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7

조선을 떠나며 | 이연식 | 알라딘

조선을 떠나며 | 이연식 | 알라딘


조선을 떠나며 -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 
이연식 (지은이)역사비평사2012-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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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6쪽
책소개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


목차


책머리에: ‘억류와 탈출’, ‘송환과 밀항’의 변주곡 ● 5

1. 뜻하지 않은 재앙, 패전
되돌아온 조선총독 부인의 배 ● 16 / 생경한 공포의 실체 ● 24 / 은행 창구로 몰려가다 ● 33 / 거리마다 넘쳐 나는 물자 ● 39 / 패전 국민의 자화상 ● 45

2. 사면초가에 처한 조선총독부
야속한 일본 정부 ● 54 / 무능한 조선총독부 ● 58 / 지도부의 갈등 ● 62 / 회심의 묘책 ● 65 / 김계조 사건과 일본인 접대부 ● 68 / 조선총독부의 변신, 일본인세화회 ● 72 / 원죄가 부른 보복 ● 75

3. 잔류와 귀환의 갈림길에 선 일본인들
때 아닌 조선어 강습 열기 ● 80 / 잔류파와 귀환파의 기싸움 ● 84 / 항구에서 붙잡힌 수산업계의 대부 ● 88 / 도둑배와 송환선, 무엇을 탈 것인가 ● 91 / 왜노 소탕을 외치는 조선인 ● 97 / 믿을 수 없는 점령군 ● 101

4. 억류.압송.탈출의 극한 체험
문신투성이 로스케 ● 108 / 사람 잡는 ‘현지 조달’ ● 114 / 사고뭉치 소련군과 그 앞잡이 ● 117 / 끌려간 자와 남겨진 자 ● 121 / 일본인도 꺼리던 만주 피난민 ● 130

5. 뒤집어진 세상을 원망하며
뒤바뀐 운명 ● 138 / 생경한 집단생활 ● 142 / 뼈에 사무치는 삶의 낙차 ● 148 / 아지노모토를 내다 파는 사람들 ● 154 / ‘로스케 마담’의 등장 ● 160 / 캄차카 고기잡이와 노동귀족 ● 168 / ‘마담 다바이’ 놀이와 대탈출 ● 175

6. 모국 일본의 배신
동포에게 당한 설움 ● 188 / 사회적 낙인, 히키아게샤 ● 193 / 총리실로 날아든 20만 통의 편지 ● 200
‘전쟁 피해자’라는 기묘한 논리 ● 206 / 체험과 기억의 틈바구니 ● 212

7. 만남과 헤어짐, 그리고 다른 기억들
‘왜노’ 출몰 소동의 전말 ● 222 / 친일파의 계보를 잇는 모리배 ● 229 / 또 다른 보복의 악순환 ● 240 /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 ● 247 / 회한과 그리움의 장소, 조선 ● 256

마치며: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 268
미주 ● 274
접기


책속에서


경성일본인세회회에서는 귀환 대기 중에 있거나 북에서 탈출한 일본인을 위해 이재민 병원과 이동의료국을 운영했다. 의료는 대개 경성제국대학 의과대학 교직원과 학생들이 담당했는데, 다나카 마사시도 그 구성원으로 활동했다. 이들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에도 대표적인 귀환 창구였던 하카타를 중심으로 해외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치료를 담당했다. 하카타항에서 약 40분 거리에 있는 구 애국부인휴양소에 후쓰카이치 보양소가 설치되자 이들은 의료진의 주축으로서 부녀자들을 들보아야 했다. 그런데 이들이 담당한 치료란 다름 아닌 패전 후 원치 않은 임신을 한 여성에게 강제 낙태 시술을 한 것이었다.-50-51쪽 접기 - mizuaki
10월 들어 일본인 부윤과 부의회 의원이 파면되고 조선인 신임 시장과 의원이 선출되었다. 그런데 11월 새 의회가 상정한 첫 안건이 지금의 신흥초등학교, 송도중학교, 답동로 일대에 자리 잡은 율목리 일본인 묘지의 이전 문제였다. 1902년에 조성된 이 일본인 공동묘지를 두고 신임 시장과 의원들은 도시 미관을 해친다는 것이었다. (중략) 결국 이 묘지의 유골들은 편조사(현재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동쪽) 일대의 방공호에 모아서 그대로 매몰해 버렸다고 전한다.-87-88쪽 접기 - mizuaki
경성제국대학 이과교원양성소에 다니던 도코 요시마사는 패전 소식을 듣고 가족이 살고 있는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왔다. 그는 이제 먹고살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해야만 했다. '일본인들은 모두들 열심히 일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같은 마을의 조선인 집에서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기 시작했다. 이 일 저일 하면서 육체노동이 몸에 익어갈 무렵, 주말에는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공중목욕탕에서 일하게 되었다. 아침 일찍 욕조에 물을 받고 장작을 때 물을 데우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인과 대면하면서 상처받은 마음은 좀처럼 추스를 수 없었다.
조선인들은 일부러 다른 사람들도 들으라는 듯이 여기저기서 더운물을 가져오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네"라고 답하며 곧바로 물을 대령해야 했다. 때로는 꼬마 아이조차 "야! 일본 도깨비, 설렁설렁 놀지 말고 물이나 푸라고." 하면서 야단을 쳤다. (중략) 얼마 전에는 같이 일하는 아줌마가 고무장화를 손에 쥔 채 헐레벌떡 뛰어왔다. (아래에 계속)-138-139쪽 접기 - mizuaki
(위에서 계속)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기모토 씨가 예전부터 데리고 일하던 '오야마'라는 조선인이 자신을 희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평소에도 아줌마 주변을 어슬렁대며 치근대던 거였다. 그는 "요즘 힘들지?" 하면서 아이에게 건네줄 것이 있다며 꾀어내 아줌마를 와락 끌어안았다. 만일 아줌마의 남편이 어디론가 끌려가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것이다.-138-139쪽 접기 - mizuaki
패전과 더불어 일본인 공직자와 회사원들은 직장에서 추방되었고 청장년기의 남성은 외지로 압송되어 가족과 헤어졌다. 자영업자도 일본인의 경제활동 금지 조처에 따라 더 이상 점포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160쪽 - mizuak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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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및 역자소개
이연식 (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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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소피아대(上智大, 蘭科硏) 및 유럽 대학 연합 국제공동연구단 학술연구기금 교수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인구이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유럽제국과 일본제국 붕괴 후 본국인의 귀환 과정, 재산 처리와 법적 지위, 인구 유입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비교 연구해왔다. 최근에는 정착지를 찾지 못한 실향민(Displaced Person), 국제난민(International Refugee), 냉전기의 반체제 이탈 주민, 그리고 사람의 집단 이동에 따른 물자와 문화 전파 현상을 공부하고 있다.
1993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사를 전공했다. 1999년 일본 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국립도쿄가쿠게이대학교(國立東京學藝大學) 일본연구과에 유학하였다. 2002년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한일역사공동위원회 현대사분과 조교, 2003년 국무총리실 산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연구위원, 2008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서울시립대학교 국제대학원과 일반대학원,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한국현대사, 국제교류사, 서울지역사 등을 강의했다. 2013년 일본 소피아대의 '일본제국 내 인구이동' 공동 연구에 참여한 이래 2021년부터는 옥스포드, 하이델베르크, 베네치아, 루뱅, 야기엘론스키 대학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유럽 대학 국제공동연구단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전후 인구이동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출간된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사, 2012)와 일본제국 붕괴 후의 인구이동을 다룬 蘭信三 外, 『引揚ㆍ追放ㆍ殘留』(名古屋大學出版會, 2019, 공저)가 있다. 그 밖에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 사할린한인 문제와 한러일 3국 관계』(채륜, 2018, 공저) 등 약 50여 편의 전후 인구이동 관련 논문과 저서, 한일 정부 및 유네스코·유엔난민기구의 조사 연구 보고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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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제공 책소개
1945년 그때,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하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우수저작, 역사비평사가 펴낸 역사 논픽션

식민지, 정치 예속, 경제적 침략과 수탈…
1910년 한일병합과 동시에 시작된 일제 35년간을 특징짓는 핵심 키워드들이다. 우리는 한일 양 민족의 지배와 피지배 관계로 시작된 불편한 만남과 그 이후, 즉 식민지 시기에 대해서는 많은 책들과 다큐멘터리를 통해 어느 정도 실상을 알고 있다. 또한 (아주 당연하지만) 해방을 맞은 조선의 다양한 표정과 조선인들의 신국가 건설 노력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1945년 조선의 해방(일본으로서는 ‘패전’)을 계기로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는 과정과 그 모습에 주목한 책은 찾아보기 힘들다.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은 과연 어떻게 되었을까? 식민자로 조선에 왔으니, 패전을 맞아 모국 본토로 아무 문제 없이 그냥 돌아갔을까?
이 책은 1945년 조선에서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뒷모습을 추적한 역사 논픽션이다.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에피소드로 엮어나간 이야기 속에는 조선총독부 최고위 관료부터 시작하여 독립운동가를 고문한 경찰, 일본인 갑부, 조선 태생의 일본인, 교사 등이 1945년 조선에서 어떻게 패전을 맞았는지, 조선에 남긴 폐긴 폐해는 무엇이며, 일본으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돌아간 일본에서 어떤 대우를 받았는지가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오랜 한일관계사 속에서 식민지 조선으로부터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은 과연 어떠한 집단이었을까? 그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은 한일 양국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이 책이 던지는 물음이다.

