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4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16편 우리는 지금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 한국에 사회계약이라는 게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16편 우리는 지금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 한국에 사회계약이라는 게

[지록위마의 시대, 윤석열 정부를 평하다] 16편 우리는 지금 '내전' 상태에 놓여 있다 : 한국에 사회계약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0. 제도는 결코 홀로 기능하지 않는다

 제도는 제도를 만들었다고 해서 잘 기능하지 않는다. 그것이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제도를 운용할 행위자를 제도의 설계의도에 맞게 유도할 여러 문화적인 혹은 법제적인 기제들이 필요하다. 헌법적 질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근대적 헌법을 만들어 두기만 하면 제대로 기능하는 게 아니다. 카를 마르크스는 1848~1852년의 프랑스 제2공화국의 역사를 개괄하며 "보통선거권"이 인민의 의사를 정치체에 반영하려는 의도와 달리 루이 보나파르트라는 독재자의 이해관계에 복무하고 인민을 '기만'하는 도구로 얼마나 자주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한탄했다.

마르크스는 보통선거권이 "이제까지처럼 기만의 도구로부터 해방의 도구로 전화"되기 위해서는 "자립한 정당에 의해 조직된 생산계급 - 프롤레타리아트 - 의 혁명적 행동"이라는 제도 외적인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롤레타리아 당 강령>, 편집부 역, 소나무, 1989, p.143) '혁명적 행동'이 필요하다는 그의 주장에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분명 그는 19세기 중후반기, 민주적 공화정이 아직까지 군주제에 의해 억압되어 있을 시기에 이미 공화정이 기능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할 행위자로서의 사회조직, 관습, 정치문화, 계급구조 등의 여러 조건들이 필요하다는 점을 통찰하였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그 조건 중 중요한 것이 바로 "자립적 정당에 의해 조직된 생산계급", 다시 말해서 시민사회 내에서의 조직화였다.

미국의 공화정은 이러한 문제를 '연방주의 논고'(알렉산더 해밀턴 외, <페더럴리스트>, 박찬표 역, 후마니타스, 2019)를 통해 해소한다. 소위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 of the United States)'의 일부 구성원들이 미국의 헌법을 통해 건설하려 하는 정치체제가 어떠한 철학, 동기 등에 기초하여 구상되었는가에 대해 직접 설명함으로써 이후의 미국 정치문화를 규정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건국의 아버지들'이 지닌 권위를 통해 정치문화와 '전통', '관습' 등을 확립함으로써 이후의 미국 정치의 행위자들의 행동을 규제하고 헌법의 가치, 이념, 철학, 동기 등에 맞도록 유도하는 '사용설명서'로 연방주의 논집이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 근대의 아버지라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문명론 개략>, <학문의 권장> 등의 저작을 저명한 일본의 정치학 연구자인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가 '전장(戰場)'으로 삼았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일본근대를 분석하고 탐구하는데 있어 후쿠자와 유키치는 여러 정치적 대립과 논쟁을 담아낼 수 있는 '그릇'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엥겔스의 지적처럼 프랑스의 공화정이 "다른 곳에 비하여 역사적인 계급투쟁들이 매번 어떤 결말에 도달할 때까지 진전"되며 "그 결과가 요약된 변화무쌍한 정치 형태들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난 것은 바로 공화정 내에서의 대립을 완화하고 완충제 역할을 할 조건이 미비했기 때문이었다.(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프랑스 혁명사 3부작>, 임지현 외 역, 소나무, 1991, p.160)

1. 투쟁의 장으로서의 제6공화국 

 그렇다면 한국 근현대사의 전개에 있어 우리에게는 어떠한 '전장'이 존재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과연 공동의 담론장으로서의 '지반'을 제시해줄 수 있는 역사적 텍스트가 존재하는가? 개인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본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는 서로 너무나도 이질적인 역사서사와 맥락을 지니고 있어 화합을 이루기가 어렵다. 동일한 지반 위에서 합의점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7년 민주화 이후에 제6공화국은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무언가가 앞서 미국의 공화정이나 일본의 입헌군주정이 기능하도록 하는 바와 같이 정치적 행위자로서의 한국인을 규정하고 규제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그것이 바로 광주항쟁과 노태우•김영삼의 1991~1996년의 노동운동 및 학생운동권 진압이다. 아래의 인용문을 보자.

