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역작 ‘이승만과 김구’ 연구 손세일이 본 이승만의 얼굴
윤수정 객원기자
▲ ‘이승만과 김구’의 저자 손세일 전 의원. photo 이경민 영상미디어 기자
‘이승만 국부론(國父論)’ 논쟁이 뜨겁다. 한상진 국민의당 창당준비위원장과 김종인 더불어민주당 선대위원장에 이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대표도 가세했다. 문 대표는 지난 1월 19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정부 수립으로 대한민국이 건국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며 “이승만 대통령도 아마 그렇게(스스로가 국부라고) 생각 안 했을 것”이라고 언급했다.
이승만 국부론 논란을 어떻게 봐야 할까. 정치적·이념적 입장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다. 언론인 출신인 손세일 전 의원은 국내에서 대표적인 이승만 연구가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손세일 전 의원의 저서 ‘이승만과 김구’를 통해 논쟁의 쟁점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하다. 그는 14년간의 연구를 통해 지난해 전(全) 7권에 달하는 ‘이승만과 김구’(조선뉴스프레스)를 펴냈다. 권당 8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책이다. 쌓아두면 높이가 30㎝에 이른다.
독립운동가 우남과 반일론
저자 손세일이 ‘이승만과 김구’의 서설 첫머리에서 내린 결론은 명쾌하다. “이승만과 김구는 국부다.” 하지만 손씨는 주간조선의 인터뷰 요청에 조심스러워하는 태도가 역력했다. 그는 “중립적인 입장을 잃을까 염려된다”는 이유로 인터뷰를 고사했다. ‘이승만과 김구’는 정치학계에서는 한국 헌정사 연구의 선구적 성과로, 역사학계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연구의 본격적인 출발점의 하나로 평가받는다. 자타공인 ‘이승만 연구전문가’ 손씨가 바라본 ‘국부 이승만의 얼굴’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저자에 따르면 우남 이승만은 “일생 동안 말과 글로 독립운동을 한 사람”이었다. 이런 우남(雩南)이 확고한 반일론을 가졌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손씨의 서술에 의하면 우남은 을사조약을 강제해 한국을 일본의 ‘보호국’으로 편입시킨 일본의 야욕을 2차 세계대전의 원인으로 지목했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 ‘일본내막기’에서 미국이 조미수호통상조약의 거중조정(居中調整·국제분쟁을 국제기구나 국가 등 제3자의 개입을 통해 평화적으로 해결)을 행사하지 않아 일본의 한국 수탈을 도왔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대지’의 작가 펄 벅(Pearl Buck) 여사는 ‘일본내막기’에 대해 “무서운 책”이라고 평했다. 임기 내내 미국에 할 말 다해야 직성이 풀리던 이승만의 면모는 이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인지도 모른다.
손씨는 이로 인해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재임하는 12년 동안 한국과 일본은 국교를 정상화하지 못했다”고 설명한다. 1952년 1월 18일, 울릉도, 시탄섬, 독도 등을 일본 통치대상에서 제외하고 일본의 12마일(19.2㎞) 이내 독도 접근을 방지했던 ‘맥아더라인’이 ‘샌프란시스코 대일(對日)평화조약’에 따라 철폐될 운명이었다. 이에 이승만은 독도영유권을 지키기 위해 ‘인접 해양의 주권에 대한 대통령 선언’으로 맥아더라인을 대체하는 평화선, ‘이승만 라인’을 전격 선포했다. 그런데 선포를 할 즈음 도쿄에서 한·일회담이 먼저 열렸다. 당시 회담 부수석대표였던 하와이 주재 총영사 김용식은 이승만에게 “선포 전 회담에서 평화선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겠다”고 보고했다. 그런 그에게 내린 이승만의 지시가 압권이다. “내가 그렇게 설명했는데 못 알아들어? 일인(日人)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하게. Whether you like it or not, we will maintain it(당신들이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겠다).”
