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6

2010 "어느 시대냐" 日정부, 나카소네 전 총리 장례때 국립대 조기 게양, 묵념 요구 논란

 "어느 시대냐" 日정부, 나카소네 전 총리 장례때 국립대 조기 게양, 묵념 요구 논란




"어느 시대냐" 日정부, 나카소네 전 총리 장례때 국립대 조기 게양, 묵념 요구 논란이영희 입력 2020.10.15. 12:02 수정 2020.10.15. 14:39 댓글 136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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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일 장례식 맞춰 조의 요청 공문 하달
국립대교수들, "각자 조의 표하면 될 일"
일본학술회의 개입 이어 교육통제 논란


일본 정부가 오는 17일 열리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장례식 때 국립대 등에 조기 게양과 묵념으로 조의를 표하라고 요구해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에 반대하는 학자들을 임명에서 배제한 '일본학술회의' 사건에 이어 정부의 또 다른 "사상 통제 시도"라는 비판이 현장에서 쏟아지고 있다.

지난해 별세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일본 총리. 사진은 1986년 7월 도쿄 나가타초(永田町)의 자민당 본부에서 자민당의 중의원과 참의원(상하원) 동시선거 압승 소식에 활짝 웃는 모습. [교도=연합뉴스]

지난해 11월 사망한 나카소네 전 총리의 정부·자민당 합동장(葬)은 당초 올해 3월 열릴 예정이었으니,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이달 17일로 연기됐다.

14일 교도통신 등 일본 언론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합동장 당일에 정부 각 부처가 조기를 게양하고 오후 2시 10분에 합동 묵념을 하기로 지난 2일 결정했다. 이어 관계기관 등에도 같은 방법으로 애도의 뜻을 표해달라 요청하기로 했다.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같은 날 하기우다 고이치(萩生田光一) 문부과학상에게 관련 내용을 문서로 통보했다. 하기우다 문부과학상은 가토 장관에게 받은 문서를 첨부해 국립대와 소관 독립행정법인 등에 "이런 취지에 따라 잘 대처해달라"는 통지를 보냈다.

문부과학성은 또 도도부현(都道府縣·광역자치단체) 교육위원회에도 "참고로 알려드립니다"라며 가토 장관 명의 문서를 보내면서 기초자치단체 교육위원회에도 이를 주지시켜달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장(國葬)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하지만 정부로부터 '조의 표명' 통보를 받은 교육 현장에서는 "도대체 어느 시대냐", "과도한 대응이다" 등의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오사카대의 한 교수는 마이니치 신문에 "사상 통제다. 국장(國葬)도 아닌데 단순히 '국립'이라는 이름이 붙는 조직에 근무한다는 것만으로 따라야 할 이유가 없다"고 반발했다.

홋카이도대의 한 50대 남성 교수도 "정부의 대응은 분명히 과잉"이라며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일본에 있어 큰 존재였을지 모르나, 개인이 각자 조의를 표하면 된다"고 지적했다.

히로타 데루유키(広田照幸) 일본대 교수(교육학)도 교도통신에 "지금 시대에 걸맞지 않은 조치"라며 "정치인 장례식에 정부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는지 폭넓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대학에도 '손타쿠' 문화 퍼질 것"
이같은 반발은 최근 일본 사회를 들끓게 한 '일본학술회의' 문제와도 관련이 깊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총리는 지난 1일 학술회의 추천 후보 105명 중 정부 정책에 반대한 적이 있는 6명을 이 단체 회원으로 임명하지 않아 "학문의 자유를 침해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반정부 학자들을 일본학술회의 회원 임명에서 탈락시켜 비판받고 있는 스가 요시히데 일본 총리. [AP=연합뉴스]

마고메 다카시(駒込武) 교토대 교수(교육학)는 마이니치 신문에 "일본학술회의 문제도 그렇지만, 스가 내각은 '국가의 명령에 순종하는 체제'로 나라를 바꾸려 한다"고 지적했다.

류큐대의 한 교수도 "학문과 사상의 자유 등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구조를 파괴하는 행위"라며 "이제 대학이 정부에 '손타쿠(忖度·윗사람의 뜻을 헤아려 행동)'하는 풍조가 점점 강해질 것"이라고 우려했다.

