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4

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Ⅱ-.. : 네이버블로그

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Ⅱ-.. : 네이버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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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Ⅱ- ▣일본觀-미워하며배워온일본▣러시아觀-강대국 러시아는 환상?▣서양인의 조선觀-日의 왜곡으로 조선觀 악화▣일본인의 조선觀-복제오리엔탈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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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hyh45 ・ 2022. 9. 2. 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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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을 더 보시려면 아래 URL을 클릭하세요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Ⅰhttps://blog.naver.com/ohyh45/222864297805

    ▣논쟁을 재개하며[대담]-①과거 1백년을 어떻게 볼 것인가, ②무엇을 할 것인가, 

    ▣대미 인식-①미국에 대한 무지가 맹종 불러-박노자의 생각, ②대미 의존은 불가피한 현실적 선택-허동현의 생각,

    ▣근-현대 한국의 중국관-①박노자의 생각, ②허동현의 생각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Ⅱ https://blog.naver.com/ohyh45/222865212342

    ▣ 일본관(觀) - ①미워하며 배워온 일본-박노자 생각,  ②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허동현 생각

    ▣러시아관(觀) - ①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박노자 생각, ②'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허동현 생각.

    ▣서양인의조선관(觀)-①우리는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것은 아닌가,②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악화시켰다,

    ▣일본인의조선관(觀)-①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복제 오리엔탈리즘', ②일본은 고대 이래 아시아를 멸시해 왔습니다,



7.미워하며 배워온 일본- 일본관(觀)-박노자 생각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한국 근현대의 일본관(觀)에 대해서 글 쓰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지금도 “일본”이라는 기호는 한국 사회에서 “적대적 타자”의 의미를 강하게 갖고 있습니다. 보통 해마다 신문 등의 매체에서 “국가별 호감도”를 묻는 여론조사를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통계들을 허동현 교수님께서 유심히 보시니까 잘 아시겠지만 교과서 등으로 인한 파동이 있는 해면 약 60% 정도, 그렇지 않은 해에는 45-50% 정도가 각각 “일본을 가장 싫어한다”고 답합니다.



식민지의 아픔 – 우리를 “우리”로 만든 공동의 기억 

 

이처럼 – 일본과의 각종의 교류를 이미 거의 40년동안 해 왔음에도 – 일본에 대한 끈질긴 싫증을 느끼고 있는 근본적인 이유는 당연히 지금까지도 아물지 못한 식민화의 상처일 것입니다. 상처에 대한 공동의 기억이, 영예로운 과거에 대한 기억 못지 않게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만들기에 기여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전쟁, 학살 등에 대한 “민족 전체가 나눈 상처”에 대한 “기억”의 정치가 민족을 어떻게 만드는가에 대해서 예컨대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ed. John R. Gilli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한 면에서 각종의 갈등과 모순으로 가득 찬 한국 – 제1세계의 최고 우량기업에 질 배 없는 재벌들과 기술이나 사고발생률이 제3세계 수준밖에 안 되는 중소기업, 세계적 산업지대인 수도권과 농사 지어 봐야 빚밖에 늘어나는 게 없는 농촌 등의 “명”과 “암”이 좁은 국토 속에 공존하는 역설의 땅 한국 – 


이 단합된 “민족”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식민지” 시절이라는 다들 알고 다들 나누는 커다란 “상처”를 안고 살기 때문이 아닙니까?

 

즉, “우리가 그들에게 당했다”는 – 다들 어느 정도 갖고 있는 - 생각이 바로 민족적인 “우리”를 만든다는 말씀입니다. 실제로 따져 보면 지금도 이 사회 위에 지금도 군림하는 상당수의 주요 족벌들이 그 때 “당하기”만 하지 않고 오히려 일본제국의 체제에 잘 적응하여 같은 조선인들을 착취해 가면서 돈과 지위를 확보했음에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착취와 억압의 대상이었던 식민지의 민중뿐만 아닌, 민족적 “우리”의 전체를 “피해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그러나 계급 의식을 결여한 민족관(觀)의 문제점이 어떻든 간에,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한민족의 구성에서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이 차지하는 몫이 매우 크다는 것만큼은 사실인 듯합니다. 


한국의 근대사 기점으로 인식되는 강화도조약의 체결(1876년)이 바로 일본 침략의 시점이기도 한 것은, 이 땅에서 양반과 상한들을 하나의 “민족”으로 묶은 “근대”가 “일본”이라는 가해의 이미지와 얼마나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지 잘 보여 주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한 만큼, 일본과의 각종의 교류의 발전과 별도로, “우리를 괴롭힌 적대적 타자” 일본에 대한 끈질긴 싫증은 좀처럼 쉽게 사라지지 않을 듯합니다. 


물론 만약 “조선 침략의 불법성”을 침략의 그 당시부터 줄곧 주장해 온 일제 시대의 좌파의 계승자인 일본 공산당과 사회당이 일본에서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일본의 역사 교과서에서 메이지 “성공”에 대한 “자랑스러운 우리의 이야기” 대신에 그 당시의 일본 국내 공장에서 폐결핵으로 무더기로 죽었던 여공의 고생과 국외에서의 일본군의 잔악한 의병 “토벌” 등의 범죄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글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면 

아마도 한국 쪽 “일본”의 의식도 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1920-30년대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이 침략적인 제정 러시아 정권과 국제주의적인 레닌의 정책 방침을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분리해서 사유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일제의 패망 이후에 미제의 비호 하에서 다시 살아나 결국 공고한 “소프트 권위주의적” 우파 지배의 국가 체제를 갖추게 된 일본의 우익이 그 헤게모니를 – 적어도 가까운 시일 내에 – 내놓을 것 같지 않으니 결국 이 이야기는 어디까지나 꿈에 불과합니다. 

 

오늘의 일본의 집권 우파가 일제 시절의 관료와 정객들을 계승한 만큼, 우리로서는 “그때의 일본”과 “오늘의 일본”을 분리해서 생각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미제가 천황제라는 군국 일본의 정신적인 기축을 그대로 살려 내 지금까지 천황제가 지속돼 온 점이나, 부시 정권의 적극적인 사주에 의해서 이제 일본의 군국주의적 모습까지 “이라크 파병” 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우리의 심기를 결코 편안케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미국과 꼭 닮은 100년 전의 약화돼 가는 세계적 패권 국가 영국의 힘에 기댄 일본이, 그 때의 미-일 안보 조약의 격인 영-일 동맹의 체제 하에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너무나 잘 기억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피해자로서의 우리”의 명과 암 

 

특정 국가/민족에 대한 피해 의식에 기반한 민족 의식의 구성이란 아마도 장ㆍ단점이 두루 있는 것 같습니다. 

단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여러 가지 열거할 수 있지만 몇 개만 뽑겠습니다. 

 

하나는, 우리의 집단적 피해 의식이 “일본”에 집중된 만큼 한반도 주위의 기타의 제국주의적 야수에 대해서 우리가 상대적으로 “관대”(?)한 편인 듯합니다. “관대”한 것이라기보다는, “적대적 타자”의 역할을 “일본”이 전담한 만큼, 나머지 야수와의 관계를 “과거 기억의 부담” 없이 그 때 그 때의 필요성대로 만들어 가도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지난 2004년 2월 12일에 인천에서 러-일 전쟁 그 당시에 인천 앞바다 해전에서 전사한 러시아 해군을 기념하는 추모비가 – 여러 시민단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 끝내 한국측의 적극적인 협조 하에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제막되지 않았습니까? 


물론 북한 문제 등의 안건이 있어서 노무현 정권이 푸틴 정권과의 관계를 개선하는 데에 힘을 싣는 걸 외교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만, 역사적 차원에서 생각해 보면 한반도 – 적어도 한반도의 이북 지역 – 를 러시아의 군사적 보호령으로 만들기 위한 제국주의적 침략 전쟁인 러-일 전쟁에서 죽은 제국주의 국가 군인들을 과연 한국 측이 한국의 영토 내에서 “추모”까지 할 하등의 이유라도 있습니까? 

 

제 말씀이 과하다고 생각하시는 모든 분들께서, 러-일 전쟁 발발 직전에 원동(연해주)의 총독인 알렉세예프 (Alekseev)가 러시아 외무부 장관인 람스도르프 (Lamsdorf: 1844-1907) 백작에게 보낸 서한을 읽어 봐주시기를 바랍니다:

 

“때가 되면 한반도가 러시아의 영토가 되게 돼 있습니다 (…) 우리로 하여금 한국에 들어오게 하는 힘은, 우리로 하여금 우랄 산맥에서 태평양까지 오게 하기도 한, 우리로 하여금 중앙아시아를 우리의 영토나 우리의 보호국으로 만들게 한, 그리고 이제는 만주에 진출하게 하기도 한 바로 그 힘이다 (…)” 

(РГАВМФ, ф.32, о.1, д.201, л.5 об., 6 – 최근에 러-일 전쟁의 100주년과 관련해서 <서울 헤럴드>가 낸 특집 기사에서 이 문서의 원문이 재인용됐습니다: http://vestnik.tripod.com/novosti04/021201.html ). 

 

알렉세예프가 이야기하는 “힘”은, 그가 확신했던 러시아의 

“동진의 운명”, “하나님이 부여하신 동방 여러 민족들의 문명화의 사명”이었습니다. 

 

만약 일본 쪽에서 청일 내지 러일 전쟁에서 전몰한 일본 군인들을 위한 추모비를 한국 영토 내에서 세워 달라는 요청이 온다면 아마도 우리는 “망언”으로 규정하겠지만, 100년 전에 똑 같은 한반도 침략을 꿈꾼 러시아의 “러-일 전쟁 영웅화”에 노무현 정권이 일조를 해도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별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즉, “우리”를 오늘과 같은 “우리”의 민족 집단으로 만든 그 아물지 못한 상처가 주로 “일본”으로 인해서 발생된 만큼, 주위의 기타의 야수들의 야수성에 대해서 우리가 그다지 강한 자각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러시아도 그렇지만, 한국전쟁 때 “이북 지역 융단 폭격”이라는 이름의 인종주의적 살육을 자행해 수십만 명의 동포를 무참히 죽인 뒤에 참회나 사과의 한 마디를 하지 않은 미제의 범죄도 그렇습니다. 

 

둘째는, “밖으로부터”의 상처에 대한 골수에 박힌 기억, 즉 “우리는 다 피해자”라는 통념은, 우리를 지배해 온 우파 정객들이 미제의 세계적 헤게모니에 편승해 저질러 온 “밖”에 대한 가해를 우리로 하여금 잘 생각하지 않게 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중산층이 지금 누리고 있는 번영에, 베트남전쟁이라는 4백만 명 이상의 같은 아시아인들을 죽인 미제의 범죄에 편승해 벌었던 돈, 그리고 한국 기업들이 중국이나 베트남 등지의 노동자를 착취해 벌고 있는 돈이 지금 밑천이 된 것이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피해 의식이 강한 만큼 “가해 사건”들에 대한 우리의 기억은 강하지 못합니다. 

바로 그렇기에 노무현에 실망한 수많은 과거의 지지자들이 그 실망의 원인을 물으면 “도덕성 상실”이나 “경제 침체”, “개혁 부진” 등을 들지, 미제와의 최악의 공범 행각이자 이라크 민중과 독립군에 대한 가해인 소위 “이라크 파병”을 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와 “가해자” 라는 두 단어는 아직까지 우리 뇌에서 동의어가 되기 어렵지만, 집권 우파의 숭미 정책이 우리를 자원 수탈을 위한 중동 침략의 “졸병”으로 전락시키는 것은 간과할 수 없는 현실입니다. 


참, 항일 운동에 목숨을 바치신 분들께서, 태극기를 휘날리는 남아들이 또 하나의 약소 민족인 이라크인들의 가슴에 총을 겨누는, 이 수치스럽게 짝이 없는 광경을 지금 저승에서 지켜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시겠습니까? 

 

인기몰이에 아주 능한 노무현이라는 사람이 그 무슨 말을 해도 다 좋지만, <백범일지>를 애독한다는 말을 더 이상 제발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부시 도당의 이라크 침략에서의 동참을 “아랍권과의 우호 증진을 위한 일”과 같은 정신 나간 망언을 퍼부은 그 입에 김구 선생과 같은 어른의 함자가 오르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씀입니다. 

참, 여담이 너무 길어 져서 죄송합니다! 

 

그러면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우리”가 피해의식이라는 “태” 내에서 태어난 것은 과연 어떤 장점을 갖고 있습니까? 일본이 점령한 한반도의 땅에서는, 지금의 우리로서 상상하기 어려운 너무나 많은 신분/지역적 집단 간의 경계선들이 존재하지 않았습니까? 

 

노비제가 갑오개혁 때 철폐됐음에도 식민지 때만 해도 과거 상전의 집안들이 과거의 노복 집안들을 어디까지나 동등하게 존댓말을 쓸 수 없는, 함부로 대해도 대상으로 인식했는가 하면, 독립운동가 사이에서조차도 기호인 지도자(이승만 등)들이 평안도인 지도자(박용만, 안창호 등)들과 종종 태심한 갈등을 빚는 등 “지역색”이 무시할 수 없는 정체성들 중의 하나이었습니다. 

 

인구의 절반인 여성들이 아예 충분한 의미의 정치 사회의 구성원으로 간주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었습니다. 

일본인 지배자들이 총독부의 관료 임용 과정에서 기호인 양반을 우대하는 등의 교묘한 “분리 통제 정책”도 썼지만, 


일단 그들의 인종주의적인 멸시적 “조센징”관(觀)에서는 양반이든 상한이든 남성이든 여성이든 기호인이든 서북인이든 누구나 다 “태생적으로 열등한”, 언제나 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해도 되는 “통치 대상으로서의 반도인”이었습니다.

 

조선 왕조 때는 서로 다른 법적인 카테고리였던 사족과 상한과 노복과 백정의 자손들이, 일제의 식민지 법으로 다들 똑 같은 “조선인”으로 분류됐습니다. 


일제의 목적이야 어디까지나 식민적 통치 “대상물”의 분류이었지만, 바로 이와 같은 피지배자인 “조선인”으로서의 일체감은 한국인으로 하여금 전근대적인 각종의 분류법들을 벗어나게끔 한 것은 아닙니까? 

 

전근대적 신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한국전쟁 때이지만, 그 전의 일정 (日政)의 쓰라린 경험도 일치된 집단으로서의 “한국인”의 탄생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일본 통치자들의 “민족적” 분류법의 민족 정체성에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는 일부 미국의 한국계 소장파 학자들의 이야기 (예컨대, Em, Henry H. "Minjok as a Modern and Democratic Construct: Sin Ch'aeho's Historiography." In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참조하시기를 바랍니다)


에 완전히 찬동하기가 힘들지만 (개화기 때의 “국민 만들기” 노력이 미국 학자들에 의해서 너무 과소평가되는 듯한 씁쓸한 느낌입니다), 거기에 일단 일말의 진실이 담겨 있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영토의 상당 부분이 간접 지배를 받은 영국령의 인도에 비해서는, 직접 지배를 받은 한반도에서는 전근대적인 신분제에 대한 기억들이 훨씬 더 철저하게 사라진 듯합니다. 


물론 전통적 지배자인 사족들이 비워준 자리를, 곧잘 “선진 지식”을 통해서 그 권위를 확립한 “유학파”의 지식인들과 역대 정권들의 비호 하에서 부를 축적한 재벌의 정상 (政商) 등의 “신흥 양반”들이 차지해 버렸지만 – 즉, “국민”의 형성이 결코 평등과 박애를 의미하지 않았지만 – 역사적으로 이미 그 유효 기간이 지나 버린 조선시대적 혈통적 권위 체제의 종말이 일종의 의미의 “진보”로 이해될 수 있을 듯합니다.


 

일본, “근대”의 위협이자 거울

 

일본의 지배로 인한 집단적 아픔이 오늘과 같은 “우리”를 만든 이상, 일본에 대한 적대감뿐만 아니고 “친일” 문제에 대한 분노도 그렇게 쉽게 없어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친일”의 화신이라 할 만한 박정희가 일제로부터 물려받은 강압적인 통치 방법으로 나라를 다스렸을 때 이 문제가 금기의 영역이 됐기에 더욱더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의 지배층인 우익 보수층을 공격할 때, 반대쪽에 서 있는 사람들이 “친일파 후손”이라는 언설을 보수층의 역사적 정통성 부정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사용하지 않습니까? 


그럼에도, 재일 교포 작가나 사업가가 일본에서 인정을 받아 성공한다면, 국내에서 보수언론이든 진보언론이든 늘 크게 부각하지요. 

 

예컨대, 한국인 대다수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의 소설을 잘 안 읽지만, 재일 작가 유미리(1968년 생)가 “일본의 최고 권위인 아쿠타가와상”을 탔다는 소식을 들어 “아쿠타가와”의 이름을 알 것입니다. 그만큼 “일본의 권위”가 인정을 받는 것이겠지요? 

 

일본이 분명히 한국 근현대사의 “부정적 타자”(The negative Other)이면서도 “유의미한 타자” (The significant Other)인 셈이지요. 한국 근대의 담론이 일본의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 만큼, “따라 잡아야 할” 대상으로서의 일본, “우리 우수성을 보여주어 인정을 받아야 할” 권위자로서의 일본, 그리고 시찰하여 이해해야 할 “근대의 모델 중의 하나”로 일본은 늘 우리 머리를 떠나지 않는 듯한 느낌입니다. 

 

밉기도 하고 배워야 하기도 하고, 근대성 체화 과정에서 경쟁해야 하기도 하는 일본에 대한 근현대 한국인의 의식을 어떻게 쉽게 서술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보면 한국인들의 일본관이 근대성 그 자체를 보는 태도와 구조적으로 흡사한 면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옛시절”을 향수하면서 근대가 가져다준 “인간성의 상실”을 한탄스럽게 여기는 감정, 

즉 강제적으로 이식된 근대성에 대한 원한은, 우리 모두에게 약간씩 내재돼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도 국제적 경쟁에서 이겨서 “일등 국가”가 돼야 할 경쟁적 강박감, 그리고 근대성 성취의 모델로 인식되는 “선진국” 사람들의 눈을 크게 의식하는 근대성 권위의 인정도 우리 뇌리에 이미 박혀 잇는 것이 아닙니까? 

 

“따라 배우기”와 “경쟁하기”와 “인정 받기”의 불가피성을 받아들이면서도 원한을 씻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근대관이기도 하고 일본관이기도 한 셈이지요. 

 

“미워도 배운다”는 일본에 대한 오늘날의 태도는, 이미 개화기 때 어느 정도 형성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정치적으로 “친일적”이라 전혀 할 수 없는 개화기의 계몽주의자들까지도 대개 일본을 한국으로서 현실적으로 가장 시급하게 필요한 모델로 인식한 것이었습니다. 


이승만의 <독립정신> (1904년 탈고)이나 서재필의 <독립신문>에서 명치유신의 근대주의적 면모 – 예컨대 유학파의 등용이나 법률ㆍ제도의 서구화, 부국강병 정책 – 가 큰 칭찬을 받는 한편, “온고지신”에 중점을 두었던 개신 유학자들은 명치유신의 보수적인 측면들 – 예컨대, 유교적 충효 사상이나 신도, 불교의 이용 – 을 부각시켰습니다. 


예컨대, 개화파가 구래의 풍습을 급진적으로 버리는 것이 “국성” (國性: 전통을 바탕으로 한 국민적 통합)을 해친다는 논리를 전개했던 한 논객이 명치 유신의 권위에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어느 나라든 간에 그 유신을 창도하는 초기에 일반 인민이 크게 깨달아 바람에 휩쓸리는 구름처럼 크게 일어나는 것은 보통 잘 없는 일이다. 민습(民習)이 오랫동안 그대로 있었다가 갑자기 획기적으로 바뀌는 것은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메이지 유신 초기에 인민들의 고유한 불교 신앙을 기반으로 삼아 그들을 고취한 관계로 일본이 크게 일어나는 것이 쉬었던 게 아니었던가? 

그러나 지금 우리 나라의 개화파는 도리어 우리 나라의 고래의 국성 (國性)이 어떤가를 전혀 참작하지 않고 객관적인 기준만 적용하여 대대로 내려온 선조들의 풍속을 다 불가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 

(松南, “開化守舊兩派의 胥失”, - <서북학회월보>, 제19호, 1910년1월, 3-7쪽, 현대 한국어로 번역하였음). 

 

조선에 한때 영향을 끼쳤던 유라시아의 두 개의 후발 근대화 국가 – 청나라와 제정 러시아 – 가 차례로 일본에 의해서 참패를 당하자 이제는 수많은 한국 유학생의 목적지가 된 일본이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근대성의 대표자”의 표상을 구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장하도다 우리 학도 병식 행보가 나파륜 (拿破崙: Napoleon)의 군인보다 질 것 없겠네” 

(안창호가 설립한 대성학교의 체조 노래: 주요한, <안도산전>, 삼중당, 1975, 71쪽)


와 같은 개화기의 수많은 시가에서 알 수 있듯이 프랑스나 독일, 미국 등의 서방 국가들의 “최상의 근대적인 권위”는 늘 인정돼 왔지만, 머나먼 그들과 달리 가까운 일본은 일단 손쉽게 따를 수 있는 “현실적인 모델”이었습니다. 


1905-1910년 간의 개화기의 주요 학술지들을 보면, 자치제나 근대 법률, “정신 교육”의 원칙부터 조혼 폐지와 여성의 이혼 권리의 확립까지의 거의 모든 “근대화”의 구체적인 분야에서는 “유신 이후의 일본”은 일차적인 참고 모델이 된 것입니다. 

 

<대한매일신보>처럼 확고한 반일적인 입장을 취한 매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즐겨 사용했던 근대적 어휘와 개념들 – 예컨대 “국가 사상” (1910년 6월 25일자 논설, “소리 없는 무기”)이나 “국수” (國粹: 1908년 8월 12일자 논설, “국수보전론”), “정신 상의 국가” (같은 이름의 1909년 4월 29일자 논설) 


등의 국가주의적인 어법의 요소들 – 은 거의 다 당대 일본의 매체에서 사용되었던 일본의 국가주의적 근대의 주된 관념들이었습니다. 


어떤 <대한매일>의 논설들은 “서구의 정신이 자유 독립이고 일본의 정신이 명치 유신의 정신인 것처럼 우리 대한의 정신도 있어야 한다”는 “그들이 그렇기에 우리도 그래야 한다” 식의 논리를 편 “대한 정신”이라는 유명한 논설(1907년 9월 29일자)처럼, 일본 근대의 구체적인 현실들을 “우리의 근대”의 참고로 직접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즉, 근대주의적인 항일 운동가들은 “적대적 타자”로서의 일본의 근대적인 “유의미성”을 결코 부인하려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위협”인 일본은 그 동시에 “근대의 교사”이기도 했습니다. 


 

“강간” 형태의 “근대 수업”

 

파르타 차테르지 (Partha Chatterji)라는 유명한 탈식민(post-colonial) 이론의 대표자가, “근대성에 대한 원한”이라는 것이 식민지 내지 구(舊) 식민지 지성인으로서 정상적인 정서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서구 침략의 결과로 제3세계로 전락하게 된 아시아 대륙의 전통적인 문화 중심지 – 중동이나 인도, 중국, 한국 등 – 가 서구적 근대성의 세례를 강제로 받은 만큼, 근대로의 전환을 “가치의 상실”로 인식하는 것도, 일종의 “강간”에 비유하는 것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차테르지가 주된 준거로 삼은 인도의 경우도 그랬지만, 하물며 전통 시대 내내로 늘 천시해온 “도이"(島夷)들에게 전통 문화의 가치라는 “정조”를 빼앗긴 한국의 경우는 어느 정도였겠습니까? 

 

웬만하면 극언을 삼가하는 유림 출신들이 일본이 “그 놈들의 수도를 빈터로 만들며 그 종족을 멸종시킬 만큼의 천지가 용납 못할 죄를 범했다”(최익현, 1898년 10월 9일의 상소문)고 말하고, “강도 일본과 그 주구에 대한 암살, 파괴 폭동"(신채호, “조선혁명선언”, 1923년 1월)을 외친 것으로 보면, 


당시의 원한이 어느 수준에 달했는지 알 수 있고, 박정희 정권의 국내적 지지 기반이 “굴욕 외교”로 인식됐던 1965년의 한일 수교 이후에 급속도로 파괴돼 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면, 그 원한이 오늘날에도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원한이 강한 것은, 항일에 목숨을 바친 사람뿐만 아니고 식민지의 현실에 순응한 사람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우리가 통상 1920-30년대의 윤치호를 “친일적 인물”로 보지만, 그가 그 일기에서 “조선에 충만한 것은 천황의 은혜가 아니라 천황의 악의이다”같은 표현을 사용하기도 하고, 조선인들에 대한 일본인들의 일상적인 오만과 핍박을 한탄했습니다. 


정치적 지향이 아무리 현실 순응적이라 해도, 속 깊은 곳에서 원한을 갖지 않기란 매우 어려운 노릇이었습니다. 

미시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이러한 원한의 직접적인 동기는 대개 – 김구가 <백범일지>에서 지적했듯이 – 일본인들의 인종주의적인 일상적 폭력이었습니다. 


식민화 이전이었음에도, 1890년대에 일본 상인들은 조선인들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괴롭혔습니다: 

 

“시가로 5천환씩 하는 토지를 저당 잡아 불과 1-2백환만을 빌려주고 이에 50-80%의 고리를 받을 뿐만 아니라 원래 저당 잡힌 땅을 빼앗으려고 하는 대금인지라 기한이 오면 법률을 앞에 내세우고 용서 없이 토지를 빼앗는다. (…) 혹은 상점에 조선인이 나타나 상품을 손에 들고 값을 물었다가 만일 그것을 사지 않는 경우에는 손때가 묻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에게 팔 수 없다 하여 트집 잡아 20-30% 이상 비싸게 메긴다” 

(龜岡榮吉, <朝鮮を直視して>, 경성, 1924, 32쪽 – 최준, <한국신문사>, 일조각, 1990, 75쪽에서 재인용). 

 

“천황의 악의”라는 윤치호의 표현은, 이처럼 일상적인 폭력을 당하면서 사는 식민지의 백성들에게 매우 구체적인 것을 의미했던 셈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보자면, 당당한 항일적 입장에 섰던 사람들도 일본으로부터 근대를 배운다는 것을 당연한 걸로 생각한 것도 사실입니다. 


“조선의 문명이 일본에 미치지 못함은 사실인즉, 독립한 후에 문명을 수입하려면 일본을 외면하려면 달리 길이 없을 것이다”. 3.1 운동이 일어난 이후에 투옥된 만해 한용운(1879-1944)의 명저 <조선 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 (1919)에서 나온 문구입니다. 


1908년에 일본을 시찰한 한용운은, 정치적으로 확연히 독립 지향적 입장에 섰음에도, 한국 불교의 개혁에 있어서 일본의 전례를 많이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서양어를 잘 몰랐던 관계로 세계 시사를 읽는 데에 있어서 주로 일본의 신문과 잡지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즉, 한마디로 원한을 원한대로 품으면서도 “근대의 공부”를 일본을 통해서 하는 것은 정치적 지향과 무관하게 한국 근대 지성의 하나의 특징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 거듭 강조해서 말씀 드리지만, 이 과정에서 일본 특유의 근대적인 전체주의적 이념들 – “단일 민족”이라는 배타주의적 관념이나 “국민 의무”에 대한 무조건적 강조 등 –이 한국에서 무비판적으로 수용된 것은 한국 근대의 최대 비극 중의 하나입니다. 


