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가 우치무라 간조, “간토대지진 후 자경단 가담했다”
홍이표 일본 야마나시에이와대 교수 “‘조선인 방화’ 믿었고 순찰에 참여했다”
2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 심포지엄에서 공개
기사입력 2023.09.02
홍이표(가운데) 일본 야마나시에이와대 교수가 2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우치무라 간조의 자경단 활동 내용을 발표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를 대표했던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1923년 일본 간토대지진 직후 조선인 학살에 앞장섰던 자경단 활동을 했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공개됐다.
그가 학살 등에 직접 가담했던 건 아니지만 자경단원으로 순찰 업무에 수차례 나섰고 ‘조선인에 의한 방화’ 같은 유언비어를 믿고 있었단 내용의 사료가 확인되면서 파장이 예상된다.
무교회주의의 창시자인 우치무라 간조는 ‘나는 어떻게 기독교 신도가 되었나’ ‘기독교 신도의 위로’ ‘성서의 연구’ 등을 쓴 기독교 사상가로 김교신 함석헌 최태용 등 한국인 제자들도 적지 않다.
이 같은 내용은 홍이표 일본 야마나시에이와대 교수의 발표를 통해 알려졌다.
홍 교수는 2일 한국기독교역사학회(회장 이재근 광신대 교수)가 간토대지진 100주년을 맞아 서울 새문안교회(이상학 목사)에서 연 학술 심포지엄에서 ‘한일 기독교 지식인의 간토대지진 인식과 대응’을 주제로 발표했다.
홍 교수는 “우치무라 간조가 대지진 이후 조선인 학살에 대해 ‘적극적 긍정형’ 입장을 갖고 학살에 냉소적 태도로 자경단에 참여했다”면서 “이 유형은 조선인 폭동설 등 유언비어를 진실로 믿는 사람들로서 당국이나 군경의 사고방식과 기본적으로 일치하며 조선인에 대한 거부감, 적대감에 기초해 자경단 활동을 적극 지지하거나 참여한 사람들이 속한다”고 분류했다.
우치무라 간조는 지진 발생 나흘 후인 1923년 9월 5일부터 쓴 일기와 저서 ‘말일의 모형-신일본 건설의 절호의 기회’라는 글에서 조선인 폭동설과 자경단 활동에 대한 소신을 밝혔다.
우치무라 간조.
대지진을 일본이 은혜와 속죄의 길로 나가는 첩경을 봤던 우치무라 간조는
“(대지진은) 정결해지기 위한 멸망이고 구원을 위한 멸망이며
신천지의 시작이고 신일본 건설의 절호의 기회를 부여받고 있다”고 봤다.
기독교 민족주의자이기도 했던 우치무라 간조는 일생 자신의 애국심을 ‘지저스(Jesus)’와 ‘저팬(Japan) 등 ‘두 개의 제이(J)’로 표현했다.
그가 100년 전 9월 22일과 24일에 각각 쓴 일기의 내용이다.
“센다이 사단 제29연대 제3중대 제2소대 병사가 오늘 이마이관을 떠났다. 그들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에게 평안을 안겨 주기 위한 군대라고 생각하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분위기가 안 좋다. 그저께 밤과 어젯밤에 가족과 함께 야경(夜警)에 종사하였고 오늘은 모두 녹초가 되었다.”
조선인 학살의 한복판에서 치안 유지에 나섰던 일본 군대에 대한 심정적 지지와 자경단 활동에 참여한 고백이 있다.
10월 5일 일기에는 자경단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어젯밤 순번에 따라서 자경단의 야번(夜番)을 섰다. 우치무라 의학사(도쿄제대 의학부 출신 아들)는 콘고즈에(수도자들이 쓰는 지팡이)와 제등(자루가 달린 휴대용 등)을 들고 앞장섰고 노 선생(본인)은 효시기(딱딱이) 소리를 내면서 그 뒤를 따랐다.”
조선인에 의한 방화와 절도라는 유언비어를 신뢰했던 우치무라 간조는 10월 18일 일기에 폭동에 대한 우려도 썼다.
