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8

200816 최봉영 《한국사람 : 사람 노릇과 사람 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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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봉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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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묻따풀 학당
《한국사람 : 사람 노릇과 사람 구실》

한국사람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일을 잘 하려면, “사람이 사람 노릇 하는 일과 “사람이 사람 구실 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먼저 “사람”과 “노릇”과 “구실”이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묻고 따져야 한다.

1. 사람
한국말에서 “사람”은 “살다”, “살리다”에 바탕을 둔 말이다. 사람들은 온갖 것이 갖고 있는 살리는 힘을 살려서,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갖가지 것들을 만들고 쓴다. 사람들은 온갖 것을 살려서 살아가는 살림살이의 임자로서, 사람 노릇을 하고, 사람 구실을 하면서,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2. 노릇
한국말에서 “노릇”은 “놀다”, “놀이”, “노래”, “노름”, “노님”, “놈”과 뿌리를 같이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놀다”를 바탕으로 삼아서 “노릇”, “놀이”, “노래”, “노름”, “노님”, “놈”과 같은 말을 만들어 써왔다.
“놀다”는 어떤 것이 이쪽과 저쪽으로 왔다갔다하는 상태를 말한다. 예컨대 “방문에 손잡이가 논다”라고 할 때, 손잡이가 노는 것은 손잡이가 방문에 느슨하게 달려 있는 상태에서, 이쪽과 저쪽으로 왔다갔다 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와 같이 어떤 것이 노는 것은 사람이 줄을 흔들었을 때, 줄이 위아래로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것, 사람이 물에 돌을 던졌을 때, 물이 위아래로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것, 사람이 손이나 팔이나 발이나 다리나 입을 놀렸을 때, 손이나 팔이나 발이나 다리나 입이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면서 노는 것 따위로 뻗어 나가게 된다.
사람들은 어떤 것이 노는 상태가 되게 만드는 것을 “놀리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려서, 그것들이 놀게 만든다. 사람들은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게 해서 온갖 짓거리를 함으로써, 살아가는 일을 한다. 이러니 사람들은 살아가는 일을 “노는 일”이라고 말한다. 사람들이 “놀고 있네”, “놀고 자빠졌네”, “어디서 노는 놈이냐”, “어디서 놀다가 온 놈이냐”라고 말할 때, “노는 일”은 “사는 일”과 같다. 사람들은 “사는 일”을 “노는 일”과 같다고 보는 까닭으로 “살아가는 임자”를 “놈”이라고 부른다. “이 놈”, “저 놈”에서 “놈”은 “노는 일”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임자를 말한다. 
한국사람은 몸에 있는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려서 어떤 짓거리를 하게 될 때, 그것을 “노릇하다”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갖가지로 노릇하는 일을 바탕으로 삼아서 사람으로서 살아간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려면,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려서,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은 사람으로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갖가지 일을 해낼 수 있다.
한국사람은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리는 일을 보람으로 삼아서 그냥 어떤 것을 놀리는 짓거리를 하게 될 때, 그것을 “놀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놀이”에는 “노래”, “노름”, “노님” 따위가 있다. “노래”는 “놀이” 가운데서 사람이 목소리를 가지고 “노는 일”을 일컫고, “노름”은 “놀이” 가운데서 내기로써 “노는 일”을 일컫고, “노님”은 “놀이” 가운데서 한가로이 “노는 일”을 일컫는다. 

