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7

다시 조선으로 | 이연식 | 알라딘 2025

[전자책] 다시 조선으로 | 이연식 | 알라딘


다시 조선으로 -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이연식 (지은이)역사비평사202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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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정보
파일 형식 : ePub(66.15 MB)
TTS 여부 : 지원

종이책 페이지수 : 352쪽


책소개
2012년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조선을 떠나며』의 자매편으로 기획되었다.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라는 부제를 가졌던 전작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조선에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거나 거류했던 사람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생존하는 이야기다. 이른바 귀환자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조국의 거친 현실은 참으로 엄혹한 것이었다. 지은이 이연식은 해방 조선의 민낯과 비정한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30여 개의 에피소드 속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1장 해방 조선의 민낯
여자 경찰대 발족, 귀환 부녀자들의 매음굴 소탕 작전
공창 폐지 후 더욱 늘어난 사창, 그 뒷배의 실체
부둣가의 새 범죄자, 밀가루와 석탄 창고를 턴 고사리손
어느새 사라진 귀환자 수용소의 비상식량과 약품들
경찰 트럭에 실려 내버려진 사람들
자릿세 협박에 노점상마저도 언감생심
아사와 동사, 곁눈질마저 거둔 빙설氷雪 같은 동포애

2장 해방 후에도 이어진 지독한 인연
돌아가는 일본인과 돌아오는 조선인
전례 없는 인구이동과 대혼란
전재민이란 낙인, 인재人才인가 인재人災인가
강물 위를 걸어가는 도인의 숨겨진 과거
도쿄 태생 아씨의 ‘낙향’
험난하기 그지없던 탄광 갱부들의 ‘귀향’
조선총독부의 ‘음험한’ 프로젝트
뜻하지 않은 양 민족의 불편한 동거
낯부끄러운 태세 전환

3장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 적산가옥과 고급 요정
미군정,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더라
첫 단추부터 잘못 끼운 미군정의 위기관리
‘모리배’와 ‘간상배’, 드디어 날개를 달다
해방군의 선물, 포르노와 극한의 도파민
명월관의 도색영화 상영, 마침내 분노의 쓰나미를 부르다
도색 야회의 현장에서 덜미를 잡힌 수도경찰청장
요정 개방을 꺼리는 ‘모리배’와 ‘간상배’의 실체
만악의 근원, 요정과 유곽을 당장 집 없는 자에게 개방하라

4장 해방 조선에서 출세를 하려면
백제 왕궁터에서 태어난 초대 서울시장의 황금 인맥
영어 선생님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된 사연
백주 대낮에 유괴당한 전임 시장님의 청파동 조카딸
퇴임 후에야 드러난 서울시장의 두 얼굴
‘복마전’이 된 서울시를 샅샅이 뒤진 검찰 수사진
청파동 ‘적산가옥’의 미스터리
경성 시대 고급 주택단지에서 쏟아져 나온 급매물
용산 일대에 새겨진 역사의 편린들

5장 비정하기만 했던 나의 조국, 조선
숨 가쁘게 휘몰아치는 사건 사고
미뤄지는 요정개방과 알 수 없는 당국의 해명
해방 공간의 고난도 퍼즐 게임
경성 미쓰코시백화점과 신세계백화점 사이에 가려진 역사
친일경찰이 ’모리배‘와 운명을 같이 한 까닭은
소규모 귀속재산 불하소동
누구를 위한 가주택 건설과 귀농 알선인가
다시 고향을 등지는 사람들, 조국이 이럴 줄은 몰랐소
귀환자와 월남민의 아픔은 만국 공통의 상처