 

탈근대적인 공존: 길의 모색

 

원한과 지속적 “따라잡기”를 강요하는 일본의 “근대적” 권위에의 승복… 특정 국가에 대한 피해 의식에 기반한 근대적 “민족” 정체성의 형성… 일본의 폭력에 대한 깊은 원한을 가지면서도 일본의 “인정(認定)"을 갈구하는 “따라잡는” 마음… 불우한 역사가 낳은 이 복잡한 감정들을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요? 

 

우파 헤게모니 구조의 완전한 해체가 불가능하다 해도, 일본 사회가 적어도 어느 정도 근대 지상주의를 극복하여 메이지시기 서구화의 야만적이며 배타적인 측면들에 대해서 충분히 자각, 반성한다면, 그리고 한국이 일본 정도의 경제적인 수준에 도달하여 “일본 컴플렉스”의 물질적 원인이 없어진다면 한일 양국이 프랑스와 독일처럼 불우한 과거를 잊고 새로운 연대와 연합의 시대를 열 수 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위해서 양쪽의 지식인들이 근대적 국가지상주의적 패러다임의 해체와 인간 위주의 새로운 포용적인, 화쟁적 사관(史觀)의 성립에 노력해야겠지요? 

 

아직도 영하권을 벗어나지 못하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된 책

 

⊙김구,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돌베개, 2002, 207쪽.  

⊙주요한, <안도산전>, 삼중당, 1975.  

⊙최익현 저​​, <면암집>, 민족문화추진회 편, 솔, 1997, 제1권,  

⊙안병직 편, <한용운>, 한길사, 1979.  

⊙권태억, ”근대화, 동화, 식민지유산”, - <한국사연구> 108. 서울: 한국사연구회, 2000.  

⊙권태억, ”자강운동기 문명개화론의 일본 인식”, - <한국문화> 28. 서울: 서울대 한국문화연구소, 2001. 

⊙Partha Chatterji, Our Modernity, SEPHIS, Rotterdam, 1997.  

⊙Commemorations: The Politics of National Identity, ed. John R. Gillis, Princet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4.  

⊙Gi-Wook Shin and Michael Robinson, eds. Colonial Modernity in Korea. Cambridge, MA: 

      Harvard University Asia Center, 1999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7.미워하며 배워온 일본- 일본관-박노자 생각. 프레시안.2004, 2.  18.



8.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 일본관(觀)-허동현 생각


욕하면서 배우는 이율배반의 일본인식

 

반갑습니다.박노자 교수님 

 

위풍당당한 통신사 행렬을 그린 옛 그림이 말해주듯, 앞선 문물을 뽐내며 전수한 통신사에게 일본은 미개한 야만국에 지나지 않았지요. 1748년 영조 때 일본 통신사로 갔던 조명채(曹命采)가 남긴 기행문 『봉사일본시문견록(奉使日本時聞見錄)』을 보면, 우리 문화에 대한 우월의식과 일본 문화에 대한 모멸감이 곳곳에 짙게 베어 있습니다. 


조명채는 통신사를 맞이하는 일본인 태도를 보고 "왜인(倭人) 선비는 문답하며 필담을 나눌 때 우리를 황화(皇華, 천자의 사신)라 부르니 사모하여 따르는 마음을 알 만하다"며 우월감을 과시했고, 생김새가 다른 일본의 닭을 보고 "짐승이 닮지 않은 것도 오랑캐와 중화가 다른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일본을 야만시했습니다. 

 

조선시대 유교 지식인들은 일본은 왜, 일본의 수도는 왜경, 천황은 왜왕, 관원들은 대차왜(大差倭)ㆍ호행왜(護行倭) 등으로 표현했지요. 이처럼 그들의 눈에 비친 일본인들은 사람이 아닌 "왜의 무리(群倭)"에 불과한 부정적 타자였습니다. 


또한 멀리는 려말선초의 왜구(倭寇)와 임진왜란(1592-1598)으로부터 가깝게는 식민지 지배(1910-1945)에 이르기까지 이 땅의 사람들 눈에 비친 일본은 끊임없이 재부를 약탈하고 생존을 위협하던 적대적 타자이기도 했습니다. 


오늘의 한국인에게 가장 큰 고통을 안겨준 남북분단의 비극도 그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에게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렇기에 일본은 아직도 우리에게 가장 싫어하는 나라로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박노자 선생님이 지적하신 것처럼 한국인이 일본을 증오하는 이유의 하나는 과거사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지 않는 일본 주류사회의 오만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이, 우리의 학교 교육과 언론매체들이 주도해 재생산되는 증오의 기억도 세대를 넘어 한국인들이 일본을 부정적 타자로 보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라고 볼 수 있겠지요. 

 

"원수의 나라에 가는 너는 배반자야." 몇 년 전 교환교수로 일본에 체류 중이던 아빠를 만나러 일본에 온 초등학생 아들이 급우들에게서 들었다고 제게 전한 말입니다. 한국인들은 학교 교육을 통해 일본이 과거에 행한 악행을 누누이 배우기 때문에 그들을 증오하는 마음을 선험적으로 품게 됩니다. 


반면 개화기 이래 한국인들은 일본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본 떠 왔기에 그들을 선망하는 마음도 알게 모르게 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의 우리들은 선험적 지식에서 우러나오는 증오와, 체험을 통해 갖게 된 호감이 충돌ㆍ갈등하는 이율배반적 일본관을 갖고 있는 것이지요.

 

"욕하면서 배운다고 했던가요?" 이스라엘의 민족주인인 시오니즘이 나치즘의 또 다른 얼굴이듯, 식민지는 식민모국을 따라 배우기 마련입니다. 20세기 후반 남한의 권위주의 체제하에서 추진된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는 "일본 따라잡기"의 한 모습이었던 것도 사실이지요. 


"해방후 한국민은 한편으로는 일제의 식민통치를 증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일본을 본 따는 애증상반적 갈등(love-hate conflict) 증세를 무의식중에 표출"시키고 있다는 진단이 설득력을 발휘합니다

(유영익, 「일제 식민통치와 한국의 근대화 문제」, 『한국근현대사론』(일조각, 1992)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개화기에 시동된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 프로젝트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시절 아시아의 변방이었던 일본은 서세동점의 시대를 맞아 "서구의 충격(western impact)"에 발 빠르게 대응해 일본형 국민국가를 이루면서 지역의 중심으로 거듭났지요. 


이후 일본인들의 눈에 조선은 부정적 타자의 이미지로 각인되고 말았지만, 조선 사람들의 눈에 비친 일본의 모습은 역전되기 시작했습니다. 1882년 제3차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박영효(朴泳孝)가 남긴 기행문 『사화기략(使和記略)』의 제목은 이를 잘 말해줍니다. 


이제 일본은 더 이상 왜(倭)로 멸시되는 대상이 아니라 따라 배워야 할 화(和)로 비추이기 시작한 것이지요.

 

나아가 근대 국민국가로 탈바꿈한 일본의 위협, 다시 말해 "일본의 충격"은 세계질서의 변화에 눈 뜬 몇몇 지식인의 뇌리에 일본과 같은 국민국가를 수립해야만 한다는 목표를 심어주었던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은 일의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고 단연히 감행하므로, 잃는 바가 있더라도 국체(國體)를 세울 수 있었다. 청나라 사람들은 낡은 관습에 연연해 허송세월하며 날을 보낸다. 이로써 천하를 보면 이해를 돌아보지 않고 행하는 자가 성공한다." 

 

1881년 근대 국민국가로 거듭난 일본의 문물과 제도를 시찰한 조사시찰단(朝士視察團, 소위 신사유람단)의 어윤중(魚允中, 1848-1896)이 남긴 말이지요. 1880년대 이후 선각한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형 국민국가를 모델로 조선에서도 국민국가를 세우려 했습니다. 


그와 사상적 맥락을 같이한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은 "일본이 동방의 영국 노릇을 하려 하니 우리는 우리나라를 불란서로 만들어야 한다"는 소망을 이루기 위해 1884년 갑신정변을 일으켰었지요. 갑신정변의 근대 기획은 좌절되었고 10년 뒤의 갑오개혁도 물거품이 되어버린 참담한 실패의 역사를 우리는 쓰고 말았습니다.

 

"nation"은 국민으로도 민족으로도 번역됩니다. "국가를 정치적 표현물로 갖는 시민단을 뜻할 때는 '국민'이 되고, 공통의 문화와 역사적 전통을 토대로 영토적인 정치권력을 요구하는 집단을 뜻할 때는 '민족'이 되는 것"이겠지요(최갑수, 「내셔널리즘의 기원과 특성」, 『내셔널리즘 : 과거와 현재』(국제역사학한국위원회, 2003)를 참조했습니다.)

 

결국 조선왕조의 백성이자 대한제국의 신민(臣民)이었던 우리 선조는 자신의 힘으로 국민으로 거듭나지 못했지요. 일본제국의 식민지 국민이자 천황폐하의 신민으로 살 수밖에 없었던 그때 그들은 자기들만의 국민국가의 국민되기를 소망하는 민족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개화기에 태동된 이 땅의 민족주의는 일제 식민통치를 거치며 강력한 "저항 민족주의"로 바뀌었으며, 

이를 무기로 해방 후 한국인들은 일본 "따라잡기"를 시도할 욕망을 품게 되었던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개화기 선각들의 국민국가와 국민 만들기 노력은 과소평가되어서는 곤란하다고 보기에 헨리 임이나 신기욱 같은 재미학자들과 견해를 달리 합니다. 


 

야누스의 두 얼굴, 저항적 민족주의와 패배적 민족주의

 

박노자 선생님 말씀대로 침략과 학살의 아픈 기억과 상처를 남긴 러시아와 미국의 악행에 대해 우리는 일본처럼 지속적으로 증오하거나 문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또한 베트남전쟁에서 범한, 이라크전쟁에서 일어날 소지가 큰 "밖"에 대한 가해에 침묵하거나 눈을 돌리고 있는 것도 일본에 대해 우리가 꾸준히 제기하고 있는 과거사에 대한 반성 요구에 견줄 때 형평이 맞지 않는 것이지요. 

 

이러한 우리의 대외 인식의 어두운 부분이 일본에게 당한 피해의식에 기인한다는 선생님 진단에 저 또한 생각을 같이 합니다. 


일본이 적대적 타자의 역할을 전담한 때문에 우리들이 러시아와 미국과 같은 제국주의 세력의 야수성에 대해 맹목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우리가 "밖으로부터 받은 골수에 박힌 통념화된 피해의식"이 우리가 행한 "가해"에 대해 무감각하게 만들 수도 있겠지요. 

 

민족주의는 항상 자민족의 우월함을 선전하기 위해 타자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근대 일본의 민족주의는 중국 특히 한국을 부정적인 타자로 삼아 이들에 대한 멸시를 통해 자민족의 우월을 증명하려 했지요. 그러나 피해자인 한국의 민족주의는 그것의 역상으로 지금의 실패를 달래기 위해 고대의 영광을 노래할 수밖에 없었지요. 


가해자인 일본보다 더 긴 "반만년"의 역사를 말하거나 고대 일본의 이곳저곳에 남아 있는 한민족의 자취를 강조함으로써 민족의 영광을 말하려 했지요. 고대사의 영광을 말하는 우리 정신의 깊은 곳에는 근대의 참담한 좌절에 대한 보상심리와 열패감이 꿈틀거리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창씨개명으로 상징되는 민족말살정책과 같은 일제의 폭압에 맞서 한민족의 생존을 지키려 한 일제 하의 저항 민족주의는 당시에는 건강한 민족주의 내지 민족의식이었습니다. 


프란츠 파농이 말했듯이, 제국주의의 침략 아래 민족이란 존재는 이에 맞서 투쟁하는 소수자이기에 이들의 민족주의는 상대적 진보성을 갖는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나 역사의 시공간이 변하면 민족주의의 역할도 바뀌어야 하는 법이겠지요. 산업사회를 이룬 오늘의 한국은 더 이상 침략당하는 제3세계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 하나는 지난 세기가 남긴 숙제인 국민국가 만들기와 이를 넘어선 아시아와 더불어 살기이며, 다른 하나는 국민을 넘어 시민으로 거듭나기가 아닐까 합니다. 


일제시대의 민족이 국민 되기를 소망한 자였다면, 해방 후 우리들은 시민 되기를 꿈꾼 국민이겠지요. 변화하는 현재에 맞춰 역사를 재해석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일 터. 오늘의 과제를 직시하며 시효가 지난 저항민족주의가 초래한 폐단을 곱씹어 보겠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일본만이 아닌 주변의 야수들―중국ㆍ러시아ㆍ미국―에게 받은 가해의 아픈 상처는 우리의 기억 속에 큰 상처를 남겼고 이것이 현재 우리의 정신을 병들게 하고 있다고 봅니다. 저항 민족주의는 마치 야누스와 같이 패배적 민족주의라는 또 하나의 숨은 얼굴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양키", "쪽발이", "돼놈", "로스케". 우리 주변의 강자들을 낮추어 부르는 비칭들이지요. "베트남 사람" "방글라데시 사람", "몽골 사람", "티베트 사람". 우리에 비해 상대적 약자들의 호칭은 편안합니다. 

그러나 강자와 약자에 대한 현실적 대접은 역전되는 것이 오늘 우리 사회의 현주소입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격언이 새삼 가슴에 와 닿습니다. 뼈아픈 과거사의 소산으로 우리는 주위의 4대 강국에 동포사회를 갖고 있습니다. 고려인, 조선족, 재일동포, 재미동포. 


우리 밖의 또 다른 우리에 대한 서열화된 차별대우를 보며 우리 민족주의의 편협성을 넘어 시대에 맞는 건강성을 다시 얻기 위해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할 때인 것 같습니다.

 

국가, 민족, 인종, 계급, 성차(젠더)를 둘러싼 모든 사회적 울타리를 넘어 나와 생각과 이해와 처지가 다른 타자들과 연대하고 공존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시민사회에 기반을 둔 새로운 민족의식의 창출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책무가 아닐까 합니다. 


베트남에서 온 산업연수생들의 한국어 교재에서 "우리도 사람이예요. 함부로 때리면 안 돼요"란 표현이 사라질 날이 오길 기다릴 뿐입니다(『한겨레』 2002년 11월 26일자 보도를 참조하세요). 



식민지의 아픔만이 우리를 하나의 민족으로 상상하게 하였을까?

 

통치의 대상이었던 민중들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역설을 이룬 프랑스에서는 왕과 귀족이 사라지고 민중들이 국민으로 거듭날 수 있었지요. 그러나 "천황대권(天皇大權)"을 규정한 일본의 "명치헌법"에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자각한 시민사회의 형성을 찾아보기 어려운 일본이나 이를 거울로 삼은 우리에게 "민족" 이나 "민족주의"는 "상상의 공동체"라는 상징기제를 이용한 위로부터의 의도적인 "국민 만들기"일 수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의 지적처럼, "사족과 상한과 노복과 백정의 자신을 구별하지 않고 다 같이 태생적으로 열등한 통치의 대상물"로 다룬 일제의 "민족적 분류법"이 양반과 상한을 "상상의 공동체"로서 하나의 민족으로 묶는 통합적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 즉 식민지의 아픔만이 우리를 "민족"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식민지의 민중이 "착취와 억압의 대상"에 머무른 우민이었다고 보지 않으며, 그들이 "민족"이란 공동체 의식을 갖게 된 것이 양반과 상인을 구별하지 않은 일제 지배정책의 우연한 선물이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백성, 신민(臣民), 민중은 타율과 동원의 대상에 불과한 우민이었을까요? 

기생의 딸 춘향과 일급양반의 아들 이몽룡의 자유연애를 다룬 『춘향전』과 박지원의 소설 『양반전』이 웅변하듯, 18세기 이래 우리 사회에서는 평등주의를 지향하는 자생적 노력이 있어 왔습니다. 

이러한 평등주의적 사회변화의 추세는 사노비의 해방을 선언한 갑오경장(1894년) 이후 가속화되는 추세였지요. 


그러나 민족 분열정책을 통치수단으로 택한 일제의 지배정책으로 인해 양반지주의 사회ㆍ경제적 지위가 철저하게 보장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세는 1930년대까지 저지당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이후 조선 신분제 사회의 주변인들이었던 중인과 향리, 그리고 천민계층의 백정들의 사회적 상향이 눈에 띠게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이러한 추세는 식민지 공업화의 진전과 외연을 양반층 밖으로 넓힌 일제의 친일파 포섭정책이 주효한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박노자 선생님 말씀대로 우리에게서 신분에 대한 기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6.25전쟁에 힘입은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민족이동으로 인한 동족부락의 파괴와 익명성이 보장되는 도시화의 진전이 전근대적 신분 차별을 없애는 데 한 몫을 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전통시대 특권신분층을 지칭하던 양반이란 호칭이 제3인칭 대명사로 바뀐, 모두가 양반이 된 오늘의 우리사회를 만든 동력의 주된 요인은 조선 사람들의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평등사회 건설 노력에서 찾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봅니다. 


그래야만 해방 후 이승만정권의 문민독재와 박정희ㆍ전두환ㆍ노태우 정권의 군부독재에 맞서 시민사회를 일구어 낸 우리 시민사회의 역동성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양반과 백정이 사라진 오늘의 우리 시민사회에 비해 한 때 우리 근대의 거울이었던 일본에 남아있는 3백만명을 헤아리는 부라쿠(部落)민의 존재가 이를 역설한다고 봅니다. 


일본에서는 1871년에 에타(穢多)와 히닌(非人) 같은 천민이 평민으로 해방되고 평민과 화족ㆍ사족의 결혼이 허용되는 등 이른바 사민평등이 이루어졌다고 선언되었지만, 오늘날도 일본사회에는 여전히 천민의 후손들이 사회적 차별을 당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는 다음의 신문보도에 잘 나타납니다. 

 

"부라쿠 해방동맹은 12만여명이 가입해 있는 인권단체. 다니모토 아키노부(谷元昭信) 부라쿠 해방동맹 중앙본부 중앙서기차장은 '19세기 후반 메이지(明治)정부 수립 후 신분차별 제도가 없어져 모두 평민이 됐지만 차별 의식·가문 중시 문화가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고, 법의 허점도 커 여전히 많은 문제를 낳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신분제도 철폐 후에도 호적에는 과거 신분·출신지역 등이 적혀 있고, 누구나 남의 호적을 열람할 수 있어 많은 개인·기업이 결혼·신입사원 채용 때 흥신소·사설탐정 등을 시켜 상대방의 신분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다니모토 차장은 '부라쿠 지역을 떠나고, 호적상 출신지를 바꿔도 호적에 원적지가 남아 있기 때문에 갓 태어난 아기도 원적지와 「부라쿠 지명 총감」을 비교하면 부라쿠 출신임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부라쿠 지명 총감」에 적힌 6천여곳의 후손은 3백만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중앙일보』 2004년 3월 11일자) 


 

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박노자 선생님께서는 한국 근대를 일본 근대의 강간으로 인해 세상에 나오게 된 사생아로 보시는군요. 

물론 한국의 근현대사를 일제와 미제의 강간으로 일그러진 모습으로 비추일 수도 있습니다. 


카터 에케트(Carter Eckert)의 <Offspring of Empire(Univ of Washington Press, 1996)>―통상 "제국의 후예"로 번역되나 "offspring"의 정확한 의미는 "후예"나 "사생아"라기보다는 "아비가 인지하지 않는 자식"이라는 의미가 더 정확한 것이겠지요―이나, 

브루스 커밍스의 <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에 보이는 바와 같이, 


오늘의 한국이 이룩한 경제적 성공은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중심의 세계체제에 기생해 종속적으로 성장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요. 

 

물론 일본 근대는 우리 근대의 거울이었기에,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을 부정할 수만은 없겠지요. 

전체주의와 미성숙한 시민사회로 특징지어지는 일본 근대를 모방한 우리 근대의 난맥상―개발독재와 친일세력의 미청산 등―을 옹호하거나 미화하려는 생각은 저 역시 없습니다. 


허나 이처럼 한국 근대의 식민지적 기원만을 주목할 때, 우리의 근현대사는 일제와 미제에 의해 종속적이고 타율적이며 기생적으로 전개된 타율과 종속의 역사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흡하긴 하지만 개발독재를 자력으로 극복한 현존하는 한국 시민사회의 성장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저는 물론 외생적 요소가 오늘의 우리를 이루는 데 큰 몫을 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정치적으로 시민사회를 일구고 경제적으로 산업화를 이루기까지, 개발독재와 맞서 싸우고 묵묵히 일한 우리 민중 아니 시민들이 뿌린 땀과 희생을 정당히 평가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박노자 선생님께서 지적하신 일본 근대의 사생아인 전체주의의 유산, 배타적 민족주의, 패배적 민족주의를 넘어 세계와 더불어 살아갈 건강한 민족의식 아니 시민의식을 기르기 위해서는 열패감을 넘어 우리 자신을 긍정할 수 있는 자긍―자만과 준별되는―의 역사의식도 필요하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탈근대만을 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 

 

민족주의는 사회적 강자를 위해 소수자와 약자를 희생하는 허위의식일 수도 있습니다. 박노자 선생님 지적처럼 민족주의는 국민국가의 희생양들에게 모순에 가득 찬 현실의 사회관계와 계급적 모순을 감추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기능합니다. 식민지 시대 여성들은 식민주의와 민족주의 양날의 칼에 찔린 피해자였습니다. 


근대 만들기란 거대 담론은 양심적 병역 거부자와 같은 소수자와 여성과 같은 약자에게는 억압과 약탈의 기제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저 역시 그 동안 간과되었던 개인의 발견과 젠더와 환경 같은 상대적으로 조그만 문제들에 관한 미시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데 생각을 같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서구 국가들이 두 세기 전에, 그리고 일본이 한 세기 전에 달성한 근대 국민국가의 수립을 아직도 미완의 과제로 떠안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역사의 특수성에서 비롯된 지체로 인해 우리는 근대 이후의 문제와 더불어 근대의 완성도 꾀해야만 하는 이중의 책무가 우리의 위에 놓여져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고 민족과 국가의 통합작업을 완수해야 하고, 진정한 시민사회를 구현해야 하며, 세계와 더불어 살기를 도모해야만 한다고 봅니다. 국민국가의 완성이라는 근대과제와 약자와 타자와 더불어 살기라는 탈근대 과제를 함께 추구해야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는 우리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연대와 공존의 새 시대를 바라며 

 

한국은 왜 일본을 따라 배우면서도 고마워하지 않고, 일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 독일처럼 진솔하게 반성하지 않을까요? 한ㆍ일 두 나라도 독일과 프랑스처럼 해묵은 갈등과 반목을 넘어 화해와 연대의 새 시대를 열 수는 없을까요? 


독일과 프랑스의 사례 외에도 우리와 처지가 비슷한 약소국 핀란드의 경험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를 줍니다. 핀란드는 1293년에 스웨덴 왕국에, 1809년에는 러시아에 합병되었다가 1917년 제정 러시아가 무너지는 틈에 독립하였습니다. 


이후 핀란드는 스탈린 시대의 소련과는 힘겨운 전쟁을 치러 주권을 지켰으며, 냉전의 와중에서 동ㆍ서 양 진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균형 잡힌 중립정책을 펼쳐 번영을 일구어 왔습니다. 

 

작년 겨울 헬싱키대학에서 열렸던 학술회의 기억나시지요. 그 때 저는 헬싱키 시내 한 복판에서 마주친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II, 1818~1881)의 동상에 놀라고, 스웨덴어가 핀란드어와 나란히 공용어로 쓰이는 것을 보고 다시 한번 충격을 받았습니다. 


마치 서울 한 복판에 메이지 천황의 동상이 서있고 일본어가 우리말과 함께 국어의 지위를 누리는 것이나 진배없으니 말입니다. 한국과 핀란드가 한때 자기 나라를 지배한 식민모국들에게 대접하는 바가 어찌 이리도 다를까요. 

 

속사정을 들어보니 우리들이 핀란드 사람들보다 속이 좁아서인 것만은 아닌 것 같더군요. 알렉산드르 2세의 동상은 러시아에도 없던 의회를 식민지에 허용해 자치권을 보장해 준데 대한 감사이자 그의 아들의 폭정에 대한 항의 표시로 세워진 것이며, 


스웨덴어에 주어진 공용어로서의 지위도 스탈린 시대 소련과 맞서 싸울 때 수십만의 핀란드 아이들을 맡아 돌보아 준 스웨덴 시민들의 배려에 대한 보답이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일본의 지도자 중 어느 누구의 동상도 서울에서 찾아 볼 수 없고 일본이 한국의 근대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가 자명해지지 않습니까? 

 

일본은 서세동점(西勢東漸)의 시기 동아시아에서 영국과 미국의 이익을 지켜주는 "집 지키는 개(番犬)" 노릇을 한 덕에 한국을 식민지로 삼았고, 어떤 제국주의 나라에 비해서도 철두철미하게 자국의 이익을 위주로 "혹독하고, 조직적이며, 강제 동원적인 식민통치"를 펼쳤습니다. 


그렇기에 일본 덕에 근대화되었다는 말에 공감하는 한국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우리들의 편협함 때문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현대 한국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상처를 준 남북분단과 동족상잔의 6.25전쟁에도 일본이 져야할 책임의 몫이 크며, 전후 일본의 부흥도 6.25전쟁 특수, 즉 조선의 아픔을 딛고 섰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재일동포를 대하는 일본의 태도를 볼 때 그들이 존중받을 만한 선진국이라고 느낄 수 없게 만들더군요. 

 

한국인은 프랑스가 독일에게서 받은 것처럼 아직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일본의 사과를 받아 본 적이 없습니다. 사정이 이러하니 한국 사람들이 품은 적개심은 독일과 달리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오만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독일이 프랑스에게 과거의 잘못을 반성하고, 알렉산드르 2세가 핀란드의 자치를 보장한 이면에는 그들보다 먼저 시민사회를 이룬 선진 프랑스와 핀란드에 대한 열등의식과 수치심도 작용했으리라고 봅니다. 

사실 독일도 비서구 국가에 대해 저지른 과거의 악행에 대해서는 사죄한 적이 없으니 말이지요. 

 

그러니 일본이 반성하지 않는 것도 그들의 탓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프랑스나 핀란드가 그들의 점령자에게 충분히 존중받을 만한 대상이었던 데 비해 한 때 일본의 스승이었던 우리들은 그렇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우리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문화가 동류(東流)하던 옛 시절의 영광만을 자랑하며, 오늘날 일본인들에게 "유의미한 타자"로 거듭나기를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한다면, 우리는 결코 일본사람들과 당당히 연대하고 협력하는 새 시대를 열지 못할 것입니다.



봄이 다가오는 수원의 연구실에서... 

허동현 드림 

 


도움이 된 책

 

⊙강만길. 『21세기사의 서론은 어떻게 쓸 것인가』. 삼인, 1999. 

⊙권용립 등. 『우리 안의 이분법』. 생각의 나무, 2004. 

⊙사까이 나오끼 저, 이규수 역. 『국민주의의 포에이시스』. 창비, 2003. 

⊙야마무로 신이찌 저, 임성모 역. 『여럿이며 하나인 아시아』. 창비, 2003. 

⊙왕후이 저, 이욱연 외 역. 『새로운 아시아를 상상한다』. 창비, 2003. 

⊙유영익. 『한국근현대연구』. 일조각, 1992. 

⊙윤건차 저, 이지원 역,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 문화과학사, 2003.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8.우리 근대는 일본 근대의 사생아일까? - 일본관-허동현 생각. 프레시안.2004,  3.  12.




9,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 - 러시아관(觀)-박노자 생각


“천하 제일의 약탈자 호랑이 러시아”

 

허동현 교수님,  그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러시아”라는 말을 꺼내면 한국인에게 보통 연상되는 것은 무엇인가요? 단순화시켜서 이야기하자면 구한말의 지배층에게는 “러시아”가 무엇보다도 “강병의 국가”, “강한 국가”로 인식됐습니다. 