3. 구실
한국말에서 “구실”은 “그윗일”이 줄어서 된 말이다. “그윗일”은 “그위+ㅅ+일”로서, “그위”에서 비롯하는 “일”을 말한다. 이때 “그위”는 한자 낱말인 “공(公)”을 “그위 공(公)”이라고 새길 때의 “그위”를 말한다. “그위”는 “그+우+이”로서, “그러한 것이 위에 자리하고 있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한 것”이 누구나 함께 할 수 있는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모두가 함께 하는 것이 될 수 있다.
한국말에서 “공(公)”을 뜻하는 “그위”는 “사(私)”를 뜻하는 “아름”과 짝을 이루고 있는 말이다. 위에 자리한 “그위”가 있어야, 아래에 자리한 “아름”이 있을 수 있고, 아래에 자리한 “아름”이 있어야 위에 자리한 “그위”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은 “공(公)”을 뜻하는 말이 “그위”이고 “사(私)”를 뜻하는 말이 “아름”이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끊임없이 “공(公)”과 “사(私)”에 대해서 말하지만, 뜻이 어설프게 겉돌고 있다.
조선시대에 <훈몽자회>, <광주천자문>, <석봉천자문>, <신증유합>에는 “공(公)”이 “그위/구위 공(公)”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사(私)”의 경우에는 <훈몽자회>나 <천자문>에는 “사(私)”라는 글자가 나오지 않기 때문에 뜻을 알 수 없다. <신증유합>에는 “사(私)”라는 글자가 나오는데, “아름 사(私)”로 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위”와 “아름”을 가지고서,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것을 “그위”, “구위”, “구의”로 부르고, 저다마 따로 할 수 있는 것을 “아름”으로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일을 “그위실”, “그우실”, “구의실”, “구실”로 불렀고, 저마다 따로 할 수 있는 일을 “아름 일”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조선후기로 내려가면서, 사람들이 “공(公)”을 “공반(公反)/공변 공(公)”으로 새기고, “사(私)”를 “사사(私事) 사(事)”로 새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은 그들이 “그위”와 “아름”의 뜻을 잘 알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공(公)”을 “고루고루 하는 것”이라는 뜻을 가진 이두(吏讀) 낱말인 “공반(公反)/공변”으로 새기게 되었다. 이두에서 “공반(公反)”은 “어떤 것을 고루(:公正) 하는 것을 거듭하는(:反復) 것”을 뜻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고루고루”를 뜻하는 한자 낱말을 새롭게 만들어서 “공반(公反)”이라고 적고, 읽을 때는 “고루고루/골고루”라고 읽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고루고루/골고루”를 뜻하는 “공변/공반”의 뜻도 잘 알아보지 못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은 “공(公)”을 이루는 잣대가 “고루고루”와 “두루두루”라는 것도 알지 못하게 되었다. 오늘날에 사람들은 “그위”, “공반”, “아름” 따위를 모두 잊어버린 상태에서 “공(公)”을 “공정(公正) 공(公)”으로, “사(私)”를 “사사로울 사(私)”로 새기고 있다.
한국사람에게 “구실”은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는 “그위의 일=그윗일=구실”을 뜻한다. 이러한 “구실”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따르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구실하다”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는 “그위의 일”을 낱낱의 임자가 “고루고루”와 “두루두루”를 잣대로 삼아서 이루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으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모두가 함께 해야 하는 “그위의 일”을 “고루고루” 그리고 “두루두루” 잘해낼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사람은 “그위”를 “공(公)”, “공공(公共)”, “공정(公正)”, “공반(公反)”, “public” 따위로 말하고, “아름”을 “사(私)”, “사사(私事)”, “private” 따위로 말하고, “구실”을 “직분(職分)”, “역할(役割)”, “role” 따위로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말의 뜻을 깊고 넓게 묻고 따지지 않는다. 그들은 말의 뜻을 매우 어설프게 알고 있는 상태에서, 목소리를 높이는 일에만 힘을 쏟고 있다.

3. “나”와 사람 구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저마다 “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나”는 살아가는 일을 하는 낱낱의 임자를 말한다. 그런데 "나"는 "내"가 절로 난 것이면서, 어버이가 "나"를 낳은 것이면서, 하늘과 바다와 땅이 "나"를 낸 것이기 때문에 저마다 따로 하는 "작은 나"를 넘어서, 우리로서 함께 하는 "큰 나"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작은 나"에서 "큰 나"로 나아가게 되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려면 손, 팔, 발, 다리, 입과 같은 것을 놀려서 그냥 어떤 짓거리를 하는 것을 넘어서, 구실에 알맞게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나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고,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고, 큰 사람이 될 수 있다. 내가 사람으로서 구실하는 일이 어떠한 과정을 거쳐서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내가 아직 사람 구실을 알지 못하는 단계
첫째,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냥 느낌에 끌리는 대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갓난아기는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은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냥 느낌에 이끌리는 대로 무엇이든 한다. 그런데 이들은 느끼고 아는 것이 매우 적기 때문에 그냥 할 수 있는 것도 매우 적다. 사람들은 이러한 단계의 “나”를 두고서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라고 말한다.
둘째,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느껴서 아는 것을 좇아서 절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느낌의 임자인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제가 느껴서 아는 것을 좇아서, 어떤 것을 그냥 그대로 한다. 이런 경우에 아기는 어떤 일의 보람인 것과 어떤 일의 대상인 것이 하나로 아우러져 있다. 예컨대 아기가 손으로 젖병을 쥐고서 젖을 빨아 먹을 때, 아기가 젖병을 쥐고서 젖을 빨아 먹는 일과 아가기 손에 쥐고 있는 젖병과 입으로 빨아먹는 젖이 나누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하나로 아우러져 있다.   
셋째, 내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좇아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아기가 점점 자라면서, 느낌의 임자인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알음의 임자인 제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알음의 임자로서 알고 있는 것을 좇아서 어떤 일을 알아서 하려고 한다. 이런 경우에 아기는 어떤 일의 보람인 것과 어떤 일의 대상인 것을 나누어서 알아보게 된다. 예컨대 아기가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서 먹는 일을 할 때, 아기는 일의 대상으로 삼는 손, 봉지, 과자, 입과 같은 것에 따라서 손으로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서 입으로 과자를 먹는 일을 두 개의 일로 나누어서 알아본다. 그들은 손으로 봉지에서 과자를 꺼내는 일과 입으로 과자를 먹는 일을 하나로 어울러서, 과자를 먹는 일을 하고자 한다. 
넷째로, 내가 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저만”을 위해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아기가 아이로 자라나면서, 알음의 임자인 제가 따로 하는 것을 넘어서, 내가 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제가 저만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한다. 예컨대 아이는 어떤 과자가 먹고 싶으면, 엄마에게 그것 사달라고 조른다. 아이가 어떤 과자를 먹고자 하는 일은 제가 저만을 위해서 하는 일이다. 이런 경우에 아기는 나와 남이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나에게 남은 나를 위해서 필요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무엇이든 나의 뜻을 좇아서 오로지 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나와 남이 함께 해야 하는 사람의 구실을 알지 못하는 단계에 있다. 그들은 윤리로 나아가기 이전의 단계에 있다. 