정부의 이같은 조치는 법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오사카부 교육위원회는 문부과학성의 통지를 받고 협의한 결과 특정 정당에 대한 지지와 정치적 활동을 금지한 교육기본법 14조에 저촉될 우려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오사카부 소속 고등학교나 대학 등 교육기관에 이같은 권고사항을 전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나카소네 전 일본 총리는 '전후 정치 총결산'을 내걸고 1980년대 장기 집권한 자민당 소속 정치인으로, 일본 우파 정치인의 원조 격으로 꼽힌다.

앞서 일본에서는 나카소네 전 총리 장례식 비용과 관련해서도 논란이 일었다. 총 1억 9천만엔(약 20억원)의 장례식 비용 중 절반을 정부 예산으로 지출하는 데 대해 "코로나19 상황에서 정치인 장례식에 거액의 세금을 쓰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지적이 야당을 중심으로 나왔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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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나카소네도 신민족주의 보수주의자이었지만, 그의 대륙 정책은 '관계 강화'이었습니다. 그는 1980년대 중반에 한국에 차관을 제공하여 대외 부채가 많았던 한국 경제의 '구원 투수'로 나서기도 하고, 등소평과 친선관계를 구축해 대중국 지원 정책을 펴기도 하고...아베 도당의 훨씬 더 미국 편향적인, 훨씬 더 대륙을 소외시키는 외교와는 격이 전혀 달랐죠. 지금 일본은 동북아에서 사실 거의 '자초한 고립'이 된 상태인데, 그때는 동북아 개발의 '견인차'와 같은 역할을 자임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이미 일본으로서 회복이 불가능한 '과거'죠....
그런데 이 '조의 강요', 이 명치시대 식의 '관존민비' 풍토를 보면 드는 생각인데...한국에서도 적폐정권이 뿌리를 강고하게 내렸다면 지금 아마도 이랬을 것입니다. 한일 극우 뿌리는 하나, 그리고 정신 상태도 다 엇비슷합니다. 박근혜씨 정권이나 그 정권을 이을 다른 극우들도, 교수고 뭐고 국가의 모든 피고용자들에게는 이런 걸 충분히 강요할 수 있었던 위인들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지금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는 것은 촛불의 덕이지요.
그러니까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님이나 다른 일각의 논자들은 극우들의 '구악'과 자유주의 '신악' (?)을 자꾸 '같다'는 식으로 말씀하시지만, 그게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입니다. 극우도 자유주의자들도 '보수'긴 하지만, '같은 것'은 아니죠. 여러 중요한 부분에 있어서는 다르기도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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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曽根康弘死去であらためて振り返る従軍慰安婦 中曽根の「慰安所つくった」証言と「土人女を集め慰安所開設」防衛省文書
2019.11.29 06:57
左・中曽根元首相の“手記”が収録されている『終りなき海軍』(文化放送開発センター)/右・中曽根元首相が慰安所を設置させたことを示す資料



 中曽根康弘元首相が、101歳で死去した。メディアでは、国鉄民営化や日米安保体制強化などを功績として振り返っているが、負の側面も非常に大きい政治家ある。

 たとえば、現在の日本社会にもつながる右傾化・歴史修正主義の台頭や新自由主義路線の端緒となり、日本の戦後民主主義政治を歪めた張本人だ。こうした功罪の罪の部分も検証されるべきだが、なかでも本人が一度は告白しながら途中からダンマリを貫いたこの問題はきっちり検証するべきだろう。

 そう、日本軍の従軍慰安婦問題だ。

 中曽根元首相が戦時中、海軍主計士官(将校)の地位にあったことは有名だが、その当時、自ら慰安所の設置に積極的に関わり、慰安婦の調達までしていたことを、戦後に自分の“手記”の中で自ら書いているのだ。

 しかも、これは中曽根元首相の思い違いでも妄想でもない。防衛省にも中曽根元首相の“慰安所づくり”証言を裏付ける戦時資料が存在している。

 本サイトでは、2014年夏、朝日新聞の慰安婦記事バッシングが盛り上がり勢いづいた右派の、慰安婦の存在や日本軍の関与までなかったことにしようという歴史修正主義の動きに抵抗するため、この中曽根“慰安所づくり”証言とそれを裏付ける戦時資料について詳しく報じた。(ちなみに、フジ産経グループの総帥だった鹿内信隆にも中曽根元首相と同様に、慰安所づくりへの関与発言があり、やはり本サイトが記事にしている(https://lite-ra.com/2014/09/post-440.html)。

