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10-15

Doheum Lee 20세기 민족문학론의 해체와 21세기 민족문학론의 재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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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20세기 민족문학론의 해체와 21세기 민족문학론의 재구성

1. 해체와 재구성의 이유 
21세기다. 제국이 아시아와 아메리카를 정복하여 자원을 수탈하고 원주민을 학살하던 18-20세기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산업사회에서 탈산업사회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사회로 이행했으며, 국가의 경계가 무너지고 세계화와 탈국가화가 급속이 진행되고 있다. 인류는 45억 년의 지구의 역사에서 전혀 새로운 시대인 인류세(Anthropocene)로 접어들고 있다. 콘크리트와 플라스틱이 지층을 형성하고 닭뼈들이 화석으로 발견되고 온난화로 여러 기상이변이 일상화화고 지구상의 생명체의 38%가 멸종위기에 놓였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간이 생명을 창조하는 호모 데우스의 지위에 올라섰으며, 인공지능이 앞으로 대략 30년 안에 인간의 지능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18-20세기에 부합하던 민족문학론을 다시 재론한다면, 이는 “국수주의적, 복고적, 교조적이며, 권력지향적, 한국 우위주의라는 가면을 쓴 패배주의자의 문학”의 혐의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무엇보다 20세기의 민족문학론은 민족과 국가의 동일성에 갇혀 타자에 대한 억압과 폭력을 재생산한다. 왜 이성과 교양이 증대된 20세기에 집단학살이 수시로 자행되었는가. 한나 아렌트는 평범한 악, ‘순전한 생각없음’, 스탠리 밀그램은 ‘권위에 대한 복종’ 때문이라 주장한다. 이는 부분적으로만 타당하다. 경제적인 요인이 토대로 작용하지만, 근본적 원인은 가해자들이 타자를 배제하고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집착에 갇혔기 때문이다. 아이히만에게 우파 독일 중산층 시민을 학살하라 했어도 아이히만이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명령을 준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백인 아이는 때리지도 못하는 신부가 아메리카에서는 별다른 죄책감이 없이 원주민 어린이를 죽이는 일에 가담하였다. 학살을 행하기 전에 상대방을 타자화하는 혐오언어(hate speech)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일이 먼저 일어나며, 학살은 타자화한 특정 종교, 인종, 민족, 종교, 집단에 한해서만 행해진다. 그렇기에 동일성에 바탕을 둔 민족문학은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타자에 대한 폭력과 혐오를 내포한다.
민족문학론은 다른 국가와 종족의 문학과 예술, 문화를 타자화하면서 이와 구분되는 자신의 언어, 문화, 역사, 민족성 등의 동일성을 표상하거나 우월한 것으로 주장하기에 배타적이고 국수적이다. 민족문학은 21세기임에도 식민지 지배를 받던 일제강점기나 산업사회에 통용될 정서와 의식을 형상화하거나 이에 호소하기에 복고적이고 퇴행적이다. 민족문학은 다양성과 독창성을 지향해야 할 문학작품의 주제와 형식을 종족 민족주의(ethno nationalism)가 구성하고 지향하는 이념에 종속시키기에 교조적이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민족문학은 지배층의 민족주의의 이데올로기와 결합하거나 계급 모순을 은폐하고 이를 민중과 노동자의 구체적인 현실을 소거시킨 (순수) 민족으로 대체하기에 국민을 동원하는 지배층의 통치전략에 복무하거나 체제의 정당성을 강화하는 기능을 한다. 민족문학은 한국 문학의 독창성과 우수성을 외국, 주로 서양의 문학계로부터 인정을 받으려 하기에 열등감의 표출이다.
