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웅 - 나무위키
김원웅
최근 수정 시각: 2020-08-17 10:34:39
분류
제14대 국회의원
제16대 국회의원
제17대 국회의원
민주당(1991년) 국회의원
한나라당 국회의원
개혁국민정당 국회의원
열린우리당 국회의원
대통합민주신당 국회의원
통합민주당(2008년) 국회의원
충칭시 출신 인물
의성 김씨
1944년 출생
당 대표/대한민국
서울대학교 출신
종북주의자
혐일
초대
김원웅
2대
유시민
◀ 새천년민주당 총재 및 대표
열린우리당 의장 ▶
대한민국 국회의원 (대전 대덕구)
선거구 개편
이인구[1]
윤성한[2]
→
제14대
김원웅
→
제15대
이인구
제15대
이인구
→
제16·17대
김원웅
→
제18대
김창수
대한민국 제14,16,17대 국회의원
김원웅
金元雄 | Kim Won Ung
출생
1944년 3월 8일 (76세)
중화민국 충칭시
가족
부 김근수, 모 전월순
학력
대전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정치학 / 학사)
본관
의성 김씨
소속 정당
무소속
지역구
대전 대덕구
정치 입문정당 및 당시 총수
전두환의 민정당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4, 16, 17
현직
광복회장
1. 개요2. 생애
2.1. 학창 시절2.2. 공화당 시절 (1971년~1980년)2.3. 민정당 시절 (1980년~1990년)2.4. 민주당 시절 (1990년~1997년)2.5. 한나라당 시절 (1997년~2002년)2.6. 개혁당~민주당 시절 (2002년~2010년)2.7. 정계 은퇴 선언 이후 (2010년~)3. 비판
3.1.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4. 선거이력5. 둘러보기6. 소속 정당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정치인이며, 2019년 6월 1일부터 현재 광복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박정희의 민주공화당 당료 공채로 1971년 사회생활을 시작했으며, 유신 이후에도 계속 일했다. 정치입문은 전두환의 민정당에서 하였다. 전두환의 민정당부터 90년대와 2000년대를 걸쳐 한나라당 민주당을 수차례 오가 그의 정치적 성향은 보수정당과 민주당계 정당을 왔다갔다하여 철새 정치인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정의로운 종북' 언급으로 종북 인사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또한 광복절 기념사에서 역대 국군 참모총장과 건국인사들은 모두 친일파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지속적으로 국립묘지 파묘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있다.
2. 생애[편집]
2.1. 학창 시절[편집]
1944년 중화민국 충칭 시에서 김원봉이 창설한 조선의열단의 연락원이었던 김근수와 광복군에서 정보 수집 등을 했던 전월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8.15 광복 후 그의 가족들은 중국을 떠나 귀국하여 충청남도 대전부로 이주하였다. 김원웅은 대전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정치학과에 입학, 졸업했다. 서울대 재학 중 한일기본조약 체결에 반대하여 6.3 항쟁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되었다. 당시 같이 투옥던 인물로 이명박 전 대통령이 있다.
2.2. 공화당 시절 (1971년~1980년)[편집]
유신 헌법이 발표 되기 전 해인 1971년에 김원웅은 민주공화당 사무처 직원 공채에 응시, 합격하여 공화당 공채 7기 당료로서 근무를 시작했다. 김원웅은 훗날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 시절인 2001년 시사저널 인터뷰에서 김원웅은 자신이 한일협정에 반대하긴 했어도 박정희를 타도의 대상으로 보지 않았다고 말했다. 오히려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유진산이나 윤보선보다는 박정희가 비전이 있는 사람으로 생각해서 공화당을 선택했다고 술회했다.
공화당 사무국을 거쳐 1974년에 공화당 새세대문제연구회 조직부 차장이 되었으며, 1975년에는 공화당 해외국 간사가 되었다. 1980년에는 공화당 청년국 국장이 되었다. 김원웅은 유신 정권이 시작되었을 때부터 공화당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유신 정권이 무너지고 공화당이 해산할 때까지 당에 남아 당직자로 근무했다.
