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0-23

요시다 미치에 ‘휴즌’의 도시를 기록한 우수(憂愁) 수집가들의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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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즌’의 도시를 기록한 우수(憂愁) 수집가들의 시간여행
요시다 미치에 수필가, 번역가입력 2025.10.21 08:06
호수 202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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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다 미치에 ‘고독한 여행자’(6)]
튀르키예(下)-오스만 제국의 화양연화, 애수의 이스탄불

파무크의 고향, 오스만 제국의 쇠락 정서 담긴 비애의 도시
‘동방의 환상’…서구 여행자들이 기록한 이스탄불의 표정
블루 모스크라는 애칭으로 알려진 술탄 아프메트 저미(1609~1616 건설). 6개의 미나렛(첨탑)을 가진 것이 특징이다.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작가 오르한 파무크(1952~)는 아랍어에서 유래한 ‘휴즌(우수, 憂愁)’이라는 말로 이스탄불을 표현했다. 오스만 제국(1299~1922)의 영화(栄華)를 유산으로 간직한 채 서유럽을 향한 패배감과 쇠퇴한 도시가 주는 애수와 서글픔 등 수백만의 사람들에게 스며든 공통된 감정을 의미한다. 한 인간의 실의나 슬픔을 나타내는 ‘멜랑콜리’(검은 담즙, 검은 고통)와는 다른, 보스포루스 해협에 걸린 아침 안개 같은 감정인 것이다.

오늘날의 이스탄불은 금각만(Golden Horn Bay)을 사이에 둔 신·구시가지를 합친 유럽 쪽과 보스포루스 해협을 사이에 둔 아나톨리아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술탄의 왕궁이 있는 구시가지만 이스탄불로 불렸다.

신시가지에 있는 노포 호텔인 펠라 팰리스 호텔에서 나는 터키 여행의 마지막 며칠을 보냈다. 신시가라고 해도 왕궁이 세워진 구시가지보다 나중에 지어진 거리라는 정도의 의미다.

추리소설 작가 애거사 크리스티(Agatha Christie)가 <오리엔트 특급살인>을 집필했다는 방에 머물렀다. 방 설비는 낡았고, 고양이 발 모양 장식이 받치고 있는 커다란 욕조는 뜨거운 물을 모으는 것도 빼는 것도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시간이 걸렸다. 귀여운 갑옷 문은 경첩이 떨어져 나가 바다에서 불어오는 강풍에 밤새 두들겨 맞고 있었다. 애거사 크리스티는 1930년부터 몇 회나 이스탄불을 방문했는데, 이 펠라 팰리스를 숙소로 삼았다. 그녀는 욕조에 뜨거운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며 소설을 구상했을까?

호텔 프런트를 담당하는 초로의 남자들은 큰 짐을 옮겨주지도 않으면서, 낡은 엘리베이터보다는 계단을 사용하라고 했다. 어딘지 모르게 피로감이 감도는 그들의 풍모와 옷차림은 호텔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이스탄불에서 가장 화려한 번화가인 호텔 앞 이스티클랄 거리를 닮았다.


오르한 파무크가 그린 ‘휴즌’의 도시

터키인으로 유일한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르한 파무크는 저서 <이스탄불-도시 그리고 추억>에서 서구나 이스탄불 시인·작가들이 본 것들, 보고 싶어 했던 것들을 쓰고 있다. 그는 50세에 쓴 이 책을 ‘어린아이의 눈으로 본 이스탄불’이라고 했다.

오르한이 어릴 적부터 살았던 파무크 아파트는 신시가의 탁심광장 근처였던 것 같다. 오스만 제국 시절 사업가였던 할아버지 덕분에 가족은 풍요로운 삶을 누려왔지만, 점차 가난해져 가는 상실감이 어머니와 어린 오르한의 마음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작가가 되고 싶었다는 오르한의 아버지는 가업과 가족을 두고 파리의 아파트에서 지내는 일이 많았다. 오르한의 지인인 작가나 친구들 또한 경제적으로는 비슷한 처지였다.

오스만 튀르크가 망하고 전쟁, 패배, 다른 나라 사람들의 유입 등으로 인해 이스탄불은 빈곤에 처하게 됐다. 오르한 파무크는 ‘휴즌’이란 ‘패배 후 거리에 사는 자들이 느끼는 감정’이라고 썼다.

신시가에 해당하는 갈라타지구는 근대적인 서구 문화가 일찍 들어온 서구인 거주구역으로 발전했다. 수도가 앙카라로 옮겨진 뒤 대사관에서 영사관으로 바뀐 재외공관만이 금각만과 보스포루스 해협, 마르마라해가 모이는 해안가에 서 있었다.