친러적 성향의 인물들이 그 “강함”을 이용하려고 하기도 했고, 반러적 성향의 인물들이 “호랑이와 살쾡이”의 나라 러시아의 “침략성”을 경계, 성토했지만 공통 분모는 그 “강함”의 사실을 인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천하 제일의 약탈자 호랑이 러시아”에 대한 최초의 경보를 내보낸 것은 물론 그 유명한 1880년의 <조선책략>이었지만, 그 후에는 조선의 최초의 근대적 매체인 <한성순보> (1883-1884)와 <한성주보> (1886-1888)는 러시아의 “호전성”과 “강성함”에 대한 중국, 일본 계통의 정보를 계속 그 주된 독자층인 경향의 관료, 지주들에게 전해 주고 있었습니다. 


 

한성순보                                                       한성주보


이미 <한성순보>는 러시아의 징병제를 분석하여 러시아의 병력수가 2백43만 명에 이른다는 – 그 당시의 조선 당로자들이 듣기에는 다소 충격적인 – 이야기를 내보냈지만(1884년 5월 11일), <한성주보>는 “강력하고 야수적인 러시아”를 훨씬 더 가시적인 존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한성주보>의 러시아 관련의 이야기를 분석해 보면, 동향 파악은 꼭 잘못된 것은 아니었지만, 역시 정보가 유럽과 일본 내지 중국 매체 –즉, 이중삼중의 번역과 전달의 과정 - 를 거쳐 들어온 만큼 과장과 오보가 태심했습니다. 

예컨대, <한성주보> 초기의 다음과 같은 기사는 어떨까요: 

 

“러시아 수도의 어느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러시아는 반드시 몽골의 우르가(克而及 – 현재 울란바토르라는 몽골의 중심지) 지방을 점거하여 형세를 도와야 한다고 여러 차례에 논급하였다. (…) 

국가를 소유한 자는 덕(德)에 있는 것이지 영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니 진실로 덕을 펴서 인 (仁)을 행하여 먼 곳 사람들이 기꺼이 복종한다면 영토 개척을 일삼지 않아도 국세는 날로 확장될 것이다. 

그런데 그 러시아 신문이 무례한 이야기를 공언한다는 것은 스스로 분수를 몰랐다고 하겠다.  

또 몽골의 우쑤리 (Ussuri) 강과 캐룰렌 (Kerulen)강은 모두 흑룡강 근처에 있는데, 이 두 하천 지역에는 본래부터 사금(砂金)이 생산된다. 수개월 전에 어떤 사람이 그 곳에서 금광을 개설하여 매우 번창했는데, 러시아인과 서양인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사금을 채굴하였고, 중국인 역시 이 소식을 듣고 와서 채취하였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 정부에서 병사를 파견하여 그 곳을 지키며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하고 있으니 러시아인이 이익을 독점하는 것이 이와 같다 (…)”(“俄事近耗”, - <한성주보>, 제29호, 1886년 9월 20일, 외보란). 

 

신문이 제시한 전거는 중국의 유명한 선구적 근대 신문 <호보>(滬報)인데, 아마도 이 이야기가 중국 신문에 들어가기 전에 몇 차례에 유럽과 일본 매체의 번역, 전달 과정을 거쳐 이 과정에서 못 알아볼 정도로 변모한 셈입니다. 


물론 원동(遠東) 지방에서의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침략의 일차적 방향이 바로 몽골이라는 전체적인 동향은 여기에서 올바르게 포착됐으며, 러시아의 중앙아시아 식민화가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러시아의 침략성에 대한 우려도 이해할 만합니다. 


제2차 아편전쟁으로 약해진 청나라의 어려움을 이용한 러시아가 이미 1862년에 외몽고에서의 무(無)관세 무역권(權) 등의 이권을 챙기는 등 몽골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일찌감치 나타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청나라가 멀쩡히 엄존했던 1880년대 중반의 상황에서는, 러시아가 몽골을 “점거”한다든가 그 쪽 이권을 “독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허구에 가까운 과장이었습니다. 


허동현 교수님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청나라가 1911-12년의 혁명으로 망하고 나서야 자주권을 얻은 외몽골이 명실공히 러시아의 영향권에 들어간 것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러시아 군대가 그 지역을 “점거”한 일까지는 없었지요. 


즉, 러시아에 대한 직접적이고 확실한 정보를 얻을 길이 없었던 <한성주보>는, 중국 신문의 허구성이 심한 보도를 진실로 취급한 셈이지요. 이중삼중의 정보 유통의 모순점, 즉 정보의 측면에서의 그 당시 조선의 극단적인 대(對)중국, 대(對)일본 종속성의 문제점은 여실히 드러나는 대목이 아닙니까?

 


중국ㆍ일본측 정보에의 극단적 의존-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외 정보 

 

마침 <한성주보>의 이야기를 꺼냈으니 그 신문의 러시아 관련의 또 하나의 기사를 인용해 봅시다:

 

“(…) 중국으로서 프랑스, 일본보다도 가장 지체할 수 없는 나라는 러시아이다. (…) 

러시아는 아시아와 유럽 양(兩)대주의 북쪽에 점거하고 있으면서 바다를 건너 아메리카의 서북 모퉁이도 점거하고 있으므로 북빙양을 중심으로 고래처럼 둘러 있다. (…) 

유럽의 책에 의거하면 그 나라의 백성은 4천1백만 명이고 (…) [현역] 군사의 총수는 60만 명인데, 전시에는 1백여만 명까지 증원할 수 있으니 참으로 강대한 나라라고 할 만하다. (…) 

러시아 서울인 상트-페테르부르그에서 중국의 변경까지 그 거리가 수천여 리로서 (…) 산 건너 물 건너 달려가자면 수개월이 걸리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바닷길을 이용해서 군대를 보낸다 해도 (…) 

길이 너무 멀어서 연료도 떨어지지 않게 취득해 낼 수가 없다. (…) 

그래서 지금까지는 중국 변경의 방비는 튼튼했지만, 러시아에는 드디어 러시아 서울로부터 훈춘(琿春)까지 철로를 가설하자고 권하는 사람이 나왔으니 만약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우리 중국의 문호를 어떻게 지키겠는가? (…) 

유럽의 각국을 규합하여 (…) [반러시아적] 동맹을 맺고 이 동맹국 가운데 러시아에 약간의 땅이라도 양보하는 나라가 생긴다면 그 나라를 용서 없이 공격해야 한다. (…) 유럽 각국은 중국을 위한 계책을 세우지 않더라도 어찌 자기 나라를 위한 계책을 세워 이 동맹에 기꺼이 참가하지 않겠는가? (…)”

(”防俄芻言”, - 제67호, 1887년 6월 13일자 외보란). 

 

역시 중국의 <신보>(申報)의 자료를 전재한 이 기사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의 가설 계획이 바로 원동 지역에서의 침략을 하나의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파악한 셈입니다. 그러나 과연 그 당시의 러시아는 정말로 모든 유럽 국가들이 오늘날의 나토(NATO)를 방불케 하는 ”방(防)러 동맹”을 맺을 만큼 강대하고 위협적인 나라이었을까요? 


이 기사가 러시아의 ”아메리카 서북 모퉁이 점거”를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러시아는 18세기 후반부터 점거해 왔던 알래스카(Alaska) 반도를 이미 1867년에 미국에 헐값에 팔아 버렸습니다(알래스카 석유 매장량, 그리고 차후 석유의 가치에 대해서 알았다면 과연 그렇게 했을까요?). 


러시아와 영국은 중앙아시아나 발칸에서의 제국주의적 경쟁에 휘말린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당시의 영국으로서 러시아보다는 신흥 산업 대국 독일은 훨씬 더 위협적인 존재이었습니다. 즉, 이 ”방러 동맹”의 계획은 말 그대로 세계에 대한 정보 부족과 분석 미숙성의 결실이었던 셈입니다. 


그러면서도 재미있게도 러시아 인구의 통계는 실제 숫자 (대략 1억1천만 명)보다 약 2배 이상 적게 4천1백만 명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부실하기 짝이 없는 대외 정보를 근거로 삼아 세계 정세에 대한 결정을 내려야 했던 그 당시의 조선 당국자들은, 과연 균형 잡히고 장기적인 안목에 입각한 정책을 입안, 결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지금은 나아졌나-전 체첸 지도자 얀다르비예프 암살의 경우

 

여담이지만, 러시아와 같은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의 중심으로부터 약간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에 대한 정보는, 러시아어에 능통한 한국의 특파원들이 현지에 직접 가서 정보를 수집할 수 있는 오늘날에는 120년 전보다 질적으로 과연 어느 정도 개선됐는가요? 


물론 영토나 인구 수치에 대한 그 때와 같은 웃지 못할 오류를, 오늘의 한국 신문들은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보 수집의 포괄성이나 분석의 깊이나 독자성 등의 측면에서는, 지금만해도 너무나 뚜렷한 한계가 보입니다. 

 

예컨대 지난 2월 13일에 중동의 작은 나라 카타르의 수도 도하에서 체첸공화국의 전 대통령인 얀다르비예프라는 시인이자 체첸 독립운동의 이념가가 차량 폭발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는데, 이와 같은 ”사고”의 배후에 있는 것은 바로 KGB 출신의 러시아의 통치자 푸틴의 KGB 계통의 선후배들이 있었다는 것은 체첸 독립운동, 그리고 적지 않은 수의 서방 관찰자들의 판단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사건이 벌어진 뒤에 카타르에서 배후 조정의 혐의로 러시아 대사관의 2명의 ”비(非)외교 계통의 직원”(즉, 보안 기관 요원)이 경찰에 잡히는 사태까지 벌어졌습니다. 


확증이야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체첸 전쟁을 최고의 인기몰이 수단으로 이용해 온 푸틴의 ”살육 정치”의 맥락으로 본다면 ”러시아 안보기관 배후설”은 가장 유력시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불온 분자”에 대한 무제한적 폭력을 주된 바탕으로 삼는 요즘의 러시아의 ”현대판 군국주의”의 진짜 모습을 잘 보여 주는 이 사건에 대한 국내 보도는 과연 어느 정도이었습니까? KBS 등은 ”러시아 배후 조정의 가능성”을 언급하되 이 문제와 관련시켜 러시아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들을 논의한 적이 없었는데, 신문들도 마찬가지이었습니다. 


<한겨레>는 간단하게나마 ”러, 납치, 암살 정치 흉흉”(2004년 2월 16일)이라는 기사를 내보내 곧 다가올 러시아 대선과 카타르에서의 암살을 연결시켰는데, 역시 이 문제에 대해서 상론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한국의 가까운 이웃인 러시아가 요즘 국외에서의 국가 범죄(즉, 정보 기관에 의한 체첸 독립운동가 암살)를 거침 없이 저지르고 있을 정도로 이미 야수적인 모습으로 복귀됐다는 것은 과연 한국과 무관한 일일까요? 


이 문제에 대한 분석과 토론의 부재는 러시아의 눈치를 보고 있는 외무부의 신문에 대한 ”압력”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순한 정보 수집, 분석 능력의 한계로 여겨야 하는지 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한국에서의 러시아 관련의 공공적 논의는 지금도 결코 만족스러울 만한 수준에 도달한 것은 아닙니다. 

 

러시아를 이용하려는 “인아” (引俄) 정책을 실현하려 하였던 고종의 측근 이용익 (李容翊)과 같은 친러적 인물들의 경우에는, 러시아가 “최강의 군대”를 보유하여 일본의 위협으로부터 조선을 보호해줄 수 있다는 것은 세계 인식의 골자이었습니다. 


그러나, 1897년 3월부터 고종을 압박하여 노골적인 간섭 정책을 펴기 시작한 러시아에 저항하여 나선 친미적 개혁가 서재필, 윤치호도 러시아의 “강성함”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독립신문>에서 게재된 러시아 관련 논설들을 보면, 러시아가 산업 개발이 저조한 농업 국가인 만큼 오히려 곡물 수입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 적국들이 봉쇄해봐야 소용이 없는, 국제 무대에서 다른 열강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독자 행동을 할 수 있는 강대국이다(영문판, 1897년 11월 23일)라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고, 러시아 군대의 전투력에 대한 찬사들이 연발되기도 합니다. 

 

통찰력이 뛰어난 윤치호가 1896년에 민영환(1861-1905) 사절단의 일원으로 러시아를 방문할 때 “그 나라의 공장에서 설치된 좋은 기계들이 거의 다 서구나 미국제다”라는 사실 – 즉, 러시아가 서방 선진국에 비해서 기술 발전이 훨씬 느렸던 사실 –을 눈치챘음에도, 러시아의 군사력을 계속 높이 평가했습니다. 


 

        민충정공유고(閔忠正公遺稿)    /                                 천일책(千一策), 민충정공유고 卷二



윤치호를 통역으로 데리고 러시아에 간 민영환도, 그의 유명한 외교 시무책 <천일책>(千一策)에서, 이와 같은 그 당시의 통상적인 러시아관(觀)을 극명하게 보여 주었습니다: 

 

“러시아의 강함은 천하에서 무적입니다. 그들의 영토는 30여 만리이며, 육군은 66여 만 명이며, 군함은 368척입니다. 천하의 동북, 서북 지역을 통제하고 그 험악한 지세의 이점을 살리면서 만국을 호시탐탐하여 병탄의 뜻을 가집니다. (…) 

[피터 대제 이후의 역대의 러시아 황제들이] 폴란드를 멸하고 터키를 침략하고 중앙아시아를 공략하고 유럽 여러 나라의 일에 간섭했습니다 (…) 

그들의 군함이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정박하고 흑룡강 철도가 부설된 것은 말하자면 한 새의 왼쪽 날개가 준비된 셈인데, 만약 오른쪽 날개라 할 만한 시베리아 횡단 철도까지 완성된다면 동아시아를 심각하게 핍박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그 손아귀에 놓이지 않겠습니까? 

특히 우리의 동쪽 나라는 바로 그 충돌의 길에 있기에 맨 먼저 그들의 마수를 당할 것입니다. 타국과 비교될 바도 못됩니다. 설령 우리를 도와 줄 외세가 있더라도 어찌 내수 (內修)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내수의 방략을 불가불 준비해야 합니다“(<閔忠正公遺稿 卷二>)


 

당대 제일의 외국통 민영환의 피상적 세계인식

 

민영환이 제시한 징병제 실시나 학교 진흥, 민심 안정 등의 “내수책”이야 매우 합리적으로 보이지만, 러시아를 

“천하 무적”으로 여겼던 그의 텍스트를 읽으면 민씨 척족 중에서 “제일의 외국통”으로 알려졌던 그마저도 얼마나 피상적인 세계 지식을 가졌는지를 여실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니, 그 당시 러시아의 졸병 중에서 절반 정도가 글을 해독하지 못하는 문맹자이었다는 사실(독일의 병졸 중에 이미 문맹자란 거의 없었습니다!)이나 1897년에 러시아의 전체 인구에서 도시 인구가 11%밖에 안 됐던 사실(영국은 80%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일인당 국민 소득은 40달러도 안 됐던 사실(미국은 350달러를 넘었습니다!) 


등의 러시아의 극단적인 경제적, 사회적 취약함을 보여 주는 기본적인 통계조차도, 한국의 최고 외교관 중의 한 사람에게 알려져 있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19세기말 러시아 실정 관련 통계를, Blackwell W., <Russian Economic Development from Peter the Great to Stalin>, N. -Y., 1974, p. 161-196에서 참고하시기를 바랍니다). 

 

러시아가 최다수의 육군을 가졌지만, 대형 대포나 최첨단 무기 등의 생산, 그리고 군함 제조 등의 측면에서는 유럽의 어느 열강과도 “게임이 안 될” 정도로 취약한 산업 구조의 탓으로 영, 불, 독 등의 유럽 열강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능력을 결여했습니다. 


러시아나 일본과 같은 “아류 급” 제국주의적 야수를 놓고 볼 때 세계의 헤게모니를 잡고 있었던 영국과의 중앙아시아에서의 식민지 쟁탈 경쟁을 벌여 영국의 견제 대상이 된 러시아보다, 영국과 친밀해져 가는 데다가 러시아보다 훨씬 더 급진적인 서구화 정책을 채택한 일본이 한국에 더 큰 위협이 된다는 것은 과연 상식적인 판단은 아니었겠습니까? 

 

물론 1900년도의 의화단 투쟁을 핑계로 삼은 러시아의 만주 점령과 그 후의 지속적인 철병 지연과 같은 니콜라이 2세 정권의 모험주의적인 침략적 노선은 고종 정권과 경향의 유지들의 경각심을 일으키기에는 충분했겠지만, 이 모험의 승산이 낮은 사실을 러시아의 부실한 내정이나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 등을 잘 아는 그 당시의 상당수의 관찰자들이 명확히 예측하고 있었습니다. 

 

불행하게도 러시아의 “강대함”을 거의 맹신하다시피 한 한국의 지배층은, 러-일 전쟁에서의 일본의 승리의 결과로 닥쳐 온 일본의 침략과 보호국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러시아의 참패를 예측할 수 있었다 하더라도, 중앙 정부의 명령이 이미 지방에서 제대로 실시되지 못했던, 매관매직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고 내장원의 재정이 국고를 압도할 정도로 황실의 독식이 태심했던, 그리고 그나마 있었던 군대마저도 화적보다 민폐가 더 심각하다는 비판을 받을 정도로(<황성신문>, 1903년 4월 11일) 


관기(官紀)란 바로 서지 못했던 고종 정권하의 대한제국이 과연 어떤 방비를 할 수 있었는가 라는 것은 별도의 질문입니다. "외적보다 민중을 더 두려워했던 고종의 수탈적인 정권에게 이와 같은 저항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일본과 같은 외적의 침략을 방비하기 위해서 민중적인 전력 (全力)전쟁을 전개하여 – 지금 이라크의 독립군이 미군에게 하는 것처럼 – 일본 주둔군의 전력(戰力)을 침략자들이 못 견딜 만큼 소모시켰어야 했는데, 외적보다 민중을 더 두려워했던 고종의 수탈적인 정권에게 이와 같은 저항을 기대할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근대적 무장의 절대적 부족 등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이와 같은 全민중적 저항도 과연 일본의 침략을 막을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의심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차피 러시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만큼 대외 정보력이란 매우 취약했던 구한말 지배층의 “정보적 한계성”은 대한제국의 패배에 한몫을 했다고 봐야겠습니다. 외세에 대한 철저한 정보 수집과 분석이 국가의 운명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우리에게 잘 이야기해 주는 교훈이라 봐야겠지요? 

 

러일 전쟁에서의 러시아의 참패는, 구한말의 지배층에게는 예상 밖의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보호국화는 해학(海鶴) 이기(李沂: 1848-1909)나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 등의 여태까지 “백인 침략자 강국 러시아”를 보다 더 경계했던 일부의 독립 지향적인 인사들이 반러에서 반일로 돌아서는 계기가 됐지만, 


친일적 성향의 상당수에게는 일본의 뜻밖의 전승이 “노대국 러시아까지도 이긴 황인종의 유일한 근대 국가” 일본의 한반도 지배가 불가피하거나 “백인 침략으로부터의 방어”하기 위해서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는 중요한 계기이기도 했었습니다. 

 

인종주의란 그 당시 구미 세계의 “근대성의 핵심 담론” 중의 하나이었던 만큼 놀랄 일이 안 되지만, “황인종과 백인종의 생존권 전쟁”이라는 일본 아시아주의자들의 세계 인식의 구도가 개화기 후기의 한국의 “신지식인”들에게는 우리 상상 이상으로 그야말로 지적인 “히트 상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러시아가 “황인종에 대한 위협”이라는 기호로 계속 기능해도, 그 기호는 1895-1904년간의 시기만큼은 경계심을 일으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전근대적인 지주층의 대토지 소유에 대한 농민의 커가는 분노에다가 근대적 식자층과 무산계층의 거세져 가는 반발이 가세돼 제정 정권의 기반이 파괴돼 가는 당대 러시아의 실정을 이해하지 못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이 1904년 이전에 “강국 러시아”​의 대한 환상에 잠겨 있다가 그 환상이 깨진 뒤에 러시아에 대한 관심을 많이 잃었습니다. 

 

물론 톨스토이와 같은 그 당시의 최고급의 러시아 문호에 대한 관심이야 구한말 후기나 식민지 시대 초기에 지속됐지만, 톨스토이가 이미 유럽과 미국 등의 “문명의 중심지”에서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는 것은 그 관심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이유이었습니다. 


사실, 톨스토이를 존숭했던 최남선과 같은 대표적인 젊은 지식인들은 그 작품들을 주로 일본어나 영어로 읽었습니다. 세계 체제의 한 준(準)변방 (러시아)의 문화가 또 다른 변방 (조선)으로 이식될 때 꼭 세계적 중심부나 지역적 중심부의 언어(영어 내지 일어)라는 “중심적” 매개를 거쳐야 한다는 것은, 과연 세계 체제 안에서의 문화적, 정보적 예속 관계의 심도를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가 아닙니까? 

 

식민지 시기도 그랬지만, 지금도 세계 중심부의 착취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는 멕시코의 사파티스타와 같은 훌륭한 혁명 운동가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대개 바로 그 중심부의 언어 (영어)를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은 과연 슬픈 아이러니가 아닙니까? 


미제의 문화적 헤게모니와 싸우는 첩경 중의 하나가 바로 세계 “비주류” 언어에 대한 공부가 아닌가 라는 생각이 자주 듭니다. 


 

정보력의 낮은 수준과 종속된 세계관의 내부적 부실

 

1917년에 볼셔비키들이 집권한 뒤에는, 식민지 조선 지식인들에게 다시 한 번 가까이 다가와 “유의미한 타자”가 된 “러시아”가 대개 “혁명”​의 동일어가 됐습니다.

 “적로"(赤露)에 대한 입장의 문제는, 조선의 지성인들을 이미 1920년대 초반부터 양분시키기 시작했습니다. 

 

한편으로, 님 웨일즈가 쓴 소설 '아리랑'의 주인공인 혁명가 김산(본명 張志樂)에게는 소련은 “세계 모든 혁명가들의 어머니”와 같은 존재이었으며, 공산주의를 어느 정도 동감하거나 호의적인 관심의 대상으로 삼았던 상당수의 사회주의 지향적인 지식인들에게는 “신문명 건설의 현장”​(모스크바 주재 특파원 이관용의 기사, <동아일보>, 1925년 5월 23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또 한 편으로는 미국의 여론을 기본적 준거틀로 삼았던 안창호와 같은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자들에게 제정 러시아의 외채를 갚지 않겠다고 선언한 소련이 “도둑놈의 정부”에 불과했으며, 완강한 민족주의자 김구는 국제공산당(코민테른)의 “지휘와 명령”을 조선에 대한 또 하나의 간섭이자 속박으로 이해했습니다.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에 대한 노선의 문제로 민족운동이 분열된 것도 불행한 일이었지만, 좌파와 우파 양쪽에서 소련의 현실에 대한 구체적인 파악도 없이 융통성과 깊이가 결여된 무조건적 긍정과 부정만을 내세웠던 것도 큰 문제이었습니다. 


공산주의를 “야만”과 “위협”만으로 본 우파의 반소련적 분위기가 결국 남한 “주류” 사회의 반공 이데올로기로 계승됐으며, 강제 협동화 정책에 의해서 아사하거나 이농하게 된 수백만 명 농민들을 희생시킨 스탈린의 “5개년 계획”의 “대성공”을 치하만 했던 좌파의 맹목적인 스탈린주의적 편향은 스탈린주의의 망령을 쉽게 벗어나지 못할 남한의 일부 진보적 “운동권”의 비극을 예견하기도 했습니다. 


제정 러시아의 실정에 대한 무지가 그 “강대함”에 대한 비현실적인 환상을 키우듯, 스탈린의 소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의 부족과 교조적인 사고 방식이 스탈린주의에 대한 균형적이지 못한 일방적인 긍정으로 이어졌습니다. 


동구권의 몰락이 스탈린 식의 “병영 사회주의”의 내부적 모순들을 노정했을 때의 진보적 지식인들의 놀라움은, 1904년의 제정 러시아 참패 때의 놀라움과 비슷한 정도이었습니다.

 

러시아에 대한 꿈과 환멸의 역사를 다시 되돌아보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면 어떨까요? 

어떤 외국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 그 외형적인 강약이나 군사력보다도 먼저 그 사회의 내부적 갈등과 모순부터 바로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순의 직시"라는 상대적인 객관성의 필수 조건이 바로 이중삼중의 “세계 체제 중심부를 거친 정보 전달”이 아닌 “현지 정보의 직접 입수”를 요구하는데, 이 부분은 188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말 너무나 취약했습니다. 


중국 신문에서 따 온 <한성순보>와 <한성주보>의 러시아 관련 기사, “주먹구구”식의 민영환 등의 러시아 관련 서술, 주로 일본어로 읽은 1920년대의 레닌주의의 교과서들, 역시 일본어나 영어를 통해서 1980년대에 들어온 “이념 서적”… 중심부 매개체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르는 것이 이미 “인식 실패”의 조건들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까? 

 

1900년대의 제정 러시아나 1980년의 소련이 외형적으로 매우 강해보였지만, 곧 몰락했다는 사실이 정보력의 낮은 수준과 종속된 세계관의 내부적 부실을 드러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서야 러시아 관련 정부의 “직수입”을 위한 여러 조건들이 조성됐는데, 러시아라는 주변 정세의 중요한 변수에 대한 관심 부족과, 푸틴의 개발 독재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독자적인 이론적 틀의 부재는 매우 아쉬운 사실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여쭈어 보고 싶습니다. 러시아의 “강함”이 계속 비현실적으로 평가됐듯이, 오늘의 미국의 “강대함”을 과연 과대평가할 필요가 있을까요? 외형이야 그렇지만, 그 내부적 모순이 이제 곧 드러날 듯한 예감입니다… 


 

도움이 된 책

 

⊙국사편찬위원회 편간, <민충정공 유고 - 민영환 -> (한국사료총서 제7). 서울, 국사편찬위원회, 1958. 

⊙<해천추범>, 을유문화사, 1959 (민영환 사절의 러시아 방문 일기)  

⊙이민원, “민영환의 모스크바 외교와 <천일책>”, <청계사학> 16, 17. 성남,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2002. 

⊙반병률, <성재 이동휘 일대기>, 범우사, 1998.  

⊙도진순 주해, <백범 일지>, 돌베개, 1997.  

⊙권희영, <한국과 러시아: 관계와 변화>, 국학자료원, 1999.  

⊙원재연. “19세기 조선의 러시아 인식과 문호개방론”, <한국문화> 23.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99. 

⊙허동현, “1880년대 한국인들의 러시아 인식 양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2.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 정책>, 신서원, 2002.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9,무지가 빚어낸 비현실적 환상 - 러시아관-박노자 생각. 프레시안.2004,  3.  19.




10.'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 - 러시아관(觀)-허동현 생각


박노자 교수님,  쏜살같이 빠르게 흘러가는 것이 시간인 것 같습니다. 연재를 재개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 

 

박노자 교수님께서는 후발 제국주의 국가 러시아의 취약한 산업구조나 후진적 요소를 들어 러시아의 "강대함"이 허상이었다고 보시는군요. 물론 박 교수님이 지적하신 바와 같이 19세기 조선인들의 러시아 인식은 주로 중국과 일본에서 얻은 정보에 의존한 것이었기에 "이중․삼중으로 번역된" 일그러지고 왜곡된 이미지일 수도 있습니다. 


당대 최고 지식인 윤치호나 외교통 민영환이 그린 "강대국" 러시아의 이미지도 피상적 관찰이라고 일축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강국 러시아는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으니까요. 

