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는 소문과 괴담이던 시절...그들도 정신대라 불렸다
송윤경 기자 - 경향 ‘향이네’ 2020-05-31
“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부끄럽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25일 기자회견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커뮤니티에선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잇달아 공유됐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의 전신)라는 단체명의 ‘정신대’는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짚고 “‘위안부’(피해자)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기자회견 직후 포털사이트엔 ‘정신대 위안부’ 혹은 ‘정신대 위안부 차이’ 등이 자동완성 검색어로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여성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에 집중해 온 시민단체의 이름은 왜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이었을까요. 왜 그동안 상당수 시민들이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하나의 개념으로 여겨왔던 것일까요.
■여성근로정신대
‘여성근로정신대’는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군수산업에서의 노동력 부족 때문에 만든 조직입니다. 한반도에 ‘여자정신근로령’이 내려진 것은 1944년으로, 주로 이 시기에 많은 소녀들이 근로정신대에 동원됐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는 일제강점 말기에 광범위하게 쓰였는데요, 정신대의 ‘정신(挺身)’은 ‘스스로 나서 자신의 몸을 던짐’을 뜻하고 정신대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전시국가 체제에서 정신대는 말하자면 전선 밖에서 전쟁에 임하는 또다른 ‘부대’ 같은 의미의 일반명사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사대’ 혹은 ‘보국대’와도 뉘앙스가 유사합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가 여성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한 ‘여성정신근로대’의 줄임말로서 ‘정신대’를 사용하겠습니다)
증언과 사료에 따르면 여성정신근로대에 동원된 이들은 주로 국민학교 6학년이나 갓 졸업한 소녀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학교 교사나 동네반장, 헌병들은 ‘정신대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돈도 벌 수 있다’는 거짓말로 소녀들을 속였습니다. 또 가족들에겐 소녀들이 정신대 지원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신대에 동원된 소녀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같은 군수회사에 배치되어, 폭행과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가혹한 노동착취에 시달렸습니다. 화장실조차 제때 가기 어려웠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검열을 당했으며, 사고가 발생해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운데)가 지난해 6월 27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호소하고 있다. 도쿄|김진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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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밥 한 끼로는 배가 고파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마시다가 반장한테 ‘도둑이냐’고 발로 차이곤 했어요. 73년이 지나도록 일본은 사죄 한 마디 없는데 눈물로 보내온 이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70여년 한을 어떻게”…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도쿄서 호소’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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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제강점기의 ‘강제징용’ 사안을 생각하면 주로 남성 피해자만 떠오릅니다. 하지만 정신대 여성들 역시 강제로 동원돼, 심각한 노동착취와 폭행에 노출된 점은 같습니다. 1930~40년대 전시 폭력의 여성 피해자가 군 ‘위안부’ 피해자를 뜻하는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사이,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지워졌습니다.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곡괭이를 짚고 서 있는, 강제동원 노동자의 형상은 왜 성인 남성이어야만 하는가? 여성들은 어째서 소녀의 형상으로 표상되어야만 하는가? 좁은 막장 안에서 남편과 함께 채탄 작업을 했던 부인, 비행장 공사장에서 돌을 캐고 나르던 소년은 어디에 있는가?” (‘강제징용? 강제동원?…올바른 기억은 올바른 명명에서 시작된다’ 강정석·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 연구교수)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의해 설치된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당해야 했던 이들을 말합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를 최초로 드러낸 이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전 정대협 대표)입니다. 윤정옥 교수는 해방 직후 학도병 등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돌아왔는데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은 돌아온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서울에 와 보니까 학도병들, 징병 갔던 사람, 강제연행당했던 사람, 다 돌아오잖아. 그런데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는데 여자들 왔다는 얘기는 없잖아. 내가 그때 스무살이니까, 그때 (끌려간 여성이) 43년에 제일 많았고 (끌려간 이들의) 제일 많은 나이가 열일곱살이야. 그러니까 내가 꼭 고 나이라고. (중략) 제일 처음에 내 시작은 그거야.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거. 그때 들은 얘기야. 얘들이 군수공장에 간 게 아니라 사창굴 같은데에 가서…. 그때 한국사람으로서는 상상을 못해. 줄 서 있는 남자들한테 하루종일 당했다, 이 소리를…” (‘얘들, 어떻게 됐나 내 나이 스물, 딱 고 나이라고’ 2001년 ‘여성과 사회’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윤 전 교수는 해방 직후만해도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이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구할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훗날 윤 전 교수 본인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 이런 ‘소문’ 속의 여성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없었습니다.
