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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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화쟁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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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18 August 2015
  ·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원효의 화쟁(和諍)을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는 개시개비(皆是皆非)로 해석하는 담론이 상당히 세를 얻고 있다. 불교학에서 탁월한 한 교수가 이렇게 해석하고 이를 칼럼, 책, 강연 등을 통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파하고 도법 스님의 화쟁위원회가 이런 대응과 실천을 여러 해 지속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진영의 논리를 떠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실천에 편승하고 있다.   
<장아함경>이나 <우다나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가 나온다. 등과 다리와 꼬리만 만진 장님들은 각각 코끼리가 언덕처럼, 기둥처럼,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웠다. 부처님은 사이비인 육사외도의 주장이 이들 장님과 같음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활용하였다. 
원효는 이 비유를 끌어와 화쟁에 대해 설명한다. 누구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옳지만[皆是],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채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고 있으니 그르다[皆非]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를 근거로 화쟁의 핵심이 바로 개시개비이니,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할 수 있다며 이를 4대강, 강정 등 한국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적용하자고 주장한다. 보수도 그래야 하지만 진보 진영도 정부쪽 이야기를 경청하라고 주문도 하였다. 도법 스님은 ‘진영의 감옥’에서 탈피하자며 4대강 문제 등에 정부쪽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함께 불러서 토론회를 가졌고, 노동이나 종단 개혁, 최근의 서의현 사태에서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설핏 보면 균형을 갖춘 합리적 방식 같지만, 실제나 결과는 그렇지 않다.
화쟁이 개시개비인 것은 옳지만 화쟁의 핵심은 아니다. 개시개비는 화쟁의 출발점일 뿐이며 이는 관념의 해석일 뿐이다. 화쟁은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이다. 극렬하게 싸우던 두 집단이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어 상생하는 것이 모두 잘되는 길임을 깨우치면 싸움을 멈출 것이다. 
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신병이 추운 겨울날에 찬 물로 세수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래라.”고 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다음 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고 시켰다. 신병이 그리 하자 인사계는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다. 하지만, 소대장은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 반면에 인사계는 고참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관계를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이다. 
세월호, 임금피크제, 서의현 사태 모두 마찬가지다. 대립자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양자를 불러다가 대화를 시켜서 도법 스님이 해결한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 교수의 말대로 강간당한 소녀에게 가해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것은 화쟁이 아니라 폭력이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대립자 사이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은 권력이다.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진 곳에서 화쟁은 가능하지 않다. 정부나 종단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고 많은 진실을 은폐하는 상황에서 약자보고 진영의 감옥에서 벗어나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강자를 편든 것으로 귀결된다. (미국 연방대법관으로 그의 이름을 딴 법학대학원이 뉴욕시에 있을 정도로 명판결과 명판결문으로 유명한 벤저민 카아도조(Benjamin N. Cardozo)가 “법관으로 재임 중 중립적이었다고 생각한 판결은 나중에 보니 강자에게 기울어진 판결이었고, 재임 중 약자에게 유리한 판결을 내렸다고 한 것은 나중에 보니 중립적이었다.”라고 한 것도 이런 관계를 고려한 발언이다.)  이런 결과를 모르고 계속 개시개비를 주장한다면 무지한 것이고, 알고 그런다면 이는 사악한 것이다. 
그러기에 세월호든, 임금피크제든, 서의현 사태든 이 문제를 화쟁으로 해결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을 파악하고, 먼저 대화의 장만큼은 권력이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하면 약자의 편에 서라. 그것이 바로 ‘공정한’ 화쟁을 이루는 길이다. 

* 1999년에 그때까지는 제가 가장 존경했던 스님인 도법 스님께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책을 드린 후 여러 차례 화쟁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 화쟁위원회가 처음 만들어졌을 때 위원들과 스님들께 조성택교수와 둘이서 화쟁에 대해 강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법스님께서 화쟁이 개시개비란 논리에 빠져버려 ‘진영의 감옥’ 운운하며 이런 식의 대안만을 고집했습니다. 4대강과 봉은사문제에서부터 시작하여 최근의 서의현사태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말씀을 드렸지만 전혀 수용되지 않아, 공개적으로 한겨레에 기고하였습니다. 페북에는 9.3매에 맞추느라 생략했던 문장도 살려서 올립니다. 도법스님께서 화쟁의 핵심이 개시개비란 미망에서 빨리 벗어나기를 염원합니다.
