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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23. 아와 무아③-이도흠의 ‘눈부처’
기자명 법보신문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
입력 2007.09.05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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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눈동자 속 나 나인가, 너인가
<사진설명>‘킬링필드’의 주인공 폴 포트가 캄보디아 인구 4분의 1을 죽음으로 내몰게 된 이면에는 타자를 배척함으로써 소수의 동질성을 지키려는 무모한 욕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
나는 없는데 내가 있다고 집착하면 타인의 욕망을 점유하고 그들을 배제하고 폭력을 가하면서 나를 지키고 강화하려 한다. 하지만, 내가 없다며 나를 버리면 나는 타인을 위해 오히려 나의 욕망을 절제하며 그를 그답게 하여 거꾸로 나를 존재하게 한다. 이런 역설을 이론화한 것이 원효의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논리며, 한 마디 낱말로 응축한 것이 바로 ‘눈부처’다. 연기 원리에 따라 무아를 깨닫는 것이 과학이라면, 타자와 관계 속에서 무아를 인식하는 것은 윤리다.
관계 속 무아인식이 ‘윤리’
집터를 넓히려/산기슭 흙 덜어내려는데/소복하게 담긴 건/흙이 아니라 청개구리 한 마리,//허리 굽혀 들여다보니/그 놈 눈에 내가 담겼다.//그도 내 눈 안에서/자기를 본 모양,//도망갈 생각은커녕/가부좌를 틀고/염불을 한다.
필자가 지은 ‘눈부처’란 시이다. 시골 작은 집에 가서 삽을 들고 산기슭 흙 덜어내 마당을 넓히려는데 삽 위에 담긴 흙 위로 청개구리 한 마리가 폴짝 뛰어들었다. 도망도 가지 않았다. 삽보다, 삽 위에 담긴 흙보다 크게 보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를 낮추어야 보이는 법.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니 청개구리 눈망울에 내 모습이 보인다. 도망을 가지 않고 그대로 앉아 있는 청개구리를 보니, 그 청개구리도 내 눈동자에서 자기 모습을 본 모양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형상이 꼭 부처를 닮았다. 개굴개굴 울며 염불까지 한다. 청개구리는 그동안 내가 박해하거나 경멸했었던 내 안의 타자들, 곧 여성, 장애인, 이주노동자, 노인, 작은 생명들이다. 어느 누가 여기서 삽질을 더할 것인가. 염불을 들으며 나는 개구리와 내가 공존하는 길을 꿈꾼다.
글을 읽는 지금 이 순간 당장 옆에 있는 사람과 마주 보고 눈을 맞추시라. 똑바로 상대방의 눈동자를 바라보면 상대방의 눈동자 안에서 내 모습을 발견할 것이다. 이를 한국어로 ‘눈부처’라 한다. 내 모습 속에 숨어있는 부처, 곧 타자와 자연, 약자들을 사랑하고 포용하고 희생하면서 그들과 공존하려는 마음이 상대방의 눈동자를 거울로 삼아 비추어진 것이다. 그 눈부처를 바라보는 순간 상대방과 나의 구분이 사라진다. 상대방을 살해하려 간 자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발견하는 순간 상대방에게 폭력을 가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20세기가 전쟁과 학살로 점철된 것 또한 근본적으로 자성(自性), 혹은 동일성의 사유를 보편적인 사유로 가졌기 때문이다. 폴 포트(Pol Pot)를 만난 이들은 그가 아주 온화하고 지적이며 상대방을 설득하는 능력이 뛰어나면서도 겸손하고 과묵하며 따스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캄보디아 인구의 1/4에 달하는 170만 명을 킬링필드로 보냈을까? 그의 뜻만큼은 숭고하였다. 캄보디아 농촌을 보고서 그는 캄보디아 전체를 농촌처럼 서로 사랑하고 연대하며 순박한 인심을 가진 공동체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동일성으로 하여 타자, 곧 ‘도시적인 것’을 철저히 배제하고서 절대 순수한 농촌공동체를 건설하고자 하였다. 그는 도시와 시장, 학교를 없애버리고 안경을 낀 사람도 ‘도시스러움’을 갖고 있다고 처형할 정도로 농촌공동체의 범주에 들어오지 않는 타자에 대해 폭력을 가하여 농촌공동체의 동일성을 유지하고자 하였다. 바로 자성의 사고, 동일성의 패러다임이 그들을 그렇게 악마로 바꾸어버렸던 것이다.
