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4

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Ⅰ .. : 네이버블로그

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Ⅰ .. : 네이버블로그
분류사.통사


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Ⅰ 
▣논쟁을 재개하며-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대미 인식-미국에대한 무지가 대미 맹종 불러
▣근·현대의 한국의 중국관
ohyh45 ・ 2022. 9. 1.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Ⅰ https://blog.naver.com/ohyh45/222864297805

▣논쟁을 재개하며-①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②무엇을 할 것인가, 
▣대미 인식-①미국에 대한 무지가 맹종 불러,

②대미 의존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 
▣근-현대 한국의 중국관-
①박노자의 생각, 
②허동현의 생각,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865212342

▣ 일본관(觀) - ①미워하며 배워온 일본-박노자 생각, ②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허동현 생각

▣러시아관(觀) - ①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박노자 생각, ②'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허동현 생각.

▣서양인의조선관(觀)-①우리는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것은 아닌가,②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악화시켰다,

▣일본인의조선관(觀)-①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복제 오리엔탈리즘', ②일본은 고대 이래 아시아를 멸시해 왔습니다,






1.논쟁을 재개하며 ①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박노자ㆍ허동현 교수가 다시 만났다. 프레시안 본사에서 대담을 나눴다. 박ㆍ허 교수는 이날 1시간반에 걸쳐 '한반도의 지난 1백년'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지한 논쟁을 벌였다. 두 교수는 이번 대담을 시작으로 '백년 전 열강이 본 우리, 우리가 본 열강', '신여성, 기생, 영화, 불교, 이광수 등 친일문제 어떻게 볼 것인가' 등에 대해 격주로 토론을 벌일 예정이다. 두 분의 대담을 2회에 걸쳐 나눠 싣는다. 편집자





한국근대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보는 주체에 따라 '다양한' 역사 가능, '하나'의 '진리'는 있을 수 없어​



허: 백 년 전과 오늘날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소위 보수와 진보라는 대립항을 통해 살펴봤지만, 사실은 공통분모 찾기를 통해 오늘 우리가 나아갈 길을 모색해보려 했던 것이거든요. 독자들도 저희 두 사람이 지향하는 바는 같지 않느냐 하는 얘기를 많이 하시더라구요.



박: 저희들이 합의한 부분이라 한다면 사관의 문제에 있어 진리의 상대성 부분입니다.

역사도 역사를 보는 주체에 의해 서술되는 하나의 내러티브(narrative)입니다. 그 내러티브들이 서로 다르다는 것은 주체들이 그만큼 다르다는 얘기지 왜곡이다 진실이다 하는 개념으로 재단할 수 없거든요.

하나의 역사를 상정하고 맞다-틀리다 싸우는 게 아니라 '역사를 보는 다양한 눈'에 대해서는 합의하고 있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한국사뿐만 아니라 세계 정치 질서에 대한 접근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지금과 같은 세계질서는 근본적으로 인류의 발전을 막고 있다고 생각하고 그 질서가 이제는 막다른 골목으로 와 있다고 보거든요. 그런 현재의 입장을 통해 백 년 전 한국인들의 눈을 알게 모르게 바라보게 됩니다.



세계질서에 대한 근본적인 입장에 따라 역사를 보는 눈도 달라지게 되는 거죠. 그런데 허동현 교수님께서는 어쨌든 현 세계질서에서 한국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근본적인 전제로 갖고 계신 것 같습니다.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역사를 보는 눈과 내러티브가 다르죠.



다른 내러티브들이 서로를 배제하거나 적대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보충적인 관계에 있다는 것을 독자한테 보여주면 역사적 상대주의와 상대성 원칙에 의거한 똘레랑스에 대한 보다 깊은 이해가 생길 것 같습니다.

사실 왜곡이 없는 이상 사관의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진실이다 왜곡이다라는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구요.



허동현과 박노자의 한국근대100년논쟁집 '우리역사 최전선'





"지금의 한국, 세계체제 냉전 질서 하의 결과물", "우리의 자율성과 독자성을 인정 안하는 논리"



프레시안: 수정주의 사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냉전 이후 한국의 경제적 성공의 원인을 어디에 둘 것이냐에 대해 아직도 논란이 많습니다만 허교수님은 우리의 독자적 능력을 중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의 근면함도 사실이지만 한국이 냉전 질서의 절대적 영향력 하에서 휘둘린 것도 사실이 아닙니까?



허: 저는 수정주의 사관이나 세계 체제론적인 인식을 갖고 한국현대사를 바라보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한국현대사에 관한 책 대부분이 이러한 사관과 인식 하에 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수정주의사관은 미국사회의 건강성을 모색하는 진보적 학자들이 미국의 외교정책이 제국주의적이라고 공격하는 것이고 세계체제론도 미국 지배하의 세계질서를 극복하려는 대안 찾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우리 자신의 눈으로 우리 역사를 본 게 아니라 바깥의 눈으로 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관과 인식을 갖고 한국현대사를 보다 보면 해방 후 대한민국의 역사는 비주체적이고 종속적인 역사이자, 극복되어야 할 역사로 보일 수밖에 없어요. 아까 박노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역사를 보는 눈과 내러티브는 다를 수밖에 없거든요.



그런데 저는 세계체제론적 시각을 갖고 보더라도 2차대전 이후 주변부에서 반주변부로 다시 중심부(?)로 고속 이동한 경험은 우리사회만이 유일하게 갖고 있다고 봅니다. 물론 이러한 '성공'의 이면에는 중심부의 자본과 이곳의 개발독재와 재벌 세력의 야합이 있었던 것도 부정할 수만은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제 생각은 지금 우리의 성공을 설명함에 있어 우리의 주체적이고 자주적인 요인을 찾는 눈과 서술도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개발독재와 재벌 세력들이 중심부 자본과 야합해서 우리 노동자 농민을 착취하는 과정에서 운 좋게 우연한 '발전'을 이룬 것으로 본다면, 한국은 존재하지 말아야 할, 정당성이 결여된 나라가 돼버려요.



저는 그런 인식에 반대하는 거죠. 오늘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이룬 우리 시민사회의 입장에서 시민의 눈으로 우리가 거둔 성공의 겉과 안, 공(功)과 과(過)를 균형있게 서술해야만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이런 까닭에 우리 현대사의 오점을 비판적으로 조명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우리 시민사회가 거둔 성공의 역사를 자긍하는 눈과 서술도 필요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던 것이죠.



프레시안: 세계체제론자들이 말하는 냉전질서 하에서 독특한 위치로 인해 소위 '안보주권을 희생하고 경제적 실리를 얻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허: 물론 우리가 세계체제의 중심인 미국의 쇼케이스나 반공의 보루 역할을 하면서 얻은 게 있습니다. 그러나 수정주의 사관으로 한국 현대사를 보는 브루스 커밍스의 말처럼 미국이라는 제국주의 국가가 그 꼭두각시인 정당성이 결여된 남한의 독재정권에 미국 시민들의 피땀인 세금을 퍼붓는 과정에서 군부와 재벌의 야합에 의한 천민자본주의가 우연하게 발전했다는 식의 말에 동의하기 싫은 것이지요.



미국은 그들의 이데올로기와 상품을 지키고 전시하는 보루나 쇼케이스를 원한 것이지, 한국의 진정한 성장, 즉 다원적 시민사회의 구현과 산업화를 원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 시민사회가 거둔 성공을 개발독재와 재벌의 공으로 돌리는 것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오늘 한국이 거둔 성공의 주된 원인은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이 흘린 땀과 피의 대가에서 찾는 게 정당하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수정주의 사관이 풍미하던 1980년대에 우리 사회의 현실―광주 학살과 같은―을 돌이켜 보면 수정주의사관에 입각한 한국사 인식이 분명 상당한 호소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시민사회를 이룬 오늘의 입장에서 조명할 때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있어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이 흘린 피와 땀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민력 성장의 역사로서 시민의 역사를 다시 써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박노자, "최소한의 합리성 지닌 관료집단과 '선비정신' 지식계층이 한국 발전 이끌어"



박: 좋으신 말씀이십니다. 세계체제와 한국의 상호작용을 이야기할 때 한국의 독자적인 성장요인으로 적어도 두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한국은 다른 세계체제 주변부 국가에 비해 관료체제 전통이 깊은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는 어쩌면 단점이 될 수도 있으나 근대화 작업에 있어서 장점도 될 수 있거든요.



우리 보통 고시 제도를 많이 욕하잖아요. 그래도 평가해줘야 할 부분은 세계 체제 주변부 어디에서도 국가 공무원 채용이 그나마 이 정도의 최소한의 합리성과 공공성을 가지는 나라는 거의 한국이나 기타 동아시아권밖에 없거든요



러시아나 동구라파 같은 경우는 공공연하게 공무원 채용시 뇌물이라든가 배경 이라든가 등의 사적 네트워크가 개입되는데 한국사회는 대단히 사적 네트워크가 중요한 '연줄 사회'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공무원 임용과 승진이 어느 정도 공적으로 이뤄진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70-80년대의 군부독재를 좋아할 일은 없지만 군부독재가 그나마 한국경제의 성장을 이끌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전부터 어느 정도 합리성과 독립성, 공공성을 가진 관료 체제의 골간이 이미 잡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위에 군벌들은 막말로 도둑질을 많이 했다 해도 중간 경제 관료의 긍정적인 역할들은 분명히 있었던 것이지요.



또 한 가지는-제가 이름 붙였는데- 한국적인 유교적 이상주의라는 근본 심성이죠. 그런 것이 결국은 민주화운동의 바탕이 된 것 같습니다. 한국 지식인들한테는 교육받고 독서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이상이 주입되는데 이것은 바로 의(義), 의인, 양심입니다.



예컨대 독립운동의 역사나 전통사회의 역사를 읽을 때 지식인들이 이런 가치를 강력하게 주입받습니다. 60-70년대 한국 대학생들의 이상이 비타협적인 독립군이 되는 시기가 있었죠.



'부조리한 사회와 타협하면 나쁜 것'이라든지 '본인의 출세만 도모하면 나쁜 것이다'라는 것을 상식으로 익혔던 것이죠.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같은 관념이 80년대까지 지식인들의 심성 밑바탕에 아직 많이 깔려 있었습니다.



물론 표현할 때는 민주주의, 독재타도, 민족주의적 수사로 표현됐지만 그 심연을 들여다보면

'선비는 부조리한 사회에서 살 수 없다'는 관념이 깔려 있었던 것입니다.

'사회를 바로잡든지 어쨌든 간에 사회와의 타협은 선비로서 있을 수 없다'

는 그런 의, 의인 정신이 한국사회를 여기까지 끌고 온 원동력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싱가포르 같은 경우 일인당 소득이 한국보다 높지만 지금도 박정희 시대와 흡사한 독재 정권 하에 있습니다.

그래도 한국이 통치 형태에 있어서 제도적 민주주적인 형태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그 저변에 유교적 전통 심성이 이어져왔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유교 전통 자체는 두절이 됐는데 심성은 그렇게 쉽게 안 바뀌죠.



허동현 "관료들의 최소한의 공공성을 지키게 한 민력의 성장은 2공화국 때부터 이뤄져"



허: 이제 논쟁이 좀 본격화되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의 독자적 성공 요인에 대해 박노자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에 이견을 갖고 있습니다. 먼저 한국의 성공을 이끈 견인차로 관료의 공채제도를 말하셨는데 사실 공무원 공채제도의 확립을 처음으로 모색하고 실행했던 정권은 제2공화국 장면정권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겁니다.



사실 박정희 시대에 군인들의 집권이 있었기에 한국의 산업화가 가능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학설이지만, 그 성공 요인으로 인구에 회자되는 장기경제개발계획, 관료의 공채제도, 국토개발사업 등이 실제로는 9개월밖에 존속 못했지만 제2공화국 때 입안되고 시행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시민사회의 성장을 억압하고 우리의 미래를 가불해 간 군사정권이 오늘 한국의 성장을 가져온 공로자로 보는 데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가 다시 상명하달의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관료 주도의 일방주의적 경제개발정책을 따를 수 없지 않습니까?



그러하면 민과 관이 동등한 입장에서 난상토론을 벌이며 국가의 경제정책을 함께 토의하고 고민한 제2공화국의 기억이 소중한 것이지요.



제 생각으로는 군사정부가 관료의 공채제도를 그나마 유지한 것도 시민들의 눈이 무서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즉 민력의 신장이 있었기에 군사정권 하에서도 관료제도가 그나마의 공정성과 합리성이 유지될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 아닐까요.



박: 그게 어디까지나 과거제도가 천년 이상 존재했던 한국의 문화적 전통이라서 '민의(民意)와 같은 공공성 기대 심리가 가능한 것이지요. 군인들이 잘해서 그런 것은 아니거든요. 군인의 횡포와 독재에도 불구하고 오랜 전통에 의해서 관료제도가 효율적으로 작동한 측면이 있는 거죠.



'의리'는 사적 집단의 집단적 이기심일 뿐, 우리 조상들이 강조했던 '의'와 달라



허: 또 하나 다른 생각을 말씀드리자면, 박노자 교수님이 유교적 심성, 즉 의(義)가 근대 이래 한국 지식인들의 의사결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바탕이었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요즘 세상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지식인들도 공적인 '의'보다 사적 관계인 소위 '의리'를 앞세우는 것 같더군요.



소위 '노빠'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가는 추세로 보면 어떤 정치집단이건 자기 무리끼리의 '의리'를 '의'로 착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독립운동과 학생운동, 그리고 사회운동을 이끈 운동자들에게 선비정신의 계승이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사회에서 이러한 지사정신은 찾아보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가 그동안 '의'와 '공'을 진정 중시했다면 오늘과 같은 정신적 공황사태를 맞지 않았을 테지요. 근대에 들어서서 한국사회가 물질을 숭배하는 물신(物神) 지배하의 사회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물질적인 풍요를 일구어 낸 우리가 잃어버린 게 있다면 바로 '의'와 '공'을 소중하게 여겼던 정신적 가치겠지요.



사적 집단간의 '의리'만 판치는 시대를 맞아 우리 사회에 지킬만한 가치가 있음을 보여주는―한 세기 전 선비들과 같이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는―진정한 의미의 보수주의자들이 다시 등장하길 바랄 뿐입니다.



박: 장준하 선생이나 함석헌 선생을 보면 그래도 지사정신이라는 것을 느끼는데 문제는 그 '의'의 정신은 일반인 차원에서 자꾸 패거리 논리, 즉 일본식의 '의리'로 변질된다는 것이죠. 한국 유교 전통의 '의'는 '공공선'을 의미하지만, 일본적인 '의리'는 결국 사적 집단의 단체적 이기심 이상이 될 수 없어요.



허동현, "식민통치와 6ㆍ25전쟁으로 인한 양반계층의 완전 몰락, 사회적 상향의지 불러일으킨 '발전 원동력'인 동시에 '노블리스 오블리제' 없는 주류형성의 원인"



허:'의리'라는 말은 사실 전통시대 우리에게는 없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의(義)와 리(理)를 이야기했지요.

현재 우리가 말하는 의리란 일본에서 무사나 야쿠자 같은 사적인 집단들이 중시한 친분관계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 천박한 조폭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우리 사회를 썩지 않게 해주는 소금과 같은 선비의 지사정신이 다시 한번 구현되기를 저 역시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의를 찾는 그 정신'들이 근대이래 한국사회를 여태껏 움직여온 주류가 아니라는 겁니다.

오늘날 백 년 전에 나물 먹고 물만 먹더라도 의를 찾겠다는 정신은 사실상 단절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한국사회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돈과 권력과 지위를 쫓는 사회로 변한 것은 선비와 양반 계급의 몰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조선왕조의 붕괴 이후 우리는 돈만 있으면 모두가 양반이 될 수 있는 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사실 오늘 우리의 은―어찌 보면 물질 면에 지나지 않는 '천박한 성공'은―의를 쫓는 선비정신의 몰락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사회가 의보다는 의리를, 선비정신보다는 물질적 풍요를 쫓게 된 것은 일제 식민통치와 6ㆍ25전쟁이라는 두 개의 비극, 내지 '발전 충격(development shock)'을 맛보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먼저 일제 식민통치로 인해 5백년을 지탱한 양반이라는 조선의 지배계급이 무너져 내렸기 때문에 누구나 위로 올라갈 수 있다는 사회적 상향의지(social upward mobility)를 갖게 되었어요.



또 6ㆍ25전쟁으로 인해 동족부락이 해체되는 등 '민족 대이동'이 있었고 이에 따른 도시로의 인구집중과 익명성의 보장이 누구나 평등한 민주사회의 추구라는 엄청난 변화를 촉발한 것이라고 봅니다.



소위 미국의 서부개척시대와 같은 엄청난 발전 동력 효과를 준 거죠. 저는 다원화와 산업화로 가는 변화의 동력을 주는 제도와 이념이 도입되고 정착된 시대가 1950년대라고 생각합니다. 종래 이 시기를 독재와 빈곤만이 있던 암흑시대라고 보는 학설들이 우세했습니다.



수정주의사관의 눈으로 보자면 이승만 정권은 제국주의국가 미국의 꼭두각시 정권이어야 하기에 이 시기에 독자적 발전의 토대가 놓여졌다는 점을 무시했고 한국의 산업화를 박정희 정권의 공으로 보는 우파적 사관도 박정희 시대를 상대적으로 돋보이게 하기 위해 1950년대를 정체와 퇴영의 시대로 그리는 것이 당연지사였지요.

그러나 저는 종래 이승만 정권이 지나치게 평가절하되었다고 봅니다.



사실 한국 사회의 민주화와 산업화에 기여한 이승만 정권의 공헌도 그 과오―친일파 옹호나 시민 학살 같은―를 비판하는 것만큼 정당하게 평가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제도적으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가 도입된 것은 이승만 정권 때이고 이렇게 도입된 토대를 딛고 성장한 시민사회가 미국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제대로 해보자고 요구한 것이 4ㆍ19였고, 그 결과 성립된 제2공화국이 이러한 시민적 욕구를 실천하려던 도중에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난 것이지요.



박정희 군부 정권과 그 이전의 이승만과 장면정권의 차이를 한마디로 줄이자면 그 지향점이 일본식과 미국식 근대화로 달랐다는 것이에요.



박정희 정권 이후의 군사정권은 모두 시민사회의 성장, 즉 민력이 커지는 것을 짓누른 것이고, 이러한 민족과 국가를 앞세워 개인의 존재를 부정한 시대를 극복하는 데 무려 30년 이상이 걸렸다는 점에서 개발독재의 시대를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이지요.



