 龍 혹은 귀신이 있는지 등을 보는 것, 특수한 감각이나 질병 치유 능력을 '영성', '깨달음', '道'라고부르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그들도, 한 번 재배하고 나면 땅의 힘을 소진시켜 몇 년간 땅을 쉬게 해야 한다는 인삼을 매일 먹어 가며 건강/젊음에 집착하는, 마치 보톡스 중독자의 젊음 집착과도 전혀 다르지 않은 자기 자신의 그 이기적 욕심 ('無爲', '無心', '대자연의 섭리'에 모두 거스르는)은 보지 못 한다. 이렇듯 자신의 욕망조차 보지 못 하는 수련법이라면, 그 어떤 신통력/특이공이 가능한들 그걸 '기술' 아닌 '영성', '깨달음', '道'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 있을런지 나는 회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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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어떤 이들은 자기 내부의 '참 나 (true self)'를 찾는 것이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데, 결국 인도 베다전통에서 말하는 브라만-아트만이 그 뿌리. 대승불교에서는 이것을 '佛性'이라고 단어만 바꿨고. 각 존재 하나 하나가 神 (Consciousness)의 일부 (프랙탈 개념)인데 '자신이 神이라는 사실' (혹은 '자신이 본래 부처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기에 그 망각만 일깨우면 된다는 얘기. 그렇기에 Advaita 혹은 Nondualism이라고도 불리는 이 전통에서의 수행이라는 것은 '이승에 국한된 자아인 ego'가 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I am'을 되뇌임으로써 잠자고 있는 神性/佛性을 깨우는 것. 그리고 이런 철학을 이어 받은 뉴에이지는 미국에서 자기계발과 결합하여 "너는 신이기 때문에 너 자신의 감정을 신뢰해야 하고, 너는 신이기 때문에 니가 스스로를 믿기만 하면 며칠만에 백만장자도 될 수 있다!"라는 현대판 기복신앙을 낳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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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부처님은, self의 관점이나 no self의 관점에서 매사를 생각하는 일을 그만두고 오직 skillful-unskillful과 cause-effect의 두 관점에서만 생각하라고 하셨다. 초기불교에서의 '깨달음'이란, 팔정도 (초기불교에서 '道'는 팔정도를 가리킬 뿐 '대자연의 신비/섭리'가 아님)의 전체 과정을 차근차근 밟아가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즉, '부처님은 이렇다고 했는데 진짜 그런지 안 그런지 어디 한 번 보자'의 단계를 거쳐 '아~ 이래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하셨구나! 그게 바로 이 얘기였구나! 이제 보니 진짜네!'하고 direct knowledge를 얻는 것을 말한다. 45년간 부처님이 남긴 가르침을 사성제라는 단어로 대표하기도 하고, 그러나 핵심 교리는 12연기이기에, "사성제를 깨닫는다", "12연기를 깨닫는다"고 표현해도 틀린 얘기는 아닌데, 암튼 중요한 것은 현상 속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재발견 혹은 확인하는 것 - 단순히 논리적 이해에서 그치지 않고. 다시 말해, 신비적인 게 전혀 아니라는 얘기다. (당신의 가르침은 "쥔 주먹"이 아니라 "편 손바닥" 같은 것이어서, 비밀스러운 것도 신비적인 것도 없다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Direct knowledge까지 얻고 난 후! 모든 관념과 노력마저도 놓는 것은 '윤회라고 불리는 강의 건너편=해탈에 다다랐으니 이제 뗏목에서 내림'인 것이고. (무조건 생각/이성을 버리라고 말하는 다른 전통들과 달리, 강의 건너편에 도달도 하기 전에 생각/분별을 포기하면 평범한 인간보다도 의식수준이 오히려 더 낮아져 축생으로 윤회할 뿐이라고 아비담마는 가르친다.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정심은 동물의 마인드일 뿐 '영적인' 것이 아님.) 요약하여, 선정의 도움을 받아 지혜를 계발( =탐진치 제거)해 나가다 보면 direct knowledge를 거쳐 해탈하는 것이고, 신통력은 지혜나 해탈과는 별개라는 것이 초기불교의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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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깨달음'을 초기불교에선 4수준으로 나누는데, 첫번째 수준의 깨달음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지적 이해가 필수) 없이 선정만 닦아 무색계에 태어날 경우, 무색계에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몸이 없어 영원에 가까운 그 세계의 미아가 되는 형국이 됨. 그 이후로는 아래 차원으로 떨어질 테고. 지적 이해나 분별력/통찰력 계발 없이 선정만 닦는 어리석음에 동반되는 첫째 위험. 둘째 위험은 走火入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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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통은 불교라는 단어를 들으면 '자비'를 가장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불교에서 '자비'는 업에 대한 정확한 이해에 달린 것이며, '선행'이나 '사랑'이라는 의미로 흔히 오해!하는 '자비'는 우리를 해탈시켜 주지 못 함. 탐과 진도 어리석음/치에서 기인하고 해탈 직전의 최후/최고 차원에까지 남아 있는 것 역시 어리석음과 들뜸. 그렇기에 해탈은 궁극적으로 '지혜'의 계발에 달려 있음.