 中曽根元首相の証言は、従軍慰安婦に日本軍が組織的に関与していたことを物語る重大な証言だったが、手記出版から30年ほど経ってからこの記述がクローズアップされると、中曽根元首相は一転否定、その後ダンマリを通してきた。

 中曽根元首相には、従軍慰安婦問題とりわけ日本軍の関与について、自らの口で明らかにする歴史的責任があったはずだが、それはかなわなくなってしまった。

 中曽根“慰安所づくり”証言とそれを裏付ける戦時資料から、従軍慰安婦の存在と日本軍関与が事実であることを報じた記事を再録する。「慰安婦は存在しなかった」というデマが大手を振って罷り通るいま、あらためてご一読いただきたい。
編集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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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曽根元首相が「土人女を集め慰安所開設」! 防衛省に戦時記録が

 朝日新聞の慰安婦訂正記事で右派陣営が勢いづいている。「朝日は責任をとれ!」と気勢をあげているのはもちろん、自民党の政務調査会議は河野談話も朝日報道が前提だとして「河野談話を撤回し、新たな官房長官談話を!」とぶちあげた。また、同党の議連では朝日新聞関係者、さらに当時の河野洋平元官房長を国会に招致して聴取すべき、という意見までとび出している。
 
 だが、朝日や河野洋平氏を聴取するなら、もっと先に国会に呼ぶべき人物がいる。それは第71代日本国内閣総理大臣の中曽根康弘だ。
 
 大勲位まで受章した元首相をなぜ従軍慰安婦問題で審訊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か。それは先の大戦で海軍主計士官(将校)の地位にあった中曽根元首相が、自ら慰安所の設置に積極的に関わり、慰安婦の調達までしていたからだ。


中曽根が手記で「原住民の女を襲う」部下のために「苦心して、慰安所をつくってやった」と自慢

 何かというと左翼のでっちあげとわめきたてて自分たちを正当化しようとする保守派やネトウヨのみなさんには申し訳ないが、これは捏造でも推測でもない。中曽根元首相は自分の“手記”の中で自らこの事実を書いており、しかも、防衛省にそれを裏付ける戦時資料が存在していたのだ。そこには、部隊の隊員によるこんな文言が書かれていた。

「主計長の取計で土人女を集め慰安所を開設」

 まず、“手記”の話からいこう。中曽根が慰安所設立の事実を書いたのは『終りなき海軍』(松浦敬紀・編/文化放送開発センター/1978)。同書は戦中海軍に所属し、戦後各界で活躍した成功者たちが思い出話を語った本だが、その中で、海軍主計士官だった中曽根も文章を寄稿していた。

 タイトルは「二十三歳で三千人の総指揮官」。当時、インドネシアの設営部隊の主計長だった中曽根が、荒ぶる部下たちを引き連れながら、いかに人心掌握し戦場を乗り切ったかという自慢話だが、その中にこんな一文があったのだ。

「三千人からの大部隊だ。やがて、原住民の女を襲うものやバクチにふけるものも出てきた。そんなかれらのために、私は苦心して、慰安所をつくってやったこともある。かれらは、ちょうど、たらいのなかにひしめくイモであった。卑屈なところもあるし、ずるい面もあった。そして、私自身、そのイモの一つとして、ゴシゴシともまれてきたのである」

 おそらく当時、中曽根は後に慰安婦が問題になるなんてまったく想像していなかったのだろう。その重大性に気づかず、自慢話として得々と「原住民の女を襲う」部下のために「苦心して、慰安所をつくってやった」と書いていたのだ。

 ところが、それから30年たって、この記述が問題になる。2007年3月23日、中曽根が日本外国特派員協会で会見をした際、アメリカの新聞社の特派員からこの記載を追及されたのだ。


防衛省に、中曽根「慰安所づくり」証言を裏付ける客観的証拠が!