윤정옥 교수는 1970년대에 센다 가꼬오라는 일본인 기자의 글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접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과거 자신이 학도병들에게서 들은 ‘소문’이 사실규명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1980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최초로 만나게 되는데, 오키나와에서 “인간 기피증”에 걸린 채 사탕수수 밭에 홀로 살던 있던 배봉기 할머니였습니다.
이후 윤 전 교수는 오키나와, 홋카이도, 중국, 태국 등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만나고 증언을 수집했습니다. 윤 전 교수가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은 1990년 ‘한겨레신문’에 연재물로 실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재물의 제목은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입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바로 그해 가을에 조직됐습니다. 여성운동의 대모였던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박순금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 그리고 윤정옥 교수가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습니다.
정대협이 만들어진 이듬해인 1991년 한국 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김학순 할머니였습니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군 위안부 피해 폭로 기자회견을 다룬 기사의 제목은 ‘전선의 노리개 짓밟힌 17세…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 눈물의 폭로’였습니다.
피해자(생존자)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직접 기자회견을 열면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합니다. 정대협은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했고,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힘입어 여러 생존자들이 피해 사실을 직접 신고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보도(경향신문 1991년 8월15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신대’와 ‘위안부’ 혼용된 이유
여성근로정신대를 지칭하는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1991년까지만 해도 학자, 운동가, 기자들도 구분 없이 사용했습니다. 윤정옥 교수의 1990년 연재물 제목은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이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보도의 제목 역시 ‘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입니다.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용은 완전히 지워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를 어렵사리 건져올린 과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해 온 한 학자는 “1937~1938년에 ‘위안부’ 제도가 조직적으로 확산되어 여성들이 끌려가 사라질 때, ‘정신대로 동원됐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당시의 언어를 보면)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말이 잘 안나타난다. 작부, 예기, 종업원 등 그들을 이르는 다양한 명칭이 있었는데 그런 것으로 끌려갔다고 말하면 당시엔 잡혀갔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후 학자들이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당시의 감각대로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몸을 더럽혔더라’ 라고 말이 많이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존재는) 괴담처럼 떠돌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당시엔 어린 미혼여성을 일제가 차출해 간다는 의미의 ‘처녀 공출’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녀 공출’이라는 용어로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즉 ‘노동’이 아닌 성적인 이유로 동원된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으나 입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공통된 용어가 따로 형성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정신대’라는 용어로 대신해 증언했던 겁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90년 정대협이 탄생했습니다. 정의기억연대가 25일 설명자료를 통해 “정대협에 포함된 ‘정신대’는 운동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밝힌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수요시위’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듬해인 1992년부터 열리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이고 증언이 종합되면서부터 학자와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또다른 학자는 “의도적으로 섞었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정대협이란 이름으로 출발하고 그 직후 (정신대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의) 구분을 바로 하게 됐지만, 과거 운동의 역사를 존중해서 정대협이란 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대협이 정신대 문제와 ‘위안부’를 함께 다뤄왔던 단체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는데요, 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했고, 근로정신대 피해 등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단체로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등이 따로 있습니다.