에필로그
남은 자, 남겨진 자, 돌아오지 못한 자의 그림자

후기

미주
접기


책속에서


적어도 미군정의 철퇴 지시에 따라 일본인들이 모두 돌아가고, 장충단에 제1호 귀환자 구호소가 설치된 1946년 3월 이후에는 이들이 남기고 간 건물에 귀환자나 초기 월남민을 얼마든지 수용할 수도 있었을 터인데 왜 그런 소동이 벌어졌을까. 그 해답의 단서는 김형민 서울시장이 기자회견에서 곧 요릿집을 개방할 예정이지만 ‘사정상’ 이름은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다고 한 미묘한 답변에 숨어 있었다. 즉 이미 누군가가 그 건물들을 차지하고서는 내놓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해방 후 해외 귀환자의 유입으로 인해 발생한 모든 사회적 갈등과 후유증의 시발점이자 기폭제였다고도 볼 수도 있다.(「1장」 중에서) 접기
이렇듯 많은 변수가 존재하기는 했지만 종전 후 이루어진 대규모 인구이동은 본질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이동하는 사람들의 송환과 수용 사이에는 이동 당사자의 개인적인 선택권보다는 조선인ㆍ일본인ㆍ점령군이라는 각 행위 주체의 집단적ㆍ민족적ㆍ국가적 이해관계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이들 3자 간의 각기 다른 필요ㆍ욕망ㆍ지향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이것이 미세 조정되는 방식으로 전후 인구이동의 논리와 틀이 만들어진 셈이다.(「2장」 중에서) 접기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이러한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ㆍ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3장」 중에서) 접기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해방과 건국이란 시공간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극한의 ‘양극화’가 사회 전면으로 파급된 시기였다. 이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조적인 사회현상이 부유층 자제의 ‘유괴’와 극빈 가정 유아의 ‘밀장密葬’이다. 즉 부잣집 아이는 부모의 금품을 노리는 유괴범들의 손쉬운 표적이 되기 일쑤었다. 반면에 가난한 집 아이는 병들거나 굶어 죽어도 부모가 장사를 치를 돈조차 없어 매장은 고사하고 허름한 거적 등으로 말아 인적이 뜸한 외진 곳에 버려지는 일이 적잖았다. 이것은 일견 정반대의 상황으로 비칠지는 모르지만 결국 ‘고르지 못한’ 공동체 안에서는 그 구성원이 금수저이든 흙수저이든 결과적으로 그 누구도 편안하게 지낼 수 없다는 것을 매우 거칠게 보여주는 장면이다.(「4장」 중에서) 접기
남한에서 새 삶을 살아보겠다던 귀환자나 초기월남민의 원대한 꿈은 열악한 정착 환경과 더불어 남한 사회의 ‘냉대’ 속에서 식어갔다. 1946년 봄부터 여름에 걸쳐 급증한 만주 재이민과 일본 재밀항 현상은 해방 직후 신국가 건설의 열기라든가, 민족주의의 고조 속에서 한껏 물신화된 ‘국가’와 ‘민족’의 허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먹을거리도 해결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의 손길도 내밀지 못한 조국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되묻게 한다. 이러한 남한의 구호 능력과 사회적 통합 능력의 취약성은 오랜 식민 지배로 인해 구조화되었다. 여기에 더해 미군정의 점령 통치로 인해 이들 소외된 자들에 대한 사회적 구호 요구가 무시된 결과, 남한 사회는 귀환자, 월남민, 도시 빈민에게 있어 ‘비정한 조국’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웃사촌이라고 믿었던 주변 사람에게 입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피를 나눈 동포’라는 것은 애초부터 있지도 않은 헛된 신화라는 것을 뼛속 깊이 새기게 되었다.(「5장」 중에서) 접기



저자 및 역자소개
이연식 (지은이)
저자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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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소피아대(上智大, 蘭科硏) 및 유럽 대학 연합 국제공동연구단 학술연구기금 교수로서 제2차 세계대전 후 국제 인구이동을 연구하고 있다. 주로 유럽제국과 일본제국 붕괴 후 본국인의 귀환 과정, 재산 처리와 법적 지위, 인구 유입으로 인한 사회문제를 비교 연구해왔다. 최근에는 정착지를 찾지 못한 실향민(Displaced Person), 국제난민(International Refugee), 냉전기의 반체제 이탈 주민, 그리고 사람의 집단 이동에 따른 물자와 문화 전파 현상을 공부하고 있다.
1993년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근현대사와 한일관계사를 전공했다. 1999년 일본 문부성 국비장학생으로 국립도쿄가쿠게이대학교(國立東京學藝大學) 일본연구과에 유학하였다. 2002년 교육인적자원부 산하 한일역사공동위원회 현대사분과 조교, 2003년 국무총리실 산하 강제동원피해진상규명위원회 연구위원, 2008년 서울시사편찬위원회(현 서울역사편찬원) 전임연구원을 지냈다. 서울시립대학교 국제대학원과 일반대학원, 고려대학교 행정대학원, 서울시민대학 등에서 한국현대사, 국제교류사, 서울지역사 등을 강의했다. 2013년 일본 소피아대의 '일본제국 내 인구이동' 공동 연구에 참여한 이래 2021년부터는 옥스포드, 하이델베르크, 베네치아, 루뱅, 야기엘론스키 대학의 연구자들로 구성된 유럽 대학 국제공동연구단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전후 인구이동을 비교 연구하고 있다.
주요 저작으로는 한국, 일본, 타이완에서 출간된 『조선을 떠나며』(역사비평사, 2012)와 일본제국 붕괴 후의 인구이동을 다룬 蘭信三 外, 『引揚ㆍ追放ㆍ殘留』(名古屋大學出版會, 2019, 공저)가 있다. 그 밖에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 사할린한인 문제와 한러일 3국 관계』(채륜, 2018, 공저) 등 약 50여 편의 전후 인구이동 관련 논문과 저서, 한일 정부 및 유네스코·유엔난민기구의 조사 연구 보고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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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작 : <다시 조선으로>,<[큰글자책] 조선을 떠나며>,<조선을 떠나며> … 총 9종 (모두보기)


출판사 제공 책소개
이 책의 특징: 『조선을 떠나며』의 자매편

이 책은 2012년 역사비평사에서 출간해 큰 반향을 일으킨 『조선을 떠나며』의 자매편으로 기획되었다. ‘1945년 패전을 맞은 일본인들의 최후’라는 부제를 가졌던 전작과는 반대로, 이번에는 조선에서 해외로 강제 동원되었거나 거류했던 사람들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고 생존하는 이야기다. 이른바 귀환자들이 해방된 조국으로 귀환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마주한 조국의 거친 현실은 참으로 엄혹한 것이었다. 지은이 이연식은 해방 조선의 민낯과 비정한 사회 분위기에 대해 당시 자료를 바탕으로 30여 개의 에피소드 속에서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다.
또한 이 책은 기획과 집필의 연속성과 참신함을 인정받아 <2024년 경기도 우수출판물 제작지원 사업 선정작>에 뽑히기도 했다.