1945년 조선은 해방을 맞이했지만,
일본인들에게 그것은 일찍이 겪어보지 못한 생경한 공포요, 끔찍한 재앙이었다

1945년 8월 16일부터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조선 전역에서 중앙에 보고된 ‘불상사건不祥事件’은 총 913건이었다. 사건 내역을 살펴보면 조선인이 집단으로 습격한 곳은 주로 경찰관서, 지방행정기관, 신사였다. 또한 개인을 상대로 한 살상과 폭행 사건은 약 267건이 보고되었는데, 주된 표적은 경찰관, 학교 교원, 행정기관의 공무원, 그리고 그 가족들이었다. (…) 패전 후 벌어진 이 같은 사태에 당황한 총독부는 8월 18일 각 기관에 걸어둔 천황 사진을 불태울 것을 지시하는 한편, 각 지역 신사에 신속히 연락해 신령이 불경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위패를 불태우는 승신식昇神式을 거행하라고 했다. 일본 식민 지배의 상징인 천황 사진은 말할 것도 없고, 거류민에게 온갖 재앙을 막아주는 액막이로서 정서적 안정감을 안겨준 일상의 공간이자 일본 문화의 구현체였던 신사가 ‘불경’하기 그지없는 조선인들에 의해 파괴되는 것을 차마 두 손 놓고 지켜볼 수 없었던 것이다. 일본인들은 사건의 경중과 다과를 떠나 이러한 초유의 사태를 경험하며 집단적 공포에 시달렸다.
―본문 25~26쪽

천황의 항복 선언 직후 조선 각지에서는 조선인들의 집단행동이 표출되었다. 일제 식민 지배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다가 해방을 맞아 그동안 봉인되었던 해묵은 감정을 토해낸 것이다.
집단적 공포와 공황 상태에 빠져든 일본인들은 저마다 제 살 길을 찾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들은 통장과 도장을 들고 은행 창구로 몰려가고, 귀환에 앞서 가재도구를 팔기에 바빴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비상시국에서 조선총독부는 무능했고,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관이 자신들을 지켜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에 이들은 ‘돈’을 더 믿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일본 정부는 식민지의 일본인들이 본토로 한꺼번에 쇄도하여 사회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총독부로 하여금 가급적 조선의 일본인들을 현지에 머무르게 하라고 지시했다. 조선의 치안 유지를 감당할 힘도 없고, 일본 정부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수도 없으며, 점령군에게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교섭도 벌여야 한 데다, 하루라도 빨리 귀환하려는 일본인들의 요청을 계속 무시할 수도 없는 조선총독부는 그야말로 사면초가에 처했다.

각기 다른 처지에 놓인 남쪽과 북쪽의 일본인들
집단 송환과 밀항, 그리고 억류·압송·탈출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거나 조선 땅에서 오랫동안 뿌리박고 살아온 일본인들은 조선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패전으로 인해 왜 자신들이 ‘낯선’ 땅 일본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조선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잔류파와 귀환파의 갈등이 크게 불거지기도 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의 거센 추방 압력과 미군정의 송환 행정에 따라 조선에 남아 계속 살고자 했던 일본인들도 결국은 본토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그들의 고민거리는 어떻게 일본으로 더 많은 재산을 갖고 가느냐였다.

1945년 12월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 발생했다. 수십 년 동안 부산에서 ‘3거두巨頭’ 혹은 ‘4거두’ 소리를 듣던 일본인 유력자 중의 한 사람이 옹색하게도 자전거 튜브에 주식·채권·보험증서 등을 숨겨 일본으로 밀항을 시도하다가 해안경찰에 체포된 것이다.
―본문 88~89쪽

38도선 이남을 점령한 미군정은 처음에는 송환행정을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다가 점증하는 조선인의 요구를 제한적으로 반영하면서, 송환하는 일본인들의 소지금을 1인당 1,000엔, 화물은 두 손에 들 수 있는 짐으로 제한했다. 한 푼이라도 더 많은 재산을 들고 가려 한 일본인들은 공식 송환선이 아닌 밀항선, 일명 도둑배에 오르기 위해 온갖 수단을 이용했고, 미 군정에 각종 로비 행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브로커와 결탁한 갖가지 폐해가 성행했다.
한편 소련 점령지의 북한 내 일본인들은 바로 송환되지 못했다. 특히 식민 통치와 직결된 남성의 경우 점령군이나 새롭게 들어선 현지 정권에 의해 투옥·압송·억류되었다. 게다가 각종 공출과 곧 이어 시작된 재산 몰수에 따른 집단 공동생활은 남한의 일본인에 비해 훨씬 열악한 거류와 귀환 환경을 초래했다. 남성들이 시베리아 등지의 타지로 끌려가거나 압송된 상황에서 남겨진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가족과 떨어져 피난하고 탈출해야 했기에 ‘국가 부재’와 ‘가장 부재’를 더 뼈저리게 실감해야 했다.

모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귀환자, 그러나 마침내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다
‘전쟁 피해자’에 담긴 정치적 수사

저자 이연식은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과 목소리를 높이지 않는다. 1945년 시점에서 조선의 일본인들이 패전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응해 나갔는지, 본토 귀환을 앞둔 일본인들의 표정과 마지막 뒷모습을 그들 자신의 입을 통해 서술하고 있다. 당시의 현장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한 묘사와 마치 르포 같은 서술로 엮어내고 있다. 또한 당시 신문기사의 내용도 꼼꼼하게 챙겨 복잡다단한 사회상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식민기구의 최상층을 차지하는 정치인보다는 오히려 평범한 갑남을녀의 일본인들이 실제 맞닥뜨린 패전의 공포와 어떡하든 자신의 재산을 지키고자 좌고우면하는 모습이 적나라하다. 그뿐 아니라 남쪽과 북쪽에서 각기 미군정과 소군정이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앞세우며 처리하는 행정 체계, 그리고 귀환하는 일본인들과 결탁하여 온갖 부정을 저지르는 조선인 브로커의 모습도 실감난다. 이 때문에 논픽션으로서 이 책의 특징이 더욱 잘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고 저자가 자신의 견해를 아주 숨기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패전 후 일본인들이 경험한 이 생경한 불안과 공포는 곧 조선인에 대해 굳이 관심을 두지 않아도 일상을 영위할 수 있었던 특권의 대가였다. 지난 역사에 대한 망각과 무지가 곧 불안과 공포의 원인이었던 것이다”라거나 “조선인에게 일본인의 마지막 모습은 그들이 처음 이 땅에 발을 디딜 때와 마찬가지로 살상과 파괴로 점철되었다”와 같이 패전과 귀환 국면의 일본인들의 모습을 그들의 회고록 등을 통해 그려내면서도 분석과 평가를 과하지 않게 곁들인다. 이는 저자가 독자로 하여금 당시의 사회상을 읽으며 복잡다단한 사회상과 조선을 떠난 식민자의 두 얼굴을 스스로 생각해보고 평가하게 하기 위해서다.
이러한 저자가 자신의 생각을 크게 드러낸 곳은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가 ‘전쟁 피해자’로 둔갑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전후 일본 정부와 사회의 태도를 서술한 부분에서이다.