[왜냐면]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 이도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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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면] 화쟁의 핵심은 개시개비가 아니다 / 이도흠
등록 2015-08-17 18:43

원효의 화쟁(和諍)을 모두 옳고 모두 그르다는 개시개비(皆是皆非)로 해석하는 담론이 상당히 세를 얻고 있다. 한 교수가 이렇게 해석하고 이를 칼럼, 책, 강연 등을 통하여 수차례에 걸쳐 전파하고 도법 스님의 화쟁위원회가 이런 대응과 실천을 여러 해 지속하면서, 수많은 이들이 진영의 논리를 떠나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자는 실천에 편승하고 있다.
장아함경이나 우다나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 비유가 나온다. 등과 다리와 꼬리만 만진 장님들은 각각 코끼리가 언덕처럼, 기둥처럼, 밧줄처럼 생겼다고 주장하며 서로 싸웠다. 부처님은 사이비인 육사외도의 주장이 이들 장님과 같음을 비판하기 위하여 이 비유를 활용하였다.
원효는 이 비유를 끌어와 화쟁에 대해 설명한다. 누구든 코끼리를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므로 옳지만[皆是], 누구도 코끼리의 전모를 보지 못한 채 부분을 전체로 오인하고 있으니 그르다[皆非]는 것이다. 한 교수는 이를 근거로 화쟁의 핵심이 바로 개시개비이니, 다른 사람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이는 ‘평화로운 다툼’의 과정을 통해 코끼리의 전모를 완성할 수 있다며 이를 4대강, 강정 등 한국 사회의 갈등을 해결하는 데도 적용하자고 주장한다. 보수도 그래야 하지만 진보 진영도 정부 쪽 이야기를 경청하라고 주문도 하였다. 도법 스님은 ‘진영의 감옥’에서 탈피하자며 4대강 문제 등에 정부 쪽과 이에 반대하는 사람을 함께 불러서 토론회를 열었고, 노동이나 종단 개혁, 최근의 서의현 사태에서도 이런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선한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고 균형을 갖춘 합리적인 방식 같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화쟁이 개시개비인 것은 옳지만 화쟁의 핵심은 아니다. 개시개비는 화쟁의 출발점일 뿐이며 이는 관념의 해석일 뿐이다. 화쟁은 ‘대립물 사이의 연기적 깨우침’이다. 극렬하게 싸우던 두 집단이 서로 긴밀하게 의존하고 있어 상생하는 것이 모두 잘되는 길임을 깨우치면 싸움을 멈출 것이다. 한 이야기를 예로 들자. 신병이 추운 겨울날에 찬 물로 세수하고 있었다. 지나가던 소대장이 이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식당에 가서 온수를 달래라”고 했다. 신병은 그렇게 했다가 고참에게 군기가 빠졌다고 두들겨 맞았다. 다음날 아침 인사계가 신병에게 “식당의 김 병장에게 내가 세수할 온수를 달래서 가지고 와라”고 시켰다. 신병이 그리하자 인사계는 신병에게 그 물로 세수하라고 일렀다. 소대장과 인사계 모두 신병에 대한 자비심도 있었고 개시개비의 화쟁적 사고를 하였다. 하지만 소대장은 여러 조건을 고려하지 못하고 신병의 실체만 보았다. 반면에 인사계는 고참과 신병, 자신과 신병 사이의 연기관계를 파악하였기에 소대장과 다른 사고와 행동을 한 것이다.
세월호, 임금피크제, 서의현 사태 모두 마찬가지다. 대립자 사이에 놓인 조건과 인과관계를 무시하고 실체만 바라보고 개시개비하면, 관념은 가능할지라도 현실의 장에서는 화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양자를 불러다가 대화를 시켜서 도법 스님이 해결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특히 대립자 사이의 조건을 형성하는 것 가운데 가장 강력한 요인은 권력이다. 권력이 심하게 기울어진 곳에서 화쟁은 가능하지 않다. 정부나 종단이 압도적으로 강력한 권력을 갖고 있고 많은 진실을 은폐하는 상황에서 약자보고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것은 아무리 동기가 순수하더라도 강자를 편든 것으로 귀결된다. 그러기에 세월호든, 임금피크제든, 서의현 사태든 이 문제를 화쟁으로 해결하려면, 양자가 놓인 조건을 파악하고, 먼저 대화의 장만큼은 권력이 대칭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이 일에 실패하면 약자의 편에 서라. 그것이 바로 ‘공정한’ 화쟁이다.