2차 기자회견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제야 알았다면, 그동안 너무 몰랐던 것 아닐까요”
송윤경 기자 - 경향 ‘향이네’ 2020-05-31
“정신대와 위안부가 다르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됐어요. 부끄럽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의 지난 25일 기자회견 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와 온라인커뮤니티에선 이러한 내용의 글이 잇달아 공유됐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이날 기자회견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정의기억연대의 전신)라는 단체명의 ‘정신대’는 “공장에 갔다온 할머니”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짚고 “‘위안부’(피해자)하고는 많이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기자회견 직후 포털사이트엔 ‘정신대 위안부’ 혹은 ‘정신대 위안부 차이’ 등이 자동완성 검색어로 등장했습니다. 그동안 정신대와 ‘위안부’를 혼동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뜻입니다.
여성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어떻게 다를까요. 그리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 해결에 집중해 온 시민단체의 이름은 왜 정대협(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의기억연대 전신)이었을까요. 왜 그동안 상당수 시민들이 근로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를 하나의 개념으로 여겨왔던 것일까요.
■여성근로정신대
‘여성근로정신대’는 중일전쟁·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가 군수산업에서의 노동력 부족 때문에 만든 조직입니다. 한반도에 ‘여자정신근로령’이 내려진 것은 1944년으로, 주로 이 시기에 많은 소녀들이 근로정신대에 동원됐습니다.
‘정신대(挺身隊)’라는 용어는 일제강점 말기에 광범위하게 쓰였는데요, 정신대의 ‘정신(挺身)’은 ‘스스로 나서 자신의 몸을 던짐’을 뜻하고 정신대는 그런 일을 하기 위한 조직입니다. 전시국가 체제에서 정신대는 말하자면 전선 밖에서 전쟁에 임하는 또다른 ‘부대’ 같은 의미의 일반명사로 쓰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사대’ 혹은 ‘보국대’와도 뉘앙스가 유사합니다. (이 글에서는 일제가 여성을 동원해 노동력을 착취한 ‘여성정신근로대’의 줄임말로서 ‘정신대’를 사용하겠습니다)
증언과 사료에 따르면 여성정신근로대에 동원된 이들은 주로 국민학교 6학년이나 갓 졸업한 소녀들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학교 교사나 동네반장, 헌병들은 ‘정신대에 가면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돈도 벌 수 있다’는 거짓말로 소녀들을 속였습니다. 또 가족들에겐 소녀들이 정신대 지원을 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협박을 가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정신대에 동원된 소녀들은 미쓰비시중공업과 같은 군수회사에 배치되어, 폭행과 욕설이 난무하는 환경 속에서 가혹한 노동착취에 시달렸습니다. 화장실조차 제때 가기 어려웠고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를 검열을 당했으며, 사고가 발생해도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임금을 거의 받지 못한 이들이 많습니다.

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가운데)가 지난해 6월 27일 오전 도쿄 지요다구 미쓰비시중공업 본사 앞에서 일본 정부의 사죄를 호소하고 있다. 도쿄|김진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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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밥 한 끼로는 배가 고파 화장실에 가서 수돗물을 마시다가 반장한테 ‘도둑이냐’고 발로 차이곤 했어요. 73년이 지나도록 일본은 사죄 한 마디 없는데 눈물로 보내온 이 한을 어떻게 풀어야 합니까.”(‘“70여년 한을 어떻게”…강제동원 피해자 양금덕 할머니 도쿄서 호소’ 김진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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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일제강점기의 ‘강제징용’ 사안을 생각하면 주로 남성 피해자만 떠오릅니다. 하지만 정신대 여성들 역시 강제로 동원돼, 심각한 노동착취와 폭행에 노출된 점은 같습니다. 1930~40년대 전시 폭력의 여성 피해자가 군 ‘위안부’ 피해자를 뜻하는 ‘소녀상’으로 대표되는 사이, 강제노동에 동원된 여성들의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지워졌습니다.