해방 조선의 민낯과 비정한 조국
그 속에서 역(逆) 디아스포라의 서사를 펼치다

디아스포라(Diaspora)는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이주 그 자체”를 뜻한다. 한마디로 “타국 살이”, “타국으로의 이주”다. 반면 이번 『다시 조선으로』에서 지은이가 향하는 시선은 바로 그 타국 살이를 끝내고 원래의 본토로 돌아가는 자들의 행로와 마음을 향한다. 이른바 ‘역 디아스포라(reverse diaspora)’의 드라마다. 거기에 조국이라는 미명의 공동체가 있었으나, 동시에 그곳은 싸움질만 하는 아수라, 제 욕심만 부리는 아귀, 못된 악업만 쌓는 축생들의 도가니이기도 했다. 해방 직후 약 1,600만 명이 살던 남한, 불과 1~2년 만에 약 100만 명의 일본인이 돌아가고, 약 250만 명의 귀환자와 초기 월남인이 유입되었으니, 이것만으로 이미 엄청난 변화였다. 따라서 아직 공동체로서의 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해방된 조국’은 지독한 사회적 모순만 드러내고 말았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지구 곳곳에서는 돌아오고 돌아가는 사람들의 ‘쌍방향’ 이동이 약간의 시차를 두고 동시다발로 나타났다. 즉 어느 곳이든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새로 들어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었다. 그로 인해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새로운 국민국가, 즉 공동체 건설과 사회적 통합이라는 새로운 과제가 대두하였다. 이것은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대규모 인구이동을 경험한 지역이나 국가라면 예외 없이 안게 된 공통된 문제이기도 했다.

해방 조선의 민낯과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

책의 앞부분에서는 고생 끝에 그리던 고국에 돌아왔으나 기대와 달리 해방의 혼란으로 몸살을 앓고 있던 남한 사회를 마주한 사람들의 다양한 삶의 모습을 다뤘다. 먹고살기 위해 사창가로 모여든 여성들, 주린 배를 채우고자 식량 창고를 터는 사람들, 옷차림과 말투가 달라 집단 따돌림을 당하는 어린이들, 노점상을 시작했지만 기존 상인의 텃세와 폭력배의 갈취로 맘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끝도 없이 밀려드는 유입자들로 인해 집, 쌀, 일자리 등이 줄어들자 이내 싸늘하게 식어버린 기주민旣住民(host society)들의 따가운 시선 등을 소개했다.
또한 남한으로 돌아오는 조선인과 이곳을 떠나가는 일본인의 미묘한 관계에, 이들을 관리 감독하던 미군정까지 포함하여, 이 3자 간의 동상이몽을 살피기도 했다. 그와 함께 일본에서 주류 사회에 성공적으로 입성한 가족과 식민 지배 말기에 강제 동원된 사람들의 귀환 과정을 대비함으로써 이동하는 집단 안에도 굉장히 다양한 차이와 균열이 존재했음을 밝히고 있다.

들끓는 욕망의 해방 공간

특히 이 책의 3장은 일본인의 송환과 유입되는 조선인의 수용 국면에서 미군정의 잘못된 판단과 실정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생하였는지를 다루고 있다. 구 일본인 재산의 섣부른 처리가 각종 편법을 동원한 투기와 사재기를 조장하고, 그 속에서 사복만 채우려는 사회적 병리 현상을 자극하게 된 과정을 소개했다. 이것은 단순히 부의 편재를 심화할 뿐만 아니라 남한 사회의 체질을 왜곡시켜 장기간에 걸쳐 후유증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 구조적 문제점에 초점을 맞추었다. 또한 해방 공간에서 비리의 온상이자 만악의 근원으로 지목된 고급 요정에서 벌어진 사건들도 소개했다. 특히 조선 제일의 명기들이 가득하다는 고급 요정의 상징인 명월관의 포르노 상영 사건이 몰고 온 엄청난 사회적 후폭풍을 중점적으로 다뤘다. 이런 사건들을 통해 이들이 한사코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의 공익적 활용에 반대하고 요정과 유곽을 집 없는 귀환자, 월남민, 도시 빈민에게 개방하자는 사회적 요구를 애써 외면한 이유를 함께 생각해 보고자 했다.

