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17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 에큐메니안 이정배

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 에큐메니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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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 여운형의 ‘좌우합작론’의 기독교적 의미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을 중심으로이정배(顯藏 아카데미) |
승인 2019.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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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강덕상의 책 『여운형 평전』(김광열 역[서울: 역사비평사]. 2007)을 토대로 했으나 관련 저서를 두루 살펴 자유롭게 서술했음을 밝힌다. - 저자 주


최근 필자가 속한 ‘생명평화마당’에서 정치학자 박명림 교수를 청해 남북 화해를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었다. 본 기회를 통해 두 가지 사실을 마음에 담을 수 있었다. 하나는 남북화해는 남남갈등 극복 없이 힘겨울 것이고 이 과제는 기독교, 크게 보아 종교가 풀어내야 할 과제라는 사실이다.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였으나 분단체제에 기생했던 이 땅의 정치와 종북/좌빨의 이념을 확대, 재생산한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할 때 본 사실이 가슴 깊게 새겨졌다. 이보다 먼저 논픽션 소설 『세 여자』를 읽은 적이 있었다. 이 땅의 독립을 위해 사회주의 이념을 택한 여성들의 지난한 삶을 다룬 이야기이다.

지금껏 일제하의 독립을 다룰 때 우리는 민족주의와 기독교적 시각만을 집중적으로 배웠다. 반공주의자 이승만을 국부로 강요했던 지난 역사 탓이다. 하지만 독립을 위해 중추역할을 했던 다른 이념, 사회주의를 간과하고서는 독립운동의 온전한 실태를 그려낼 수 없다. 건국절 논쟁도 이런 맥락에서 비롯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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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갖고 몽양 여운형의 자서전과 관련된 논문들을 다시 읽게 되었다. 재일 사학자 강덕상의 『여운형 평전』도 그 중 하나였다. 몽양 기념 사업회(회장 이부영 전 국회의원)가 조직되어 매년 추모 강연회가 열린다는 소식도 접했고 올해 발표된 자료집도 구해 읽었다.

자서전도 여럿 나왔다. 그의 생애가 독립에서 분단을 거쳐 통일을 위한 여정까지 걸쳐 있기에 자서전은 곧 이 땅의 정치사였다. 몽양의 정치 스펙트럼이 당대 민족주의 계열이나 사회주의 계열과 많이 달랐다.

3.8선이 만들어진 이후에도 그를 넘어 수차례 김일성을 만나기도 했다. 결국 양 진영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고 어느 쪽 사주인지 모를 일이나 혜화동 거리서 암살당했다. 이승만, 박헌영 심지어 김구가 그랬다고 하는 설도 지금까지 회자된다.


여하튼 그는 독립운동시기 부터 해방 후 찬/반탁 운동에 이르기까지 모든 이념을 품고 가려고 했다. 특정 이념 및 정파에 매몰되지 않고자 기를 썼던 정치가였다. 때론 상해 임정과도 거리를 두었고 민족배반자라는 오해를 무릅쓰고 일본 정치가들과 만난 적도 있었다.

해방 후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자들과 함께 자주적 정권을 이루고자 했다. 일본이 그를 회유했듯이 미군정과 김일성 모두가 여운형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공을 들였다. 그만큼 그는 역량이 컸던 인물이다. 해방 공간에서 첫 대통령이 될 사람이 바로 그였다는 것이 당대의 역사적 평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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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운형을 처음 알게 된 것은 가나안 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책을 읽던 중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 시점에서였다. 사진 하단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조국이여 안심하라, 우리가 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이기에 이런 말을 내놓고 할 수 있었을까를 한참이나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정치가 몽양과 기독교 장로인 김용기와의 관계가 궁금했다. 아니 정치인 몽양과 기독교의 관계가 더 궁금해 진 것이다.

그가 평양신학교 출신으로 승동 장로교회 전도사였고 상해에서 교회 담임자로 일했던 것을 최근 알게 되었다. 손정도 목사와도 임정에서 활동을 같이 했다. 3.1 독립운동 이후 일본 정부조차 자국 조합교회를 앞세워 그를 성직자로 묶어 둘 음모를 세운 바 있다.

