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시몽중조작(夢時夢中造作) 각시각경도무(覺時覺境都無). 꿈꿀 때에는 꿈속에서 조작하지만 깨어난 때에는 깨어난 경계가 전혀 없다. - 지공(誌公) 스님의 <대승찬(大乘讚)>에서 인용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현실과 비현실은 철학의 인식론적 문제로 다뤄져 왔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동굴의 비유를 들어 물질계만 알고 물질계 뒤의 이데아를 보지 못하는 미욱한 중생들을 비판했다. 데카르트는 《제1철학에 관한 성찰》에서 감각의 신뢰를 회의하다가 모든 게 꿈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확대하면서, 악령이 우리를 체계적으로 기만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주장했다. 그런가 하면 칸트는 공간이 물질 자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주체들이 세계를 직관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했다. 이런 저런 논의 끝에 서구철학은 초실재는 시뮬레이션 상태라는 이유로 재현을 초월한다는 장 보드리야르 철학에까지 닿게 됐다.
동양철학은 어떠한가?
| |  | | | ▲ 춘원 이광수. |
나비 꿈을 꾸고 나니 지금 나비가 사람 꿈을 꾸고 있는지, 아니면 사람이 나비 꿈을 꾸었는지 알 수가 없다는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이 꿈의 인식론을 다룬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월창 거사의 《술몽쇄언》도 꿈의 비유로 공(空)의 이치를 설파한 좋은 책이다. 불교에서도 꿈의 비유는 곧잘 쓰인다. 조신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들도 삶이 한낱 백일몽에 지나지 않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삼국유사》의 조신설화는 몽유록(夢遊錄) 문학 혹은 환몽설화(幻夢說話) 문학의 원형에 해당한다. 몽유록이란 현실의 주인공이 꿈속에서 겪은 일을 기록한 글을 일컫는다. 그러다보니 구성 상 꿈속 이야기가 소설의 중심축을 차지하고, 꿈꾸기 전은 소설의 도입부에, 꿈에서 깨어난 뒤는 소설의 결말에 해당한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의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 남효온(南孝溫)의 〈수향기(睡鄕記)〉, 심의(沈義)의 〈대관재몽유록(大觀齋夢遊錄)〉, 임제(林悌)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등이 몽유록 문학에 해당한다. 몽유록 문학은 구성 상 ‘갈구(渴求)-세락(世樂)-후고(後苦)-각찰(覺察)’ 순으로 전개되는데, 이를 일컬어 환몽구조(幻夢構造)라고도 한다.
정규복은 환몽구조(幻夢構造)의 원형으로 초기경전인 《잡보장경(雜寶藏經)》의 ‘사라나비구(娑羅那比丘) 이야기’를 꼽고 있다. 환몽구조 이야기가 육조시대에 중국에 들어와 당나라 때 <침중기(枕中記)>, <남가태수전(南柯太守傳)>, <앵도청의(櫻桃靑衣)> 등 전기소설(傳奇小說)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조신설화가 몽유록 문학에서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은 매우 크다.
조신설화는 이번 지면에 소개하는 이광수의 <꿈>과 김성동의 <꿈>의 모티브가 됐으며, 신상옥의 <꿈>, 배창호의 <꿈>이라는 영화의 원작이 되기도 했다. 이광수의 <꿈>을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조신설화부터 살펴보자.
신라 때 조신(調信)이라는 스님이 태수의 딸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그녀와의 사랑을 관세음보살 앞에서 빌다가 잠이 들었는데 깨어보니 처녀가 눈앞에 있었다. 그 길로 조신은 여자와 함께 산을 내려와 다섯 남매를 낳고 40년의 세월을 보냈다. 하지만 입에 풀칠도 못할 정도로 가난해져 막 헤어지려던 찰나 눈을 떠보니 꿈이었다.
그러면 이광수는 조신설화를 어떻게 바꿨을까? 1947년 면학서관에서 발행한 이광수의 중편소설 <꿈>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봄날 새벽 낙산사, 아침 예불을 마치고 마당을 쓰는 조신과 평목 앞에 용선 화상이 나타나 오늘 태수의 행차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엄명을 내린다. 조신은 세달사에서 태수의 딸 달례의 청으로 꽃을 꺾어준 인연이 떠올라 번민을 한다. 달례가 시집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신은 용선 화상을 찾아가 달례와 인연을 맺게 해 달라고 간청한다. 하지만 용선 화상은 조신에게 법당에 들어가 부를 때까지 나오지 말고 기도를 하라고 명한다.