해외 귀환자들은 우여곡절 끝에 일본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실제로 이들이 입은 객관적 피해에 대한 보상 개념이 아니라, 전후 일본 정부의 다양한 ‘필요와 지향’이 녹아든 담론적 성격이 강했다. 일본 정부 입장에서 보자면 당시 재정 상태로는 어차피 공적자금을 통한 구제가 어려웠던 상황이기 때문에 이들의 마음을 달래고 사회 일반의 도움을 이끌어내기 위한 명분이 필요했다. 그리고 제각기 다른 피해와 보상을 주장하는 여러 집단의 요구를 무마하면서 동시에 이들을 새로운 국민국가의 국민으로 통합하기 위해서도 무언가 공통의 화두가 필요했다. ‘전쟁 피해자’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 등장하여 전 사회적으로 유포되었다. 이것이 ‘전쟁 피해자’라는 정치적 수사의 본질이었다.
―본문 211쪽

패전과 동시에 일본으로 돌아간 귀환자들은 자국 동포로부터 식민지민을 착취해 호사를 누린 ‘대륙 침략의 첨병’이라는 비판을 받고, 대공습과 패전으로 인해 가뜩이나 살기 힘든 전후 일본 사회에 일자리를 위협하고 식량을 축내는 ‘민폐 집단’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결국 자신이 떠나온 조선은 물론이고 모국에서조차 환영받지 못한 ‘일본제국의 사생아’ 집단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청원운동을 벌였고 마침내 정부로부터 ‘전쟁 피해자’로 공인받기에 이른다.
저자는 차분하게 문제 제기한다. 이들은 일본의 ‘해외 귀환자’이기 이전에 일본제국을 뒷받침하던 ‘식민자’였다고. 피해의 맥락에서만 이들을 바라본다면 식민자로서 행한 가해의 문제를 간과할 수 있다고. 이들이 한반도를 떠나가면서 남긴 흔적이 한일 양국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그리고 한일 양국이 가해와 피해의 기억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이러한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고 살펴보아야 한다고.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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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지나다닐 때면 느낀다. ‘이제 정말 이어폰 안 끼고 지나다니는 사람을 찾기가 어렵구나.’ 게다가 유선 이어폰이 아닌 무선 이어폰이다. 시대가 얼마나 빨리 흘러가는지 놀라울 지경이다. 하긴 나도 산책을 할 때면 음악을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어폰을 착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날 퇴근길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다가 내릴 때가 되었는데 귀를 좀 쉬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어폰을 가방에 넣고 내렸다. 공기를 느끼면서 길을 걸었고 주변을 살피니 사람들의 표정이 들어왔다. 아이를 데리고 귀가하는 학부모, 학원을 가기 위해 가방을 메고 뛰어가는 아이, 지팡이를 짚고 지나가는 어르신 등등… 그러나 한 어르신이 핸드폰에 스피커가 켜져 있는채 지나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어폰으로 들으시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자세히 들어보니 “인생은 무의미합니다. …….” 이런 류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갑자기 어쩐지 무안해지면서 얼굴이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뉴스인 것일까, 아니면 라디오인가, 역시 유튜브의 컨텐츠일까 씁쓸하기도 하고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아버지 연세 정도 되는 분이셔서 그런지 몰라도 불현듯 아버지 생각이 났다. 평소 정말 자주 안하는 전화를 그것도 매번 용건만 간단히 하는 나다. 사실 전화를 걸어도 늘 비슷한 대화가 오간다. “식사 하셨어요? 아프신 곳은 좀 어떠신가요?” 그럼 아버지의 대답은 “괜찮다. 고맙다.” 이게 끝이다. 참 단조로운 대화가 아닐 수 없지만 그럼에도 어머니는 아버지께 전화 좀 자주 하라고 다그치신다(어머니께도 전화 자주 안하는 것은 마찬가지기는한데…). 아무튼 아버지께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도 이전의 대화와 똑같은 상황이 이어졌고 전화는 순식간에 끝이 났다. 어르신을 눈여겨 보지 않았다면, 내가 만약 이어폰을 낀 채 같은 자리를 걸어갔다면 그때 아버지께 전화를 걸 일은 없었을 것이다. 속으로 어르신께 감사 인사를 드렸다. 부디 내가 과민반응한 것이기를 하고 바라면서… 어르신이 인생무상이 모토라서 그저 가볍게 들은 컨텐츠였다고 말이다.











(봐도 또 봐도 좋은 장미)




주말에 운동 복습을 하자 생각했는데 어느덧 일요일 늦은 오후가 되어가고 있었다. 체육관을 나가는 것까지가 왜 이리 힘든 것인지… 산책은 그리 쉽게 하면서 아무튼! 굳은 결심을 하고 체육관을 나갔다. 아직 해는 지지 않은 시각이었지만 비가 오려는지 날이 후텁지근했다. 얼마 후면 PT 선생님이 바뀌게 되는데 새로운 선생님이 내 코어 상태에 대해 궁금하셨는지 선생님께 물어보셨다고 한다. 나는 “코어 근육 거의 없다고 해주세요.”라고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체육관에 도착했고 스트레칭 후 집에서는 하지 못하는 기구를 상하체 골고루 하고 유산소까지 하니 2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늘은 바를 이용한 팔굽혀펴기를 하는데 허리가 꺾인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고 시티드 레그 익스텐션할 때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늘 낮에는 청계천을 걸었다. 요즘 외근이 잦아서 4월부터 이 부근을 몇 차례나 오는 중인데 오늘도 그랬던 것이다. 비가 애매하게 내려서 우산을 쓰다 말다를 반복하며 걸었다. 관광하시는 분들도 많고 직장인들도 점심 먹고 나와서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걷다 보니 어딘가에서 촬영을 나왔는지 사람들이 모여 있고 그 부근을 사람들이 둘러싸듯 구경중이었으나 나는 건너뛰었다. 비가 많이 내렸다면 잠겨서 청계천을 산책할 수 없었을텐데 이렇게 산책할 수 있다는 것이 작은 행복이었다.






(오늘 먹은 판모밀&돈까스 정식, 맛있었다!)




이번 주는 짧게나마 옆지기와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대선 투표하고 마음이 가벼워질지 무거워질지는 모르겠지만 이 지저분한 진흙탕 싸움이 일단락될 수는 있겠지.







- 4,5월에 읽은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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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5-06-02 공감 (22) 댓글 (4)









4월에 읽었던 <조선을 떠나며>, 얼마 전 읽은 <다시 조선으로>를 더 들여다보고 싶어 주말 동안 그 과정을 짧게나마 진행했다. 더 깊이 읽고자 하면 미주에 있는 참고 사항을 확인해보며 정리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기엔 시간상 제약이 크니 최소한 꼭 보아야 할 기사나 영상 위주로 체크를 해둔 상태였다. <다시 조선으로>를 한 번 더 읽었다. 초독 때도 간단하게 내용을 적으면서 읽기는 했는데 재독 때도 열심히 적어가면서 읽었다(역시나 놓쳤던 내용이 이다지도 많은지).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은 따로 읽어도 좋지만 함께 읽으면 시너지가 더 상승되고 보충이 된다고 생각했다.




먼저 나는 다큐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을 보았다. KBS 광복절 특별기획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2013), 일본 종전기념일 특별기획 NHK <망각된 귀환자> 2부작(2013)에 저자의 <조선을 떠나며> 내용을 참고로 제작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서다. 다만 NHK 방송은 내가 일본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에 자료 검색 자체를 할 수가 없어 보기를 내려놓았고 KBS 다큐멘터리만 시청했다. KBS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명확히 보였다. 주로 해방 직후 25일 간 조선총독부의 태도 변화에 주목하며 그들의 범죄를 추적하는데 집중했다. 조선총독부는 8월 20일이 되자 조선 반도의 책임 통제를 재천명했고 일본 주류 사회의 분위기도 바뀌게 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남하를 걱정했던 그들의 지연이 늦어진 것이 결정타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제 미군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해야 했고 이를 위해 당시 미 24사단 하지 중장에게 비밀 서신을 80여통 보내 조선의 사정을 알렸다. 다만 그들은 사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달하고 새로 꾸려진 건준 등 조선의 정치 세력을 깎아내리거나 불온한 세력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조선인들의 폭동 제지를 위해 치안 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강변했다. 9월 8일 미 24단이 들어왔을 때 하지는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있는 채 도착했을 것이지만 결정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앞선 서신 로비는 미군 도착 시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향해 발포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권 화폐를 불과 2주 만에 140억 발행하면서 남한 경제를 교란시켰다. 이 돈의 절반은 예금 인출로 사용되었지만 나머지 반은 조선총독부 관리, 귀환하는 조선군, 기업인의 퇴각 자금으로 쓰여졌다. 다만 남한의 혼란한 상황을 제대로 이용한 이들은 친일파를 비롯한 투기꾼들이었다. 이들의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포커싱이 맞춰져 있지 않다. 말미에 김계조 댄스홀 사건이 언급되는 정도인데 분량을 보면 소략하다. 이 때문에 비리와 범죄의 온상은 조선총독부이고 이를 비호해준 것은 미군정이라는 단순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NHK 방송의 내용은 조선총독부 관련 내용보다는 소련군이 남하하면서 북한에 있던 일본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 집중했다고 한다.