(2) '지혜'의 정확한 의미는, 흔히 생각하듯 '보고도 못 본 척, 알아도 모르는 척, 이길 수 있지만 져 주는' 그런 condescending한 처세술이 아니라, '탐진치 없는 분별력/통찰력'을 뜻함. '생각 없음'이 미덕이 아니고 무조건 '긍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도 미혹/망상/게으름이며, '해로운 마음부수'에 물들지 않은 생각/사유인가?가 중요한 것. (https://www.facebook.com/photo.php?fbid=942321206139963&set=a.906304756408275&type=3&theater)
(3) 모든 존재가 각자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한 최대 '피해자'가 되며 그 누구도 자기 업의 결과를 비껴갈 수 없다는 이 사실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바로 세상 모든 존재들에 대한 '자비'의 근원. Compassion이라는 것은 환자를 대하는 의사의 마음과도 같다고 틱낫한스님은 말씀하셨는데, 상대의 어리석음=병균을 어리석음=병균이라 보아야 상대의 질병=고통에 도움을 줄 수 있지, 상대의 어리석음을 부인/합리화해 주는 人情은 '자비'가 아님. 아기 잃은 젊은 어머니가 울며 석가모니 부처님을 찾아왔을 때 부처님이 하신 일은, 아기를 살려 주거나 함께 울어 주거나 그 여인을 따뜻하게 위로해 준 것이 아니라, "마을에 내려가 일가친척 아무도 죽은 적 없는 집에서 겨자씨를 얻어 오라"고 말한 것.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 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해탈 후 돌아가실 때까지 무려 45년간 온갖 오해와 모욕 속에서도 끊임없이 가르침을 펼친 것. 이런 것이 바로 부처님의 '자비'.
(4) 분별력/통찰력 없이 마음이 무디고 게으른 데에서 기인하는 '좋은 게 좋은 거' 식의 평정심/人情은 불교에선 오히려 '악'. (불교에서 '선'/'악' 개념은 해탈에 도움이 되는가?, 즉 지혜가 그 기준.) 살면서 지은 과보는 현생에서든 내생에서든 받게 되지만, 어느 차원/세상으로 윤회하느냐는 죽을 때의 의식상태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다고 하는데, '분별력/통찰력 없는 평온'은 惡處로의 윤회를 이끈다고. 숨거두는 순간까지 욕심/집착이나 증오/원한을 마음에 품고서 죽는 것이 물론 최악이고, 생전에 지혜를 안 닦아 정신이 흐린 상태로 '평온'하게 죽는 것도 악처로 윤회한다고. (실제로 대부분의 인간이 다음 번에 축생으로 태어난다 함.) 분별력/통찰력이 남아 있을 때 선정에 들어 그 상태에서 죽거나, '내 몸 = 나'라는 집착을 놓고서 몸의 감각이 사라지고 숨이 끊어져 가는 것을 관찰/관조하면서 눈감으면 이상적. (평소 수행 안 했는데 임종 닥쳐 갑자기 이게 될 리는 물론 만무.) 그러므로 임종이 가까운 환자 곁에서 울거나 소란/심란하게 하면 안 된다고.