“앙상한 갈비뼈를 드러내든 입술을 굳게 다문 채 곡괭이를 짚고 서 있는, 강제동원 노동자의 형상은 왜 성인 남성이어야만 하는가? 여성들은 어째서 소녀의 형상으로 표상되어야만 하는가? 좁은 막장 안에서 남편과 함께 채탄 작업을 했던 부인, 비행장 공사장에서 돌을 캐고 나르던 소년은 어디에 있는가?” (‘강제징용? 강제동원?…올바른 기억은 올바른 명명에서 시작된다’ 강정석·서강대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HK+ 연구교수)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 | 경향신문 자료사진
■일본군 ‘위안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에 의해 설치된 위안소에서 성폭력을 당해야 했던 이들을 말합니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문제를 최초로 드러낸 이는 윤정옥 전 이화여대 교수(전 정대협 대표)입니다. 윤정옥 교수는 해방 직후 학도병 등으로 끌려갔던 이들은 돌아왔는데 정신대로 끌려간 여성들은 돌아온 흔적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이 이상했다고 합니다.
“서울에 와 보니까 학도병들, 징병 갔던 사람, 강제연행당했던 사람, 다 돌아오잖아. 그런데 그렇게 많은 여자들이 끌려갔는데 여자들 왔다는 얘기는 없잖아. 내가 그때 스무살이니까, 그때 (끌려간 여성이) 43년에 제일 많았고 (끌려간 이들의) 제일 많은 나이가 열일곱살이야. 그러니까 내가 꼭 고 나이라고. (중략) 제일 처음에 내 시작은 그거야. 소문에 귀를 기울이는 거. 그때 들은 얘기야. 얘들이 군수공장에 간 게 아니라 사창굴 같은데에 가서…. 그때 한국사람으로서는 상상을 못해. 줄 서 있는 남자들한테 하루종일 당했다, 이 소리를…” (‘얘들, 어떻게 됐나 내 나이 스물, 딱 고 나이라고’ 2001년 ‘여성과 사회’ 인터뷰)
이 인터뷰에서 윤 전 교수는 해방 직후만해도 “우리나라의 역사가들”이 이런 여성들의 이야기를 연구할 거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훗날 윤 전 교수 본인이 직접 나서기 전까지 한국 내에서 이런 ‘소문’ 속의 여성들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없었습니다.
윤정옥 교수는 1970년대에 센다 가꼬오라는 일본인 기자의 글 속에서 위안부 문제를 접하게 됐다고 합니다. 이때 그는 과거 자신이 학도병들에게서 들은 ‘소문’이 사실규명이 가능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걸 알게 됩니다. 그리고 1980년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를 최초로 만나게 되는데, 오키나와에서 “인간 기피증”에 걸린 채 사탕수수 밭에 홀로 살던 있던 배봉기 할머니였습니다.
이후 윤 전 교수는 오키나와, 홋카이도, 중국, 태국 등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피해자들을 수소문해 만나고 증언을 수집했습니다. 윤 전 교수가 조사하고 연구한 내용은 1990년 ‘한겨레신문’에 연재물로 실렸고,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연재물의 제목은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입니다.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정대협)은 바로 그해 가을에 조직됐습니다. 여성운동의 대모였던 이효재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박순금 한국교회여성연합회장 그리고 윤정옥 교수가 초대 공동대표를 맡았습니다.
정대협이 만들어진 이듬해인 1991년 한국 내에서 처음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증언자가 나타납니다. 바로 김학순 할머니였습니다. 당시 김학순 할머니의 군 위안부 피해 폭로 기자회견을 다룬 기사의 제목은 ‘전선의 노리개 짓밟힌 17세…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 눈물의 폭로’였습니다.
피해자(생존자)가 ‘살아있는 증거’로서 직접 기자회견을 열면서 ‘위안부’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합니다. 정대협은 ‘정신대 신고전화’를 개설했고,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힘입어 여러 생존자들이 피해 사실을 직접 신고하게 됩니다.