"제6공화국은 광주항쟁을 통해 극우파와 군부집단이 폭력을 사용하여 기존의 체제를 전복시키는 군사쿠데타의 가능성을 완전히 소거한 뒤에야 안정화 될 수 있었다. 광주항쟁의 기억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극우적인 집단이 집권하더라도 군사쿠데타는 이뤄질 수 없을 것이다. 반대로 노태우와 김영삼 정부가 1991~1996년 사이에 급진화된 학생운동권을 차례로 제압하면서 극좌적인 폭력혁명의 가능성 또한 사라졌다. 극우파의 군사쿠데타와 극좌파의 폭력혁명의 가능성이 차례로 제거된 뒤에야, 그리고 1997년의 외환위기를 겪으며 발전국가 체제가 해체되면서 제6공화국은 권위주의적인 정치와 결별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치질서를 그려나갈 수 있게 되었다. 양극단이 제거된 상황에서 양당제가 정착되고 그들 간의 정치적 대립의 정도가 날이 갈수록 격해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0년동안 제6공화국은 한국 자본주의의 선진화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추동해왔다. 이 체제의 한계가 보인다면 우리는 광주항쟁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제6공화국의 전개라는 총체적 관점에서 광주항쟁의 현재성을 새롭게 보아야 하지 않을까?"

https://alook.so/posts/LKtyP6E

 위의 내용을 조금 풀어서 설명해보자면, 한국의 제6공화국은 전두환-노태우의 '광주학살'이라는 '원죄'를 품고 탄생했다. 노태우는 여러 정치적 의도와 민주화 이후의 강성야당에 의한 압박 등의 요인들이 겹쳐 1988년 13대 국회에서 '제5공화국 청문회'를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이를 통해 일해재단 비리, 광주민주화 운동 진상조사, 언론기관통폐합 등의 제5공화국 하에서 있었던 사건들을 처리하며 제6공화국은 제5공화국의 무덤 위에서 성립한다는 점을 '상징적'으로나마 확립하였다. 이는 이후에 1993년 역사바로세우기 운동을 공약한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가 5.18 민주화 운동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내걸고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희대의 망언 등의 우여곡절을 거쳐 1995년 5.18 민주화운동 특별법 제정 및 1996년 전두환•노태우의 구속으로 '실질적'인 내용을 갖추게 된다. 1988~1996년의 약 7년의 기간을 거쳐 제6공화국은 극우파의 (군사)쿠데타를 용인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확립하게 되었다.

 반대로 1991~1996년의 기간동안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급진화된 학생운동권 및 노동운동 세력을 폭력적으로 탄압했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의 좌파 계열은 비합법전위정당의 건설을 목표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인민노련)', '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사노맹)' 등을 시도하였으나 1989~1991년의 동구권 사회주의의 몰락을 계기로 합법정당의 건설로 선회하여 인민노련은 1991년 7월에는 '한국사회주의노동당 창준위'를, 12월에는 '한국노동당 창준위'를 결성한다. 또 '제헌의회소집파(CA세력)'이 주축이 된 사노맹 집단 또한 '사회당추진위'를 통해 사민주의에 가까워지며 사실상 비합법 운동은 소멸하게 된다.(김세균, <1987년 이후의 한국 사회운동>) 이후 학생운동 계열은 방황 속에서 1996년의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의 연세대 사태를 계기로 사실상 와해되어버린다. 한총련은 김영삼 정부 하에서 '반(反)국가단체'로 규정되고 그에 따라 한총련의 간부들은 국가보안법의 수사대상이 된다.

노동운동의 경우에도 상황은 다르지 않아서 1990년 민주노조운동이 전국적 연합체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로 이어지거나 '전국업종별 노동조합회의(업종회의)' 등으로 이어지며 결실을 거두는 듯했지만, 전투적 성향의 노동조합에 대한 노태우 정부의 탄압으로 1991년이 되면 사실상 와해되어 전노협은 조합수와 조합원의 규모가 절반가량으로 줄어들게 된다. 전투적 노조운동이 가져온 임금상승에도 불구하고 노동운동세력은 한국노총이라는 어용단체의 존재 및 한국경영자총연합(경총)에 의한 반발 등의 여러 요인으로 시민사회 내에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데 실패하였다. 이후에도 여러 운동을 동력으로 삼아 1995년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이 건설되었지만 김창우의 지적처럼 전노협의 '이른' 청산과 민주노총으로의 이행은 우파적인 경향이 노동운동 내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김창우, <전노협 청상과 한국노동운동>, 후마니타스, 2007) 권영길을 위원장으로 하는 민주노총의 1기 지도부는 전투적인 변혁운동을 포기하고 1993년 우루과이 라운드(UR)의 세계화, 국가경쟁력 등의 담론에 친화적인 노선을 택하며 체제내로 포섭되어버린다. 민주노동당 건설과 민주노총의 사회운동이 상호작용하며 발전을 꾀하지만 1997년 15대 선거에서의 권영길은 1.19%의 득표율을 기록함으로써 민주노총의 정치적 영향력은 미미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1996년까지 제6공화국의 존립을 위한 정치적 조건이 정비되자 1997년에 IMF가 터졌다. 외환위기를 거쳐 제6공화국은 소위 '신자유주의적 질서'(이 표현에 상당한 불만을 지니고 있지만 달리 표현할 개념어가 없어 통설에 따라 신자유주의적 질서라 표현한다)라는 새로운 정치경제적 질서로 이행하여 사실상 박정희 이래로 유지된 '발전국가'와 결별하여 권위주의의 잔재를 털어버리게 된다. 즉, 한국의 제6공화국은 1988~1996년의 극우파의 (군사)쿠데타에 대한 처벌과 1991~1996년의 노동운동 및 급진적 학생운동권을 탄압으로 극좌파의 등장을 차단하여 사실상 좌우의 극단적 세력의 등장을 봉쇄하였다. 그런 정치적 봉쇄를 전제로 1997년 IMF라는 경제위기 속에서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여 새로운 형태의 정치경제적 질서를 도입함에 따라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제6공화국은 전두환의 제5공화국을 부정함으로써 극우세력에 의한 (군사)쿠데타를 방지하고, 1996년까지 급진화된 학생운동권과 노동세력을 효과적으로 탄압함으로써 극좌 세력에 의한 체제전복의 가능성을 제거하여 공통의 장(場)을 마련하였다. 광주항쟁의 기억과 소련국가사회주의의 패망 및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의 반복은 제6공화국을 기능하게 하는 근간이라 할 수 있겠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노무현과 문재인 정부 시기에도 그 지지자들이 민주노총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내며 노동운동의 탄압에 찬성했던 것은 이러한 질서가 상당히 잘 각인되어 있다는 걸 반증하지 않나 한다. 586세대를 기득권화하는 '세대 담론'과 함께 '귀족노조'라는 프레임이 보혁을 가리지 않고 널리 받아들여지는 이 세태를 이해하려면 한국은 '텍스트'가 아니라 "사건"으로 제도를 기능하게 한다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러한 '사건에 의한 사회계약'은 '텍스트에 의한 사회계약'과 달리 행위의 반복으로써만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에 매계약마다 새로운 '투쟁'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동일한 사회계약의 내용을 확정하기 위해 차이를 보이는 투쟁이 반복된다. 한국 사회를 구성하는 토대로서의 '사회계약'이 지닌 어떤 불안정성은, 매5년마다의 대통령 선거 속에서 극대화된다. 지금 우리는 5년마다 '건국'을 반복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정신적 내전'을 겪고 있다는 말이 현 상황을 가장 적확하게 묘사하는 것일 수 있다. 