구시가지의 작은 언덕에 있는, 지금은 박물관이 된 톱카프(탑캅) 궁전이 그 풍경을 내려다본다. 보스포루스 해협이 이스탄불을 유럽(서쪽)과 아시아(동쪽)로 나누고, 금각만이 정교도와 가톨릭으로 나누더니, 이후 무슬림과 기독교인으로, 그리고 오스만·무슬림적 전통문화의 상징인 구시가지와 서구 문화로 번성한 신시가지의 경계가 되었다*.

1923년 터키공화국 수립 후 수도를 소아시아로 불리던 아나톨리아 반도에 있는 인구 2만 명에 불과한 소도시 앙카라로 옮긴 것은 대통령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의 결의였다.
수도 앙카라에 있는 아타튀르크(튀르크인의 아버지) 묘. 아타튀르크는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에게 의회에서 보낸 성이다.

예로부터 서구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 ‘동방의 이국적 정서’를 요구했다.

서구 국가에서 본 동방이란 일반적으로 아시아, 동아시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집트, 이슬람권, 소아시아, 그리고 인도 정도를 가리킨다. 프랑스 여행자들은 프랑스와 베네치아 왕궁의 두 배쯤 되는 이스탄불의 궁전과 광활한 궁전 앞 광장을 보고 깜짝 놀랐다. 16세기 후반 가장 먼저 이스탄불에 재외공관을 둔 프랑스의 대사 일행은 각 분야 전문가들로 구성됐으면서도 그 시선은 구시가지의 단골 명소 옛터를 향해 있었다. 탑캅 궁전, 아야 소피아, 그랜드 바자르, 고대 유적, 곶에서 바라본 전망 등이다. 현대의 우리가 하는 ‘tour(관광)’ 또한 그들의 시선과 다르지 않다.
이스탄불 구시가지 아야 소피아 모자이크화. 성모자와 콘스탄티누스 1세, 유스티니아누스가 그려져 있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입구.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지붕 있는 시장으로 오스만 제국 성립 후인 15세기에 시작됐다.


콘야와 카파도키아, 휴즌의 뿌리를 찾아서

반면, 이스탄불의 지식인과 부유층은 서구 문화를 접목하는 데 열심이었다. 하지만 서구 여행자들은 터번이나 민족의상을 버리고 서구인 같은 옷차림과 매너로 그들을 대접하는 터키인들을 우습게 느껴 어색함을 표시했다. 메이지(明治) 유신 이후의 일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인 풍물을 ‘옛날의 좋고 유서 깊은 터키’라며 그것이 사라져가는 것을 우려했다. 근대화와 정체성의 결합은 어렵다. ‘이국적인 것’은 외부의 눈이 느끼는 것으로, 현지인들의 실체와는 다른 것이다.

이스탄불에 들어가기 전 터키 중앙부의 도시 콘야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콘야는 룸 셀주크 왕조(11~12세기)의 수도이자 이슬람 신비주의 ‘메브레비(메블라나) 교단’의 중심지였다. 교단은 신학교 교사이자 시인인 젤랄레딘 루미(1207~1273)에 의해 13세기에 탄생했다. 공화국 성립 후 신비주의(수피즘) 교단 활동은 금지되었지만, 끝없이 선회함으로써 망아의 경지에 이른다는 선무는 계승되었다. 죽음을 상징하는 검은 옷을 벗어 던지고 선회에 의해 순백의 치마가 꽃피는 쇼 ‘세마 댄스’는 지금도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현재는 콘야의 호텔과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승원(사찰) 등에서 볼 수 있다.

교단을 상징하는 흰색과 검은색은 콘야 곳곳에 있다. 콘야의 신학교 돔을 채우는 푸른 타일에 배치된 흑백의 모티브가 있고, 흑해에 대비되는 백해는 지중해를 가리킨다. 파무크의 작품 중엔 <검은 책>과 <하얀 성>이라는 책도 있다. 파무크는 휴즌이라는 감정의 세계가 상실감이나 고통을 삶 속에서 긍정적인 것으로 보는 수피즘에서 왔다고 한다.

카파도키아에도 들렀다. 로마제국의 종교적 박해와 아랍군의 침공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굴이나 지하 주거지에 숨어 살던 그리스 정교 수도사나 신도들의 모습은 사라졌다. 20세기 초, 터키 정부와 그리스 정부 간의 ‘주민 교환’에 의해 본국으로 강제 이주당한 것이다.

현재 카파도키아 동굴 내에 있는 교회 터나 그리스도의 벽화를 지키는 것은 이슬람교도다. 주민 교환은 이즈미르를 포함해 터키 아나톨리아 반도의 그리스계 주민과 그리스에 거주하던 터키계 이슬람교도 사이에 이루어졌지만, 이스탄불의 그리스인은 터키어를 구사하는 그리스 정교도로 예외가 됐다. 이스탄불 신시가지에는 지금도 쿠르드족 등 다른 소수민족과 함께 그리스인 거주구역이 있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는 카파도키아 풍경. 기암군과 동굴 주거지로 알려진 지역으로, 화산활동과 오랜 풍화작용 때문에 형성됐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는 카파도키아 풍경. 기암군과 동굴 주거지로 알려진 지역으로, 화산활동과 오랜 풍화작용 때문에 형성됐다.