하지만, “이런 논리는 (특히 프로문학과 민족문학을 대척점에 놓고 민족문학을 오도한 김현과 이형기 식의 주장은) 지금 우리의 문학이 식민지적 의식에서 벗어났다는 전칭 긍정이 성립된 이후에 가능하다.” 우리는 아직 식민잔재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한 상태에서 제국의 지배를 받고 있다. 식민성은 우리의 의식과 삶을 규정하고 있으며, 식민적 구조는 제도와 담론과 이데올로기와 아비투스로서 작용하고 있으며, 제국은 다양한 방식으로 우리를 노예화하고 있다.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은 일제의 관료와 지주 등 친일 분자들을 독립국가의 지배층으로 존속시켰다. 박정희는 만주군관학교 출신인 백선엽, 정일권 등과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하고 대한민국을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만주국을 모델로 한 짝퉁 병영국가’로 개조하였다. 산업개발 5개년 계획을 본떠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고 국민교육헌장, 재건체조, 교련을 강요하고, 일제강점기 때의 행정체계와 사법체계를 그대로 존속시켰다. 해방이 된 지 7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친일분자들이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문화의 전 영역에 걸쳐서 지배블록의 일원을 형성하면서 식민지 근대화론을 확대재생산하고 일본에 유리한 정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 대중은 지배층의 국가 이데올로기와 결합한 독도영유권, 위안부 문제 등에 대해서는 민감하게 반응하지만, 내면의 식민성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향가에서 탈춤에 이르기까지 한국 문화가 ‘정과 한을 대대적(待對的)으로 화쟁한 흥(興)과 신명의 아우름’의 심층구조를 이루고 있건만, 야나기 무네요시가 설정한 ‘한국문화=한(恨)의 문화’라는 도식은 김소월에서 임권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술인과 지식인에 의해 확대재생산되고 있으며, 외려 이들이 ‘한국적 작가’로 대우를 받고 있다. 한국 시가의 기본 율조가 3.4조인데 반하여 와까(和歌)에서 하이쿠(俳句)에 이르기까지 일본 시가의 기본 율조가 7.5조인데, 7.5조로 노래한 김소월이 민족시인으로 둔갑하고, 지금도 수천만의 한국 대중들이 렌까(連歌)의 영향을 깊이 받은 애상적 뽕짝에 가슴을 내주고 있다.
일본 제국은 미국 제국으로 대체되어 한국인의 내면에 식민성을 더욱 강화하고 있다. 변방인 한국에서 중심으로서 내지(內地)인 “일본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이 세계체제(world system)의 역학과 한미관계에 따라 “미국으로 들어간다”는 표현으로 대체된 사례에서 잘 나타나듯, 이제 한국인의 중심은 미국이다. 미국은 분단체제를 고착시키며 남한을 사회주의를 막는 반소 전진기지와 미국에 종속된 자본주의 시장으로 유지하기 위하여 불평등협정을 체결하고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때로 민중학살에 가담하면서 무기와 상품을 팔아 막대한 이익을 취해 왔다. 촛불항쟁으로 집권한 문재인 정권조차 미국의 눈치를 보며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의 재개조차 추진하지 못하고 한국의 대외정책이 철저히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따라 제한될 정도로 정치는 종속되어 있다. 경제정책은 정권에 관계없이 미국 유학파이자 미국의 파워엘리트들과 유착관계를 맺고 있는 관료들에 의해 결정이 된다. 미국의 지식과 담론이 학계와 언론계를 압도한다. 드라마와 영화, 광고, 인터넷에 담긴 미국의 이미지와 이데올로기가 대중의 의식은 물론 무의식마저 지배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제 잔재의 완전한 청산, 미국에 대한 종속 체제의 극복, 남북통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평화체제나 세계공화국을 건설하기 전까지는 제국에 대한 저항으로서, 우리 안의 식민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민족담론과 민족문학은 유효하다. 그러기에 민족문학은 기존의 민족문학을 해체하고 새로운 맥락과 패러다임에 맞게 재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2. 동일성에서 차이의 민족문학론으로
인간은 동일성에 포획되면, “유색인, 이교도, 좌파, 장애인, 여성, 병자” 등으로 타자를 상정하고 이를 배제하고 때로는 폭력을 행하면서 동일성을 강화하고, 그로부터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안정과 이익을 얻고 동일성 내부의 구성원과 유대를 강화한다. 인류가 동일성을 형성한 요인은 유전자의 번식 본능, 농경 생활, 문화, 전염병, 언어 및 이로 이루어진 종교와 이데올로기, 국가다.