해방 후 남북한의 귀환 과정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남한의 일본인 귀환은 미군정에 의해 1946년 2~3월이 되면 대부분 다 이루어졌으나 북한에 있던 일본인은 소련군의 진주로 사실상 귀환이 늦어져 1946년 3월 이후에나 귀환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참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같은 책의 내용이 포커싱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 시선으로 다른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도 일방적인 수용이나 비난보다는 비판적인 자세가 요구되듯 시청각 자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책 <다시 조선으로>에서는 일본인의 귀환이 늦어지고 조선인의 수용이 늦어지면서 이루어진 양민족 간의 불편한 동거 전개 내용을 잘 다루고 있다. 남한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거류민의 안전 확보를 위해 세화회 조직을 만들고 미군정 정책에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여기에 도움을 주었던 친일파나 투기꾼들은 국공유, 사유 부동산, 기업체를 불법 매수하고 구호품을 횡령하였으며 생필품 등을 사재기하고 밀수하며 자기 배를 불렸다. 일본인들이 재산을 돌려 감시를 피해 밀항하는 동안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사유재산을 허용해주면서 투기를 사실상 방조하고 묵인, 비호했다.




두 번째로 다큐멘터리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2019)를 보았다.

얼마 전 읽었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에 사할린의 한인을 다루는 챕터가 다큐 시청에 도움이 되었다. 사할린의 남쪽 지역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사할린에 자발적 또는 강제 징용으로 간 한인 노동자들이 1941~42년에는 개인적으로 도주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1943년 이후가 되면 집단 도주가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 환경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러시아 공식 기록 문서에 의하면 종전까지 인구 만명 정도였던 조선인의 수가 그 후 5천명으로 감소한다. 이는 피난, 귀환의 이유도 있지만 일본인에 의한 학살이 원인이라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특히 ‘카미시스카 학살’, ‘미즈호 학살’에 대한 참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증언자들의 증언과 참상에 대한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 너무 잔혹하고 끔찍했다. 일본군은 조선인을 항상 특별 관리(특수부대가 있었다고)하며 경계와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이 전쟁에 참전하자 일본(군)은 다급해진 나머지 피난 명령을 내린 뒤 군 시설 등을 모두 파괴했다. 문제는 조선인들을 소련군의 스파이 취급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몰살시켰다는 데 있다. 미즈호 마을은 27명으로 집계되었다가 나중에 피해 규명이 되면서 35명으로 늘어났다(이들은 심지어 민간인들이었다). 카미시스카에서도 18명의 학살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협정 당시에도 사할린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 정부는 초반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경계로 이들을 다루지 않고 그 이후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1992년 사할린 영주 귀국의 길이 열렸을 때 증언과 사료를 모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생각했다. 심지어 이때 영주 귀국 자격 조건은 1945년 이전 건너간 사람들로 제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다큐 마지막에 조국과 한국인들은 사할린 한인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는 인터뷰이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이래서 이 역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 번째로 한겨레 기사 <‘우키시마호 사건’ 특별한 남북일 시민연대>를 읽었다.

우키시마호 사건 현장과 기록은 일본에 있고 생환자와 유족은 한국에 있는 사건인데 시민단체가 이에 접근하여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우키시마호 사건 발생 원인에 대해서 미군이 설치한 지뢰에 의한 폭침 때문이다라는 설과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에 의한 공격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사건 발생 후 재일조선인연맹이 일본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합국 총사령부에 조사 요청을 했으나 미군정도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1950년 선체 인양을 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신원 확인된 유골 일부를 봉환할 수 있게 한 것은 모두 재일조선인 연맹 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우키시마호의 출항지인 아오모리 지역 시민 단체, 침몰지인 교토의 시민그룹인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사건 소송을 주도한 ‘일본국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모임’은 소송을 하고 사건에 관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진행했다. 한일(+미국) 정부가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동안 발벗고 나서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도 이런 자료들이 쌓일 수가 있었다. 정부는 앞으로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여전히 관심조차 없을지 답답하다.




재일조선인의 북송 과정을 다룬 KBS 파노라마 다큐멘터리(2013)를 보고 싶었는데 자료를 아무리 검색해도 영상을 찾지 못해 다큐를 언급한 기사를 보고 짧게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관리하며 차별하고 특별 대상으로 삼았던 시기였다. 이때 북한은 현대식 고층 아파트를 제공하고 무상 의료 서비스를 보장한다며 달콤한 유혹을 했다. 이에 조총련 중심으로 북한 귀국을 촉구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많은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다시 가난과 차별에 직면해야 했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한번 들어간 그곳에서 다시 빠져나올 길은 만무했다는 데 있다. 이후에도 조총련은 북한의 실제 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재일동포를 계속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계속 했다. 다큐멘터리에는 10만명에 이르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유괴했다(?)고 다소 자극적인 언급을 했는데 너무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아쉽지만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는 수밖에.



거리의화가 2025-05-18 공감 (22) 댓글 (0)





여러 번 이곳에서 언급했듯 나는 해방 전후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동안 관련 책들을 읽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일이 있었다니(고?).’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놀라움을 느낀다. 동시에 여전히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느끼게도 한다.




저자는 해방 전후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으로 귀환한 자, 해외에 동원되었거나 해외에 거류하다가 한반도로 돌아온 자들에 대하여 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일본 소피아 대학에서 일본인이나 외국인(유럽인)을 상대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 어떤 계기로 작년에 저자의 또 다른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일을 알게 되었다. 최근 출간된 저작은 이번에 내가 읽은 이 책의 후속 시리즈 성격을 지닌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해에 나온 책은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두고 전 시리즈인 이 책부터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해방 후의 역사는 주로 한반도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귀환(임정 등), 일제의 시스템을 답습한 미군정(쌀 파동 등), 미소대립, 이후 국내 정치 세력의 분열,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흘러간다. 다양한 저작이 나오면서 이를 보충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국내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떠날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일본에 정착해서는 어떠했는지를 통해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재구성한다(P5).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사건과 다양한 계급의 일본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에피소드는 해방 정국의 혼란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조선총독부는 본토에 긴급 타전을 했으나 일본인들의 귀환을 가능한 최대한 미루라 지시받는다. 이는 일본 국내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꺼번에 밀려들 귀환자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정치 세력과 타협을 통해 일본인을 보호하려는 고육책을 펼친다. 일본인들은 은행이 파산할 것을 우려하였고 이에 전국적으로 외화를 반출하려 하면서 대량인출사태가 벌어진다. 이 와중에 이를 이용한 환전상들이 수혜자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각 지역에 있던 세화회를 통했다. 세화회는 조선총독부가 식민기구와 조선군이 무력화될 경우에 대비하여 미군 진주 후에도 귀환 원호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 조직으로 1945년 8~9월에 걸쳐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이중 경성일본인세화회는 남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초 대부분 돌아간 뒤에도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체류하며 북한 지역에서 남하한 일본인들의 원호까지 담당한 곳이었다. 이곳의 임원진은 거의 구 총독부 관료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세화회는 조선에 잔류하는 일본인과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 중 잔류를 희망하는 쪽에 있던 일본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일본인들은 송환선을 타고 본토로 귀환해야 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3일 민간인 송환 업무 창구를 외사과로 통일하고, 일본인 송환 원호를 위해 설치한 종전사무처리본부와 일본인세화회를 통해 이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송환 순서는 현역 일본군->휴가 중이거나 제대한 군인과 가족->구 일본 경찰 등 바람직하지 않은 자->신관->일본인 광산노동자->일반 민간인 중 원호 대상자->일반 민간인->고위 공직자와 회사 간부->교통 및 통신 요원 순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은 이처럼 차등을 두어 귀환 절차를 진행한데다가 일본인 재산 반출에 제한 조치까지 더하면서 혼란을 키운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배 공급이 부족해지자 밀수배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조선의 수산왕으로 유명했던 기시이 겐타로는 밀수선을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히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회사 자금을 횡령한 뒤 미군정의 허술한 관리를 이용해 조선인 브로커를 끼고 몰래 반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형태가 전개되었다. 주택 매수 조치로 북한의 일본인과 민간인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산업 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소련군이 자원을 반출하면서 북한 지역 사람들은 이중고를 겪었다고 한다. 소련군은 일본인을 고급 노동력으로 보아 이들을 귀환시키려하지 않았다. 살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일본인들은 귀환 전까지 집단공동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와중에도 북한에 살던 일본인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으나 만주에서 온 피난민, 전란을 피해 이동해온 일본인은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여기에서도 계급이 나뉘어진 것이다). 1946년 봄이 되면 일본에 귀환하지 못한 이들의 상당수가 집단 남하를 한다(소련의 묵인, 조선인 사회의 요구 등에 의해).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갔으나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귀환한 일본인 남성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력감에 빠졌고 여성은 순결을 의심받으며 색안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들은 귀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일부는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과 전재민과 소개민 등 본토의 전쟁 피해자들을 넓은 범위의 피해자로 뭉뚱그리며 이들의 요구를 적당히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었던만큼 각기 다른 처우가 필요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지원 금액도 턱없이 작았다. 시간을 끌면서 해외 귀환자들의 교부금은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일본 정부가 구 식민지 출신의 피해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서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지남’ 등의 이유를 들게 되는 나쁜 선례가 되었다.