무엇보다 몽양은 자신의 정치적 역량과 판단이 기독교적 시각 탓에 생겨난 것을 스스로 고백하였다. 잘 밝혀지지 않았을 뿐이지 최소한 일제 말기 까지는 이런 경향이 공공연했다. 실제 목사라는 직책이 당시 서양 세력과 접할 수 있게 하는 촉매가 되었을 것이다.

여하튼 소위 ‘좌우합작’ 이론가로 알려진 몽양의 정치여정을 기독교적 시각에서 조명할 여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해방 후 강원용 목사도 몽양의 정당에서 활동한 바 있다. 평화의 기운감도는 한반도의 현 상황을 개척할 기독교 사상가로서도 큰 의미를 갖는 존재라 할 것이다.

이하 내용에서는 본 논문에서 엮어질 사안, 주제들을 생각나는 대로 나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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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양은 젊은 시절 실천적 유교인 양명학의 가르침을 존중했고 이후 그 바탕에서 기독교를 수용했다. 일본 기독교인(우찌무라 간조)들 마음바탕이 본래 양명학이었듯이 말이다. 이보다 먼저 그의 조부 및 선친은 동학교도였다. 해월 최시형과 함께 동학 운동을 했던 가계였다.

이후 배재학당에 입학 기독교에 입문했고 상동교회에서 전덕기 목사 등 많은 독립지사들을 만나 민족의식을 키운다. 이후 이때 만난 인사들 다수가 104인 사건에 연루 되자 이를 민족의식을 함양하는 계기로 삼았다. 승동 교회에서 외국인 선교사를 돕는 전도사 역할 시작했다.

아주 열심을 다해 사역했기에 선교사들이 몽양을 기독교 지도자로 키우고자 평양 신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고향 양평 인근에서 교회 사역을 시작했으나 선교사들이 한국인을 무시하는 현실에 분노했고 말과 행위의 불일치에 기독교를 다소 멀리하기 시작했다. 한국 정치현실에 무관심한 선교사들에 절망하고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몽양은 선교사들이 세운 남경 금릉 대학에 기독교를 본격적으로 배우러 중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그곳에서 배운 것은 영문학이었고 이 공부로 당대 세계적 인물들과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학업 후 상해 임시정부를 함께 만들어 갔으나 의견 차로 임정과 거리를 두었고 상해에서 교회 목사로서 활동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감화로 교회에 모였고 독립을 위해 헌신하였다.

하지만 본래 몽양은 임시정부를 원치 않았다. 정부대신 정당을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그는 임정 이전에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활동했다. 거시적 정부를 만들기에는 때가 이르지 못했다 여긴 것이다.

몽양은 조선 땅에서부터 중국 상해에 이르기까지 YMCA 활동을 많이 하며 기독교와의 관계를 깊게 했다. 상해에서도 이것을 실마리삼아 외국 선교사들과 소통하며 지냈다. 그 스스로 YMCA를 통해 한국 체육 발전을 위해 애썼다.

3.1 독립선언 이후 일제가 무단정치에서 문화정책으로 입장을 선회한 후 일본 조합교회 목사들이 대거 조선 땅이 들어와 선교했다. 일본 정신과 기독교 정신을 일치시켜 한민족을 개조하자는 취지에서였다. 한국인 목사들도 이에 동조하는 자가 많았다. 몽양을 이런 입장으로 회유시키고자 했으나 끝까지 이들과 타협치 않았다.

일제 말기 그리고 해방 후 정국에서 몽양은 목사 혹은 기독교 입지를 많이 내세우지 않았고 정치가로서 활동했다. 하지만 통일 논의 과정에서 그가 설(說)한 ‘좌우합작론’은 기독교 시각에서 살필 여지가 많다. 독립을 대의이자 하늘 뜻이라 여겼듯이 통일 역시 그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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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국을 떠나 중국을 건너간 몽양은 그곳에서 젊은이들 모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그 첫 쾌거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실행을 논하는 파리(강화)회의에 조선대표로 김규식(후일 우익으로 돌아선다)을 파견했다. 오히려 역으로 김규식을 나라 대표로 파견키 위해 파견주체로서 신한청년당을 결성했다고 봐도 좋겠다.

몽양은 국내 3.1 운동 전후로 상해에 머물면서 동경에 사람을 파견하여 이광수 등이 주도한 2.8선언에 동참시켰고 그 경험을 경성에 전달하여 3.1 선언의 힘을 불어 넣었다. 상해와 동경 그리고 경성(서울)의 연결고리를 만든 장본인이 바로 몽양 여운형이었다. 이후 3.1 선언을 중국의 5.4운동과 이어지게 한 사람도 몽양이었다.