그러나 시각을 달리하면 달리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보아 병적으로 무서워 한 공로증(恐露症, Russophobia)이 웅변하듯, 1860년대나 1880년대 아니 1900년대초까지도 러시아는 주변국들에게 강대국으로 비추어졌던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 말입니다. 


당시 중국과 일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러시아의 위협을 우리만 무시했다면 이것도 피상적인 인식이 아니겠습니까? 당시 러시아의 군사력은 중국이나 일본에게는 간과할 수 없는 실체적 위협이었습니다. 


일례로 1895년 러시아가 주도한 삼국간섭으로 청일전쟁으로 확보했다고 믿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내어 놓아야 했던 일본에게 러시아는 결코 만만한 상대는 결코 아니지 않았습니까? 

 

예나 지금이나 러시아는 서구제국에 비해 취약한 산업구조와 생산력을 갖고 있었지만, 멀리는 유럽을 떨게 한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군대를 패퇴시켰으며, 가깝게는 "오만한 제국" 미국을 상대로 맞설 수 있었던 군사적 강국이자 "몰락한" 지금도 최대규모의 핵무기를 보유한 군사대국임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결과를 놓고 볼 때 19세기와 20세기의 최강국은 영국과 미국이었지만, 당시 이들과 자웅을 겨룬 나라가 러시아였던 것도 사실이니 러시아의 "강대함"을 허상이라고 볼 수만은 없는 것 같습니다. 물론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일본에 무릎을 꿇었지만, 러시아의 패전은 당시 일어난 적군과 백군 사이에 벌어진 내전 때문이기도 하며, 일본 승리의 이면에는 전비를 빌려준 미국과 영국의 지원이 있었다는 것도 무시할 수 없는 사실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저는 러시아를 "강대국"으로 보아 러시아에게 모든 것을 건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이 "정보적 한계" 때문에 망국의 길을 걸었다는 데 견해를 달리합니다. 

 

1905년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패배는 대한제국을 무너뜨렸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의 승리는 우리를 남북으로 갈라놓았습니다. 이처럼 러시아의 성쇠(盛衰)는 우리의 운명에 바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다면 미국과 자웅을 겨루던 소련의 붕괴는 오늘 우리에게 어떤 파장을 미칠까요? 


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가로막은 군국주의 일본의 내부모순도 지금 세계를 호령하는 "오만한 제국" 미국보다 덜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보기에 미국이 러시아처럼 약체화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호랑이와의 사냥터 다툼에서 승리한 후 포효하는 사자와 같은 미국은 한 세기 전 러시아의 무릎을 꿇린 일본처럼 우리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것 같은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크게 보아 한 세기 전 한반도를 놓고 중국과 러시아 같은 대륙세력과 일본․영국․미국 같은 해양세력이 벌인 패권 다툼에서, 승리의 여신은 후자의 손을 들어주었지요. 


2차대전 이후 러시아와 중국은 38도선 분할과 6․25전쟁 개입으로 한반도의 절반을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는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결로 게임의 룰을 바꾼 냉전 시대의 쟁패에서도 승리자는 해양세력 쪽이었습니다. 

과연 핵을 방패삼아 미국의 위협을 막아보려는 북한에게 러시아와 중국은 튼튼한 울타리일 수 있을까요? 

 

해양과 대륙세력의 쟁패에서 대륙 세력의 승리 쪽에 판돈을 걸었던 우리 위정자들의 잘못된 선택은 결국 나라의 멸망을 막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러시아의 성쇠가 우리 운명의 바로미터라면, 우리들의 러시아 인식과 정책의 추이를 살펴보는 것도 오늘 우리의 생존전략을 가다듬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일이 될 것 같습니다. 

 


17세기 조선 사람들 눈에 비친 코쟁이의 나라 러시아는 이미 강대국

 

러시아는 우리에게 생면부지의 나라는 아니었습니다. 17세기에 들어와 청나라의 발상지로 신성시되어 출입을 금한 흑룡강 일대의 봉금(封禁) 지대에 러시아 사람들이 사금을 캐고 수달을 잡기 위해 몰려오면서 분쟁이 일어나자 총포로 무장한 러시아인들과 맞서기 위해 청나라는 호랑이 잡는 명포수들로 구성된 조선의 화승총 부대의 출병을 요구했지요. 


이 나선정벌(羅禪征伐, 1654, 1658)이 조선인들이 러시아와 조우하게 된 최초의 사건이니 두 나라 사이의 만남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비하면 턱없이 짧지만, 미국에 비하면 상당히 긴 연조를 갖고 있는 것이지요.

 

당시 조선인들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던 정보는 러시아를 칭하는 서로 다른 호칭인 아라사와 대비(大鼻)가 각기 다른 나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보잘 것 없었으며, 조선의 식자층들은 문화의 중국화 정도를 기준으로 문명과 야만을 나누는 화이사상이란 눈을 통해 러시아를 인식함으로써 금수와 야만의 나라로 깎아내릴 만큼 비합리적이었습니다. 


실학자 홍대용(洪大容, 1731~1783)조차 <담헌연기(湛軒燕記)>(1765)에서 

"대비달자(大鼻㺚子)는 아라사(俄羅斯)이며, 몽고의 별종이다. 그들은 모두 코가 크며 흉악하고 사납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코쟁이(대비달자)라 부른다"

고 해 러시아사람들을 코쟁이로 비하할 정도로 당시 조선사람들의 러시아 인식은 피상적이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1689년 청ㆍ러 양국 사이에 네르친스크(Nerchinsk)조약이 체결된 이후 북경에서 조선인과 러시아인이 조우할 기회가 많아지면서 러시아 사절에 대한 청국의 후대를 보고 러시아의 강대함을 인정한 것도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 점은 1686년 연행사로 청국에 다녀온 남구만(南九萬, 1629~1711)이 

"아라사는 북해(北海)와 접하고 있는 대국인데, 대비와 가까운 지역으로서 대비가 두려워하여 복종하는 나라입니다. 예부시랑이 나가서 접대하고 병부시랑이 북해까지 나아가 맞아들이며 몽고의 다섯 왕들이 말을 번갈아 타면서 들여보내는데, 그러한 점으로 보아 아마도 강대국인 듯 합니다"

라고 한 데서 잘 나타납니다. 


 

"러시아에 대한 정보를 중국과 일본에 의존한 것도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우리에게 손에 잡히는 실체로서 다가선 것은 1860년 북경조약의 결과로 중국이 연해주를 러시아에게 넘겨줌으로써 우리와 국경을 접하게 된 이후이지요. 거시적인 눈으로 볼 때 북경조약이 맺어진 1860년은 우리 역사의 전개에 큰 획을 그은 해였습니다. 


왜냐하면 러시아와의 접경은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세력균형을 깨뜨린 것으로 이 때부터 한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열강의 쟁패가 시작되었으니 말입니다. 러시아가 한반도내에서 부동항을 얻는다면 이것은 해양세력인 영국과 일본에게는 치명적인 위협이었으며, 대륙세력 중국에게도 울타리가 무너져 내리는 순망치한(脣亡齒寒)의 두려움을 안겨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러시아는 점차 위협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1864년과 1865년에는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 통상을 요구하였으며, 1866년에는 영흥만에 나타나 통상을 요구해 오는 등 러시아의 위협이 가시화 되자 조선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경계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흥선 대원군(李昰應, 1820~1898) 치하의 조선에서 러시아에 대한 경계론을 제일 먼저 주창한 세력은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러시아에 대해 경계심을 갖게 된 남종삼(南鍾三, 1817~1866)등 천주교 세력이었지요. 


1866년 남종삼은 국청(鞫聽)에서 

"아라사는 천하의 1/9을 차지하고 있고, [춘추전국시대에] 강력했던 진나라가 [이웃 나라를] 병탄하는 것과 같은 기세를 가지고 있어 비단 조선에 근심이 있을 뿐만 아니라 비록 다른 나라라도 장차 차례로 병탄할 것"이며 "아라사가 처음에는 교역으로 말하지만 만약 그것을 허락한다면 장차 침범하는 근심이 있을 것"

이라고 해 러시아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의식을 노정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연대해 러시아의 남하를 막자는 이들의 러시아 대비책은 대원군에 의해 묵살될 만큼 당시 러시아에 대한 경계의식은 크지 않았지요. 병적으로 러시아를 두려워하는 공로증적 러시아 경계론은 1880년대 청․일 두 나라를 통해 본격적으로 조선 사람들의 뇌리에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860년 연해주를 할양하면서 러시아를 경계하기 시작했던 중국은 러시아와의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그 공로증이 더욱더 심해졌지요. 두 나라의 국경분쟁은 1871년에 러시아가 지금의 신장성인 중국령 터키스탄에서 일어난 회교도 반란을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중국 진출의 관문인 이리(伊犁​: 지금의 중국 신장성 서북부 텐산산맥 중부에 있는 분지) 계곡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 일어났습니다. 


더구나 이 국경분쟁을 이용해 일본은 대만을 침략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개방시켰는가 하면 류큐(琉球: 현재의 오키나와)왕국까지 병합한데다, 또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일본의 진출을 이용해 이리 지역에 대한 공격의 기세를 드높이자 중국으로서는 일본과 러시아를 모두 견제해야 했지요. 


특히 중국은 일본보다는 러시아가 더 큰 위협으로 간주해 전략적으로 자국의 안보에 매우 중요한 조선이 러시아 세력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1879년이래 조선 조정에 군비 확충과 서구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였습니다. 


 황준헌의 『조선책략(원명 私擬朝鮮策略)』



중국의 공로증(恐露症)은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에 잘 나타납니다. 

김홍집이 동경주재 청국 공사관의 참찬관 황준헌과 필담한 내용이 담긴 이 책은 러시아를 영토확장욕에 가득찬 

야만국으로 묘사하는 공로증적 방아론(防俄論)을 제기한 바 있었습니다. 

 

"지구 위에 더할 수 없이 큰 나라가 있으니 아라사라 한다. 그 둘레의 넓음이 3대주[유럽․아세아주, 그리고 북아메리카주(?). 북아메리카주에 있던 러시아령 알래스카는 1867년에 미국에 매각되었다]에 걸쳐 있고 육군 정병이 1백여만 명, 해군의 큰 함정이 200여 척이다. 

다만 나라가 북쪽에 위치하여 기후가 춥고 땅이 메마르기 때문에 재빨리 그 영토를 넓혀서 사직(社稷)을 이롭게 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선세(先世)인 피득왕(彼得王, 표트르 1세, pyotr Ⅰ: 재위 1689~1725] 이래 새로 강토를 개척하여 이미 [전보다] 십 배가 넘었으며, 지금의 왕(알렉산드르 2세, Aleksandr Ⅱ: 재위 1881~1894)에 이르러서는 다시 사해(四海)를 차지하고 팔방을 병합할 마음을 가지고 중앙아시아에서 위글 여러 부족의 땅을 거의 잠식하였다. 

천하가 다 그 뜻이 적지 않음을 알고 이따금 서로 합종하여 대항하였다 …지금 서양의 여러 대국들, 예컨대 독일․영국․오스트리아․이탈리아․프랑스가 모두 모두 호시탐탐하여 단연코 한치의 땅도 남에게 넘겨주려 하지 않는다. 러시아가 서방 공략을 할 수 없게 되자, 번연히 계략을 바꾸어, 동쪽 강토를 넓히려 하였다. 

십여 년 이래로 화태(樺太,사할린)를 일본에서 얻고, 흑룡강의 동쪽을 중국에서 얻었으며, 도문강 입구에 주둔하고 있다. 높은 집 지붕 위에서 동이의 물을 쏟아 붓는 듯한 형세로 그 경영하여 여력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세아에서 뜻을 얻으려는 것이다. 

조선이라는 땅은 실로 아시아의 요충에 놓여 있어서 반드시 다투어야 할 요해처(要害處)가 되고 있다. 조선이 위태로우면 중국과 일본의 형세도 날로 급해질 것이며, 러시아가 영토를 공략하려 한다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이다. 

아! 아라사가 이리와 호랑이 같은 진나라처럼 정벌에 힘써온 지 3백여년. 그 처음 [대상]은 구라파이었고 이어서 중앙아시아였으며, 오늘에 와서는 다시 동아시아로 옮겨져 마침 조선이 그 피해를 입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선의 오늘날 급무를 계책할 때 러시아를 막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을 것이다." 

 

러시아를 두려워한 것은 중국만이 아니었지요. 시베리아를 관통하는 철도가 없었던 러시아는, 새로 얻은 연해주에 대한 지배를 확고히 하고 이를 발판으로 태평양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부동항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1875년 일본은 러시아의 위협에 굴복해 개발 가능성이 매우 높은 사할린을 넘겨주고 불모지나 다름없는 쿠릴열도를 받은 뒤로 러시아에 대해 거의 병적인 공포심, 즉 공로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본은 1876년 이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말 것을 조선에 권고했습니다. 


제1차 수신사 김기수(金綺秀, 1832~1894)는 1876년 일본 체류시 만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로부터 

"러시아(魯西亞)가 동병(動兵)할 징조가 있다는 것은 내가 강화도에서 이미 말한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 사람이 저 러시아의 땅에 갈 때마다 그들이 날마다 병기를 만들고 흑룡도(黑龍島)에 군량을 많이 저장하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이 장차 무엇을 할 것인지, 귀국에서는 마땅히 미리 대비하여 기계를 수선하고 병졸을 훈련시켜 방어의 계책을 강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라고 해 러시아에 대한 방비책을 세우라는 권고를 들었습니다. 


1880년에 김홍집도 귀국 후 고종이 "그 나라에서 과연 러시아를 몹시 두려워하던가?"라고 묻자 이에 답해 "온 나라가 그 문제를 절박한 걱정거리로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라고 해 일본이 병적인 공로증 증세를 보이고 있음을 보고한 바 있었지요. 


당시 일본인들은 정부관리나 재야인사를 막론하고 조선인들에게 공로의식을 전파함으로써 조선을 자국의 영향권 하에 두려하였지요. 그 때 일본인들이 공로증 이식의 매개수단으로 활용한 것이 서구제국 특히 러시아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한 조ㆍ중ㆍ일 삼국의 연대, 즉 아시아연대론이지 않습니까? 


 

공로증(恐露症) 감염과 방아론(防俄論)의 대두

 

1880년대 초반 일본과 청국 두 나라가 전파시킨 공로증은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매개로 일반인들에게로까지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신문에 보이는 공로의식 관계기사 두 개가 이를 입증합니다. <한성순보>는 <상해신보>와 일본신문을 각각 인용해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 있습니다. 

 

"러시아 황제가 쉴 새 없이 과도한 사치와 국토의 확장에 전력하여 4대주의 땅을 죄다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하므로, 동맹국에 대해 겉으로는 우호의 태도를 보였지만 속으로는 음흉한 마음을 품었으니 터키가 싸움을 벌리고 아프가니스탄이 영국을 배반한 예가 다 러시아의 간계에서 나온 것이요, 그 국내에는 날마다 군사를 훈련하여 장차 무력으로써 온 천하에 과시하려 하였다. (2호, 1883년 11월 10일자)" 

 

"지금 아국(俄國)의 강역은 구라파와 아시아 양 대륙과 연접되어 있고 그들의 강역은 전세계 육지의 7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니 지구에서 고금에 없이 큰 나라이다. 그러나 옛날 이 나라의 강역은 거의 몽고의 관할이었는데, 그후 몽고의 국력이 점차 쇠미하여졌기 때문에 서기 1462년에 모스크바의 영주 이반(Ivan)이란 자가 휴양하면서 한 나라를 세우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강역은 39만 4천 평방마일에 불과했으니, 지금의 모스크바가 그곳이다. 이후부터 전국이 몽고의 관할로부터 벗어나 가까운 이웃나라를 잠식하였다. 1505년에는 러시아의 강역이 79만 2천 평방마일로 증가하였고, 1584년에는 2백67만6천 평방마일로 확장되었다. 

그 후에 내란이 계속되어 이반의 계통이 끊어졌으나 인근 국가를 잠식하는 계책은 그만두지 않았다. 1614년 미하일 로마노프(Mikhail Romanov)란 자가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에 러시아의 강역은 실로 5백42만7천여 평방마일이나 되었으니, 이는 미하일 로마노프 지금 황제의 비조(鼻祖)이다. 

이후부터 대대로 왕위를 이은 자가 강역을 개척하기에 전력하였고, 피득(피요트르)황제는 자손에게 동쪽 지경(地境)을 전적으로 개척하라는 유언을 했기 때문에 1689년에는 러시아의 강역이 5백63만 평방마일이 되고, 1725년에는 5백84만1천 평방마일, 1763년에는 6백81만6천 평방마일, 1825년에는 7백5만 평방마일, 1837년에는 7백50만 평방마일, 1855년에는 7백82만1천 평방마일, 1867년에는 은(銀) 7백20만불을 미국으로부터 받고 알래스카 39만4천 평방마일을 팔았다. 

그래도 지금의 러시아 강역은 실로 8백38만7천8백16 평방마일이나 된다. 대저 러시아 사람들이 구라파와 아시아 양 대륙에서 강역을 개척하는데 대대로 내려오면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래서 스웨덴ㆍ독일ㆍ오스트리아ㆍ터키 등의 나라는 러시아를 엄히 경비하고, 중국ㆍ일본 및 波斯(페르시아) 등은 북방 경계에 전력을 기울여 그들의 잠식을 면할 수 있었다. 이제 조선도 러시아와 접경하고 있으니 경계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이상은 일본의 근신(近信)이다.(11호, 1884년 2월 7일자)"

 

갑신정변으로 인해 발행이 중지된 <한성순보>에 이어 1886년 1월부터 1888년 7월까지 주간으로 발간된 <한성주보>의 경우에도 청국의 공로의식을 <신보(申報)>와 같은 중국신문을 전재해 보도함으로써 일반에 유포시켰지요.

 

"러시아는 여러 나라의 꺼리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 꺼림으로 인하여 질투심을 일으켜 합종연횡을 하니 마치 전국시대에 제후들이 연합하여 진나라를 배척하던 국세(局勢)와 같다. …

함풍(咸豊) 연간에 두 차례에 걸쳐 땅을 요구하여 흑룡강 동쪽 이르쿠츠크의 여러 지역으로부터 우루무치 서쪽 이리ㆍ쿠커ㆍ아커수의 여러 지역을 모두 점거하였다.…

또 동쪽으로는 일본 사할린 지방을 빼앗아 쿠릴열도의 18도와 바꿨으며, 다시 동해를 건너 고려의 동쪽으로 와서 탄광을 개발하고 석탄과 철을 채굴하며 근래에는 또 흑룡강 경계에 병사를 주둔시켜 철도를 부설하여 중국에까지 통하도록 하려고 하고 있다. (32호, 1886년 10월 11일자)" 

 

"아무리 맹서로 요구하고 혼인으로 신중하게 하더라도 일단 집어삼킬 기회가 오면 호랑이와 이리 같은 게 러시아인들의 심성인데 어떻게 살찐 고기를 택하여 뜯어먹지 않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는가. …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현재 러시아는 내란이 끊이지 않아 수시로 난당(亂黨)이 일어나 그 황제를 자살(刺殺)하려 하고 있다. 그래서 군사가 비록 강하기는 하지만 국고가 이미 고갈된 상태이다. 비록 철도의 가설을 권한 말이 있기는 했지만 이는 공언일 뿐 과연 그 일이 성취될는지는 기필할 수 없다. 

아! 이 말은 참으로 잠시 동안의 편안을 훔치려는 자들의 말이다.      (67호, 1987년 6월 13일자)" 

 

청ㆍ일 두 나라가 자국의 이해를 위해 조선에 전염시키려 공러의식은 상당한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이 점은 수신사 김홍집이 복명한 후 <조선책략>에 제기된 러시아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한 중신 회의에서 이최응(李最應, 1815~1882)이 한 말에 잘 나타납니다. 

 

"신이 그 책을 보았는데 그가 여러 조항으로 분석하고 변론한 것이 우리의 심산(心算)과 부합되니 한 번 보고 묶어서 시렁 높이 얹어둘 수는 없습니다. 대체로 러시아는 먼 북쪽에 있고 성질이 또 추운 것을 싫어하여 매번 남쪽을 향해 나오려고 합니다. 다른 나라의 경우에는 이득을 보려는데 지나지 않지만 러시아 사람들이 욕심내는 것은 땅과 백성에 있으며 우리나라의 백두산 북쪽은 바로 러시아의 국경입니다. 

비록 큰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이라도 한 대의 돛배로 순풍을 타고 오히려 왕래할 수 있는데 하물며 두만강을 두고 두 나라의 경계가 서로 접한다면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보통 때에도 숨쉬는 소리까지 서로 통할 만한데 얼음이 얼어붙으면 비록 걸어서라도 올 수 있을 것입니다. 

바야흐로 지금 러시아 사람들은 병선 16척을 집결시켰는데 배마다 3,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만약 추위가 지나가게 되면 그 형세는 틀림없이 남쪽으로 향할 것입니다. 그 의도를 헤아릴 수 없으니 어찌 대단히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은 1876년이래 1880년대 초반까지 일본과 청국이 조선을 상대로 전개한 공로증 주입 노력이 주효했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러한 공로증의 감염이 방아론으로까지 확대되었음은 같은 날 고종과 이최응이 나눈 다음과 같은 문답에 잘 보입니다. 

 

"지시하기를, 

'일본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러시아를 두려워하여 조선은 방비하라고 요구하는 듯하지만 사실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저희나라를 위한 것이다'라고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사실은 저희나라를 위한 것이고 조선을 위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조선이 만일 방비하지 않으면 저희 나라가 반드시 위태롭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렇더라도 우리 나라야 어찌 러시아 사람들의 뜻은 일본에 있다고 핑계대면서 심상하게 보고만 있겠습니까. 지금 성곽과 무기, 군사와 군량은 옛날만 못하여 백에 하나도 믿을 것이 없습니다. 마침내 비록 무사하게 되더라도 당장의 방비를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지시하기를, '방비대책은 어떠한가?'라고 하니 이최응이 아뢰기를, 

'방비대책에 대하여 우리 스스로가 어찌 강구할 것이 없겠습니까. 청나라 사람의 책에서 논한 것이 이처럼 완벽하고 이미 다른 나라에 준 것은 충분한 소견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그 중 믿을 만한 것은 믿고 채용해야 할 것입니다.'고 하였다."

 

당시 공로증에 감염된 조선정부는 백춘배(白春培)를 아라사 채탐사(採探使)로 임명해 블라디보스톡에 보내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을 조사해 보고하게 했으며, 그는 러시아가 남하할 수밖에 없는 이유로 "조선을 향한 러시아의 팽창 방향과 부동항의 필요성" 등 10여 가지를 제시한 바 있었습니다. 


특히 조사시찰단을 따라 일본에 유학했던 유길준(兪吉濬, 1856~1914)은 귀국 직후인 1883년 고종에게 올린 <언사소(言事疏)>와 1885년에 쓴 <중립론>에서 다음과 같이 공로증을 토로한 바 있습니다. 

 

"현재 유독 우리 국가의 영토는 바로 아주의 인후에 해당하고 인근에 막강한 러시아와 접경하였으니, 천하가 필시 쟁패를 겨루는 지역인 것입니다. 또 러시아인은 사납기가 범이나 이리와 같아서 호시탐탐 기회만 엿보고 있는 지 벌써 여러 해 되었습니다. 러시아가 움직이지 않는 것은 단지 구실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 

오호! 위태롭습니다. 무릇 국경 사이에 걸린 이해관계에 있어서는 도리를 알고 서로 친애하는 국가라도 굽히지 않고 주장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인과 같이 포악함에야. 

세력이 서로 균등한 나라라야 싸워서 판가름 낼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와 같이 강대함에야. 서로 조약을 체결한 나라라도 힐변(詰辯)이 있을 수 있는 것인데 하물며 러시아인과 같이 틈만 노리고 있음에야." 

 

"대저 러시아라는 나라는 만여리에 달하는 거칠고 추운 땅에 위치하고 있으면서 백만명의 정병으로 날마다 그 영토를 넓히는데 힘쓰고 있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작은 나라들을 회유하여 보호국을 만들기도 하고 혹은 그 독립권을 보장하기도 했지만, 그 혈맹이 채 마르기도 전에 그 토지를 모두 군현화하고 그 인민들을 노예화했다.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를 큰 나라가 작은 나라를 병탄하고자 하는 것은 본래 인간세상의 다반사다. 

그런데 러시아는 특히 무도하기 때문에 천하가 탐욕스럽고 포악한 나라로 지목하고 있는데도, 그 호랑이와 이리 같은 마음은 더욱 왕성해져 그칠 줄 몰랐다.…

러시아인이 강대한 인접국 [영국과 프랑스 등]과 반목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 마침내 그 군대를 동쪽으로 옮겨 대병력을 블라디보스톡에 주둔시키고 시베리아 철로를 가설하기에 이르렀다. 

그 비용이 매우 거대하여 얻는 것이 잃은 것을 보충하지 못하니, 그 노리는 바는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알 만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나라의 위태로움은 그 절박함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 

 

나아가 유길준은 이러한 공러의식을 바탕으로 러시아의 침략을 막기 위해 "우리나라가 아시아의 중립국이 되는 것이 실로 러시아를 막는 큰 계기가 될 것이며, 또한 아시아 강대국들의 서로 보존하는 정략도 될 것이다"

라고 해 방아를 위한 조선의 중립화 방안을 구상한 바 있었습니다. 


 

인아책(引俄策)의 수립 : 러시아, 조선 독립의 옹호자

 

일본과 청국 두 나라로부터 이입된 공로의식은 일반화된 것은 아니었지요. 왜냐하면 1880년대초 러시아의 침략 가능성에 대비하기 위한 균세책을 선전하기 위해 고종은 《조선책략》을 위정척사파 유생들에게 유포시켜 공러의식을 붇돋우려 했지만, 이들은 17세기이래 러시아와 별다른 마찰 없이 지낸 전례를 거론하며 러시아의 잠재적 침략 가능성을 일소에 부쳤다.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일례로 이만손(李晩孫)이 소두로 올린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는 러시아의 남침가능성을 부인하면서 <조선책략>에서 제시된 방아론을 비판하였습니다. 

 

"러시아로 말하면 우리와는 본래 아무런 혐의도 없습니다. 공연히 남의 이간술에 빠져 우리의 권위를 손상시키면서 먼 나라와 사귀고 이웃 나라를 건드려 전도된 행동을 하다가 헛소문이 먼저 퍼져 이것을 구실로 삼아 가지고 병란(兵亂)을 일으킨다면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황준헌의 말과 같이 설사 러시아가 정말 우리를 집어삼킬 만한 역량이 있고 우리를 침략할 뜻이 있다고 한들 장차 만리 밖의 구원을 앉아서 기다리면서 턱밑에 있는 오랑캐 무리들과 싸우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이해 관계가 뚜렷한 것입니다. 

지금 조정에서 무엇 때문에 백 가지 해가 있고 한 가지의 이익도 없는 이런 일을 굳이 함으로써 러시아 오랑캐에게는 마음먹은 적도 없는 생각을 가지게 하고 미국과는 일없을 일을 일으킴으로써 원수를 오게 하고 병란을 초래하겠습니까?" 

 

고종을 위시한 조선정부도 직접적인 정보수집을 통해 러시아의 남침 가능성에 대해 검증하기 위한 노력을 전개했지요. 일본이 공로증 전파를 위해 이용한 아시아 연대론의 논리와 황준헌이 《조선책략》에서 제기한 균세론․자강론의 논리는 매우 유사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아시아 연대론이나 《조선책략》이 제기한 균세론의 배후에는 일본이나 청국이 조선 개화의 옹호자 혹은 인도자라는 의식이 깔려 있었을 뿐 아니라, 조선에 개방을 촉구하고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권유한 이면에도 정치․경제적으로 일본이나 청국의 영향력을 증대하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아닐까 합니다. 