비정한 조국의 냉대와 인구이동의 현상, 그리고 남는 문제들

마지막 장에서는 각 장에 등장한 개별적인 이야기들이 해방 공간에서 각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했다. 주로 구 일본인 소유 가옥을 비롯해 고급 요정 및 유곽의 개방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비난 여론에 떠밀려 미군정이 졸속으로 추진한 가주택 건설과 귀농 알선 사업의 결과 등을 다루었다. 그리고 해방 후 남한으로 돌아오거나 새로 유입된 사람들이 급기야 남한 사회의 냉대와 무관심에 실망한 나머지 어렵게 돌아온 길을 되짚어 만주로, 일본으로 다시 떠나가는 뒷모습을 다뤘다. 끝으로 이러한 해외 귀환자 및 월남민의 유입과 그로 인한 사회적 혼란은 제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지역에서는 정도와 맥락의 차이는 있지만 글로벌한 현상이었다는 점을 부기했다. 이를 통해 해방 후 귀환자와 월남민의 유입이라는 역사적 현상을 세계사적인 견지에서 생각해 봄으로써 전후 인구이동이 지닌 다양한 역동적인 특징들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도록 했다.
또한 본문에서 다루지는 않았으나 전후 인구이동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들을 정리했다. 남한으로 돌아온 사람들과 달리 해방 후에도 여전히 타지에 ‘남은 자, 남겨진 자, 돌아오지 못한 자의 그림자’를 다뤘다. 즉 해방 후 왜 ‘60만 명’이나 되는 ‘재일동포’가 모국 귀환을 단념하게 되었는가, 또 그로부터 10여 년이나 지난 시점에 약 10만 명에 달하는 재일동포가 남한에 연고를 두고 있으면서도 북한으로 가게 되었는가(귀국 운동ㆍ북송 문제), 그리고 해방 후 최초의 귀국선이 될 수도 있었던 우키시마호가 침몰된 후에 제대로 된 진상 조사나 사후 처리가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 등을 소개했다. 아울러 미군 점령 지구의 귀환 환경과는 전혀 달랐던 소련 점령 지구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도록 반세기 이상 집단 억류 상태에 있었던 ‘사할린 한인’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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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




위 평점은 책의 내용에 대한 것이 아닌, 순전히 책의 만듦새에 관한 것이다.. 문제는 출판사다.. 동일한 출판사에서 시리즈에 가까운 두 권의 책(조선을 떠나며/다시 조선으로)이 출간되었다면. 어느 정도 통일성을 유지해줘야하지 않은가.. 어떻게 가장 쉬운 책의 사이즈조차 맞추지 못하는가..
생쥐스뜨 2025-06-11 공감 (3)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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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쪽한쪽이 쓰다. 오늘의 높이는 어제가 쌓인 바로 그 위라는 사실을 약초 씹듯 쓰게 깨닫는다. 역사연구의 언어로 갈무리된 시린 귀환의 풍경은, 힘을 가진 자들이 편취한 것이 단순히 한뼘의 땅과 몇장의 지폐가 아니라 더불어 누릴 인간의 삶과 자유였음을 증명한다. 이용악<하늘만 곱구나>를 묶자
참한꽁딱심 2025-01-01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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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조선으로: 해방된 조국, 돌아온 자들과 무너진 공동체



우리는 어느새 일국사 틀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해외 귀환자 문제는 한국은 물론이고 일본, 그리고 다른 여러 나라에서도 이 문제를 마이너 테마로 간과하거나 애써 배제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상하지 않은가. 일제강점기 말에 그렇게 많은 조선인이 해외로 끌려갔다고 교과서에 적어놓고선 그들이 그 후 어떻게 돌아왔고, 어떤 과정을 거쳐 새 나라의 국민이 되어 갔는지는 정작 설명하지 않는다. 즉 ‘사람’의 실체가 보이지 않는 역사책을 만들고 그것을 줄줄이 암기해 온 셈이다. - P315




종전 후 이루어진 대규모 인구이동은 본질적으로 뚜렷한 특징을 내포하고 있었다. 즉 이동하는 사람들의 송환과 수용 사이에는 이동 당사자의 개인적인 선택권보다는 조선인•일본인•점령군이라는 각 행위 주체의 집단적•민족적•국가적 이해관계가 압도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말하자면 이들 3자 간의 각기 다른 필요•욕망•지향이 서로 충돌하는 가운데 이것이 미세 조정되는 방식으로 전후 인구이동의 논리와 틀이 만들어진 셈이다. - P68




남한의 제 정당 및 사회단체, 그리고 학계에서는 일본인들이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벌인 일련의 행동을 지켜본 뒤, 끔찍한 사태를 예상하고 다양한 경로로 일본인 소유 재산을 당장 ‘동결’해 자유 매매를 금지하고, 이들이 보유한 화폐를 공공 기관에 ‘등록•예탁’시켜 국가(남한에 수립될 임시정부나 군정 당국)가 철저히 ‘관리’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하지만 미군은 진주 후 이러한 남한 사회의 권고를 무시한 채 1945년 9월 25일 일본인 사유재산의 매매(미군정법령 제2호)를 허용함으로써 도저히 수습할 수 없는 탐욕과 죄악의 판도라 상자를 기어코 열고야 말았다. - P132

또한 남한 사회는 긴급한 사회문제로서 일본인의 불법적인 재산 처분과 밀항에 대한 단속을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미군정은 1945년 10월 초 법령 제10호를 발표해 당국의 허가 없이 반경 10킬로미터 이상의 이동을 금지했지만, 이를 어겨도 이를 단속할 의지나 여력이 없었다. 이에 미군정 당국자(하지 등)는 도리어 ‘돈에 눈이 먼 의식 없는 조선인’ 탓이라며 일본인을 도와 밀항을 알선한 브로커를 비난했고, 단속할 방법을 찾아달라며 적반하장의 태도를 보였다. 결국 1945년 12월 15일이 되어서야 남한의 구 일본국에 소속된 재산과 권리를 모두 군정청에서 관리한다는 선언을 발표하게 된다. 그러나 이미 이를 돈냄새를 맡은 이들은 횡령, 사재기, 밀수 등으로 이미 법망을 다 빠져나간 뒤였다.