현재 한국이 일본에 뒤지지 않는 다원화된 시민사회를 이룬 동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이러한 물음의 해답은 서구근대를 직수입한 이승만 정권과 이를 곧이곧대로 실천하려한 장면 정권, 그리고 이를 가능하게 한 민력의 성장에서 찾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아탑을 우골탑으로 불리게 한, 소와 전답을 팔아 자식을 공부시킨, 후세의 미래에 과감히 투자한 농부들이었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들의 희생을 정당히 평가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박노자, "해방 후 이승만 정권에 이식된 미국적 근대, 일본적인 일상적 근대에 묻혀 오히려 민중들의 자발적인 요구 무시"



박: 예 말씀하신 것 중에 약간 다르게 생각하는 부분은 이승만 정권하 정권 상층부에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미국식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던 것은 사실인 듯 합니다. 일단은 이상화시키고 교과서적으로 이해한 미국적 근대를 '모델'로 생각한 게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정부 수립 제 1공화국 출범



그런데 문제는 한국적인 근대적 규율, 일상적 근대를 만든 것이 일본 식민통치시대구요. 그 식민지적 일상 통치, 대민 통제 방식을 제1공화국이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지요. 거시적으로는 미국적 근대화에 대한 열망이 있었지만 -이승만 정부 하에서 비밀경찰조직, 안기부같은 조직은 없었던 것을 평가해주기도 하죠-미시적으로 통치 형태를 본다면, 예를 들어 그 당시 마을 선거를 어떻게 치렀습니까.



경찰들이 동장들을 불러서 야당표 나오면 너희 죽는다 이런 거 아닙니까. 말단 행정관이라도 향촌사회에서 왕 노릇을 한 거고 이 것은 일제시대하고 똑같았습니다. 기층 민중에 대한 통제 방식은 일제 때와 차이 없고 공무원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하게 30년 근속상을 받고 그랬습니다. 그 당시 첩 두는 것도 그대로구요.



거시적인 차원에서 봐도 조봉암 선생의 법살 같은 걸 보면 미국의 매카시즘과는 또 차원이 다릅니다. 매카시즘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소련간첩 혐의가 짙은 로젠버그 부부를 총살하긴 했지만 단순한 정치적 라이벌까지 죽이려 하지는 않았거든요. 따라서 일제 시기의 미시적 근대는 지속됐으며 이 차원에서 이승만 시기 근대의 비(非)미국적인 기원도 생각해봐야 합니다.





허동현, "제 2공화국의 지방자치 수준 오히려 지금보다 높아..산업화가 있은 후에야 민주주의 가능하다는 것은 군사쿠데타를 옹호하려는 사후해석"



허: 저도 서구 근대의 제도장치들이 도입되자마자 바로 영향을 미쳤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지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에 참정권을 부여한 것이 프랑스보다 1년 앞설 정도로 적어도 제도적인 면에서 제1공화국 때 도입된 민주주의는 지금보다도 못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제 2공화국 출범



그리고 박노자 선생님이 말씀하신 축첩의 악습은 이미 제2공화국 때 철폐됩니다. 소위 작은마누라를 둔 사람은 공직에서 쫓겨났지요. 민주주의 제도가 도입된 지 약 10여년 만인 제2공화국 시절 시민의 힘으로 민주주의가 시작되면서 읍ㆍ면ㆍ이장까지 직접 뽑는 풀뿌리 민주주의가 태동된 바 있었습니다.



오히려 지금에 비해서도 지방자치의 수준이 높았다고 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많은 정치학자들이 제2공화국 당시의 민주주의를 '조숙한 민주주의'라고 평가 절하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들은 로스토(Rostow, Walt Whitman)류의 경제발전 단계론 내지 근대화론의 영향을 받아, 후진국에서는 경제 발전단계를 뛰어넘는 민주주의의 성장은 불가능하며 개발독재에 의한 경제의 도약(take-off), 즉 산업화가 있은 이후에야 민주주의의 발전이 가능하다는 시각에서 제2공화국 당시에 꽃핀 민주주의를 폄하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제2공화국의 민주주의를 유산될 운명이었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5ㆍ16군사쿠데타의 필연성 내지는 정당성을 옹호하려는 결과론적 시각에서 기인한 사후(事後, post-factum) 해석이라고 생각합니다.



박: 1공 때 상층부에 의해 도식적이고 교과서적으로 이식된 근대화는 2공 때 민초, 뿌리로 확산되는 계기는 있었죠. 그러나 한 가지 예를 들어볼까요. 교원노조-지금 전교조-를 만들려는 시도를 그 때 처음 했어요.



그런데 그런 움직임을 최선을 다해 막으려고 했던 사람이 다름 아닌 서울대 국사학과의 원조로 꼽히는 이병도 선생님이셨어요. 당시 이 교수님은 문교부에 해당하는 부서의 장관을 맡고 계셨죠.



허: 제가 보통 이런 이야기를 하면 왜 5ㆍ16 군사쿠데타가 일어났을 때 왜 시민적 저항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하는 반론이 나올 수 있거든요. 그게 바로 한국적 특수성입니다.



세계체제하에서 한국이 성장한 것도 한국의 특수성이듯이 왜 민주주의가 확산되고 시민의 힘이 분출될 수 있는 기회를 쉽게 포기했는가 이것도 한국이 처한 특수성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군부독재가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억압하고 중앙정보부나 안기부와 같은 국가권력이 조성하는 공포에 의존해 통치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의 민주주의 기본틀은 지켜졌던 것도 사실이지요.



우리 시민사회는 6ㆍ25전쟁을 통해 맛본 공산주의라는 또 다른 형태의 전체주의에 대한 기억에서 오는 두려움 때문에 개인의 기본권과 자유를 억압하는 군부독재의 우익 전체주의를 감내하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요.



두려움의 기억을 이용하는 대중 동원과 조작, 즉 반공을 내세우는 안보논리―대표적 사례로 평화의 댐―로 시민사회를 우롱한 것이지요. 시민들이 기본적인 인권의 침해를 감수하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최소한 이나마 민주주의 체제와 사유권이 보장되는 시장경제 체제였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박: 저도 동의합니다. 다만 이제는 이쪽의 군벌들 말고 중간, 하급관료 즉 탈식민주의 사학이 이야기하는 서발턴(subaltern)의 역할은 좀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죠. 그리고 관료 체제 전체의 효율성을 보면 다른 개발도상국에 비해 그래도 한국이 나은 편이죠.



허: 서구제도를 삼권분립의 역사라고 보자면 우리는 왕권과 신권의 균형의 역사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견제와 균형의 논리는 한국사에서 상당히 오래 전부터 이뤄지고 있었지요. 양반 지배구조가 5백년 이상 간 것도 통치체제가 상당히 튼튼했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기도 하지요.



박: 지방관 같은 경우 적어도 한달에 한번씩 위로 보고서도 올리고 그랬습니다. 한편으로는 또 중앙의 향촌에 대한 파악력이 그리 강하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말단의 행정관리까지는 상당히 조율이 잘된 측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성장을 이야기하자면, 제1공화국 때는 그 상층부를 어떻게 평가를 해도 분단의 책임을 상당히 지고 있는 사람들이고 어쨌든 서구적 근대화를 자신들의 목표로 생각했던 것만큼은 사실이지요.



그럼에도 제 1공화국 때는 민주주의는 '밑으로' 제대로 정착이 안됐지요. 그러나 4ㆍ19 혁명 이후에 민중들의 에너지 분출이 시작됐고 그 에너지 분출과 이미 이식된 근대화 담론이 합쳐져서 상당히 빠른 속도로 민주화가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민중들이 요구하는 민주적 근대(교원노조같은)와 이병도 장관같은 식민지 시기 교육을 받은 보수적인 관료들 사이의 괴리가 상당했습니다. 관ㆍ민의 합심이 그렇게 잘 됐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민중들이 바라는 바와 보수적인 자유주의자 사이의 차이가 상당했죠.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논쟁을 재개하며<상> 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프레시안.2004, 1. 13.





2.논쟁을 재개하며 ②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할 것인가



프레시안: 이제 시선을 현재로 옮겨보죠. 한국은 지난 50년동안 나름대로 민주화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작년 대선에서는 반미 레토릭을 구사하는, 즉 자주적 입장을 표방하는 인물을 대통령을 뽑기도 했습니다.

취임 후 언행이나 정책을 보면 그렇지도 않지만.. 어쨌든 기존의 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우리의 지향점은 반미가 아닌 반외세가 돼야



허동현: 1970년대에는 반정부 시위보다 반미 시위를 더 문제시했던 적도 있었지요. 촛불시위가 상징하듯 시민사회의 성장에 따른 자긍심이 커진 데서 반미 의식의 확산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도 우리 시민사회가 미국에 대한 동등의식을 갖고 미국의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봅니다.



그러나 우리 시민사회가 진정한 주체의식과 자긍심을 가지려면 미국만이 아닌 다른 나라의 우리 시민들에게 대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서도 한결같은 잣대로 재어서 판단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닌가요?



우리 시민사회가 ‘상상의 공동체’로서 상상하는 국민 또는 민족의 범주는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입니다.

미국이 우리 시민에게 가한 부당한 행위에 대해 비판하듯 중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탈북 동포들에 대한 인권 유린에 대해서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고 이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우리 시민사회가 노력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한 세기 전 불행한 역사의 산물로 우리를 둘러싼 열강―미국ㆍ중국ㆍ일본ㆍ러시아―네 나라에 모두 수십만에 달하는 교포사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정부나 시민사회가 재미ㆍ재일 동포사회에 비해 재중ㆍ재러 동포사회에 보이는 관심과 대우는 실로 하늘과 땅만큼 큰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 국가와 시민사회가 진정한 자긍심을 갖고 있다면, 불행한 과거사의 산물인 재외동포들과 북한주민들에게 우리 시민들과 동일한 관심을 보이고 대우를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재중ㆍ재러 동포들에 대한 국적 부여문제나 탈북 동포들에 대한 처우를 놓고 볼 때 우리 시민사회가 거듭나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지금 고구려라는 기억속의 영토를 놓고 중국과 싸우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한 자존의식을 갖고 있다면 재중 동포나 탈북자나 똑같은 국민으로 취급해야지 왜 내칩니까.

우리 시민사회나 시민단체들이 그들에게 보이는 상대적 무관심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촛불시위에서 보이는 미국에 대한 자존의식과 재중ㆍ재러ㆍ탈북 동포에 대한 시민사회의 무관심이 교차하는 모습을 보며 저는 아직 우리 시민사회가 미성숙했음을 절감합니다.



박노자 선생님이 최근에 낸 책제목처럼 우리는 ‘하얀 가면의 제국’ 사람들로 허위의 자존의식을 갖고 있는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금치 못하겠더군요.



다시 돌아온 야수의 시대, 일본 우익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폐쇄적인 민족주의가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오늘 우리 시민사회가 진정한 자긍과 자존의식을 갖는 길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요?



일본역사 교과서 왜곡사건이나 중국의 동북공정에 잘 나타나듯 역사의 기억을 둘러싼 싸움이 한일간에 한중간에 전개되기 시작하였지요.



이들의 민족주의와 정면 대결하는 방법보다는 두 나라의 양식 있는 시민사회와의 국제적 연대를 통한 화해와 협력의 신시대를 모색하는 개방형의 열린 민족주의를 갖는 성숙한 우리 시민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첩경일 것입니다.



이러한 열린 민족주의가 야수의 시대에 우리의 생존과 번영을 지켜 줄 최소한의 방패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구와 일본이 수세기전과 한 세기 전에 이룩한 국민국가를 아직도 못 이룩했기 때문이지요.



탈북자와 해외동포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상상속의 국민개념과 현실의 국민인식이 충돌하며 우리와 우리 안의 또 다른 우리라고 할 수 있는 북한 동포와 재외동포를 구별하고 있지 않습니까?



EU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 유럽은 국민국가를 넘어 지역 공동체로 가고 있는데 우리는 우리 안의 통합도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는 현실은 지체라고 할 수 있지요.



게다가 고개를 돌려 우리 주위를 보면 중국과 일본이 국민국가의 틀을 넘어 지역 공동체를 모색하기보다는 민족주의와 국가주의를 강화하는 현실을 보면 우리 안의 지체만이 아니라 동북아시아 전체의 지체라는 이중의 지체를 절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주위의 강국들이 야수가 아닌 인간의 얼굴을 갖기 전에 우리가 민족주의라는 갑옷을 먼저 벗을 수는 없다는 것이 우리 시민사회의 고민일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힘으로 정면 대결할 수도 없으니 우리의 민족주의는 우리 옆의 두 강자에게 더불어 살기를 설득하는 개방형의 열린 민족주의가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한 세기 전 프랑스와 영국의 쟁패 속에서도 국가를 지킨 태국이나 냉전 하 동서 양 진영 사이에서 균형을 지키며 독립을 지킨 핀란드의 경험에서 교훈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허동현 "오늘날 최대 위협은 일본 우익의 팽창주의와 중국의 폐쇄적 민족주의"



프레시안:‘다시 돌아온 야수의 시대’라고 표현하셨는데 이미 야수의 시대는 19세기부터 지속된 것 아닙니까?



허: 물론 19세기는 야수의 세기였습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부터 얼마 전까지 존속한 냉전체제 때는 큰 야수 둘의 대결장이었기 때문에 힘보다는 도덕률이 세계를 지배했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절대 강자들이 세계를 지배하던 시기에는 “나를 따르면 너를 보호해준다”는 이런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죠.



예를 들어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체제를 택하면 이를 쫓는 국가집단 내에서는 서로를 형제로 보았지요.

가족관계에 비유하자면, 작은형이 막내동생을 때리면 큰형이 “야! 그러지 마라”라고 개입할 수 있는 게 냉전체제에요. 그러나 냉전이 붕괴된 지금은 털끝만한 이익을 놓고 형제간에도 힘으로 다투는 시대가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제 세계는 이데올로기나 도덕이 아닌 힘에 의해 규율될 뿐이지요. 가장 힘이 센 자가 군림하는 시대. 약자가 강자에게 먹히는 게 당연한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겁니다. 물론 더불어 사는 게 가장 좋은 것이고 지식인으로서 이 세상이 인간의 얼굴을 띠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겠죠.



그런데 이런 말을 하다 보면 가슴 한 모퉁이가 공허해지는 것을 금할 수 없죠. 간어제초(間於齊楚)라는 고사성어가 웅변하듯, 정전제와 왕도정치를 채택해 유교적 이상사회를 구현하는데 열심이었던 등나라는 결국 망국을 면하지 못했습니다.



등나라와 같은 소국이 아니라 제나라와 초나라 같은 강자가 바뀌어야 세상이 바귈 수 있는 것이지요.

강자가 바뀌지 않는데 약자의 이상 추구란 항상 공허한 것이지요.



박노자: 두 가지 얘기할 것 중에

첫 번째는 현재 세계 체제 속에서는 미국의 역할이 달라지고 한국의 대미관계 혹은 대중관계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과연 민족주의를 버릴 때냐 (사실 국민주의라고 해야죠. 민족주의라기보다는) 하는 문제입니다.



첫째는 남한은 1945년에 스스로의 의지라기보다는 상황 전개에 따라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체제에 편입되지 않았습니까?



허: 저는 박노자 선생님과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이 세계체제를 재편하는 와중에 우리가 타율적으로 편입된 것일 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을 주체로 놓고 우리를 피동적인 객체로 놓고 역사를 보면 우리 근ㆍ현대사가 너무 처참하게 보일 것 같습니다.



사실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 재편과정에서 주체적인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수립이 미국의 세계체제 재편과정에서 실현된 것이라고 해도 이승만의 제1공화국이 미국의 의도대로만 움직인 괴뢰정권이었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사실 이승만 정권의 대미외교를 보면 오히려 역대정권들 중 제일 자주적이라고 볼 수 있는 측면이 많다고 봅니다.





박노자 "정치담론적으로 우리가 미국 하에 있지만 경제적 기반은 중화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박: 미국 중심의 체제에 편입됐다는 것은 물론 미국이 찍어 누르는 걸로만 됐다는 뜻은 아닙니다. 실제 한국의 독립운동의 우파를 본다면은 이미 대미관은 상당히 숭미 쪽으로 가 있었습니다. 그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안창호의 글만 봐도 알 수 있는데요.



안창호가 필리핀에 가서 ‘미국의 식민지 필리핀이 왜 이리 자유로운지, 마음대로 미국을 욕할 수도 있고..’ 거기에 감동에서 여행기(比律賓視察記, <삼천리> 제5원 3호, 1933년 3월)도 썼습니다. 미국에 편입된 것은 미군이 들어와서 그런 것도 있지만 독립운동 우파의 주체적인 숭미적 움직임도 주요한 역할을 했죠.



그런데 대만, 싱가포르까지 중화권에 포함시키자면 지금 이미 대미무역량보다 대중무역량이 훨씬 커요.

경제적으로 동아시아적 블록(block)화가 이미 형성되고 있어요. 한국의 경제 상황의 가장 큰 변화라면 제조업체의 중국 이전입니다. 아직은 정치담론적으로 우리가 미국 하에 있지만 경제적 기반이 중화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입니다.



이승만의 대미로비능력은 뛰어났으나 미국에 대한 주체적인 비판과 의식이 어려웠습니다. 50년대 <사상계> 같은 잡지를 보면 민주주의는 즉 미국이고 곧 선진이다 라는 인식 하에 민족주의라는 말조차 잘 안 나와요.



민족주의는 선진적이지 못하다는 등식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 중화권에 편입되어 가는 시점에 한국이 구조적으로 비교될 수 있는 현상을 되풀이하고 있어요.



우리가 미국의 모든 것을 숭배했듯이 지금 중국의 경제 성장을 숭배하고 미국의 끔찍한 이면에 무관심했듯이 중국의 경제 성장의 이면에 대해서는 기초지식도 비판 의식도 없지요.



중국에 대해서 실정도 모르고 제대로 비판할 줄 모릅니다. 비판하기는커녕 중국 근대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에 대해서 중국 민족주의 담론에 대해서 전혀 관심조차 없어요.



허: 박노자 선생님의 분석은 대륙세력이 강할 때는 대륙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하고 해양세력이 강할 때는 해양세력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식민주의사관의 타율성론과 비슷한 이야기처럼 들릴 소지도 있다고 봅니다.



중국세력의 팽창을 주된 변수로 놓고 이에 “한국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라는 식의 접근은 한국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부정하는 얘기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이 미국을 추종하는 '하얀 가면'을 썼다고도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이 가면은 미국이 억지로 씌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좋아서 스스로 쓴 것이란 말이지요.