국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 사실을 최초로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보도(경향신문 1991년 8월15일자) | 경향신문 자료사진
■‘정신대’와 ‘위안부’ 혼용된 이유
여성근로정신대를 지칭하는 정신대와 일본군 ‘위안부’는 1991년까지만 해도 학자, 운동가, 기자들도 구분 없이 사용했습니다. 윤정옥 교수의 1990년 연재물 제목은 ‘정신대 원혼 서린 발자취 취재기’이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기자회견 보도의 제목 역시 ‘정신대로 끌려간 김학순 할머니’입니다. 정신대와 ‘위안부’의 혼용은 완전히 지워져 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역사를 어렵사리 건져올린 과정과 연관이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해 온 한 학자는 “1937~1938년에 ‘위안부’ 제도가 조직적으로 확산되어 여성들이 끌려가 사라질 때, ‘정신대로 동원됐다’는 인식이 있었다”고 설명합니다. 그는 “(당시의 언어를 보면) ‘위안부로 끌려갔다’는 말이 잘 안나타난다. 작부, 예기, 종업원 등 그들을 이르는 다양한 명칭이 있었는데 그런 것으로 끌려갔다고 말하면 당시엔 잡혀갔다. 그래서 사람들이 ‘정신대로 끌려갔다’라고 말했던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이후 학자들이 증언을 수집하는 과정에서도 당시의 감각대로 ‘정신대로 끌려갔다가 몸을 더럽혔더라’ 라고 말이 많이 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군 ‘위안부’ 존재는) 괴담처럼 떠돌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당시엔 어린 미혼여성을 일제가 차출해 간다는 의미의 ‘처녀 공출’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고 합니다. 하지만 ‘처녀 공출’이라는 용어로는 정신대와 ‘위안부’가 구분되지 않습니다.
즉 ‘노동’이 아닌 성적인 이유로 동원된 여성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사람들도 알고 있었으나 입밖으로 꺼내 말하지 못했던 과거가 있었고, 이 때문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지칭하는 공통된 용어가 따로 형성되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정신대’라는 용어로 대신해 증언했던 겁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1990년 정대협이 탄생했습니다. 정의기억연대가 25일 설명자료를 통해 “정대협에 포함된 ‘정신대’는 운동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밝힌 것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수요시위’는 김학순 할머니의 증언 이듬해인 1992년부터 열리게 되는데, 이 시기를 전후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모이고 증언이 종합되면서부터 학자와 운동가들 사이에서는 양자를 명확히 구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위안부’ 관련 연구를 하고 있는 또다른 학자는 “의도적으로 섞었거나 몰라서가 아니라, 정대협이란 이름으로 출발하고 그 직후 (정신대 피해자와 ‘위안부’ 피해자의) 구분을 바로 하게 됐지만, 과거 운동의 역사를 존중해서 정대협이란 말을 버리지 않았던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정대협이 정신대 문제와 ‘위안부’를 함께 다뤄왔던 단체인지에 대한 의문도 제기됐는데요, 운동가들과 학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사실이 아닙니다. 정대협은 ‘위안부’ 문제에 집중했고, 근로정신대 피해 등 강제동원 문제를 다루는 단체로는 ‘태평양전쟁 희생자 유족회’ 등이 따로 있습니다.

2차 기자회견 중인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이자 여성인권운동가인 이용수 할머니| 김창길 기자 cut@kyunghyang.com
■“이제야 알았다면, 그동안 너무 몰랐던 것 아닐까요”
일본군 ‘위안부’ 역사가 ‘정신대’라는 용어를 통해 괴담과 소문으로 존재하는 동안, 말 못하는 고통을 겪은 근로정신대 피해자들도 있습니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됐던 자신의 아내가 군 ‘위안부’ 피해자였던 것으로 오해해 폭력을 가한 사례, 갈등 끝에 이혼했던 사례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위안부’의 역사가 제대로 건져올려지지 못하는 동안 정절을 중시했던 유교 가부장제의 폭력까지 겹쳐지면서 생겨난 비극들입니다.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 용어를 쓸 때에도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위안부의 ‘위안’은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강제로 끌려가 성착취를 겪은 피해자들의 고통 대신 가해자인 일본군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고 배상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아예 이 용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때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사실이 ‘위안부’라는 단어를 통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용어를 버리는 대신 ‘가해자의 언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따옴표를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정신대 피해의 개념이 혼용돼 온 과거를 알고 난 후에도 궁금증은 남습니다.