2.3. 민정당 시절 (1980년~1990년)[편집]
전두환 정권이 출범한 후 1980년 민주정의당 창당준비위원이 되어 민정당 창당에 참여했다.[3] 1981년 1월 민정당이 창당된 후 사무국을 거쳐, 1982년부터 민정당 정책국 부국장을 역임했으며, 1985년부터 민정당 조직국 부국장을 역임했다. 1986년에는 민정당 헌법특별위원회 행정국장과 청년국장을 겸임했다. 1988년에는 민정당 국책연구소 상근연구위원이 되었고, 같은해, 민정당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1990년 3당 합당이 전격 성사된 후 김원웅은 그간 20년 가까이 커리어를 쌓아왔던 당을 돌연 탈당하여 꼬마민주당에 입당했다. 김원웅이 갑자기 탈당한 이유는 당시 김원웅이 민정당 대전 동구 (을) 지구당 위원장이었는데, 3당 합당으로 자신의 지역구를 내주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당시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전현직 국회의원을 번갈아 역임해오던 민주계(김영삼계) 송천영과 공화계(김종필계) 윤성한이 3당 합당으로 동시에 민자당 소속이 되면서 김원웅은 대전 동구 (을) 지역구에서 졸지에 3인자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합당 후 송천영과 윤성한 중 누가 공천을 따내게 될 것인가가 관심의 대상이 되었을 뿐, 김원웅이 동구 을에서 공천을 따낼 가능성은 낙타가 바늘 구멍 통과하기 보다 어려워 보였다.
김원웅이 민자당을 탈당하여 꼬마민주당에 입당한 것을 훗날 한겨레신문 등에서는 3당 야합에 반대한 업적으로 포장했다. 물론 한겨레신문은 김원웅은 기회주의자의 전형으로 비춰지기도 한다면서 까기도 했다. 김원웅이 3당 야합에 반대해서 탈당했다는 포장이 모순된 말속임에 지나지 않는 것이 3당 야합에 반대하여 탈당했다는 것은 과거 민주화 운동을 했던 민주당 소속이었던 사람들에나 해당하는 것이지 김원웅처럼 원래부터 민정당에 몸담고 있었던 사람에게는 당연히 전혀 해당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이부영에 따르면 김원웅은 3당 합당 당시 "민정당의 법통이 무시된다"고 분개하면서 민자당을 탈당했다고 한다.... 민정당의 법통이 무시되었다는 발언은 민정당 출신인 자신이 지역구에서 완전히 나가리된 현실을 본인의 관점에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2.4. 민주당 시절 (1990년~1997년)[편집]
이후 꼬마민주당은 김대중의 신민주연합당과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었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그는 신설된 대전 대덕구 선거구에 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여 민주자유당 이인구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러나 민주당은 선거에 참패했고, 김대중은 이에 책임을 지고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의원 뱃지를 단 김원웅은 국민학교 명칭이 일제강점기의 잔재라며 초등학교로 바꾸는 작업을 추진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은퇴 선언을 번복하고 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이에 동교동계를 중심으로 대다수의 당원들이 민주당을 탈당하고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였으나, 김원웅은 여기에 합류하지 않았다.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하지 않고 잔류한 이기택, 노무현 등은 통합민주당을 창당했으며, 김원웅도 여기에 잔류했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원웅은 통합민주당 후보로 대전광역시 대덕구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이인구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총선 이후 통합민주당은 주류와 비주류 간에 계파 갈등이 극심해졌고, 결국 1996년 11월 비주류파인 김원기, 김정길, 노무현 등은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를 조직하였고, 김원웅도 통추에 합류했다. 통추는 통합민주당 내 정당으로 불리우며, 당 지도부와 사사건건 대립을 이어갔다. 당 지도부와 통추의 대립으로 민주당은 존립이 위태로운 상태가 되었다. 한편 1997년 낙선한 박계동, 노무현 등 통추 멤버들과 함께 서울 역삼동에 하로동선이라는 고깃집을 공동 창업하였다. 김원웅이 하로동선의 대표를 맡아 경영하였다.
