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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순
5 h ·
< “테스형,” 누구를 사회적 발화 주체로 만드는가>
1. 추석 전후해서 가수 나훈아 콘서트에 대한 이야기가 곳곳에 등장한다. 나는 그 프로그램을 보지는 못했다. 그렇지만, 그가 불렀다는 노래 “테스형" (소크라테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뒤이어 “맑스형” 등 다양한 사상가들이 “형”으로 등장하는 포스팅들을 본다 (그런데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너 자신을 알라”는 구절은 노래 가사에 등장하듯 소크라테스가 처음 “툭 뱉고 간 말”이 아니라, 델피 신전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이제 앞으로 얼마나 많은 “형”들이 등장할 것인가.
2. 테스형에 환호하는 현상을 보면서 지금도 여전히 중심적 문제중의 하나인 발화의 주체 (speaking subject)와 발화의 객체 (spoken object)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오랫동안 “유관순 누나”라는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가 있어왔고, 지금은 “유관순 열사”라는 호칭으로 불리곤 한다. 음악회에서 나훈아는 유관순을 여전히 “유관순 누나”라고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이러한 형 또는 누나라는 호칭 방식은 왜 문제인가.
그런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다. 물론 테스형과 유관순 누나는 각기 다른 사회적 함의를 지닌다. 상상의 실험을 해보자. 예를 들어서 내가 만약 데리다 오빠, 푸코 오빠, 아렌트 언니, 또는 안중근 오빠 라는 호칭을 나의 일기장이 아니라, 페북이나 칼럼과 같은 공적 공간에서 지속적으로 반복하여 사용한다면, 그 사상가/운동가에 대한 나의 개인적 호칭은 어떠한 사회정치적 기능을 하게 되는가.
지금 세세하게 그 상이한 함의를 논의하지는 않겠지만, 테스 형/맑스 형과 같은 이러한 호칭 방식은 최소한 세 가지 문제점을 지닌다.
첫째, 발화의 주체를 남성으로 설정하는 것을 자연적인 것으로 만든다.
둘째, 나이에 따른 위계적 관계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강화하고 지속한다.
셋째, 호명되는 사상가들을 사적인 존재로 전이시켜 버림으로써, 그들의 사상적 유산이 지닌 중요한 보편적 함의를 외면하게 한다.
3. 1960년대 이후 공적 영역에 등장한 다양한 사회개혁 운동은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의 주변부에서 ‘발화의 객체’로만 존재해 왔던 사람들이 스스로 ‘발화의 주체’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역사이기도 하다. 민권운동이나 여성운동, 그리고 퀴어 운동은 백인들에 의해서 늘 규정을 받기만 하던 흑인들, 또한 남성들에 의해서 늘 규정 받기만 하던 여성들, 이성애자들에 의해서 규정 받기만 하던 성소수자들이 이제 발화의 주체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회자되는 레토릭들은 발화의 주체가 여전히 남성이며, 나이에 따른 위계주의가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생물학적 관계가 없는 사람끼리 친근성을 드러내는 형태로 자연스럽게 주고받는 이러한 형, 오빠, 누나, 언니, 동생 등의 표현을 듣고 볼 때마다, 그 ‘좋은 의도’에도 불구하고 양가적 감정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호칭 방식이 지극히 사적인 자리에서 통용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적인 담을 넘어서 공적 공간으로 들어가서 문제가 되는 가치관을 확산하는 데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호칭방식은 만나는 사람간의 관계를 젠더나 생물학적 나이, 또는 학연에 의해서 우선적으로 규정함으로서, 한국사회에서 젠더나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서는 우정이나 동료관계가 거의 불가능한 이유가 되기도 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생물학적 가족관계가 아닌 사람들을 이렇게 오빠, 동생, 또는 선후배 등으로 호칭한 적도 없고, 그렇게 불려지는 것도 좋아하지 않는다.