30년을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정대협과 함께해 온 이용수 할머니는 왜 ‘정대협은 정신대를 해야지 왜 위안부 피해자를 한 데 섞어서 이용했느냐’고 말했을까요. 한 연구자는 “이용수 할머니 역시 정대협 단체명의 ‘정신대’는 운동의 역사로서 남겨져 있을 뿐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왔음을 알고 계신다”면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28일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에 ‘운동 과정’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 답했습니다. 정대협 측의 증언 기록 과정 문제, 잘 알지 못한 채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에 함께 활동한 것, 김복동 할머니가 한쪽 눈이 실명인 상태로 힘겹게 외부 활동을 했다는 문제 등입니다.
할머니의 ‘이용당했다’는 의미는 정대협이 이미 여성인권운동가로서 거듭난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로 보입니다.

정의기억연대의 이나영 이사장이 27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열리고 있난 ‘제 1441차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를 위한 수요시위’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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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게 된 과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그간의 활동 방식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의 비판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은 여러 논의를 거쳐 다시 한번 거듭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할머니의 발언을 ‘갈등 구경’ 차원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위안부' 문제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아닐까요. “정신대와 ‘위안부’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는 반응이 많다는 얘기에 한 연구자가 되물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알았다면,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미 시민사회에선 명확했던 개념을 언론부터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아울러 일본군 ‘위안부’ 용어를 쓸 때에도 주의해야할 점이 있습니다. 위안부의 ‘위안’은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위안부’라는 말에는 강제로 끌려가 성착취를 겪은 피해자들의 고통 대신 가해자인 일본군의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일본이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은폐하고 배상을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므로 아예 이 용어를 폐기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때 제기됐습니다. 하지만 ‘위안부’ 피해 사실이 ‘위안부’라는 단어를 통해 국제적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용어를 버리는 대신 ‘가해자의 언어’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 따옴표를 붙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와 정신대 피해의 개념이 혼용돼 온 과거를 알고 난 후에도 궁금증은 남습니다.
30년을 여성인권운동가로서 정대협과 함께해 온 이용수 할머니는 왜 ‘정대협은 정신대를 해야지 왜 위안부 피해자를 한 데 섞어서 이용했느냐’고 말했을까요. 한 연구자는 “이용수 할머니 역시 정대협 단체명의 ‘정신대’는 운동의 역사로서 남겨져 있을 뿐 정대협이 위안부 문제 해결에만 매달려왔음을 알고 계신다”면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는 28일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에서 이런 질문에 ‘운동 과정’ 문제에 대한 설명으로 답했습니다. 정대협 측의 증언 기록 과정 문제, 잘 알지 못한 채로 ‘정신대 할머니와 함께하는 시민모임’ 등에 함께 활동한 것, 김복동 할머니가 한쪽 눈이 실명인 상태로 힘겹게 외부 활동을 했다는 문제 등입니다.
할머니의 ‘이용당했다’는 의미는 정대협이 이미 여성인권운동가로서 거듭난 피해자 할머니들의 목소리를 의사결정 과정에서 충분히 존중하지 않았다는 문제제기로 보입니다.

정의기억연대의 이나영 이사장이 27일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서 열리고 있난 ‘제 1441차 일본군 성노예 피해 할머니를 위한 수요시위’에서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있다. |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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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다루게 된 과정은 그 자체로 또 하나의 역사입니다. 그간의 활동 방식에 대한 이용수 할머니의 비판으로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은 여러 논의를 거쳐 다시 한번 거듭날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할머니의 발언을 ‘갈등 구경’ 차원으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라도 '위안부' 문제에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는 것 아닐까요. “정신대와 ‘위안부’ 차이를 이제야 알았다”는 반응이 많다는 얘기에 한 연구자가 되물었습니다. “지금에서야 알았다면, 그동안 너무 무관심했던 것 아닐까요. 그리고 이미 시민사회에선 명확했던 개념을 언론부터 제대로 구분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요.”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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