동일성을 극복하는 것은 차이의 사유로 전환하는 것이다. 서양에서 탈근대의 사상가들은 동일성의 사유를 해체한다. 필자는 이에 대해 데리다와 들뢰즈의 차이의 사유와 원효의 변동어이(辨同於異)론을 결합하여 눈부처-차이를 제시한 바 있다. 첫째, 눈부처란 ‘주/객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대대(待對)’다. 우선 상대방의 몸인데 내가 있다. 그리고 상대방의 눈부처를 보는 순간에 내 눈동자에도 상대방이 담겨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를 서로 바라보는 순간만큼은 너와 나,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 해체되고 상대방을 내 안에 서로 모시는 대대적 관계를 형성한다. 둘째, ‘내 안의 불성(佛性)과 타인 안의 불성의 서로 드러남’이다. 설혹 상대방을 때리러 간 사람이라 할지라도 눈부처를 보는 순간 멈출 수밖에 없다. 이처럼 눈부처는 내 안에 타인과 공존하고 섬기려는 불성이 드러난 것이다. 셋째, 동일성에 포획되거나 환원되지 않는 ’차이 그 자체’다. 이처럼 눈부처의 차이는 내 안의 타자, 타자 안의 내가 대화를 하여 공감을 매개로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이 서로 감성에 의해 차이를 긍정하고 몸으로 상대방을 수용하고 섞이면서 생성되기에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다.
이제 민족문학은 세계문학으로서, 동아시아 문학으로서, 한국문학으로서 모든 동일성을 해체하고 유럽,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한국 내의 여러 집단의 사상, 이데올로기, 문화, 삶 등에 대해 눈부처-차이로 바라보고 재현하는 것으로 전환을 해야 한다. 한 예로, 박범신의 『나마스테』는 차이의 민족문학에 다가간 작품이다. 작가는 한국인이 행하고 있는 네팔 노동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을 한국인이 미국에서 당한 똑같은 경험을 나란히 배치시켜 차이의 관점에서 바라보도록 유도하고 있다. 그리 한국인이 네팔의 노동자를 경멸하고 무시하고 있지만, 그들은 바로 독일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너의 누이이고, 미국에서 흑인에게 똑같은 조롱을 받고 폭행을 당하던 너의 아버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눈부처 차이의 단계로 진입하지 못한 채 이주 노동자를 연민과 시혜의 대상으로 타자화하고 있다. 카밀은 현실에 존재하는 서발턴(subaltern)으로서 주체가 아니라 작가가 재현한 ‘착한 타자’일 뿐이다. 이는 ‘재현의 폭력(the violence of representation)’이다. 이런 작가의 태도는 착한 이주노동자에 한해서만 차이를 존중하려는 한국 중산층의 지배이데올로기와 일치한다. 
3. 정태적 민족문학론에서 생성적 민족문학론으로
30대 때 참석한 학회에서 대학자라고 자부하는 사람의 입에서 “탈춤은 우리나라에만 있다”라는 말을 듣고는 실소한 적이 있다. 탈춤 자체가 신라 때 서역으로부터 수용한 것이며 유럽, 아프리카와 아메리카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유형의 마스크 댄스(mask dance)가 있기 때문이다. 이제 민족문학은 ‘우물 안 개구리’를 넘어 세계문학의 지평에서 아시아 문학으로서 자리매김을 해야 하며, 이럴 때 전제는 정태적 민족문학론에서 생성적 민족문학론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데리다의 지적대로, “동일자 속에 타자성이 없다면 어떻게 동일자의 유희가 발생하겠는가?” 한국에서 얼굴이 하얗다고 자랑하던 학생이 유럽으로 유학을 가면 자신의 얼굴이 노란색임을 절감하며 하루에도 여러 차례 거울을 보게 된다는 말을 들었다. 유럽 학생 또한 아시아계 유학생의 얼굴을 보며 자신의 얼굴이 흰색이란 점을 새삼 각인할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다. ‘아시아(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은 유럽이며, ‘유럽(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것 또한 아시아다. 양자는 서로에게 거울이자 타자다. “아시아는 유럽의 침략을 받을 때까지 결코 자기를 의식하지 못했다. 자율을 상실하고 유럽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았을 때, 또는 서양이라는 거울에 비춰보고서야 비로소 아시아는 문명적․문화적․민족적․국민적 정체성을 반성적으로 획득할 수 있었다.”