3.1 선언 이후 세 곳에서 임시정부가 발족되었었다. 경성과 시베리아 이주민을 주축으로 한 소련의 블라디보스톡 그리고 상해가 바로 그곳이다. 이 세 곳을 상해 임시정부로 통합시킬 수 있었던 것 역시 몽양의 힘이었다.

특히 소련 연해주 지역의 임정은 사회주의적 요소를 갖고 있었다. 아울러 무력을 선호하는 입장이었다. 민족주의자들이 중심이었던 상해 임정이 이들을 거부했다.

하지만 몽양은 이동휘를 중심한 이들 세력을 수용했다. 이후 노선 다툼으로 흩어졌으나 하나의 정부를 이뤘다는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임정을 대한민국의 시작이라 할 경우, 그 속에 사회주의 요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옳다.

정작 몽양은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원치 않았다. 나라를 빼앗긴 조선말기의 이름이었던 탓이다. 계급타파적인 언어를 선호했으나 의견을 합하기 위해 자기 뜻을 접었다. 이는 몽양이 소련에서 일어난 프롤레타리아 혁명에 깊이 관심한 결과였다. 소련과 중국의 혁명이 완성될 때 조선 독립도 그 선상에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일제 후기로 갈수록 몽양은 조선 독립을 위해 소련 혁명과 중국 혁명에 주목했다.

하지만 몽양은 조선의 경우 계급 보다 민족모순 극복이 우선인 것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공산당과 협력한 것도 민족모순을 해결키 위함이었다. 더욱 몽양은 당시 조선을 계급투쟁의 여건이 갖춰지지 않았다고 보았다. 영어를 구사할 줄 알았던 몽양은 당시 시대적 상황을 꿰뚫고 있었다. 세계정세를 누구보다 잘 파악한 것이다.

중국 지도자 손문과도 수차례 만났고 트로츠키, 레닌과도 대화했으며(레닌의 공산당 선언을 최초로 번역소개) 모택동과도 의견을 나눴다. 중국 공산당의 특별회원이 된 적도 있었다.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조선의 독립이 주변 국가들과의 연대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았던 탓이다.

그렇기에 몽양은 거듭 외교적 접근을 시도했다. 이점에서 민족주의 시각을 지닌 임정 지도자들과의 관계가 소원한 적도 있었다. 당시 안창호의 지지가 없었다면 몽양의 입지가 많이 좁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는 안창호의 독립노선과도 결별한다.

당시 이승만 중심의 미국 의존파, 소련과 손잡고 무력독립을 원했던 이동휘의 친소파, 중국혁명과 연대하자는 여운형파, 일중 간 교섭을 기다리며 우선 실력을 배양하자는 안창호 파 등이 공존했었다.

안창호의 신뢰 하에 몽양은 일본 정부의 초대에 응해 일본 땅을 밟았다. 몽양을 가장 큰 위험인물로 여긴 정부가 그를 회유키 위함이었다. 그렇기에 상해 임정 요원들은 그의 방일을 결사반대했다. 몽양 역시 고민했으나 일본 정부 각료들과 독립을 담판 짖고자 방일을 결정했다.

말했듯이 안창호 혼자 그를 믿고 지지해 주었다. 일본 수상을 비롯해(일본 천황까지 만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치 않다) 여러 각료들과 만나 멋지게 독립의 정당성을 선포했다. 이 일로 일본 정부가 의회에서 불신임을 당하는 결과도 있었다. 조선 총독부와의 갈등도 컸다. 이 일을 주선한 조합교회 목사들이 자기 공적을 위해 몰래 추진했던 탓이다.

조합교회 목사들은 자기 정당화를 위해 몽양이 회유되었다는 이야기를 거듭 퍼트렸다. 이로써 당시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몽양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몽양 스스로도 방일을 주선한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이후 목회자의 길을 걷겠다고 생각을 바꾼 흔적이 있다.

하지만 몽양이 독립을 접고 일제치하에서 조선인의 자치로 마음을 돌렸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독립의지를 한 번도 접고 꺾은 적이 없었던 까닭이다. 일본 치하에서 자치를 원한 적이 없었다.