이도흠 한양대 교수


Namgok Lee
30 July 2017
  · 
어제 고택에서 듣는 인문학 강좌에 다녀 왔다.
이도흠 교수의 ‘인류위기에 대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였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역작(力作)을 두어시간 안에 압축해서 발표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핵심을 뽑아 정성껏 발표한 이 교수에게 감사한다.
나는 고택이라 열린 공간인줄만 알고(전에 내가 발표한 적도 있으므로) 가장 시원한 옷을 골라서 입고 갔는데, 아뿔싸 에어컨이 나오는 안의에 있는 책박물관 고반재였다.
더구나 앉은 곳이 에어컨 바람을 정면에서 받는 곳이어서 몸에 이상이 왔다.
후반은 자리를 바꿔서 좀 나았지만, 몸의 상태가 듣는데 집중을 방해했다.
결국 질의응답과 토론 시간은 참가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치통까지 생겨서 약을 먹고 잤는데, 역시 깨는 것은 새벽 세시. ㅎㅎ


<왜 원효와 마르크스의 대화인가?>에서 이 교수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인식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의식을 마르크스로부터 얻고,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세상을 얻을 수 있는 지혜를 붓다에게서, 이를 화쟁의 원리로 하나로 아우른 동쪽 변방의 철학자, 원효에게서 찾는다‘고 말한다.
7세기의 원효와 19세기의 마르크스를 현대에 불러내서 만나게 하는 웅대한 작업이다.

어제 내가 페북에 올린 글 가운데 

“ 내 생각에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다는 것은 두 가지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물적 생산력이 인류의 총수요를 넘어설 만큼 충분해 진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그것이 사회주의든 공산주의든)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준비된다는 것이다.
나에게는 생산력은 준비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4차 혁명은 그것을 완숙하게 할 것이다.
지금의 자본주의 시스템으로는 감당 못할 사회적 모순이 발생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그것을 넘어서는 사회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준비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안되면 혼란이다.
따라서 혁명은 어쩌면 ‘사람의 혁명’이다.”와 상통하는 문제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마르크스가 예견하지 못한 ‘비움’이 사라진 자본주의 즉 40%에 가까운 생명체가 사라질 정도의 환경 위기에 대한 해법도 여러모로 제시했다.
어제 이 교수와의 만남은 처음이었지만, 페친으로 평소 그의 글들은 보고 있었다.
어제는 시간도 짧았는데다가 내 몸의 상태까지 안 좋아서 직접 대화를 하지 못했지만, 그의 문제의식과 미래전망에 동의하면서 언제 기회가 되면 다음의 테마들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를 바란다.

1.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을 이해하고 비판할 수 있는 의식을 마르크스에 어느 정도 의존할 수 있는가?
2. ‘정의가 있는 화쟁’에서 ‘정의’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공자의 ‘無適 無莫 義之與比 단정하지 않고, 의를 좇는다’라는 말과 화쟁을 나는 거의 같은 말로 이해하고 있는데 그 점은 어떤가? 
이것은 ‘자비의 분노’와 이어지는 것 같은데, 이 ‘분노’의 상태는 어떤 것인가?
내가 기회가 되면 이 두 점에 대해 논의해 보고 싶다.
어제 에어컨 때문에 혼이나 무덥지근한 공기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ㅎㅎ) 새벽의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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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mgok Lee
18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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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8일
이도흠 교수의 글을 공유한다.
'절대공동체'라는 단어가 인상적이다.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해방공간에서 '절대변증법'을 이야기한 선구자가 있었다.
나도 고 양정규 선생님으로부터 소개 받았었는데, 그 자료가 없어 안타깝다.
젊은 시절의 기억이지만, 그 엄혹한 시기에 유물변증법과 관념변증법을 넘어선 철학이었다고 생각된다.