아시아는 유럽의 정치적, 군사적, 문화적 침략을 받으면서 자신을 인식하며 국민을 형성하였고, 이에 대한 집단적 불안감을 근대국가 건설로 극복하였다. “서양 근대의 정수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국민’이라고 불리는 집단적 주체가 불가결했고, 아시아의 국민은 밖으로는 서양에 저항하고 안으로는 반동적 유제를 초극(超克)해야 했던 것이다. 서양에 대한 저항과 부정이 없는 곳에 아시아의 근대가 실현될 전망은 없다.” 근대 초기에 유럽의 파리나 런던에 갔거나 난학(蘭學)의 태동공간인 데지마[出島]에서 유럽의 근대에 충격을 받은 일본의 엘리트들은 이를 일본과 일본의 하층민에게 이식하였고, 외부로는 조선과 타이완을 근대화와 식민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런 식민화와 근대화 과정에서 조선과 타이완에 국민(國民), 이를 주체로 한 근대 국민국가가 형성되었다.
일본의 엘리트들은 조선의 역사와 문화, 언어를 유럽으로부터 유입한 근대 학문 방법론으로 분석하였으며, 그 중 대다수는 타율성론, 정체론,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의 식민주의 사관에 꿰맞추어 해석하였다. 일본적인 것이거나 일본과 조선에 공통인 것은 보편이었고 이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조선의 전통으로 분류하였다. 이광수를 비롯하여 한국의 엘리트들도 ‘미개한 조선’을 일본식으로 근대화하는 데 앞장섰다.
이에 동조하든 반대하든, 한국의 엘리트들도 이들의 연구를 바탕으로 국문학과 국사학, 민족적 정체성을 형성하며 이중의 수행을 하였다. 그들은 한국을 서양과 일본을 좇아 근대화하는 동시에 서양/일본적인 것에 저항하였다. 자본제, 합리성, 과학, 근대 학문과 교육, 민주주의를 수용하여 근대화에 박차를 가하는 한편, 서양과 일본에 저항하여 유럽과 일본의 타자로서 유럽과 일본에 없거나 부족한 것으로 ‘한국’을 구성하고 ‘전통’을 창출하였다. 이 과정에서 유럽적인 것은 세계적 보편과 동일시되고 그것과 다른 한국의 특성은 민족성의 이름으로 호명되었다.
식민지배의 종식 이후 정치적인 지배-종속관계는 해체되었지만 경제적, 문화적 지배-종속관계는 잔존하며, 유럽과 아시아, 일본과 나머지 아시아 사이의 보편-특수의 역학관계는 존속하고 있다. 이런 구조와 역학관계 속에서 대다수 한국의 작가들은 근대 초기에는 서양식 근대화와 계몽을 강한 메시지로 전하였으며, 이후에는 민족의식을 고양하거나 가장 한국적인 것을 드러내는 방편으로 문학을 창작하였고 비평가 또한 이 관점에서 감상하고 평가하였다. 