반공주의 실패에 대한 확고한 믿음
20세기는 공산주의의 시대였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혁명을 시작으로 세계 곳곳에 공산주의 열풍이 식민지 민족해방운동의 강렬한 복음(福音)처럼 퍼졌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었다. 1946년 5월, 미국 트루먼 대통령 대일(對日) 배상특사로 내한해 한국을 둘러봤던 폴 리는 “한국의 공산주의는 세계의 어느 곳에서보다 좋은 출발을 할 수 있었다”고 평했다. 손씨는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가장 치열하게 대결한 독립운동가가 다름 아닌 이승만과 김구였다는 사실은 특기할 만하다”고 설명한다. 우남은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 “우리 민족은 다른 민족들과 처지가 달라서 이런 사상(공산주의)을 수용하는 데는 큰 위험이 따른다”고 여러 차례 경고했다. 건국 과정 초기엔 이런 이승만의 반공주의가 우남과 백범의 공통점을 잇는 연결고리였지만 정부수립 후엔 분열의 씨앗이 됐다.
이승만은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는 방법의 하나로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것은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지극히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상으로 “공산주의는 반드시 필패할 것이라는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이는 그의 반일론에도 영향을 미쳤다. 1951년 5월, 농림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친일 행적 때문에 국회 취임인사를 거절당하고 온 임문환에게 이승만은 “일본을 잘 아는 당신들 친일파가 나라를 지켜야 되오”라고 말한다. “아라사(러시아)의 공산주의는 곧 지지만 일본은 미국에 밀착해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해 갈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손씨는 이 일화가 “이승만의 공산주의 필패 신념과, 동시에 그가 왜 친일파 테크노크라트(기술관료)를 등용했는지 설명하는 말”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차후 ‘반민족행위처벌법(반민법)’의 집행을 유야무야 마무리했다는 비판의 계기로 이어졌다.
건국 정통성 논란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과 1919년 4월 13일 임시정부의 수립. 이 중 어느 것을 ‘건국’으로 봐야 하는지는 오랫동안 역사학계의 화두였다. 1948년 5월 22일, 대한민국 최초의 국회를 누가 소집하고 어떤 의제를 논의할 것인지 등의 협의를 위한 당선자 회의가 독촉국민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앞으로 수립될 정부는 3·1운동의 결과로 서울에서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 곧 자신을 집정관 총재로 선출한 한성정부의 법통을 계승하는 정부”라고 선언했다. 손씨는 이에 대해 “‘건국의 아버지’라는 의식에서 우러난 비전의 천명”이라고 평했다. “김구 그룹의 임시정부 정통성 계승 주장을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해석이다.
반면 김구는 지속적으로 남한 단독정부와 임시정부의 정통성 연계를 거부했다. 김구는 1948년 7월 2일, “현재 국회에서 토의되고 있는 헌법 초안에 ‘대한민국’ 국호는 임시정부 법통을 계승하는 것인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현재의 반 조각 정부로서는 계승할 근거가 없다”며 “정부를 하나 아니라 열 개를 만들었대도 법적으로 조직이 안 된 정부는 법통을 계승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당시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우남과 백범의 극명한 시각차를 엿볼 수 있다.
‘이승만과 김구’는 김구의 암살 이야기를 끝으로 마무리된다. 우남의 이후 행보에 대해선 농지개혁 외엔 특별한 서술이 이어지지 않았다. 이승만과 김구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으로 기술하기 위한 안배로 보인다. 주간조선과의 통화에서 손씨는 ‘김구 사후 이승만의 독재 행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망설이지 않고 “잘못이다”라고 답했다. 그는 “루스벨트도 4선을 했으니 전쟁을 끝내고 (정권을) 포기하는 게 자기 과업이라는 과대한 소명의식을 가졌을지 모르지만 민주주의 운영이라는 부분에서는 큰 실패이자 실책이다”라고 말했다. ‘이승만의 독재는 건국 과정에서 불가피한 일이었다’는 일각의 주장과는 분명한 선긋기다. 동시에 그는 “공과를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검토해서 판단해야 하는 일”이라며 “두 사람(우남과 백범)이 없었으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로서 대한민국 건국은 없었다. 두 사람이 건국의 기틀을 세운 것이다”라고 말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