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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에서 <정감록>, 다시 동학으로 -- 나의 역사학 3
● 어느 모로 보아도 부실하기만 한 한 역사가의 신변잡담입니다. 글은 길어도 쓸만한 내용은 한 줄도 발견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저의 잡담에 관심을 가진 분만 잠깐 들여다보시기 바랍니다. 백승종 삼가.
1.
아무래도 ‘나의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다. 살면서 나는 점이나 예언 같은 것을 믿은 적은 없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나고 난 다음, 지난날을 뒤돌아보면 굵게 패인 자국이 뚜렷한 선으로 남아 있기는 하다. 하필 왜, 내가 걸어간 길이 이런 모양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일까.
왜 그렇게 되었을까? 요령 있는 설명을 하기가 어렵다. 그럴 때 운명이란 낱말을 슬쩍 꺼내 들면 그 이상 어떤 귀찮은 질문도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운명이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설명하기 어렵고 귀찮은 일이 생기면 운명의 그늘 뒤로 숨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다.
동학은 내 삶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1976년 고향에서 어느 대학교에 들어갈 때 나는 평생 동학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자 다짐했다. 군사독재의 사슬을 끊어버리려면 1894년 나의 고장을 불태운 동학농민운동/혁명의 체험을 되살리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나는 대학에 입학하던 그해에 그런 공부를 하기가 당장에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의 어설픈 짐작과 기대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 대학에는 동학을 연구하는 교수님이 없었다. 이런저런 경로로 알아본 결과, 그 무렵 우리나라 어느 대학에도 이 분야에 관한 스승으로 모실 분이 안 계신 것 같았다.
내 나름으로 운동/혁명의 중심지를 찾아가서 수소문해보았는데, 결과는 역시 실망스러웠다. 눈길을 끄는 문헌 자료도 보이지 않았고, 운동/혁명의 경험을 구술해줄 분도 발견하기 어려웠다. 동학은 일종의 사회적 금기였던 것이다. 나는 크게 실망했다.
우회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골의 대학 초년생에 불과한 내가 동학 연구의 새길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나는 멀리 돌아가는 길을 고민했다. 다행히도 그 대학 사학과에는 양반사회를 깊이 연구하는 교수님이 계셨다. 그분의 상세하고 정밀한 연구를 통해서 나는 조선사회의 구조를 깊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면 나중에는 조선사회의 문제점이 무엇이었는지도 정확하게 이해할 날이 올 것이라는 믿음이 자라났다. 그런 다음이라면 내힘으로 다시 동학을 연구할 수 있는 때가 오고야 말 것이다. 나는 그렇게 굳게 믿고 공부를 열심히 하였다.
2.
양반전문가인 교수님은 기꺼이 나의 스승님이 되어주셨다. 누구보다 성품이 엄격하고 “까탈스럽지”만 언제나 정직하고 소탈하셨으며 한없이 너그럽고 자애로우신 분이기도 하셨다. 나는 스승님을 내 아버님처럼 곁에서 모셨다. 자질구레한 잔심부름부터 날마다 연구실을 깨끗이 쓸고 닦는 일, 스승님의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베끼고 정리하고, 스승님의 원고를 몇 번이고 다시 정서하고 교정보는 일까지 기쁜 마음으로 했다. 사적인 조수 노릇을 하며 나는 그 대학을 졸업하였다. 스승님과의 인연은 ‘매우 깊었다’는 한마디로는 도저히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스승님의 학문과 인품을 절대적으로 믿고 존경하였으나 대학을 졸업할 때가 되자, 나는 그분의 곁을 떠나기로 결심하였다. “옛날에도 선비는 때가 되면 스승을 바꿔 책상을 지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법이 있었네. 너무 서운해하지 마소!” 스승님은 그런 말씀으로 잠시의 이별을 받아들이셨다.
