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mgok Lee
나는 공자와 노자를 60이 넘어서 ‘논어’와 ‘도덕경’을 통해서 만났다.
이른바 제대로 학습을 해본 적이 없는 상태에서 바로 그 책들을 접한 것이다.
특히 논어는 그 구절들을 사람들과 현대적 문제들을 우리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해설서들의 도움 없이(물론 참가자들이 나름대로 해설서를 읽은 경험들이 있어서 전혀 무관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특정 해설서들의 견해에 의존하기보다 원문이 가지는 보편성이나 시대를 관통하는 의미를 찾으려고 했다는 의미) 함께 읽고 연찬하는 방식으로 만났다.
도덕경은 그 후 몇 분의 해설서를 통해서 만났다.
나에게는 논어를 내 방식으로 읽었던 것이 도덕경을 읽으면서 여러모로 도움(? 어떤 면에서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공부를 한 사람에게는 왜곡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이 되었다.
이른바 공자의 유위(有爲)와 노자의 무위(無爲)가 나에게는 대립이나 대칭적으로 보이지도 않았고, 서로 우열을 다투는 것이 오히려 대단히 작위적인 것으로 비춰지는 것이었다.
오히려 노자의 무위(無爲)에 대한 지향은 공자의 유위(有爲)를 거쳐 현실적으로 가능해지리라는 전망을 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만 공자의 유위(有爲)를 무엇인가 규범을 정해서 그것을 당위적(當爲的)으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윤리나 도덕으로 강조하는 것으로 파악하는 과거 유교(유학)의 경향(나에게는 이것이야말로 공자의 사상을 왜곡시킨 것으로 보여왔다)의 폐단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의미에서 노자의 사상이 도움이 많이 되었다.
공자를 그 왜곡에서 벗겨내는데, 노자가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소유(所有)’를 예로 들어본다.
소유는 자연에는 없다.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제도다.
그것이 마치 당연한 ‘인간의 자연’처럼 되었지만, 진짜 자연은 아니다.
어떻게 자연으로 돌아갈(원시반본) 것인가?
결국 인간의 관념을 정상화하는 길을 통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현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이 ‘당위의 규범’으로 강제되는 것은 ‘자연’스럽지 못하다.
‘자연’스럽게 인간의 관념을 정상화시키는 길은 그 과정이 좋아서 하는 것이다.
기쁨이 동력이 되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에 대한 현실적 접근은 공자에게서 발견된다.
빈이락(貧而樂)과 부이호례(富而好禮)가 그것이다.
물질적 결핍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인간의 자유와 행복의 제1조건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자유롭지도 행복해지지도 않는다.
물질 결핍에서 벗어나기 위한 자유를 향한 노력이 마침내 물신(物神)의 지배라는 감옥에 갇히는 과정으로 진척된 역사를 우리가 지금 겪고 있지 않는가?
소유의 긴 관성(전체 우주 자연 인간의 역사에서 보면 지극히 짧지만, 우리의 현실을 지배하는 점에서는 꽤 강고하다고 볼 수 있다)에서 벗어나는 ‘자연’스러운 길은 인간 스스로가 그것을 좋아서 선택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빈이락’과 ‘부이호례’를 물신이 지배하는 자본주의를 넘어서는(타도나 폐지가 아니다. 타도나 폐지 자체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자연’스럽지 않다) 인간 정신의 진보에 대단히 중요한 것으로 애써 인용하는 이유다.
유위(有爲)를 무위(無爲)적으로 하는 것이다.
공자는 유위(有爲)를 말하지만, 네 가지 끊음(毋意 毋必 毋固 毋我)이 바탕이 되어서 한다.
공자와 노자는 동반자이지 경쟁자가 아니다.
공자와 노자의 후대들은 ‘경쟁적으로 동반’하는 관계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요 며칠 ‘노자’를 중국 드라마로 보면서 들었던 생각의 일단이다.
‘선무당’의 단상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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