<요코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 이 책이 알려지고 난 뒤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여러 권의 책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0년대 말부터 <요코 이야기>의 저자와 같은 개인 체험이나 수기가 많았다고 전해준다(하긴 왜 아니 그랬겠는가.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대표작으로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언급한다. 그 책은 북한 지역에서 돌아간 여성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후 이를 대표하는 저작들은 대개 이 책과 비슷한 귀환 여정을 담으며 선례가 된다.

문제는 수기가 일본인들을 피해의 맥락으로만 파악하게 하면서 역사적 진실과 함의는 놓치게 하고 식민지 지배 시기 가한 행위에 대한 문제는 등한시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는 <요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런 체험 수기가 있는 반면 또 다른 유형의 체험 수기가 있었다. 주인공인 이소가야는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1928년 함경남도 나남의 보병연대에 보충병으로 입대한 뒤 1930년대 조선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1945년 이후에는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 적극 나섰고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조선의 사정에 대해 계속 궁금해했으며 이것이 한반도의 동향에 관한 책을 집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패전과 해방 국면에서 북한 당국과 소련 점령군, 재류 일본인 사이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어떠한 체험을 하느냐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의 역사적 비극(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대다수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 P265

양국간 잠재해 있으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해와 피해 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런 책들이 더욱 많이 나와주면 좋겠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도서관에 희망도서가 도착하는 대로 후속 책을 읽어볼 요량이다.
거리의화가 2025-04-13 공감 (19)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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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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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식민지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정작 식민지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모르던 일본인들이 일본 제국 패망으로 하루아침에 뒤집힌 세상에서 겪은 고초와 혼란의 기록.
解明 2020-10-09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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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간악한 강제지배가 끝나고 도망치듯, 또는 여유있게 사라졌던 일본인들의 모습. 어떻게 떠났으며 또 지금은 어떻게 남았을까 보여주는 책이다.
Kenobi 2014-03-27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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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좋으나 pdf 글자가 너무 작아서 눈이 아픔. E북을 이렇게 만들면 누가 봅니까? 30대가 볼 때도 인상이 써질 정도로 글자가 작아요. 그래도 다른데서 구하기 힘든 자료들이라 별 4개
키츠 2019-02-15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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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다 잊고 싶은 틈새의 역사



우리는 무려 36년간 일제 식민지를 겪었다. 36년이라는 시간은 평균수명이 50대였던 당대에는 2세대 혹은 3세대에 이르는 긴 기간이다. 기간이 길다보니 당시 조선에는 무려 100만명이 넘는 일본인이 살고 있었으며 이들 중에 상당수는 조선이 고향인 사람들었다. 우리에게 약탈자와 가해자로 불리우는 이들은 패전과 동시에 모든 것을 잃고 쫓겨나는 기구한 운명을 맞게 되며 그 부분을 다루는 것이 이 책이다.

때문에 이 책은 양자에겐 서로 잊고 싶은 틈새의 역사 일 수 밖에 없다. 당연히 절대적 피해자인 조선민족으로서는 이들의 퇴거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를 응분의 대가로 여겨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으며, 일본 역시 그들을 무리한 전쟁을 일으킨자, 식민지배를 정당화하여 나라를 망친 주범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몇년 전 우리나라에 큰 충격을 안긴 '요코 이야기' 갖은 책들은 이런 맥락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패전 일본인은 크게 지역에 따라서는 세 지역, 그리고 계층에 따라서도 3 계층정도로 다른 운명을 맞게 된다. 지역은 만주지역, 북한, 남한 지역이며 계층은 정보력과 무력을 가진 군인과 고급 공무원들의 고위인사, 적당한 정도의 부유층, 그리고 일반인들이다. 이 패전 일본인들은 이처럼 계층과 지역에 따라 퇴거과정에서 상당히 다른 운명을 맞게 되는데 이는 지역에 따라 점령한 세력이 다르고 계층에 따라 정보력과 힘에서 차이가 나 퇴거과정에서 상당히 다른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계층별로 살펴보면 정보력과 힘을 갖고 있었던 군인계급과 고위공무원들은 패전과 거의 동시에 일본으로 빠르게 돌아갔으며, 어느정도 돈을 갖추고 있던 일본인들은 밀선이나 조선인 브로커에게 돈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재산도 어느정도 챙겨서 돌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없는 일반 일본인의 경우, 이룬 거의 모든 것을 잃고 돌아 갈 수 밖에 없었으며 이 과정에서 폭행, 약탈, 상당히 비좁고 좋지 않은 환경에서의 수용과 아사 및 동사, 그리고 겨우 돌아간 고국에서의 문전박대를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지역별로 살펴보면 우선 가장 평안한 운명을 맞았던 것은 남한지역의 일본인들이었다. 이들은 겨우 1년여만에 일본으로 모두 돌아갈 수 있었으며 남한에 있었던 재산의 상당수를 포기할 수 밖에 없었지만 미군정의 비호하에 그래도 북한과 만주지역의 일본인보다는 상당히 편안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들은 패전후 조선인들의 만세소리와 몰려다님에 적잖히 당황하였고 하루아침에 직장에서 짤려, 자신이 우습게 보던 하위직 조선인들의 눈치나 보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아직 군인이나 경찰력들의 무장이 남아 있어 패전초기에는 오히려 만세를 부르던 조선인들이 이들에게 살해당하는 경우도 빈번하였다.

그리고 조선인들의 경우 일본인들을 좋게 돌려보내자는 분위기도 의외로 상당하였는데, 이는 일본인들과 같이 짐승이 되고 싶지 않다는 마음과 더불어 실질적으로 일본에서 돌아와야하는 조선인도 상당하였다는 이유에서 기인한다. 조선에서 퇴거하는 일본인에 가해지는 위해는 그대로 일본에서 돌아오는 조선인에게 가해질 수 밖에 없는 형국이었기 때문.

만주지역과 북한 지역의 일본인의 운명은 남한보다 훨씬 위태로웠다. 이는 소련군의 열악한 상황때문이기도 한데, 당시 소련군은 열악한 상황으로 월급이나 물자등의 모든 것이 점령지에서의 현지조달이었다. 때문에 일본인은 물론이고 심지어 조선인들까지 소련군의 약탈의 대상이었으며 이는 상당기간 지속된다. 또한 소련군은 수감자 출신들도 많아 더욱 군기강이 해이했다.