서울에 있는 대학원으로 가서 나는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의 꿈은 색달랐다고 볼 수 있다. 대학 시절 스승님 덕분에 조선 사회와 중국의 명청 사회의 특징에 관해서는 기본적인 공부를 적지 않게 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고대사를 어떻게 연구하는지도 나는 몰랐고, 근현대사도 무슨 자료를 어떻게 다루는지를 거의 모르는 상태였다. 전문적인 학자들의 지도를 받음으로써 나는 한국사 공부의 폭을 넓히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보통은 대학 시절에는 폭넓게 공부하다가 대학원에 진학하면 좁은 전공을 골라서 그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한다. 그러나 나는 그 역순을 밟은 것이었다. 부족한 사람의 엉뚱한 선택이었다.
어디서나 우여곡절은 있는 법이다. 나의 삶이라고 다를 리가 없었다. 그래도 서울의 대학원에서도 운이 좋았던지 큰 스승님을 여럿 뵈었다. 재능도 있고 마음씨도 넉넉한 동료와 선후배도 만났다. 그런데 대학원을 마친 다음, 내 인생에는 약간의 조정 기간이 찾아왔다. 그러고는 홀연히 독일로 먼 길을 떠나게 되었다.
여러 가지 우연이 겹치고 또 쌓이면서 내 인생은 마치 스스로 길을 터 나가는 듯 보였다. 행운이 있었던지, 나는 첫 번째 책을 쓰게 되엇는데 조선 시대 어느 면(面)의 사회사였다. 그 책은 처음부터 독일어로 지은 것이었고 우리 말로는 작업일지만 작성하였다. 그런데 좋은 인연이 있어서 서울의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준다고 했다. 어렵게 독일어로 쓴 책을 제 손으로 번역하려니 난감한 대목도 적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빛을 본 <<조선사회사연구>>(일조각, 1996)의 간행이 한동안 나를 기쁘게 하였다. 큰 틀에서 보면 그 시점까지 나는 근 20년 동안 양반사회를 이해하려고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았던 것이다.
3.
그러나 동학을 잊어버린 채 마냥 시간을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1994년 박사학위 논문이 끝나자 나는 동학으로 되돌아갈 방법을 찾아 나섰다. 그때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이 바로 <정감록>이었다.
그 당시 <정감록>에 관심을 가진 역사가는 세상 어디에도 없었다. 이유는 한둘이 아니었다. 첫째, 이 책자는 정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이본이 각지 에 널리 퍼져 있는 데다 내용도 종잡기 어려웠다. 엄밀하게 말해서 풍수신앙과 음양오행설과 점성술 등이 잡다하게 뒤섞인 잡술 서적에 지나지 않았다.
둘째, 조선 시대의 역사 기록을 뒤져 보아도 <정감록>을 우호적이고 애정 어린 관점에서 서술한 내용은 단 한 줄도 보이지 않는다. 엄숙한 역사학자들이 보기에 이 책자가 잠시의 잡담거리는 될지언정 연구대상으로 삼기에는 너무도 사소해 보였다. <정감록>은 역사가 쓴 잡기장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달랐다. 나는 <정감록>을 통하여 조선의 국시(國是)인 성리학, 즉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한 거대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고 가정하였다. 이미 서양의 여러 가지 저항운동과 중국사에서 이따금 등장한 비밀결사에 관하여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그런 가정을 세울 수 있었다.
그때 마침 한국에서는 각종 역사문헌의 디지털 작업이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중이었다. 그때까지는 쉽게 구해 보지 못한 귀중한 자료를 어디서든지 검색할 수 있게 연구 환경이 바뀌고 있었다. 나의 <정감록> 연구에도 서광이 보였던 것이다.
운이 좋게도 독일연구재단(DFG)이 <정감록> 연구의 가치를 인정해주었다. 재단에서는 6년 동안 연구비를 주기로 결정하였다. 이른바 “하빌리타치온(정교수 자격논문) 연구비”를 얻은 덕분에, 나는 편한 마음으로 공부에 몰두할 수 있었다. 그렇게 2년의 세월이 지났을 때 갑자기 신변에 변화가 일어났다. 서울의 어느 대학에서 오라는 소식이 있었다. 나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으나 그때 독일연구재단과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편안한 독일보다는 불편해도 한국이 더 좋았다.