 

이는 역으로 청․일 양국에 의해 침략세력이라는 이미지로 소개되었던 러시아도 청․일 양국이 조선에 대한 실질적 위협세력이나 참략자로 판명났을 때에는 이들을 견제해 세력균형을 이룸으로서 조선의 독립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그 역할이 바뀔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실제로 조선정부는 일본과 청국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유입된 러시아 위협론에 맹목되지 않았으며, 자신이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균형을 이루는 데 러시아를 동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계속 타진해 왔던 것이지요. 


실제로 당시 조선인들은 러시아의 위협이 과장된 것임을 보여주는 정보도 접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1884년 6월 23일자 《한성순보》에 실려 있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러시아의 수도에서 혼춘(琿春)까지는 서쪽으로든 동쪽으로든 수만리의 거리며 중간에 동부시베리아가 황막하여 끝이 없으니 서쪽으로부터 군사를 움직이려고 하면 결코 성공하기 어려울 것이고 동부에는 비록 병사가 있으나 충분하지 못하니 러시아가 비록 침식하고 싶은 뜻이 있더라도 다른 날을 기다릴 것이라 결코 지금 싸움을 벌이지는 않을 것이다.… 러시아가 비록 고려를 넘어다본다 하여도 동부의 힘으로는 병탄하기에 부족하고 서부의 병사는 또 실어 나르기가 쉽지 아니하니 실지는 중국의 길림․흑룡강 두 성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뜻은 있어도 이루지 못하는 것과 한가지다. 더욱이 고려는 현재 미국과 이미 통상을 하였고 또 영국과도 조약을 맺었으며 그리고 중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일본의 후원이 있으니 러시아가 어찌 감히 사지(私志)를 드러내겠는가." 

 

오히려 러시아는 조선을 둘러싼 열강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는 데 필요한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김옥균(金玉均, 1851~1894)ㆍ박영효(朴泳孝, 1861~1939) 등 개화파 인사와 고종은 러시아와의 수교를 위해 독자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지요.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부차적 제국주의(secondary imperialism) 세력으로서 청국의 간섭이 점점 노골화하자 청국이 가장 두려워한다고 본 러시아와 수교함으로써 조선의 독립을 옹호해 줄 세력으로 불러들이려 했습니다. 


즉 이들은 임오군란 이후 일본에 파견된 수신사절로 일본에 갔을 때 주일 러시아공사 로센(Romananovih R. Rosen)과 만나 수교를 위한 교섭을 전개했지요. 특히 김옥균은 1884년초에도 주일 러시아 공사 다비도프(Alexandre P. Davydow)에게 조약체결 의사를 표명한 바 있으며, 고종도 김관선을 노브키예브스코(Novokievskoe)로 보내 러시아 관리에게 수교의사를 전달한 바 있었습니다. 


마침내 서울로 들어 온 천진주재 러시아 영사 웨베르(Carl Waeber)는 1884년 전격적으로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르렀지요. 갑신정변 실패이후 청국의 간섭정책이 더욱 심해지자 고종은 이른바 조로밀약(朝露密約)을 추진하는 등 인아책을 적극 구사하기 시작했지요. 

 

그러면 당시 인아책을 구사했던 인아론자들은 누구였을까요? 고종의 측근이었던 민영익(閔泳翊, 1860~1914)과 한규직(韓圭稷, ?~1884)이 바로 그들이지요. 민영익은 보빙사(報聘使)로 미국과 유럽을 다녀온 후 고종에 복명하면서 


"유럽에서는 특히 러시아가 강대하며 유럽 여러 나라는 모두 러시아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조만간 러시아가 아시아로 침략의 손을 뻗쳐 조선에도 그 영향이 미칠 것이니 우리나라 입국의 근본정책은 일본이나 청국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러시아의 보호를 받도록 하는 것이 상책이다"

고 고종에게 헌책한 바 있었습니다. 


민씨 척족정권의 중요인물 중 하나이자 경흥부사를 역임한 한규직도 

"일본은 청과 러시아를 의식하여 감히 조선을 병탄하지 못하지만 늘 침략하고자 하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청은 다른 나라가 조선을 점령해도 힘이 부족하여 조선을 보호하지 못할 것이지만 조․일간의 조약에 문제가 있으면 '감국제권(監國制權)'하려고 할 것이며, 러시아는 세계 최강국으로 세계가 두려워 하지만 조선과 더불어 도울 수 있다"고 보아 인아론을 제기하였지요. 

 

1880년대 이전 러시아는 중앙아시아와 발칸반도 경략에 몰두하였으며, 새로 개척한 극동지역 쪽으로의 육로 교통망도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대한 영향력 확대를 적극적으로 기도하지 않았던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치 무대에서 눈에 띠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1884년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결과 조선의 대내외 정치에 대한 중국의 적극적 간섭이 가해진 후부터이며, 조선을 둘러싼 각축전에 능동적으로 개입해 괄목할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1895년 삼국간섭으로 일본을 굴복시킨 다음부터의 일이었습니다. 


일본 등 주변국을 통해 감염․이입된 공로증적 러시아 인식은 한․러관계의 진전과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역관계 변화에 따라 러시아를 조선 독립의 옹호자로 이용하려는 인아책이 수립․추진되기에 이르렀던 것이지요. 


따라서 저는 윤치호나 민영환 같은 사람들의 러시아 인식을 피상적인 것이었다고 보지 않습니다. 

당시에는 힘의 균형이 도모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렌센(G. A. Lensen)의 말처럼 "책략의 균형"이 획책된 시대로 

볼 수 있지도 않습니까?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 본 한ㆍ러관계

 

개화기이래 우리들의 생존전략은 크게 미국과 영국 축에 서느냐,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편을 드느냐 둘로 압축됩니다. 어떤 전략을 취하느냐에 따라 러시아는 침략자나 독립의 옹호자라는 전혀 다른 이미지로 비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공로증에 감염된 유길준, 러시아의 경제침략을 반대한 독립협회 관계자, 소련을 사회혁명을 책동하는 위협세력으로 인식한 식민지시대 민족주의 우파와 남한의 위정자들은 러시아를 침략세력으로 본 반면, 


인아책을 구사한 고종과 민씨 척족세력, 아관파천을 추진한 친러파, 마르크스ㆍ레닌주의의 세계관을 받아들인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세력과 북한의 집권세력들에게 러시아는 둘도 없는 우방이었습니다. 


냉전 해체 이후 러시아는 남북한 모두에게 적국도 될 수 있고 우방도 될 수 있기에 러시아를 보는 남북한 사람들의 인식은 아직 불확정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냉전 이데올로기가 지배하던 시절에는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느냐는 선악을 기준으로 적과 동지를 나누었다면, 개화기나 요즘과 같이 힘이 지배하는 시대에는 어느 편을 들어야 득이 되는지를 살펴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도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조선의 위정자들은 도덕률이 지배하던 사대교린(事大交隣)의 세상에서 무난한 보호자였던 중국과 큰 탈없이 지내오던 일본이 침략자로 돌변하자, 이들의 야욕을 막기 위해 생면부지의 미국이 새로운 보호자가 되 주길 간절히 바랬지요. 계속된 구애가 짝사랑으로 끝나 대답 없는 메아리가 되어 버리자, 


중국과 일본이 병적으로 무서워하는 러시아에게 추파를 던졌지요. 그러나 러시아도 일본의 팽창을 막기에 역부족이었습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을 보호국화 하려 했던 일본의 야심을 독일과 프랑스와 같은 대륙세력과 힘을 합친 삼국간섭으로 꺾을 수 있었지만, 


결국 러시아는 영국과 미국이 노골적으로 일본 편을 든 러일전쟁에 패배해 동아시아 진출의 꿈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결국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과 이해를 같이하는 해양세력 일본이 한국을 집어삼키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습니다. 

 

한 세기 전 이해를 놓고 열강들이 편을 가르던 시절, 우리 선조는 자신의 힘으로 생존하기보다 남의 힘을 빌려 살아 남으려 했습니다. 다시 돌아 온 열강 쟁패의 시대에 과거와 다른 점은 우리는 백년 전 우리 선조들이 그토록 원했던 해양세력 편에 서있으며, 


우리의 다른 반쪽은 여전히 대륙세력에 생존을 위한 판돈을 걸고 있다는 것이지요. 러ㆍ프ㆍ독 삼국간섭으로 한반도 지배를 10년 늦추었던 제정러시아와 같은 힘을 오늘의 러시아가 발휘할 수 있을까요?

 

봄기운을 온 몸으로 느끼는 수원에서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박노자. 「19세기후반 한인의 노령 이민의 초기 단계」, 『한인의 해외이주와 그 정착과정』, 

                전주대 역사문화연구소ㆍ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원 주최 국제학술회의 발표요지, 1998. 

⊙송병기 편역. 『개방과 예속』.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0. 

⊙송종환. 『러시아의 조선침략사』. 범우사, 1990. 

⊙씸비르쩨바 따찌아나. 「1869~1870년간에 진행된 러시아와 조선간의 경흥협상과 그 역사적 의의」.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원재연. 「19세기 조선의 러시아 인식과 문호개방론」. 『한국문화』23, 1999. 

⊙최문형. 『제국주의 시대의 列强과 韓國』. 민음사, 1990. 

⊙최문형. 『한국을 둘러싼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 지식산업사, 2001. 

⊙한국사연구협의회 편, 『한로관계100년사』, 한국사연구협의회, 1984. 

⊙허동현, 「1880년대 한국인들의 러시아 인식 양태」,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George Alexander Lensen, 『Balance of Intrigue : International Rivalry in Korea & Manchuria, 

                  1884∼1899』. Tallahassee : University Press of Florida, 1982. 

⊙V. Tikhonov(박노자).「The Experience of Importing and Translating a Semantic System: 

               'Civilization', 

⊙'West', and 'Russia' in the English and Korean Editions of The Independent」.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2, 2002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10.'강대국' 러시아는 허상이었을까요? - 러시아관-허동현 생각. 프레시안.2004,  3.  26.




11.서양인의 조선관(觀) 

-지금 우리는 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가 -박노자의 생각


"가는 정"은 두터웠지만,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가는 말이 아름다우면 오는 말도 아름답다"(去言美, 來言美)라는 한문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요즘 한국에서 쓰는 방식으로 바꾸자면, "가는 정 (情)이 있어야 오는 정도 있다"는 말이 되겠지요. 

즉, 우리 쪽에서 좋은 감정을 갖고 좋은 말을 쓴다면 상대방도 우리를 그렇게 대해주리라는 이야기인 셈이지요. 


유교적인 인의염치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와 같은 "호혜성"(互惠性)의 원칙이 지켜지겠지만, 획일적인 서구 "문명"과 "국민 국가"의 유무의 여부가 한 나라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즘의 잔혹한 국제 무대에서 "가는 정"이 있어봐야 "오는 정"이 별로 두텁지 않은 경우가 허다합니다. 

 

개화기의 미국인들과 한국인들의 상호 인식이 이 안타까운 사실의 좋은 사례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의 쪽에서는 고종을 비롯한 대다수의 조정 대신들이 미국을 열강 중에서 가장 공평하고 욕심이 적은 나라로 인식하여 미국 선교사들에게 여러가지 혜택을 부여하고, 서재필을 비롯한 친미 개화파들이 서방 선진국들 – 특히 미국 -을 "문명 국민"의 완전무결한 모델로 생각하지 않았습니까? "가는 정"은 이 정도로 두터웠지만, 오는 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물론 저는 개화기에 한국과 종교적, 외교적 관련을 맺은 모든 서구인이나 미국인들을 일률적으로 "침략의 첨병"이나 "제국주의자"로 매도할 의도란 추호도 없습니다. 


전통적인 국내외적 질서가 해체되고 일본을 비롯한 각종의 신흥 침략 세력들이 한반도로 밀려 들어 오는 100년 전의 실질적인 상황에서는, 직접적인 침략적 의도가 당장 없는 구미인들은 – 본인들의 편견이나 세계관과 무관하게 – 한반도 주민들에게 세계 관련 지식 전수를 비롯한 여러 차원에서 실제적인 이익을 가져다 주는 경우는 꽤나 있을 수 있었습니다. 



조선 독립을 주장한 데니, 조선의 실상에는 어두워 

 

그리고 제국주의의 세계관 전체를 문제시하는 우리 입장에서야 그들의 "동양" 인식을 "편견"으로 보지만, 그들의 주관적인 의식의 차원에서는 그들이 한국에 대한 대단한 애정을 가진 경우도 없지 않았습니다. 


예컨대 서울에서 1882년부터 내정 간섭적인 "예속화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해 온 원세개(袁世凱)의 횡포를 국제적으로 폭로했을 뿐만 아니라 한국이 근대적 국제법상 분명히 독립국임을 만방에 알리는 등 한국의 외교에 상당한 긍정적인 기여를 한 고종의 외무 고문(1886-1890년간) 데니 (한자 이름: 德尼, 본명: Owen Nickerson Denny)를 물론 기억하시지요?

 


The Letters of Owen Nickerson Denny


그의 명문 <청한론>(淸韓論: <China and Corea>, 1888년 8월 출판)은 비록 47쪽의 짧고 난해한 글이지만, 

여러 가지 국제법적인 근거와 전례들을 들어 "중국과 조선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가 국제법 상의 조선의 독립을 전혀 실추시키거나 말소시킬 수 없다"고 명백하게 주장한 구미 쪽의 최초의 논문이 아닙니까? 


그 글에 담겨져 있는 "예속화 정책" 반대 주장도 귀중하지만 자강 정책만 잘 펴서 양반들로 하여금 산업을 일으키게 하고 지하자원만 잘 개발하면 조선이 곧 부국이 될 수 있다는 데니의 "조선 미래 낙관론"도 그 당시의 구미인의 입에서 자주 들을 수 있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데니의 글들을 읽으면서 느끼는 것은, 고종을 긍정적으로 봐야 할 근거로 "서구 문명의 위대한 초원에 첫발을 내디디려는" 고종의 개화 지향적인 정책을 드는 등 "서구화"를 유일무이한 "선"으로 생각했던 데니의 서구 중심주의적 한계입니다. 


이와 반대로는, "개화"를 접할 기회를 가질 리 없었던 조선의 평민들은 난이 일어나기만 하면 무조건 모든 외국인들을 다 몰살하려는 "배외적인 야만인"으로 서술됩니다. 

 

데니의 거시적인 세계관도 문제가 많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고종의 최측근으로 있었던 그의 국내 정세의 이해에도 그야말로 납득이 가지 않는 부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예컨대 그는 명성황후 민비를 "용감하고 애국적인 지도자"로 묘사한 것까지 좋은데, 민씨척족들의 "근왕적인 애국당"이 청나라와의 일체 전통 조공 관계를 끊어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한다는 데니의 주장


(" Corea," - <Chinese Times>, Tientsin, June 30, 1888, pp. 413-415. 국사편찬위원회 편, <데니문서>, 1981, 233-235쪽)은 조금 믿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민씨척족의 궁극적인 목적이야 물론 본인 집단의 세도의 영구화를 위한 점차적인 기술적 서구화 개혁이었지만 – 미국이나 러시아에 대한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면서도 - 청나라에 대한 "사대"를 불가피한 것으로 믿었던 그들을 "청나라와의 일체 관계를 끊으려는 일파"로 묘사한 것은 과장 중의 과장이었을 것입니다. 


물론 고종의 대러, 대미 외교를 적극적으로 도와주려 했던 데니의 입장에서는 한국의 집권 정파를 "반(反)중국적 인물"로 묘사하려 했던 것을 어쩌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조선에 상당 기간 내에 요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어를 배우려 하지 않아 통역에만 계속 의존했던 데니의 "정보의 한계"도 만만치 않았을 것입니다… 

 

데니 이야기를 한 뒤에 아무래도 사족을 하나 달아야 할 듯합니다. 데니의 의식이나 정보의 한계가 어땠든 간에 그에 대해서 높이 평가해 주어야 할 점은 그가 미국 등지의 친지에게 보내는 개인적인 편지에서까지도 조선과 자신의 "고용주"이었던 고종에 대해서 늘 그 나름의 호감을 내보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그 당시에 한국과 관련된 일을 했던 미국 외교관 중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인간적인 호감이나 존중이란 결코 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종이 "고용주"가 되고 그 신하들이 "파트너"나 "동료"가 되더라도 "가장 진보된 나라"로 인식됐던 미국에서 "가장 뒤떨어진 오지"로 여겨졌던 한국으로 "내려 왔던" 그들은 그들의 새로운 "고용주"나 "동료"들을 동등하고 존중 받아야 할 인간으로 쉽게 취급할 리는 없었습니다. 


 

의사ㆍ선교사ㆍ외교관이었던 알렌의 조선인 멸시

 

예컨대, 데니가 "선교사로서도 외교관으로서도 아무 자격이 없다"고 폄하하고 혐오했던 최초의 미국 선교사, 외교관 중의 한 사람인 그 유명한 알렌(한자 이름: 安連, 본명: 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을 들어 봅시다. 


1884년에 무명의 젊은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온 그는, 그의 치료 성과에 매료된 고종과의 가까운 관계를 발판 삼아 주한 미국 공사관 서기관 (1890-1893), 주한 미국 공사대리, 전권 공사 (1893-1905) 등으로 출세하는 등 한국과의 관계를 "사업 분야"로 삼아 "성공"을 이룬 최초 미국인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잘 알려졌듯이 러-일 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그가 본국 정부의 친일 일변도의 외교 방침에 반대하여 한국에서의 미국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일본 사이를 조절하여 한국의 독립을 보호해야 한다는 자신의 지론을 펴는 등 고종의 기대를 완전히 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그의 공적인, 개인적인 발언과 생각을 보면 한국과의 관계 덕택에 출세한 자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철저한 인종주의적 세계관을 가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컨대 1887년에 주미 공사 박정양의 사절단과 함께 한국에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같이 간 그는, 자신의 한국인 일행에 대한 소감을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적습니다: 

 

"박 공사는 사절단 일행 중 가장 나약하고 바보 천치 같은 인물이었다. (…) 이완용과 이하영은 그래도 전반적으로 조선사절단의 나쁜 인상을 상쇄하지만 그들이 항상 자기 객실의 지정좌석에서 일어서서 자리를 어지럽히고 있는가 하면 (…) 그들의 몸에서 계속 고리타분한 똥 냄새가 풍기고 있었고, 그들은 선실에서 끊임없이 줄담배를 피우고 있어서 이 담배 냄새에다가 목욕하지 않은 고린 체취, 똥 냄새, 오줌 지린 내, 고약한 냄새가 나는 조선음식 등이 뒤섞여 온통 선실 안은 악취로 가득했다. 


이 여객선(오션익호)의 승객들은 매우 친절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냄새 나는 조선사절단을 한 방으로 몰아 격리해 준 데에 대해 감사했고, 나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 

나는 그들의 옷에서 기어 다니는 이 (虱)를 가리키면서 잡으라고 주의를 주었지만 아무래도 악취는 별 차이 없었다 (…)" (<알렌의 일기>, 1887년12월26일).

 

평생 처음으로 여객선을 타 보는 조선 사절단이 서구적인 위생 규칙을 지키는 데에 익숙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똥오줌도 제대로 못 치우는 더러운 조선인"과, 이를 잡으라고 "주의를 주는" (어른이 어린아이를 가르치듯이!) "깨끗한 미국 신사"인 자신을 이렇게 대조시키는 알렌의 사고방식은 분명히 그 시대의 통상적인 인종주의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알렌과 그의<조선견문기 (Things Korean)> ​



그가 이와 같은 생각을 가졌다는 것도 별로 아름다워 보이지 않지만 알렌의 "조선인 멸시론"이 영향력을 꽤나 행사했던 그의 공개적인 발언에서 그대로 드러나는 것은 보다 큰 문제이었습니다. 예컨대, 1908년에 자신의 유명한 저서 <조선견문기> (<Things Korean>)에서 알렌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서술을 시작합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 이미 블라디워스토크 지역에서 자신의 부인을 죽인 마적들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무수한 중국인들을 죽임으로써 "용명" (?)을 얻은 한 미국 선장은, 한 한국 마을을 방문할 때 "원주민" 앞에서 그의 의치(義齒)를 한 번 빼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의치라는 것이 뭔지 모르고 인체가 이렇게 분리되는 걸 상상조차 못하는 "원주민"들이 결국 그에 대한 비길 바 없는 경외심을 가지게 됐으며 늘 그에게 말을 잘 대주는 등 극진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입니다." 

(pp. 14-19).

 

중국인이나 조선인들을 무자비한 복수로 위협하거나 "문명의 이기"로 압도해야 한다는 이 시각을, 우리가 오늘날에 와서 어떻게 봐야 합니까?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자가 자신을 동아시아의 "이교도"에게 복음을 전해 주는 "복음과 문명의 전도사"로 의식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쓴 웃음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샌즈, 조선 중립화 실패하자 미련없이 떠나

 

고종이 미국인 사업가의 이권 챙기기에 비협조적으로 나서자 그의 "대미 불신"을 미국 정부에 고발하겠다고 위협할 정도로(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92쪽에서 Allen Papers, Vol. 7-1, M.f. 367, 1901년 10월 10일자 기사를 재인용함) 한국 정부와 한국인 위에서 군림하려는 태도를 취했던 알렌과 달리, 


1899-1903년간 한국 궁내부의 고문으로 재직했던 미국인 외교관 샌즈(한자 이름: 山島, 본명: William Franklin Sands)는 민영환 등의 친미파 요인들과 가까이 협력하면서 민영환이 고민 끝에 고안해 낸 한국의 중립화 계획을 – 알렌의 방해 공작에도 불구하고 – 나름대로 충실히 실행하려고 애썼습니다. 

 

그가 한국어를 기초 수준 이상으로 구사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궁내부 외사과장 고희경 (高羲敬)이나 강석호 (姜錫鎬), 현상건, 이학균 등의 영어 실력이 뛰어난 중인(中人) 출신의 "신흥 궁내 세력"들과 하도 가까이 밀착된 결과 그 당시의 한국 국내 정세의 그야말로 뛰어난 파악을 할 수 있었습니다. 


고종을 "개혁주의자", 그리고 민비를 "애국자" 이상으로 이해하지 못한 데니와 달리, 샌즈는 구한말의 내정 상황 연구를 위한 귀중한 자료가 되는 회고록을 남길 정도로 한국 관련의 "내부자로서의 지식"이 유별났습니다. 


예컨대, 요즘 고종을 마치 "계몽 군주"쯤으로 생각하려는 일각의 극우 사학자들은 샌즈의 다음과 같은 텍스트를 아마도 염두에 두셔야 할 듯합니다: 

 

"한국의 관료 임명 제도는 타락될 대로 타락됐다. (…) 모든 행정적인 벼슬들은 개인의 정실 인사 아니면 뇌물로만 얻어질 수 있었다. 뇌물로 벼슬을 얻은 탐관오리들은 그들이 투자한 돈을 백성들로부터 거두어 내느라 과중한 임의 잡세들을 마음대로 만들었는데, 그게 바로 민란들의 주된 원인이었다. 

뇌물에 의한 매관매직 제도가 하도 상식이 됐기에 일본인 고리대금 업자까지도 이를 이용할 지경이었다. 

그들이 원님이 될 사람에게 월당 20%의 이자로 (…) 뇌물을 바칠 돈을 꾸어 주곤 했다. 

그러한 사람이 원님이 된 뒤에 맨 먼저 이 융자를 갚느라 조세를 부과하고 그 뒤에 황제에게 바칠 상납금을 만들라고 새로운 잡세를 부과하고, 그 뒤에 끝내 자신의 이익이 될 돈을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 (…) 

황제와의 직거래를 할 수 있는 행운아들은 궁내의 중개인들에게 돈을 바칠 필요가 없었다. 

궁내 요직들은 뇌물이 오가는 통로이었기에 가장 귀중히 여겨 졌다. (…)" 

(<Undiplomatic Memories>, Royal Asiatic Society, Korean Branch, 1990, p. 121).

 

다소 과장이 심한 구미인의 기록이라 치더라도 고종에 대한 나름대로의 호감을 가지고 그의 궁내에서 많은 친구들을 만든 샌즈는 의도적으로 거짓말 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사실, 뇌물쟁이들이 고종과 직거래했다는 이야기를, <매천야록>과 같은 국내 기록들도 충분히 내포하지 않습니까? 


고종이 어디까지나 개화 지향적인 인물이었음에 틀림없지만 가렴주구와 뇌물의 "먹이사슬"을 상식쯤으로 알았던 그에게는 모든 개혁의 유일한 목표는 바로 자신과 그 측근들의 권력의 공고화, 그리고 수탈 체제의 영구화이었던 듯합니다.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지만 만약 샌즈와 민영환의 "중립화" 계획이 성공돼 조선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황실과 그 측근의 "살찌우기"를 궁극적 목적으로 했던 그 기형적인 "유사 근대화"는 아마도 계속 민중의 거센 저항에 부딪쳤을 것이고 민씨척족과 고종 측근들을 극단적으로 혐오했던 지배층의 대다수조차를 결코 만족시켜 주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담이 너무 길었습니다만 한국의 조정을 한국인 이상으로 잘 파악하고 "용감하고 인간적 존엄성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그 나름의 선심으로 "중립화의 혜택"을 입히려 했던 샌즈의 한국관(觀)의 문제점은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샌즈는 한국인들과 밀접히 유착된 상태에서 궁정 생활했지만 (백인에 비해서 "물론" 열등한) 일본인에 비해서도 한국인들이 비도덕적이며 능력이 모자란다고 봤던 그는 한국인들을 결코 동등한 인류로 생각하지 않았던 셈입니다. 


그에게는 한국 "귀족"들도 무능력과 협잡 이상으로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았지만 한국인 하인들을 체벌하지 않고서는 도박과 같은 벽들을 없앨 수 없다는(p. 105) 이야기나, 


"일본의 게이샤들은 지능 아니면 미모를 갖고 있지만 천민인 한국의 기생들은 게이샤만한 대접을 받은 적이 없다. 기생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 말하면 한국의 어느 계급의 여성 중에서도 미인이란 별로 안 보인다"

(pp. 197-198)는 식의 "경험담"들을 읽어 보면 그의 거의 체질적 수준의 인종주의를 느낄 수 있습니다.

 

한국의 "중립화" 계획이 좌절된 뒤에 한반도를 떠난 샌즈는 그 뒤에 한국에 대한 별다른 미련 없이 남미 등지에서 미국의 패권주의적 외교를 전개했으며, 회고록 작성 때에 이미 식민지로 전락되고 만 한국의 참극에 대해서는 그 텍스트에서 별다른 동감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션교사 혈버트의 조선문화 멸시 

 

외교관 이야기를 하도 장황하게 했기에 국가 공무원들보다 조금 더 인간적이며 인본주의적여야 할 선교사들의 이야기도 해야 할 듯합니다. 혹시, 양화진의 외인 묘지에 있는 유명한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한자 이름: 轄甫, 본명: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의 묘비를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고종과 매우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가졌던 "해이그 밀사 사건"(1907년)의 주역 중의 한 명인 헐버트의 묘비명은, "나는 [영국의 명사와 귀족들이 묻히는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라고 돼 있습니다. 