2. '사회계약'이란 무엇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내전'에 반대되는 '사회계약'이 어떤 개념인지를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래야만 한국의 '사건에 의한 사회계약'의 특질을 보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계약의 개념을 다룬 정치사상가들은 많지만 우리가 이 논의에서 다룰 '내전'을 방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사회계약"을 논한 사상가는 토마스 홉스(Thomas Hobbes)를 꼽아야 할 것이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홉스의 <리바이어던>(토마스 홉스, <리바이어던 1, 2>, 진석용 역, 나남, 2008)에 기초하여 논의를 제한하고자 한다. 아래의 <리바이어던>에 관한 해석은 나의 독자적인 것이 아니며, 지우 오윤근씨와의 대화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1) 홉스에게 있어 인간이란?

 홉스의 사회계약론의 해석에는 여러 유형이 있지만 대체로 '합리적 사회계약론'이라 부를만한 이해방식이 여전히 큰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듯하다.(대표적인 예로 데이비드 고티에, <리바이어던의 논리>, 박완규 역, 아카넷, 2013)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상태에서 자신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자신의 안전을 도모하게 되지만, 결국에 이르러 서로가 서로를 죽이기보다는 자연상태 하에서 자신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떠한 수단이든 사용할 수 있는 자연권(right of nature)의 일부를 포기하는 대신 강력한 최고 권력으로서의 '주권자'에게 그 권리를 양도하여 안전을 꾀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체결되는 계약이 바로 '사회계약'이라 할 수 있다. 즉, 인간은 자연상태에서의 끝없는 전쟁상태의 유지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사회계약'을 통해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게 된다.

이러한 해석을 접했을 때 우리는 한 가지의 의문이 든다. 그러한 '깨달음'이 왜 꼭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상태를 거친 다음에야 나타나는 것일까? 진정으로 이성적이라면 그러한 위기에 빠지기 이전에 그 가능성에 대해 통찰하고 사회계약을 맺을 수 있지 않을까?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을 하기 이전에 합리적인 의사소통으로부터 도출된 합의에 이를 수 있지 않을까?

다시 말해서 '합리적 사회계약론'의 해석에는 자연상태가 왜 반드시, 필연적으로 "전쟁상태"여야만 하는가에 대한 고려가 빠져 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우리를 '전쟁상태'가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으로 몰고 가는데, 홉스의 '전쟁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으로 홉스가 '인간'을 무엇이라 생각했는지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홉스의 '인간' 이해가 <리바이어던>의 상당 부분을 설명하는 핵심적인 요소이기 때문이다.

홉스에게 있어 인간이란 다른 무엇보다도 "언어적 존재"이다. 이 말을 유물론적이지 않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 인간이 동물과 구별된다는 의미에서 언어적 존재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언어가 없었다면 사람들 사이에는 코먼웰스도 사회도 계약도 평화도 없었을 것이며, 사자나 곰이나 이리의 세계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조성되었을 것"이다.(홉스, 2008 : 50) 인간이란 언어를 통해서 "사고를 기록하고, 과거의 사고를 회상하고, 또한 상호간의 이익이나 교제를 위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게 된다.(홉스, 2008 : 50) 그리고 바로 이런 언어를 매개로 한 기록들이 모여 '학문(arts)'이 된다. 인간은 그 '학문'을 활용하여 동물과 다른 문명을 건설하고 사회를 발전시켜나간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홉스가 보기에 언어와 그것이 지시하는 사물 간의 관계이다.