서울의 대학교수 생활은 분주한 편이었다. 나의 <정감록> 연구는 앞으로 나아가기보다 뒷걸음을 쳤다고 하겠다. 그래도 몇 편의 논문을 발표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 당시 내 주변에는 누구도 이 연구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분들이 보기에 나라고 하는 사람은 특이하고 이상한 연구주제를 만지작거리는 한 명의 이방인에 지나지 않았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나는 내 길을 조용히 가면 그뿐이다. 지금도 나는 그런 태도로 살지만 그때라고 해서 크게 다를 이유가 없었다.
4.
서울의 대학 생활은 짧게 지나갔다. 좋은 동료들과 제자들이 많았으나 나를 실은 인생의 배는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그 문제와는 별도로 <정감록>이란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룰 기회는 다시 왔다. 얼마 후 나는 서울의 한 출판사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대표와 특별한 인연이 있었다. 덕분에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그 대표는 출판계의 걸물이었다.
그분의 교섭 덕분에 어느 일간지에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주었다. 50회에 걸쳐서 <정감록>에 관한 글을 연재할 수 있었다. 이 연재가 끝나자 출판사 대표의 권고로 <정감록>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했다. 한두 권이 아니었다. 차츰 출판 계획이 확장되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도 훨씬 많은 책자가 연달아서 탄생했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2006년부터 시작해서 내가 출판사를 떠난 뒤에도 한동안 <정감록>에 관한 나의 책들이 행렬을 길게 이어갔다.
-<<한국의 예언문화사>>, 2006(문화관광부선정 우수학술도서)
-<<鄭鑑錄>>, 松本眞輔 역, 일본 勉誠出版, 2011(한국 예언문화사의 일어 번역본)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 2006(KBS ‘TV 책을 말하다’ 주제 북)
-<<읽기와 쓰기>>, 서강대학교 교양국어 교재편찬위원회, 서강대학교출판부, 2008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 2007(문화관광부 우수 교양도서)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 18세기 조선의 문화투쟁>>, 2011(제52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상)
-<<Indigo+ing>>, 32호(2011년 11월호)
-<<정감록 미스터리>>, 2012
-<<조선의 멋진 신세계>>, 김양식 외, 서해문집, 2017(공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들녘, 2019
10권의 책이 나의 인생에 독특한 색채를 선사했다. 그 가운데는 공저 1권도 있고, 대학교재 1권, 청소년 잡지 1권도 포함된다. 내 책을 외국어로 번역한 것도 한 권이 끼어있다. <정감록>에 관한 나의 저술은 모두 6권이었다. 너무 많은 책을 낸 것도 같은 느낌이 든다. 하지만 책자의 성격을 곰곰 따져보면 이것으로도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분수에 어긋난 나의 탐심일지도 모르겠다.
5.
그러나 책의 권수가 많을 뿐이었다. 필생의 업적이라고 내세울 책은 단 한 권도 쓰지 못했다. 능력이 부족하고 게으른 탓이었다. 그런 약점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여러 해 동안 심중을 지배한 주제들이었던 만큼 저술의 특징을 간단히 적어두려고 한다. 다른 분들에게는 소음이나 다름 없는 행위겠지만 저자인 나에게는 이 또한 진지한 삶의 기록이다.
<<한국의 예언문화사>>는 <정감록>의 역사를 고대부터 현대까지 정리한 것이다. 달리 말해 ‘정치적 예언’의 역사를 내 나름으로 고찰한 것이었다. 독자들의 반응도 좋은 편이었다. KBS의 인기 프로그램이던 ‘TV 책을 말하다’에서 이 책을 특집으로 다루었고, 문화관광부는 우수학술도서로 선정하였다.
<정감록>이라는 정치적 예언서에 주목해 역사 연구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은 거였다. 또, 조선 후기에 <정감록>을 빌미로 일어난 역모사건들에 정치사회 및 문화적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에서 지나치게 호평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 <정감록>이 조선 후기에 시작된 신종교 운동의 출발점이었다는 나의 주장에도 많은 이가 동의하였다는 점에서 분수 바깥의 개가(凱歌)였다.
