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한과 복수의 문제
단비 ・ 2020. 7. 17.
동경, 연일 폭염이다. 습도가 높은 곳의 34, 5도는 건조한 지역의 40-50도를 ‘베이비’라고 할만하다. 아내와 냉방이 잘된 집에서 멀지않은 오사키(大崎)의 한 쇼핑센터에 차를 세우고 기웃기웃 시간을 보냈다. 특히 살 책도 정하지 않은 채 1층 너른 책방에서 시간을 제일 오래 보냈다. 이 책, 저 책, 이 소설, 저 소설 뽑아 조금씩 읽는 재미도 솔솔 하다. 특히 추리소설 쪽에서 기웃거렸는데, 역시 사건은 대개, ‘복수’로부터 출발한다. 늘 즐겨보는 수사드라마의 사건들도, 짧게는 3년에서 5년 전, 길게는 20년, 30년 전의 ‘우리미’(恨み, 怨恨)로부터 스토리는 전개된다.
며칠 전 동료 교수들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어쩌다가 화제가 바로 이 ‘원한’과 ‘복수(復讐)의 문화론’에 이르렀다. “아직 한국 서울의 주택지 한 가운데, ‘광주 민주화 운동’의 가해(加害) 주역들이, 보통 사람이상의 레벨로 잘 살고 있지요?” 우리의 이야기가 여기에까지 이르며, 나는 그만 한국인의, ‘원한 극복’의 ‘사회사’를 ‘한 풀이’의 ‘종교론’으로까지 본의 아니게 강의하듯 몰고 가지 않으면 안 되고 말았다.
그 기회에 찬찬히 생각해 보았다. 참으로 우리 한국인들은 무엇이든지 잘 잊는다. 가슴이 찢어 질 정도의 ‘고통’도, 하늘과 땅이 거꾸로 뒤바뀔 정도의 ‘억울함’도, 심지어 나를 죽이고자 했던 그 ‘적’(敵)도 비교적 잘 잊는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한국인이 가슴에 안고 삭여야 했던 역사적 ‘한’은, 보통 여기저기 많이 있는 ‘원한’과는 다르다. 그래도 ‘원한’ 정도는 언젠가 상황이 바뀌고, 맘만 굳게 먹으면, 갚을 수도 있는 수준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이 역사적으로, 혹은 가혹한 사회구조, 혹은 절망적 인간관계 속에서 가슴에 품어야 했던 ‘한’은 도무지 어떤 기회와 방법으로도 되갚을 방법이 없는, 절대적 수준의 것이다. 이는 겉으로 보면, 허허 넘기는 것으로 보이거나. 안으로 보면 차곡차곡 퇴적시켜 전혀 다른 극복으로 승화해 내지 않으면 안 되는 수준의 ‘차원변경’(次元變更)의 단계로나 해결 가능한 것이다. 이것을 잘 해내는 것, 곧 도저히 어느 나라 말로도 번역이 되지 않는 말이 바로 ‘한 풀이’이다. 이것을 민간종교에서는 ‘무당’이 잘 하였고, 최근에는 여러 종교의 성직자, 특히 목사들도 잘 해 주어야 하는 역할이다.
긍정적으로 보면, 한국인은 일반적으로 잘 잊고, 잘 용서하고, 비교적 좋게 생각하고, 꽁하게 벼르지 않고..., 참으로 좋은 에너지를 가득 품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원수 갚기’, ‘복수’ 등의 개념보다, ‘화해’를 잘 하는 사람들로서, 상대적으로 높은 단계의 ‘정신문화’를 형성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에너지를 더욱 승화시키면, 한일 (韓日)간의 역사적 문제도, 남북(南北)의 갈등과 대립도 잘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끔은, 참으로 허허롭고 허무할 때가 많다. 한 시대, 한 시대마다 얼마나 많은 억울한 사람들이, 어떻게 소리치며 죽어갔고,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맨땅을 머리를 찧으며 고통의 울음을 토해냈으며, 그 수많은 민중의 해맑은 목숨들이 부당한 권력의 가혹한 칼날에 그토록 맥없이 쓰러져 갔는지, 그것이 과연 누구누구의 욕심과 가증스러운 위선 때문이었는지를, 어찌 그렇게 하얗게 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차라리 잊고, 품고, 같이 사는 정도는 최고의 정신적 문화의 단계라고 치자. 그런데 어떻게 그 시대를 미화하고, 찬양할 수까지 있다는 말인가. 독재자들이 압제를 다시 해도 되는 나라로, 업신여김을 받아도 쌀 정도이다. 이것은 ‘한풀이’도 아니고, 저 ‘민초’들이,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 가슴의 멍울 멍울을 울컥 울컥 삼키는, 생존행위도 물론 아니며, 더더구나 ‘그리스도의 원수사랑’이라는 최고 단계의 ‘사랑’도 아니다. 정말 ‘바보’이거나, ‘자존심’도 없는 ‘천지’이다. 그래서 역사의 어리석음을 반복하는. 그런.
역사의 ‘망각’과 ‘용서’는 그렇게 쉽게 하는 것이 아니다.
<사진> 자주 가보는 동경(東京都千代田区九段北3丁目1−1)의 ‘야스쿠니’(靖国)신사의 정면 사진인데, 이곳에는 제2차 대전 전범(戰犯)들도 합사되어 있다. 여기에 매일 줄서서 참배하는 우익(右翼)인사 일부들은 아직도 패전에 대한 재기(再起), 원수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역사를 깊이 생각하는 또 다른 사람들은 용서인가, 화해인가, 그 이전에 ‘역사적 정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고민할 것이다.
[출처] 원한과 복수의 문제|작성자 단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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