박: 그게 제일 무서운 거죠.



허: 비서구 지역에서 한국만큼 프로테스탄티즘이 번성한 데가 없지요. 이것만 보더라도 한국은 이미 서구보다 더 서구적이에요. 이런 상황에서 미국에 자주를 얘기하는 것은 사실은 미국에 대해 대등하게 대접해달라는 요구지 미국을 벗어나자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는 가치는 미국적 가치이지요. 사실 촛불시위에 보이는 반미의식도 뒤집어 보면 미국과 자신을 동일시한 데서 온 한국인의 열등의식의 표출이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우리가 이만큼 컸는데, 너희와 같이 사고하고 행동하는데 왜 아직도 우리를 무시하느냐는 무의식의 표출일 수도 있다는 겁니다. 사실 우리가 근대이후 중국의 변화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지금 우리 시민사회는 개발독재 시대의 전체주의를 넘어 개인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데 중국은 아직도 박정희 시대를 연상하게 하는 전체주의의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로 보인단 말이지요.



우리와 가치를 공유하는 시민사회가 존재하지 않는 중국을 상품시장으로밖에 생각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개발독재의 질곡을 뚫고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해 많은 피를 흘린 우리의 입장에서 보자면 중국에 진정한 시민사회가 어서 도래해 두 나라의 시민사회가 공동의 번영을 위해 현안에 대해 대화하고 협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동아시아 지역에 백 년 전과 같이 다시 힘이 지배하고, 열강이 우리를 둘러싸고 쟁패할 가능성이 커진 상황이 다시 돌아왔거든요. 한 세기 전과 유사한 힘의 쟁투가 전개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주권과 독자성을 유지하느냐가 가장 긴급한 과제이겠죠.



열강들 사이에 교차하는 이해의 충돌을 막기 위해 우리가 쓸 수 있는 책략은 무엇일까요?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이 미국에 일방적 짝사랑을 퍼부었던 이유도 미국 쪽이 우리 주변의 다른 열강보다 한반도에 대해 덜 탐욕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지요.



냉전이 깨진 후 동북아에서 미국이 한반도에 갖는 전략적 이해의 강도가 약화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백 년 전에 우리가 쓰고 싶어도 못 썼던 미국이라는 카드를 이제는 쓸 수밖에 없지 않는가하는 생각입니다.





박노자 "미국의 위선과 중국의 공격적 민족주의 모두 비판할 수 있어야"



박: 민주적 가치의 상당 부분은 이미 우리에게 어느 정도 상식화돼 있지요. 우리가 경제적으로 중화권에 편입돼도 담론적으로 편입될 수 없는 이유는 중국의 담론이 현재 공격적 민족주의 밖에 없기 때문이죠.



만약 보편선이 담보된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라면 몰라도요. 지금 중국에서 ‘개명전제론’을 주장하는 양계초의 글들이 다시 대량 출판되고 있거든요. 이 ‘개명전제’가 사실 독재거든요. 1906년에 양계초가 내놓은 ‘개명전제론’이 등소평 개혁에서 하나의 청사진이 된 것입니다.



양계초의 논리는 박정희와도 연결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한 중국의 지배담론에 우리가 편입될 수 없는 거죠.

우리가 이미 그 단계를 지났기 때문에요. 경제적 연관이 밀접했음에도 담론적으로는 한국의 주체성을 유지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러려면 중국을 등거리로 다뤄야 합니다.



허: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박: 그리고 우리가 미국 영향권에 편입됐던 당시에 하지 못했던 미국에 대한 주체적인 비판을 중국에 대해서 거침없이 할 줄 알아야지요. 얼굴이 돼버린 미국적 가치 중에는 미국이 전혀 실천하지 못한 것이 많아요.

예를 들어 인권은 미국이 하나도 실천 못한, 종종 외교적으로만 이용되는 명분일 뿐이죠.



허: 요즘 미국의 주도하는 네오콘(neo-conservatives, 신보수주의자)과 일본의 보수 우익이 말하는 대외 침략 논리가 똑같아요. 예를 들면 이라크 전쟁이나 대 테러 전쟁에 대해 네오콘이 주장하는 논리는 일본 우익들이 주장하는 “한반도 흉기론”과 내용과 논리가 거의 같다고 할 수 있지요.



다른 열강들이 한반도를 장악하면 한반도는 강도의 손에 들린 흉기와 같이 일본열도의 가슴을 겨눌 것이기에 정당방위 차원에서 강도의 손에 들린 무기를 뺐는―한반도를 자기 영역화 하는― 것은 침략이 아니라 자위라는 논리인데, 이는 대량살상무기를 개발하는 적성국가와 테러조직에 대한 선제공격 정책을 선언한 네오콘의 전쟁 옹호 논리와 동일하지요.



현재 미국을 주도하는 네오콘의 모습은 과거 냉전체제 미국을 이끌던 세력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띠고 있지요.

네오콘은 힘이 곧 정의라고 믿으며 무력을 바탕으로 미국이 세계를 호령하는 패권국으로 부상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지요.



박: 이런 미국에 대해 과감하게 비판할 수 있어야 하고 중국에 대한 종전의 자세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중국은 힘깨나 쓰는 나라가 됐고 이미 고구려사 논란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북한 같은 만만한 나라는 얼마든지 찍어 누르려고 하고 있거든요.



허: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도 북한을 중국 지방사의 일환으로 편입하려는 것인데, 이는 우리의 역사 기억에 대한 침략일 수 도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갑작스런 북한붕괴가 가져올 힘의 균형의 붕괴 가능성을 막기 위한 예방조치라고도 볼 수 있겠지요.



“순망치한(脣亡齒寒)”이란 말처럼 북한이란 입술이 사라졌을 때 중국이라는 이가 시릴 수밖에 없다고 보는 생각이지요. 적어도 북한지역에 자국에게 적대적인 세력을 들이지 않기 위한―연고권 주장을 위한 ―사전 포석의 의미가 짙다고 봅니다.



박: 그렇죠, 다 편입하려고 그러는 거죠. 최근 북한 국경에 중국군 15만을 배치한 것도 주의해서 보아야 할 대목입니다.



허: 북한지역은 고구려의 강역이니 북한 붕괴 시 이를 비적성지역으로 만들어 완충지대를 두겠다는 것으로도 보이거든요. 백 년 전 중국 중심의 조공질서 아래에서 한중관계는 힘이 우선하던 관계가 아니었지요.



대국이라 해도 힘이 있다고 힘으로 누르기보다 아비가 자식을 대하듯 형이 동생을 대하듯 일종의 보호자라고 해도 좋았겠지요. 그런데 임오군란 이후 중국은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등 우리에게 침략자의 얼굴로 다가오기 시작했지요. 지금 냉전 붕괴이후 북한과 중국의 관계 변화는 백 년 전을 떠올리게 합니다.



박: 담론적으로는 여기에 과감히 맞설 필요가 있죠. 민족주의적으로 맞서는 게 아니라 중국 민족주의의 한계를 우리의 견지에서 지적하는 게 가장 맞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 한국의 위치는 민족주의를 넘을 수 있는 수준이 됐어요.



이 견지에서 중국 민족주의의 조급성과 그 억압성을 한국학계가 과감하게 분석해서 비판해야 합니다.

담론적인 중국민족주의 해체작업을 시작해야 합니다.



허: 백 년 전 우리 선조들의 어깨를 짓누른 두 개의 과제가 있었지요. 반봉건(근대만들기), 반외세(침략배격)이지요. 그런데 동시대의 서구인들 같으면 근대 만들기만 하면 됐어요. 그런데 우리는 두 가지 난제를 동시에 해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백 년 전의 지체가 오늘의 우리에게서도 찾아 볼 수 있지요. 이 땅에 사는 지식인의 양식에 비쳐 볼 때 민족주의로 포장된 전체주의와 국가주의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처한 현실을 보면 이러한 노력이 허무해진단 말입니다.



유럽이 국민국가를 해체하는 노력을 보이는 이때 우리는 국민국가 만들기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고,

유럽이 지역 통합을 달성한 이때 우리 주변의 이웃들은 자국의 우월함을 자랑하는 자민족 우월주의를 다시 생산하기 시작했으니 말입니다.



이것은 우리만의 지체가 아니라 동아시아 전체의 지체이겠지요. 이 땅에 태어난 우리 지식인들은 대한민국이란 국민국가의 지식인이자 동아시아 지역의 지식인으로서 우리와 우리 지역이 갖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이중의 과제를 갖고 있다는 점에서 한 세기 전 우리 선조와 유사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봅니다.



박: 동아시아에서 평화롭게 살기를 도모하자면 한국지식인들이 중국 민족주의의 분석과 해체와 함께 중국의 여러 가지 야만적인 행위들을 관심대상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양계초 같은 사람들도 티베트 소유권에 대한 엄청난 관심을 가지고 절대 놓치면 안 된다고 말했거든요.



그것이 중국 근대 만들기의 시작이죠. 중국 민족주의의 실천과정이 무엇이었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 티베트 현대사부터 배워야 합니다. 중국과 베트남의 관계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워드 진이나 촘스키를 통해 미국이 무엇인가 알았듯이 이제는 중국의 숨겨진 진실이 무엇인가를 같은 각도에서 배우는 것이 우리의 주체성 확립의 과정이 될 것입니다. 중국에 대한 분명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입장,

민족주의를 넘을 줄 아는 성숙된 지식인으로서의 입장을 표명해야 합니다.



등거리외교나 담론의 상대주의 얘기할 때 빠질 수 없는 부분이 있어요 미국의 최근의 석유약탈전쟁에 대응할 때는 대응모델로 참고해 볼만한 것이 독일, 프랑스였습니다.



물론 경제적인 상황과 위치가 다르지만 한국도 WTO가입한 나라잖아요. 우리가 미국의 요구를 거부했을 때 미제의 보복이 예상된다면 과연 그 실상은 어느 정도일지 정확하게 실제적 조사를 하는 것이 필요했죠.



‘이라크 파병 국익론’을 이야기하는 쪽에서 미국의 경제 보복이 매우 두렵다는 것이 중요 논거 중 하나인데 WTO 체제에서 그들이 가할 수 있는 경제적 손실이 대략 어느 정도 되는지 일단 구체적으로 실사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등거리외교가 젤 중요하지요. 중국과의 관계를 얘기하자면 미국 예속관계라는 잘못된 유산으로부터 벗어나면서 미국, 유럽을 이용하면서 담론적으로, 외교적으로 중국을 견제해야 할 것 같습니다.





허동현 "중국ㆍ일본 견제하려면 미국과 제휴할 수밖에 없어"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허: 제 생각으로는 우리 주위의 두 강대국 중국과 일본이 우리와 더불어 살 마음을 가질 때까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미국과 제휴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벌이는 게임에서 미국 이외에 현실적으로 우리가 쓸 패가 없다고 봅니다.



우리 혼자 힘으로 중국과 일본을 변화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미국 네오콘들의 세계전략을 옹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현재 미국은 몰락의 길을 가고 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최전성기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무너지지 않는 제국은 없으나 미국이 우리가 사는 당대에 무너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힘이 지배하는 야수의 시대에 최악(最惡)과 차악(次惡)의 구별은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존에 도움이 될 때 어떤 세력과도 전략적 제휴는 가능하다는 것이고, 선악을 기준으로 한 이분법적 사고는 오늘을 살아가는데 적합한 사고방식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박: 다만 경제적으로는 중국이 급상승하고 현재 미국경제는 점차 무너져가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허: 제 생각으로는 고구려에 대한 기억의 침략과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이 상징하듯, 앞으로 우리의 생존에 대한 실질적인 위협은 미국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오리라고 봅니다.



이는 백 년 전과 비슷해요. 이 때 우리가 이들을 견제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카드는 결국 미국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프레시안: 실질적인 위협이 중국과 일본이라는 것에 박노자 선생님은 동의를 안하시는 것 같은데요?



박: 위협이라기보다는 일본 같은 경우는 독자적인 세력으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죠. 지금 일본정권은 대미추종세력이거든요.



허: 백 년 전에도 일본은 영국추종세력이었지요. 그 때 일본을 영국의 번견(番犬), 집 지키는 개라고 불렀지요.

주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영국의 이익을 위협하는 이리와 같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는 충직한 개 일본에게 영국과 미국이 던져 준 먹이가 바로 우리였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프레시안: 북핵문제가 잘 안 풀리는 방해요인으로 미국을 지목하는 견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분단극복을 진짜로 미국이 방해하는 겁니까?



허: 북핵은 공격용 무기라기보다는 대미협상용으로 북한이 택한 최후의 카드이자, 국제사회에 참여하는 유일한 티켓이기도 하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을 협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한다는 것을 역으로 생각하면, 북한이 처한 위기가 그만큼 크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미구에 올지도 모를 북한 붕괴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수십 년 동안 통일에 대비해온 독일에서도 동독 사람들이 통일후 좌절하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습니까. 아마도 우리의 경우 북한 주민들이 느끼는 좌절과 소외는 몇 배는 더 심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직 우리 시민사회는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사이의 마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안의 이익집단간의 갈등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고 있지요. 저는 원칙적으로 남북한의 통일, 한 세기 전에 이루지 못한 진정한 국민국가의 수립에 찬성합니다.



그러나 그 전제로 먼저 우리 마음속의 차별의식에서 놓여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북한 주민을 우리와 갈라 차별하면서 통일한다면, 실질적으로는 내부 식민지를 만든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요.



지금 우리들이 북한 주민들을 우리와 동일한 국민으로 볼까요? 아마도 식민지 백성으로 볼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봅니다. 북한주민에 대한 배제와 차별이 예상되는 이런 식의 통일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고구려를 중국사에 편입시켜 북한 붕괴 이후 연고권을 주장할지도 모를 중국이나, 피를 나누었으니 북한은 우리 영역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나 식민지를 노리는 제국주의적 발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박: 중국위협론에 대해 좀 얘기해볼께요. 지금 중국은 외자에 의한 종속형 성장을 급속하게 이루고 있는데 재밌는 것이 외자 중 80%가 대만, 홍콩, 싱가포르 등 화교자본이에요. 외자종속이라 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중화권 안에서의 역학 관계입니다.



허: 화교자본이라고 하지만 국민국가 차원의 자본이라기보다는 이미 세계자본이고 중국은 이미 세계 체제에 속했다고 봐야합니다. 외환보유고는 제일 높지만 앞으로 경제위기가 터질 가능성이 큰 지역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외환보유고가 높다는 것은 중국에 대한 서방 자본의 투자규모가 크다는 것이고 이는 역으로 중국이 자본투자를 통해 얻는 과실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봅니다. 자본투하에 따른 이익 창출이 원활하다는 것은 노동에 대한 착취강도가 그만큼 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봅니다.



우리가 경험한 개발독재 시절 독재정권은 일종의 외국자본의 관리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중국의 집권세력도 외국자본의 관리자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즉 외세와 이익을 나누고 있다는 말이지요.



따라서 개발독재세력이 먼저 외세와 마찰이나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후세인도 미국의 하수인 역할을 하던 개발독재 세력이었고, 먼저 미국에 도전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세계체제에 포섭된 주변부가 중심에 도전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만약 주변부가 중심에 도전할 때 마주치게 되는 현실은 현재의 이라크의 경우가 대변한다고 봅니다.



박: 중국의 성장기는 우리의 60년대와 비슷합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중국이 제일 필요한 것이 자본과 기술이고 중국입장에서 보면 한국자본은 화교자본 못지않게 중국 친화적이고 관리 시스템도 비슷합니다.



이것은 한국기업이 중화경제권에 편입돼도 홍콩처럼 내부적 자율성을 보장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허 한국기업들이 중국 많이 가는 게 시스템이 한국과 비슷하기 때문이죠) 전쟁에 관해서라면 중국은 지금 전쟁하기 어렵지만 미국입장에서는 중국이 위협이 되거든요. 게다가 미국은 전쟁 안하고는 살 수 없는 나라죠.



미국에서 군사기업이 무너지면 경제 전체가 망하거든요. 지금 미국 제조업이 그나마 살아남을 수 있는 부분이 군수 기업체 말고 어디 있습니까. 지금 미국은 중국에 투자하면서도 견제하고 가상적 적 중의 하나로 파악하는 상태입니다.



중국 군대 현대화가 이뤄지기 전에 -만약 네오콘 정권이 지속된다면- 미국이 대북침략을 통해 중국을 도발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가장 걱정되는 부분이죠.



위협을 얘기하자면 중국 중심의 동아시아 체제로 간다해도 우리 내부의 민주 질서가 위협받지는 않을 겁니다.

그런데 북한-즉, 중국-에 대한 미국의 잠재적 도발은 분명히 우리 생존에 대한 최대의 위협입니다!



허: 저는 앞으로 어떤 정파가 정권을 잡더라도 우리의 생존을 가지고 미국이 장난하지 못하게는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한반도 문제를 놓고 6자회담이 가능한 것도 이 곳이 미국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 지역이기 때문이거든요.



이는 이라크와 북한이 미국에게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중국과 미국이 한반도에 대한 영향권을 놓고 승부를 가른다는 것은 미국입장으로서도 버거운 일이지요.



한반도에 대해 이해를 갖고 있는 러시아와 일본의 눈치도 보아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실 미국입장에서 보면 이라크가 먹음직스러운 닭다리라면 북한은 먹으려 해도 먹잘 것이 없는 계륵이나 닭목이예요.



미국이 보기에 북한은 먹을 고기도 별로 없는 데 먹으려고 욕심을 부리다 오히려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보는 겁니다. 게다가 북한은 핵무기도 갖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협상용일수도 있지만 실제로 북한에게는 훌륭한 갑옷일수도 있지요.



일단 북한이 사회주의권이 다 붕괴된 이후에도 이렇게 생존할 수 있는 것은 북한 나름대로 우수성이 있는 거죠.

핵과 미사일이 상징하듯 과학기술력도 사회주의 체제 내에서 상당한 수준에 올랐다는 것이구요.



중국이나 미국과 같은 강대국 중심의 눈으로만 한반도 문제를 볼 수 없는 북한 나름의, 남한 나름의 능력이 있다는 것이 백 년 전과 오늘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죠. 우리를 둘러싸고 외세의 쟁패가 시작되었다는 것은 백 년 전과 같지만 다름이 있다면 오늘의 우리는 우리의 생존을 위해 사용할 창과 방패를 손에 들고 있다는 것이지요.