<<鄭鑑錄>>은 바로 위에서 말한 책자(한국의 예언문화사)를 일본어로 번역한 것이다. 역자는 마츠모토 선생으로 그 당시 경희대학교에서 일본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우연한 기회에 서로 알게 되었는데, 선생이 나의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고 계셔서 깜짝 놀랐다. 일본어 판에는 약간 오자도 있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원본인 한국어 판보다 글의 짜임새도 훌륭하고 편집도 잘 된 것 같았다. 문화국가 일본의 높은 수준을 보는 것 같아서 부끄러운 심정이 들기도 하였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진실게임>>은 출판사의 공이 많이 들어간 책이었다. 삽화도 박시백 화백에게 부탁해서 특별하게 꾸몄고, 책의 구성에도 심혈을 기울여주었다. 이것은 영조와 정조시대에 일어난 <정감록> 역모 사건 가운데 세 가지를 선택하여 특이한 방식으로 구성한 것이었다. 어느 평론가는 차라리 소설이라는 제목을 붙였으면 일반 시민이 더욱더 사랑했을 것이라고 평했다. 어느 역사소설가는 서술 내용을 검토해 보면 주인공의 어투에 별 차이가 없어서 아쉽다고 말했다. 아마 옳은 지적일 것이다. 이 책을 쓰면서 나는 ‘역사적 상상력’을 마음껏 동원할 뿐이었다. 그런 점에서는 실험적인 저작이었다고 본다. 그러나 나라는 사람이 소설을 쓰는 전문작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KBS의 ‘TV 책을 말하다’에서 이 책 또한 특별히 대접해주어서 고마웠다.
<<읽기와 쓰기>>는 서울의 어느 대학교 국어교재이다. <<정감록 역모사건>>의 한 대목을 옮겨 예문으로 실었다. 역사에 관한 저자(‘나’)의 관점이 독특하다고 여겨서 그렇게 한 모양이었다. 저자로서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었다.
그 이후 어떤 분은 나의 역사 서술 기법을 포스트 모던하다고 분류하고 자신의 석사논문 주제로 삼기도 하였다. 나의 역사 쓰기 실험은 일부 사람들 사이에서 상당한 관심거리가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었든가 싶다.
<<예언가 우리 역사를 말하다>>는 때로는 <정감록>에 포함되기도 하고 때로는 독립적 예언서로 취급되기도 한 여러 종류의 정치적 예언서를 일일이 검토한 거였다. 정치적 예언서의 전파 과정, 내용의 차이, 저자를 확정하는 문제 등을 폭넓게 다루었다. 이 책에서 나는 예언서의 진위를 따지는 작업이 별로 의미있는 일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 대신에 조선 후기에 ‘평민지식인’들이 이와 같은 예언서를 동원해서 그 시대의 희망 또는 절망을 표현하였다는 점을 좀 더 유심히 검토하고자 했다. 평자들은 나의 이러한 노력에 일리가 있다고 보았던 것 같다. 문화관광부의 우수교양도서로 이 책을 뽑아주어서 감사했다. 과연 이 책이 시민들의 교양 증진에 이바지할 지는 잘 모르겠으나, 평자들의 따뜻한 평가에 감사드리는 마음은 감출 수 없다.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은 회심의 역작이라는 평가를 얻었다. 부산의 어떤 신문에서도 ‘올해의 책’으로 뽑았고, 서울에서도 한국출판문화상(학술상)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나의 능력은 부실하지만 여러분이 호평을 아끼지 않았으니 크나큰 영광이었다. 이 책이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두어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서술의 참신함이었다. 일반인에는 이름조차 생소한 강이천이라는 선비를 책의 주인공으로 삼아서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정조와 대비시킨 점이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둘째, 바로 이책에서 저자가 시종일관 강조하는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이 책의 배경을 장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문화투쟁(Kulturkampf, culture war)’이라는 개념이 그것이다. 끝으로, 이 책은 정조시대에 일어난 한 가지 작은 사건을 다루었으나, ‘서구의 침입’이라는 조선후기의 핵심적인 사회적 과제를 염두에 두었다. 그런 이유로 식자들은 이책에 대해 찬사를 베풀었다. 물론 내가 쓴 책인데 과연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을 리 없다. 이책을 조금이라도 싫어하거나 비판하고 싶은 이는 더욱더 많으리라 생각한다. 그렇게 비판하는 것은 그분들의 자유가 아니겠는가.
