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20

[한일관계] 호사카 유지 교수 - 오선화 같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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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 호사카 유지 교수 - 오선화 같으다.




Park Yuha
Favourites · tesnroodpSe30h10b12me8t 0192pl0r8ecu5 aitt0gl70S8t4gmci5gc27 ·

학자의 기만과 태만
얼마전에는 김문길교수가, 일본정부가 이미 이십여년전에 발간한 자료를 마치 자신이 처음 발견한 것처럼 발표하기에 문제를 지적한 적이 있는데, 이번엔 호사카 교수가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 같다. 호사카교수는 자신이 자료를 발견했다고는 말하지 않은 듯 하지만, 호사카 교수가 말한 내용은 이미 오래전에 일본 학자들이 한 이야기다. 20년 전에 일본 정부가 발간한 자료집을 기존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을 거라고 호사카 교수는 생각했을까. 나조차도 이 자료집은 4년전에 <제국의 위안부>에서 사용했다.
(이 기사는 그나마 이 자료집이 일본에서 나온 거라고 기술하고 있지만, 호사카 교수가 발견한 것처럼 쓰고 있는 언론도 많다.)
위안부문제 연구는 수십년 축적이 있어서 독창적인 의견을 말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호사카교수가 위안부문제 연구에까지 뛰어든 거야 이해되지만, 그럴려면 기존 연구를 다는 읽지 못한다 해도, 중심적 연구 정도는 읽고 발언했어야 했다. 그건 석사과정생도 아는 얘기다.
그런데, 다른 곳도 아니고 내가 재직하는 학교에서 이런 내용을 기자회견까지 하면서 발표했다니 부끄럽고 참담하다. 일본이 알아도 웃을 것이고, 이정도 자료 존재는 알고 있을 전세계 연구자들도 당연히 웃을 것이다.
호사카 교수자신이 말하는 대로, 위안부 동원은 기본적으로 호주의 동의서를 포함,본인이 국가에 도항(이동)을 요청하는 서류가 필요했다. 말하자면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요건을 갖춘 사람에 한해 "합법적"으로 허가하고 이동하도록 했다. 이 기사에서 말하고 있는 건 말하자면 오늘의 여권 같은 것이다. 설사 서류부족을 묵인했다 해도, 중요한 건 기본방침이 어땠는지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덧붙이자면, 합법이었으니 문제가 없다는 건 아니다. )
이 기사에서 주목해야 하는 건, 위안부문제에 대해 일본이 부정하고 있는 책임은 책임 자체가 아니라 "법적" 책임이라는 사실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그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아 일본이 모든 책임을 부정하는 것처럼 이해되고 있었지만, 이 시점에서 이 사실만이라도 제대로 공유되면 좋겠다.
또하나, 일본군 위안부의 중심은 일본인여성이었다는 사실이다. 훗날 위안부숫자는 조선인이 더 많아진 것 같지만, 위안부 중에는 늘 일본인이 있었고, 최후에 일본군과 함께 전쟁터에서 옥쇄라는 이름의 집단자살로 희생된 여성 중에는 일본인 여성이 더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비록 남의 해석을 빌린 거지만(일본의 배를 탔으니 강제연행, 이라는 해석도 이미 다른 학자가 내놓은 해석이다)., 호사카 교수의 발표가 말해 주는 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하는 "강제연행"에 대해서는 학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런 무리한 해석까지 내놓으면서 "강제성"을 증명하려 하는 것이 학계의 현황이다.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1991년 문제제기 시점에서 학계가 조선인위안부문제도 글자 그대로의 "강제연행"이라고 이해했기 때문이고, 그런 이해에 기반해 주장했던 "법적책임"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서다. 말하자면 오늘의 혼란은, 연구가 진전되었는데도 무시하거나 자료해석을 다르게 하면서, 초기의 "운동적 주장"을 고수하려는 태도가 만든 결과다.
조선에서는 더 강압적 동원이 이루어졌을 거라고 호사카교수는 말하는데, 그 부분도 이미 연구들이 있으니 참고하시라. 물론 그런 논문을 철저하게 비판하는 연구도 또 있다.
또하나, 호사카교수는 일본이 무슨 목적으로 이 자료집을 만들었는지 모른다고 말했는데, 당연히 위안부 문제 관련해서 자료를 공개하라는 요청에 부응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건 정보를 먼저 독점한 학자의 기만이다. 목적은,
이 자료집을 발간한 아시아 여성 기금 홈페이지에 가면 다 나와 있다.
호사카교수의 "목적"은 고노담화 부정인 듯 한데, 그건 일본의 이른바 "양심적" 학자들도 찬성하지 않을 것이다. 뒤늦게 위안부 문제를 흔들려면, 제대로 흔들어 주기를 바란다.
사실,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기분이다. 하지만, 이런 기만을 방치하는 건 또다른 태만일 수 밖에 없어서 쓴다.
어제도 다른 분이 언급한 다른 문제에 대한 댓글에서 썼지만, 우리 사회는 소모가 너무 많다.
호사카 유지 교수 “일본 내 위안부 동원, 외무성·경찰 등서 협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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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 “일본 내 위안부 동원, 외무성·경찰 등서 협조”
일본군이 과거 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본 행정부 기관들에 협조요청을 했고 외무성과 내무성, 경찰 등이 이에 응했다는 내용이 담긴 1930년대 일본 정부 문건들이 공개됐다. 일본군과 민간 업자 외에도 행정부까지 위안부 동원 과정에 관여 내지는 방조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간 법적 책임이 없다던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자료이다. 이 자료는 일본 내 위안부 동원 과정에 대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위안부 동원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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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사카 유지 교수 “일본 내 위안부 동원, 외무성·경찰 등서 협조”
2017.09.19 22:05 입력
윤승민 기자