 언어는 "마음속 담화를 입말로, 사고의 연속을 낱말의 연속으로 바꾸어"준다. 이것은 두 가지의 효용성을 우리에게 주는데, "하나는 사고의 연속을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다수가 동일한 낱말들을 사용할 경우 그 낱말들의 관련과 순서에 의해 자신의 관념이나 사고를, 혹은 욕망이나 공포를, 혹은 다른 어떤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홉스, 2008 : 51) 다시 말해서 홉스에게 있어 언어란 철저하게 인간의 생활세계의 목적에 따라 이용되는 수단이다. 하지만 수단으로서의 언어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름'을 붙여야만 한다. 바로 그 이름을 붙이는 과정에서 "동일한 것이라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영향을 받는 것도 아니요, 또한 같은 사람이라 하더라도 동일한 것으로부터 항상 같은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이런 말들은 사람들의 일상적 대화에서는 의미가 '일정하지 않'"게 된다.(홉스, 2008 : 63) 다시 말해서 우리는 동일한 사물에 대해 우리 개개인이 갖고 있는 다양한 '정념'에 따라 서로 다른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으며 그 "말에는 우리가 본질이라고 생각하는 의미 이외에 화자(話者)의 성격, 성향, 흥미도 같이 들어있"다.(홉스, 2008 : 63)

개개인의 정념은 "신체의 소질이 서로 다르거나 받은 교육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차이를 보이며, 특히 "정념 중에서 지력의 차이를 좌우하는 정념은 주로 권력, 부, 지식, 명예에 대한 크고 작은 욕망'들이다. 이것들은 결국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귀착"될 수 있기 때문에 권력에 대한 크고 작은 욕망이 정념의 차이를 만들어낸다.(홉스, 2008 : 105) 홉스는 모든 인간이 권력에 대한 영구적이고 멈출 수 없는 추구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바로 이러한 '정념'의 차이로부터 언어 체계의 차이가 나타나고, 언어체계의 차이는 '의미 체계'의 차이로 이어진다. 이런 상황에서는 보편타당한 어떤 진리체계가 존재할 수 없게 된다. 더 엄밀하게 말하자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언어체계조차도 통일되기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개개인의 정념에 기초하여 언어가 성립한다는 말은, 그 정념에 따라 성립된 언어체계가 상정하는 '선악'의 기준 또한 상이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인간이 욕구 또는 의욕을 갖는 것은 그 대상이 무엇이든지 그에게는 '선(good)'이며, 증오 또는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악(evil)'"이기 때문이다.(홉스, 2008 : 79) 서로가 이렇듯 다른 가치체계, 규범체계를 지니고 있는 상황에서는 특정한 누군가의 가치체계, 규범체계에 "동의"하게 만들기가 어렵게 된다. 각자의 정념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붙이기'를 행할 것이기에 동일한 사물에 대해서도 언어가 회통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각기 다른 규범체계에 기초하여 언어를 사용할 때, 특히 그러한 규범체계들 간의 관계를 규율할 보편타당한 질서가 부재할 때 그것은 곧바로 갈등과 불화로 이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특정한 가치 체계의 일방향적인 관철은 다른 가치 체계에 대한 부정, 더 나아가서 그 가치체계를 구성하는 정념과 욕구의 부정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각각의 개인이 가지고 있는 욕구를 부정하는 것은 곧 그 개인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어버리기에 이 지점에서 쉽게 합의와 타협을 하기 어려워진다. 우리가 앞서 고티에 등의 '합리적 사회계약론'이 제시한 합리적인 판단에 기초한 계약의 성립을 부정적으로 보았던 것은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규범언어의 불일치는 단순히 타인에 대한 이해의 부족에 그치는 게 아니라 격렬한 감정상태, 즉 정념의 소용돌이를 수반하는 격한 대립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러한 정념의 충돌을 '선제적'으로 미리 해소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홉스가 자연상태에서의 전쟁상태로의 필연적 이행의 계기로 꼽는 ‘경쟁(competition)’, ‘불신(diffidence)’, ‘영광(glory)’에서 다른 무엇보다도 '영광(glory)'에 주목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경쟁'과 '불신'은 자연상태에서의 개인들을 전쟁상태로 '필연적'으로 이끌지는 못한다. 오직 '영광'만이, 규범체계의 차이에서 나오는 상대방의 욕구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짐으로써 자연상태를 전쟁상태로 만든다. "인간은 누구나 자기 친구들이 자기를 높이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최소한 자기가 자기를 평가하는 정도만큼은 평가해주기를 바란다. 따라서 자기를 경멸하거나 혹은 과소평가하는 기미가 보이기만 하면, 자기를 경멸한 사람을 공격하여 평가의 수정을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본보기를 보여줌으로써, 자신에 대한 그들의 평가가 더욱 높아질 것을 기대한다."(홉스, 2008 : 170-171)