<<인디고잉>>(32호)은 <<정조와 불량선비 강이천>>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주제와 변주’라는 강연 및 토론 시리즈 기획의 일부였다. 나는 청년들의 부름에 따라 부산으로 내려가서 유쾌하고도 생산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사회정의를 희구하는 청년들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 기억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이다.
<<정감록 미스터리>>는 <정감록>에 관한 나의 마지막 책이었다.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묶어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것이었다. 조금 깊이 생각하면, 아직도 <정감록>에 관해 더 하고 싶은 말이 남아 있다. 하지만 이쯤에서 멈추어도 섭섭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는 다른 연구자들이 더욱 깊고 다양한 <정감록> 연구를 하실 줄로 믿는다.
<<조선의 멋지 신세계>>에는 두 편의 글을 싣게 되었는데, 송찬섭 교수님과의 좋은 인연 때문이었다. 한 편은 <정감록>에 관해 쓴 것이고, 다른 하나는 ‘미륵신앙’을 다룬 글이다. 두 편 모두 내 생각에는 <정감록> 공부의 연장선상에서 태어난 것이었다. 그런 흐름이 결국 하나로 합쳐져서 동학 사상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는 무엇인가. 긴 방랑을 마치고 마침내 내가 동학으로 귀환했음을 알리는 책자였다고나 할까. 여러 해 전의 일로 기억하는데, 서울 영등포에 있는 ‘하자센터’의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덕택에 나는 청소년들 앞에서 동학에 관한 강의를 했다. 모두 네 번에 걸친 연속강의였는데, 들녘 출판사의 도움으로 아담한 소책자가 되어 나타났다.
스스로 생각하면 이런 기연이 없다. 군사독재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며 나는 역사공부를 시작했고, 그때 속으로 다짐한 연구주제가 동학이었다. 1976년에 첫발을 뗀 탐색의 길이었다. 수십 년 세월의 풍파 속에서도 동학의 길이 끊어질 듯하다가도 이어지기를 여러 번. 드디어는 손바닥만한 한 권의 소책자가 되었다. 인연으로 치면 감개무량하나, 책의 내용은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간단하였다.
한 마디로, “관계의 질적 전환”이 핵심이었다. 먼 길을 돌아서 도달한 나의 역사적 발견이 그 말 속에 들어있다. 인간과 사물, 인간과 우주의 관계에는 질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되었다.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 선생의 가르침은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6.
18세기에 <정감록>을 매개로 미미하게 시작되었던 한 가지 정치사회적인 움직임이 있었다. 나는 그 흐름을 따라가며 조선사회에 ‘대항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과정을 탐색하였다. 그런 공부를 계속하다 보니, 우리 사회에는 “생태적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 생각을 조금 더 밀고 나가자 뜻밖에도 새로운 기치가 멀리서 흔들리며 나를 부르는 것만 같았다.
유럽에서 발생하여 여러 단계를 거치며 발달한 근대적 역사학을 나는 “지배/소유의 역사학”이라 부르고, 앞으로 내가 나아갈 길을 “존재/사랑의 역사학”이라고 구별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존재 또는 사랑의 역사학”이 무엇인가를 나에게 묻고 싶은 분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굳이 설명을 보태자면, 나의 요령 없는 설명이 또 길게 이어질 것 같은 두려움이 든다. 이것은 아마 지루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나의 새로운 역사학이 무엇인가를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지나간 시간을 묵묵히 뒤돌아보며 추수하는 썰물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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