또한 소련은 전쟁으로 인한 상당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만주와 북한지역에서 산업시설을 모조리 반출해갔으며 이는 북한 경제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또한 점령지의 일본남자들을 1년이상 시베리아로 압송하여 강제노역케 하였다. 이런 소련군의 행태에 일본 여인네들은 윤간을 피하기 위하여 머리를 삭발하고 검댕칠을 하는등 갖은 노력을 다하였다고 한다. 또는 일반 부녀자의 피해를 막기위해 자발적으로 위안부를 조직하려는 시도까지 행한다. 개버릇 남 못준다.

이처럼 우여곡절끝에 돌아간 패전일본인들을 기다리는 것은 고국에서의 문전박대였다. 일본 본토인들은 전쟁기간에도 조선출신인들과 결혼을 피하는등 차별하는 풍토가 있었으며 심지어 패전후에는 전쟁의 책임을 그들에게 묻기도 하였다. 이들이 패전식민지에 놓고 온 재산에 대한 배상도 사실상 거부하게 된다. 이런 나라니 당연히 식민지 패해 보상역시 할 생각을 안하는 것이다.

책은 쫓겨난 일본인의 고난에 가까운 실상을 담담하게 드러내면서도 그들에 대한 섣부른 동정은 경계한다. 요코이야기의 저자를 포함한 이들 역시 자신들의 피해만 알고 식민지배를 통해 수탈한 조선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식민지배 기간동안 일본인과 조선인은 그 거주지가 공간적으로 구분되었으며 조선의 일본인들이 겪은 조선인 역시 친일파이거나 상대적으로 부유한 계층이었다. 때문에 이들에게 조선인은 마치 과거의 양반가의 노비처럼 속 가득한 불만을 전혀 내세우지 못하는 원래 그런 존재였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광복이 가져온 조선인들의 기쁨과 일본인에 대한 분노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기에 자신들의 피해자적 시각만 가득한 요코이야기 같은 책의 저술이 가능했었던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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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슈 2017-02-20 공감(25)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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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떠나며



여러 번 이곳에서 언급했듯 나는 해방 전후 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동안 관련 책들을 읽어오면서 느끼는 것은 ‘이런 일이 있었다니(고?).’ 공부했다고 생각했지만 새롭게 알게 되는 이야기를 마주할 때마다 매번 놀라움을 느낀다. 동시에 여전히 숨어 있는 이야기들이 얼마나 많을까 느끼게도 한다.




저자는 해방 전후 한반도에 있다가 일본으로 귀환한 자, 해외에 동원되었거나 해외에 거류하다가 한반도로 돌아온 자들에 대하여 주로 연구를 진행해왔다. 현재 일본 소피아 대학에서 일본인이나 외국인(유럽인)을 상대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우연히 어떤 계기로 작년에 저자의 또 다른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는 일을 알게 되었다. 최근 출간된 저작은 이번에 내가 읽은 이 책의 후속 시리즈 성격을 지닌 책이라고 볼 수 있다. 지난 해에 나온 책은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두고 전 시리즈인 이 책부터 먼저 읽어보기로 했다.




해방 후의 역사는 주로 한반도의 공간에서 벌어진 일들에 집중되어 있다. 예를 들어 해외에 있던 독립운동가의 귀환(임정 등), 일제의 시스템을 답습한 미군정(쌀 파동 등), 미소대립, 이후 국내 정치 세력의 분열, 남한 단독 정부의 수립에 이르기까지 흘러간다. 다양한 저작이 나오면서 이를 보충해주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국내 공간에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책은 해방 후 일본인들이 조선 땅을 떠날 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일본에 정착해서는 어떠했는지를 통해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재구성한다(P5).




짐작할 수 있겠지만 일본인들의 모습은 하나가 아니었다. 여러 사건과 다양한 계급의 일본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듣는 에피소드는 해방 정국의 혼란을 좀 더 입체적으로 바라보게 한다.




일본이 패전하자 조선총독부는 본토에 긴급 타전을 했으나 일본인들의 귀환을 가능한 최대한 미루라 지시받는다. 이는 일본 국내 사정이 좋지 않은 상황에서 한꺼번에 밀려들 귀환자들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인 정치 세력과 타협을 통해 일본인을 보호하려는 고육책을 펼친다. 일본인들은 은행이 파산할 것을 우려하였고 이에 전국적으로 외화를 반출하려 하면서 대량인출사태가 벌어진다. 이 와중에 이를 이용한 환전상들이 수혜자가 되었다. 일본인들은 갖고 있던 물건을 처분하기 위해 각 지역에 있던 세화회를 통했다. 세화회는 조선총독부가 식민기구와 조선군이 무력화될 경우에 대비하여 미군 진주 후에도 귀환 원호 사업의 연속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만들어진 민간 조직으로 1945년 8~9월에 걸쳐 전국에 37개의 세화회가 결성되었다고 한다.

이중 경성일본인세화회는 남한의 일본인들이 1946년 초 대부분 돌아간 뒤에도 미군정의 허가를 받아 체류하며 북한 지역에서 남하한 일본인들의 원호까지 담당한 곳이었다. 이곳의 임원진은 거의 구 총독부 관료 출신이 많았다고 한다. 세화회는 조선에 잔류하는 일본인과 본토로 돌아가는 일본인 중 잔류를 희망하는 쪽에 있던 일본인들을 지원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일본인들은 송환선을 타고 본토로 귀환해야 했다. 미군정은 1945년 9월 23일 민간인 송환 업무 창구를 외사과로 통일하고, 일본인 송환 원호를 위해 설치한 종전사무처리본부와 일본인세화회를 통해 이를 관할, 감독하게 하였다. 송환 순서는 현역 일본군->휴가 중이거나 제대한 군인과 가족->구 일본 경찰 등 바람직하지 않은 자->신관->일본인 광산노동자->일반 민간인 중 원호 대상자->일반 민간인->고위 공직자와 회사 간부->교통 및 통신 요원 순으로 발표했다. 미군정은 이처럼 차등을 두어 귀환 절차를 진행한데다가 일본인 재산 반출에 제한 조치까지 더하면서 혼란을 키운다. 떠나려는 사람들은 많은데 배 공급이 부족해지자 밀수배가 성행할 수밖에 없었다. 일례로 조선의 수산왕으로 유명했던 기시이 겐타로는 밀수선을 타고 도망치려다 붙잡히기도 했다. 일부 기업가들은 회사 자금을 횡령한 뒤 미군정의 허술한 관리를 이용해 조선인 브로커를 끼고 몰래 반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북한은 남한과는 다른 형태가 전개되었다. 주택 매수 조치로 북한의 일본인과 민간인은 사실상 연금 상태에 놓인다. 그리고 이미 일본인들에 의해 산업 시설이 파괴된 상태에서 소련군이 자원을 반출하면서 북한 지역 사람들은 이중고를 겪었다고 한다. 소련군은 일본인을 고급 노동력으로 보아 이들을 귀환시키려하지 않았다. 살던 집에서 강제로 쫓겨난 일본인들은 귀환 전까지 집단공동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와중에도 북한에 살던 일본인의 사정은 그나마 나았으나 만주에서 온 피난민, 전란을 피해 이동해온 일본인은 환경이 훨씬 열악했다(여기에서도 계급이 나뉘어진 것이다). 1946년 봄이 되면 일본에 귀환하지 못한 이들의 상당수가 집단 남하를 한다(소련의 묵인, 조선인 사회의 요구 등에 의해).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일본인들은 본토로 돌아갔으나 정착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귀환한 일본인 남성은 일자리를 찾지 못해 무력감에 빠졌고 여성은 순결을 의심받으며 색안경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이들은 귀환자라는 낙인이 찍혔고 일부는 범죄자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는 귀환자들과 전재민과 소개민 등 본토의 전쟁 피해자들을 넓은 범위의 피해자로 뭉뚱그리며 이들의 요구를 적당히 무마하는 선에서 전후 보상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들은 엄연히 다른 집단이었던만큼 각기 다른 처우가 필요했으나 그러지 못했고 지원 금액도 턱없이 작았다. 시간을 끌면서 해외 귀환자들의 교부금은 사후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는 1980년대 이후 일본 정부가 구 식민지 출신의 피해자가 제기하는 소송에 대해서 ‘개인 청구권의 부인’, ‘시효 지남’ 등의 이유를 들게 되는 나쁜 선례가 되었다.