2.5. 한나라당 시절 (1997년~2002년)[편집]
그러나 1997년 11월 IMF 사태 등으로 집권 신한국당이 사실상 와해되고 한나라당으로 재창당하자 김원웅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핵심 멤버들과 결별하고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김원웅을 제외하고 노무현, 김정길, 김원기 등 통추의 핵심 멤버들은 대부분 새정치국민회의에 합류했다. 훗날 김원웅은 3김 정치 청산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한나라당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실상은 신한국당 내에서 그간 김원웅과 껄끄러웠던 김영삼계가 몰락하고, 김종필계는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여 딴 살림 차리고 나가면서 대전 대덕 현직 의원 이인구도 함께 자민련 소속으로 당적을 옮기게 되어 신한국당-한나라당의 대전 대덕 지역구가 비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김원웅은 원래 자신의 친정이었던 한나라당에 대전 대덕 지역구를 요구, 이를 보장받자 신속히 통추를 버리고 한나라당에 합류했다는 관측이 많다. 실제로 그는 한나라당 입당과 동시에 대전 대덕 지구당 위원장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의원에 당선된 김원웅은 이후 반미, 친북 발언을 이어가며 당 지도부를 지속적으로 비난하여 당내외에 충격을 주었다. 한나라당 김원웅의원 반미발언 파문. 김원웅은 미국과의 군사협력을 '친미사대주의'로 규정하고, 주한미군이 환경을 오염시키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하였으며, 한나라당 지도부가 남북문제를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고 주장하면서 이회창 총재와 최병렬 의원 등 당 지도부를 '수구'라고 싸잡아 비난했다. 2001년는 TV 토론회에 출연하여 미국이 911테러의 보복을 하기로 결정한 것을 강력하게 비난하기도 했다. 김원웅 의원의 이같은 돌출 행동을 이어가자 2001년 6월 국회 본회의 도중 같은 당 김용갑 의원과 설전을 벌이기까지 했다.[4] 한나라당에 몸담고 있던 시절인 2002년 7월에는 미선이 효순이 사건에 대해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의 사과를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
2.6. 개혁당~민주당 시절 (2002년~2010년)[편집]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진행되던 2002년,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한나라당을 탈당하여[5] 유시민이 창당한 개혁국민정당[6]에 입당했다. 입당 후 초대 당대표에 선출되어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를 지원하였다.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어 당선자 신분인 시절에 김원웅은 비공개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어 민족평화축전 개최를 합의하고 돌아왔다. 이후에도 노무현 임기 중에 특사로 북한에 파견되었다.
2003년 열린우리당이 창당하자 유시민 등 대다수의 당원들과 함께 개혁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대전 대덕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국회 윤리특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6년부터 2008년까지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장을 역임하였다.
2007년 17대 대통령선거에 출마 의지를 밝혔으나 실제로 출마하지는 못했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 통합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했으나 3위로 낙선했다.
2010년 제5회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참여당, 진보신당 4개 정당의 범야권 단일후보로 대전시장에 출마했으나 염홍철, 박성효에 밀려 3위로 광탈했다. 선거 참패 후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2.7. 정계 은퇴 선언 이후 (2010년~)[편집]
정계은퇴를 선언했으나 재야에서 계속 정치 활동을 이어갔다. 2015년 NL계 통일운동가 등과 함께 '민주통일정치포럼'을 창립했고, 이를 바탕으로 3월 13일 '민주통일연합 창당추진위'를 발족시켜 상임대표로 활동 중이다.
2019년 3월 국가보훈처 산하 단체인 광복회 회장 선거에 출마하여 친북반미적 행적에도 불구하고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꺾고 광복회장에 당선되는 이변을 일으켰다. 하지만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광복회 내부에서 반발이 나오고 있다. 결국 2019년, 김원웅 현직 광복회 회장은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을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긴 이유로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되었다.