번역·분석 중인 1930년대 일본 문건 공개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19일 오전 서울 광진구 세종대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일본 내무성과 외무성 등 행정부가 일본군 위안부 조직에 개입한 증거를 공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일본군이 과거 군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일본 행정부 기관들에 협조요청을 했고 외무성과 내무성, 경찰 등이 이에 응했다는 내용이 담긴 1930년대 일본 정부 문건들이 공개됐다.


일본군과 민간 업자 외에도 행정부까지 위안부 동원 과정에 관여 내지는 방조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간 법적 책임이 없다던 일본 정부의 주장과는 배치되는 자료이다. 이 자료는 일본 내 위안부 동원 과정에 대한 것이지만 당시 한국에서 벌어진 위안부 동원도 같은 방식으로 진행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계 한국인인 호사카 유지(保坂祐二) 세종대 대양휴머니티칼리지 교수(61)는 19일 서울 세종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해 아시아여성기금이 1997년에 편찬한 문서집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 중 일부 문건의 내용을 발표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19일 공개한 1938년 2월18일자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 문서. 이 문서에는 위안부 동원 과정에 내무성이 개입한 정황이 드러나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 제공

총 5권에 이르는 문서집은 호사카 교수가 소장으로 있는 세종대 독도종합연구소에서 번역·분석 중이다. 이날 발표된 문건들은 1937~1938년 일본 외무성, 내무성 소속 경찰청 등이 작성한 것이다. 당시는 1937년 난징대학살 이후 일본군의 재외 위안소 설치 및 위안부 모집이 본격화된 시점이다.


이날 기자회견에는 1938년 2월7일자로 작성된 일본 경찰청 문서 ‘시국 이용 부녀유괴 피의사건에 관한 건’ 문서 내용이 주로 공개됐다. 이 문서는 부녀자들을 납치했다는 혐의로 붙잡힌 업자들이 경찰에 “1937년 12월 중국 상하이에 보내는 위안부 3000명을 군에서 모집하기 시작했고, 군의 의뢰로 위안부를 동원하는 과정에서 지역 경찰의 편의를 제공받았다”고 진술한 내용이 담겼다.


경찰청은 편의를 제공했다는 나가사키현과 오사카부 경찰에 사실관계를 물었고, 해당 경찰서에서 회신한 내용도 같은 문건에 나온다. 나가사키현 경찰은 “주중국 상하이 일본총영사관 경찰서장으로부터 ‘황군 장병 위안부녀 도항(배를 타고 바다를 건넘)에 대해 편의제공 의뢰’를 전달받았다”고 답변했다. 나가사키현은 일본군이 필요로 하는 위안부와 위안부 모집 업자들의 출국을 허가해왔다는 내용도 있다.


오사카 구조 경찰서장도 경찰청에 “상하이 파견군 위안소의 종업 작부 모집에 관해 내무성으로부터 비공식으로지만 우리 오사카부 경찰부장에게 의뢰한 바가 있다”며 “오사카부에서도 상당한 편의를 제공했다”고 회신했다.


특히 해당 문건에는 “도항 시 편의 제공”, “항구 도착과 동시에 영사관에 머물게 하지 말고 직접 헌병대에 인계” 등 외무성이 관여한 정황도 있다. 이에 대해 호사카 교수는 “중국 현지의 일본군이 외무성 소속의 현지 총영사관에 위안부 동원 협조를 요청했고, 이는 일본 내무성, 경찰청 순서로 전달됐다”고 주장했다.


또 이날 공개된 1938년 2월18일자 경찰청 ‘내무성 경보국장 통첩 : 지나(중국) 도항 부녀 취급에 관한 건’ 문서에는 위안부 동원 과정에서 내무성이 개입한 정황이 적혔다.


문건 중 ‘내무성의 결정’ 부분에는 “추업(더러운 직업·성매매를 뜻하는 은어)을 목적으로 하는 여성의 도항은 ‘추업에 종사하는 만 21세 이상 및 성병, 기타 전염성 질환이 없는 자’로 이들이 도항할 때 신분증명서 발급을 신청할 경우 부모나 호주의 승인을 얻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그러면서도 “아울러 북지나, 중부지나 방면으로 가는 자는 당분간 이것(자격요건 충족 여부)을 묵인할 것”이라고 돼 있었다. 호사카 교수는 “사실상 성 노동자, 21세 이상이 아닌 여성도 부모 동의 없이 위안소에 끌려갈 수 있었던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호사카 교수는 “오늘 문건들은 주로 일본 본토 내 위안부 동원에 관련된 것”이라며 “당시 식민지였던 조선에서의 위안부 동원은 일본 본토에서보다 더 강압적으로 이뤄졌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문서집 5권 중 3권의 번역을 마친 호사카 교수는 이번 기자회견은 중간보고 차원이고 내년 2월까지 전체 문서의 번역 및 분석작업을 완료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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