그리고 탐욕은 부에서 끝나지 않고 권력으로도 이어진다. 식민지 시기 이루어졌던 요정에서의 밀실 정치가 해방 후에도 이어져 총독부 고관 대신 미군정 관료와 통역관 등이 그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곳에서 포르노 상영회가 이루어졌다고 하니 기가 막힐 따름이다. 도색영화 상영 모임의 물주는 물건을 사재기하거나, 귀환하는 일본인으로부터 값싸게 물건을 건졌거나 건물 등의 운영권 등을 따내 떼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아! 도색영화 현장에는 당시 수도경찰청장인 장택상도 있었다.

이 무렵 서울은 귀환자와 월남민 외에 생계를 찾아 몰려드는 사람들로 극심한 몸살을 앓고 있던 시점이었다. 주거난이 심각하여 역의 대합실,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방공호, 길거리를 전전하는 사람들이 념쳐났다. 이런 모리배와 투기꾼들이 주지육림에 빠져 있는 동안 정작 일거리가 없고 먹고 살 길이 막막하여 길을 떠돌다 굶어 죽는 사람들이 다반사였던 것을 생각하면 분노가 치미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여기에는 미군정의 행태와 잘못이 가장 크다. 미군정은 구 총독부 시스템을 답습하여 남한의 정치 기본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잘못된 곡가 정책으로 인해 물가 인플레이션을 발생시켜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거기에 미군정 핵심 인사는 친일파나 정재계의 거물들에게서 각종 뇌물과 향응 등의 이익을 받고 뒷배를 봐주기까지 했다. 여기에는 초대 서울시장인 김형민도 있다. 그는 특별한 흠결이 없었고 영어가 되어(유학 경험) 미군정으로서는 그를 점찍었던 모양이다. 서울 시장으로 있었던 기간은 단 2년 7개월이었다는데 그가 그 자리에 있는 동안 온갖 잡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심지어 그 비싸다는 청파동 가옥을 매입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분배했다).

만약 미군정이 일본인들이 떠난 후 적산가옥과 대규모 요정, 유곽 시설을 귀환자나 월남인들을 위해 적절히 배분해주었다면 어땠을까.




귀환자와 월남민은 제2차 세계대전이 발생한 뒤 많은 나라들에서 이루어진 상황이었다. 한반도에 200만의 인구가 유입이 되었고 일본도 60만의 인구가 유입되었으나 둘 간의 정책에는 차이가 있었다. 우선 일본은 정부와 의회가 있어 이들의 의견을 청취할 수 있는 창구가 열려 있었다. 그러나 남한은 미군정이 1944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조선구호령 제도의 틀을 그대로 끌어오고 군정령을 더해 처리한 미봉책으로 빈곤자들마저도 혜택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일본은 귀환원호단체의 지도자나 경성일본인세화회 회장 등이 귀환자들을 지지하여 의회에 진출하여 그들의 의견을 반영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던 반면 조선은 그런 창구 자체가 거의 전무했다.

연합국총사령부의 간접 통치 아래 있던 일본은 귀환자 구호를 위한 ‘제도’에 관한 논의가 공적으로 이루어졌고, 귀환자도 독자적 정치 세력화를 통해서 요구 사항을 제도적으로 관철하려는 등의 움직임을 보였다. 반면에 한국은 귀환자의 정착을 위한 미군정의 제도적 노력도 부족했고, 귀환자들의 정치 세력화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것은 한일 간의 역사적 경험 차이와 더불어 19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한국과 일본의 국가 운영 경험과 행정 능력의 차이, 그리고 점령국인 미국에게 있어 전후 한일 양 지역이 지닌 전략적 중요성과 국가적 위상의 차이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 P285~286




전작에 이어 한달 안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역시 좋은 책이었다. 전작과 함께 이 책도 구매할 예정이지만 두 권의 책은 도서관에 꼭 있어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을 했기에 희망도서로 신청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기존에 내가 알고 있었던 미군정의 정책에 더해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모리배, 간상배, 아귀는 지금도 정재계와 사회에 뿌리 내려 있음을 앞선 역사를 통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재미난 사례와 그것을 사료와 적절한 설명으로 풀어내는 저자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전작이 2012년에 나왔는데 후속작이 무려 12년 만에 다시 나온 것이다. 연구 등으로 바쁘시겠지만 부디 저자가 앞으로도 이런 학술대중서를 출간해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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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5-05-06 공감(1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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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조선으로

지금으로부터 80 여 년 전의 이야기. 나라를 잃은 슬픔과 차별, 배고픔과 생명의 위태로움까지 견뎌내며 해방을 맞이했지만, 어떤 이들에게 해방은 더 큰 좌절과 슬픔, 한탄만을 안겨주었다.