3. 비판[편집]
국회의원 활동 시절에는 그나마 상식적인 선에서 대북 유화정책을 주장했으나, 정치 활동을 접은 후에는 친북을 넘어서 거의 종북주의자와 다름없는 주장을 본인의 페이스북을 통해 하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을 적극 옹호하며## 문재인 정부까지도 북한에 강경하다는 이유로 비난하고 있다. 문재인의 장진호 전투 기념비 참배를 경박하다고 비난하면서 심지어 6.25 전쟁 당시 월남한 국민들을 친일파 청산을 피하려 온 사람들로 싸잡아 취급하고 있다. 김정은 맞이 세미나 “박근혜보다 金 좋아하는 게 개념 있어”
국회의원 활동 당시에도 반미 성향을 드러냈는데 한나라당 의원 시절에도 미군 철수를 주장했고# 열린우리당 입당 이후에는 노무현 정부나 여당 사람들에게도 한미동맹을 강조하거나 이라크 파병을 지지하면 숭미사대주의자라고 비난했다.# 미국이 북한의 핵개발과 인권을 비판하자 한반도 평화 위해 한미동맹을 포기할 수도 있다며 선택하라면 한미동맹을 포기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을 외세라고 부르며 한미동맹을 부정하고 있다. '한미동맹의 강화는 대미종속의 강화'라고 주장했고 '착한 동맹은 없다'며 한미동맹을 반대했다. 그러면서 '미국은 사실 대한민국을 동맹국가로 생각 안한다. 졸개로 생각하지'라고 말하며 한미동맹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
2020년 8월 15일 오전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에서 '이승만이 친일파와 결탁하여 대한민국은 민족 반역자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고 발언하여# 이에 대해 네티즌들로부터 갑론을박이 나오고 있다. 이승만이 국내적으로는 반민특위를 해산하며 정치/사회 모든 공직에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을 중용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기 일본과의 외교에서는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한국 영토에 편입시키고, 대일 청구권 협상에서 강경 노선을 굽히지 않으며 적극적인 반일외교를 했다.[7] 그러나 이 비판의 핵심은 반민족 행위에 대한 처벌 미흡이지, 이승만이 친일행위를 했다는 의미가 아님을 유의하자. 일본 제국의 붕괴와 함께 친일파들은 더이상 일본에 빌붙을 수 없어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고, 반민족행위자 등용은 그런 친일파들을 이승만의 정파로 만들기 위해 이루어진 정치적 타협 행위였다. 이승만의 반일적 경향과는 큰 연관이 없다.
해당 기념사는 전국 시도 광복절 기념식에서도 대독(代讀)되었는데, 이 대독 연설문 가운데에는 "이승만이 집권해 국군을 창설하던 초대 육군참모총장부터 무려 21대까지 한 명도 예외 없이 일제에 빌붙어, 독립군을 토벌하던 자가 육군참모총장이 됐다"는 내용이 있었으나, 이 부분은 역사적 사실이 아니며, 고인에 대한 명예 훼손의 소지가 있다. 건국 초기 육군참모총장 가운데서는 친일반민족행위자가 아닌 사람이 있으며, 미국 유학파와 국군 군사영어학교 출신도 있다. #
친일파 입장과 함께 민정당 소속일때에는 가만히있다가 현시점에서 나온 발언으로서, 사회적 영향력 측면에서 아무런 효용이 없는 발언이라는 해석도 있다. 이것은 목숨을 걸고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한 김대중, 노무현, 김근태 등과 정반대로 차별적인 김원웅만의 독보적 안전추구형 소신발언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독재 정권하에서 이러한 발언을 했다면 상당히 무게가 실렸음에 분명하나, 그 때는 박정희의 공화당, 전두환의 민정당의 녹을 받다가 다끝나고 수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아무런 소용없는 이러한 발언을 한다는 점이 많은 국민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다.