정체성이란 자체가 정적인 것이 아니라 타자에 따라, 시공간에 따라, 맥락에 따라 변하는 역동적인 것이다. 인간과 인간, 나라와 나라의 관계는 찰나의 순간에도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서로 생성하는 상호 생성자(inter-becoming)의 관계에 있다. 한국의 정체성이 변하면 일본도 따라 변하며, 이는 동양과 서양의 관계서도  마찬가지다. 정체성은 기업, 국가, 화폐처럼 허구이지만 그 안의 구성원들의 사고와 실천에 영향을 미치면서 현실을 구성하는 상호주관적 실재로 작동한다. 그러기에 우리는 제국과 다른 국가가 동일성의 배제와 폭력을 행할 때는 이에 저항하는 주체로서 정체성을 가지면서도 우리가 타자에 대한 배제와 폭력, 전쟁을 행사하려 할 때는 이를 해체하는 이중의 실천을 해야 한다. 동아시아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민족주의, 국민국가, 각 국가의 정체성 등 동일성을 해체하고 고정된 정체성을 넘어 연기(緣起)적이고 생성적인 정체성, 이에 바탕을 둔 생성적 민족문학으로 전환해야 한다.
생성적 민족문학은 서양과 일본, 중국에 대해서만 아니라 한국 안에서도 모든 중심을 해체하는 생성을 해야 한다. 국가주의, 엘리트주의와 가부장주의를 해체하고 중심- 파워엘리트, 남성, 다수자-에서 주변-서발턴과 호모 사케르, 여성, 사회적 약자, 이주여성과 이주 노동자-로 시선을 옮기고, 그들이 목소리를 내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그렇지 못할 경우 지식인과 작가들이 대변해야 한다.
4. 오리엔탈리즘의 내면화에서 탈식민의 민족문학으로
유럽 안에서 인종, 국가, 계급, 집단에 따라 다양한 자질과 양태가 생성되므로 서양을 통일적인 정체성으로 정의하는 것 자체가 허구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는 통일적인 정체성을 구성하여 서로 영향을 미쳤다. 유럽은 초월적인 이분법적 재현체계를 통하여 ‘서양’과 대조하여 ‘동양’을 ‘이국적, 전근대적, 전제적인 것, 비합리적, 이교도’ 등 의 스테레오타입으로 재현하였다. “오리엔탈리즘은 ‘동양’과 ‘서양’이라고 하는 것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존재론적이자 인식론적인 구별에 근거한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한 마디로 말해, 오리엔탈리즘은 힘과 헤게모니에서 월등하게 우월한 유럽이 동양을 지배하고 재구성하기 위하여 ‘서양’과 대조되는 이미지, 관념, 성격, 경험으로서 ‘동양’을 조작적으로 재현한 것이다. 이것을 1차 오리엔탈리즘으로 명명한다.
동양은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한다. 근대 이후 서양 대 동양을 “근대 대 전근대, 발전과 미/저발전, 계몽 대 야만, 교양 대 무지, 과학 대 주술”로 구분하고 후자를 열등한 것으로 간주하며 전자를 지향하려는 것이 2차 오리엔탈리즘이라면, 이를 일부 반성하면서 차이라는 명목 하에 “분석적 대 직관적, 능동적 대 수동적, 남성적(아니무스) 대 여성적(아니마), 합리적 대 감성적, 개인주의적 대 집단주의적”으로 구분하여 설명하는 것은 3차 오리엔탈리즘이다. 물론, A or not-A의 이분법 대 A and not-A의 퍼지(fuzzy), 부분적 대 총체적, 실체론 대 관계론 등 사유(구조)의 차이는 존재한다. 또, 유교자본주의론에서 잘 볼 수 있듯, ‘동아시아적인 것,’ ‘혹은 서양에 없는 동양의 고유 전통’이라고 우리가 인지하고 구성하고 있는 개념, 이미지, 정체성조차 유럽의 눈으로 본 타자로서 동아시아다. 유럽적인 것과 동아시아적인 것을 비교하며 유럽에 없거나 부족한 것, 혹은 ‘이질적이고 기묘한 것’을 비서양으로, 더 나아가 동아시아의 전통이나 정체성으로 간주한다. 세계에서 서양을 빼냈을 때 남는 잔여물을 아시아적이거나 아프리카적인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처럼 서양과 구분하여 형성된 정체성에 대해 아시아인이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식으로 우월감을 가지는 것이 4차 오리엔탈리즘이다.