<요코 이야기>가 이 책에서도 언급된다. 한국에서 이 책이 알려지고 난 뒤 적지 않은 파장을 일으켰고 여러 권의 책에서 소개되기도 했다. 그러나 저자는 1940년대 말부터 <요코 이야기>의 저자와 같은 개인 체험이나 수기가 많았다고 전해준다(하긴 왜 아니 그랬겠는가. 다만 알려지지 않았을 따름이다). 대표작으로 후지와라 데이의 <흐르는 별은 살아 있다>를 언급한다. 그 책은 북한 지역에서 돌아간 여성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이후 이를 대표하는 저작들은 대개 이 책과 비슷한 귀환 여정을 담으며 선례가 된다.

문제는 수기가 일본인들을 피해의 맥락으로만 파악하게 하면서 역사적 진실과 함의는 놓치게 하고 식민지 지배 시기 가한 행위에 대한 문제는 등한시하게 한다는 데 있다. 이는 <요코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이런 체험 수기가 있는 반면 또 다른 유형의 체험 수기가 있었다. 주인공인 이소가야는 1907년 일본 시즈오카에서 태어나 1928년 함경남도 나남의 보병연대에 보충병으로 입대한 뒤 1930년대 조선의 노동운동가들을 만나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고 한다. 1945년 이후에는 일본인 문제에 대해서 적극 나섰고 일본에 돌아간 뒤에도 조선의 사정에 대해 계속 궁금해했으며 이것이 한반도의 동향에 관한 책을 집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패전과 해방 국면에서 북한 당국과 소련 점령군, 재류 일본인 사이 가교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는 어떠한 체험을 하느냐가 개인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북한의 역사적 비극(한국전쟁)을 지켜보면서 대다수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 P265

양국간 잠재해 있으면서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가해와 피해 의식에 대해서 다시 한번 곱씹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의 빈 자리를 채워주는 이런 책들이 더욱 많이 나와주면 좋겠다. 이제라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에 도서관에 희망도서가 도착하는 대로 후속 책을 읽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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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5-04-13 공감(19)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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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한일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상호 이해를 도모하게 하는 책



한일 양쪽에 새로운 정부가 세워지게 되었다. 특사가 파견되고 새롭게 관계 설정이 이뤄지려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지만, 역시 한일 간에 항상 중요한 화두는 역사문제일 것이다. 이 문제에 관해서 양측 정부와 시민사회의 역사인식이 공유되고, 과거사 문제에 대한 상호이해가 진행될 때, 양측의 평화로운 공존도 가능해질 것이다.



한일 역사인식/역사문제와 관련해서는 이미 많은 책이 존재하지만, 이번에 이연식의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사)는 좀 색다른 구석이 있어 주목된다. 이연식은 조선이 해방을 맞이한 1945년 그 직후의 일본인들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면서 그 이전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과 일본인의 관계, 해방 이후 한국과 일본의 역사인식 문제를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식민지 조선과 해방 후 한국을 곧바로 연결해주는 글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저자는 해방 직후 조선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모습을 조선인, 그리고 점령군(미군, 소련군) 등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살펴보고 있다.



저자가 피력했듯이 이 책은 한일 양 민족의 '헤어짐'의 방식과 인간 군상의 모습을 일본인들의 회고를 통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5쪽). 여기에는 해방 직후 일본인들의 다채로운 인간군상이 묘사되어 있다. 일본이 패망하고 천황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슬퍼하고 당황했던 일본인들, 일본이 패전할 것을 예측하고 재빠르게 재산과 가족을 미리 일본으로 옮겨간 사람들, '대일본제국'의 영광을 조선에서 구현하고 과시하고자 했던 조선총독부가 패전 직후 상황에 특별히 대처하지 못하고 조선에 있던 많은 일본인에게 불안과 분노를 샀던 사실, 자신의 고향은 조선이라는 믿음 속에서 잔류를 원했던 일본인들, 소련군에게 강제로 끌려간 38선 이북의 일본인 남자들과 남겨진 일본인 여성들과 아이들의 모습들이 그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에서 저자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설명을 시도하고 있다. 우선 조선에 있었던 일본인들의 본토 귀환과 정착 과정을 통해 저자는 구 일본제국의 균열과 취약성, 일본 지배체제의 허상을 보여주고 있다. 패전 과정에서 일본으로 귀환했던 해외 일본인들은 본토인 입장에서는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더 어렵게 만드는 민폐 집단으로 비춰졌다. 패전의 폐허 속에서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귀환 일본인들은 골칫거리로 존재했던 것이다. 또한 조선에 살고 있었던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삶에 무지했고, 관심이 없었다. 그 점은 일본제국의 지배체제가 갖고 있던 취약성이었다. 아무리 일본인과 조선인은 하나라는 '내선일체'를 강조해도 막상 일본인들의 무관심과 무지가 존재하는 이상, 그 구호에는 심각한 균열이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일본인들의 회고에서 드러나는 조선인들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은 일제시기 조선인과 일본인이 어떻게 한반도라는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총독부 관리의 딸로 조선에서 20여 년을 살았던 한 일본인 여성은 노년에 다시 한국 땅을 찾았다. 그가 살았던 지역인 현재의 충무로 일대는 그가 눈감고도 돌아다닐 수 있었던 만큼 여전히 익숙한 곳이었으나, 거기서 인사동과 종로 쪽으로 가자마자 그는 낯선 이방인이 되었다. 조선에서 20년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그가 살던 집과 학교, 근처에 머물고 있었고, 조선인들이 살던 곳으로는 시선이 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무지와 무관심을 다시금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것은 결국 일본 통치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한편 이 책은 해방 후에서 현재까지 한-일 양국의 문제에 가로놓여 있는 역사인식이라든가, 여러 문제들의 기원, 특성을 이해하고 파악하게 해주는 글이기도 하다. 패전 직후 일본 정부는 사회 곳곳에서 불거진 집단 간의 균열을 막고자, 모든 국민이 전쟁으로 피해를 입었다는 정치적 수사를 구사하며 광의의 '전쟁 피해자.희생자론'을 유포했다. 이는 국가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논리였다. 어쨌든 귀환 일본인이나 본토 일본인 등 자신들이 '패전의 피해자'라는 인식은 이후 동아시아 역사분쟁을 낳는 인식적인 기반이 되었다. 현재까지도 일본의 아시아 침략이라는 사실이 가려지고, 일본이 점령했고 통치했던 사람들의 피해상에 대해서는 등한시하는 문제가 발생했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자신도 피해자'라는 인식에서 왜 너희만 피해자라고 강조하느냐는 인식의 구조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현재 한일관계의 문제와 그 배경에 대해서 여러 각도로 의미를 던져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과거 일본에 피해를 입었던 우리만을 생각하고, 이후에 한국(사회)이 다른 사회, 다른 나라의 사람들의 삶에 미치고 있는 영향은 없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현재 '다문화'라고 표방되고 있지만 그것이 과연 공존의 차원에서 한국사회가 '함께 살기'를 시도하고 있는 것인지, 그러한 문제들에게도 시선이 돌아가야 할 것이다.



가해와 피해의 시각을 넘어서서 진정한 공존과 평화를 지향하기 위해서, 끝으로 '세계인'으로서의 한 귀환 일본인을 소개하고자 한다. 7장 부분에서 저자는 조선의 노동운동가들과 함께 함흥 지역에서 혁명적 노동조합 운동에 투신하고, 해방 직후에는 고통을 겪고 있던 일본인 동포의 귀환에 힘을 썼고, 귀국한 후에도 지속적으로 그가 살았던 북한 사회가 발전하도록 애정을 갖고 기원했던 한 일본인을 소개하고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대다수의 일본인은 자신들이 입은 고난을 군국주의 일본의 무모한 전쟁 행위에 따른 결과로 간주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조선 민족에 대한 일본의 반세기에 걸친 박해의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일본인은 얼마나 반성했을까. 그저 자신들이 조우했던 고난에만 매몰되거나, 혹은 조선 민족을 가해자로 생각하고 이들을 미워하며 조선을 떠나지는 않았는지 ... "(264~265쪽)



민족과 국가의 틀을 벗어나서 진정하게 상대방을 인정하고 이해하려고 하는 그의 모습은 우리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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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twmaha 2013-01-18 공감(7)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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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전후 한국을 떠나는 일본인들에 대한 디테일한 소묘

억울하지만 제대로 대접 받지 못한 이들이 있다.
한국으로는 정신대가 대표적인 존재다.
그런데 동시대에 나도 피해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만주와 조선에서 떠나가야만 했던 일본인 거주자들이다.