여하튼 몽양의 일본 방문을 두고 임시정부에서 찬반 논쟁이 심해지자 몽양은 임정과 거리를 두고 상해 민단의 대표자로 활동했다. 상해 거주 이주 동포들을 위해 계몽과 교육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의거로 죽음에 이른 의사(義士)들을 추모하는 모임도 빈번하게 주도했었다. 이주민 자녀들의 교육도 그가 감당했다. 물론 임정의 하부조직으로 편입되었으나 실상 민단 조직 없이 임정은 유지되기 어려웠다.

상해 민단대표가 전체 10명 바뀌었는데 그중 5번을 몽양이 맡았다. 이는 당대 상해에서의 몽양의 위치를 가늠케 한다. 몽양은 1920년 대 초반 필리핀 경우, 홍콩에 방문한 미국 국회의원 사절단과의 면담을 위해 백방의 노력을 다했다. 물론 나중에는 미국을 향한 마음을 접었으나 당시로서 미국의 역할에 주목하여 미국을 통해 독립의 기반을 다질 생각이었다.

하지만 결국 워싱턴회의(미국 중심한 서방국가들에게 일본 견제를 부탁할 것인가?)와 극동(지역)민족대회(약소국들의 저항 모임에 참여할 것인가?)를 두고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이후 이승만이 독자적으로 미국에게 조선 통치를 부탁한 것을 알고선 미국에 대한 일체 미련을 접었고 그를 의지한 이승만과도 시종일관 갈등했다. 일제 말기(1944) 조선에 머문 몽양은 일본 패망을 예감하고 뜻있는 사람들과 비밀리에 ‘건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당시로서는 선견지명을 지닌 행동이었다. 일제 패망 후 총독부에서 몽양에게 조선 치리권을 양도할 만큼 공신력이 컸다. 미소 양국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몽양은 새 나라의 첫 대통령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 이승만. 김일성의 이름은 아직 거론되지 않았었다. 이렇게 몽양은 일제 패망을 예견했기에 해방과 더불어 건국준비위원장의 자격을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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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 해방군으로 들어 온 미소 군대로 인해 남북의 입장 차가 생겨났다. 북쪽의 경우 김일성을 앞세운 공산당 단일 체제가 쉽게 확립되었으나 남쪽의 경우는 정당 수가 수십 개나 되었다. 민족주의자, 사회주의자, 공산당 등 좌우익의 정당들이 부지기수로 생겨난 것이다. 이 정황에서 몽양은 ‘인민당’을 조직했다.

필자에게 이 정당 이름 속에 몽양에게 영향을 준 단군신화, 유교, 기독교 그리고 사회주의 뜻이 함축되었다고 생각한다. 몽양은 시종일관 어느 특정 이념세력이 독주하기보다 모든 이념이 함께하는 통합적 국가를 꿈꿨다. 모두가 자기 색깔을 강조하는 현실에서 몽양은 처음부터 ‘좌우합작론’을 내세운 것이다.


▲ 사진 왼쪽이 박헌영 선생이고 오른쪽이 몽양 여운형 선생이다. ⓒ한국 위키피디아
이로써 모두에게 비판받았고 미소 모두가 그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한 공작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 미 행정관 하지 중장이 수차례 회유했고 북쪽의 김일성도 몽양을 남노당 박헌영 보다 더 중히 여길 정도였다.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이 땅 남쪽은 친/반탁 소용돌이에 휩싸였다. 민족주의 진영에서는 반탁이 대세였고 미군정을 등에 업은 송진우의 경우 친탁을 선호했다.

이 때 몽양은 친탁의 입장에 섰기에 민족진영으로부터 큰 미움을 샀다. 몽양의 친탁은 송진우의 친탁과 격이 달랐다. 국제 정치의 흐름을 읽은 탓이었다. 본래 이들 미·영·소 세 국가는 본래 몇 년간 정부수립을 도운 후 이 땅에서 손을 떼고자 했었다.

하지만 친/반탁 논쟁으로 혼란스러워지자 이들은 분할 통치로 마음을 바꾸었던 것이다. 일본이 회유한 자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원했던 몽양이 친탁에 만족할리 없었으나 대세를 보았기에 오해를 무릅쓰고 이런 입장을 취했다. 이점에서 김구와의 갈등도 컸다.