 このとき、中曽根元首相は「旧海軍時代に慰安所をつくった記憶はない」「事実と違う。海軍の工員の休憩と娯楽の施設をつくってほしいということだったので作ってやった」「具体的なことは知らない」と完全否定している。

 だが、これは明らかに嘘、ごまかしである。そもそもたんなる休憩や娯楽のための施設なら、「苦心」する必要があるとは思えないし、中曽根元首相の弁明通りなら、『終りなき海軍』の“手記”のほうがデタラメということになってしまう。だが、同書の編者である松浦敬紀はその10年ほど前、「フライデー」の取材に「中曽根さん本人が原稿を2本かいてきて、どちらかを採用してくれと送ってきた」「本にする段階で本人もゲラのチェックをしている」と明言しているのだ。

 いや、そんなことよりなにより、中曽根元首相の慰安所開設には、冒頭に書いたように、客観的な証拠が存在する。 

 国家機関である防衛省のシンクタンク・防衛研究所の戦史研究センター。戦史資料の編纂・管理や、調査研究を行っている研究機関だが、そこにその証拠資料があった。

 資料名は「海軍航空基地第2設営班資料」(以下、「2設営班資料」)。第2設営班とは、中曽根が当時、主計長を務めていた海軍設営班矢部班のことで、飛行場設営を目的にダバオ(フィリピン)、タラカン(インドネシア)を経てバリクパパン(インドネシア)に転戦した部隊だが、この資料は同部隊の工営長だった宮地米三氏がそれを記録し、寄贈。同センターが歴史的価値のある資料として保存していたものだ。
 
 本サイトは今回、同センターでその「第2設営班資料」を閲覧し、コピーを入手した。

 宮地氏の自筆で書かれたと思われるその資料にはまず、「第二設営班 矢部部隊」という表題の後、「一 編制」という項目があり、幹部の名前が列挙されていた。すると、そこには「主計長 海軍主計中尉 中曽根康弘」という記載。そして、資料を読み進めていくと、「5、設営後の状況」という項目にこんな記録が載っていたのだ。

「バリクパパンでは◯(判読不可)場の整備一応完了して、攻撃機による蘭印作戦が始まると工員連中ゆるみが出た風で又日本出港の際約二ヶ月の旨申し渡しありし為皈(ママ)心矢の如く気荒くなり日本人同志けんか等起る様になる
 主計長の取計で土人女を集め慰安所を開設気持の緩和に非常に効果ありたり」

 さらに「第2設営班資料」のなかには、慰安所設置を指し示す証拠となる、宮地氏の残したものと思われる手書きの地図も存在していた。


インドネシアで民家だった場所を、日本軍が接収し慰安所に作り変え!

 それはバリクパパン「上陸時」の様子(昭和17年1月24日)と、設営「完了時」の様子(17年1月24日〜同年3月24日)を表す2点の地図資料だ。バリクパパン市街から約20km地点のこの地図から、中曽根たちが設営したと思われるマンガル飛行場滑走路のそばを流れるマンガル河を中心に民家が点在し、またマンガル河から離れた場所に民家が一軒だけポツリと孤立していることがわかる。

 そして2つの地図を見比べてみると、“ある変化”があることに気づく。「上陸時」から「完了時」の地図の変化のひとつとして、その孤立した民家の周辺に、設営班が便所をおいたことが記されている。さらにその場所には「上陸時」にはなかった「設営班慰安所」との記載が書き加えられている。

 つまり、上陸時に民家だった場所を日本軍が接収し、「設営班慰安所」に変えてしまったと思われるのだ。 

 もはや言い逃れのしようはないだろう。「主計長 海軍主計中尉 中曽根康弘」「主計長の取計で土人女を集め慰安所を開設」という記載。それを裏付ける地図。中曽根元首相が自分で手記に書いたこととぴったり符号するではないか。

 しかも、「土人女を集め」という表現を読む限り、中曽根主計長が命じて、現地で女性を調達したとしか考えられないのである。

 実際、インドネシアでは多くの女性が慰安婦として働かされており、彼女たちは日本軍に命じられた村の役人の方針で、どんなことをさせられるのかもしらないまま日本兵の引率のもと連れ去られたことを証言している。そして、年端も行かない女性達がいきなり慰安所で複数の日本兵に犯されたという悲惨な体験が語られ、その中にはこのパリクパパンの慰安所に連れてこられたという女性もいる。
 
 つまり、中曽根首相がこうした“強制連行”に関与していた可能性も十分あるのだ。

 朝日新聞の訂正で勢いづいた保守・右派勢力は銃剣を突きつけて連行したという吉田証言が虚偽だったという一事をもって、強制連行そのものを否定しようとしている。さらには従軍慰安婦への軍の関与そのものを否定するかのような虚偽を平気でふりまいている。