4. 소통의 도구로서의 언어란 무엇인가. 한때 나는 언어란 단지 사람 간의 소통을 위한 중성적 도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단순한 언어이해였다. 그런데 한국어에서 독어로, 그 다음에 영어로 소통의 언어를 바꾸면서, 언어 자체는 결코 중성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하고 또한 이론적으로 배우게 되었다. 언어란 한 사회의 가치관이 주입된 것이며, 그 사회적 가치관이 언어를 통해서 자연적인 것으로 만들어지고 확산된다. 미국 대학에서 처음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한국이나 독일에서와는 달리 미국 대학에서 왜 그렇게 남성중심적 상징 (하나님 아버지 등)이나 남성중심적 대명사들과 명사들 (폴리스맨, 체어맨 등)이 문제라고 하는 것인지 한동안 이해하기 힘들었다. 우리가 논의해야 할 더 중요한 문제들이 많은데, 왜 그렇게 “사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쓰는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니 나의 이 포스팅을 읽으면서, 유행가요에 나오는 별거 아닌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가 라고 하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 나도 그러한 자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배타적 언어(exclusive language)의 문제가 얼마나 복합적인지는 알게 된 지금, 포괄적 언어 (inclusive language)가 왜 중요한지, 그것이 어떻게 사회정치적 함의를 지니는지를 글로 말로 강조하게 되었다. 내가 일하는 대학은 교수의 강의 요목에 반드시 젠더, 인종, 성소수자 등을 배제시키지 않는 포괄적 언어사용 지침을 포함하도록 한다.
5. 한 사회의 변화란 혁명적으로 단숨에 일어나지 않는다. 삶의 모든 영역들에서 크고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야 한다. 법이나 제도 등과 같은 객관적 차원에서는 물론, 의식과 가치관 등에서의 주관적 변화, 또한 개별인들의 의식변화와 집단 들에서의 변화 등 모든 개혁이 일어나야 한다. 수잔 앤소니(Susan Anthony)와 함께 미국 여성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두 명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캐디 스탠톤 (Elizabeth Cady Stanton)이 1895년에 편집하여 출판한 <여성의 성서(The Woman’s Bible)>의 서문에서 한 유명한 말이 있다: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이다.”
여성의 참정권 획득이라는 정치 세계의 변화에 일생 개입했던 캐디 스탠톤이 그의 생애 말년에 비로소 경험하게 된 것은 진정한 사회적 변화는 정치만이 아니라, 종교의 변화, 그리고 집단만이 아니라 개별인들의 의식변화 등 ‘모든 영역’들에서의 변화가 요청된다는 것을 다양한 자리에서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80세가 되던 해인 1895년에 캐디 스탠톤이 이 책을 출판하게 된 이유이다.
6. 한 사회에서 평등과 정의의 원을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 개혁이 지향하는 것이라면, 제도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사소한 것’같이 보이는 우리의 언어 사용의 문제까지 세심하게 생각하면서 변화를 모색해야 한다. 우리의 인식 세계는 단번에 형성되지 않는다. 나 자신의 삶의 여정을 되돌아보아도 그 인식 세계의 전이들을 여러 번 경험했다. 여성, 인종, 또는 성소수자에 대한 나의 인식이 조금씩 변화해 왔던 것이지, 단번에 그 문제들에 대한 지금의 나의 의식이 형성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한국이나 독일에 있을 때는 페미니즘이란 진정한 학문적 주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또한 여성 스스로가 열심히 노력하면 성차별이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미국의 대학에서 처음 성소수자를 대학원 세미나에서 만났을 때, 그가 웬지 이상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휴식 시간에라도 가능하면 멀리 있어야겠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7. 지금 나/우리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내가/우리가 보는 것을 못 본다고 해서, 그런 사람들을 적대시하거나, 지적 우월감을 작동시키거나, 또는 더 나아가서 악마화해서는 안 된다. 생각이 유사하든 상이하든, 우리/그들 모두 이 지구에서 함께 살아가야 하는 “동료 인간”이라는 의식이 모든 사회변혁 운동의 토대가 되는 인간 이해라고 나는 본다.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 그리고 그 상이성을 폭력적으로 행사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동료-인간이라는 이해를 적용시키는 것은 한번 마음먹었다고 작동되지 않는다. 매번 각자가 상기시켜야 하는 과제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의 아닌’ 위계적 가치체계의 구성과 확산에 대한 예민성을 가지는 것— 동료인간으로서의 우리 모두의 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과제를 이루어내기 위해서, 젠더와 나이에 따른 호칭의 구조를 지닌 한국사회에서 더욱더 서로를 '동료 인간'으로서 보고 관계맺는 연습이 부단히 필요하다.