 이렇듯 홉스에게 있어 인간이란 각자의 고유한 경험세계로부터 도출된 정념이 그의 언어사용에 반영되어 나타남으로써 상이한 규범적 질서를 체화한 '언어적 존재'이다. 이 '언어적 존재'들이 각자 서로에게 다른 규범체계를 강요하기 시작할 때, 자연상태는 비로소 "필연적"으로 전쟁상태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연상태는 곧 '전쟁상태'가 된다. 그렇다면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2) 마르크스의 화폐와 홉스의 과학

 우리는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홉스와 동일한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있어서는 상품 중의 하나에 불과한 '특정한 상품'이 다른 모든 상품들 간의 교환관계를 매개하는 '화폐'로, 마르크스적 표현으로는 '일반적 가치형태'에서 '화폐 형태'로 이행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상품을 생산하는 모든 개별적인 생산자들은 자신이 생산하는 상품이 가치체계를 대표하는 '화폐'가 되기를 바란다. 자신이 들고 있는 상품에 따라 가치가 판별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어느 상품 소유자에게 다른 사람의 상품은 모두 자기 상품의 특수한 등가물로서의 의의를 가지며, 따라서 그의 상품은 다른 모든 상품의 일반적 등가물로서 의의를 갖는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상품 소유자들에게 적용되므로, 사실상 어떤 상품도 일반적 등가물일 수 없고 또 그리하여 상품들은 그 속에서 상품들이 가치로서 등치되고 가치크기로서 비교되는 어떤 일반적, 상대적 가치형태도 갖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결코 상품으로서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생산물 또는 사용가치들로서 서로 대면하는 것이다."(카를 마르크스, <자본 1-1>, 김영민 역, 이론과실천, 1990, pp.117-118)

 왜 어떤 특정한 상품, 마르크스적 세계에서는 '금', 이 다른 모든 상품들의 기준이 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화폐라는 것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익숙한 것이기에 100그램의 쌀이 100원과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그것을 쌀 100그램=100원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1724년 경상도 고성의 구상덕이라는 양반의 일기에서는 100원=쌀 100그램이라 표기되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에게 있어서는 쌀 100그램을 사기 위해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는 "화폐"를 기준으로 하여 가치측정을 하겠지만, 18세기 양반들은 반대로 동전 100원을 얻기 위해 쌀 100그램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가치등식과 교환관계를 갖고 있었다. 여기서 화폐란 특정한 교환을 위해 필요한 "상품"으로서 구입되었던 것이지, 오늘날과 같이 가치척도의 기준으로 기능하고 있지 않았다. 국가에 세금을 낸다든지 특정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교환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지, 아직은 '일반적 가치형태'로서의 지위를 지니고 있지 못했던 것이다. 시장경제가 발달하여 19세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화폐는 그 사용가치로부터 분리되어 순수한 교환가치를 지닌 수단으로써 기능하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마르크스는 이에 대해 어떻게 설명할까?

 "태초에 행동이 있었다."(마르크스, 1990 : 118) 특정한 상품의 현물형태가 사회적으로 가장 적절한 등가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교환'이라는 행위가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그들은 "생각하기에 앞서 이미 행동"해야만 한다. 그렇게 '교환'이라는 행위가 반복되어감에 따라 "다른 모든 상품의 사회적 행동이 어느 일정한 상품을 배제시키며, 배제된 이 상품을 통해 다른 모든 상품은 자신들의 가치를 전면적으로 표시"하게 되는 것이다.(마르크스, 1990 : 118)

하지만 이러한 교환행위는 마르크스에게 따르면 자급자족적인 '자연발생적인 공동체' 내부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공동체가 끝나는 곳, 즉 하나의 공동체가 다른 공동체 또는 다른 공동체의 성원들과 접촉하게 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마르크스, 1990 : 120) 생산물의 소유자의 직접적인 욕망을 '초과'하는 양의 사용가치 곧 비사용가치로서의 사용대상의 존재가 교환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자급자족적인 공동체의 필요를 초과하는 양의 생산물만이 그 자체로 인간에 외적이고 따라서 타인에게 양도될 수 있다. 이 지점에서 비로소 "서로가 서로에 대해 타인"인 관계가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자연발생적인 공동체가 "가부장제적인 가족의 형태를 갖든, 고대 인도적인 공동체의 형태를 취하든, 또는 페루의 잉카 제국의 형태를 취하든"간에 그 자급자족적인 영역을 넘어서는 그 지점에서부터 상품교환이 시작되고, 이 상품교환을 통해 거래되는 생산물은 "일단 어떤 한 공동체의 대외적인 공동생활에서 상품이 되면 그 즉시 그것들은 반작용적으로 그 내부적인 공동생활에서도 상품이 된"다.(마르크스, 1990 : 119-120) 비록 처음에는 "전적으로 우연적"이었겠지만 교환이 끊임없이 반복됨에 따라 "관습을 그것들을 일정한 가치크기로서 고정시킨"다.(마르크스, 1990 : 120)