본인부터가 박정희 대통령이 만들었던 민주공화당에서 당료 생활을 시작했었다는 점에서 본인이 걸어왔던 인생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아니냐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군 면제자다. 왜 면제인지 사유는 불분명 북한 정권이나 북한군에 반감을 가지는것 자체를 민족반역자 친일파로 보는거 같은데 물론 필요에 따라서 북한 정권과 평화 정책과 유화책을 가지는것이 절대 악으로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할수 없고 개개인이 판단할수 있는 문제지만 심정적으로 군대에 징병되서 끌려와 북한군과 대치하면서 생긴 북한군이나 북한 정권에 반감을 가진 대한민국의 군필 남성의 부류에 대해서 군면제자가 군필 남성을 민족반역자 매국노 취급 하는 것이 아이러니 하다. 한국의 특수한 상황에서 진보로 분류되지 외국 기준으로는 극우 파쇼다.
3.1. 광복회장 정치중립 위배 논란[편집]
친북반미적 행적에도 광복회장에 당선되어 논란이 되었다.[8] 광복회 내부적으로 선거로 인해 소란을 겪고 있다.[9] 그 중심에 선 인물이다. 정치에 관해 그동안 개입하지 않았던 광복회의 신임 광복회장이 이념 전쟁을 주도하자 후손 중 내부의 정치성에 반발하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총선을 계기로 하여 김원봉의 서훈을 위해 보훈법을 개정을 주도한다는 소식을 언론에 전했다.
2019년 10월 18일, 이석기를 찬양하고 자유한국당을 폄훼하는 등 정치적 중립을 어기고 있다는 이유로 광복회 내부 상벌위원회에 제소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회 정관에는 정치적 중립이 명시돼 있다. 국가보훈처도 "국가유공자 등 단체 설립에 관한 법률 제14조에 따라 각 단체는 특정 정당의 정강을 지지, 반대하거나 특정 공직 후보자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등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다"며 "이에 따라 정치 중립 위반 여부를 검토해보고 그 결과에 따라 상응한 관리·감독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
-----------------------
[1] 충남 대덕군-연기군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2] 충남 대전 동구 을 선거구의 제13대 국회의원[3] 알려진 바와 같이 신군부는 기존 공화당 당직자들을 대거 데려와 민정당을 창당했다.[4] 2001년 6월 남북 관계를 놓고 당이 너무 대결구도로 몰아간다는 김원웅의 발언에 김용갑이 "당에 왜 찬물을 끼얹느냐? 그러려면 나가!"라고 일갈하자 이에 발끈한 김원웅이 "내가 왜 나가! 낡은 사람들이 나가야지!"라고 맞받아쳤다.[5] 여담으로 이 당시 조선일보 만평을 보면 이회창 당시 대통령 후보를 비롯한 한나라당 주요 인사들이 "앓던 이가 빠졌다!"면서 김원웅 의원 탈당식을 성대하게 열어주는 것으로 나온다.[6] 개혁국민정당은 노무현이 유시민에게 난파선(새천년민주당)에서 피신할 배를 만들어달라는 유청을 한 후 유시민의 주도로 창당되었다.[7] 애당초 이승만 문서만 봐도 그는 자신이 살던 미국에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 및 외교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대해서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다.[8] 사실 김원웅이 열린우리당 의원 출신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극단적인 친북반미 성향으로 문재인 정부에서도 김원웅이 아닌 이종찬 전 국정원장을 광복회장 선거에서 밀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다.[9] 광복회장 선거에서 김원웅 지지자들은 이종찬을 전두환 정권 부역자라고 비난했는데 사실 김원웅도 민정당 출신이다.[10] 신민주공화당, 통일민주당과의 합당[11] 신민주연합당과의 합당[12] 개혁신당과의 합당[13] 신한국당과의 합당[14] 열린우리당의 흡수 합당[15] 민주당(2007년)과 신설 합당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