조신은 법당에 들어가 염불을 외우는데 문득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달례가 찾아왔다. 달례는 “꽃을 받은 후 사모해 왔으니 둘이 도망가자”고 말한다. 조신은 보화가 든 달례의 보퉁이를 들고 사찰을 빠져나온다. 조신과 달례는 2남 2녀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평목이 나타나 조신에게 둘째 딸을 달라고 한다. 조신은 평목을 죽여 동굴 속에 버린다. 때마침 달례의 약혼자였던 모례가 태수와 사냥을 오게 되고, 조신이 그 안내를 맡는다. 모례가 쏜 화살을 맞은 사슴이 동굴로 들어가는 바람에 평목의 시체가 발견된다. 조신은 범인으로 지목되어 교수형을 당한다. 조신이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순간 꿈에서 깨어난다. 깨어보니 용선 화상과 관음보살이 미소를 짓고 있다.
이광수의 <꿈>은 조신설화의 골자를 유지하되 독자들의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조신과 달례 밖에도 많은 인물을 창조했다. 그럼으로써 서사의 긴장감을 유지하고 갈등을 고조시켰던 것이다.
이광수의 <꿈>은 말할 것도 없이 주제 면에서 불교사상에 빚지고 있다. 그중에서도 《금강경》 사상을 토대로 하고 있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구절로 대표되는 진공묘유(眞空妙有) 사상이 조신의 꿈을 통해서 현현(顯現)되고 있는 것이다.
이광수는 애욕을 좇아 파계를 한 후 점차 일그러져 가는 조신의 모습을 통해 고뇌하는 니힐리스트의 심경을 잘 표현하였다. 애욕의 덧없음을 강조하다보니 결국 두 주인공의 삶은 낭하(廊下)에 서게 된다. 조신이 살인을 저지르는 것도 이 때문이리라.
이광수가 <꿈>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홍안의 미소〔紅顔微笑〕는 풀 위의 이슬이요, 지란의 약속〔約束芝蘭〕은 광풍 앞에 버들꽃’이라는 조신설화의 한 대목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증일아함》 31권 <역품(力品)> 제2경에는 붓다가 무상을 설한 내용이 실려 있다.
“그대들은 늘 모든 것이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고 그 생각을 모든 것에 적용시켜라. 모든 것이 덧없다고 생각하고 무상하다는 생각을 모든 것에 적용시키면 욕심의 세계〔欲界〕와 형상의 세계〔色界〕와 무형의 세계〔無色界〕에 있는 모든 욕망을 끊고, 무명과 교만을 없애게 될 것이다. 비유하면 마치 불로 모든 초목을 태워 남김이 없고 그 자취마저 없도록 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을 하고 수행을 한다면 욕심의 세계와 형상의 세계와 무형의 세계에 있는 모든 욕망과 무명과 교만을 끊어 남음이 아주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수행자가 항상 모든 것이 덧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 욕심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욕심이 없으므로 곧 법을 잘 분별하고 그 뜻을 생각하여 근심과 걱정과 고통과 번민이 없어지고, 법의 뜻을 생각함으로써 곧 어리석음과 미혹이 없어질 것이다.”
불교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 중 하나는 삶이 한낱 물거품과 같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삶의 유한성과 존재의 불완전성을 바로 본 후에야 사람은 시야를 타자에게 돌릴 수 있다. 너도 나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 때, 숨 탄 것들에 대한 지극하고도 극진한 마음이 생긴다.
지공 스님의 <대승찬>을 인용하면서 글을 시작했으니 마무리도 지공 스님의 <대승찬>으로 짓고자 한다.
번사교시여몽하니(翻思覺時與夢) 전도이견불수(顚倒二見不殊). 깨어난 때와 꿈꿀 때를 뒤집어 생각해 보니 뒤바뀐 두 견해가 다르지 않구나.
유응오 | 소설가, 전 주간불교 편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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