(5) '축생'하면 우린 보통 포유류나 조류만 생각하지만, 글자 그대로 모든 형태/종류의 생명체를 전부 합해야.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이 얼마나 드물고 귀한 기회인지 알 수 있음.
(6) 의식은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에 묶이지 않기에, 인간으로 살면서도 선정 (정신의 집중으로 인한 고요함. 분별력/통찰력 계발의 조건)을 통해 다른 차원을 경험할 수 있다고. 다만, 자신의 근기를 실제로 극복하고서 한 차원 상승하여 윤회하기는 단순 '경험'보다 훨씬 어려우며, 해탈은 궁극적으로 선정 아닌 지혜에 달려 있음. 어쩌면 저 31개 차원들이 물리적으로 서로 동떨어진 공간에 존재하다기보다 라디오 주파수들처럼 겹쳐서 존재하는데 인간의 감각+의식으로는 다른 차원을 감지 못 하는 것일 뿐인지도. 똑같이 인간계에 살아도 보다 높은 수준의 의식을 유지하며 사는 사람이 '우월'하고, 낮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보다 높은 의식 수준의 생명을 죽이는 죄가 더 무거움.
(7) 눈에 보이는 인간/동물 이외의 존재들을 무조건 神/靈이라고 우린 부르지만, 어느 특정 神/靈이 저 많은 차원들 중 대체 어느 차원의 존재인지 그 누구도 알 방법이 없음. 어떤 무당/종교가 말하는 神/靈이 실은 인간보다도 저열한 존재인 아수라/아귀일 수도 있는 것이고, 인간보다는 좀 '우월한' 존재라 해도 여전히 인간처럼 감각적 욕망의 노예일 뿐인 그런 '허영 덩어리'의 神/靈일 수도 있는 것. 그러니, 神/靈과 소통할 수 있는 靈媒 (medium, channeler)라고 해서 평범한 인간보다 '영적으로 우월한' 존재도 아니고, 그런 '능력'이나 神/靈 숭배가 지혜/해탈에 도움이 되는 것도 전혀 아님. 소위 말하는 영적 체험과 신통력은 선정의 side effect ('지혜'의 side effect도 아닌 '선정'의 side effect)이며 전생과 관련있을 뿐 지혜 자체와는 무관하니, 영적 체험이나 신통력에 아무 의미도 두지 말 것을 아비담마는 강조. ('영성'이라는 것에 대해 신비주의적인 생각을 갖고 있으면, 잔재주로 사람 현혹하는 사이비에 넘어가거나 주화입마 걸리기 십상.)
(8) 암튼 초기불교에 의하면, 내게 잘못한 이를 내가 용서해 준다고 해서 그가 그 악업으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아니고 제사를 지내 준다고 해서 좋은 곳으로 윤회하는 것도 아니며, 업과 윤회에 영향을 끼치지 못 함. 그러니 각자 자기 수행에 집중하라고, 수행보다 더 큰 '선업'은 없다고 초기불교는 가르침. 무려 부처님조차 타인을 구해 줄 수 없다고, 당신을 구원하는 건 오로지 당신 자신의 수행뿐이라 하셨음.
(9) 중국 도교에만 있는 줄 알았던 龍이 불교에도 나오니 재밌는데, #5 인간계 바로 위 #6 매트릭스인 사대왕천 신들이 龍을 지배한다고. (기공하시는 분들은 용을 키우네 뭐네 이런 말들을 실제로 하심. 그땐 뭔소린가 했었음.) 또 어떤 분 말씀으로는 陰陽 원리는 욕계에서만 작용한다고.
6You, 崔明淑 and 4 others
5 comments
Hanjin Kang
명쾌합니다! 아직도 불교 공부하려면 한자를 잘하고 불교한자를 제대로 익혀야한다고 믿는 분들이 태반이니... 한국어로 초기불교 소개하시는 분들도 결국 한자어에 의존 안 할수는 없는 노릇이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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