Comments
지희경
갑자기 정신이 확 깹니다. 전혀, 미처 생각지 못한 주제라서요...
좀 더 신중히 생각해보겠습니다~^^
· 5 h
나일경
"모든 개혁은 상호의존적이다"라는 말의 의미가 깊이 와닿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 5 h
Kim Sang Soo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는 너무나 당연한 명제, 이것이 언론 표방 매체들에 의해, 또는 기득권 세력들에 의해 왜곡될 때 가치 혼돈이란 끔찍합니다. 일례로 한국 사회에서 ‘자유’와 ‘보수’가 오남용 되는 것처럼 말이지요. 부패 집단을 가치 집단화로 포장시키는 근본의 착란이 일반화 일상화 된 것인데요. 문제가 아주 심각하다고 봅니다. 대중가수의 ‘테스 형’이야 무지와 억지유머의 혼잡이지만 “보수”니 “자유”의 오용은 책략적이고 사악한 정치지요.
· 5 h
강남순
네, 선생님의 지적하시는 점들에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저도 언론에 등장하는 언어들이 그 의미가 왜곡된 채 마구 사용되는 것을 볼 때마다 참으로 착잡합니다. 언론의 자유를 언론의 무책임성으로 착각하는 듯, 그 어떤 집단보다 철저하게 개념사용을 해야 할 언론이 그 개념들을 오히려 혼돈속에 집어넣곤 합니다. 최근 곳곳에서 회자되는 "선택적 정의"라는 말도 마치 검찰이 특정인을 미리 타겟하여 폭력적으로 파헤치고, 폄하하는 행위들을 마치 '정의' 실현의 한… See more
· 2 h
윤재환
6번에 와서야 비로소 이해하는 폭이 넓어지는 듯 합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세상이 조금 더 보름달처럼 구김없고 밝으며 환해지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 5 h
윤재환
허~걱~?
그렇지 않습니다.… See more
· 53 m
So Young Moon
2004년 열린우리당 국회의원끼리, 국회의원과 보좌관 관계에섳 국회의원과 기자들 사이의 호칭이 ‘형’ 이라고 까댔는데요, 그냥 특정언론이 정부여당이 싫어서 깐거지, 이 호칭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바라볼 시각은 없어서리, ‘소크라테스 형’ 까지 나오는!!!
박근혜 대통령을 ‘누나’로 부르는 정치인 문제도 그냥 유야무야되던~
· 4 h · Edited
강남순
아, 2004년에 그런 일이 있었군요. 다른 나라에서는 찾기 어려운 한국 사회의 독특한 문제들 중 하나가 바로 이 호칭과 관련된 주제들일 것 같습니다. 언론에서 이러한 앞으로도 잘 다루어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 2 h
박연숙
교수님의 문제제기와 담론은 늘 선지자적이고
섬세한 사유의 결이 참 귀하다 생각듭니다. 아름다운 교수님!
· 4 h
강남순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하시니, 추석선물로 받습니다. 감사합니다.🙂
· 2 h
구기욱
저는 제 회사에서 구성원 모두 ‘님’없는 별명 부르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반말이나 하대 같아 불편해 했는데, 지금은 고객들도 별명을 따라 부를 만큼 정착되었습니다.