권력을 가지고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었던 미군정과 주요 요직자들은 전재민들(귀국 동포, 월남민)에게 관심을 두고 따스한 손길로 도와주지 않았다. 올바르지 못한 체제 유지와 권력 획득(유지), 개인적 부의 축재에만 관심을 가진 자들이 분열된 조국을 안정시키고, 양극화를 해소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그 피해는 언제나 고스란히 힘없고, 연줄 없고, 돈 없고, 정보력 없는 다수 민간인의 몫이었다.

P56 해외에 가서 고생하다가 고국이 해방되었다고 기쁘게 돌아오니 기다려주었으리라고 믿었던 고국에서 주는 선물은 주택 대신에 길 위의 거적과 방공호요, 따뜻한 음식 대신에 추위와 (굶)주림뿐이요, 따스한 동정 대신에 얼음 같은 학대와 멸시뿐이오. 그 말로가 참혹한 죽음이라는 오늘의 이 현실은 참으로 통한할 일

P78 국공내전 속에서 농토마저 빼앗긴 채 살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던 자, 위험천만한 밀선에 올라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의탁할 가족이나 친족이 없던 자, 강제 동원지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 돌아왔으나 귀환과 동시에 실업에 직면한 자, 그리고 초기 월남민 가운데 이른바 `생계형 남하 집단`등이 바로 해방 공간의 `전재민` 집단이었다.

P94 1945년 8월 24일 우키시마호 폭침 사건. 조선인 3,735명, 일본인 255명 탑승. 사망 조선인 524명, 일본인 25명(비공식 5천여 명). 미군이 투하한 항공 기뢰 때문인가? 패망에 대한 일본의 조선인에 대한 '분풀이'이자 '계획적인 범죄'로 봐야 할까?

P116 1945년 10월 들어 일본 군부대원과 경찰의 송환이 끝나고 '민간인' 차례가 다가오자, 미군정 당국은 한일 간의 모든 재산 반출을 금지할 것이며 송환 예정자에게는 '현금 1,000엔(원)'과 '손에 든 수화물'만 허용하겠다고 발표. 천황의 항복 방송을 듣자마자 눈치 빠른 총독부의 고관대작과 의사, 변호사, 기업가와 대기업 간부들은 몰래 재산을 처분하고 이것을 귀금속과 문화재로 바꾼 뒤 밀항단을 이루어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기어코 빠져나가는 모습. . .

인간 본연의 '악'과 극도의 이기심이 느껴졌다. 살려고 발버둥 치는 그것 자체를 무조건 죄악으로 여길 순 없지만 불법과 편법, 돈, 인맥 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부와 기득권을 놓지 않는 모습에선 그 누군가가 떠올려지기도 했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급품(식량)과 의약품들을 횡령하거나 중간에 가로채기해서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축적하거나, 적산가옥 등을 부당하게 편법과 불법(공사문서 위조)으로 여러 채 사들여 재산을 늘리려고 했던 자들. . . 땅에서도 모자라 배 위에서도 해적질로 물품을 빼앗기까지. . .

P152 과거의 기록 속에서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볼 때면, '역사란 결국 시공간을 넘나드는 도플갱어들의 재현'이 아 ·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주로 선한 사람들보다는 역사 속의 악인들이 마치 오래된 유럽 건물 꼭대기의 빙글빙글 도는 시계탑 인형들처럼 주기적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P226 관유지나 국유지는 결국 조선 왕가의 땅이거나 선조들의 능, 원, 묘역이었는데, 일본인들은 이것들을 맘대로 유곽, 골프장, 공원 녹지 등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인들은 조선왕조의 전통적인 능, 원, 묘를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서민들의 분묘 또한 이장비도 없이 맘대로 처분했다.

P288 해방 후 약 250만 명이 남한으로 돌아온 가운데 타지에는 여전히 '남은 자, 남겨진 자, 돌아오지 못한 자'들이 있었다. 우리는 해방 후 돌아온 사람에게도 관심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타지에 남은 이들은 왜 돌아오지 못했는지 또한 살피지 못했다. 그 결과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온 자에게는 '사회적 소외'가, 미처 돌아오지 못한 자에게는 '비정한 기민'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듯 해방과 분단은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재편'이 등시에 이루어진 시공간이기도 했다.