마르크스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이러한 교환행위를 정착시켜 공동체 간의 관계를 구성하였던 것이 바로 "유목민족"이었다. 유목민족들은 "그들의 모든 재산이 움직일 수 있는 물건이고 따라서 직접 양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생활양식이 그들을 끊임없이 다른 공동체와 접촉하게 함으로써 생산물의 교환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맨 먼저 화폐형태를 발전"시켰다.(마르크스, 1990 : 121) 이로써 논리적 모순이 '역사적 행위'를 통해 해소된다. 각자가 자신이 들고 있는 생산물이 화폐로 기능하기를 바라는 상황에서는 도저히 '화폐'라는 보편적 가치척도의 기준이 나타나지 못한다. 이 모순을 해소하는 것은 역사적 개입으로서의 "유목민족"의 존재이다. 이처럼 논리 외적인 '역사'의 개입이 논리적 모순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게 마르크스의 '변증법'이다. <자본론>을 비롯한 그의 저작을 읽을 때는 이런 논리적인 내적 모순의 전개와 역사적인 외적 개입의 교차관계로 독해해야만 비로소 제대로 된 '역사과학'으로, '변증법적'으로 독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홉스에게 있어서 서로 다른 규범체계를 지닌 개인들이 상대방에게 자신의 규범체계를 강제하는 방식은 어떻게 해소되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지점에서 홉스의 '과학' 개념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서 보았듯이 서로가 서로에게 다른 규범체계를 강요하는 이런 상황에서는 보편타당한 어떤 진리체계가 존재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학문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학문은 존재하지만 홉스가 보기에 인간의 언어체계 및 지식체계는 어딘가에 존재하는 '보편적 진리'를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 것이다. 주어진 언어 체계 안에서 작동하며 일관성을 확보하는 것이 바로 '과학'이다.

즉, 홉스에게 과학이란 "첫째, 적절한 이름을 부여한다. 둘째, 이름이 부여된 요소들에서 출발하여 훌륭하고 정연한 방법으로 이름들을 결합해 주장을 세운다. 여러 주장들을 결합하여 삼단논법으로 진행한다. 마지막으로, 당면한 문제와 관련된 모든 이름들의 연결관계에 관한 지식에 도달한다. 이것이 바로 과학(science)"(홉스, 2008 : 72)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은 대상들에 이름을 붙이고 그것들 간의 관계를 설정하여 일관된 지식체계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다시금 경험세계에 판별하는 기준을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이러한 지식체계의 형성은 그 자체가 개개인의 '정념'에 따라 이름을 붙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보편적 지식으로 발전해나갈 수가 없다.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러한 경우는 오직 단 하나, 과학적 언어에 대한 '합의'를 행하는 것이다.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언어'를 형성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의 전제조건이다.

 이런 점에서 홉스의 '과학' 개념은 상당히 특이하게도 규범적 판단을 전제로 하고 있다. 홉스에게 있어 과학이란 중립성을 지닌 것이라기보다는 언어를 매개로 하여 성립되는 특정한 "규범 체계", 가치체계를 '전제'로 하고 있을뿐 아니라 그 규범 체계에 대한 '복종'과 '합의'도 전제로 하고 있다. 
 
3) 도약으로서의 신약(信約, Covenant)과 교회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것이다. 과학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치체계의 통일이 전제되어 있어야 하듯이, 국가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정념과 가치체계를 지닌 개인들이 하나의 사회계약을 통해 '합의'에 이르러야 한다. 하지만 과학적 지식의 문제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에게도 실존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국가의 문제는 다르다. 과학에서 홉스는 합의와 복종에 의한 성립을 손쉽게 논할 수 있을지 몰라도 국가의 경우에는 다르다. 거기서는 생존을 건 투쟁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보았듯이 가치체계의 다원화는 자연상태를 필연적으로 '전쟁상태'로 이끈다. 전쟁상태로서의 자연상태는 국가의 '해체'를 전제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상태를 해소할 '코먼웰스'의 성립은 곧 전쟁상태의 해소, 가치 다원화의 해소를 의미하게 된다. 다양한 생산물들이 교환을 통해 화폐라는 하나의 생산물의 가치체계로 수렴되듯이 정념에 기초한 다원적 가치체계들도 하나의 가치체계로서의 코먼웰스 혹은 과학으로 수렴되어야만 한다. 여기서 마르크스와 마찬가지로 홉스에게도 하나의 '모순'이 나타난다. 주권자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가치가 통일되어 있어야 하는데, 가치가 통일되어 있으면 이미 주권자는 "사실상" 존재하게 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통일되어야 하는데 통일되기 이전에 이미 통일되어 있는 이 동어반복적인 모순을 홉스는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바로 거기에 국가 탄생의 비밀이 있다. 도약으로서의 신약(信約, Covenant)이 바로 그 해답이다. 마르크스의 상품이 "상품의 목숨을 건 비약(Salto mortale)"(마르크스, 1990 : 141)을 하듯이 홉스의 주권자 또한 '도약으로서의 신약'을 통해 스스로를 형성해야만 한다. 법은 합리적 계약이 아닌 권위와 믿음에 의해 창출된다.