이 별명 부르기가 확실하게 나이의 권위를 제거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온국민이 지각하지 못한 채 휩쓸릴 때, 호칭의 위험성을 정리하고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 4 h
강남순
회사에서 그런 시도를 하고 계시다니 참 좋네요. 그런 실천을 하시는 분들이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경험을 나누어주셔서 반갑습니다.
· 2 h
김은정
교수님~
의식하고, 연습하고, 적용해야 하는 과제예요.
이미 언어습관이 몸에 배서요😢
요즘 읽은 김하수 교수의 <거리의 언어학>에도 한 장이 '차별하는 언어, 배제하는 사회'였어요.
· 4 h · Edited
강남순
책 제목이 참 흥미롭네요. 언어의 습관이라는 것이 참으로 깊숙하게 다양한 편견을 뿌리내리게 하지요.
· 2 h
Paul Kyung Jung
교수님 , 제가 그동안 미처 생각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일깨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시에 그것이 제 인식의 변화(확장)를 가져옵니다. "위계적 가치체계의 구성과 확산에 대한 예민성을 가지는 것" - 제 무의식을 주관하고 있는 언어체계 속에서 다시한번 더 민감하게 저의 언어사용과 인식에 대해 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 4 h
강남순
선생님뿐 아니라, 저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이 돌아보아야 할 문제인 것 같습니다. 잘 읽어주셔서 반갑고 고마워요.
· 2 h
Lee Joohyuck
한국사회에선 너무 첩첩산중인 문제입니다... 나이 한 살 차이라도 존댓말을 쓰느냐 반말하냐 인사할때 고개 숙였네 아니네 술 먹을때 고개를 꺽네 마네 이런걸 갖고 싸움도 일어나는 사회에서...... 포괄적, 동반자적 호칭과 관계가 상식이 되려면, 윽....
· 4 h
강미숙
저도 가족내 호칭을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있습니다. 테스형도 그냥 웃고 넘어가야 하나 하면서도 어딘가 불편했던 것의 정체를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4 h
강미숙
장정희 저도 비슷한 경험들이 있어요. 근데 남성들 사이에서도 그게 끈끈한(뭔가 비정상적인, 비정량적이고 음험한 느낌을 자아내는 이 낱말을 싫어해요) 연대로 작동하고 동참하지 않으면 불편하게 되더군요. 남녀불문하고 그들끼리의 문법에 동조하지 않거나 배제되는 모두에게 부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 3 h
강남순
강미숙그러셨군요. 불편함의 정체를 조금씩 알아가는 것을 통해서 나/우리가 변해가는 거겠지요.
· 2 h
백성주
이번 명절, 유독 마음의 갈피가 잡히지 않았어요,
"동료인간"으로서 보고, 관계맺는 연습을 부단히해야한다
는 말씀이, 제게 좋은 단초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4 h
Soyeon Kang
지금까지 교수님의 여러 글 중에서도 특히 함께 읽고 나눠야 할 글이라 공유하렵니다. 왜곡된 페미니즘에 대한 올바른 사유뿐만이 아니라 최근 일종의 ‘나훈아 현상’같은 일방적 찬양에 씁쓸했는데 이런 다른 목소리, 다행입니다. 개인적으로 추정만 했던 ‘테스형’의 의미를 교수님 덕분에 알게 되었네요.^^;;; 전 사실 나훈아의 아젠다 자체가 의도적이든 아니든 기득권 카르텔을 건드리는 굉장히 위험한 것이라고 봅니다. 버즈를 위해 기획된... 이 과정에서 3가지 정도의 한국사회 거악을 심화시키는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1) 교수님이 지적한 가족 간 호칭의 문제점, 2) 나훈아 vs. 남진으로 이분화된 경쟁관에 대한 통념 강화, 3) 세간의 관심에 끼어들어 한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소외된 것 같은 천편일률적 문화인식.을 고착화 시키는 거 같아 불편했거든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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