지금 한국의 대중, 언론, 학계, 지식인에게 1차와 2차, 3차, 4차 오리엔탈리즘이 혼재한다. 오리엔탈리즘을 내면화하는 반면에 이에서 한국의 전통과 정체성을 확립하여 서양과 일본의 문화적 종속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그것 또한 유럽과 일본에 대한 거울에 비춰진 타자로서 한국적인 것이다. 학자들 또한 유럽의 ‘수입오퍼상’을 답습하거나 유럽의 타자로서 ‘고물상’을 고집하는 것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식민지인들이 식민주의자의 자아상에 따라 ‘자아 통합적 타자로 구성되고, 유럽 또한 식민지를 타자로 정의함으로써 스스로를 주권적 주체(sovereign subject)로 통합하였다.” 이런 면에서 로버트 영의 “서양의 전유적 나르시시즘(the appropriating narcissism of the West),” 사카이 나오키(酒井直樹)의 서양의 거울에 비춰진 타자로서, “유럽중심주의적 보편주의와 아시아적 특수주의 사이의 공범성-전형적인 탈식민지주의적 공범성” 개념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왜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가해자의 법(독일-일본법)으로 판정하는가. 탈식민의 기획은 한 마디로 “나는 노예다→나는 내가 노예임을 알았다→나는 나를 노예로 규정하고 구성한 모든 것에 저항한다→나는 이제 노예가 아니다.”로 진행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황석영의 『손님』은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이라는 두 서양 손님, 타의에 의한 근대화가 어떻게 신천 양민 대학살이라는 비극을 낳았고 또 화해, 해원하는 과정에 대하여 지노귀굿의 형식, 다초점 서술방식을 빌어 묘사하고 있다. 이 작품은 “소설이라는 서구의 장르를 빌어 동일성 담론으로서의 소설 이데올로기를 해체하는 데 효과적으로 이용함으로써 서구 문화의 전복적 수용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즉, 근대 소설 양식과 이와는 이질적인 전통적 서사 기법이 혼성적으로 교차하면서 새로운 서사의 모델을 형상하는 것이다. 산 자와 죽은 자의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재현의 틀을 넘어서는 헛것(유령)의 세계는 재현된 심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근대의 통합된 서사에 균열을 낸다.……죽음과 삶을 가로지르는 지노귀굿을 차용한 구성적 힘은 전통 양식을 현재적으로 전용한 『손님』의 탈식민주의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한 예이다.” 헛것을 현실에 끌어와 판타지를 현실과 결합시킨 것 또한 한국적 환상적 리얼리즘의 지평도 열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민족문학에서 진일보한 것은 분명하지만, 문체와 시간관, 세계관은 아직 서양의 그것에 머물고 있다.
5.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주변의 부정성의 종합
K-pop의 세계적 열풍에도 시조를 아는 외국인은 아마 몇 명밖에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일본의 하이쿠는 해외에 최소한 1억 명 이상의 동호인이 있고 대다수 나라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최근에 들어 진전이 있지만, 세계문학계에서 일본문학이나 중국문학에 비하여 한국문학이 차지하는 위상은 아직 초라하고 미미하다. 누구든 한국 작품이 노벨문학상을 받고 서양의 교과서에도 버젓이 실릴 수 있게 되기를 열망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 영화제의 목록에 오르고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한국 영화에 대해, 권명아가 “이는 한국 영화가 국가 통제에서 벗어나는 탈영토화하의 과정이자 세계 자본으로 편입하는 재영토화의 과정이며, 동시에 변방marginality에서 벗어나려는 탈게토화와 중심으로 편입하려는 욕망의 산물이기도 하다.”라는 지적은 문학의 장에서도 음미할 만하다. 주변은 늘 타자화하고 열등한 것으로 간주되고 배제되지만, 이 때문에 중심의 원리 및 이데올로기에 포섭되지 않는 부정성을 갖는다. 반면에 중심은 늘 권력을 갖고 주변을 지배하지만, 이 때문에 부정성은 상실되고 창조성마저 고갈된다. 그래서 주변이 중심을 교체하면서 인류문화는 발전하였다. 한국문학의 주변성에 대한 냉정한 통찰을 바탕으로 이를 잘 형상화하되, 세계 자본에 편입하려는 재영토화와 중심으로 편입하려는 욕망과 조바심을 버리고 지역성/특수성과 세계성/보편성 사이를 부단히 오고가면서 주변성을 벼리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 작업에서 필요한 것이 한국이 맞고 있는 현실의 모순에 대한 객관적이고 첨예한 인식을 바탕으로 전망이나 판타지를 종합하는 것이다. 