 しかし、もし、強制連行はない、軍の関与もないといいはるならここはやはり、「土人女を集め」たという元主計長・中曽根康弘を国会に喚問して、どう「集め」たのか、「苦心」とはなんだったのか証言させるべきではないのか。一メディアの誤報をあげつらうより、そのほうがはるかに「歴史の検証」になると思うのだが、いかがだろう。

エンジョウトオル

最終更新:2019.11.29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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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소네 야스히로 사망으로 다시 되돌아 종군 위안부 나카소네의 "위안소 만든 '증언'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 개설"방위성 문서 2019.11.29 06:57 나카소네 야스히로 사망으로 다시 되돌아 종군 위안부 나카소네의 "위안소 만든 '증언'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 개설"국방부 문서의 이미지 1 왼쪽 · 나카소네 전 총리의 "수기"가수록되어있는 "끝없는 해군"(문화 방송 개발 센터) / 오른쪽 · 나카소네 전 총리가 위안소를 설치 한 것을 나타내는 자료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101 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미디어에서는 국철 민영화와 일미 안보 체제 강화 등을 공적으로 되돌아 있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매우 큰 정치인 이다.  예를 들어, 현재의 일본 사회에도 도움 우경화 · 역사 수정 주의의 대두와 신자유주의 노선의 단초가되어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 정치를 왜곡 한 장본인이다. 이러한 공과 죄 부분도 검증되어야 할 것이지만, 그 중에서도 본인이 한 번 고백하면서 도중에 침묵으로 일관 한이 문제는 제대로 검증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일본군의 종군 위안부 문제 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전쟁 중 해군 주계 사관 (장교)의 지위에 있었던 것은 유명하지만, 그 당시 자신 위안소의 설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위안부 의 조달까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후에 자신의 "수기"에서 스스로 쓰고있다.  게다가 이것은 나카소네 전 총리의 오해도 망상 도 아니다. 방위성 도 나카소네 전 총리의 "위안소 만들기"증언을 뒷받침 전시 자료가 존재하고있다.  본 사이트에서는 2014 년 여름, 아사히 신문 위안부 기사 학대 가 급증 기세가 오른 우파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군의 관여까지 없었던 것으로 하자는 역사 수정주의의 움직임에 저항하기 위해이 나카소네 "위안소 만들기"증언과 그것을 뒷받침 전시 자료에 대한 자세한 내용 보도했다. (참고로, 후지 산케이 그룹의 총수이었다 시카 나이信隆도 나카소네 전 총리와 마찬가지로 위안소 만들기에 참여 발언 역시 본 사이트가 기사로하고있다 ( https://lite-ra.com/ 2014 / 09 / post-440.html ).  나카소네 전 총리의 증언은 종군 위안부 일본군이 조직적으로 관여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언했지만, 수기 출판에서 30 년 정도 지나고 나서이 기술이 클로즈업되면 나카소네 전 총리는 일전 부정 이후 침묵을 통해왔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종군 위안부 문제 특히 일본군의 관여에 대해 자신의 입으로 계시 역사적 책임이 있었을 것이다하지만 이길 수 없게되어 버렸다.  나카소네 "위안소 만들기"증언과 그것을 뒷받침 전시 자료에서 종군 위안부의 존재와 일본군 참여가 사실임을 보도 한 기사를 재록한다. "위안부는 존재하지 않았다"라는 루머 가 활개를 치고罷り通る지금 다시 읽어 주셨으면한다. ( 편집부 ) ************ ● 나카소네 전 총리가 "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 개설」! 방위성에 전시 기록  아사히 신문 위안부 정정 기사에서 우파 진영이 기세가있다. "아사히는 책임을 취할!」