백 년 전의 경험을 거울삼아 우리의 생존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 지를 역사 속에서 찾아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힘 있는 분들께 역사공부 좀 하라고 해야하는데..(웃음)





박노자 "몰락해가는 미제의 발악이 제일 두려워"





박노자는 한국의 진보계열 지식인으로 러시아어와 노르웨이어, 영어, 한국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한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티호노프이며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태생으로 지난 2001년 한국에 귀화했다. 모스크바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노르웨이 오슬로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다.





박: 결국 우리의 과제는 이미 이루어낸 경제, 시민사회, 내부 민주주의 성장 등을 바탕으로 해서 주체성을 확립하는 것이지요. 허교수님 같은 경우는 일본과 중국을 견제하면서 미국과 어느 정도 협력해야 한다는 의견이시고

저는 주체성은 미국권, 유럽권, 중화권으로부터 중립적인 거리를 유지할 때만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의견차라면 차이입니다.



허교수님은 동아시아 세력권내의 역학관계를 가장 큰 위협으로 보시는 것이고 제가 보기에는 지금 몰락해가는 미제의 발악이 제일 두렵습니다. 일제 말기도 생각나구요.



지금 우리가 동아시권에서 해야할 일은 우리 혼자 민족주의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아직은 담론적으로 가시적 움직임이 별로 없는 중국의 민족주의에 메스를 가하고 중국적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이면을 지적하는 일이겠죠.



허: 저는 오늘을 사는 우리들이 풀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과제가 있다고 봅니다. 이익 집단이나 정파들이 털끝만한 이익을 놓고 끝없이 대립하고 갈등하는 폐해를 넘어 모두가 더불어 사는 다원적 시민사회를 이루기 위해 우리 모두의 힘을 합쳐야 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아무리 큰 수라 해도 0을 곱하면 0이 되어 버리는 곱셈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지금의 정치와 사회를 곱셈에 비교할 때 자기 몫을 남과 나누려는 마음이 없다고 볼 수 있지요.



이처럼 자기가 0이면 뭘 곱해도 0이란 말이지요. 자신의 몫 남과 나눌 때 우리 사회의 곱셈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나누려고 할 만큼 공동의 빵도 커져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박: 백년전에는 거의 소통이 불가능했잖아요. 개화파하고 위정척사파하고 어디 같은 자리에서 토론이라도 한 적 있습니까



허: 박노자 선생님은 거시적 입장에서 세계체제론적 시각에서 조망하시니까 오늘의 세계를 미국과 중국의 다툼을 주된 변수로 우리를 종속 변수로 놓고 보시는 것이지요.



저는 백년 전의 경험을 보자면 영국과 러시아라는 다툼에서 일본이 영국에 종속되었지만 그 대가로 한국이 먹이로 던져졌듯이 세계체제적 시각에서는 잘 보이지 않는 동아시적 맥락과 역학관계를 자세히 볼 필요가 있다는 입장인 것이지요.



프레시안: 두 분이 강조점은 다르지만 주체성 확립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에 있어서는 합의하시는 듯합니다. 두 분 내공이 대단하셔서 앞으로 10시간도 거뜬히 하실 수 있을 것 같은데 오늘은 여기서 마무리하고요 기본적으로 문제의식이 같다면 앞으로 연재를 통해서 가급적 공통분모 찾으려는 노력을 계속 해주셨으면 합니다.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2.논쟁을 재개하며 <하> 무엇을 할 것인가. 프레시안.2004, 1. 14.





3. 대미 인식 - ①"미국에 대한 무지가 대미 맹종 불러"



<박노자ㆍ허동현 '한국근대 1백년 논쟁>을 다시 시작한다. 두 사람간의 논쟁은 박노자 교수가 먼저 문제를 제기하면 허동현 교수가 받는 형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주제는 '개화기의 대미 인식'이다. 편집자





전쟁을 먹고 사는 괴물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개화기의 대미 의식에 대해서 글을 쓰려고 하니 묘한 느낌이 듭니다. 문명의 요람 중의 하나인 메소포타미아의 땅이 미군의 군화에 이미 짓밟혔고, 바그다드를 장악한 미군의 방관 하에서 서방 세계의 미술품 밀수 조직의 “주문”을 받은 불량배들이 이미 국립 박물관을 약탈하여 그 고귀한 슈메르 문서와 바빌론의 조각들을 훔치거나 파괴했습니다.



수천 명의 이라크 시민들에게 “폭도”의 딱지를 붙여 놓고 영장도 재판의 기약도 없이 수용소에서 구금해 고문, 학대하고 있는 미군, 하루마다 “폭도 진압 작전” 차 수십 명의 이라크 양민들을 마구 죽이는 미군…



이미 인간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이 미제의 고용 살인자 (전문 군인)들의 살기 등등한 얼굴들을 보면, 의병을 “토벌”했던 일군의 장교들이나 1941-2년간에 벨로루시(Belorussia) 같은 피점령 지대에서 “빨치산”을 “소탕”하려고 마을들을 송두리째 불살라 버렸던 파시스트 독일의 Einsatzkommando (“[특수] 작전 부대”, 일종의 특전사)의 모습밖에 연상되는 것은 없습니다.



히틀러의 군국 독일이 동구의 자원 약탈과 지속적인 군사적 긴장 없이 살아 남을 수 없었듯이, 범죄적 성격이 짙은 네오콘(neocon)의 마피아 지배 하의 미국은 유로화와의 어려운 경쟁과 천문학적인 외채, 그리고 새로운 외국 투자 유입으로 이제는 메워지지도 않는 월 470억 달러에 달하는 경상적자 등의 악화 일로의 경제, 사회 상황에서 이라크 유전의 약탈과 “후세인 체포”와 같은 저질 쇼 없이 경제적 이윤 수취와 사회 내부의 통합을 유지할 수 없는 형편인 듯합니다.



부시가 백악관에서 보내는 하루의 값, 그리고 미국 주식 시장의 지수가 하루에 몇 포인트 오르는 값은 수십 명의 이라크 시민의 생명일 것입니다. “후세인 체포” 대신에 “김정일 체포”와 같은 쇼로 그 우민 (愚民) 들의 가학증세적 상상력에 언젠가 호소할는지도 모를, 기름 대신에 인간의 살과 피를 태우는 살인 기계 미국의 모습을 보면,

제국주의가 드디어 인류의 역사를 막다른 골목으로 끌고 왔다는 생각을 본인도 모르게 하게 됩니다.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원죄 – 그리고 불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전생의 악업과 무명 (無明 – avidya) – 짐을 지고 있는 인간은 폭력을 저지르거나 그 에너지를 즐길 (도덕론적으로 보면 직접적 폭력 행위와 폭력을 오락으로 아는 것은 등가의 행동이지요) 잠재적 가능성을 늘 내포하고 있습니다.



정상적인 인간의 사회라면 인간의 폭력성을 순화시키는 길로 가야 하는데, 미국과 러시아를 위시한 오늘의 군사주의적 제국주의 사회들은 오락적인 폭력과 폭력적인 오락을 매일씩이나 거의 모든 구성원들이 즐기거나 직접 하는 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최근 유럽의 한 여론 조사가 미국과 이스라엘을 북한이나 이란보다 세계 평화를 더 위협하는 존재로 거론한 것은, 바로 이 사실에 대한 넓어져 가는 세계인의 인식을 반영합니다. 전쟁을 먹고 사는 괴물, 미국이 세계 체제의 정상에 서 있는 한 우리에게 안심과 평화의 날은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요순시대 버금가는 새로운 유토피아



그러나 개화기의 미국 관련 서술들을 읽어 보면, 오늘의 미국이 아닌 완전히 다른 나라에 대해서 쓰여진 듯한 느낌이 듭니다. 물론 그들이 볼 수 있었던 당대의 미국은,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의 군사적 패권자가 아닌, 아직 유럽의

“보통” 열강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수준의 상비병도, 영국을 제외한 모든 열강들이 이미 민중에게 강요한 평시 징집제도 없었던, 군사주의 세계의 “변방”에 속했습니다.



그러나 인디언의 말살이나 중남미에 대한 지속적 군사주의적 간섭, 그리고 적어도 약 30-40만 명의 필리핀 양민들을 죽인 1899-1902년간의 필리핀 식민화와 같은, 이미 잘 알려진 미제의 대형 범죄들도,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론에 의해서 합리화되거나 “야만인에 대한 문명화 작업”의 이름으로 정당화됐습니다.

그만큼 개화기의 신지식인들은 제국주의의 논리에 완전히 압도를 당한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통상 현대 소설의 효시로 생각하는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작품 <무정> (無情: 1917)의 결말을 기억하시지요? 주인공인 신지식인 한 쌍이 암담한 조선의 현실을 과학 문명을 통해서 개선하려는 일념으로 미국으로 유학하여 시카고 대학교를 졸업하는 것이 아닙니까?



즉, 그 당시의 이광수의 의식에서는, 과학과 문명의 화신인 미국이 그 교육을 통해서 조선을 구할 수 있는 “구세주”, “시혜자”이었던 겁니다.



바로 그 시카고의 1886년 5월 1-4일, 수만 명의 노동자와 경찰 사이의 유혈 충돌 속에서 세계 노동운동의 5월 1일 노동절의 전통이 태어났다는 사실을, 이광수가 알았어도 별로 중요한 사실로 취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소설은 일제 초기에 쓰여졌지만, 이와 같은 긍정 일변도의 미국 의식은 개화기 초기부터 형성돼 갔습니다.



1880년의 <조선책략>을 통해서 청나라 양무(洋務) 개혁 지도부의 호의적인 대미 의식이 조선에 이식된 뒤에, 개화기 간행물들이 미국을 요순 시대에 버금가는 새로운 유토피아로 묘사했습니다.



예컨대, 조선의 최초의 근대적 신문인 <한성순보>가, 선거라는 제도 덕분에 오직 덕망이 높고 재간이 풍부한 사람만이 대통령이 된다 하면서, 미국의 선거를 “임금을 뽑기 위한 과거 시험”처럼 매우 긍정적으로 서술했습니다 (1884년 8월 31일자).



그 “아름다운 제도”덕분에 “날로 부강해지는”미국의 “번성함을 아무도 따를 수 없다”는 것도 <한성순보>의 미국관의 핵심적인 부분이었습니다.





노동자ㆍ유색인종 등 소수세력의 고통은 외면



재미있는 것은,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신문인 <한성순보>나 <한성주보> (1886-1888년간 발간)는 미국에서의 노동 운동에 대한 경찰 탄압이나 노동자들이 겪는 고통을 대체적으로 외면하면서도 파업들을 “공장의 주인에 대한 협박”쯤으로 이해하고 “파업을 일삼는 미국의 일부 노동자”들을 민란의 주모자인 것처럼 준엄하게 꾸짖기도 했습니다.



예컨대 1886년 5월 1-4일의 역사적인 시카고 노동자의 대(大)투쟁이 일어난 거의 직후에 <한성주보> (1886년 6월 28일자 外報欄)가 미국 노동자의 또 다른 파업 사건에 대한 다음과 같은 보도를 했습니다:



“영국 수도에서 온 소식에 의하면 미국 지방에 근래에 노동자 5만1천 여명이 함께 파업을 하였는데, 그 까닭을 아직 자세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이 소식은 영국 수도에서 2월 10일에 발송한 것이니 지금쯤은 파업을 끝내고 일을 시작했는지 알 수 없다. 미국의 노동자들은 그 무리의 많음을 믿고 조금이라도 뜻대로 되지 않으면 번번히 주인을 위협하고 공장의 주인이 일을 재촉하면 곧 서로 모여 노임을 올리라고 위협한다”



중국의 한 지방 신문의 보도를 대략 따르는 이 기사는, 그 다음에 “쥐새끼처럼 노임만 챙기려 하고 약게 구는” 미국 노동자와 “신의를 지키고 공장 주인의 일을 자기 일처럼 여기는” 중국인 화교 노동자의 “질적인 차이”를 강조했습니다.



이 기사의 어조는, 어째서 “강성 노조”를 비난하는 요즘의 수구 언론의 말투와 이렇게도 통합니까? 노동자를 머슴과 같은 존재로 여기려는 중세적인 의식에다가 서방 세계 “주류”들의 반(反)노동적인 세계관이 가세돼 이루어진 동아시아 근대 엘리트들의 노동자관(觀)이 과연 지난 한 세기 동안 근본적으로 바뀌었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또 하나의 지적할 만한 점은, 1880-90년대의 한국의 초기 친미파, 지미(知美)파 지식인들이 미국 내에서의 중국 이민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박해와 배척에 대한 우리로서 도저히 납득되어지지 않는 너무나 관대한 (?)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미국인이 되기를 가장 열렬히 열망했던 윤치호와 같은 기독교적 친미파 지식인들이 “화석화된 동양 전통을 고수하고 시끄럽고 수치심도 없는” 화교들에 대한 미국측의 이민 억제책을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이민자들을 뒷받침해 줄 만한 능력이 없는 청나라의 “약함”을 오히려 탓하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윤치호 일기>, 1890년 2월 14일).



“힘이 곧 정의”인 그 당시의 윤치호의 정신 세계에서 힘 없는 화교들의 비참한 상황이 당연한 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윤치호와 달리 유교적인 양심을 지키려 했던 유길준마저도 샌프란시스코의 화교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유길준의 『서유견문』





“이 고장으로 이주해 온 자는 중국에서도 불학무식한 하류층 사람이기 때문에 아편을 좋아한다. 또 그들의 거주하는 양상은 미국사람들처럼 깨끗한 습속에 젖어 있지 않는 까닭으로 온 세계 사람들이 어울려서 사는 지역에 섞여 살 권리를 잃고 중국인들만의 거류지를 따로 갖게 된 것이다. (…) 미국은 중국인들이 이주하는 일만을 허락치 않는다고 한다” (<서유견문>, 제19편, “합중국의 여러 큰 도시들”).



“깨끗하고 합리적인 미국인”과 “더러운 아편쟁이 중국인”의 상반된 모습을 대조시키고 “더러운 동양인”들을 게토 (ghetto)에 몰아내는 미국의 인종주의를 합리화하는 이 끔찍한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초기 개화파들의 “하얀 가면” (즉, 서구의 인종주의적 담론에 함몰되는 서구 중심주의적 인식)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 뒤에 <독립신문>은 한 술 더 떠서 미국을 “문명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국제 사회에서의 약자를 보호해주는 “수호 천사”로까지 서술했습니다.



서재필과 그 동료에 의하면 미국이 “강토를 넓힐 생각이 없을 뿐만 아니라 (…)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에게 무례하게 압제를 받으면 자기 나라의 군사를 죽이면서까지 약자를 구제해주는”(1899년 2월 27일자 논설) 공평함의 권신이었습니다.





미국 시민인 서재필이 그의 새로운 조국을 찬양하는 것이 그 당시 주류의 생각을 대표했는지에 대해서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유식자들에게 상당한 신뢰를 받았던 <황성신문>의 개신 유림들도 일본에서 기존에 나온 <미국독립사>를 번역, 출판하기도 하고 (1899년), 미국의 “공평함”과 “신의”를 극구 찬양하기도 했습니다.



어찌해서 12-13시간의 일과와 쥐꼬리만한 월급에 저항하여 파업을 하는 이민자 노동자들을 학살하곤 하고, “유색 인종”의 이민을 최대한 제한시키고, 중남미에서의 무장 간섭을 일삼았던 그 당시의 미국을, 한국의 개화적 유림들이 “요순의 나라”로 봤을까요?





지금 우리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실체를 제대로 알고 있나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나는, 개화 프로젝트의 골자가 최대한 빠른 시일 내의 “압축 성장”이었기에, 불과 100여년만에 영국의 식민지에서 세계 제2 무역 대국으로 발전한 미국의 성장 속도가 개화파 지식인들에게는 고무적인 모범이 아닐 수 없었던 겁니다.



그 성장의 이면에 저임금과 각종의 차별, 그리고 평균 하루 11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노동에 시달렸던 주로 동유럽과 남유럽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던 것은, 민초들에 대한 유교적인 동감으로부터 이미 자유로워진(?) 개화파들에게는 별 상관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국민 선거라는 메커니즘이 다른 나라에서 보기 드문 정치, 사회적 안정성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은 그들 개화파의 관찰이었습니다.



정치에 소외를 당하고 경제적으로 희생만 당하고 있었던 미국의 하층민 (흑인, 이민자 빈민, 準노예였던 중국 출신의 “쿨리(苦力)" 등)​의 고통과 저항에 대해서는, 의병이나 동학들을 “비도” (匪徒)라고 낮추어 불렀던 개화파 “신사”들이 과연 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들이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미국”은, 착취 공장들의 지옥이 아니라 시카고 대학교와 같은 엘리트 교육 기관들의 지적인 천당이었습니다. 즉, 개화파의 개발주의, 엘리트주의가 그들이 친미화될 수 있는 토양을 만들었습니다.



둘째, 미국이 그 당시로서 극동 지역에서 다른 열강에 비해서 영토적 야심이나 침략적 경향이 비교적 적었다는 사실을, 개화파가 확대해석하여 미국을 “공평한 나라”로 본 셈입니다.



중남미에서의 미국의 침략의 역사에 대해서 개화파들이 자세히 알려고 하지도 않았지만, 어차피 조선과 상관이 없으리라 생각했습니다. 이 점에서 그들의 세계 정보와 인식의 한계도 확연히 보입니다.



셋째, 경제적 수탈과 이권 침탈만을 일삼았던 기타의 열강과 달리 미국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 건립을 통해서 조선에 “문명의 혜택을 부여”했다는 점을 개화파들이 높이 샀던 것 같습니다.



외국계 학교의 졸업생들이 외국 문화에 너무나 쉽게 “동화”된다는 점을 신채호가 개탄했지만, 미션스쿨들이 길러낸 친미파들이 나중에 한국의 문화적 판도를 얼마나 바꿀는지 대다수의 개신 유림들이 대개 짐작도 못한 셈입니다.



물론 유럽적 근대의 바다를 최초로 탐험해 봤던 100년 전의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제국주의의 총칼의 위협을 피부로 느꼈던 만큼 미국에 대한 부풀린 꿈에만 안주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습니다.



1906년 9월 30일자 <대한매일신보>에서 “거멸국신법론 (擧滅國新法論)하여 고전한인사 (告全韓人士)”라는 – 개화파 유림들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 논설이 나왔는데, 이 논설에서 길게 인용되는 것은 바로 청나라의 망명객 양계초 (1873-1929) 라는 개화기의 “스타” 논객이 1901년에 – 중국에 대한 열강들의 이권 싸움을 지켜 보면서 – 아픔과 걱정에 가득 찬 마음으로 쓴 “멸국신법론”이라는 글입니다.