민족문학/프로문학의 이분법이 민족문학에서 민중, 노동자, 계급모순, 정치성을 제거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되면 남는 것은 국수주의 내지 국가주의로서 민족문학일 뿐이다. 이는 사이비민족주의론에 불과하다. 백보 양보하여, 일제강점기에 한국 문화와 언어를 말살하는 것에 맞서서 순수하게 한국적인 것을 재현할 때 이는 정치성과 민족적 정당성을 갖는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 해방 이후의 공간에서는 이런 민족문학은 민족적인 것을 감상과 복고의 대상으로 전락시키고 박제화할 뿐이다. 민족문학은 당연히 민족이 맞고 있는 여러 모순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하여야 한다. “민족문학의 개념은 철저히 역사적 성격”을 지님과 동시에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관점을 가져야 하며, 당대 있는 현실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묘사와 더불어 통일을 지향하고 유토피아적 전망이나 전복(顚覆)으로서 판타지 또한 가져야 한다. 이럴 때 참조할 만한 것은 난장이다. 탈춤의 장에서는 양반/서민, 어른/아이, 남성/여성의 권력이 전복된다. 참여한 이들은 유교의 규율체계와 이데올로기, 윤리에서 벗어나 욕망과 불만을 발산한다. 문화는 지배와 저항, 질서와 일탈, 포섭과 배제, 지배담론과 피지배담론, 지배 코드와 피지배코드, 지배이데올로기와 유토피아가 치열하게 마주치는 장이다. 난장은 모든 억압에 맞서서 욕망(desire)만이 아니라 욕망으로 타자화하지 않은 욕동(drive)마저 발산하면서 기존의 질서를 전복하는 장이다. 난장의 민족문학은 자연스레 민족을 세계체제, 국가나 자본에 포섭하려는 모든 시도를 부정한다.
말 그대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민족문학론이 20세기의 고루한 이념과 형식을 고집한다면 신체시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다. 이제 민족문학은 새로운 패러다임과 세계관을 갖고서 한국의 현실에 대한 객관적 재현과 인류세에 부합하는 전망을 종합하면서 변방의 부정성에 충실하여 세계문학의 보편성을 획득해야 한다.
-  <푸른사상> 2019년 겨울호(30호)에 게재한 원고입니다.임동확, 맹문재, 공광규 선생께서 저와 유사한 주제로 새로운 ㅁ민족문학론에 대해 저보다 나은 글을 게재하였고, 김응교 선생도 김수영에  뺴어난 글을 실었으니  <푸른사상> 2019년 겨울호구독하시고 앞으로도 많이 사랑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Comments
권태영
깊은 사유를 느낄 수 있는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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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택
존경하는 교수님... 많은 깨우침을 주시는 글이라 생각합니다. 죄송하지만, 제가 독서력이 좀 딸려서요. '난장은 모든 억압에 맞서서~~'에서 '난장. 단어를 사전 검색해도 정확한 뜻을 모르겠습니다. 좀 알으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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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난장(亂場)은 우리나라의 전통 놀이판, 판소리나 탈출 마당, 시장판처럼 여러 사람이 모여서
어지러이 뒤엉켜 떠들고 놀고 술먹고 노래하고 춤추는 판을 말합니다. 때로 법과 이데올로기, 기존 질서를 해체하고 마음이 가는 대로 신명이 나게 놀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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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택
이도흠 상세한 설명을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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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yul Kim
좋은 공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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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heum Lee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새해 복 많이 지으시고 받으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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