라고 기세를 올리고있는 것은 물론, 자민당 정무 조사 회의는 고노 담화도 아사히 보도가 전제 이라며"고노 담화를 철회하고 새로운 관방 장관 담화를! "고 얼룩 올렸다. 또한 같은 당 의원 연맹은 아사히 신문 관계자, 또한 당시의 고노 요헤이 전 관방 장을 국회 에 유치하여 청취해야한다는 의견까지 돌출하고있다.    하지만 아사히와 고노 요헤이 씨를 청취한다면 더 먼저 국회에 불러야 인물이있다. 그것은 제 71 대 일본 총리 나카소네 야스히로이다.    큰 훈 위까지 수여 한 전 총리를 왜 종군 위안부 문제에審訊해야 하는가. 그것은 앞의 대전에 해군 주계 사관 (장교)의 지위에 있었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자신 위안소의 설치에 적극적으로 참여 위안부 조달까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카소네이 수기에서 "원주민 여자를 덮치는"부하를 위해 '고심하고 위안소를 만들어 줬다 "고 자랑  무엇인가하면 좌익의 날조와わめきたて자신들을 정당화하려고하는 보수 주의자와 우익 의 여러분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것은 날조 하지만 추측도 아니다. 나카소네 전 총리는 자신의 "수기"에서 스스로이 사실을 쓰고, 게다가 방위성 그것을 뒷받침 전시 자료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부대의 대원에 의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회계사의 제거 계에서 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를 개설"  첫째, "수기"의 이야기에서 가자. 나카소네가 위안소 설립 사실을 쓴 것은 "끝없는 해군"(마츠우라 敬紀 · 편 / 문화 방송 개발 센터 / 1978). 이 책은 전쟁 중 해군에 소속 전후 각계에서 활약 한 성공자들이 추억담을 이야기 한 책이지만, 그 속에서 해군 경리 부장 사관이었던 나카소네도 글을 기고했다.  제목은 "스물 세 살에 삼천 명의 총 지휘관" 당시 인도네시아 설영 부대의 회계사였던 나카소네가 황인 체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하면서 어떻게 인심 장악 전장을 극복 했는가하는 자랑이지만, 그 안에 이런 문장이 있었던 것이다. "삼천의 대부대이다. 결국 원주민 여자를 덮치는 것이나 도박에 탐닉도 나왔다. 그런 그들을 위해 내가 고심하고 위안소를 만들어 준 것도 있다. 그들은 그냥 통 속에 북적 거리는 고구마였다. 비굴 한 곳도 있고, 교활한 면도 있었다. 그리고 저도 그 고구마의 하나로 쓱쓱과 휩쓸 온 것이다 "  아마 당시 나카소네는 이후 위안부 문제가 될 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심각성을 눈치 채지 못하고, 자랑으로 득과 "출신의 여자를 덮치는"부하를 위해 '고심하고 위안소를 만들어 주었다 "라고 써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30 년이 지난,이 기술이 문제가된다. 2007 년 3 월 23 일, 나카소네 일본 외국 특파원 협회에서 회견 을했을 때, 미국 의 신문사의 특파원에서이 언급을 추구 한 것이다. 방위성 나카소네 "위안소 만들기"증언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가!  이 때, 나카소네 전 총리는 "전 해군 시대에 위안소를 만든 기억은 없다" "사실과 다르다. 해군의 공원의 휴식과 오락 시설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 었으므로 만들어 주었다" " 구체적인 것은 모른다 "고 완전 부정하고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히 거짓말, 속임수이다. 원래 단순한 휴식과 오락을위한 시설이라면,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며, 나카소네 전 총리의 해명대로라면 "끝없는 해군"의 "수기"쪽이 엉터리라는 것이되어 버린다. 하지만이 책의 편자 인 마츠우라敬紀는 10 년 전 ' 프라이데이 '의 취재에 "나카소네 씨 본인이 원고를 2 개 헤엄 와서 중 하나를 채택 해달라고 보내온」 「책 이 단계에서 본인도 게라의 체크를하고있다 "고 언급하고있다.  아니, 그런 것보다 무엇보다 나카소네 전 총리의 위안소 개설은 처음에 쓴 것처럼 객관적인 증거가 존재한다.   국가 기관인 국방부의 싱크 탱크 인 방위 연구소의 전사 연구 센터. 전사 자료의 편찬 · 관리 및 조사 연구를 실시하고있는 연구 기관이지만, 거기에 증거 자료가 있었다.  