 

광복 직후에 한국에 초빙됐다가 미국의 땅에서 묻히고 싶어 죽기 직전에 미국에 돌아간 서재필과 대조적으로 1949년에 한국에 들어와서 서거하여, 생전의 숙원대로 한국 땅에서 묻힌 헐버트 같은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커다란 사랑을 가졌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객관적으로 보면 그의 한국 인식의 기본틀은 제국주의 시대의 비틀어진 "상식"을 크게 벗어난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의 <한국사> (<History of Korea>, 1905)라는 방대한 저서의 제2권에서 한국 전통 문화의 

"몰락"을 다음과 같이 논했습니다: 

 

"퇴보하는 왕국이나 죽어가는 문명을 위해서 통곡하는 것은 별로 좋지 않은 철학이다. (…) 

한국에서 지금 낡은 것들이 소리나게 죽어가고 있으며 새로운 술이 옛날의 술병에 부어지고 있다." 

 

다른 저서인 <대한제국 멸망사> (<The Passing of Korea>, 1906)에서 한국 전래의 무속을 "한국인들에게 씌워진 저주"라고 서술하고 불교 사원의 "잔인한" 지옥도 (地獄圖)들이 한국 형벌 제도를 잔혹하게 만드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미쳤다고 주장하는 등 한국의 전통 문화를 "청소"의 대상으로 본 헐버트인 만큼, "죽어가는" 전통 문화에 대해서 "통곡"할 리는 만무했습니다. 

 

데니, 알렌, 샌즈, 헐버트… "지한파" 내지 "친한파"라 부를 만한 이들은 각자 구한말의 한국 문화의 새로운 변모에 나름대로 기여한 사람들임에 틀림없지 않습니까? 


데니의 "독립론"도, 알렌이 처음으로 소개한 근대 의료도, 샌즈의 "중립화" 노력도, 

헐버트의 개척적인 한국사 서술이나 독립 운동도 다 대외 접촉의 긍정적인 결실로 봐도 무방할 듯합니다. 

인간적인 차원에서도 그들 중의 일부에 한국에 대한 호감이나 선심이 남달랐다는 것은 분명히 사실입니다.

 

문제는 무엇입니까? 인간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본인의 사회와 시대를 뛰어넘을 수 없는데다가, 이들 "지한파"들이 속했던 제국주의 중심지 미국의 상류층, 중산층의 경우에는 혁명가나 아주 특별한 종교적 이상주의자가 되지 않고서는 그 당시 제국주의의 중심 담론인 서구 우월주의와 인종주의를 결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혁명가인 마르크스라 해도 인도가 영국인에 의해서 "수천 년의 잠에 깨어났다"는 식의 속류 오리엔탈리즘을 극복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혁명가도 정말로 탈(脫)속세적인 이상주의자도 아니었던 이들 "지한파"는 더더욱 잔인한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 서구/기독교 우월론에 그대로 매몰됐으며, 구미지역/기독교/"근대문명" 중심적인 제국주의적 세계관을 한국에 이식시키는 데에 열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외국인노동자의 지옥이자 미국 투기꾼들의 천당이 된 오늘의 한국

 

사실, 선심과 (서구화시키고 싶은 대상물로서의) 한국에 대한 호감이 강할수록 그들의 강도적인 세계관을 남의 땅에 심는 일에 더욱더 열을 올렸던 것이지요. 제국주의라는 마굴을 정신적으로 벗어나지 않고서는 소위 "선심"이란 – 옛날 속담대로 - 결국 지옥으로 가는 길을 포장해 주는 돌로 돌변되지 않습니까? 

 

이들 "선심에 가득 찬 제국주의자"의 제자의 제자의 제자 격이 되는 지배층이 아시아 노동자의 고혈을 잔혹하게 짜면서 미국의 투기 자본 앞에서 꼼짝 못하는 오늘날의 한국은, 바로 이와 같은 인종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지옥"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한국 문화를 무시하면서 한국을 "제2의 미국"으로 만들려는 자들의 망상이 결국 현실로 나타났다고 생각해 보면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이념가 프렌시스 푸쿠야마가 퍼붓는 말과 달리, 역사는 아직 결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한파"이야기만 하면 안 될 듯합니다. 헐버트와 같은 "문명의 전도사"들이 한국을 사랑하면서도 "유일하게 진보할 수 있는 기독교 문명"에 그 절대적인 충성을 바쳤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식민화를 막는 데에 도와달라는 고종의 애원을 무시해버린 미국의 정책에 대해서 "가장 모욕적인 방법으로 한민족을 배신하는 데 제일 앞장섰다 "고 소리 높여 비판한 헐버트와 같은 친한파 양심적 미국인들조차도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그 당시의 대다수의 미국의 학자, 저널리스트들이 한국이라는 "퇴보적인 국가"(George Kennan, "Korea, a Degenerate State": <Outlook>, Oct. 7, 1905)가 "진보적인 일본"(William Griffis, <Corea, the Hermit Nation>, 1889)에 그 국권을 빼앗기는 것을 "당연하고 다행스러운 일"로 평가했습니다. 


미국 사학의 거두로 알려져 있는 데네트 (Dennett, Tylor: 1883-1949)가 "한국이라는 자그마한 보트가 침몰되지 않으려면 일본에 의해서 반드시 견인돼야 한다"라는 – 지금이면 망언쯤으로 들리는 – 발언을 했을 때, 그는 단지 미국 학계와 외교계의 지배적인 분위기를 정확하게 표현했을 뿐입니다. 


필리핀이나 중미 등지에서의 식민지 약탈 정책을 "문명의 전파"라는 미명으로 합리화했던 당대 미국의 "주류" 인사들은, "조선 폐정 (弊政)의 개혁"을 들먹였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더 쉬웠던 것입니다.

 

서구와 미국을 모범, 보호자, 시혜자로 생각했던 구한말의 많은 인물들에게 돌아온 것은, 정(情)이 아니라 제국주의적인 냉혹함과 모멸이었습니다. 그리고 구한말에 일각의 개화파를 중심으로 만들어지기 시작된 미국 중심적인 친제국주의적 세계관은, 결국 미군에 의한 한반도 남반부 점령 (1945년) 이후에 한국 지배층의 주된 담론으로서 공고화돼 한국을 오늘날의 아시아 노동자 "지옥"이자 오만한 미국 투기꾼들의 "천당"으로 만드는 데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친미주의의 승리는 어디까지는 그 다음의 이야기이며, 구한말로 국한시켜 이야기하자면 미국 방조 하의 일본의 한반도 침탈은 그 때의 민영환 등의 궁정 "신미"(信美)파를 극도로 절망시켰습니다. 믿었던 미국이 결국 배신한 것은, 민영환 자살의 하나의 요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까? 


현재 미국을 "불변의 동반자"나 "혈맹"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그 당시에 고종을 비롯한 여러 "신미"(信美)파들이 궁극적으로 느꼈던 좌절과 배신감이 어느 정도 컸는지를 꼭 기억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드디어 봄이 찾아 오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되는 책

 

⊙Coleman, Craig, <American Images of Korea>, Hollym, 1997.  

⊙Chay Jongsuk, <Diplomacy of Assymetry: Korean-American relations to 1910>,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0. 

⊙Choy Bong-youn, <Koreans in America>, Chicago, 1979.  

⊙Dennett, Tylor, <Americans in Eastern Asia>, NY, 1922.  

⊙William F. Sands, <Undiplomatic Memories>, Royal Asiatic Society, Korean Branch, 1990 

                                  (한국어 번역: <조선비망록>, 신복룡 옮김, 한말 외국인 기록 18, 집문당, 1999).  

⊙Robert R. Swartout, Jr., <Mandarins, Gunboats, and Power Politics: Owen Nickerson Denny 

          and the International Rivalries in Korea>, Honolulu: The University Press of Hawaii, 1980.  

⊙김원모 완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출판부, 1991.  

⊙김현숙, "구한말 고문관 데니 ( O. N. Denny : 덕니 (德尼) ) 의 『 청한론 』 분석", - <이화사학연구>, 

                제23-24권, 1997, 113-141쪽.  

⊙<조선견문기> - 한말 외국인 기록 4, H.N.알렌 (지은이), 신복룡 (옮긴이), 집문당, 1999.  

⊙현광호, <대한제국의 대외정책>, 신서원, 2002.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11.서양인의 조선관 -지금 우리는 1백년전의 서양인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가 -박노자의 생각. 프레시안.2004,  4.  2.



12.서양인의 조선관(觀) 

-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 허동현의 생각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서양인들의 한국관을 이야기하려 하니 다니엘 데포(Daniel Defoe, 1660 - 1731)가 1719년에 지은 『로빈슨 크루소』(원제 : The Life and Strange Surprising Adventures of Robinson Crusoe)와 조나단 스위프트(Jonathan Swift, 1667 ~ 1745)가 1726년에 쓴 『걸리버여행기』(원제 : Travels into Several Remote Nations of the World)가 문득 생각납니다.

 

어린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이 두 권의 소설책은 영국인이 자국이 세계제국으로 등장하던 무렵에 썼고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 우월주의가 책갈피마다 짙게 배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더군요. 


로빈슨 크루소의 눈에는 비서구인들은 야만의 상징인 식인종으로, 심지어 서구세계의 일원인 백인종 스페인 선원들마저 악인들로 비칠 뿐이었습니다. 그러니 걸리버가 만난 키가 6인치도 안되는 소인국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아시아인들을 빗대어 조롱한 것으로 보는 것도 지나친 억측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로빈슨의 표류기를 인간이 사회적 동물임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그리고 걸리버 여행기는 재미있는 사회 풍자소설로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모든 책은 시대의 산물이란 관점에서 보면, 이 두 책에서 "해가 지지 않는" 세계제국 영국의 오만이 물씬 풍겨 나오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한 세기 전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들을 살펴 볼 때, 그들은 한국에 대해 호감을 가졌든 그렇지 않든 간에 


선진과 후진, 진리와 미신, 문명과 야만, 합리와 비합리, 강자와 약자, 타자와 자기, 백인과 비백인 그리고 진보와 정체 같은 이항 대립의 눈으로 백인종 우월의식에 대한 확신을 갖고 한국을 낮추어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일그러진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 Korea and Her Neighbours』  /   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



"토착 한국인들의 특징인 의심과 나태한 자부심, 자기보다 나은 사람들에 대한 노예근성이, 주체성과 독립성, 아시아인의 것이라기보다는 영국인의 것에 가까운 터프한 남자다움으로 변했다. 활발한 움직임이 우쭐대는 양반의 거만함과 농부의 낙담한 빈둥거림을 대체했다. 돈을 벌수 있는 많은 기회가 있었고 만다린이나 양반의 착취는 없었다. 안락과 어떤 형태의 부도 더 이상 관리들의 수탈의 대상이 되지는 않았다. 이 곳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것은 불안함의 원천인 부보다는 명예였다. 이곳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평온할 수 있었다. …한국에 있을 때 나는 한국인들을 세계에서 제일 열등한 민족이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고 그들의 상황을 가망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곳 프리모르스크에서 내 견해를 수정할 상당한 이유를 발견했다. 이 곳에서 한국인들은 번창하는 부농이 되었고 근면하고 훌륭한 행실을 하고 우수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로 변해갔다. 이들 역시 한국에 있었으면 똑같이 근면하지 않고 절약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기근으로부터 도망쳐 나온 배고픈 난민들에 불과했었다. 이들의 번영과 보편적인 행동은 한국에 남아있는 민중들이 정직한 정부 밑에서 그들의 생계를 보호받을 수만 있다면 천천히 진정한 의미의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나에게 주었다."                 (이사벨라 버드 비숍 저, 이인화 역,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urs)』, 살림, 1994, pp. 276-277)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생활상을 보고 "정직한 정부"가 들어선다면 한국인들이 "시민"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한국인의 미래에 후한 평점을 주었던 영국인 비숍(I. B. Bishop, 1832~1904)조차 19세기 서양의 식민주의 담론과 백인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 벗어나지는 못했습니다. 


한 마디로 "한국은 없다" 이것이 개화기 한국을 둘러본 서구인들 대다수가 품은 한 세기 전 한국의 현실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문화론과 민족성론

 

물론 제한된 경험과 편견을 가진 관찰자의 머리 속에서 상상되고 재구성된 한 나라에 대한 문화론은 타자에 대한 특수성 찾기일 뿐입니다. 특히 어떤 민족의 집단적 특성, 즉 민족성은 사회의 발전 정도에 따라 변해가는 추세이지 불변의 특징은 아니지 않습니까? 

 

1986년 대학원생 시절 처음 일본에 가보았을 때 겪은 제 개인적 경험에 비추어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그때 저는 큐슈(九州)대학 조선사학과 학생들과 회식을 마친 후 일본 학생들이 제 몫의 식대를 나누어 내는 소위 더치페이를 목격하고는 일본인들의 민족성은 참 쩨쩨하다고 고소를 금치 못했지요. 


왜냐하면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소위 신발 끈 짧은 사람이 식대나 술값을 계산하곤 했으니까요. 그런데 20여년이 지난 요즘 우리 젊은이들도 더치페이에 익숙하더군요. 


사실 저는 자본주의가 이식된 어떤 사회에서건 산업화가 진전되고 합리주의와 개인주의와 같은 가치관이 널리 퍼지면 더치페이는 생활의 일부로 굳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요즘에야 깨달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미공사 박정양을 비롯한 당시 우리네의 비위생적인 생활 습관을 질타했던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과 같은 서양인들도 국민국가의 소산인 위생 관념이 보급되기 전에는 우리네 선조들 못지않게 비위생적인 생활환경과 관습을 지니고 살지 않았던가요? 


하이힐이 파리의 뒷골목에 뒤덮인 인분을 밟지 않으려는 노력의 소산이라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도 있고, 향수의 용도가 목욕을 하지 않아 풍기는 퀴퀴한 체취를 감추기 위한 미봉의 수단이었다고도 하더군요. 

남성이 길 바깥쪽에서 여성을 에스코트하는 것이 에티켓인 요즘과 달리 길 안쪽에 남자가 섰던 시절도 있었다지요. 


그 이유가 화장실이 없던 시절 늘어선 건물의 창에서 언제 날아들지 모를 오물로부터 여성을 지키겠다는 배려였겠지요. 그렇다면 한 때 명절 때만 목욕하던 한국인들은 요즘 아침저녁으로 샤워를 하고 있듯이 근대 과학이 발달하고 위생관념이 보급되면 바뀌는 것이 생활습관 아니겠습니까? 

 

비숍이 예언한 대로 시민으로 진화한 오늘의 우리들은 개화기 서양인들이 남긴 우리의 특수성에 관한 관찰기록들을 편견의 산물이나 "장님 코끼리 만지기"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한 세기전의 관찰자들에 의해 형성된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부정적 한국인식이 개화기와 일제시대, 그리고 해방 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한국문제를 다룰 때마다 여전히 살아 숨쉬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 현실이기에 이러한 인식의 뿌리를 찾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 합니다. 

 


서구인의 체험기에 보이는 일본의 부정적 영향

 

저는 "한국은 없다"와 "일본은 있다"로 극명하게 대비되는 한 세기 전 서양인들의 판정이 아누비스(Anubis)가 쓰던 정의의 저울처럼 정확할 것 같지는 않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물론 한국의 전통문화와 자치능력을 비하하는 서구인들의 체험기가 한국에 대한 부정적 인식의 근원적 뿌리임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그 이면에 존재하는 일본의 역할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잘 알려진 대로 일본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해 서구 여러 나라를 대상으로 조직적인 선전 활동을 펼쳤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일본이란 프리즘에 의해 일그러진 한국의 이미지가, 카스라ㆍ태프트 밀약이 웅변하듯 미국과 일본 두 나라 사이 이해의 유착관계를 배경으로 미국의 주류 인사들의 뇌리에 깊게 뿌리내렸던 것이지요. 

 

예컨대 1882년이래 일본 외무성에 고용되어 여러 번 훈장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이익을 대변한 미국인 스티븐스(D. W. Stevens)는, 1904년 한국 외부(外部)의 고문이 된 후 1907년 두 명의 애국지사―전명운(田明雲, 1884 ~ 1947)과 장인환(張仁煥, 1877 ~ 1930)―에게 사살될 때까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하는 선전활동―일본의 보호 아래 한국인들이 더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든가, 일본이 아니었다면 러시아가 한국을 장악했을 것이라는 논조로 일제의 입장을 대변하는―을 전개하였습니다. 

 

일본 정부 초청으로 1905년 한국을 잠시 방문했던 친일 언론인 케난(George Kennan)도 『아웃 룩(The Outlook)』(1905년 10월호)에 한국인을 깎아내리는 글을 실었습니다. 

 

"한국인은 보잘 것 없을 뿐 아니라 서양인은 한국인과 더불어 정신적 동감을 느낄 것이 없기 때문에 한국인에게는 서양인의 관심을 끌거나 동정을 살 만한 점이 없다. 그들은 두고 볼수록 게으르고 더럽고 나쁜 일을 예사로 하고 거짓되면서 엄청나게 무식하며 사람이 자기의 능력과 가치를 깨닫는 데서 생기는 자존심도 없다. 저들은 미개한 야만인이요 퇴폐한 동양 문명의 썩은 분비물이다"라고 말입니다. 

 

또 한 사람의 친일 미국인으로 1907년 통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예일(Yale)대학의 래드(George Trumbull Ladd, 1842~1921)교수도


 "저들은 안이하기를 좋아한다는 것보다 게으르다. 사람은 희망이나 필요조건에 자극을 받지 아니하면 자연스러이 게으른 동물이지만 담뱃대를 빨면서 땅에 침을 뱉는 노동자와 농민들이나, 일하는 대낮에 드러눕기 일쑤인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한다. 한인은 성나면 앞뒤를 가릴 줄 모르게 잔인하고 생명을 전혀 돌보지 않는다. 상거래에서 신용을 지키거나, 남의 소유물을 존중히 여기는 것 같은 일은 한인 중에는 찾아 볼 수 없다

(In Korea with Marquis Ito, p. 290)"고 혹평하였습니다. 

 

이들 친일 미국인들의 악담이 균형을 잃은 것이었던 것임은 동 시대 미국인들의 입을 통해서도 들을 수 있습니다. 

알렌은 윤치호에게 보낸 1905년 11월 30일자 서한에서 


"케난이란 자가 한국에 관하여 매우 고약스런 글을 이 나라 한 저명잡지에 기고하였습니다. 내가 만나 본 사람은 다 읽은 듯 합니다. 그는 일본 훈장을 받을 공작으로 그리하였나 봅니다"

라고 해 그 동기의 순수하지 못함을 지적하였으며, 


서울 주재 장로회 선교사 밀러(E. H. Miller)도 1908년 12월 9일자로 브라운(Arther J. Brown) 박사에게 보낸 

서한에서 

"래드가 한국 체류중에 한국 실정을 직접적으로 알아보려는 태도를 갖추었다고 볼 수 없다. 그는 통감부 손님의 입장에서 우리들이나 우리의 사업을 보려고 왔던 것이다. 그는 일본인들이 보이려고 준비한 것만 보았다. 이는 편견이다"라고 일침을 가하였습니다. 

 

그러나 한국인을 비방하고 깎아내리는 일본의 대미 선전공작은 오랫동안 지속된 일본과 미국 두 나라 사이의 이해의 유착 때문에 미국 조야에 쉽사리 수용되었습니다. 

예컨대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5년 1월 데오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 미국 대통령은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침략자에게) 일격도 가하지 못하는 한국인을 위해 일본을 상대로 중재에 나설 수는 없다"고 잘라 말하며 조미수호조약에 명시된 거중조정의 의무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쳤습니다.

 

이런 연유로 "내가 이 수도에 와있는 짧은 기간동안 보고 들은 바로써 이 나라의 모든 일이 청국의 간섭만 없다면 순조롭게 진행되고 이 나라가 급속히 번영하고 산업이 일어날 것을 단언할 수 있다. 그러나 청국 주차관 원세개의 방해로 이 모든 발전이 저지되고 있다"


며 한국의 독립과 개화를 지지했던 딘스모아(H. A. Dinsmore, 재임, 1887~1890) 공사와 같은 몇몇 미국인의 긍정적 한국 인식은, 미국 주류사회에 전파되지 못한 채 극소수의 생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한국을 사랑한 서양인들

 


 

Frederick Arthur Mckenzie,『Korea's Fight for Freedom)』 / 신복룡 번역  『한국의 독립운동』 집문당


한말의 의병을 이야기 할 때 떠오르는 한 장의 사진이 있지요. 이글거리는 눈으로 지휘도를 든 대한제국 군복 차림 장교의 지휘 아래 십여명의 의병이 당당히 총을 겨눈 모습의 사진 말입니다. 1907년 가을에 이 사진을 찍은 매켄지(Frederick Arthur Mckenzie, 1869~1931)는 의병들의 전투를 직접 취재하고 기록하였습니다. 

 

"일본인들의 목적은 가능한 한 의병의 활동이 알려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며, 동시에 의병을 양민에 대해서 노략질하는 비도로 보이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전 세계에 이러한 여론을 조성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활동은 사실상 더욱더욱 커져 갔다. 한국인들은 무기를 구할 수가 없어 맨주먹으로 싸웠다. 

약 2년 후인 1908년 7월, 한 일본인 고관은 서울에서 열린 특별법정에서 베셀(Bethell)씨 심문에 증언하면서, 당시 약 2만명의 일본 병력이 소우를 진압하는 데 동원되고 있으며, 전국의 약 반이 무장봉기가 일어난 상태이었다고 말한 바 있었다. 

한국인들은 1915년까지 전투를 계속하였으며, 이 해에 이르러 비로소 반란이 완전히 진압되었다는 일본의 공식 발표가 있었다. 산악 주민들, 평지의 젊은이들, 범 사냥꾼들, 그리고 늙은 군인들이 겪어야만 했던 고초를 다른 사람은 어렴풋이나마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인에 대해서 기왕에 '비겁하다'느니, '냉담하다'고 던졌던 조롱은 가시기 시작했다."

(매켄지 저, 이광린 역, 『한국의 독립운동(Korea's Fight for Freedom)』, 일조각, 1969. p. 121)." 

 

캐나다인으로 영국 런던에서 발행되던 『데일리 메일(Daily mail)』의 기자였던 매캔지가 남긴 기록은 루즈벨트 대통령의 이야기와 너무도 다른 우리네 선조들의 기상을 전해줍니다. 

 

그도 한국에 오기 전에는 한국보다 일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접 한국을 돌아본 결과 자신의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고 하더군요. 


"일본군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고 부녀자를 겁탈하는 비인도적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한국인은 비겁하지도 않고 자기 운명에 대해 무심하지도 않다. 한국인들은 애국심이 무엇인가를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 말입니다.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 베셀(Ernest Thomas Bethell) ·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Korea Daily News)』와 같은 신문을 발행하면서 항일언론 활동에 신명을 바친 베셀(Ernest Thomas Bethell, 1872~1909)이나, 매켄지처럼 이 땅에 와서 살면서 가까이에서 한국인들을 접했던 몇몇 서양인들은 일본의 선전이 왜곡된 것임을 깨닫고 우리의 잠재능력과 미래를 긍정했습니다. 


하지만 서구 주류 사회의 대다수 인사들은 한국의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기 위한 일본의 선전에 넘어가 한국의 경제적 가치와 자치능력을 평가 절하하였지요. 따라서 이들 몇몇 서양인의 긍정적 한국 인식은, 서양 주류사회에 전파되지 못한 채 극소수의 생각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그처럼 호의적으로 대했음에도 서구로부터 냉담한 반응만 되돌아온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 아닐까요? 


 

한 세기 전 부정적 한국 이미지는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아직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기란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기를 기대하는 일과 같다"는 영국 『더 타임스(The Times)』의 조롱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세기 전 서양인들의 뇌리에 각인된 부정적인 한국의 이미지는 오늘까지도 재생산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레고리 핸더슨(좌)·소용돌이의 한국 정치(Korea:The Politics of the Vortex)초판 표지(중)·번역본(우)



일례로 아직도 한국에 파견되는 미국의 관리나 장성들에게 필독서로 한국에 대한 가이드북 역할을 하고 있는 헨더슨(Gregory Henderson, 1922-1988)의 『한국 : 소용돌이의 정치(Korea : The Politics of the Vortex)』는 한국에 대한 뿌리 깊은 편견을 계속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는 전근대사회로부터 1960년대―개정판에서는 1980년대―까지 한국의 정치를 "the Vortex" 즉, "소용돌이" 내지 "회오리바람"의 정치로 파악했지요. 그의 입론은 한국사회는 중간집단의 형성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낱낱이 흩어진 개인들이 모두 중앙권력을 향해 직접적으로 달려드는―마치 회오리바람이나 소용돌이 같이 하나의 정점을 향해 빨려 들어가는―형국을 취한다는 것이지요. 

 

"한국의 여러 조직들은 조직 자체나 조직원들이 중심축을 향해 상승하는 흐름에 참여하려고 하는 아메바적 성격을 갖고 있어야 했다. 그 중심축은 가정 이외에 한국문화가 만들어낸 거대한 산물이다. 조직은 유동성만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기능하는가는 문제시되지 않는다. 

위계질서적 상하관계도, 조직원칙도, 지도자를 결정하기 위한 확실한 기준도 없다. 상의하달식 지도력은 뿌리가 없고 일시적인 존재에 불과했다. 하층사회는 지도층에 대해 아는 것이 없고 분리된 채 있다. 대표선출 과정에서 개인적 요소 이외의 것은 수용되지 않는다. 

언제나 독재라고 하는 형태를 띠고 나타나는 권력고립화의 원인은, 공산주의라든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이데올로기 때문도, 또는 김일성, 이승만, 박정희라고 하는 인물의 성격 또는 야심 때문도 아니다. 

사실 과거 조선이나 현 한국의 정치적 혼전은 이데올로기와 정책 강령, 인격 및 지도력 등을 중앙권력 획득경쟁에서 쓸데없는 것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결과적으로 장기간에 걸친 한국의 격렬한 정치사에는 중요한 토착적 철학이 전혀 생겨나지 못했으며, 지속적인 강력한 정치지도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수도 바깥에 뿌리를 두고 발생하는 사건도 정쟁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중앙의 이익에 관계없는 개발계획은 곧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모든 가치는 중앙권력에 속했다. 

권력기반도, 안정성도, 야심을 만족시질 수 있는 대체 수단도 없이 권력을 향한 경쟁에 뛰어드는 사람들이 계속 증가했다. 이 사회는 높이 솟은 원추형 소용돌이라는 특유의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와같은 소용돌이 구조는 지금까지는 한국에서만 추적되고 있으며 기록도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레고리 헨더슨 저, 박행웅 등 역,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한울 아카데미, 2000, pp. 514~515) 

 

이 인용문에서 식민주의사관―독자성의 결여를 지적하는 타율성론, 봉건제도의 결여에서 자율적 근대로의 길을 부정하는 정체성론, 모래알과 같은 민족성으로 상징되는 당파성론―의 영향과 제2차대전 후 라이샤워(E. O. Reischauer)나 홀(J. Hall) 같은 일군의 미국학자들이 제기한 ​"일본근대화론"의 강한 자취를 느낀다면 너무 민감한 것일까요?

 

라이샤워는 일본은 ​"목표 지향형의 사회"​이고 한국과 중국은 "지위 지향형의 사회"였기 때문에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였고 한국과 중국은 자발적 근대를 이루지 못한 것으로 설명하더군요. 


과거제도가 채택된 지위지향형의 사회였던 한국과 중국 사회는 하나의 목표에 대한 집념보다 지위 상승을 위한 공부를 중시하므로 장인정신 같은 기술 발전에 도움이 되는 정신이 나올 수 없었던 반면, 목표지향형의 일본은 주어진 한계 내에서 극한을 추구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기술축적이 가능했고 이 때문에 근대로 갈 수 있었다는 논리입니다. 