 "이 권력을 확립하는 유일한 길은 모든 사람의 의지를 다수결에 의해 하나의 의지로 결집하는 것, 즉 그들이 지닌 모든 권력과 힘을 '한 사람(one Man)' 혹은 '하나의 합의체(one Assembly)'에 양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들 모두의 인격을 지니는 한 사람 혹은 합의체를 임명하여, 그가 공공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어떤 행위를 하든, 혹은 [백성에게] 어떤 행위를 하게 하든, 각자가 그 모든 행위의 본인이 되고, 또한 본인임을 인정함으로써, 개개인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종속시키고, 개개인의 다양한 판단들을 그의 단 하나의 판단에 위임하는 것이다. 이것은 동의 혹은 화합 이상의 것이며, 만인이 만인과 상호 신의계약을 체결함으로써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동일 인격으로 결합되는 것이다. ... 이리하여 바로 저 위대한 '리바이어던(Leviathan)'이 탄생한다."(홉스, 2008 : 232) 

 마르크스에게 있어 일반적 가치형태의 '관철'이 가져온 모순이 논리적으로는 "교환행위", 역사적으로는 "유목민족"이라는 '역사적/외부적 개입'에 의해 해소되었듯이 홉스에게 있어 가치체계의 통일이라는 모순은 "교회"에 의해 해소된다. 홉스는 <리바이어던> 29장에서 코먼웰스를 약화시키거나 해체시키는 요인들에 대하여 분석하는데 이때 특히 주목해야 하는 것이 "선동적 학설의 해독에서 비롯되는 코먼웰스의 질병들"이다. 그중에서도 홉스는 "각자가 행위의 선악에 대한 판단자", 달리 표현하자면 "행위의 선악에 대한 척도는 명백히 시민법이며, 판단자는 입법자, 즉 항상 코먼웰스의 대표자"인 주권자가 되어야 하는데 각각의 개개인이 선악의 판단자가 되려고 하는 것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것은 "완전한 자연상태, 즉 시민법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나 "시민정부 하에서도 선악이 법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있"는 상태에서는 진실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사사로이 '규범적 가치체계'를 만들어내는 행위는 국가를 해체시키는 심각한 요소가 된다.(홉스, 2008 : 416)

 이런 맥락에서 홉스는 리바이어던이 해체될 수 있는 온갖 요인들을 검토하는데 대체로 사적인 개인들이 국가가 성립될 때 세워진 규범체계를 무시하고 독자적인 판단을 내려 국가 내부에서 새로운 가치규범체계가 창출되는 것에 대한 부정적인 언술로 가득하다. 그런 다음에 그는 바로 뒤의 제30장 '주권을 지닌 대표자의 직무에 대하여'에서 앞서 제29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국가를 성립시키는 '규범체계'와 다른 규범체계가 나타나지 않게 하는 요소로 "교육"을 꼽는다. 다시 말해서 국가는 인민의 "교사"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국가가 인민의 교사로서 오직 하나의 규범적 가치체계를 주입시키는 것, 알튀세르 식으로 표현하자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AIE)'로서 기능해야 한다는 게 홉스의 핵심적 주장이다. "주권자의 본질적 권리에 대하여 그 근거 및 이유를 인민들에게 알리지 않거나, 혹은 잘못 알도록 방치하는 것도 주권자의 의무에 위배되는 일이다."(홉스, 2008 : 431) 이런 맥락에서 지난 지윤평 14편에서 '홉스의 독해자'로서의 슈미트의 전체국가를 설명할 때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 이해된다.

슈미트가 보기에 대중사회 속에서 여러 이질적인 정치집단으로 분열된 민주주의의 상황을 의회와 자유주의는 감당할 수 없을뿐만 아니라 되려 이들 제도는 그러한 상황을 조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정치적 다원주의'를 극복하고 어떻게 다시금 '동질성'을 회복할 수 있는가? 슈미트는 히틀러의 나치즘에서 민족적이고 인종적인 동질성을 확보하고,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충성과 지도자의 카리스마에 입각한 하나의 '공동체'를 건설할 기획을 발견한다. 그는 독일이 잘 조직된 관료제, 나치즘 일당독재에 의해 이뤄지는 정치, 그리고 직능단체들의 매개에 의해 이뤄지는 행정이 히틀러의 '카리스마'를 매개로 하나로 통합되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런 의미에서 전체국가는 민족공동체의 완전한 통일을 전제로 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의 산물이 된다. 그렇게 다시금 "강력한 국가"를 재건하는 것으로 17~18세기 절대국가에서 출발하여 19세기 중성국가로 약화되었던 근대국가는 20세기 다시금 '경제에 대한 정치의 우위성'을 회복하며 재건되게 된다. 고차원적 회복으로서의 국가의 변증법적 운동이 나타난다.