서구의 작가와 여행자들은 이스탄불에 무엇을 요구했을까. 프랑스 작가 테오필 고티에(1811~1872)는 그의 저서 <콘스탄티노플>(1853)에서 무너져가는 목조 가옥, 물이 나오지 않는 물푸레, 묘지의 삼나무, 해협을 건너는 노 젓는 배 ‘카약’, 담쟁이덩굴에 덮인 돌담, 변두리 커피 하우스 등에 주목했다. 콘스탄티노플은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다.


케말, 로티, 파무크가 남긴 시간과 기억의 기록

1870년 이스탄불을 처음 방문한 사람은 프랑스인 피에르 로티(1850~1923)였다. 로티는 지중해 함대의 사관이었지만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 커피 하우스에 다니며 하렘(술탄의 후궁) 여인과 금단의 사랑 이야기 <아지야데>를 썼다.

로티가 소설을 집필한 카페가 있는 ‘피에르 로티의 언덕’은 금각만의 전망이 아름다워 지금도 인기 있는 곳이다. 카페는 무슬림 남성들의 사교장이었는데, 정부 비판과 여론조작의 장이 된다며 오스만제국이 여러 차례 카페 금지령을 내렸다. 16세기 중반 구시가지에는 유럽 대륙 카페 제1호점이 생겼고, 술탄 아흐메드 거리를 따라 많은 카페가 들어섰다.

한편 오르한 파무크처럼 이스탄불을 활동 거점으로 삼은 튀르크인 시인과 작가들도 있었다. 오스만 영토인 마케도니아에서 이스탄불로 옮겨 정착하고 <이스탄불론>을 쓴 시인 야흐야 케말(1884~1958), 이스탄불 태생의 소설가 아흐메드 함디 탄프나르(1901~1962), 역사가 레샤트 에크렘 코추(1905~1975) 등이다. 케말은 이스탄불을 ‘향토’라고 했다. 케말과 탄프나르는 서구 여행자들의 책을 읽고 함께 변두리의 잔해 사이로 휴즌의 이미지를 찾아 걸었다.

그는 이스탄불에 관한 이상한 이야기와 기묘한 사건들의 기록을 찾아 잡지와 신문에 발표하고 <이스탄불 백과사전>이라는 독창적인 저서를 남겼다. 독자들은 이를 백과사전이 아닌 잡지로 읽었다고 한다. 이 작가들은 이스탄불 우수(휴즌)의 수집가들이었다.

오르한 파무크의 책 <아버지의 여행가방>에는 아버지가 젊었을 때 파리에서 지내며 쓴 메모와 노트를 담은 여행가방(트렁크)을 오르한에게 주었지만, 그는 며칠 동안 그 트렁크를 열지 못했다. 아버지에게 있을 작가로서의 목소리를 듣고 그 재능을 아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트렁크를 무겁게 만들었다고 한다. 여행은 혼자 떠난다고 해도 자신만의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수 또한 이스탄불의 역사와 가족의 추억과 함께한다.

1600년 수도로 번창한 이스탄불은 그 자리를 앙카라에 내주긴 했지만, 그 그늘진 아름다움으로 지금도 사람들을 사로잡는다. 동아시아에서 보면 아시아의 서쪽에 있고, 유럽에서 보면 동쪽에 있는 이스탄불은 동서 문화에 대한 갈등을 안고 더 넓은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번영의 정점을 찍고 나서 그 틀 밖으로 물러났을 때, 사람에게도 도시에도 진정으로 낙관적이고 성숙한 매력이 깃들지도 모른다. 썩어가는 것도 아침저녁으로 자연의 빛을 받아 아름다운 풍경으로 눈에 비치는 듯.

“이스탄불의 수도에는 천 가지의 아름다움이 있다
여러 가지 장식으로 꾸며진 끝없는 아름다움의, 얼마나 많은 일인가
예를 들어 새 젖마저 바라소서”
(오스만 튀르크 시대의 시인 래티피의 시 ‘이스탄불 예찬’ 일부)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는 카파도키아 풍경.

*미야시타 료 <이야기 이스탄불의 역사>
참고문헌: 오르한 파무크 <이스탄불>, 미야시타 료 <다원성의 도시 이스탄불>


요시다 미치에
20대에 서울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귀국 후 남북한 뉴스를 주로 다루는 <신아통신>에서 번역 업무를 맡았다. 국회의원 비서, 한국문화원 근무를 거쳐 프리랜서 번역가로 활동하며 에세이를 쓰고 있다. 일본의 언론인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 인포넷에서 15년간 에세이를 연재했다. <조선왕조의 의상과 장신구>(2007, 공저), <한국 현대 문학>(1992, 번역서)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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