제가 보기에 헨더슨의 "회오리바람론"은 "지위 지향형 사회론"의 모조품이자, 한 세기 전부터 유포된 부정적 한국인식이 거꾸로 투영되어 선험적으로 유추된 결과론적 해석인 것으로 보입니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집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이러한 한국 폄하론이 우파 학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외교정책을 공격해온 미국학계의 대표적 지한파 학자 브루스 커밍스에게서도 한 세기 전 헐버트 (Hulbert, Homer Bezaleel: 1863-1949)와 같이 한국을 타자화해 낮추어 보는 오리엔탈리즘의 시각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그의 저작을 읽다 보면 반미(反美)ㆍ반제(反帝)의 비판의식과 약소국 한국민중에 대한 강렬한 연민의 정이 심금을 울리지만, 결국 그 역시 "합리주의자"를 자처하는 미국인, 즉 "영원한 타자"의 눈으로 한국 "근대성"의 역사 자체를 부정하는 오만함이 느껴지더군요. 

 

그는 합리성이 결여된 "한국"과 서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근대성"을 연결시킬 수 없다는 오리엔탈리즘의 각본대로 조선후기의 역동성과 개화기의 자주적 근대화의 가능성을 부정하고 남한의 현대사도 깎아 내리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공화국은 예전에는 완전히 종속적이었다. 이 나라는 처음에는 식민지였다가, 그 다음에는 외국군에게 점령당했으며, 그 후 1950년 여름에 미국이 이 나라를 망각의 늪에서 구출했다"

(김동노 등 역,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Korea's Place In the Sun : A Modern History)』, 창작과 비평사, 2001, p. 419). 

 

그에 의하면 한국의 산업화는 식민지 시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산업화의 물적ㆍ인적 토대를 바탕으로 해방 후 미국 시민들의 세금으로 조성된 거대한 원조에 의해 종속적으로 이루어진 예기치 못한 성공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한국 현대사를 보면, 분단과 동족상잔, 개발독재를 뚫고 시민사회를 이룬 오늘의 한국인들의 노력은 부정되어 버리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반구제기(反求諸己)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우리에게 미국은 무엇일까요?  

박노자 교수님 지적처럼, 미국은 한 세기 전 우리에게 "정(情)이 아니라 제국주의적 냉혹함과 모멸"을 안겨준 배반자였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만이 아니라 윌슨(Woodrow Wilson) 대통령도 거족적으로 일어난 3.1운동의 독립 요구에 귀를 막았습니다. 


심지어 프랭클린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 대통령은 우리의 자치능력을 의심해 일본의 패망 이후에도 20~40년 동안 독립을 허락하지 않으려고 했고, 트루만(Harry Truman) 대통령은 일본의 항복을 며칠 앞두고 38도선을 그어버려 분단의 비극을 초래했습니다. 


5.16 군사쿠데타와 신군부의 집권을 방조한 미국의 위정자들도 민주주의적 제 가치가 구현되는 시민사회를 이루려 했던 한국인들의 열망에 눈을 감아버렸었지요. 이처럼 미국과 관계를 갖게 된 이후의 역사를 조감해 볼 때, 미국은 우리의 주체적 역사발전을 왜곡하는 제국주의적 패권국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해방 후 한미관계가 미국의 일방적 전략적ㆍ경제적 이해타산에 좌우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동전에 양면이 있듯이 잃은 것이 있다면 얻는 것도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닐는지요.

 

저는 이 시기에 옛날 우리 선조가 그토록 열망하던 미국과의 긴밀한 유대를 쌓고 이를 기반으로 서구중심 세계질서 속에 진출해 산업사회의 일원으로 거듭났으며, 다원적 시민사회도 일구어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필요에 의한 미국과의 유대강화와 이를 통한 우리 국익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두 나라의 관계를 본다면, 

미국은 제2차대전 이후 일제를 몰아내고 해방을 가져다 준 "구원자"이자 우리와 이해를 같이하는 우방으로 평가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이제 또 다시 우리의 생존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외세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다시 돌아온 힘이 곧 정의인 시대에 "정"에 호소하다 맛본 좌절과 배신감을 또 다시 맛보지 않기 위해 쓰라린 과거사에서 어떤 교훈을 얻어야만 할까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입장을 제대로 대변해 줄 미국 내 세력을 키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세기 전 일본의 손을 들어준 쪽이 루즈벨트를 비롯한 주류 인사들이었던데 비해, 우리 편을 들어주었던 인사들은 그렇지 못했기에 미국인을 상대로 우리의 모습을 바로 알리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이제 우리들은 한국이 그들의 원조와 보호를 일방적으로 구걸하는 수혜자가 아님을, 그리고 "퇴보적인 국가"가 아니라 그들의 번영을 위해 꼭 필요한 동반자임을 미국 주류사회에 널리 알려 다시는 그들이 모멸과 비웃음으로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급선무가 아닐까 합니다. 

 

한 세기전 우리들은 미국에게 그렇게 간절하게 독립을 도와달라고 호소했는데, 그들의 가치인 민주주의를 그렇게 짝사랑했는데 왜 미국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렸을까요? "발이부중(發而不中)이면, 반구제기(反求諸己)하라."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나오는 말입니다. 


짝사랑하는 상대에게 큐피드의 화살을 쏘았음에도 냉담한 반응만 돌아왔다면, 그 원인을 상대에게 돌리기보다는 우선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합당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많은 정을 보냈는데 어쩜 그리도 냉정하냐고 상대를 비난만 한다면, 우리 가슴 속에는 배신감과 증오만 남을 터이니 말입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바로 자신에 대한 반성적 고찰인 것 같습니다.

 

이승만의 민주독재, 박정희와 신군부의 군사독재를 넘어 다원적 시민사회를 일구어내는 동안 우리들은 시민사회는 남이 만들고 지켜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만들고 지킬 때 이루어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미국에게 왜 우리의 국가를 아니 민주주의를 지켜주지 않았느냐고, 왜 우리를 배신했느냐고 책망하기보다 왜 그들이 그러했는가의 원인을 우리 안에서 찾는 것이 보다 나은 자세일 듯합니다. 


 

더 읽을 만한 책

 

⊙김세중. 「G. 헨더슨, 『한국: 회오리바람의 정치』」. 『해외한국학 평론』창간호, 2000. 

⊙단국대학교 동양학 연구소. 『개화기 한국과 세계의 상호 이해』. 국학자료원, 2003. 

⊙신복룡. 『이방인이 본 조선 다시 읽기』. 풀빛, 2002. 

⊙유영익. 「19세기 말 조․미관계의 전개와 일본의 역할」. 『한국근현대사론』. 일조각, 1992.

⊙이배용. 「서양인이 본 한국 근대사회」. 『이화사학연구』28, 2001. 

⊙조동걸. 「인간의 길을 향한 100년의 전통-20세기 한국사의 전개와 반성-」. 『한국사학사 학보』 1, 2000.

⊙최기영. 「매캔지: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알린 서양인」. 『한국사 시민강좌』34, 2004.

⊙한철호. 『친미개화파연구』. 국학자료원, 1998.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12.서양인의 조선관 -일본의 왜곡이 부정적 조선관을 더욱 악화시켰습니다 - 허동현의 생각. 프레시안.2004,  4.  9.




13.일본인의 조선관(觀) 

- 서구 간섭 막고, 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 '복제 오리엔탈리즘'-박노자의 생각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과잉충성, 권위주의적 근대국가라는 괴물 만들어내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어렸을 때 배운 마르크스의 명언 중에서 제 머리 속에 지금까지도 남은 구절이 있습니다. 

"자본주의적 '진보'란 노동자의 시체들을 짓밟고 다니는 우상(偶像)을 모신 초대형 마차(juggernaut: 인도 신전의 전통 마차, 그에 치여 죽으면 곧 극락으로 간다는 믿음이 있었음)와 같은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회, 경제적인 차원에서 자본가들의 최대 희생자란 노동자임에 틀림없지요. 그러나 상징적인 폭력의 차원을 이야기하자면 그나마 "우리"의 울타리 안에 있는 존재로 인식되는 자국의 노동자에 비해서는 식민화의 희생자가 되는 비(非)서구 지역은 훨씬 더 심한 멸시와 타격을 당하게 돼 있습니다. 

 

"발전"의 망상에 도취된 서구는, 비서구 사회들을 늘 정체돼 있고 발전되지 못하는 "산 시체", "불구자", "병자"로 그리면서 그 언어적 폭력을 통해서 식민화의 물질적 폭력을 합리화합니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1978)이라는 탁월한 연구 저서는, 이와 같은 상징적 폭력에 "오리엔탈리즘"이란 명칭을 붙였지요. 


19세기말 서구의 서적에서 나오는 "허약하고 비현실적인" 인도의 성직자나 "비겁한 음모만 꾸밀 줄 아는" 중국 사대부 등의 이미지를 보면,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우상을 모신 초대형 마차"가 비서구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짓밟고 다녔는지 느낄 수 있습니다.

 

서구의 세계 체제에 편입하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 지성인들의 "오리엔탈리즘"에 대응하는 방법이 무엇이었는가요? 한편으로는, 그들이 서구인의 빈축을 사는 혼욕(混浴), 문신(文身)과 같은 전래 풍속을 금지하는 등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칼을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혼욕, 문신뿐입니까? 서구 열강들이 일체 폭력을 국가적으로 독점하여 개인적인 자의적 폭력을 원칙적으로 불허한다는 것을 일찌감치 파헤친 메이지 정부는 1873년 2월 7일에 "구토"(仇討, blood revenge - 양친이나 가까운 친척의 살해에 대한 사적인 복수)라는, 중국이나 조선에도 법적으로 일정한 범위 내에서 허용됐던 오랜 법속(法俗)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습니다. 


모델이었던 서구열강에서 사적인 폭력의 한 형태인 상류층의 결투(duel)가 아직 성행했던 그 당시에(러시아 군의 경우에는 1890년대 후반부터 장교가 모욕을 당했을 때 꼭 결투를 하는 것이 아예 법제화돼 있었습니다!), 

일본은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를 "스승들"보다 더 충실히 준수하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오리엔탈리즘적 "과잉 충성"이라 할까요? 문제는, 과거에 대한 "단절 선언"과 근대적 제도들의 졸속 확립은, 시민 사회의 발전이 국가에 의해서 억압됐던 상황에서는 바로 "국가 통제의 과잉", 즉 무소불위의 국가적인 폭력의 횡행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개인끼리의 전근대적 "복수"는 많이 근절됐지만 1923년 9월 16일의 헌병에 의한 거물 아나키스트 오스기 사카에(大杉榮)와 그 가족 몇 명의 잔혹한 살해와 같은 국가에 의한 사형(私刑)들은 제국 일본의 새로운 일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즉, 1868년 이전에 오리엔탈리즘에 젖은 서구인들이 마음대로 멸시할 수 있었던 혼욕, 춘화(春畵), 쌍칼잡이 사무라이, 그리고 사랑의 약속이란 의미로 문신이 새겨진 요시와라(吉原)라는 사창가의 게이샤들이 없어지거나 안 보이는 데로 감추어졌지만 서구의 여느 열강 이상으로 초법적인 통제력과 야망이 강한 메이지 식 권위주의적 근대 국가라는 괴물이 출현했습니다.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서구화를 과연 "역사적 진보"의 동의어로 봐도 되는가?

 

물론 저는 쌍칼잡이 사무라이가 새로 만든 칼을 시험한다는 의미에서 평민을 야간 노상에서 죽이곤 했던

(그것이 일본어로 "쓰지기리" - 辻斬り라고 하지요? 막부에서 금지령을 내려도 꽤나 흔했던 일이랍니다) 

그 무자비한 사족 지배 체제를 낭만화하거나 옹호할 뜻은 전혀 없습니다. 


다만, 내면화된 오리엔탈리즘에 의한 서구화를 과연 "역사적 진보"의 동의어로 봐도 되는가에 대해서 의문이 많은 것일 뿐입니다. 민중이 주체가 돼서 평등 지향적 혁명의 길로 갔으면 모르지만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을 체득하여 민중을 "문명화"의 대상물이자 수단으로만 봤던 자들에 의한 "근대화"란 결코 진정한 의미의 "진보"나 "발전"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진보적인 일본"과 "퇴보적인 아시아"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본인들의 "문명개화의 업적"에 대해서 높은 점수를 따려는 동시에 이웃인 중국과 조선을 마땅히 멸시를 당해야 할 "오리엔트"로 묘사했습니다. 


즉,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마차로 중국이나 조선을 같이 밟자고 하면서 본인들의 "준(準)서구인"으로서의 세계 체제에의 편입을 도모한 셈이지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탈아론>(脫亞論)이 수록된 『문명론개략』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4-1901)의 <탈아론>(脫亞論: 1885)의 말대로, "혹시 우리의 땅이 지나, 조선과 인접한 고로 서구인들이 우리를 지나, 조선과 동일시"할까 봐서, 일본의 "다름"을 애써 강조하는 것이었지요. 


이 <탈아론>이 "지나"와 조선을 문책할 때 재미있게도 "유교적인 인의예지에의 맹목적인 집착"과 "법치의 부재", "전제주의", "문명에 대한 무지" 그리고 "잔혹성과 오만"을 주된 공격의 표적으로 삼습니다. 


즉, 유럽인들이 이슬람 국가나 중국에 가진 "과거에만 집착하는 무지하고 오만한 폭군(暴君)의 나라" 라는 고정 이미지는, 다시 한번 일본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잔혹하고 무지한 동양인"으로부터 "문명적인" 자신들을 차별화시킬 의도는, 메이지 시대의 "대륙"관련 저술에서 늘 너무나 강력하게 느껴집니다. 

 

"동양에서 첫째 가는 완고한 나라"(<近時評論>, 1878년 1월 18일), 

"동해의 후미진 구석에 침체된 한 야만국"​(<近時評論>, 1876년 6월 24일), 

"조선 인민을 위해서라도 빨리 멸망하여 문명국의 관리 밑에 들어가야 할 야만적 정부의 나라"

(후쿠자와 유키치, 1885),

"한국은 봉건제도로도 못 나간 고대 사회일 뿐이고, 그 민족적 특성은 부패와 쇠망이다"(나중에 마르크스주의  

                    자로 이름을 날릴 경제사학자 후쿠다 도쿠조 福田德三, "한국의 경제 조직과 경제 단위", 1904), 

"한국인들은 여성들처럼 나약하고 한국은 어차피 죽어가는 나라일 뿐이다"

                           (일본적 개인주의를 제창했던 기독교적 지식인 니토베 이나조 新渡戶稻造, <隨想錄>, 1905), 

"유교의 영향으로 발전이 상당 부분 마비된 조선 사회는,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없었다면 자본주의로 이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 한국 경제사의 최고 전문가로 꼽혔던 시가타 히로시 四方博, <조선사회경제사 연구>, 1933)

 

단순히 침략의 선전꾼도 아니고 극단적인 국수주의자도 아닌 당대 일본에서 "최고의 지성"과 "자유주의자"로 인식됐던 사람들이 "일본형 오리엔탈리즘"의 틀을 전혀 벗어나지 못한 것은 사실 메이지의 근대성의 모방성과 천박함만 보여줄 뿐입니다. 


과거에 유럽에 문명의 은혜를 베풀었던 이슬람 문명에 대해서 19세기의 유럽인들이 

"이슬람 때문에 유럽의 발전지향적 봉건 사회도 자본주의도 자생적으로 배태할 능력이 없는 완고한 세상"

이라고 한 것과 하등의 차이 없이 메이지 지식인들은 과거에 일본의 스승이었던 한국의 "정체성"과 "타율성" 이야기를 만들어낸 것입니다.


 

조선의 지식인은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는가

 

그런데 한 가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한국으로서 내셔널리즘 형성 시기이었던 구한말에는 그 내셔널리즘의 초기 담지층이라 할 만한 언론인, 학자들이 이 일본의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과연 어떻게 반응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한국의 내셔널리즘 형성에 있어서는 원래부터 "외세로부터의 자극"이 결정적이었던 만큼, 자극적이기 끝이 없는 일본의 한국관(觀)에 대한 담론적인 저항이란 없을 수 없지 않겠습니까? 


물론 일본 고위 현직 관료나 정치인들의 망언들이 지금도 한국을 분노의 도가니로 만드는 것처럼, 구한말 초기의 내셔널리즘은 일본의 체계적인 대한 의식을 반영한 온갖 망언을 결코 좌시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미 최초의 민영 신문인 <독립신문>의 단계로부터 "일본인의 왜곡 보도에 대한 대응"이라는 하나의 장르가 한국의 공론에서 그 자리를 확고히 잡은 것입니다. 

 

예컨대, 원래 임금의 외국 공관 체류(아관파천)와 같은 국가의 일에 무관심하고 사리사욕만 챙기는 한국 대신들이 평소에 러시아의 조정을 받았다가 러시아 자본가의 이권 사냥에 의해서 그 소득을 잃고 나서야 반러 쪽으로 돌아섰다는 <오사카 마이니찌 심분>(大阪每日新聞)의 악의적 왜곡 보도가 일본의 대표적인 영문 신문인 <The Kobe Chronicle>에서 1896년 10일 13일에 번역돼 나가자, <독립신문>은 국문, 영문 양쪽 판에서 당장 포문을 열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 고종 정부의 의견과 마찬가지로 - 일본의 간섭을 제거하기 위해서 러시아를 끌어들이려는 계책을 기본적으로 불가피한 일로 생각했던 <독립신문>은, 조선 대신 사이에서의 "반러적 기류"의 존재를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외국의 "조정"이 아닌 내부적 필요성과 논리에 의거한 조선 정부 정책의 주체성을 부각시켰습니다.

 

"대군주 폐하께서 아관에 가실 때에 형세가 위태하신 까닭에 아관에 가셔서 보호하여 달라 하신즉 아라사 공사는 조선 대군주를 사랑하는 까닭에 마저 편안히 계시게 한 것이니 (…) 

조선 인민이 되어 외국사람이 대군주 폐하를 도와 드렸을 것 같으면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옳거니와 미워할 이치는 없을 듯한지라. 아무 때라도 대군주 폐하께서 환어하시려면 누가 막을 사람도 없고 더구나 아라사 공사야 환어하시는 것을 맙소사고 할 리가 없는지라. (…) 

대군주 폐하께서 아관으로 가실 밖에 수가 없어 된 사정은 우리만큼 분해 하고 탄식 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을 듯하나, 사세가 그렇게 된 것은 일본에서 잘못한 일이 있는 까닭이라. (…)"

                                                                                                     (1896년 11월 5일자 국문판 논설)

 

고종 정부 방침의 "상황의 논리"와 그 주체적 의도를 부각시킴으로써 "의타적이며 독립심이 없는 조선인"의 신화를 만들려는 일본 언론 쪽의 기본적인 인식 틀을 공격했던 셈입니다. 


이외에도 잘 알려져 있듯이 서재필의 <독립신문>은 일본 내의 신문뿐만 아니라 독립협회를 "외국인 이권 챙기기를 위한" 일종의 로비 단체로 그리려는 제물포의 <조센심보>(朝鮮申報) 등의 국내의 일본 신문들과의 지상 설전을 하는 과정에서 일본인들이 만들려는 "독립심이 없는 조선인"의 상(像)에 늘 일침을 가하곤 했습니다. 

 

주로 러시아나 러시아의 맹방 프랑스를 공격의 표적으로 삼은 1898년의 독립협회의 활동 내용 중에서도, 일본의 절영도 석탄고(石炭庫) 기지 반환을 요구하는 등 일본의 이권 침탈을 반대하는 일부의 내용


(물론 일본의 전례에 따라 주된 혐오의 대상인 러시아까지도 절영도 임차를 요구할 우려는 일본의 기지까지 문제 삼은 핵심적 이유이었지요: 정교, <대한계년사>, 제3권, 光武二年戊戌-1)


이 들어 있다는 것까지 생각한다면 서재필, 윤치호의 <독립신문>과 독립협회의 성격에 "반외세적 내셔널리즘"이라는일면을 어느 정도 인정해야 할 듯하지요? 

 

즉, 반러 운동이야 독립협회가 러시아 세력 팽창을 원치 않았던 영국과 미국 공사관과 내각 내의 친미파 (이완용, 박정양 등) 등의 이해 관계에 따라서 한 부분도 있지만, 러시아보다 현실적으로 훨씬 더 큰 위협이었던 일본에 대해서 담론적인 차원의, 그리고 아주 미약하게나마 실질적 이권 침탈 반대 차원의 저항을 편 것은 훨씬 더 성숙된 내셔널리즘으로 봐야 할 듯합니다. 


 

서재필ㆍ독립협회의 민족주의-메이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런데, 일본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반응이라는 각도에서 본다면 여태까지 수많은 보수적인 사학자나 찬드라(Vipan Chandra) 선생과 같은 미국의 "주류" 중진 사학자들이 주로 긍정적으로 여겨 왔던 서재필과 독립협회의 내셔널리즘에 대해서 훨씬 더 비판적으로 생각할 여지가 큽니다. 

 

왜냐하면 서재필이나 그 추종자들이 일본측의 

구체적인 왜곡(예컨대 러시아와의 관계에 있어서의 "러시아 조정"만의 강조, 미국 선교사들을 마치 고종

                       을 움직이는 실세로 서술하는 일 등)이나 

노골적인 무례(조선 대신의 성씨를 빠뜨리고 이름만으로 언급하는 일 등), 

매우 무리한 요구(의병이 내륙 지방에서 살해한 일본인에 대한 국가의 거액 보상금 요구 등) 


등을 비판, 반박할 줄 알았지만, "진보적인 서양"과 "개화된 일본", 그리고 "정체되고 후진적인 동양"이라는 일본 메이지 제국주의의 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고스란히 그대로 이어받았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피 제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서명한 서재필의 <동양론>이라는 논문은, 이 "동양", 즉 "오리엔트" 라는 "상상의 공간"을 "한국 자유주의의 시조"로 칭해 왔던 사람이 어떻게 봤는지를 잘 보여 줍니다: 

 

“동양은 세계 오대주 안에 제일 큰 대륙이요. 그 중에 큰 섬들도 많이 있고 인구도 제일 많으나 지금 동양 경계는 대단히 참혹하지라. 아셰아 서쪽은 지금 토이기 (터키) 속국인데 그저 야만의 풍속이 많이 있어 백성이 도탄에 있고 도적이 사면에 횡행하며 악형과 고약한 풍속이 성하야 인민의 목숨과 재산이 튼튼치 아니하고 그 다음은 파사국 (Persia - 현대의 이란)인 그 나라도 역시 토이기 속지와 같아 나라가 점점 못되어 가고 아라사(러시아)와 영국 권리가 대단히 성하야 독립국가 권리를 거의 다 빼앗기게 되고 아푸간니스탄(아프가니스탄)은 영국 아라사 틈에서 날마다 점점 없어져 가고 인도도 벌써 영국 속지가 되야 일억만 명 인구가 오늘날 영국 관할이 되어 지내니 나라는 동양 나라나 실상인 즉 영국 속지라 (…) 섬나(Siam –태국) 정부에 개화한 사람이 많이 있어 외국 정치를 힘들여 본 받은 까닭에 오늘날까지 자주독립을 보존하고 쳥국은 지면이 크고 인구가 삼억만 명이 되나 정치가 고약하고 인민이 완고허야 지금 약하기가 죠션에셔 못지 않고 백성이 도탄에 있으며 정부에 완고 당이 성하야 야만에 복색과 야만의 풍속을 지금까지 숭상하는 까닭에 영국이 향항 (香港: 홍콩)을 차지하고 아라사가 아세아 북편을 모두 차지하고 지금 만주와 요동이 아라사 손 속에 들었고 쳥국 남방 지방을 불난서(프랑스)에 뺏기고 일본하고 싸움하여 세계에 망신을 겪고 죠션을 잃어버리며 대만을 일본에 뺏기고 또 연전에 유구국 (流求–오늘의 오키나와) 을 일본에 뺏기며 전국 형세가 대단히 위태롭게 됐으나 청국 정부 안에서는 밤낮 협잡이요. 구습을 버리지 못하여 허탄한(쓸모 없는) 일에 돈을 쓰고 세력 있는 사람이 약한 사람을 무리하게 대접하는 고로 정부와 인민이 원수 같이 지내고 인민끼리 서로 의심하며 서로 속이며 서로 해를 끼치려고 하야 나라 안에 삼억만 명이 있으나 합심이 안되고 애국하는마음이 없는 것이 실상인 즉 약하기가 죠션에셔 못지 아니 한지라 어찌 한심치 아니하리요. 

 

일본은 근년에 구습을 모두 버리고 태서 (서양) 각국에 좋은 법과 학문을 힘 들여 배운 덕분에 오늘날 동양 안에 제일 강하고 제일 부요하며 세계에 대접 받기를 개화한 동등한 나라로 받으니 치하를 만나고 칭찬 만하더라. 그러나 일본도 아직 구라파 각국과 겨뤄 보기 어려워 조심을 하면서배우며 더 진보를 하여야 아주 독립권을 차지할 것이라. (…). 

죠션은 쳥국 학문을 배운데에 각색 일이 쳥국과 같은 일이 많고 나라 형세가 쳥국과 같으니 어찌 슬프고 분하지 아니하리요. 그러나 나라 안에 있는 인민들이 종시 (끝까지) 구습을 좋아하고 생각하기를 쳥국 학문들을 가지고 생각한 즉 이것을 바꾸지 아니하고 쳥국 모양으로 완고하게 있으면 후사 (後事)가 어떻게 될지 우리가 말하기가 어렵더라. 

이것을 보고 사람들이생각이 잇고 지혜가 있으면 나라를 사랑하고 백성을 구완(구제)할 뜻이 있으며 (…) 

구습을 버리고 문명 진보하고 학문을 힘쓰며 민심을 합하야 나라 일을 하며 옳고 정직하고(…) 편리하고 실상으로 유익하고 자주 독립할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며 사사(私事)와 청과 비루한 것과 완고한 뜻을 내여 버려 나라를 속히 세계에 대접 받고 농상 공무와 교육과 법률과 각색 정치를 유신케 하는 것이 다만 나라만 보호할 뿐만 아니라 몸과 집을 보호하는 양책(良策)이니 안남(베트남)이나 면전(버마)이 되려면 될 터이오. 

동양에 자주 독립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려면 될 권리가 죠션 사람의 손 속에 있더라. 이것이 동양 세계이니 참작하야 여러 분은 읽어 보시요”

(<대조선독립협회회보>, 제6호, 1897년 2월, 9-12쪽)” 

 

이 논문을 원문으로 읽으면 100년 전의 아직 오늘처럼 표준화돼 있지 않았던 한글의 묘미를 맛볼 수 있어서 좋지만 몇 가지 심각한 문제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조선이 베트남이나 버마처럼 열강의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서 동포들에게 "애국"과 "개혁"을 주문하는 서재필의 애국심이나 진정한 "나라 걱정"의 심정을, 저는 의심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애국"이라는 주관적인 심성적 "포장" 그 뒤에 과연 어떠한 세계관이 도사리고 있는가 라는 것입니다.

 

나름대로의 기술적인 서구화를 도모하면서도 국가의 유교 관료주의적 본질을 고수하려는 중국 집권층을 

"야만의 복색과 야만의 풍속을 완고하게 숭상하는 세력가와 협잡꾼"으로 몰아 영국의 홍콩 강탈이나 러시아의 만주ㆍ요동 이권 침탈을 "청나라 완고당"의 탓으로 여기려는 서재필은, 


민중의 고혈을 짜서 대륙 침략이라는 필수적인 요소를 포함한 "초고속 서구화"의 가도를 달렸던 일본의 집권 세력가들을 "구습을 버리고 서양의 좋은 법과 학문을 배운" 문명개화의 영웅으로 치켜세웁니다. 