<대한매일신보>에서의 인용문의 골자는 무엇입니까? 과거 제국들의 약소국에 대한 “멸국”은 어디까지나 통치자를 포로로 잡거나 죽이고 일시적인 약탈을 하는 데에 그쳤지만



오늘날의 “멸국”은 일시적이지 않은, 점차적인 것이고 통상과 외채, 각종의 “선진국” 전문가 파견과 도로 건설, 약소국 내의 당쟁 부추기기와 일부 약소국 엘리트의 매수, 그리고 “문명화”의 미명 하에 교묘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정신적 침략과 경제적 침투, 현지 지배층의 괴뢰화 작전의 결과는, 양계초의 말대로 “나라의 이름은 그대로 남지만 독립 국가로서의 그 나라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미국과 유럽 제국주의의 제3세계 지배 방식을 해부하기 위해서라도 그대로 사용해도 좋을 만큼 통찰력이 뛰어난 이 텍스트를 읽은 1900년대의 개화파 선비들은, 과연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정책의 의미, 그리고 한국으로의 선교사 파견의 의미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없었겠습니까?



양계초의 뜨거운 “팬” 중의 한 사람인 신채호가 한국 신지식층의 “모방적 동화”의 경향을 크게 개탄한 것은,

양계초의 이 뛰어난 통찰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멸국신법론”에서 서술된 제국주의적 침략의 한 사례는 바로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식민화 정책이었으며,

미국이 이미 침략적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하고 있다고 명시돼 있었습니다.



그러나 재미있는 것은, 양계초의 이 글의 서두에 나오는 말은,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이 바로 자연의 법칙이라는 사회진화론적인 선언문이었습니다 (<飮氷室文集>, 상해, 廣智書局, 1907, “通論”편, 230-242쪽).





양계초의 『음빈실문집(飮氷室文集)』



1919년에 제1차 세계대전 이후의 폐허가 된 유럽을 구경하고 나서야 양계초가 사회진화론이 자연의 법칙이 아닌 제국주의의 이데올로기인 것을 깨달았지만, 1900년대에는 그 자신도 아직까지 제국주의적 세뇌의 마취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제국주의가 비서구 나라들을 멸망시키는 교묘한 방법들을 그가 잘 파악했지만 사회진화론의 이데올로기가 바로 비서구 지식인들을 포획, 포섭시키는 “신법”이었음을 아직 깨닫지 못했습니다…



비록 개화기의 한국 신문이나 잡지에 크게 보도되지 않았지만 미국 관련의 양계초 저술 중에 1903-1904년도의 <신대륙유기> (新大陸游記)라는, 동아시아의 근대 초기의 지식인들의 미국관을 이해하기 위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작품도 있습니다.



그 작품이, 개화기에 한글로까지 번역되기도 하고 (全恒基역, 1908), 원문 (한문)으로도 유식자 사이에 널리 읽혀 진 <음빙실문집> (飮氷室文集)에 실렸기에 한국 독자들에게 읽혀졌으리라 추측됩니다.



이 작품에서, 1903년에 캐나다와 미국을 실제로 방문하여 태평양부터 대서양까지 구석구석 열심히 답사한 양계초는 “세계 산업의 중심지” 미국의 “발전의 정도”에 놀라면서도 자본주의적 “발전”의 이면에도 상당한 지면을 할애합니다.



예컨대 제국주의자이자 일본의 한국 침략을 지원해 준 장본인으로서 악명이 높은 그 당시의 로즈벨트(Theodore Roosevelt: 1858-1919) 대통령의 “20세기 미국의 세력 범위에 태평양이 들어가야 되고, 태평양의 장악이 우리 자손을 위한 백년 대계”라는 취지의 침략주의적 연설을 신문에서 읽고 전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중국이 급속한 근대화를 이루지 못할 경우의 반(半)식민지 중국의 끔찍한 운명을, 통찰력이 뛰어난 애국자 양계초가 본 것입니다.



그런데, 그에게 가장 큰 우려를 일으킨 것은 다름이 아닌 미국 산업의 독점화 추세, 즉 소수의 대형 재벌 (trust)들이 미국의 보호 관세와 군사력을 이용해서 미국 국내 시장은 물론 전세계를 다 집어 삼키려는 100년 전의 미국의 “무역 제국주의”의 모습이었습니다.



소수의 대형 재벌들이 노동자의 임금이나 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산의 자원의 가격을 임의로 떨어뜨리고 중국과 같은 관세 장벽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시장을 쉽게 쓸어 버릴 수 있겠다는 것을, 양계초가 볼 보듯이 본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의 제국주의 시대의 불평등 무역과 노동 문제 이해의 초석이 된 이 글의 결론이 비록 “중국이 개명 독재를 통해서 재빨리 자강하여 이 새로운 위협을 막아야 한다”는 가진 자 입장에서의 국가주의적 해결 방안이었지만, “미국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된 것은 일단 큰 의미를 가집니다 ((<飮氷室文集>, 상해, 廣智書局, 1907, “遊記”편, 15-35쪽).



모택동 등의 미래의 혁명가들이 그러한 유의 글들을 청년 시절에 애독했기에 새 중국 지식층의 극미(克美) 의식이 다져 질 수 있었던 것이지요.



그 당시의 한국 개화파들도 이 글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것은 그들의 한계로 봐야 되지 않을까요? 개화기 때부터 동시에 병행됐던 사회, 정치 분야에서의 대일 종속 강화와 종교나 대중 문화 등의 분야에서의 대미 종속 관계의 공고화는, 결국 오늘날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들로 그대로 이어지는 듯합니다.



100년 전의 매우 호의적인 대미 의식을 오늘에 와서 생각해보면, 국제 정치에 대한 동시대인의 판단 능력의 한계를 여실히 느낍니다. 우리가 미국의 실체를 바로볼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선조에 비해서 더 똑똑하기 때문이 아니고 단지 지난 세기의 역사적 경험 덕분입니다.



그런데, 미제의 야만적인 실체가 이미 양계초가 <신대륙유기>로 처음 경종을 울렸을 때보다 더 잘 알려졌다고 해서 안심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지금도 유럽연합과 중국과 같은 “마이너” 제국주의 세력들을 대략 긍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만약 우리 후손들이 그들에게 시달리게 되면 우리의 단견들도 역사 심판의 도마에 오를 셈입니다…



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은세계의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된 책



⊙김민환, <개화기 민족지의 사회사상>, 나남, 1988.

⊙박영신, “독립협회 지도 세력의 상징적 의식구조”, - <동방학지>, 제20호, 1978.

⊙최덕수, “독립협회의 정체론 및 외교론 연구”, - <민족문화연구>, 제13호, 1978.

⊙Howard Zinn, <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1492-Present>, HarperCollins, 1995.

⊙梁啓超, <飮氷室文集>, 상해, 廣智書局, 1907.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3. 대미 인식 - ①"미국에 대한 무지가 대미 맹종 불러". 프레시안.2004, 2. 5.







4.대미 인식 -②"대미 의존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



미국을 몰라서 맹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개화기 지식인들의 대미 인식을 오늘의 현안에 비추어 우리가 어떠한 교훈을 얻을 것인가를 모색하는 옥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미국은 제국주의 침략국가이자 정신적ㆍ도덕적으로 타락해 무너져 내리는 나라인데, 100년 전 우리 지식인들은 국제정치에 대한 정보 부족과 판단능력의 한계로 미국의 침략적 본성을 꿰뚫지 못하고 미국에 짝사랑만 퍼붓다가 버림받았으니, 오늘의 우리들은 이 점을 거울로 삼아 종래의 친미 의식에서 벗어나 미국의 실체를 바로 보아야 한다는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저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을 입버릇처럼 말하면서도 비 서구지역에 대해 반민주적이고 패권적인 폭력을 행사하는 미국의 이율배반적인 행태에 비판적인 입장입니다만, 몇몇 부분에서 선생님과 견해를 달리합니다.



먼저 선생님께서는 100년 전 우리 지식인들이 미국을 호의적으로―"과학과 문명의 화신"ㆍ"문명의 중심지"ㆍ"영토적 야심이 없는 공평한 나라"ㆍ"구세주"ㆍ"시혜자"ㆍ"약자를 보호하는 수호천사", "공평함과 신의를 중시하는 요순의 나라"로―본 이유를 크게 둘로 보시는 것 같더군요.



하나는 필리핀 식민화 과정에서 저지른 양민 학살과 중남미에 대한 군사적 간섭에 보이는 미국의 제국주의적 침략성과 인디안ㆍ이민 노동자 학살과 유색인종들에 대한 인종차별, 노동자들에 대한 가혹한 착취 등이 웅변하는 미국의 사회ㆍ경제적 모순과 계급갈등을 알아챌 만큼 우리 지식인들이 충분한 정보를 갖고 있지 못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들이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논리, 계급적 이해, 서구 중심주의적 인식에 함몰되어 "미제의 야만적 실체"를 깨닫지 못할 만큼 판단 능력이 떨어졌다는 것 같습니다.





유길준ㆍ윤치호도 미국의 치부 꿰뚫어



사실 선생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1882년 전후에 형성되기 시작한 호의적 미국인식은 1894년에서 1905년 사이에는 민중들에게까지 확산된 고정관념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지식인들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실체나 내부 모순을 잘 몰랐기 때문에 미국을 호의적으로 보았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미국 유학생으로 지미(知美)파 인사인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약자를 돕는 정의의 나라”라는 미국에 대한 동시대인들의 피상적 인식에 경종을 울렸으며, 윤치호(尹致昊, 1865~1945)도 인종 차별, 마약과 범죄의 만연 등 "기독교 국가"​ 미국의 치부를 꿰뚫고 있었지요.



"혹자는 말하기를 미국은 우리 나라와 우의가 두터우니 의지하여 도움을 받을 만하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은 멀리 대양(大洋) 건너편에 있으며 우리 나라와 별로 깊은 관계가 없다.

더구나 미국이 먼로 독트린(蔓老約, the Monroe Doctrine)을 선포한 후에는 유럽이나 아시아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설사 우리 나라가 위급해지더라도 그들이 말로는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군대를 동원해서 구원해 줄 수 없다.

옛 말에 천 마디의 말이 한 발의 탄환만 못하다고 했다. 그러므로 미국은 우리의 통상의 상대로서 친할 뿐이며, 우리의 위급함을 구해주는 우방으로 믿을 바 못 된다."(유길준,「중립론(中立論)」, 1885)



"인도주의ㆍ문명ㆍ도덕ㆍ자유 등을 구가하는 강대국—기독교 국가—간에서 자행되는 [노예제도ㆍ아편무역ㆍ주류밀수 등] 죄악은 모두 혹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것도 그 나라들의 문명정도에 비례하여 비판되어야 한다. 강대국들의 이러한 범죄는 요즈음 자비로우신 하나님께 대한 나의 신앙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

공정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어떤 민족은 약하게 그리고 다른 민족은 강하게 만드셔서 후자가 전자를 못살게 굴 수 있도록 만드셨을까? 혹자는 하나님이 그렇게 창조하신 것은 아니라고 강변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역사와 사실을 잘 살펴보면 이야기는 다르다. 적도(赤道)의 불볕 아래에나 한대(寒帶)에는 강건한 민족 혹은 국민이 도무지 없다. 뿐만 아니라 각 인종이 보유하는 정신적ㆍ육체적 능력에 현격한 차이가 있다.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을 똑 같은 환경조건에 놓아두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모든 인종에게 똑같은 체력과 지력을 허여하지 않으셨나? 이러한 질문에 답하기 힘들다. 나의 신앙이 이러한 의문들 때문에 흔들려서는 안되겠다."(윤치호,『윤치호일기』1889년 12월 23일자)






윤치호일기



조미조약 체결에 관여한 김윤식(金允植, 1835~1922)도 1895년경에는 "미국사람은 말만 떠벌이지 행동으로 우리를 도와주지 않는다"고 했지요. 선생님께서 미국을 약자를 보호해 주는 "수호천사"로 그린 것으로만 본 『독립신문』에도 1898년 미국과 스페인의 사이의 식민지 쟁탈전쟁 이후 본격적으로 나타난 미국의 대외 팽창주의를 비판하는 글이 실린 바 있었습니다.



"미국은 개국 이후 백여 년에 내치만 주장하여 속지(屬地)를 탐하지 않고 무역과 제조를 숭상하고 전쟁을 힘쓰지 않더니 작년부터 서반아(西班牙)와 싸워서 동으로는 포와국(布蛙國: 하와이)과 여송(呂宋, 필리핀) 군도를…서로는 쿠바와 프토릿고(프에로토리코) 등 섬을 점령하여 이전에는 동서양 전화(戰和)에 큰 관계가 없더니 이제부터는 세계정치에 대권리를 잡고 앉았으니 미국과 같이 부강한 나라가 속지정약(원문대로)을 시작하고 보면 미구에 만국사기와 지도를 변할 일이 많이 생기려니와…"(『독립신문』, 1899년 1월 7일자)





청ㆍ일ㆍ러 등 주변 열강의 침탈 속에 그나마 믿을 건 미국뿐



이와 같이 우리의 지식인들도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에 뒤지지 않는 미국의 실체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갖고 있었으며, 1890년대 후반에 본격화된 미국의 대외 팽창에 대해서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대다수 우리 지식인들은 침략자의 손길에서 약자를 구해주는 "정의의 화신" 마이티 마우스나 기술과 문명을 주는 산타클로스로 미국을 보았을까요?



아마도 그 이유는 1882년부터 1894년까지 중국의 압제에, 그리고 1895년부터 1905년까지 일본과 러시아 두 나라의 패권 다툼에 시달리던 조선왕조의 상황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중국ㆍ일본ㆍ러시아라는 부차적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을 스스로의 힘으로 막을 힘이 없는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미국으로부터 독립과 생존에 필요한 외교적 지원을 얻음은 물론 근대화를 위한 인적ㆍ물적 지원을 기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겠지요.



그러나 보다 중요한 이유는 선생님 말씀대로 100년만에 식민지에서 제2의 무역대국으로 변신한 미국의 압축성장을 높이 평가해 우리의 성장모델로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지식인들이 사회진화론의 약육강식 논리, 계급적 이해, 서구 중심주의적 인식에 함몰되었다는 지적도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량치차오라는 동아시아의 선구적 지식인조차 제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된 유럽을 목격한 1919년에야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라는 점을 깨달았고



제국주의에 맞서 중국이 살아남을 방법으로 "개명독재"라는 가진 자의 편에 선 국가주의적 해결 방안을 모색했다면, 개화기 우리 지식인들에게 왜 사회진화론과 계급적 이해를 넘어서지 못했느냐고 채찍질 할 수는 없겠지요.



량치차오가 사회진화론이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임을 깨달을 무렵, 한국인 중에서도 러시아혁명(1917)이 성공한 이후 "혁명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입장에서 미국을 자본주의적 제국주의 국가로 보아 비판하는 김규식(金奎植, 1877~1952)과 박헌영(朴憲永, 1900~1955) 같은 인물들이 나왔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겠지요.



"우리는 원동(遠東)에서의 혁명과업과 관련하여 왕왕 "연합전선"과 "협동"의 필요성을 운위합니다.

최근에 우리는 이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서구라파와 미국의 자본주의 열강이 동아시아 전체를 공동으로 착취하기 위해 서로 어떻게 결탁하였는지를 목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자국의 "이타주의(利他主義)" 지향성과 "민주주의" 원칙의 범세계적 적용을 그토록 떠들어 온 위대한 미 공화국조차 워싱턴 회의에서 영국ㆍ프랑스ㆍ일본 등 악명 높은 3대 흡혈귀 국가와 가증할 4강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자신의 가면을 벗어 던졌습니다."

(김규식,"The Asiatic Revolutionary Movement and Imperialism", Communist Review, 1922)



"세상은 미국 건국의 역사를 보고 청교도적 순도(殉道)의 정신과 영웅적 행위가 충만하다고 찬미하나 그것은 표면만 본 피상적 관찰이 아니면 거짓말로서 정확한 사실을 숨기는 데 불과하다.

미국의 역사는 "토인 학살로 그 첫 페이지가 열린다." 미국에 처음 이주한 구주인은 신영토의 삼림과 황야에 사는 토인을 방축(放逐)하고 토민을 학살하고 토인의 주가(住家)를 약탈하는 일이 피등(彼等)에게 상제(上帝)가 준 "신성한 사업"이었다. …피등이 노예에 대한 법률이 혹독한 것은 구주 중세기 시대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업섯다. 교형(絞刑)ㆍ화형은 물론이오 "버-지니아" 교회에서는 17인, 신영란(新英蘭, New England)의 교회에서는 12인의 노예가 일시에 사형에 처하엿다는 사실은 결코 드문 일이 아니엿다."

(박헌영,「역사상으로 본 기독교의 내면」, 『개벽』 1925년 11월)



이와 같은 미국을 "흡혈귀"와 같은 제국주의 침략국가로 보는 김규식의 미국 인식이나 기독교의 이율배반적 위선을 고발하는 박헌영의 미국비판은 일제하와 해방을 거치며 우리 사회의 미국을 보는 하나의 흐름이 되었지요.



사실 오늘날 미국만큼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는 외세는 없습니다. 우리가 미국과 국교를 맺은 해는 약 120년 전인 1882년이지만, 미국이 우리에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 것은 1945년 이후의 일이지요.



이처럼 짧은 교류기간으로 인해 우리는 유사 이전부터 밀접한 관계를 가져 온 중국과 일본에 대해 호오(好惡)가 분명한 인식태도를 보이는 것과 달리 미국에 대해서는 애정과 증오가 교차하는 불확정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를 돌아보면 미국을 문명국ㆍ강대국이자 우방으로 보는 친미와 우리 민족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가로막는 제국주의 침략국가로 보는 반미가 격돌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친미와 반미로 대표되는 미국인식은 오늘 갑자기 돌출한 것이 아니라 상당한 역사적 연원을 갖고 있는 것입니다. 개화기의 호의적 미국인식은 일제한 우파 민족주의자나 독립운동가의 대미 인식의 토대가 되었으며, 해방후 6ㆍ25전쟁과 냉전기를 거치면서 "구세주 나라"로 미국을 보는 대한민국의 공식적 미국관으로 굳어졌지요.