이러한 '강력한 국가'는 사회 전반에 개입하고 그것을 장악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전체(全體)"국가가 된다. 그리고 전체국가는 자신의 개체적 존재의 재생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그 내부에 그것을 위협하는 '반(反)국가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적과 아군'의 구별이라는 우적(友敵)구별 테제가 바로 여기서 나타난다. 
전체국가는, 더 나아가 국가란 본질적으로 적과 아군의 구별을 전제로 하여 자신을 위협하는 집단을 제거하여 적과 아군의 대립이 혁명적인 사태로까지, 다시 말해서 전면적인 '내전'의 발발로까지 이어지지 않게 방지해야 한다. 그래야 질서에 입각한 안정적인 평시상태가 유지되며 법규범 및 법률에 의한 시민사회의 규율과 국가 자체의 존립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즉, 국가에게 있어서는 '법'과 '국가'의 자기존속을 위한 전제로서의 '우적'의 구별이 가장 중요한 기능이다. 이념이 없는 국가는 국가가 아니다! 슈미트가 보기에 20세기 바이마르 공화국은 국가가 갖고 있어야 할 '우적 구별', 즉 "정치적 기능"을 사회에게 빼앗긴 상태였으며, 그것이 바이마르 공화국이 보여준 극한의 혼란과 대립의 원인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다시금 되짚어보며 국내의 안정과 질서를 가져다줄 강력한 국가, 모든 폭력과 권력을 독점하여 사회 위에서 군림하며 자신의 '적(敵)'을 선포하고 제거하는 그런 국가를 바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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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우리는 다시금 원래의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리바이어던으로서의 국가가 성립한 다음에는 국가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서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인민에게 강제할 수 있겠지만,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 같은 국가의 '본원적 형성'은 어떻게 되는가? 이 지점에서 나타나야 하는 것이 바로 '교회'가 아닌가 한다.

홉스는 코먼웰스를 다룬 2부의 제31장 '자연에 의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에서 지금까지의 논의를 전제로 하나님의 나라가 상정하는 '자연법'과 '시민법'이 서로 '모순'될 가능성에 대해 논의를 한다. 앞서 국가가 하나의 일관된 규범적 가치체계를 전제로 성립하고, 그에 기초하여 그것의 인민에 대한 강요와 교육을 통해 스스로를 재생산한다는 것을 보았다면 이제는 시민사회의 영역에서의 가치규범 중 하나인 '종교'가 어떻게 국가와 모순되지 않을 수 있는가에 대해 논의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홉스는 3부와 4부에 걸쳐서 <성경>에 대한 해석을 살펴보고, 그릇된 성격해석이 어떻게 국가에 위해가 되는가에 대해 논의를 한다. 올바른 성경해석이 국가의 규범적 가치체계와 모순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어야만 비로소 종교에 기초하여 리바이어던, 국가를 부정하는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국가의 이데올로기에 부합하는 교육을 수행하는 기구로서의 '교회'는 국가의 시민법에 저촉되지 않는 종교적 규범체계를 시민들에게 주입함으로써 국가의 형성에 기여한다. 국가가 교회와 일체화되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흔히들 근대정치는 종교로부터의 '분리'에 의해 성립한다고 이해하지만, 홉스에게 있어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는 오히려 해소되어야 할 장애물이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한 규범적 판단과 개개인의 규범적 판단은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동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교육과 주입을 통한 정치적 규범과 종교적 규범의 '융합'의 시도로써 일치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국가는 정치적 권위뿐만 아니라 '신적(神的)' 권위까지 갖추어 보다 확고한 자기기반을 확립하게 된다. 이것이 홉스가 생각하는 "사회계약"이었다.

3. '사건에 의한 사회계약'의 불안정성

 이렇듯 홉스의 '사회계약'과 '내전', '전쟁상태' 등의 개념을 살펴보면 우리는 앞서 1장에서 보았던 한국적 사회계약의 특질이 본래적인 사회계약과 얼마나 '이질적'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홉스의 사회계약조차도 '교육'을 매개로 하는 일종의 '텍스트에 의한 사회계약'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는 근대국가의 '권위'가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광범위한 동의에 기초해 헤게모니를 형성하게 된다. 근대국가의 권위가 사회통합의 기제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이러한 '권위'를 갖춘 사회계약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에 대한 복종과 동의, 그리고 합의에 기초해서 사회가 운영되지 못하고 '사건'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폭력적으로 노동세력을 탄압하고 상징적으로나마 극우파를 인정하지 않는 일을 반복하는 것에 의해서 민주주의적인 제도 운영의 기초를 확립해왔다. 아무리 진보와 보수 간의 양극적 대립이 격화되더라도 이러한 한계선은 분명히 기능해왔다. 범진보진영은 더 이상 폭력혁명과 무장봉기를 주장하지 않고 있으며, 범보수 진영도 아무리 5.18 광주항쟁 등에 대한 폄훼를 하고 싶어도 적어도 공식적인 정당의 입장은 광주항쟁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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