청일 전쟁에서의 승리의 결과로 일본이 대만을 침략한 것을, 서재필이 마치 "비루하고 완고한" 중국이 당해야 할 "망신", 받아야 할 "천벌"처럼 그리는 등 일본의 대륙 침략을 사실상 중국의 "완고함" 등을 들어 합리화하는 태도를 취합니다. 


 

중국의 "민생도탄"을 비판하면서도 영국 식민지 인도의 대량 아사(餓死) 사태는 외면

 

이 정도라면 "아시아에 정신적으로 속하지 않는" 일본과 "잔혹하고 정체된 아시아"를 대조시킨 후쿠자와 유키치의 <탈아론>적 세계 구상과, 서재필의 "아시아" 인식 사이에서는 어떤 의미 있는 차이도 찾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전통이 된 지 오래된 유교를 "청나라의 학문"이라고 지칭하는 것까지, 조선인들의 "지나에 대한 숭배심"을 비난하는 메이지 일본의 신문에서 그대로 베낀 듯한 느낌입니다. 

 

어렸을 때 일본의 군사학교로 유학 가서 거기에서 일본식의 "복제 오리엔탈리즘"에 이미 노출된 바 있었던 서재필은, 미국에서 "문명국가의 시민 Phillip Jaisohn"으로 거듭나는(?) 과정에서 구미 지역의 "원판 오리엔탈리즘"까지 그대로 받아들여 서구의 세계 침략 상황을 있는 그대로 보는 능력을 아예 상실하고 말았던 셈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중국에서의 "민생도탄"을 언급하면서도 영국의 "속지"(식민지)가 된 인도에서의 대량 아사(餓死) 사태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영국과 프랑스의 세력권 틈바구니에서 간신히 형식적인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태국의 "성공"을, 그 나라의 지정학적인 특성이 아닌 그 집권자의 "개화" 열성으로 설명하는 것도 "아시아"에 대한 편견과 무지의 극치를 나타냅니다. 

 

침략의 희생자들에게 "다 너희 탓이야" 라고 외치고 세계를 서구와 미국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로만 상상했던 Philip Jaisohn의 정신적인 후예들이 지금도 한국에서 계속 헤게모니를 놓치지 않으면서 이라크 파병과 같은 형태의 비열하기 짝이 없는 제국주의 부역 행각을 벌이는 것은, 어찌 한 나라의 비극이 아닙니까?


물론 독립협회가 대중들의 정치 참여 발전이나 새로운 법률 등의 평민들에게도 유익한 여러 제도들의 착근과 발전을 위해서 투쟁하는 등 진정한 의미의 진보에 기여한 바도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 지도부의 세계관이란 일본의 메이지 엘리트에 의해서 이미 한번 "복제"된 바 있었던 구미의 오리엔탈리즘의 "재(再)복제"에 불과했음은 역시 부정하기가 어렵지 않습니까?

 

물론 일본적인 오리엔탈리즘적 "멸한론"(蔑韓論)에 대한 초기 내셔널리스트들의 대응은, 꼭 일본측 왜곡 기사에 대한 "그 때 그 때"의 시비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다 넓은 의미의 "대응"이란 일본인들이 그토록 무시하고 "타율성과 정체성"의 덩어리로만 본 한국 역사에 대한 본격적인 대중적 소개의 작업이었습니다. 


거북선이나 실학 등 한국사의 발전적인 측면들을 보여 주는 대목에 대한 기사들이 바로 그때부터 신문의 지상을 크게 장식하기 시작했는데, 이와 같은 부분을 역사 서술에서 부각시키는 것이 그 다음에 "내재적 발전" 중심의 역사학에서 하나의 관습이 되지 않았습니까?

 

꼭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한의학을 "미신"으로 취급하고 불교를 역시 무속 신앙과 다를 게 없는 "우상 숭배" 쯤으로 봤던 극단적 친미주의자 기관 <독립신문>과 달리 개신 유림의 <황성신문>은 "아국 고대발달의 유적" 

("我國 古代發達의 遺蹟": 1909년 2월 6일자 논설)


이라는 대표적인 "우리 역사 발전적 측면 소개" 형(型) 기사에서 <동의보감>과 <금강경 주석>을 "우리 고대 문명의 광명을 보여 주는 귀중한 문헌"으로 칭하는 등 "우리도 서구인처럼 우리 과거의 유적을 소중히 여기자"는 훨씬 더 성숙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서 한국의 과거 인물과 문화의 소개에 꽤나 공을 들인 박은식 선생과 같은 개신 유림만 해도, 서구인이나 일본인의 편견대로 한국인들의 "나태"(懶怠), "분발심이 없는 고루한 심성" 등을 질타하지 않았습니까? 

 


서구 근대와 다른 문화들을 서구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빨리빨리"가 특징이 된 근대와 달리 어느 나라든 전통 문화의 리듬은 "시간이 돈이다" 라는 방식으로 당연히 돼 있지 않은데, 바로 이 특성을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이 "나태"로 범주화하여 "오리엔트"의 "열등함"의 근거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나타지벌"(懶惰之罰: <서우>, 제1호, 1906년 12월, 32쪽)이라는 짤막한 글에서 "앉아서 부를 즐기는 것을 행복으로 삼는 조선"과 "백수들에게 벌을 주는 서양"을 대조시킨 박은식은, 바로 이 오리엔탈리즘적 "동양 나태론"의 함정에 그대로 빠지고 말았습니다. 

 

서구 침략 합리화의 논리인 사회진화론을 바탕으로 삼아 내셔널리즘의 철학을 구성했던 그들로서는, 서구인과 일본인들의 오리엔탈리즘적 편견을 물리칠 만한 논리적 근거가 부족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습니까? 


그 편견을 물리치려면 서구의 소위 "문명"과 거리를 두어서 상대화시킨 채 그 내부적 모순을 파악, 비판할 줄 알았어야 됐는데, "문명 개화"가 서구중심주의에의 압도를 의미했던 개화기로서는 그게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습니다

 

"오리엔탈리즘"의 공격을 받은 것은, 중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서구, 일본인들의 경멸적인 시선을 의식한 양계초(1873-1929)와 같은 개혁파 논객들이 중국의 위신을 높이는 의미에서 조선에 대한 중국의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입장"을 강조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관념상의 "종주권"의 문제와 무관하게 중국 근대의 인사들이 개인적 교제의 차원에서 한문으로 필담이 가능한 한국 선비들을 동등한 지식인으로 간주하여 따뜻한 우정을 많이 보였습니다. 

 

물론 일본 제국주의를 부정해온 공산주의나 아나키스트 뿐만 아니라 야나이하라 다다오(矢內原忠雄: 1893-1961)와 같은 온건 기독교적 자유주의자들은 일제의 동화 정책이나 식민지 약탈을 비판하면서 조선이 독립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온건파 야나이하라는, "자치 실시를 통한 점차적 독립"을 이야기했지요). 

 

그러나 많은 조선인 제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야나이하라와 같은 신앙인이라 해도, 일본 자본주의의 성장을 "진보"로 보고 남양(南洋)의 "미개인"들을 일본이 "보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서구적 자본주의 긍정론을 근본적으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한 한계가 있었음에도 그와 같은 사람들이나마 있었기에 1945년 이후의 일본에서 반성과 참회의 사조가 일어날 수 있게 됐습니다. 

 

메이지 일본 "오리엔탈리즘"의 언어적, 사상적 폭력을 회상하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제 자본주의 중진권에 진입한 우리라도, 경제적 우열에 의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을 멸시하고 무시하지 않았으면, 그리고 서구 근대와 다른 형태를 취한 다른 문화들을 서구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구름이 낀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될 책 

 

⊙하타다 다카시 저, 이기동 역,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983.  

⊙강진철, "정체성 이론 비판", - <한국사 시민 강좌>, 창간호, 1987, 20-53쪽.  

⊙<탈아론>의 영역 (英譯): http://www.udel.edu/History/figal/Hist370/text/er/entrepreneurs.pdf.  

⊙강상중 지음, 임성모ㆍ이경덕 옮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 이산, 1997.  

⊙신용하, <박은식의 사회사상 연구>, 서울대출판부, 1982.  

⊙이광린, "馬建忠과 한, 중 관계", - <개화기 연구>, 일조각, 1994, 91-101쪽.  

⊙최기영, <한국 근대 계몽운동 연구>, 일조각, 1997  

⊙한철호, <친미개화파 연구>, 국학자료원, 1998. 

⊙宇野俊一 [ほか]編集, <日本全史 : ジャパンクロニック >, 東京 , 講談社, 1991  

⊙Chandra, Vipan. <Imperialism, Resistance, and Reform in Late Nineteenth-Century Korea: 

      Enlightenment and the Independence Club>,Berkeley: Institute of East Asian Studies,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Center for Korean Studies, 1988  

⊙Susan C. Townsend, <Yanaihara Tadao and Japanese Colonial Policy>, Curzon, 2000.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13.일본인의 조선관 - 서구 간섭 막고, 조선 침략 합리화 위한 '복제 오리엔탈리즘'-박노자의 생각. 프레시안.2004,  4. 16.




14.일본인의 조선관(觀)

 - 일본은 고대 이래 아시아를 멸시해 왔습니다-허동현의 생각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는 제국주의나 오리엔탈리즘의 학습 결과일까요? 

 

박노자 교수님, 반갑습니다.


일본인의 조선인식을 논한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박 교수님께서는 일본이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 즉 자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을 받아들여 서구의 "스승들" 보다 더 충실히 지키려 한 "과잉 충성"을 보였으며, 그 결과 조선과 동아시아에 대한 제국주의 침략과 "언어적 폭력" 내지 정신적 폭력인 멸시가 행해졌다고 보시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Meiji Restoration"이란 영어 표현이 웅변하듯, 메이지유신은 서구 근대 세계체제로의 편입만이 아니라 일본 고대로의 복귀도 함께 꿈꾼 것이었습니다. 메이지유신의 주도 세력은 왕정복고(王政復古)와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내걸고 고대의 천황제(天皇制)를 부활시키고 신도(神道)를 국교로 정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서구 근대의 "글로벌 스탠더드"에 어긋나는 혼욕, 문신, 복수와 같은 전통요소들을 사라지게 했지만, 부처의 화신인 "아라히토가미(현인신, 現人神) 천황(天皇)"이 다스리는 "신국(神國)"을 다시 불러내었던 것입니다. 

 

서구인들이 기독교의 여호와나 하나님 같은 서구문명 전체를 일관하는 보편종교의 신을 의지해 그들이 선민임을 상상한 것과는 달리 일본인들은 호토케(佛陀, 부처)가 사람의 모습으로 현생에 나타난 현인신 천황이 다스리는 신성한 국가라는 특수 관념에 의탁해 그들의 우월성과 아시아 침략논리를 찾았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메이지시대 이래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란 서구에서 수입된 "마차" 때문만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자본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이식ㆍ감염되면 어디에서나 나타나는 그런 보편적인 현상이 아니라 일본역사와 사회라는 특수한 경계에서 우러나온 특수한 사례일 수 있다면, 메이지 이래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는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침략적 속성과 우월의식에서 발현된 측면이 큼을 지적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일본의 아시아 침략과 멸시가 근대 서구 제국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의 학습의 결과라고 보는 것은 메이지 이래 근ㆍ현대 일본의 대외 침략 행위와 아시아 멸시 언설―지금도 끊임없이 지속되는 소위 "망언"과 같은―에 대해 일본이라는 국가와 일본인들이 져야 할 역사적 책임을 덜어주는 것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렇게 볼 때 1930년대 이후 일본에서 제기되는 황인종주의 내지 "미영귀축(米英鬼畜)"관과 같은 반서양ㆍ반영미 의식과 서구 멸시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침략적 속성과 우월의식이 발현 

 

도쿠가와 막부가 들어선 에도시대(1603~1867) 전반에 걸쳐 조선과 일본 두 나라는 "교린(交隣)"이란 선린관계를 이어나갔으며, 이 때의 한국관은 메이지 이후 근ㆍ현대 일본의 한국관과는 대조적으로 우호적이고 존경의 념(念)이 넘쳤던 적이 있었습니다. 

 

1719년 통신사의 수행원 신유한(申維翰, 1681~ ? )이 그의 일본기행 『해유록(海遊錄)』에서 일본사람들이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의 저작을 널리 읽고 있으며 퇴계의 후손이나 생전의 기호(嗜好)까지도 질문을 받고 또한 일본인들이 조선의 유학자들의 이름을 소상하게 알고 있는 것을 경탄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일본의 조선 유학과 학자에 대한 존경이 얼마나 컸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러한 한국의 유교문화와 퇴계와 같은 유학자에 대한 존중은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 1561~1619), 하야시 라젠(林羅山, 1583~1657), 야마사키 안사이(山埼闇齊, 1618~1682), 사토 오나가타(佐藤直方, 1650~1719), 타니 신잔(谷秦山, 1663~1718), 요코이 쇼난(橫井小楠, 1809~1869), 토구토미 소호(德富蘇峯, 1863~1957) 등으로 이어지며 메이지 초기까지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조선에 대한 존중에 반하는 우월감도 에도시대 전시기에 걸쳐 이미 폭넓게 퍼져있었던 언설입니다.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 1657~1725)는 도쿠가와 막부의 통신사 우대정책


―통신사절이 교토에서 에도로 가는 길을 쇼군의 가솔만이 이용할 수 있는 비와(琵琶)호수 동쪽 연안을 타고 올라가는 고쇼(御所)가도를 이용하게 하는―


을 트집 잡아 "막부가 이렇게 대접하는 것, 칙사보다도 후대한다면 어찌 우리나라의 체면 중시를 논할 것인가"라고 하면서 통신사절에 대한 예우의 격하를 주장한 바 있었습니다. 

 

나카이 지쿠잔(中井竹山, 1730~1804)도 『초모위언(草茅危言)』이란 책에서 통신사의 행차의 위풍을 가리켜 "순시(巡視)의 깃발, 청도(淸道)의 깃발, 영(令)의 깃발을 세우는 것은 너무나도 무례하다. …공공연하게 우리를 욕되게 함은 너무나도 가증스럽다. …그런 불손을 못 본 척한다면야 더 이상 없는 국치(國恥)이리라"

고 반발했으며, 통신사절에 대한 환대에 대해서도 


"관중(館中, 숙박처)에 들어가 시문을 증답(贈答)하는 것을 관에서 금하지 않을 뿐더러 부화(浮華)의 무리들이 잡다하게 모인 것이 저자거리같고, 형편없는 문장과 시문을 갖고 한객(韓客)에게 들러붙으니 그 한심한 꼴은 한결같이 덜 떨어진 무리들의 모습이라. 100일도 더 전부터 7율(律) 1수(首)의 시를 꺼내들고 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으로 기면서 한편의 화답 시를 얻으면 종신(終身)의 영광이라며 사람들에게 뽐내는 따위는 가소롭기만 하다"

고 조선측의 유교적 소양 뽐내기에 대해 반감을 내뱉었습니다. 

 

조선과 중국의 유교문화에 대한 열등감에서 비롯된 원초적 형태의 반감의 이면에는 일본 고유의 정신이나 문화를 내세우는 우월의식이 꿈틀대고 있었습니다. 대표적 국학자(國學者) 중의 한 사람인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 1730~1801)는 "일본정신"을 이렇게 정의했지요. 

 

"일본 고래의 정신 즉 야마토고코로는 순수한 것이며, 자연이며, 속박되는 일이 없는 자유의 마음이다. 따라서 유교가 설교하는 도덕규범은 야마토고코로와는 대립되는 것이다. … 

원래 "정(情)"이라는 것은 순수하며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것을 규칙으로 묶거나 종교로 승화시키려는 것은 부자연스럽다. 이처럼 이국(異國)의 가치를 척도로 한 기만과 허위는 인간의 본성에도 어긋난다. …

그래서 인간의 소박한 정감을 노래한 일본 고가(古歌)의 전통 속에야말로 사물의 현상이 가장 명백히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소박한 형태의 일본 우월론은 막부 말기가 되면서 일본 고대의 신화와 전설에 토대를 둔, "신주(神州)" 즉 신국(神國) 일본을 우월하게 여기며 아시아를 내려다보며 침략을 정당화하는 "팔굉일우(八紘一宇)론"이나 "정한론(征韓論)" 같은, 아시아 침략론으로 진화합니다. 


메이지 유신을 이끈 사람들의 정신적 지주 중 한 사람이었던 사토 노부히로(佐藤信淵, 1769~1850)의 『우내혼동비책(宇內混同秘策)』 속에 들어 있는 다음 이야기는 국학자들의 일본 우월주의가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낸 또 하나의 기축사상이라는 점을 잘 보여줍니다. 

 

"세계 만국 중에서 황국(皇國)이 공략하기 쉬운 토지는 중국의 만주보다 쉬운 것은 없다. …

먼저 달단(韃靼, 몽고)을 취해 얻으면 조선도 중국도 차례로 도모할 수 있다. …

다섯 번째는 송강부(松江府), 여섯 번째로 추부(萩府), 이 두부는 다수의 군선에 화기와 차통(車筒)을 싣고 동해로 가 함경ㆍ강원ㆍ경상 3도의 여러 주를 공략할 것. 

일곱 번째로 박다부(博多府)의 병력은 많은 군선을 내어 조선국 남해에 이르러 충청도의 여러 주를 칠 것. 

조선은 이미 우리 송강과 추부의 강병에게 공격받아 동방 일대가 노략질에 시달림을 받는 이상 남방 

여러 고을은 어쩌면 허술한 곳이 될 것임. 

곧바로 진격하여 이를 치고 대총(大銃)과 화전(火箭)의 묘법(妙法)을 다한다면 모든 성은 바람을 바라보고 허물어질 것이다."

 

그만이 아니라 사무라이 출신의 국학자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이 남긴 『유수기(幽囚記)』에도 한국이 본래 일본의 속국이었다는 우월의식과 침략의식이 짙게 배어 나오고 있습니다. 

 

"주아이 덴노(仲哀天皇, 전설상의 천황으로 그 비인 神功황후가 죽은 남편의 신탁으로 신라를 쳐서 정복했다는 황국사관의 시원적 존재) 9년, 천황 붕어하다. 황후 스스로 신라를 정복하시다. 신라 항복…

고려ㆍ백제 역시 신을 칭하고 조공을 바치다…옛날 우리의 융성하고 강력했던 이유를 알지어다. 

나라를 잘 보존한다고 하는 것은 단지 그 존재를 잃지 아니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자람을 불리는 데 있다. 지금 서둘러 무비(武備)를 갖추고 함정을 준비하고 대포를 늘려야 한다…

류큐(琉球)를 지도하여 국내의 제후로 만들고 조선을 책망하여 인질을 보내고 조공을 바치게 하여 옛날의 성시(盛時)와 같이 해야 한다. 북쪽으로는 만주 땅을 자르고 남쪽으론 대만과 루손(필리핀)의 제도를 거두어 진취의 기세를 보일지어다." 

 

이처럼 막말의 국학자들은 일본이 서구에 개항하기 이전―즉 서구 오리엔탈리즘의 세례를 받기 이전―부터, 고대에 일본의 신이나 천황이 한국을 지배했을 때 한국의 왕이나 귀족들이 일복에 복속했다는 망상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우월의식을 바탕으로 한국을 멸시하고 침략의 대상으로 보는 "초대형 마차"의 설계도를 이미 그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설계도는 사이고 타카모리(西鄕隆盛, 1827~1877)의 "정한론(征韓論, 1873),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의 "탈아론(脫亞論, 1885)", 타루이 토오키치(橫井藤吉, 1850~1922)의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 l893)", 기타 잇키(北一輝, 1883~1937)의 "일본개조법안대강(日本改造法案大綱, 1923)" 등 일본 우월주의나 침략주의의 밑그림이 되었습니다. 


이 밖에도 1890년대 우익 낭인들의 아시아 침략논리인 대아시아주의, 

구메 구니타케(久米邦武, 1839~1931)의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 

1930년대 군국주의 시대 국가주의 사상의 모토였던 고쿠타이(國體)와 고쿠수이(國粹) 등은 


"서구의 스승들"이 가르쳐준 오리엔탈리즘보다 국학자 요시다 쇼인 같은 내부 스승들의 교시―일본이 동양문화의 전수자이며 결정체라는 국수주의적 발상―를 충실히 따른 것이 아닐는지요? 


그렇다면 근ㆍ현대 일본의 아시아 멸시와 침략은 오리엔탈리즘과 자본주의의 이식의 결과가 아니라 전근대 일본에 내재한 우월의식과 침략적 속성이 더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조선의 개화파만이 자국 우월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박노자 교수님의 지적처럼 개화기 우리 지식인들의 세계관이 일본의 우월주의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의 

"재복제"에 지나지 않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욕하면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조선의 얼과 정신을 강조한 우리의 민족주의 사관은 일본 국학자들이 말한 "야마토고코로"라는 일본 정신을 중시하는 "황국사관"을 복제한 것이고, 서재필의 멸시적 아시아 인식은 구미 오리엔탈리즘 따라하기인 것도 부정하기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동시대 아시아의 지식인들 중 동일한 심판의 잣대로 재어보았을 이 같은 비난과 질책을 면할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지 않을까요? 저는 이들 개화파나 민족주의 사가들의 한계가 그들만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보지 않기에 역사법정에 오른 이들의 과오가 이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변호해 볼까 합니다.

 

박노자 교수님께서는 중국 근대 지식인들이 우리 선비들과 동등하게 사귀었고, 일본의 공산주의자나 무정부주의자들도 진심으로 우리의 독립을 도우려 했다고 보셨지만,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한 세기 전 중국과 일본 사람들의 한국 인식을 살펴보면 마음속 깊이 우리를 사랑하고 도우려 했던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려운 듯합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이 우리 나라에 대해 가장 관심을 기울였던 부분은, 자국에 대한 측면공격의 우려, 즉 "후고(後顧)"가 없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한 세기 전 일본이 조선을 넘보자 중국인들은 자국의 안위를 염려해 한반도에 대한 정치적 지배를 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해 점령한다면, 동삼성(東三省: 봉천ㆍ길림ㆍ흑룡강)의 근본 중지(重地)가 울타리를 잃게 되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염려가 있어 후환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1875년 운양호사건에 대한 중국 최고 실력자 이홍장(李鴻章, 1823~1901)의 논평입니다. 

그 후 1879년 들어 일본이 류큐(오키나와) 왕국을 병합하고,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 국경분쟁이 일어나자, 

중국인들은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더욱 크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만일 조선이 멸망하면 우리의 왼팔이 끊기고 울타리가 모두 없어지게 되어 후환은 더 말할 것이 없다."

1880년 주일 공사 하여장(何如璋, 1838~1891)의 말입니다. 

 

중국이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청일전쟁(1894)으로 한반도에서 축출되기까지, 중국인들 중에 우리의 발전을 가로막은 패권주의에 반대하거나 조선의 독립을 위해 힘을 보태준 사람은 없었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이러했으니 동시대 일본사람들이야 더 말할 나위 없겠지요. 

 

일본 제국주의의 중국 침략이 본격화되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항일 반제 전선에 조선인들의 힘을 빌리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인들도 한국을 진정으로 도우려 했다기보다는 일본과의 싸움에 우리의 선열들을 이용한 면이 큽니다. 


국민당은 의열(義烈)투쟁 등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지원했지만 일본이 항복하기 전까지 우리 임시정부를 정식으로 인정한 바 없으며, 공산당도 조선의용군을 자신들의 팔로군 휘하에 두어 써먹었을 뿐 중국 내에서 한국인의 독자적 투쟁은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의 저명한 사회주의 계열의 작가 궈모뤄(郭沫若, 1892~1978)가 지은 항일소설 『목양애화(牧羊哀話)』(1919)는 당시 중국인들의 본심을 잘 보여줍니다. 그는 이 소설에서 한일합방에 반대하는 양반 민숭화(閔崇華)와 민패이(閔佩荑)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우리 민족에 대한 동정을 표출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중화를 숭상한다"는 뜻인 "숭화"와 "(일제에 항거하는) 오랑캐에 탄복했다"는 의미인 "패이"에 알 수 있듯이, 20세기 들어서도 중국인들은 한국에 대해 여전히 중국 중심의 우월감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식민지시대 일본의 우파들은 기껏해야 자치론을 내비칠 뿐, 한국인의 독립 능력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제와 군국주의를 비판한 일본 최고의 지성 마루야마 마사오(丸山眞男, 1912~1996)까지도 제국주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 그리고 재일동포 문제 등에 대해 침묵할 정도였지요. 

 

물론 박노자 교수님 말씀대로 군국주의에 반대하는 극소수의 공산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반제투쟁에서 한국인들과 연대를 모색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1920년대 말 코민테른의 "일국일당(一國一黨)" 방침에 따라 일본 내에서 한국인들의 독자 단체는 존재할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한국인의 반제 투쟁은 일본인의 그것을 대신하는 모습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조선사연구회"를 만들어 황국사관 비판에 앞장섰던 하타다 타카시(旗田巍, 1908~1994)의 고백은 일본인들이 한국에 대해 갖고 있는 모멸적 인식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지 잘 보여줍니다. 

 

"일본의 공산주의운동ㆍ노동운동의 강령 속에 한국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명문화되어 있기는 했으나, 일본인이 해야 하는 운동에 한국인을 동원하는 경향을 볼 수 있었다. 특히 많은 희생이 예상되는 곤란한 투쟁의 경우 한국인에게 선봉을 맡기는 일이 많았다." 

 

한 세기 전 우리는 오리엔탈리즘과 중화주의를 표방한 중국과 일본이라는 강자의 이익을 위해 희생된 약자였습니다. 심지어 일제 침략에 맞서 계급적 연대를 도모하던 중국이나 일본의 사회주의자ㆍ무정부주의자들도 그들의 필요에 따라 우리 선열들을 동원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늘 우리보다 못한 사람들을 짓누르고 멸시해서는 안되겠지요. 그러나 요즘은 예전에 우리를 짓밟은 사람들이 다시는 우리를 희생양으로 삼지 못하도록 와신상담(臥薪嘗膽)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고 봅니다. 

 

어둠이 내리는 연구실 창을 바라보며...  

허동현 드림 


 

더 읽을 만한 책

 

⊙강창일. 『근대 일본의 조선침략과 대아시아주의』. 역사비평, 2002. 

⊙고병익 등.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관계』. 문학과 지성사, 1992. 

⊙김석근 역. 마루야마 마사오 저. 『현대정치의 사상과 행동』. 한길사, 1997. 

⊙강진철, 「정체성 이론 비판」, 『한국사 시민 강좌』1. 1987. 

⊙권석봉. 『청말대조선정책사연구』. 일조각, 1986. 

⊙박영재 등. 『(한길역사강좌 9)오늘의 일본을 해부한다』. 한길사, 1987. 

⊙박재우. 「중국현대 한인취재소설의 발전추세 및 반영된 한인의 문화적 처경(1917-1949)」. 

            『동아문화』34, 1996.

⊙송병기. 『근대한중일관계사연구』. 단대출판부, 1985. 

⊙장인성 역. W. G. 비즐리 저. 『일본 근현대 정치사』. 을유문화사, 1999. 

⊙하타다 다카시 저, 이기동 역, 『일본인의 한국관』. 일조각, 1983. 

⊙西川長夫ㆍ松宮秀治 編. 『幕末ㆍ明治期の國民國家形成と文化變容』. 東京: 新曜社, 1995.

⊙H. D. Harootunian. 『Toward Restoration: The Groth od political Consciousness in 

             Tokugawa Japan』.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0.  


[출처] : 최서영기자 프레시안 기자  :<박노자ㆍ허동현의 '한국근대 1백년 논쟁'> - 14.일본인의 조선관 - 일본은 고대 이래 아시아를 멸시해 왔습니다-허동현의 생각. 프레시안.200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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