반면 부정적 대미 인식은 일제하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지식인들에게 전파되면서 형성되기 시작하였지만,

오늘 우리 사회 반미의 직접적 뿌리는 5ㆍ16 군사쿠데타 이후 30여년간 지속된 군사정권에 대한 미국의 지원에 실망한 지식인층이 1980년대 이후 미국 대외정책의 제국주의적 침략성을 비판하는 수정주의사관에 입각한 부정적 미국인식을 받아들임으로써 확산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진전되고 다원적 시민사회가 형성되면서 외세에 대한 비판의식이 조성됨에 따라 증폭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저 또한 "폭도"라는 이름으로 이라크 양민을 사살하고 메소포타미아의 고대 문명의 유적과 유물들이 파괴ㆍ약탈되는 것을 모른 척한 미군의 행위는 분명 야만적 반달리즘(vandalism)에 견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라크 주둔 미군들이 모두다 "인간이기를 스스로 거부한 미제의 고용 살인자"이며,

"기름 대신 인간의 살과 피를 태우는 살인 기계 미국의 모습을 보면 인류역사가 막다른 골목에 왔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단죄는 군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미군을 증오하고 적대하는 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증오는 증오를 낳고 피는 피를 부를 뿐이지요.



2003년 5월 미국이 공식적 종전 선언 이후 복무지를 벗어나 소속부대로 돌아가지 않은 미군의 수가 1천7백명이고, 정신적 치료를 위해 본국으로 돌아간 미군도 7천명이 넘는다는 신문보도를 본 적이 있습니다.



이 기사로 미루어 미군들도 군인이란 특수신분 때문에 자신의 양심에 거슬리는 행위를 할 수밖에 없었지만, 스스로를 돌아보고 책망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양심과 이성을 가진 인간들이 대다수가 아닐까하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또한 저는 아들 둘을 이라크전선에 보낸 래리 시버슨이란 미국시민이 쌈지 돈을 털어 작년 9월 24일자 『뉴욕타임스』에 실은 "럼스펠드 국방장관은 내 아들들을 배신했다"는 제목의 반전광고가 상징하듯, 미국 시민사회 전체가 네오콘의 제국주의적 대외 침략정책에 동의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전 시위가 전세계에서 벌어질 때 미국 시민들도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이래 최대 규모의 반전 시위를 벌였으며, 다가온 대통령 선거에 부시의 경쟁자로 나선 민주당 소속 후보들 중에는 이라크 전쟁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건 인물들도 있지 않습니까?





무조건적인 미국 배척이나 추종은 바람직하지 않아



미군 모두를 "살인기계"로 보거나 미국 시민사회를 "오락적인 폭력"으로 전쟁을 즐기는 도덕적으로 타락한 사회로만 규정한다면, 우리는 인류 필망의 암울한 종말론(終末論, eschatology)을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라크 주둔 미군과 미국 시민사회의 양식과 이성에 희망을 걸지 않는다면, 각국의 시민사회가 연대해 전개한 반전시위나 평화촉구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선 미국이 "전쟁을 먹고 사는 괴물"로 "세계체제의 정상에 서있는 한 우리에게 안심과 평화의 날은 오지 않는다"고 보고 계십니다. 또한 오늘의 한미관계를 "종속관계"로 보고 "극미의식"을 갖는 것이 우리가 취할 태도라는 입장이신 것 같습니다.



물론 해방 이후 현재에 이르는 한미관계사를 "침략자와 피침략자" 혹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미관계사를 미국의 일방적인 전략적ㆍ경제적 이해타산만이 아니라 우리의 필요에 의한 미국과의 유대 강화와 이를 통한 우리의 국익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조망한다면,



우리는 호의적 미국인식을 바탕으로 미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이용해 국내적으로는 민주주의 정치와 경제적 풍요를 누리는 다원적 시민사회도 이룩했고 대외적으로는 조선시대 이래의 폐쇄성을 극복하고 서구중심 세계질서에 본격적으로 진출하였다고도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 사회에서 격돌하는 친미와 반미의 고정관념은 냉전 이데올로기의 산물에 지나지 않기에 시대착오적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세계사적 시각에서 볼 때 냉전이 해체된 지금 친미와 반미의 소모적 논쟁을 넘어 미국에 대해 보다 유연한 인식을 갖는 것이 보다 합리적인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오늘의 우리가 냉전시대의 소산인 김동리의 시 「젊은 미국의 기빨―벤프리트 장군에게 드리는 예장(禮狀)」과 1948년 "제주민중항쟁" 때 뿌려진 「호소문」에 동감해 또다시 동족상잔의 비극을 되풀이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이번에 한국을 도와준 위대한 은인들

맥아더 릿쥬웨이 트르맨 아이젠하워 등

수많은 이름을 내 맘은 기리 잊지 못할 것입니다.

드러나 당신처럼 내 가슴에 고동을 주고

내 목에 흐느낌을 일으킨 이는 많지 않을 것입니다.

친구가 친구의 원쑤를 미워하고

형제가 형제의 원쑤를 갑되

어느 의인(義人)이 또한 나의 수도(首都)를 당신 같이

아끼며 사랑하며 지켜주었겠습니까

일찍이 한국의 어느 항구에 들어왔던 외인(外人)의 선박에서도

당신의 아드님을 비롯한 많은 부하들이

이 고장에 뿌려주신 선혈에 비하여 더 고귀한

빠이블과 삽자가를 우리는 그 속에서 본 적이 없었습니다."



"시민 동포들에게

경애하는 부모 형제들이어!

'4ㆍ3' 오늘은 당신님이(원문대로) 아들 딸 동생은 무기를 들고 일어섰습니다.

매국 단선단정(單選單政)울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 독립과 완전한 민족 해방을 위하여!

당신들의 고난과 불행을 강요하는 미제(美帝) 식인종과 주구(走狗)들의 학살 만행을 제거하기 위하여!

오늘 당신님들의 뼈에 사무친 원한을 풀기 위하여! 우리들은 무기를 들고 궐기하였습니다.

당신님들은 종국의 승리를 위하여 싸우는 우리들을 보위하고 우리와 함께 조국과 인민의(원문대로) 부르는 길 에 궐기하여야 하겠습니다!"



"제국의 오만"을 과시하는 미국의 패권주의로 인해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간의 갈등이 다시 재연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한 세기 후 우리 후손들이 우리 시대 한미관계의 회계 장부에 어떤 점수를 줄지를 유념해야 하겠지요.



반미와 친미의 고정관념을 넘어 우리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미국에 대해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인식체계에 어떠한 결함은 없는지, 그리고 한 세기 전 실패한 용미(用美)의 선책이 무엇일지를 좀더 냉철하고 합리적으로 점검해 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힘이 정의인 신자유주의의 시대에 선생님이 최악(最惡)으로 보는 미국 제국주의나 차악(次惡)으로 보는 중국이나 유럽연합 같은 "마이너" 제국주의나 침략의 속성은 매 한가지라고 보기에, 무조건ㆍ무비판적인 미국 배척이나 추종이 오늘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는 전가(傳家)의 보도(寶刀)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항상 행운과 건강이 함께 하시길 기원하며,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김기정. 『미국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초 한미관계 연구』. 문학과 지성사, 2003.

⊙김용덕. 「한국인의 미국관」. 『중앙사론』1, 1972.

⊙문동환ㆍ임재경. 「(대담) 우리에게 미국은 누구인가?」. 문동환ㆍ임재경 외. 『한국과 미국』, 실천문학사

⊙류영익. 「통시기적으로 본 대미인식」. 류영익 등. 『한국인의 대미인식』. 민음사, 1994.

―――. 「개화기의 대미인식」. 위의 책.

―――.「조미조약의 성립과 초기 한미관계의 전개」,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아라리 연구원 편. 『제주민중항쟁』Ⅱ. 소나무, 1988.

⊙유성하. 『한미간계의 발자취』. 대동, 1991.

⊙유영렬. 『개화기의 윤치호 연구』. 한길사, 198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ㆍ미수교 1세기의 회고와 전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3.

⊙한철호 역. 『미국의 대한 정책 1834~1950』. 아시아문화연구소, 1998.

⊙Taik Sup Auh, "Korean Perception of U.S-Korean Relations," Robert A. Scalapino and Sung-joo ⊙Han, eds., United States-Korean Relations, Berkeley: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1986.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4.대미 인식-②"대미 의존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 프레시안.2004, 2. 6.





5.근-현대 한국의 중국관- ①박노자의 생각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아마도 한국 역사 전체를 거시적으로 본다면 한국인에게 있어서 중국만큼 중요한 이웃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의 지역적 헤게모니가 파괴된 근대에 접어들어서, 한국인들의 중국관(觀)에도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과거의 지적인 교류가 단절되거나 약화되고, 중국을 열등시하거나 하나의 "경제권"만으로 보는 것이 안타깝게도 일반화된 듯합니다.



전통 사회 말기의 개방적인 노론 지식인 그룹, 소위 "북학파"의 핵심적인 특징이 "청나라를 배우자"는 개혁 프로그램이었음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건륭 (乾隆) 시대 (1736-1795)의 완숙한 문물 제도는 "비루한" 조선이 지향해야 할 좌표이었던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북학파의 거성이라 부를 만한 연암 박지원 (1737-1805)은, 그의 명작 <열하일기>에서 산해관에서의 중국 관료들의 엄중하고 공평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세관(稅官)과 수비(守備)들이 관 안의 익랑(翼廊)에 앉아서 사람과 말을 점고하는데, 전에 봉성의 청단(淸單 : 調査書)에 준한다. 대체 중국의 상인과 길손은 모두 성명과 사는 곳과 물화(物貨)의 이름과 수량을 등록하여 간사한 놈을 적발하며 거짓을 막음이 매우 엄하다. 수비들은 모두 만주인인데, 붉은 일산과 파초선(芭蕉扇)을 가지고 앞에 병정 백여 명이 칼을 차고 늘어섰다." ("馹汛隨筆", - "山海關記").



박지원은 만주인들을 그렇게까지 좋아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중국의 관료 제도의 운영을 일종의 모범으로 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물론 조공 사절의 많은 수가 보여 주는 1780년도의 청나라의 위력을, 박지원이 간과할 리는 없었습니다:



"차츰 열하에 가까워 지니 사방에서 조공(朝貢)이 모여들어서, 수레ㆍ말ㆍ낙타 등이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우렁대고 쿵쿵거려서 울리는 수레바퀴 소리가 마치 비바람 치는 듯하다. (…)

삼도량에서 잠깐 쉬고 합라하(哈喇河)를 건너 황혼이 될 무렵에 큰 재 하나를 넘었다.

조공 가는 수많은 수레가 길을 재촉하면서 달린다. 나는 서장관과 고삐를 나란히 하며 가는데, 산골짝 속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두세 마디 들려 온다.

그 많은 수레가 모두 길을 멈추고서 함께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할 듯싶다. 아아, 굉장하구나"

("漠北行程錄", 8월8일甲寅).



청의 문물에 큰 존경심을 갖고 있었던 박지원이 소중화주의와 존명 (尊明)대의의 비현실적인 공론 (空論)에 빠진 대다수 조선 지식인들의 청에 대한 무지각을 아주 안타깝게 여긴 것은 잘 알려 진 사실입니다.



그런데 청에 대한 그의 관심과 호의를, 과연 요즘 한국의 일부 관벌 (官閥)이나 매판적인 학상배 (學商輩)들의 무조건적 숭미주의와 같은 차원에서 놓고 볼 수 있겠습니까?



요즘 한국의 수구적인 숭미파는 상전 나라의 이라크 침략과 같은 노골적인 강도 행각을 변호하고 거기에다가 한국 젊은이들의 피를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그야말로 미제의 지역적인 대리인다운 아부를 서슴지 않지만



연암 선생께서 청나라 관료제의 부정적인 측면 – 예컨대 총신들의 부정행각과 중앙 관료의 아첨 등 – 을 결코 좋게 보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컨대 건륭 황제 말기의 중앙 관계 (官界)의 분위기에 대한 박지원의 평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해내가 태평하고 임금의 자리가 점차 높아짐에 따라 시새우고 사납고 엄하고 가혹한 일이 많을뿐더러, 기쁘고 성냄이 절도가 없으므로 조정에 선 신하들은 모두 그때그때 잘 꾸며대는 것을 상책으로 삼고, 오로지 황제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만을 시의(時義)에 맞는 일인 줄로 안다 (…)" ("太學留館錄", 8월9일 乙卯).



아니면, 그 당시 청나라의 총신의 권세의 상징이라 할만한, 수억 양의 뇌물을 받아 먹은 중국 사상 최악의 간신배 중의 하나 사람 만주인 화신 (和珅: ? - 1799)에 대한 연암 선생의 평을 들어 보면 어떨까요:



"그는 눈매가 곱고 준수한 얼굴에 기운이 날카로웠으나, 다만 덕기가 없으며, 나이는 이제 서른하나라 한다. 그는 애초 난의사 (鑾儀司: 황제의 의장대) 호위 군졸 출신으로, 성격이 몹시 교활하여 윗사람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불과 대여섯 해 사이에 갑자기 귀한 자리를 얻어서 구문(九門: 수도 수비대)을 통령하는 제독이 되어, (…) 언제나 황제의 좌우에 붙어 있으므로, 그 세력이 조정에 떨쳤다.



(…) 사람들이 함부로 눈을 뜨고 바로 보지 못한다. 그리고 황제가 이제 여섯 살 나는 딸을 화신의 어린 자식에게 약혼시켰는데, 황제의 나이가 늙어서 성격이 점차 조급해져 노염이 잦으므로 좌우에게 매질하기가 일쑤였으나, 그가 이 어린 딸을 가장 사랑했으므로, 황제가 크게 성낼 때면 궁인이 번번이 이 어린 딸을 껴안고 와서 황제 앞에 놓는다. 그러면 황제가 노염을 그친다 한다" ("太學留館錄", 8월12일 戊午)



이와 같은 촌철살인 격의 정확한 비판을, 요즘의 친미 인사들이 과연 건륭 황제보다 백배 더 무능한 폭군 부시의 월포비츠나 체이니 등의 – 화신에 비해서 천하에 훨씬 더 큰 해악을 끼치는 - 부하들에 대해서나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선조들의 중국관(觀)과 요즘 수구주의자들의 대미관(觀)을 "사대주의"라는 같은 용어로 같이 묶을 수 없을 듯합니다.



통찰력과 비판 능력의 수준은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선비들의 통찰력과 양심에 기반한 박지원과 같은 선구자들의 다면적인 중국관(觀)에서는, 우리가 과연 타자를 잘 보고 다(多)차원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을 배워야 되지 않을까요?



북학파의 중국관의 여맥을 이은 것은 1880-90년대의 소위 온건 개화파가 아닌가 싶습니다.

김윤식 (金允植: 1835-1922) 등을 중심으로 한 이 그룹은, 그 당시의 청나라 "양무"(洋務)​​ 운동의 각본대로 유교 사회의 기본틀을 보존하면서 청나라의 "보호" 아래에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을 막을 수 있는 서구 기술을 일단 받아들이는 것을 지향했습니다(<陰晴史>고종18년12월27일條).



중국의 "양무 개혁"보다 일본 메이지 모델에 훨씬 더 경도한 것으로 평가 받는 실무 개화파 인사 어윤중 (魚允中: 1848-1896) 만 해도, 고종에게 상무 (商務)진흥의 방법으로서 19세기 후반 중국의 관료 자본주의의 상징인 초상국 (招商局: 정부에서 출자하여 이홍장이 직접 나서서 1872년에 상해에서 세운 선박 회사)을 내세운 적이 있었습니다 (<從政年表>, 고종18년12월14일條).



그런데 온건 개화파의 중국 헤게모니의 현실 인정은, 생각 없는 맹신과 추종을 결코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이 그룹의 정신적인 스승이라 할 수 있는 박규수 (朴珪壽: 1807-1877)는, 1872년에 사신으로 중국에 두 번째 갔다 온 뒤에 다음과 같은 소감을 한 개인적인 편지에서 밝히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사대부들도 러시아 세력을 우려하고 있으나 만주 계통의 관료들은 그냥 음식을 배불리 먹고 술을 즐기면서 아무 일 안하고 (豢酣無爲), 한인 계통의 관료들은 문약에 빠져 [현실적인] 일을 멀리 한다 (文弱疎逖). 천하의 일이 결국 어떻게 될는지 알 수가 없다. [거기에다가] 도처에서 물가가 폭등돼 (錢輕物重) 우리 나라보다 훨씬 심하다" (<박규수전집>, 상권, 書牘, 與溫卿).



물론 그 당시의 온건파 선비들의 정보 수집 능력과 통찰에 분명한 시대적인 한계도 있었지만 비판적이며 분석적인 태도를 시종일관 유지했던 것을 깊이 존경하지 않을 수 없지 않습니까?



청나라가 결국 더 급진적인 서구화를 지향한 일본으로부터 1894-95년간에 엄청난 패배를 당했다는 결과를 아는 우리는, 목적론적인 사고에 입각하여 "양무" 운동의 "전근대적 한계성"부터 지적하곤 합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조선인의 눈으로 본다면, 박규수-김윤식 식의 중도 정책이야말로 조선 사회의 반상 (班常)이 적어도 어느 정도 함께 납득할 수 있었던 "합의의 정치"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온건 개화파도, 급진 개화파도 추구했던 것이 궁극적으로 서로 약간 다른 형태의 권위주의적인 주변부형(型) 관료 자본주의이었다는 점, 둘 다 지주 출신의 극소수 중앙 관료를 중심으로 형성된 점 등으로 봐서는 둘 다 반(反)민중적인, 억압적인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1894년의 갑오 내각을 이룬 온건 개화파 출신들이 일군 (日軍)에 의한 동학 말살을 적극 긍정했다는 것은, 한국의 "위로부터의 개혁"의 역사에서 엄청난 오점으로 남을 듯합니다.



그런데, 서구인보다 더 서구적으로 되려고 애쓰던, 조선인들을 "열등 종족"으로 규정했던 윤치호 형(型)의 오리엔탈리즘적 "급진주의자"들보다, 그나마 조선의 종래의 생활 패턴과 문화를 존중할 줄 알았던 "온건주의자"들은 일종의 "차악" (次惡)으로 생각되시지 않으십니까?



급진 개화파의 악질적인 서구 중심주의는, 역시 그들의 중국관(觀)에도 그대로 반영된 셈입니다.