김구에게 몽양은 좌익의 대표자로 여겨진 것이다. 이후 몽양은 민주주의민족전선 5인 의장단 자격으로 김일성을 만나 미·소 공동위의의 속한 재개를 촉구했고 이들 입장을 조정코자 했다. 남북 간의 대화와 협력 나아가 일치를 구한 것이다.

하지만 이들 모임이 무기한 휴회에 돌입한 탓에 남쪽에서라도 먼저 좌우합작을 통해 하나 될 것을 주창했다. 실제로 자신의 인민당과 신민당(민족주의) 그리고 남노당을 ‘사회 노동당’ 이름하에 7원칙 하에서 합당시켰다. 하지만 안팎의 방해공작으로 좌우합작은 성공할 수 없었다. 박헌영과의 도를 넘은 갈등이 한 몫을 했다. 그때마다 김일성은 몽양의 편을 들었고 합작론의 중요성을 지지해 주었다.

합작론이 깨진 후 몽양은 근로인민당을 재창당했으나 이미 힘을 잃은 상태였다. 몽양은 끝까지 ‘좌우 합작론’의 신념을 지키다가 7월 19일 정오 혜화동 로터리에서 62세 나이로 총탄에 맞아 횡사했다. 이전에도 십여 차례에 걸쳐 테러를 당해 몸을 다쳤으나 이번에는 일어서질 못했다.

우익도 좌익도 그의 죽음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민족사의 질고를 자기 몸에 지고 간 사람이었다. 새로운 조국에서 좌우가 하나 되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이 그간 너무도 주목받지 못했다. 이제 3.1 선언 100주년의 해에 그의 가치가 재조명되어야 옳다.

강조했듯이 오해를 무릅쓰고 모두를 아우르려 했던 그의 일관된 신념은 일제 치하로부터 시작되었다. 독립에서 통일에 이르기까지 몽양의 지속된 생각이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를 가능토록 했을까?

이에 대한 답을 우리는 그의 기독교성에서 찾고자 한다. 이것은 그간 논의되지 않았던 새로운 과제일 것이다. 더구나 실천적 유교의 바탕에서 수용된 기독교의 정신이 그를 민족주의자(김구)와 거리를 두게 했으며 미국식 기독교(이승만)를 이질적으로 여겼음을 크게 주목할 일이다.

오히려 기독교와 민(民)을 사랑하는 사회주의와의 만남을 이 땅의 방식으로 가능케 했다고 말해도 좋겠다. 동학은 물론 신채호, 박은식과의 비판적 관계 속에서도 홍익인간을 말한 단군신화를 소중하게 여긴 것도 중요하게 평가 받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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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껏 몽양 속 기독교 정신이 일제로부터 해방정국에 이르는 그의 족적에서 제대로 조명된 적이 없었다. 남북분단 이상으로 남남 간 이념갈등이 심각한 상황에서 한 정치학자는 후자의 해결 없이 전자를 성취하기가 힘겹다는 사실을 강조했고 그 역할을 기독교의 몫이라 말했다. 이런 정황에서 독립운동 시부터 통일을 위한 여정에 이르기까지의 몽양 족적에서 기독교성이 어찌 들어났는지를 살피는 것이 의미 있다. 그토록 오랜 세월 기독교 목회자의 자의식을 갖고 살았는데 그의 정치활동이 있어 영향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수유리 산속 어느 한 편에 초라하게 묻혔으나 그가 남긴 오늘의 의미가 결코 작지 않을 것이다. 몽양이 제일 싫어했던 이승만 정권과 그를 지지해온 반공적 수구 기독교가 그를 내쳤으나 3.1 백주년을 맞는 오늘의 촛불정국과 기독교는 그의 정신으로 남북을 새롭게 이어야 할 것이다. 남북, 남남이 분단체제로 두 동강 난 현실에서 독립과 통일을 추동했던 몽양의 기독교성을 다시 찾을 일이다. 그렇다면 그의 기독교성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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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몽양은 실천력이 뛰어난 사상가였다. 믿음의 현실화를 위해 언제든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당시 선교사들의 기본 정서에 반해 신앙과 정치를 하나로 여기 것이다. 이는 ‘민’(民)을 사랑하되 지행합일의 정신, 곧 동학과 양명학에 근거하여 기독교를 수용한 결과라 말할 수 있겠다.