나치즘의 유대인 대학살과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 스탈린주의와 수용소군도, 미군의 밀라이 대학살, 유고의 인종 청소 모두 나를 확보하기 위하여 타자에 대해 “너는 우리 편이 아니다.”라는 타자에 대한 배제의 담론의 소산이다.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불 속에 던져버린 일본 군인들이 악마의 화신이었을까? 아니다. 그들도 소설을 읽고 엉엉 울어버리고 첫사랑에 온밤을 설렘으로 지새우고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에 눈물을 훔치던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다. 다만 “저들은 우리 편이 아니야. 남이야. 저들이 사라져야 우리 일본이 대동아공영을 이룰 수 있어.”라는 식으로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통해 동일성을 확보하려 한 데서 기인한다.
타인 배척이 대학살 불러
21세기 오늘 부시와 라덴도 마찬가지다. 한국 사회의 올바른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지역주의와 패거리주의, 혼혈인과 제3세계 노동자에 대한 차별도 동일성의 사유에서 기인한 것이다. 이처럼 동일성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통해 동일성을 강화한다.
원효는 이에 대해 변동어이(辨同於異)의 논리를 편다. “같다는 것은 다름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다르다는 것은 같음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다.” 원효는 동일성은 타자성에서 같음을 분별한 것이요, 타자성은 동일성에서 다름을 밝힌 것이라 주장한다. 변동어이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들뢰즈의 ‘차이 그 자체’ 혹은 ‘내적 차이’나 레비나스의 타자성의 윤리도 이와 통한다.
변동어이의 차이, 곧 역동적이고 생성하는 차이는 개념적인 차이와 다르다. 우리가 제3세계 노동자를 차별하지 않고 관용으로 포용하는 똘레랑스의 정신도 개념적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변동어이의 차이는 이를 넘어서는 감성적이자 생성하는 차이다. 예를 들어, 한 이스라엘인이 자신과 다른 팔레스타인의 문화를 인정하고 그들을 차별하지 않고 유대인과 똑같이 관용으로 대하는 것은 개념적 차이를 인식한 데서 오는 것이다. 하지만 연극 ‘Plonter’의 배우와 스텝들은 개념적 차이에 바탕을 둔 관용이 얼마나 허술하고 관념적인지 절감하였다. 이 연극은 자살폭탄 테러로 남편을 잃은 이스라엘 여인과 이스라엘 군인의 총에 아들을 잃은 팔레스타인 여인을 중심으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갈등과 화해를 다룬 것이다. 이 연극에서 5명의 이스라엘인 배우가 팔레스타인 역을, 4명의 팔레스타인 배우가 이스라엘인 역을 연기하였다. 이제까지 상대방을 관용으로 대했던 그들도 서로 역할을 바꾸어 연기를 하면서 처음엔 서로 소리를 지르고 울부짖으며 싸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들은 7개월의 공동 작업을 통해 내 안의 타자, 상대방의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서로를 진정 이해하고 포용하게 되었고 결국 연극을 완성하였다. 바로 이들 배우는 감성과 몸을 통해 내적 차이를 깨달은 것이다.
이처럼 변동어이의 차이는 두 사상(事象)이 서로 차이를 긍정하고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된다. 차이를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자는 다른 것을 만나서 그것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킨다. 나와 타자 사이의 진정한 차이와 내 안의 타자를 발견하고서 자신의 동일성을 버리고 타자 안에서 눈부처를 발견하고서 내가 타자가 되는 것이 변동어이의 차이다. 변동어이의 차이의 사유로 바라보면, 이것과 저것의 구분이 무너지며 그 사이에 내재하는 권력,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의 담론은 서서히 힘을 상실한다. 그 타자가 자신의 친구든 원수든, 기독교도든 이슬람이든, 자연이든 인간이든 그를 부처로 만들어 내가 부처가 되는 사유다. 우리가 타인들을 만날 때마다, “오늘 당신의 눈에서 눈부처를 봅니다.”라고 인사한다면 세상은 좀 더 평화로운 세상이 되리라. 내가 없다고 하여 타자를 있게 하면 그 순간 나 또한 있게 된다.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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