온건 개화파가 중국의 경험을 배우고 중국으로부터 근대 기술 (전기, 전신, 무기 제조 등)을 대량 수입하는 반면에, 윤치호나 서재필과 같은 급진 개화파의 대표자들이 극단적인 반청 (反淸) 감정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둘 다 청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가 조선에 "독립"을 안겨주었다고 생각했으며 "부패한 청나라"를 "약육강식 시대의 부적자 (不適者)"로 인식했습니다.



물론 중국의 조선에 대한 태도의 변화가 그들의 반청 감정을 크게 자극한 듯했습니다. 1884년부터 조선에 대한 "예속화 정책"을 편 청나라는 고종의 독립적 외교의 시도들을 막고 중국 상인의 조선 침투를 장려하는 등 대표적인 "이차적 제국주의"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중국이 전통적인 온정주의를 버리고 고압적이며 착취적인 – 그러면서도 미국과 같은 선진 제국주의와 달리 교육, 의료 등의 선진 문물 이식의 효과를 내지 않는 - "후진 형 제국주의"로 돌아서자 조선의 근대 지향적 지식인들의 중국에 대한 반감이 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반감의 실질적인 모습을, 아마도 <윤치호일기>에서 가장 여실히 볼 수 있을 듯합니다. 임오 군란 때 서울에서의 유혈 진압을 잔혹하게 단행하고 대원군을 납치하고 그 뒤에 매사에 내정 간섭을 자행해 온 중국의 거만한 관료에 대해서



윤치호가 맹렬한 거부감을 가져 중국군을 "도야지 군대" (豚卒: 1884년1월4일)로, 중국 조정을 "오랑캐 조정" (胡廷: 1884년1월21일), 그리고 내정 간섭의 주범인 원세개 (袁世凱)를 "도야지 원" (豚袁: 1886년10월17일)이라고 각각 불렀습니다.



조선의 임금이 1884년의 갑신 쿠데타의 실패 이후에 거의 "오랑캐의 포로" (1884년12월21일) 신세가 되고 관료로서의 윤치호의 담당 분야이었던 외교부터 중국의 거의 무한한 부당 갑섭을 받은 상황에서는, 이와 같은 분노를 어느 정도 정당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중국의 간섭이 부정적인 측면들이 많음에도 일단 다른 – 훨씬 더 위험한 – 야수들의 조선 침략 야욕을 아직 억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한 유길준 ("중립론")이 윤치호에 비해서 보다 지혜롭고 판단력이 좋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 보면 윤치호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 않습니까?



요즘 일에 관한 여담이지만, 티베트의 평화적 민족 운동을 탄압하고 미안마의 군사 독재를 적극 후원하는 등 다소 폭력적인 지역적 패권 국가의 태도를 취하는 현재의 중국의 현대판 "이차적인 제국주의"에 대해서도, 반미적 성향이 뚜렷한 한국 진보적 지식인마저도 신뢰하지 못하는 이유는 똑같지 않습니까?



군사력을 내세워 동아시아에서 패권 정책을 추진하는 미국이 미워도, 지난 100년 동안 제국주의적 가치를 충분히 내면화한 중국이 만약 미국을 동아시아에서 퇴진시킨다면 과연 평화와 안정만을 지향할는지 도저히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무기 생산 늘리기를 통한 경제 위기의 일시적인 만회와, 몰락해 가는 패권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지구 곳곳에서 발악적인 침략을 자행하고, 잘못하면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미국에 비해서야,



일단 지금으로서 경제 개발을 중점을 두고 권내의 선진 자본주의 국가 (일본, 한국, 대만)에 대한 우선적으로 경협 정책을 내세우는 중국은 특별히 시급한 위협으로 전혀 보이지는 않지만 "모방적 제국주의"에 대한 경계 태세를 완전히 풀 수 없는 게 현실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윤치호 류의 "반청론" (反淸論)이 단순히 현실적인 역학 관계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닌, 담론적인 차원에서 서구와 일본의 멸시적인 중국관(觀), 즉 그들의 악명의 오리엔탈리즘을 모방한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국주의적 성격이 짙어 져 갔던 원세개의 "중화 중심주의"를 타파하고자 했던 윤치호 등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이 중국을 포함한 모든 비(非) 서구 지역들을 다 영원한 "기형아", "발달의 불능자"로 치부하려고 했던 서구 제국주의자들의 담론적인 무기를 빌린 것이, 과연 결국 그들의 대(對)중국 저항을 서구의 침략주의적 논리에의 포획 (捕獲)으로 둔갑시킨 것이 아니었습니까?



<윤치호일기>의 초기 부분 (1880년대)만 보더라도 1883년부터 서구인, 미국인들과 일상적으로 접촉해 온 그가 그들의 중국 인식을 어떻게 체화 (體化)했는지를 잘 지켜 볼 수 있는 듯합니다.



그는 이미 1884년에 고종에게 "구미 국가들이 중국인들을 다 노예처럼 생각하고, 인정이 두터운 미국에서마저도 그들을 좇아 낸다"고 아뢰는 (1884년9월24일) 등 구미인들의 인종주의적 억압을 "중국의 완고함"에 대한 "당연한" 반응으로 보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이 오리엔탈리즘적 중국 멸시론이 심해지기만 했습니다.



그는 유럽인 못지 않게 "입만 벌리면 개똥과 같은 더러운 냄새 나고, 이빨을 딱지 않고 허풍 떨고 떠들어 대는 것만 좋아하고 게으르고 뜻 무의미한 고전이나 시가 (浮文) 만 잘 읽는" 중국인 (1885년2월15일)들에 대한 거의 체질적이다 싶은 인종적인 반감을 가지게 되고,



서구인 전용의 상해 공원에 중국인들의 출입 금지에 대해서 "호인 (胡人: 오랑캐)"의 탓으로 돌리고 (1885년5월24일), 프랑스에 의한 베트남의 식민화 라는 서구 제국주의의 강도질까지도 "베트남이 중국을 상국 (上國)으로 섬겨 의지한 탓" (1885년11월17일)이라는 상식을 벗어난 정세 인식을 보입니다 (그러면 베트남이 중국과 절교했다면 프랑스를 이겼겠습니까?).



189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 사회진화론을 "최고의 진리"로 받들게 된 그는, 미국 내에서의 중국인에 대한 억압과 인종주의적 배제를 옹호하기까지 했습니다.



물론 아무리 "유럽인보다 더 유럽적으로" 중국을 짓밟는다고 해도, 본인도 비(非)서구 출신인 윤치호는 자신도 서구인의 인종주의적 멸시를 결코 면치 못했으며, 그 멸시로 인해서 입은 상처가 그를 결국 "소신 친일파"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한 모양입니다.



이외에 그가 첫 부인을 기독교 신도 출신의 – 매우 서구화된 - 중국 여성으로 맞이하는 등 적어도 개인적인 인간 관계의 영역에서 서구의 인종주의자들과 상당히 다른 대(對)중국 태도를 보인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그러나 그나 서재필 등의 초기 친미적 급진 개화파들이 보인 중국에 대한 담론적인 오리엔탈리즘은, 결국 한국 사회의 새로운 "주류"로 부상한 서구 중심적 "신교육"의 수여자의 세계 인식의 하나의 기초가 된 셈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자본이 투자되거나 직접 지은 현지 공장에서 고용된 약 1백만 명 이상의 중국인 노동자에 대한 착취,

"중국"이라는 범주에 들어가게 된 동포인 조선족에 대한 극단적인 멸시와 배제,



일본이나 서구의 문학 등에 대한 과열된 관심과 대조되는 중국의 현재 문학 등의 고급 문화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 박정희 등의 역대 정권의 화교 박대 등의 오늘날의 대(對)중국 태도의 여러 문제점들은 상당 부분 바로 이와 같은 우리들의 "모방적 오리엔탈리즘"과 무관하지 않는 듯합니다.



물론, 서구 지향적 개화파가 중국을 열등시하고 불신했다 해도, 중국과의 지적인 교류에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안창호 (安昌浩: 1878-1938)이었지만, 그도 청나라 말기의 유명한 개화 논객 양계초의 문집을 정독하고 학교 교과서로 삼는 것을 적극적으로 권했습니다.



인종주의적 색채가 뚜렷한 오리엔탈리즘이 매우 심각한 수준에 이른 윤치호마저도, 조혼의 피해를 논 할 때 청나라 논객들의 의견을 참고하는 (<대한자강회 월보>, 제2호, 1906년8월, 58-59쪽) 등 중국 지식인과의 지적 대화를 완전히 끊지 않았습니다.



식민지 시절에도 조선 지식인들이 중국의 사상적인 움직임들을 예의주시했습니다. 현대 중국의 대문호 노신 (魯迅: 1881-1936)의 대표작으로 알려져 있는 <광인 일기> (狂人日記)를, 안창호의 국내 제자들이 운영했던 잡지 <동광>의 제16호 (1927년8월)에 변역, 게재한 사실을 들 수 있습니다.



국내 지식인들에게도 중국은 "가까운 이웃"이었지만, 중국에 가서 독립 운동을 전개하신 분들에게 중국 지식인들과의 연대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예컨대 김규식 (1881-1950?) 선생이라는, 중국을 무대로 삼은 독립 운동가는, 미국에서 서구 중심주의적 교육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여러 유수 대학교에서 교수직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중국 현대 시인들의 시를 영문으로 번역하고 중국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양자강의 유혹"이라는 영문 시집을 내는 등 두 나라의 문화 교류에 아주 특별한 기여를 했습니다.



그런데 우사 선생과 같은 지중파 (知中派) 지사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시적인 차원에서 본 중국과 우리의 지적 교류의 흐름은 두 번 크게 단절했습니다.



1937년 이후부터 중국이 일본 제국의 "적국"이 된 뒤에 중국 관련 보도가 엄격한 통제를 받게 된 일이 있었고, 1949년의 중국 대륙의 공산화와 1950년의 중국군 한국 전쟁 참전 이후에 "중공"과의 교류가 끊겼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이 심한 윤치호는 그나마 중국에서의 풍부한 체류 경험과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라도 가졌지만 그를 계승한 남한의 친미적인 "주류"는 그것마저 없었던 셈입니다.



1990년대초부터 한중 관계에서 경제적 교류가 "붐"을 이루었지만, 중국을 열등시, 후진시하는 현재 한국의 오리엔탈리즘적 풍토는 서재필이나 윤치호의 서구 편향적 사고와 별 다름이 없어보입니다. 그리고 동시대 중국의 지적인 흐름을 파악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는 아직 식민지 시절만도 못하는 것 같습니다.



100년 전에 존재했던 동아시아의 지적인 공동체를 새로운 시대에 알맞게 새로운 차원에서 복원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이지만, 지식인의 "중국"은 여전히 우리에게 너무나 "먼 이웃"인 듯합니다.



위와 같은 굴절과 단절들이 많은 근대적인 대(對)중국 인식 변천사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요? 제 생각 같으면



첫째 중국의 현실적인 위치를 결코 무시하지 않으면서도 – 그리고 중국 문화의 장점에 대한 큰 관심을 가지면서도 – 중국 관료제의 모순들을 정확하게 파악, 비판한 박지원 선생의 정신을 이어받아야 할 듯합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중국 자본주의의 이면 – 즉, 박정희 시절을 빼닮은 중국 현재 지배층의 반(反)민중적인 행각과 서민층의 붕괴, 커 가는 약자들의 고통 –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허울좋은 "중국 자본주의의 성공" 신화를 믿지 않는 게 좋을 듯합니다.



면직자, 무직자, 빈농 등의 고통의 심화가 결국 지금의 통치 집단의 권력 명분의 상실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가 현실적으로도 기억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민중의 고통을 심화시키는 권위주의적 자본화에 유럽과 미국의 재벌뿐만 아니라 한국의 재벌들도 피비린내 나는 이득을 얻고 있는 부끄러운 현실을 잊으면 안될 듯합니다.



둘째는, 윤치호 류의 오리엔탈리즘의 유치한 구각을 벗어나 중국 문제의 실체를 조금 더 객관적으로 세계 체제의 맥락에서 보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렇게 본다면 서구에서 가장 많이 문제로 삼는 중국의 티베트 민족 억압 정책이 중국의 어떠한 "본질적인 패권 야욕"으로 인한 것이 아니고 결과적으로 서구인 자신들의 식민주의와 개발주의를 철저하게 본 딴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마찬가지로 현재 지구에서 가장 심각한 것으로 평가되는 중국의 환경 문제도, 모택동 이후의 역대 통치자들의 "사람이 능히 자연을 정복할 수 있다"는 식의 서구 근대의 왜곡된 무분별한 개발주의적 신념, 정책과도 관계가 있다는 사실, 중국에서 영업하는 서구, 미국, 일본, 한국 재벌들이 이 환경 문제를 보다 심화시킨다는 사실 등이 밝혀 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일언이폐지 (一言以蔽之)하자면 중국을 둘러싼 여러 문제들이 결국 오늘날의 구미 중심적인 세계 체제의 지구적 문제들의 지역적인 반영이 아닌가 싶습니다.



세계 자본주의적 체제가 철폐되지 않는 이상, 서구 형 복지 국가를 만들 만한 착취자의 여유가 어차피 생길 것 같지 않은 중국 안에서의 빈익빈부익부 현상과 내륙 지방, 노동자 등의 차별 대상자들의 고통이 끝날 날이 없을 듯합니다.



결국, 신자유주의로부터 피해를 입고 있는 모든 세계인들이 연대를 해서 이 체제의 본격적인 지구적 해체에 나서지 않는 한, 그리고 – 모택동 사상을 지하 서클에서 이미 다시 학습하고 있다는 일부의 중국 노동자들이 이미 하는 것처럼 – 중국에서의 자본주의 피해자들이 드디어 계급 의식을 확실히 갖고 중국 형(型) 박정희들의 죄를 강력하게 묻지 않는 한 오늘의 중국 문제들이 근본적으로 풀릴 것 같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미 중국의 노동자보다 훨씬 더 강력한 계급 의식과 연대, 그리고 조직을 갖고 있는 한국 민중이 중국 민중의 성장에 각종의 긍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한국 민중 운동의 가장 큰 역사적인 사명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캄캄해진 영하 10도의 오슬로에서 박노자 삼가 드림





도움이 된 책:



⊙구선희, <한국근대 대청 (對淸) 정책사 연구>, 혜안, 1999

⊙김명호, <열하일기 연구>, 창작과 비평, 1990, 81-98쪽.

⊙송병기, <국역 윤치호 일기>,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1, 제1권.

⊙이광린, "서재필의 개화 사상", - <동방학지>, 제18호, 1978.

⊙이정식, <김규식의 생애>, 신구문화사, 1974, 94-124쪽.

⊙총성희, <근대 한국 지식인의 대외 인식>, 성신여자대학교 출판부, 2000.

⊙한국 근현대사회 연구회 편, <한국 근대 개화 사상과 개화 운동>, 신서원, 1998, 35-155쪽.

⊙허동현 역주, <유길준논소선>, 일조각, 1987.

⊙권혁수. "김옥균과 중국: 대중국인식의 시기적 변화를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제80호.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0.

⊙Yur-Bok Lee. "Politics over Economics; China's Domination of Korea through Extension of

Financial Loans, 1882-1894".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1992.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5.근-현대 한국의 중국관-박노자의 생각. 프레시안.2004, 2. 17.





6.근현대 한국의 중국 관- ②허동현의 생각



박노자 선생님 반갑습니다.



무엇보다도 종래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갖고 있던 중국과 일본에 대한 인식을 비교해보면 그 척도가 공평하지 못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인들이 왜구의 침입, 임진왜란, 식민지 지배를 이유로 일본에 보인 적개심과 증오감에 비해 병자호란, 1882~1895년간의 준 식민지배, 6.25전쟁 개입 같은 중국의 침략행위에 대해서는 형평을 잃을 만큼 관대하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아마도 중국은 선진 문물의 공급원이었고 우리는 이를 충실하게 수용한 "동방예의지국"이었기 때문일 터이지요.



8세기 중엽 통일신라(統一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성씨ㆍ인명ㆍ지명ㆍ관직명 등을 중국식으로 바꾼 이후 개항(1876) 당시까지 우리는 중국문화를 따라 배워 온 중국지향형의 문화권에 속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개항 이후 우리는 문화 수용의 통로를 서구 내지 일본으로 전환함으로써 서구 내지 일본 문화를 열렬히 추종ㆍ모방하는 서구지향형 내지 그 아류(亞流)로서 일본지향형의 문화권으로 편입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문화란 물과 같아서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는 법이지요. 거시적으로 볼 때 근대 이전에는 중국에서 발원한 '문화'란 이름의 강물이 동류(東流)하여 우리 문화의 토양을 살찌웠지만,



지금은 개항 이후 서구 근대의 여러 가치를 자기화한―다원적 시민사회, 경제성장, 그리고 역동성으로 상징되는―현대 한국문화가 중국으로 역류하는 한류(韓流) 현상을 보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선생님의 지적처럼 현재 우리 사회 일각에 동양을 비하하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에서―서양인의 하얀 가면을 쓰고 그들의 눈을 빌려―오늘의 중국을 내려다보는 풍조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이 고정 관념화되지는 않았다고 봅니다.



새로운 시각에서 중국을 알려고 하는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유학 붐이 상징하듯, 중국의 장래를 낙관하는 경향―"한조(漢潮)"―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002년 3월 4일자 홍콩의 시사주간지 『아주주간(亞洲週刊)』은 "한조 넘실, 서울을 태운다"는 제하의 기사에서 전국2백여개 대학에 중국 관련학과가 있고 중국에 유학한 한국 학생이 3 만명을 넘어선 우리 사회의 중국 열풍을 손에 잡히게 그려내고 있더군요.



이 기사를 보고 저는 한국 문화에 대한 중국 젊은이들의 관심을 반영하는 한류와, 한국 젊은이들의 중국 배우기가 상징하는 "한조"가 제대로 합류한다면, 지식인들의 지적 공동체 복원은 물론,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마음의 거리도 좁혀져 두 나라가 가치를 공유하며 더불어 사는 날도 머지 않아 올 것 같다는 희망을 품게 되었습니다.



한ㆍ중 두 나라사이에 지적ㆍ인적ㆍ물적 교류의 연결망이 더욱 긴밀해지길 기대하며 제 생각을 밝혀 보겠습니다.



먼저 박지원과 같은 북학파 실학자들의 중국인식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순서겠지요. 저 역시 그들이 청나라를 문화적 열등자로 깎아 내리는 동시대 대다수 지식인들과 달리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넘어서서 중국을 배울 것을 제창하면서도 중국 지배체제의 모순에 눈감지 않은 점을 높이 평가합니다.



청나라 화가 나빙이 1790년 8월 연행 사신으로 간 박제가를 그린 초상화.