“밤 8시경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야경 일에 임했다. 지진은 이미 멈췄다. 그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죄악이다. 재해 이후 50일이 경과한 오늘 방화 절도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교대로 매일 밤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홍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 기독교 문학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자경단에 참가해 활동했지만 그들의 무절제한 만행을 보고 단숨에 질려 자경단을 나와 칩거했고 후회했는데 우치무라 간조는 이후에도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훗날 재개된 성서연구회에 조선인 유학생을 태연하게 초대하며 그 시대를 모른 척 통과해 보려던 일련의 모습은 거대한 한 사상가의 인간적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실망을 안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그가 100년 전 9월 22일과 24일에 각각 쓴 일기의 내용이다.
“센다이 사단 제29연대 제3중대 제2소대 병사가 오늘 이마이관을 떠났다. 그들에 대하여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백성에게 평안을 안겨 주기 위한 군대라고 생각하면 존경하지 않을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분위기가 안 좋다. 그저께 밤과 어젯밤에 가족과 함께 야경(夜警)에 종사하였고 오늘은 모두 녹초가 되었다.”
조선인 학살의 한복판에서 치안 유지에 나섰던 일본 군대에 대한 심정적 지지와 자경단 활동에 참여한 고백이 있다.
10월 5일 일기에는 자경단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했다.
“어젯밤 순번에 따라서 자경단의 야번(夜番)을 섰다. 우치무라 의학사(도쿄제대 의학부 출신 아들)는 콘고즈에(수도자들이 쓰는 지팡이)와 제등(자루가 달린 휴대용 등)을 들고 앞장섰고 노 선생(본인)은 효시기(딱딱이) 소리를 내면서 그 뒤를 따랐다.”
조선인에 의한 방화와 절도라는 유언비어를 신뢰했던 우치무라 간조는 10월 18일 일기에 폭동에 대한 우려도 썼다.
“밤 8시경 집에 돌아왔다. 오자마자 야경 일에 임했다. 지진은 이미 멈췄다. 그치지 않는 것은 사람의 죄악이다. 재해 이후 50일이 경과한 오늘 방화 절도의 위험은 여전히 존재하며 우리는 교대로 매일 밤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홍 교수는 “일본의 대표적 기독교 문학 작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도 자경단에 참가해 활동했지만 그들의 무절제한 만행을 보고 단숨에 질려 자경단을 나와 칩거했고 후회했는데 우치무라 간조는 이후에도 조선인 학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고 훗날 재개된 성서연구회에 조선인 유학생을 태연하게 초대하며 그 시대를 모른 척 통과해 보려던 일련의 모습은 거대한 한 사상가의 인간적 한계를 드러냄과 동시에 실망을 안기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글·사진=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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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jin Pak
100년이 될 때까지 이 사실을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는 것이군요. 알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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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h
Yipyo Hong
Sejin Pak 야마모토, 스즈키 등 우치무라의 제자들이 전후에 스승이 자경단에 참여한 것을 변호한 사례가 두 건 있습니다. 야만적 자경단의 횡포를 지도하고 훈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경단에 참여한 것이라고 두둔한 거죠. 도시샤 신학부 역사신학 교수였던 도히 아키오 선생은 이러한 제자들의 옹호 발언은 설득력이 없다고 냉소했습니다.
우치무라 본인은 이후 1930년 사망 때까지 자경단 참여 문제나 조선인 학살 사건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일본 기독교계에서는 2011년에 처음으로 이 주제를 공론화하여 토론했지만, 그 때도 우치무라에 대해서는 변론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이후 알면서도 모른 척 언급하지 않는 분위기다 보니 여짓껏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아 왔습니다.
김교신과 함석헌 등 존경받는 인물들의 스승이라는 점에서 다루기 힘든 이슈였을 겁니다. 이번 100년을 맞아 제대로 소개함으로써 우치무라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진다면 그것도 좋은 일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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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
Sejin Pak
Yipyo Hong 그렇군요. 답변 감사합니다.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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