2) “내”가 이미 사람 구실을 알고 있는 단계
다섯째로, 내가 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저”와 같은 “저들”을 위해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사람은 커가면서, “저”와 함께 하는 “남”에 대해서 알아가게 되면, “남” 가운데서 “저”와 같다고 여기는 이들을 “저들”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은 “저”와 같은 “저들”에 대해서는 “저”와 같이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제가 하는 사람의 구실을 두 가지로 나누어서,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로 차리게 된다. 사람들은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을 모두 함께 잘 이룸으로써,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저”와 같다고 여기는 이들을 “저들”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저”와 “저들”에 바탕을 둔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저들”을 위하는 것을 잣대로 삼아서, 사람 구실을 잘 하는 것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게 된다. 
사람이 저와 저들을 바탕으로 사람 구실을 할 때, 사람 구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로 갈라진다. 첫째로 사람들이 저들을 위해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저를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들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둘째로 사람들이 저를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저들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지만, 저들에게는 좋은 일이 된다.

여섯째로, 내가 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저”와 같은 “저들”을 위하는 것을 넘어서, “저들”의 밖에 있는 “남까지” 위해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사람은 깨달음이 깊어지면서, “저”와 같은 “저들”을 위하는 것을 넘어서, “저들”의 밖에 남아 있는 “남까지” 위해서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저들”의 밖에 있는 “남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제가 하는 사람 구실을 세 가지로 나누어서,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과 “남까지” 위해서 하는 일로 차리게 된다. 사람들은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과 “남까지” 위해서 하는 일을 모두 함께 잘 이룸으로써,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남까지” 위하는 것을 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면, “저”와 “저들”과 “남까지”에 바탕을 둔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남까지” 위하는 것을 잣대로 삼아서, 사람 구실을 잘 하는 것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게 된다. 
사람이 저와 저들과 남까지를 바탕으로 사람 구실을 할 때, 사람 구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세 가지로 갈라진다. 첫째로 사람들이 남까지 위해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저를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들이나 남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둘째로 사람들이 남까지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저들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고, 남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셋째로 사람들이 남까지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저와 저들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와 저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남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일곱째로, 내가 남과 함께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내가 “남까지” 위하는 것을 넘어서, “남까지”의 밖에 있는 “것까지” 위해서 어떤 것을 하는 단계의 “나”이다.

사람은 깨달음이 더욱 깊어지면서, “남까지” 위하는 것을 넘어서, “남까지”의 밖에 남아 있는 “것까지” 위해서 어떤 것을 하려고 한다. 그들은 “남까지”의 밖에 있는 “것까지” 함께 해야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은 제가 하는 사람 구실을 네 가지로 나누어서,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과 “남까지” 위해서 하는 일과 “것까지” 위해서 하는 일로 차리게 된다. 사람들은 “저”를 위해서 하는 일과 “저들”을 위해서 하는 일과 “남까지” 위해서 하는 일과 “것까지” 위해서 하는 일을 모두 함께 잘 이룸으로써, 사람 구실을 제대로 할 수 있게 된다.
사람들은 “것까지” 위하는 것을 구실로서 받아들이면, “저”와 “저들”과 “남까지”와 “것까지”에 바탕을 둔 사람 구실을 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게 될 때, “것까지” 위하는 것을 잣대로 삼아서, 사람 구실을 잘 하는 것과 잘 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게 된다.
사람이 “저”와 “저들”과 “남까지”와 “것까지”에 바탕을 두고서, 사람 구실을 하게 될 때, 사람 구실을 온전하게 하지 못하는 것은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로 사람들이 “것까지” 위해서 해야 하는 어떤 일을 “저”를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들”이나 “남”이나 “것”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둘째로 사람들이 “것까지”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저들”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고, “남”과 "것"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셋째로 사람들이 “것까지”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남”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남”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저”나 “저들”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고, “것”에는 나쁜 일이 된다. 넷째로 사람들이 “것까지” 위해서 하는 어떤 일을 “저”와 “저들”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와 “저들”에게는 좋은 일이 되지만, “남”이나 “것”에는 나쁜 일이 된다. 다섯째로 사람들이 “것까지” 위해서 하는 일을 “저”들과 “남”을 위해서 하는 어떤 일로 바꾸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어떤 일이 “저”에게는 아쉬운 일이 되고, “것”에게는 나쁜 일이 된다.

이와 같이 살펴보게 되면, 한국사람이 사람 구실을 해서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알뜰살뜰한 바탕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서 “도덕”과 “윤리”와 “규범”과 “공공”과 “공정”과 같은 것을 완전히 새롭게 차려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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