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민
오정환 님 페북에서
우리는 대한민국 근현대사에 너무 무지하고 공부할 것이 많다.
[잔혹했던 여순반란사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제주도의 빨치산 활동이 더욱 거세졌다. 육군 총사령부는 병력을 증파하기로 했다. 여수에 주둔 중인 14연대에도 1개 대대를 선발해 제주도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이 정보를 입수한 남로당 빨치산 군사총책 이중업은 14연대 내 조직책 지창수 상사에게 반란을 지령했다. 14연대가 거사하면 각 부대에서 일제히 호응해 이제 두 달밖에 안 된 정부를 쉽게 무너뜨릴 것으로 예상했다.
남로당은 미 군정의 국방경비대 창설 이후 꾸준히 군에 당원들을 침투시켰다. 특히 여수 14연대는 ‘붉은 연대’라 불릴 정도로 남로당원들이 많았다. 그런데 지창수 상사가 이끄는 ‘병사 소비에트’와 남파 공작원 김지회 중위 등 장교들의 ‘콤 서클’은 서로 존재조차 몰라 혼선이 빚어졌다.
1대대가 출발하는 1948년 10월 19일 밤 연대 장교들이 모두 모여 환송 회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식당 안으로 수백 발의 총알이 날아들었다. 지창수 등 병사 50여 명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이들은 장교 20여 명을 막사까지 쫓아가 살해했다.
그리고 비상 나팔을 불어 1대대 장병들을 연병장에 모았다. 지창수는 단상에 올라가 이렇게 말했다. “북조선 인민군이 38선을 넘어 남진하고 있다. 이승만은 인민을 버리고 일본으로 도망갔다. 우리는 이제 인민해방군으로서 북상한다.” 황당한 소리였다. 하사관 두 명과 사병 한 명이 고함을 치며 반대했다. 지창수는 그 자리에서 이들을 사살했다. 공포에 질린 병사들은 더이상 저항하지 못했다.
여수 인민위원회 소속 남로당원 23명이 부대 앞 식품점에서 몇 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이들은 거사에 성공했다는 전갈을 받고 부대 안으로 뛰어 들어가 반란군에 합류했다.
반란군은 여수 시내로 몰려갔다. 경찰관 200명이 지키고 있던 여수경찰서는 한 시간 동안 총격전을 벌이다 항복했다. 10월 20일 새벽 5시, 여수 전체가 반란군 수중에 떨어졌다. 그리고 경찰과 공무원 우익인사들에 대한 학살이 시작됐다.
대구폭동 때와 마찬가지로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성이 폭발했다. 여수경찰서 경찰관 9명을 벽에 세워 놓고 차로 들이받아 죽였다. 여경인 국말래와 정헌자를 집에서 끌고 와 끔찍한 성적 학대를 가하다 처형했다. 이들은 칼로 난자당하며 제발 빨리 죽여달라고 절규하다 숨졌다고 한다.
반란군은 기차를 타고 순천으로 향했다. 경찰은 동천강을 사이에 두고 저항했다. 그러나 광주에서 지원 나온 4연대 중대 병력이 우파 장교와 사병 30명을 죽이고 경찰을 뒤에서 공격했다.
순천에서도 학살극이 벌어졌다. 순천경찰서장의 눈을 뽑고 청년단장과 함께 차에 매달아 끌고 다녀 죽었다. 순천에서 900여 명을 죽였다. 여수에서는 1,000여 명이 학살당했다.
국군이 반격에 나섰다. 반군 토벌 전투사령부를 구성하고 38선 경비 병력을 뺀 12개 대대를 투입했다. 내부 반란을 수습한 광주 4연대는 21일 새벽 순천에서 구례 쪽으로 북상하던 14연대 반란군을 공격해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리고 오후부터 순천 진입을 시도해 다음 날 오전 모두 탈환했다.
열세에 놓인 반란군은 지리산으로 도주했다. 그리고 여수의 방어를 좌익 청년과 학생들에게 맡겼다. 인민군이 38선을 넘었다는 말에 속아 멋모르고 나섰다가 옥쇄를 강요당한 것이다. 이들이 무려 나흘 동안 저항한 뒤 10월 27일 새벽 여수가 점령되면서 여순반란은 종결됐다. 군대를 뒤따라온 경찰은 동료와 가족들의 처참한 시신을 보고 격분해 무자비한 보복을 벌였다.
14연대 반란을 계기로 남로당원을 색출하기 위한 대대적인 숙군 작업이 이루어졌다.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형사처벌 또는 불명예제대로 군을 떠났다. 그리고 수사에 겁을 먹고 5,568명이 탈영했다. 두 숫자를 합하면 당시 육군 병력의 무려 10%였다. 만약 이 인원이 그대로 국군에 남아있었더라면 대한민국은 존립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6.25 때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국군 안에서 부대 단위로 배신하는 일은 없었다.
- ‘세번의 혁명과 이승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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