책 제목은 "해군 항공 기지 제 2 설영 반 자료」(이하, 「2 설영 반 자료"). 제 2 설영 반은 나카소네가 당시 회계사를 맡고 있던 해군 설영 반 야베 반의하여 비행장 설영을 목적으로 다바오 (필리핀), 타라칸 (인도네시아)를 거쳐 발릭 파판 (인도네시아)에 전전 부대 하지만이 문서는이 부대의 공営長했다 미야지米三씨가 그것을 기록하고 기부했습니다. 동 센터가 역사적 가치가있는 자료로 저장하고 있던 것이다.    본 사이트는 이번이 센터에서 그 "제 2 설영 반 자료"를 검색하고 복사를 입수했다.  미야지 씨의 자필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그 문서에는 먼저 '제 2 설영 반 야베 부대'이라는 제목의 후 "한 편제 '라는 항목이 있고 간부의 이름이 열거되어 있었다. 그러자 거기에는 "회계사 해군 주계 중위 나카소네 야스히로"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내용을 계속 읽어 나가면, "5 설영 후의 상황 '이라는 항목에 이런 기록이 실려 있었던 것이다. "발릭 파판에서 ◯ (판독 불가) 주차장의 정비 일단 완료하여 공격기에 의한 네덜란드 령 동인도 전역이 시작되면 공원 무리 느슨 나온 바람에 또 일본 출항시 약 두 달의 취지申し渡し있습니다し為皈(엄마 )心矢와 같이 신경 나빠 일본인 동지 싸움 등 벌어지는하게된다  회계사의 제거 계에서 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를 개설 마음의 완화에 매우 효과가たり"  또한 "제 2 설영 반 자료」속에는 위안소 설치를 지시 표지, 미야지 씨가 남긴 것으로 보인다 필기지도도 존재하고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서 민가했던 장소를 일본군이 접수 한 위안소 만들고 변화!  그것은 발릭 파판 "착륙시」의 모습 (1942 년 1 월 24 일)과 설영"완료 "의 모습 (17 년 1 월 24 일 ~ 동년 3 월 24 일)을 나타내는 두 점의지도 자료 다. 발릭 파판 도심에서 약 20km 지점이지도에서 나카소네들이 설영 한 것으로 보인다 화로 비행장 활주로 옆을 흐르는 화로 강을 중심으로 민가가 점재하고 또한 화로 강에서 떨어진 곳에 민가가 한 채 그냥 불쑥 고립되어있는 것을 알 수있다.  그리고 두지도를 비교해 보면, "있는 변화"가 있음을 알게된다. "착륙시"에서 "완료"지도 변화의 하나로서 그 고립 된 민가 주변에 설영 반 변소를 둔 것이 기록되어있다. 또한 그 곳에는 "상륙시 '는 없었다"설영 반 위안소'라는 기재가 향상되고있다.  즉, 상륙시에 민가했던 장소를 일본군이 접수하고 "설영 반 위안소 '로 바꿔 버렸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더 이상 발뺌의 시도는 없을 것이다. "회계사 해군 주계 중위 나카소네 야스히로」 「회계사의 제거 계에서 토인 여자를 모으고 위안소를 개설」라고 설명했다. 그것을 뒷받침하는지도. 나카소네 전 총리가 직접 수기로 쓴 것으로 딱 부호하는 것은 아닐까.  게다가 "토인 여자를 모은 '라는 표현을 읽는 한 나카소네 회계사가 명하여 현지에서 여성을 조달했다고 밖에 생각할 수없는 것이다.  실제로 인도네시아에서는 많은 여성들이 위안부로 일하게되고있어 그녀들은 일본군에게 명하신 마을 관리 정책에서 어떤 일을시킬 수 있는지도 모르는 채 일본군의 인솔하에 납치 되었음을 증언하고있다. 그리고年端도 가지 않는 여성들이 갑자기 위안소에서 여러 일본 병에 감염되었다는 비참한 경험이 말해 그 동안이 빠리쿠빠빤 위안소에 끌려했다는 여성도있다.    즉, 나카소네 총리가 이런 '강제 연행'에 참여했을 가능성도 충분히있는 것이다.  아사히 신문의 정정에 기세가 오른 보수 · 우파 세력은 총칼을들이 대며 연행했다는 요시다 증언이 허위 였다는 일사를 가지고 강제 연행 자체를 부정하려고하고있다. 또 종군 위안부에 대한 군의 관여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 허위를 태연하게 뿌리고있다.  그러나 만약 강제 연행 아니라, 군의 개입도 없다라고는 る다면 여기 역시 "토인 여자를 모은"고한다 원래 회계사 · 나카소네 야스히로을 국회에 소환하여 어떻게 "모아"했다 인지, "고심"이란 무엇 이었는가 증언시켜야 아닌가. 한 매체의 오보를 あげつらう보다 그 편이 훨씬 "역사의 검증」이된다고 생각하지만, 어떨까. ( 엔 조우 토오루 ) 최종 업데이트 : 2019.11.29 0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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