그림 옆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시 두 수를 붙였다.



『북학의(北學議)』





박지원이 "내가 이 책을 펴보니 나의 『일록(日錄, 열하일기)』과 조금도 다른 것이 없어, 마치 같은 사람이 쓴 것이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고 평한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북학의(北學議)』(1778)에는 중국 배우기를 넘어서 해외통상을 촉구하는 탁견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는 나라가 작고 백성들이 가난하다. 이제 농민에게 밭을 가는 일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게 하고 국가에서는 인재를 등용하고 상업이 잘 유통될 수 있도록 하며, 공업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혜택을 주어 나라 안에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총동원한다 한들 부족함을 면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



송나라 때 배로 고려와 교류할 때 명주(明州)에서 7일이면 예성강에 닿았다 하니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조선조 4백년 동안에 딴 나라 배가 한 척도 오지 않았다. …



선주를 손님 접대하는 예로서 후하게 대접하기를 예전 고려 사람들이 하는 식으로 한다면, 저들은 우리가 구태여 초청하지 않더라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찾아 올 것이다.



그 사이 우리는 기술을 배우고 그들 나라의 풍속을 알아내어 백성들의 견문을 넓혀 주게되면 천하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이고, 그 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사실을 알고 부끄러움을 알게 될 것이므로, 이처럼 외국인과의 교류는 통상에서 얻는 이익 외에도 세상이 나아가는 도를 깨우쳐 주는 데도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



오직 중국의 배만 통하게 하고 해외의 다른 나라는 통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말은 일시적인 책략이지 정론(定論)은 아니다. 이제 앞으로 국가의 힘이 강해지고 백성의 생업이 안정되게 되면 차례차례 이들과 통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김승일 역, 박제가 저, 『북학의』(범우사, 1995), 168~173쪽)



통상만이 아닌 의식의 개방까지 촉구한 박제가의 탁견을 조선왕조의 위정자들이 받아들여 실천에 옮겼다면, 우리도 닫힌 사회에서 열린 사회로의 전환을 타력이 아닌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있었겠지요. 그렇다면 다음세기에 동아시아에서 펼쳐진 "시간과의 경쟁"에서 낙오되는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동시대나 이전 시대의 지식인에 비해 앞서 있었던 북학파의 사상도 그 역사적 위상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일국사의 관점을 넘어 세계사의 흐름과 비교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의 해외 통상론은 16세기에 이미 아시아까지 무역망을 넓혔던 서양과, 17세기 쇄국 하에서도 네덜란드에게만은 나가사키 무역을 허용했던 일본과 비교해 볼 때, 그리고 이들의 북학론은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의 소중함을 이야기한 동시대 서구 지식인들의 사상의 흐름에 비추어 볼 때, 보다 합리적인 역사적 자리 매김이 가능하지 않을까요? 또 하나 저 역시 이라크 파병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파병을 "무조건적 숭미주의"의 결과물로 보거나, 이를 용인하는 사람들 모두를 "통찰력과 비판능력"이 결여된 "미제의 지역적인 대리인"인 "숭미파"로 보는 것은 지나친 이분법이 아닐까요?



"타자를 잘 보고 다차원적으로 이해하는 기술을 배워야"한다는 선생님 말씀처럼 자신과 견해를 달리하는 쪽의 생각도 품고 이해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만이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지키는 첩경이 아닐는지요?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발로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렸을 때, 미국의 우파 지식인 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는 끝났는가?(The End of History?)"라는 도발적 질문을 던졌지요.



인간의 머리에서 짜낼 수 있는 이데올로기 상에 있어서의 진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의 승리로 끝났으니, 비 서구 국가 모두는 실패로 끝난 사회주의의 헛된 꿈에서 하루라도 빨리 벗어나 "세계화"를 통해 세계자본주의의 표준을 따라 변신하라고 목청을 높였지요.



이에 맞서 좌파 지식인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Wallerstein)은 사회주의진영의 붕괴는 자유주의와 자본주의가 거둔 최후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세계체계(Modern World -System)"의 해체가 시작되는 자본주의 붕괴의 신호탄이자 폭력에 호소하는 세계질서 재편의 전개를 예고한다고 보았지요.



강자의 패권 추구와 이에 맞서는 약자의 저항이 작열하는 카오스 같은 오늘의 세상을 볼 때 앞으로의 세계사가 어떤 쪽으로 흘러갈지 그 누구도 장담 못할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역사는 과연 반복하는가요?" 거시적으로 조망할 때 한 세기전과 오늘은 크게 두 가지의 공통점을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기존의 국제질서가 깨지고 "세계화"라는 물결이 도도하게 밀려온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한 세기 전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인 조공체제가 붕괴―선생님 표현으로는 "중국의 지역적 헤게모니가 파괴"―되는 와중에서 한반도를 놓고 열강이 패권을 겨루었듯이, 오늘날 한반도를 둘러싸고 열강의 힘 겨루기가 다시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것도 하나의 유사점이겠지요.



그것이 선생님 말씀대로 미국과 중국의 패권 쟁탈전일 가능성도 있지만, 백년 전과 마찬가지로 중국ㆍ일본ㆍ러시아 같은 "이차적 제국주의" 세력들의 각축장이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닐는지요?



한 세기전 동아시아지역에 세계화의 충격으로 국민국가 형성의 시기가 도래했을 때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일으켜 서구 근대 국민국가의 모형을 일본화 하는데 성공한 반면, 중국과 한국 두 나라는 실패의 역사를 써야만 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급진개화파"나 "온건개화파"나 모두 "반민중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주변부형 관료 자본주의"를 꿈꾸었다는 데서 별 차이가 없지만, "악질적 서구 중심주의"에 함몰된 "모방적 오리엔탈리즘"의 눈으로 중국을 본 급진개화파보다는 중체서용(中體西用)의 양무(洋務)운동을 모방한 "온건개화파"가 "조선의 반상이 동의할 수 있는 '합의의 정치'"이자 "중도정책"을 펼쳤다고 보아 온정적인 시선을 보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에 "온건개화파"가 주도한 갑오경장은 중국의 양무운동을 모방한 것이 아니라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 개화파와 마찬가지로 일본형 국민국가를 수립하려 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갑오경장 주도세력들은 국가통합을 실현하기 위해

내각(內閣) 중심의 입헌군주제(立憲君主制)와 제한적 대의정치의 도입, 경찰제도의 창설과 법제의 근대화,

그리고 상비군(常備軍) 양성을 꾀했으며, 경제통합의 방안으로 왕실 재정의 정리를 통한 정부 수입의 증대,

징세법 개량, 새로운 세원의 발굴, 정부 주도하의 민간 상공업 진흥 등을 도모하는 한편 이에 필요한 재정수요를

일본으로부터의 차관으로 조달하는 계획을 세운 바 있었습니다.



나아가 이들은 국민통합을 위해 전통적 신분제도의 철폐와 근대적 학교제도의 보급을 통해 국민을 창출하고 육성하고자 했으며, 중국에 대한 조공(朝貢)을 폐지하는 등 대외적으로 국가의 자주와 독립을 확보하려고도 했기 때문입니다.



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고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중국은 더 이상 예전과 같이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서 조선을 보호해주는 "보호자"가 아니었으며, 선생님이 지적하셨듯이 이미 "고압적이고 착취적이면서도 구미 제국주의와 달리 교육과 의료 같은 선진 문물"을 이식해 주지 않는 "후진형 제국주의" 국가로 돌변했으니 말입니다.



사실 갑신정변의 실패 이후 중국의 "이차적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탈할 당시 "온건개화파" 인사들은 친청(親淸)ㆍ보수의 민씨 척족정권 아래에서 중국의 주차관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에게 "독립노선파"로 찍힌 반청 인사들로 탄압과 박해의 대상이었습니다.







급진개화파 왼쪽부터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김옥균





"온건개화파"의 대표 인물인 김윤식조차 1886년에서 1893년까지 죄인으로 유배당할 만큼 이들은 모두 정부요직에서 쫓겨난 상태였습니다. 그러니 이들이 중국을 긍정적으로 볼 리가 없다는 점은 미루어 알 수 있겠지요.



당시 중국에 대한 호오(好惡)와 긍부(肯否)의 갈림은 "급진개화파"과 "온건개화파" 같은 세계질서의 변동을 직시하고 이에 대응하려했던 지식계층의 내부에서 찾기보다는



유교적 구질서와 세계관을 지키려한 위정척사적 지식인이나 동학과 같이 전통문화를 지키려한 민중들과 새로운 세계질서에 대응하려한 세력들 사이에 존재한 인식의 균열에서 찾아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보호자인가, 침략자인가? 1882년 3,000명의 군대로 임오군란을 진압한 후 조선의 내외정치에 직접 간섭하면서부터 중국은 서구열강과 일본의 침략을 막아주는 보호자인지, 근대화를 가로막는 침략자인지 그 정체가 모호해지고 말았습니다.



중국은 개화기에 유교적ㆍ도덕적 가치를 지키려 한 위정척사나 동도서기 계열의 사람들이나, 전통가치를 지키려 한 동학교도들에게는 여전히 중화이자 문명이었지만, 서구 근대를 따라 배우려 한 개화파 인사들에게는 이미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모순된 중국 인식은 일제하에서 냉전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일제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세력에게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믿음직한 후원자였지만, 6·25 전쟁 이후 냉전시대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중국 공산당 정부는 통일을 가로막는 침략자로 보였습니다.



반면 중국 공산당은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들에게 사회혁명의 이상을 같이하는 동지였고, 냉전시대 북한의 위정자에게는 "제국주의 미국"의 침략을 물리쳐준 독립의 옹호자였습니다.



오늘의 한국인들이 중국에 대해 애증이 교차하는 모호한 감정을 갖게 된 이유 역시, 냉전적 세계관과 이념체계의 영향뿐 아니라, 중국이 개항 이후 행한 후원자이자 침략자라는 이중적 역할의 영향이 클 것입니다.



그러나 남한의 적국, 북한의 형제국이란 구시대의 고정관념에 기반을 둔 중국 인식은 냉전해체와 한중수교(1992) 이후 바뀌기 시작하였습니다. 새로운 시장이자 기회의 땅으로 부상하기 시작한 중국이 남한 사람들에게 적국이란 낡은 이미지 대신 경제발전의 동반자이자 세계시장의 경쟁자로 비추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또한 지금 현안이 된 핵 보유 문제나 동북공정에 보이는 고구려에 대한 역사 기억을 둘러싼 갈등이 웅변하듯 북한의 위정자들에게 중국은 더 이상 운명을 같이 할 만큼 믿음직한 후원자나 보호자는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흥미로운 사실 하나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역사 경험에 비추어볼 때, 화이론(華夷論)이나

냉전 같은 이분법적 세계관이나 이념이 지배하던 시절에는 중국이 적이나 동지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었지만,

힘이 곧 정의인 지금은 침략자일 수도 혹은 후원자일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중국은 신자유주의와 세계체제의 폭압에 저항해 인간의 얼굴을 한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아직 미국의 패권추구에 맞서 새로운 세계질서를 만들어 낼 가능성이 남아 있는 마오쩌둥의 사상과 "중국혁명"의 유훈이 살아 숨쉬는 땅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한 세기 전의 아픔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또 다시 지역 내에서의 패권추구에 나선 "이차적 제국주의" 국가의 모습으로 비추어 질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외치며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전개한 한 세기 전 중국과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외치며 "개혁ㆍ개방정책"을 추진하는 현 중국의 모습은 너무도 유사합니다.



근대 이전에 동아시아 지역에는 중국이 세계를 한(漢)민족과 오랑캐(夷)로 구별하는 화이사상에 입각해 차별하는 화이(華夷)사상과 자연계와 인간세계에 상하의 서열이 존재한다는 유교사상에 기초해 중국을 종주국으로 주변국을 속방으로 삼는 종속체제가 구현되어 있었지만,



이러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는 도덕률에 의해 규율되었기에 속방의 내치와 외교는 자주였고 힘으로 간섭하는 경우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양무운동이 전개된 1860년대 이후 중국은 이리(伊ꝃ, 지금의 신강지역)를 놓고 러시아와, 유구(琉球, 지금의 오키나와)와 조선을 두고 일본과, 베트남을 갖고 프랑스와 패권을 다툰 제국주의 국가였습니다.



세상을 적과 동지로 이분하고, 자본주의 제국의 침략에서 약소민족의 해방운동을 지원한다는 국제협력의 기치가 살아있던 냉전시대에도 중국은 적국 미국과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싸운 것 이외에도 이미 사회주의 형제국인 소련과 베트남과 영토를 둘러싼 분쟁의 경험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 이념의 속박에서 풀린 오늘 중국의 지역 내 패권추구는 예상컨대 냉전 시대에 비길 바가 아니겠지요.



그렇기에 우리는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반미적 지식인들도 중국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이겠지요.

저는 티베트 민족억압이나 동북공정에서 보이는 현 중국정부의 패권주의를 "본질적인 패권 야욕"이 아니라 "서구의 식민주의와 개발주의를 철저히 본 딴 것"이니 좀 너그럽게 보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원조 범죄자를 흉내낸 모방범죄자라는 사실이 면책사유가 되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자! 다시 돌아온 약육강식의 시대에 우리 눈에 맺힌 중국의 이미지는 동반자일까요 침략자일까요?

아마도 중국의 향후 역할은 우리하기에 달려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오늘의 중국을 만든 두 인물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과 덩샤오핑(鄧小平, 1904~1997). 이 두 사람이 주도한 "문화혁명(1966~1976)"과 "개혁·개방정책(1978~ )". 오늘의 중국을 있게 한 두 사람과 지도노선에 대한 평가는 어떤 입장에서 보느냐에 따라 다를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검은 고양이건 흰 고양이건 쥐만 잘 잡으면 된다는 "흑묘백묘론(黑猫白猫論)"과 "부유할 능력이 있는 사람부터 부유해져라"는 "(先富論)"을 내걸고 중국의 "개혁․개방"을 이끈 덩샤오핑보다는,



서구 신좌파(New Left) 학자들에게서 한때 "만민평등과 조직타파를 부르짖은 인류역사상 위대한 실험"이라는 최대의 찬사를 받았던 "문화혁명"을 이끈 마오쩌둥에게 높은 점수를 주시는 것 같은 느낌입니다.



물론 덩샤오핑은 "서구 근대의 무분별한 개발주의 신념과 정책"을 모방해 환경을 파괴한 개발독재자로서

"중국형 박정희"이자, 경쟁원리를 설파해 평등이라는 사회주의의 이상을 깨트리고, 세계체제에 영합해 중국을

"세계의 공장"으로 만들어 민중을 자본의 착취대상으로 전락시킨―"중국혁명"의 이상을 무너뜨린―장본인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시각을 달리하면, 1981년 중국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당ㆍ국가ㆍ인민에게 건국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 준 모택동의 극좌적 오류"라는 비난을 받아야만 했던 "문화혁명"도 서구 자본주의제국과 대항하는 과정에서



대안적인 근대―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맞서 중국민족의 독립을 지키고, 약소민족의 민족해방운동을 지원하며, 서구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국민경제 시스템을 지키는―를 찾다가 빠져버린 극단이라고 면죄부를 줄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개혁ㆍ개방정책"으로 세계체제에 편입되어 "세계의 공장"이 되어버린 중국의 노동자들이나 민중들이 겪고 있는 고통에 눈을 돌리는 것은 아닙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지하 서클에서 모택동 사상을 다시 학습하는 중국 노동자 같은 중국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문화혁명"과 마오쩌둥의 시대가 "황금시대"로 기억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홍위병(紅衛兵)과 대자보로 상징되는 그 시대에 일어난 비극을 되새기는 중국의 "개혁·개방정권"과 지식인들이 기억하는 마오쩌둥의 시대는 전혀 다른 모습인 것 같습니다. 현재 중국은 "기억의 내전"을 치르고 있다고도 볼 수 있겠지요.



한때 서구에서도 1960년대 학생운동을 이끈―오늘의 환경운동ㆍ반전운동ㆍ페미니즘운동을 주도한 NGO운동의 선구자들로 거듭난―주도세력들이 당시 서구 자본주의의 폐해를 넘어설 대안으로 마오쩌둥의 사상과 문화혁명을 가슴에 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사실 1970~80년대 개발독재의 폭압에 항거하던 우리 젊은이들과 지식인들 중에도 물신(物神)숭배의 자본주의에 찌든 우리사회의 모순을 넘어서는 대안으로 중국식 사회혁명을 꿈꾼 이가 적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러한 중국인식이 퍼지는데 큰 영향을 미친 책이 리영희 선생님이 편역한 유신시대의 대표적 금서 『8억인과의 대화』(창작과 비평사, 1977)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를 시발로 사회주의권이 무너져 내리고 천안문 사태가 무력으로 진압되자,

우리사회의 병폐를 고치는 묘약으로 중국식 사회주의와 인간형이 더 이상 유효하다고 보는 사람들은 더 이상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지요.



선생님께서는 "마오쩌둥의 사상" 내지는 "문화혁명"으로 귀결된 "중국혁명"의 이상과 가치가 오늘날에도 세계체제와 신자유주의에 맞서 중국민중의 미래를 밝혀줄 희망이자 모든 세계인을 폭력적 세계화의 함정에서 건져줄 동아줄일 수 있다고 보시는지요?



봄이 성큼 다가온 느낌인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볼만한 책



⊙강만길. 『역사는 이상의 현실화 과정이다』. 창작과 비평사, 2002.

⊙송병기. 『근대한중관계사연구』. 단국대출판부, 1985.

⊙김기혁. 「개항을 둘러싼 국제정치」. 『한국사시민강좌』7, 1990.

⊙왕후이 저, 이욱연 외 역.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창비, 2003. ​

⊙야마무로 신이찌 저, 임성모 역.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민두기. 『시간과의 경쟁』. 연세대출판부, 2001.

⊙유영익, 『갑오경장연구』. 일조각, 1990.

⊙池田誠 외 저, 김태승 역. 『중국공업화의 역사』. 신서원, 1996.

⊙가시모토 미오 외 저, 김헌영 외 역. 『조선과 중국 근세 오백년을 가다-일국사를 넘어선 동아시아 읽기』.

역사비평사, 2003.

⊙이혜경. 『천하관과 근대화론: 양개초를 중심으로』. 문학과 지성사, 2002.

⊙이양자. 『조선에서의 원세개』. 신지서원, 2002.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6.근현대 한국의 중국관-허동현의 생각. 프레시안.2004, 2.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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