'연구서' 같기도 하고 '대중서' 같기도 한 이 책은 내게 흥미와 부담을 동시에 안겨준다. 후반부로 가면 갈수록 책을 읽는 것에 대한 부담과 후회가 조금씩 밀려오고 있었다. 불법과 편법을 동원한 상식을 초월하는 부의 증식과 이와는 정반대의 상황 속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은 1945년 해방 이후 (안타깝게도) 계속 현재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쉽사리 책을 덮기 쉽지 않았고, 다시 책을 펼치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 광복의 그 시대를 내가 살고 있었다면 나의 삶은 어떠했을까? 머리가 무겁고, 마음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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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두리맨 2025-01-23 공감(1) 댓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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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조선, 떠나가고 떠나오는 사람들. 현재진행형의 이야기







4월에 읽었던 <조선을 떠나며>, 얼마 전 읽은 <다시 조선으로>를 더 들여다보고 싶어 주말 동안 그 과정을 짧게나마 진행했다. 더 깊이 읽고자 하면 미주에 있는 참고 사항을 확인해보며 정리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러기엔 시간상 제약이 크니 최소한 꼭 보아야 할 기사나 영상 위주로 체크를 해둔 상태였다. <다시 조선으로>를 한 번 더 읽었다. 초독 때도 간단하게 내용을 적으면서 읽기는 했는데 재독 때도 열심히 적어가면서 읽었다(역시나 놓쳤던 내용이 이다지도 많은지). 읽으면서 두 권의 책은 따로 읽어도 좋지만 함께 읽으면 시너지가 더 상승되고 보충이 된다고 생각했다.




먼저 나는 다큐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을 보았다. KBS 광복절 특별기획 <조선총독부 최후의 25일>(2013), 일본 종전기념일 특별기획 NHK <망각된 귀환자> 2부작(2013)에 저자의 <조선을 떠나며> 내용을 참고로 제작한 내용이 담겨 있다고 해서다. 다만 NHK 방송은 내가 일본어가 전혀 안되기 때문에 자료 검색 자체를 할 수가 없어 보기를 내려놓았고 KBS 다큐멘터리만 시청했다. KBS 다큐멘터리의 시선은 명확히 보였다. 주로 해방 직후 25일 간 조선총독부의 태도 변화에 주목하며 그들의 범죄를 추적하는데 집중했다. 조선총독부는 8월 20일이 되자 조선 반도의 책임 통제를 재천명했고 일본 주류 사회의 분위기도 바뀌게 되었다. 이는 소련군의 남하를 걱정했던 그들의 지연이 늦어진 것이 결정타였다. 조선총독부는 이제 미군을 어떻게 맞이할지 고민해야 했고 이를 위해 당시 미 24사단 하지 중장에게 비밀 서신을 80여통 보내 조선의 사정을 알렸다. 다만 그들은 사정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전달하고 새로 꾸려진 건준 등 조선의 정치 세력을 깎아내리거나 불온한 세력으로 간주하게 만들었다. 나아가 조선인들의 폭동 제지를 위해 치안 유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강변했다. 9월 8일 미 24단이 들어왔을 때 하지는 조선(인)에 대한 편견이 있는 채 도착했을 것이지만 결정적으로 조선총독부의 앞선 서신 로비는 미군 도착 시 일본 경찰이 조선인을 향해 발포하는 행위에 정당성을 부여하게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게다가 조선총독부는 조선은행권 화폐를 불과 2주 만에 140억 발행하면서 남한 경제를 교란시켰다. 이 돈의 절반은 예금 인출로 사용되었지만 나머지 반은 조선총독부 관리, 귀환하는 조선군, 기업인의 퇴각 자금으로 쓰여졌다. 다만 남한의 혼란한 상황을 제대로 이용한 이들은 친일파를 비롯한 투기꾼들이었다. 이들의 내용은 다큐멘터리에 포커싱이 맞춰져 있지 않다. 말미에 김계조 댄스홀 사건이 언급되는 정도인데 분량을 보면 소략하다. 이 때문에 비리와 범죄의 온상은 조선총독부이고 이를 비호해준 것은 미군정이라는 단순한 시선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아쉬움이 남았다.

NHK 방송의 내용은 조선총독부 관련 내용보다는 소련군이 남하하면서 북한에 있던 일본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고발에 집중했다고 한다.

해방 후 남북한의 귀환 과정은 다르게 전개되었다. 남한의 일본인 귀환은 미군정에 의해 1946년 2~3월이 되면 대부분 다 이루어졌으나 북한에 있던 일본인은 소련군의 진주로 사실상 귀환이 늦어져 1946년 3월 이후에나 귀환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많은 참상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같은 책의 내용이 포커싱을 어디에 맞추느냐에 따라 다른 시선으로 다른 결과물이 도출될 수 있다. 그래서 책을 읽을 때도 일방적인 수용이나 비난보다는 비판적인 자세가 요구되듯 시청각 자료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책 <다시 조선으로>에서는 일본인의 귀환이 늦어지고 조선인의 수용이 늦어지면서 이루어진 양민족 간의 불편한 동거 전개 내용을 잘 다루고 있다. 남한에 거주하던 일본인은 거류민의 안전 확보를 위해 세화회 조직을 만들고 미군정 정책에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했다. 여기에 도움을 주었던 친일파나 투기꾼들은 국공유, 사유 부동산, 기업체를 불법 매수하고 구호품을 횡령하였으며 생필품 등을 사재기하고 밀수하며 자기 배를 불렸다. 일본인들이 재산을 돌려 감시를 피해 밀항하는 동안 미군정은 일본인들의 사유재산을 허용해주면서 투기를 사실상 방조하고 묵인, 비호했다.