민족을 사랑하되 민족주의를 벗고 오히려 세상의 약자들, 인민을 새롭게 발견한 것 역시 기독교의 영향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 삶을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진보적 민족주의란 말도 그를 일컫는 말 중 하나이다.

몽양에게 있어 세상과의 소통은 선교사들이 전해준 타계적, 개인 구원적 신앙관을 단숨에 무력화시켰다. 그는 교회 안에 갇히지 않았고 세상을 보았으며 뭇 이념들 세계에서 노닐었다. 시대의 징표를 읽었던 것이다.

몽양에게 기독교는 세계주의와 같았다. 세상의 열려진 시각에서 교회를 보는 혜안을 지녔다 할 것이다. 몽양은 사회주의 노선을 수용했으나 무장 폭력주의와는 거리를 두었다. 일제 강점 하에서도 일본과의 평화를 원했지 그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점에서 몽양은 평화주의자였고 이것은 그가 지닌 기독교 신앙의 열매라 생각한다. 안중근과는 다른 맥락에서 동양평화를 위해 마지막까지 노력했다. 이점에서 3.1 선언서 정신의 충실한 계승자였다.

몽양에게는 모두를 아우르려는 한 몸 사상이 있었다. 교회가 그리스도 몸이듯이 민족은 그에게 한 몸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모두-모든 이념이-가 함께하는 삶의 공간으로 이 땅을 만들고자 했다. 불굴의 정신으로 주장한 ‘좌우 합작론’은 인간이 쌓은 장벽을 허물고자 하는 기독교적 이념구현의 다른 말이었다.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편하고 득이 되었을 것인데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다.

앞서 말했듯 이런 그를 진보적 민족주의자라 불렀으나 필자는 여기서 기독교 선지자의 신념을 확인하고 싶다. ‘좌우 합작론’은 3.1 평화정신을 가장 옳게 계승한 것이다. 이 경우 ‘좌우합작론’은 일제 치하에서 군사력(무장) 보다는 외교적 역량으로 독립을 이루려 했던 정신과 맥을 같이한다.

몽양에게 민족의 독립이나 통일은 하느님의 지상명령으로 여겨졌다. 민족에 대한  사랑, 시대정신의 산물이기도 했으나 몽양은 이를 하느님 명령이라 믿었다. 함석헌이 그랬듯이 통일의 뜻을 더 깊게 물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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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차원에서 정치가이자 성직자였던 몽양의 기독교성은 분단체제를 확대 재생산해온 이 땅의 기독교에게 할 말이 많다. 한반도에 드리운 평화의 새 기운을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3.1 백주년을 통일의 원년으로 삼아야 옳다. 이를 위해 몽양의 정신이 필요하다.

북에서도 몽양은 아직도 추앙되고 있다. 몽양의 자녀들을 김일성이 돌봤고 이들이 김일성 곁에서 큰 역할을 해왔다. 하나될 조국을 위해 가교가 필요하다면 그 사람은 의당 몽양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세계를 읽었고 민족을 사랑했으며 모든 이념을 하나로 엮고자 했던 몽양, 그 때문에 그는 세상 빛을 보지 못하고 거리서 객사했다. 형틀에 매달린 십자가상의 예수처럼 그렇게 죽어 우이동 산자락에 초라하게 묻혀있다. 백범 김구를 능가하는 몽양의 정신이 이 땅에 소통될 때 대한민국은 새나라가 될 수 있다. 단군신화까지 수용하며 사회주의까지 품고자 했기에 목하 북한과 대화를 위한 적절한 이념으로 봉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갔던 ‘좌우합작론’은 남남갈등이 심한 이 땅의 현실에서 되살려 실현시킬 주제이다. 물론 좌우합작론이 남북의 하나 됨을 위한 초석일 수 있겠다. 분단체제하에서 형성된 남쪽에서의 좌우대립은 해방정국 당시 이상으로 강력하게 화석화되었다. 통일의 가장 큰 장애물이 되고만 것이다.

이를 풀어 해체시키는 일이 향후 기독교의 과제라 할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과제가 이제 한 달 앞으로 다가온  3.1 독립선언서 반포 100주년 되는 2019년에 한반도 평화체제를 위한 우리들 몫이 되었다.

이정배(顯藏 아카데미)  ljbae@mt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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