<요코 이야기>라는 책이 미국에서 한동안 논란거리였는데 딱 이 사람들 이야기였다.
가진 것 다 내놓고 떠나다가 소련군과 조선사람들에게 피해보는 이야기다.


그 다음 스토리가 더 있다고 한다.
일본에 도착하니 의사들 앞에 서는데 혹시 다른 민족 아이 배었으면 강제 낙태의 대상이 된다.
아버지의 친척집에 셋방살이 하다가 구박 받다가 자살을 선택한 젊은 여성도 있다.
역사는 때로 선명하게 선이 갈리는 것이 아니다.
가해자인듯 하면서 돌아 보면 피해자인 경우들이 그렇다.
하긴 한국도 크게 보면 일본에서는 피해자였지만 베트남에서는 가해자였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서 이 책은 상당히 흥미로운 주제를 다루었고 글도 무척 재미있었다.
그리고 매우 유익한 교훈을 준다.
난리통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진면목을 드러내는지에 대한 아주 진솔한 이야기가 담겨있다.
패전 직후 일본총독 부인이 탈취한 재물 가지고 가려다 부산 앞바다에서 배가 침몰할 뻔했다는 일화부터 시작해서 고급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일본인 고관들은 빨리 재산 빼돌리기에 나섰다.
반면 한국에 머물게 된 보통 일본인들은 생계수단이 없어져서 고역을 치른다.
이때 등장한 사업이 일본인 재산 빼돌리기를 위해 협조하는 등기소 직원, 환전상 등.
참고로 일본은 본토,한국,대만,만주 각각 화폐를 달리 사용했다.
단기간에 몰려든 은행권 대응 수요에 대처하기 위해 조선총독부는 본토에서 긴급 인쇄를 해서 화폐발행량을 두 배 이상 늘려서 초 인플레이션을 가져왔다.
이를 당시 조선인 천재 백남운(아깝지만 북으로 가서 장관하다가 숙청당한 조선의 천재)이 추계를 내서 총독부에게 함부러 하지 말라고 비판했었다.


그럼에도 진주한 미군은 일본편에 더 기울었다. 사실 제대로 조선 관리할 연구도 하지 않았었다.
민낯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서 많은 교훈을 얻었다.


저자가 잡은 신선한 소재가 꽤 흥미로웠다.
화초는 사람이 키우지만 들꽃은 하늘이 돌본다.
역사는 때로 아무도 돌보지 않은 이들에 대해 어루만짐을 주어야 한다.
저자의 독특하지만 치열한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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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2015-05-06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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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반도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어떻게 되었나



8월 15일은 한국인에게 의미깊은 날이지만, 일본인에게도 의미가 깊은 날입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일본이 항복했다는 것은, 당시를 살아가던 조선인과 일본인의 삶에 거대한 변화가 오는 것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식민지 관계가 종식되면서 모든 질서는 뒤바뀌었고, 역사적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미래를 개척해야 했습니다.《CMB 박물관 사건목록》에서 아르헨티나 독재정권이 무너졌을때의 기득권층의 심리를 '세상의 끝'이라 말한 것처럼, 한반도에 살던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8월 15일 이후는 '세상의 끝'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시의 조선인들, 그리고 국사교육을 받는 현재의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일제강점기 시절에 한반도에서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단순한 침략자이자 타지에서 온 지배자로 인지하지만, 한반도에서 살던 많은 일본인들은 한반도를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습니다. 1910년 이전부터 한반도에 넘어와 반세기가 넘도록 한반도에서 살고있는 일본인도 있었고, 일제강점기 중기와 후기에 한반도로 넘어온 사람들이나 한반도에서 태어난 식민자 2세들은 조선인들의 저항도 체감하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일본 본토의 일부라고 생각했고, 자신들의 고향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반도에서 살아가던 대략 100만 명의 일본인들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카무라가 "패전했기로서니 꼭 내지로 돌아가야만 합니까?" 하고 물었더니, 어른들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저 돌아가야 한다고만 대답했다. 그녀도 결국 '아버지의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집을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왜 '자신의 고향'인 강경 땅을 떠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 p.32


이승만 대통령이 6.25가 발발하자 재빠르게 도망간 것처럼, 한반도의 일본인 중에서도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패전 소식을 듣자마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일본으로 도망가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일본인들은 그렇게 할 수 없었고, 지도층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습니다. 그리스 사태에서 보듯이 사회가 혼란해지면서 사람들은 너도나도 은행의 돈을 인출하고자 했고, 일본정부는 금융이 정지되는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해 사람들에게 거짓 정보를 흘리는 한편, 화폐를 마구 찍었습니다. 이런 자기방어적 화폐는 향후 남한 사회에 심각한 경제 교란을 초래했으며, 그중 상당한 금액이 점령군을 상대로 한 접대비 명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서 한반도에 살던 모든 일본인들이 순식간에 일본으로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리적으로 한반도의 일본인들을 본토로 수송하기 위해선 반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고, 재산 반출에 대한 점령군의 제한 조치가 민간인은 1,000엔, 직업군인은 200~500엔으로 제한되면서 패전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일본인도 많았습니다. 잔류파들은 일본 본토로 넘어가도 아는 사람은 없고, 직장도 없고, 재산도 없었기 때문에 힘겨운 삶은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패전 이후 경성일본인세화회와 경성YMCA가 재류하고자 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조선어 강좌를 개설하자 수많은 일본인들이 조선어를 배우며 한반도에서 살고 싶다는 뜻을 내비쳤습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모두 본토로 귀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의 세력이 닿은 남한지역에 살던 일본인들은 그나마 행운아였습니다. 일본인 상류층 인사와 미군 사이의 교류는 활발했으며, 조선인과 갈등이 불거질 때마다 일본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정도 재산을 숨겨 밀반출할수도 있었고, 많은 조선인들이 광복 이후 해외에서 돌아오면서 주택난 등의 문제가 불거지자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비상국면에 서로 양보하고 협력하면서 격변의 시대를 버텼습니다. 그러나 소련의 세력이 닿은 만주, 북한 지역에서 살던 일본인들은 달랐습니다. 패전 후 북한, 만주, 다롄 등 소련 점령지에서 돌아온 사람들은 귀환 과정을 '지옥으로부터 탈출'로 묘사할 정도였습니다. 소련군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받은 피해를 복구할 목적으로 한반도에 있는 설비, 기계등을 소련으로 가져갔고, 일본인 노동력을 탐내 사람들을 강제로 끌고갔습니다. 성폭력, 약탈 등 소련군의 악행은, 조선인 보안대원이 보다못해 일본인 여성을 산속이나 민가로 몰래 피난시켜줄 정도였습니다.


해외 거주자들은 종전 후 중앙정부로부터 어떠한 외교적 보호도 받지 못한 채 거주지 선택권도 인정받지 못했고 재산마저 상실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으로 돌아가 정착하는 과정에서도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들의 재외 재산을 대외 배상 차원에서 국가가 처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제대로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 p.271


8월 15일의 역사적 혼란은 한반도에 큰 상처를 남겼습니다. 산업 시설의 파괴와 물자의 폐기, 횡령과 밀반출 같은 일본인들의 불법행위로 한국의 재산은 더 줄어들었고, 일본인들의 재산이 갑자기 시장에 몰리면서 일본인 주택을 중심으로 시작된 투기 붐과 같은 갑작스런 물가의 폭등, 식량의 부족이 일어났습니다. 각종 공, 사유재산은 극소수의 한국인에게 집중되면서 왜곡된 부의 이동, 분배를 가져왔고,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겐 오히려 식민지 시절만도 못한 삶을 가져왔습니다. 한반도에서 살던 일본인들 역시 고통스러운 삶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힘겹게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들을 기다리고 있던 건 일본 동포들로부터 받는 멸시와 차별이었습니다. 본토인 입장에서는 외지에서 돌아오는 일본인들 모두가 자신의 삶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귀환자, 제대군인들은 전후 일본의 열등 국민으로 전락했고, 빈곤 속에서 살아가야 했습니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자살하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2차 세계대전이 남긴, 태평양전쟁이 남긴 결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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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선 2015-08-12 공감(5)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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