한국의 철학계가 창조적 작업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철학적 토대를 만들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Doheum Lee
18 May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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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주민중항쟁일이다.(제가 80년대에 <지하신문>을 만들면서, 주체와 운동의 성격, 이념 등에서 이념적 지향성이 뚜렷하고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고 노동력을 판매하고 착취당하며 노동과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계급인 민중들이 주도한 자발적인 무장투쟁으로 보아  '광주민중항쟁'으로 규정한 것을 따릅니다.) 
총칼로 자신의 국민을 야만적으로 학살하는 군부독재정권에 맞서서 광주민중이 목숨을 걸고 투쟁하여 빛의 바다, 절대공동체를 열었던 날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살아남은 자’의 부채의식으로 30여 년을 살아왔는데, 그 빚을 채 갚기도 전에 세월호 참사를 맞아 이제 남은 삶에서 다시 그 부채를 갚으며 살아야 한다. 우리가 피로 쟁취하였던 것 가운데 많은 것들이 퇴행하고 유사하면서도 차이를 갖는 독재정권이 우리를 옥죄고 있다.
광주항쟁의 성지, 당시 총탄 자욱이 그대로 남아있던 옛 전남도청 건물에서 열린 광주민중항쟁 25주년 기념 토론회에서, 광주항쟁에서 투사로 싸웠고, 그 후 <매장시편>이라는 탁월한 시집을 냈던 임동확 시인(필자하고는 학생 때 전남대에 가서 광주항쟁 이후 한국 사회의 대안에 대해 마르크시즘에 입각하여 모색한 강연을 한 인연으로 맺어져 친구이자 동지로 지내고 있음.)의 요청으로 <5.18 민중항쟁에서 중심과 주변의 문제와 동아시아의 지평>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 논문 가운데 몇 문장을 발췌한다.(발표일이 도청 이전 직전인 2005년 5월경으로 기억하고 있음. 전문은 200자 원고지 141장에 달하는데 원하는 분께는 보내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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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중항쟁에서 중심과 주변의 문제와 동아시아의 지평>
1. 머리말 
문명사의 흐름에 비춰볼 때, 과연 5.18 민중항쟁은 중심과 주변의 교체를 가져왔는가. 교체하는 데 이바지하였다면, 5.18은 과연 어떤 중심을 어떤 주변으로 대체하는 데 기여하였는가. 그 양상과 현황은 어떻게 전개되고 대안은 또 무엇인가. 세계체제, 정치질서, 사회문화로 나누어 고찰해 보고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2. 세계체제와 反美 戰線의 형성, 수평적 동북아 질서의 태동
(……)신군부의 야만적인 학살에 미국이 관여한 것이 드러나면서 한국 대중들의 미국에 대한 환상과 신화가 해체된다.(……) 그럼에도 미국이 중심이 되는 시대는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세계체제의 역학관계를 볼 때 중국과 유로가 부상하여 다른 나라들과 더불어 미국과 4극체제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내부에 있다. 미국은 부시 정권에 와서 세계의 중심에 설 수 있었던 바탕인 퓨리터니즘과 프래그마티즘, 프로티어정신,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보편적 원칙을 거의 상실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5.18을 통해 축적한 대미 자주의식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균형자 역할을 잘 수행한다면, 동북아시아 국가들이 미국의 지배와 간섭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평화적인 공동체를 형성하는 ‘동북아 공동의 집’ 구상은 허황한 꿈이 아니다. 
