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과 서의 벽을 넘어]문학박사 이도흠씨
입력 2001-01-21
《“원효는 언어기호가 세계에 대한 왜곡이고 차연(差延)인 줄 알면서도 언어기호로 세계를 드러내면서 세계 실체의 한 자락이나마 드러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성과 언어기호 저 너머에 궁극적 진리가 있음을 알았기 때문에, 언어기호로 온전한 진리를 전해 줄 수 없음을 알면서도 이성과 논리를 통해 진리의 한 단면을 가리키는 방편을 폈으며,모든 대립과 갈등을 화쟁의 원리로 아울렀다.”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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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대사께서 7세기에 세운 화쟁사상이 21세기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습니다.”
지나치게 거창한 말로 들릴 수도 있겠지만 현대학문의 아이디어 대부분이 결국 고전에서 나온 것을 보면 얼토당토 않은 생각만은 아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화쟁기호학(和諍記號學)’이라는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요즘 학계 안팎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문학박사 이도흠씨(한양대 강사·43).
향가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자신의 이론을 사회문제와 대중문화 등 다양한 영역에까지 적용하면서 대학 뿐 아니라 각종 교양강좌에서도 인기 강사로 자리잡고 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신라시대 향가인 ‘혜성가’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기록문과 구전 노래의 합일점을 모색했습니다. 1993년에 학위논문이 통과되면서 나름대로 성공적이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니 제가 한 것은 합일이 아니라 절충이었더군요.”
그는 우선 기존의 문학이론들이 작품의 미적 구조가 아니면 사회적 배경 등 한쪽에 치우쳐 있다는 문제의식을 갖게 됐다. 그는 이같은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골드만, 바흐친, 크리스테바 등의 이론을 공부했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은 서양의 이분법적 체계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을 보며 동양사상에 관심을 기울였고, 원효의 화쟁사상에서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던 것이다.
“화쟁은 여러 사상과 논쟁 가운데 그 핵심을 파악해 곡해와 대립을 낳고 있는 부분을 서로 통하게 하며, 일심(一心)으로 세계의 실체를 파악해 모든 시비와 망령됨을 끊고 원융(圓融)을 이루는 사상체계입니다.”
원효가 화쟁사상으로 반야와 유식의 대립을 넘어섰듯이, 그는 온갖 이분법적 대립에 물든 이 시대의 모든 기호에 그 화쟁의 방법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이분법적 대립이란 역사주의와 형식주의를 비롯해 기표(記標)와 기의(記意), 통시성과 공시성, 주체와 구조, 현실의 반영과 굴절, 작가와 독자 등을 가리킨다.
이 박사는 자신의 이론이 단순히 여러 비평이론의 절충이 아님을 강조한다. 화쟁기호학이 포괄하는 다양한 관점 이면에는 원효가 제시한 ‘일심’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드러나는 것은 그것이 변치 않는 실상이든 변하는 현상이든, 아니면 체(體·본체)나 상(相·현상)이나 용(用·작용)이든, 그것은 모두 ‘일심’이 드러난 것이기 때문에 이 ‘일심’에서 이분법적 대립이나 개별이론의 편협성을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화쟁기호학의 해석은 다양한 관점들을 복합적으로 드러내 때로는 혼란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차연(差延)’ 개념을 자주 이용해 의미의 규정을 미루기도 한다.
차연은 기호들 사이의 차이와 관계를 통해 의미가 지속적으로 생산 변화됨을 표현하는 개념으로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가 만든 것이다. 그러나 체계 만들기를 계속 거부하고 있는 데리다와 달리 그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려 한다. 결국 ‘일심’을 얼마나 구체화하는가에 화쟁기호학이 과학적 이론으로 자리잡을 수 있는지가 달려 있는 셈이다.
이 박사 스스로 인정하듯이 화쟁기호학이 하나의 이론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텍스트 해석에 화쟁의 원리가 속속들이 스며 들어가게 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하지만 그 텍스트를 언어기호에만 한정하지 않고 드라마, 영화, 광고 등 다양한 사회현상에 적용하는 그의 문제의식과 활발한 저술 강연 활동에서 화쟁기호학의 희망을 엿볼 수 있다.
<김형찬기자>khc@donga.com
◇약력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 박사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강사
△저서: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한양대출판부·1999)
‘신라인의 마음으로 삼국 유사를 읽는다’(푸른역사·2000)
‘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정음문 화사·2001)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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