두 번째로 다큐멘터리 <사할린, 광복은 오지 않았다>(2019)를 보았다.

얼마 전 읽었던 <콰이강의 다리 위에 조선인이 있었네>에 사할린의 한인을 다루는 챕터가 다큐 시청에 도움이 되었다. 사할린의 남쪽 지역은 러일전쟁의 결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사할린에 자발적 또는 강제 징용으로 간 한인 노동자들이 1941~42년에는 개인적으로 도주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1943년 이후가 되면 집단 도주가 많았다고 한다. 그만큼 노동 환경이 악화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러시아 공식 기록 문서에 의하면 종전까지 인구 만명 정도였던 조선인의 수가 그 후 5천명으로 감소한다. 이는 피난, 귀환의 이유도 있지만 일본인에 의한 학살이 원인이라고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다큐멘터리에는 특히 ‘카미시스카 학살’, ‘미즈호 학살’에 대한 참상을 구체적으로 다룬다. 증언자들의 증언과 참상에 대한 사진은 보는 것만으로 너무 잔혹하고 끔찍했다. 일본군은 조선인을 항상 특별 관리(특수부대가 있었다고)하며 경계와 감시를 늦추지 않았다고 한다. 소련이 전쟁에 참전하자 일본(군)은 다급해진 나머지 피난 명령을 내린 뒤 군 시설 등을 모두 파괴했다. 문제는 조선인들을 소련군의 스파이 취급하여 유치장에 가두고 몰살시켰다는 데 있다. 미즈호 마을은 27명으로 집계되었다가 나중에 피해 규명이 되면서 35명으로 늘어났다(이들은 심지어 민간인들이었다). 카미시스카에서도 18명의 학살이 벌어졌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청구협정 당시에도 사할린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한국 정부는 초반에는 반공 이데올로기에 의한 경계로 이들을 다루지 않고 그 이후에는 아예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1992년 사할린 영주 귀국의 길이 열렸을 때 증언과 사료를 모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나 생각했다. 심지어 이때 영주 귀국 자격 조건은 1945년 이전 건너간 사람들로 제한되었다고 하는데 이것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다큐 마지막에 조국과 한국인들은 사할린 한인들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고 아쉬워하는 인터뷰이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이래서 이 역사는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세 번째로 한겨레 기사 <‘우키시마호 사건’ 특별한 남북일 시민연대>를 읽었다.

우키시마호 사건 현장과 기록은 일본에 있고 생환자와 유족은 한국에 있는 사건인데 시민단체가 이에 접근하여 많은 일을 했다고 한다. 우키시마호 사건 발생 원인에 대해서 미군이 설치한 지뢰에 의한 폭침 때문이다라는 설과 다른 한편에서는 일본에 의한 공격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사건 발생 후 재일조선인연맹이 일본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다. 이어서 연합국 총사령부에 조사 요청을 했으나 미군정도 관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1950년 선체 인양을 하면서 진상 규명을 요구하고 신원 확인된 유골 일부를 봉환할 수 있게 한 것은 모두 재일조선인 연맹 단체를 중심으로 한 사람들 덕분이었다.

우키시마호의 출항지인 아오모리 지역 시민 단체, 침몰지인 교토의 시민그룹인 ‘우키시마호 순난자 추도 실행위원회’, 사건 소송을 주도한 ‘일본국에 조선과 조선인에 대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추진하는 모임’은 소송을 하고 사건에 관한 사료들을 발굴하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을 진행했다. 한일(+미국) 정부가 사건을 해결하려는 의지가 없는 동안 발벗고 나서준 사람들 덕분에 그나마도 이런 자료들이 쌓일 수가 있었다. 정부는 앞으로 사건 진상규명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일 것인가 여전히 관심조차 없을지 답답하다.




재일조선인의 북송 과정을 다룬 KBS 파노라마 다큐멘터리(2013)를 보고 싶었는데 자료를 아무리 검색해도 영상을 찾지 못해 다큐를 언급한 기사를 보고 짧게만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은 재일조선인을 관리하며 차별하고 특별 대상으로 삼았던 시기였다. 이때 북한은 현대식 고층 아파트를 제공하고 무상 의료 서비스를 보장한다며 달콤한 유혹을 했다. 이에 조총련 중심으로 북한 귀국을 촉구하는 운동이 벌어지면서 많은 재일동포들이 북한에 들어갔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이들은 다시 가난과 차별에 직면해야 했다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왔다는 이유로 보이지 않는 차별이 있었다고 한다. 문제는 한번 들어간 그곳에서 다시 빠져나올 길은 만무했다는 데 있다. 이후에도 조총련은 북한의 실제 현실을 알게 되었음에도 재일동포를 계속 북한으로 보내는 일을 계속 했다. 다큐멘터리에는 10만명에 이르는 사람을 공개적으로 유괴했다(?)고 다소 자극적인 언급을 했는데 너무 궁금하지만 확인할 길이 없다. 아쉽지만 관련 자료를 더 찾아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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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5-05-18 공감 (2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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