3. 반독재 민주화 투쟁과 파워엘리트의 교체, 동아시아식 민주주의 모델
광주 민중은 신군부의 야만스런 탄압, ‘억압적 독재로의 회기’에 대항하여 공포 속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싸우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하며 신군부에 일격을 가하였다.(……) 이처럼 5.18은 지배층의 이데올로기의 허위성에 대해서도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며 지배층의 정당성에 도전하였다. 이는 결국 지배층의 중심에 타격을 가하고 주변부에 있던 이들이 지배층의 중심, 파워엘리트에 포진하게 하였다. (……) 비록 지금 노무현 정권이 (……) 개혁보다 실용을 선택하면서 더욱 진보와 개혁에서 멀어지고 있기는 하지만, 현금의 상황만으로도 동아시아 정치문화에 주는 메시지는 강하다. 일본은 전후 자민당의 독점체제가 무너지기는커녕 더욱 강화되고 있다. 자민당과 어깨를 겨루며 극우 노선에 일정한 견제와 비판을 행하던 사민당은 소수당으로 전락하였고 자민당은 극우의 물결 속에 거대여당이 되었다. 중국은 실용적이고 다소 민주적인 노선을 채택하고 있으나 본격적인 민주화나 정권교체는 요원하다. 북한은 정치 이전에 생존이 더 시급한 문제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의 예는 정권교체로 인한 중심과 주변의 이동이 정치적 역동성을 증대하고 사회통합을 강화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4.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종합과 셋이면서도 하나인 동아시아 문화 
5.18은 문학과 예술의 목적과 방법, 전략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광주학살 이후에 글을 쓰는 나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가 주요한 화두로 제기된다. (……) 진정한 리얼리즘은 미학적으로 모더니즘이다. 브레히트가 루카치의 주장에 대해 반론을 편대로 “선구적인 혁명가들은 민중들이 사회적 인과관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 매우 새로운 형식들을 이용하였다.” 낯설게하기를 하되 거기에 구체적 현실을 부여하여 맥락화를 하는 것, 그것이 대안이다. 우리는 리얼리즘이 갖고 있는 당대 객관적 현실에 대한 비판과 정치성, 진정성과 인간해방과 유토피아의 비전에 대한 지향성, 모더니즘이 내포하고 있는 새로운 실험과 낯설게하기를 통한 현실의 부정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를 종합할 수 있다. (……) 따라서 진정한 탈식민주의의 글쓰기란, 서양과 제국의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고 이를 넘어서서 타자화한 모더니티를 극복하는 작업을 수행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민족의 형식을 창조적, 변혁적으로 계승해야 한다. 아울러 서양의 이미지와 상징 조작에 맞서 고유의 상징과 이미지를 창조해야 하며, 나아가 서양의 패러다임이 아닌 동양, 또는 한국인의 패러다임으로 인간과 세계를 바라보고 이를 글로 형상화하여야 한다.(……) 
5. 절대공동체와 동아시아 공동체의 구현
5.18에서 가장 특기할 사항은 당시 그 극한의 상황에서 최정운 교수의 표현대로 ‘절대공동체’가 구현되었다는 점이다. “절대공동체는 자연스럽게 삶과 죽음을 넘어 공동체 단위로 정의했다. ‘살아남기 위해 싸운다.’ ‘우리 고장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라는 말들은 분명히 개인의 목숨과 공동체의 삶이 일치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생명의 나눔은 헌혈을 통해 피를 나눔으로써 구체화되었다. 이곳에는 사유재산도 없고, 생명도 내 것 네 것이 따로 없었다. 물론 이곳에는 계급도 없었다. 이제는 웃을 일도 심심치 않게 생겼다.” (……) 우리는 이 시점에서 5.18 기간 동안 구현되었던 절대공동체를 21세기 오늘의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구현할 것이고 이를 동아시아 공동체와 어떻게 연관시킬 것인가에 대하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소련의 해체를 목도하면서 우리는 좌절할, 꿈을 상실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실패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이다. 공산주의에 동양의 공동체 이론을 결합한 화쟁 공동체가 대안의 하나일 수 있는데, (……) 
6. 맺음말
가브리엘 마르께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을 보면 콜럼비아에서 1928년에 3,000여명의 노동자를 학살한 사건을 두고 “관리들은 말한다. ‘마콘도에선 그런 일은 없었고, 마콘도에서는 어떤 불상사도 여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로 그런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겁니다. 마콘도는 행복한 곳이니까요.’” 유일한 생존자 호세 아르카디오 세군도의 목격담은 미친 소리로 간주되고, 사람들은 법적인 증거와 기록, 교과서 등을 인용하며 마콘도엔 바나나 회사가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마콘도 또한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21세기 오늘, 5.18도 많은 부분이 마콘도를 닮아가고 있다. 5.18의 전국화, 세계화와 함께 끊임없이 지속되어야 하는 것은 기억 투쟁과 재현의 헤게모니 획득, 그리고 그 정신을 21세기 현실의 맥락에 맞게 계승, 발전시키는 것이다. 5.18은 더 이상 신기루가 되서도 안 되고 박제가 되서도 안 된다. 살아 꿈틀거리는 피와 살로 우리의 뇌를 채우고 가슴을 일렁이게 해야 한다. 동아시아에 그때의 절대 공동체가 구현되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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