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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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조일 관계와 일본 메이지 정권의 탄생
기자명 김이경  승인 2022.11.24

한반도 침략 미일결탁의 역사 ①

연재를 시작하며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가속화되면서, 한미군사훈련으로도 모자라 한미일 군사훈련까지 국가적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적 반일정서를 잘 알면서, 이렇게 자위대까지 한반도에 다시 끌어드리는 것은 역시 미국의 압력 때문이다.

일본이 미국의 아시아 침략정책에 달라붙어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 없어서 안 될 전략적 동맹자였다. 왜 미국은 아시아 침략에서 굳이 일본과 동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조선이 미국의 직접 침략에 맞서 치열하게 투쟁한 덕분이다. 미국이 포함외교를 시작한 이래, 함선을 들이밀고, 공포만 몇 발 날려도 벌벌 떨며 항복하는 것이 일반적인 약소국의 모습이었지만 조선은 달랐다.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의 대동강 침략, 1868년 국제범죄행각 <남연군 묘 도굴> 사건,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에서 모두 조선 민중의 치열한 투쟁으로 실패로 돌아갔다.

미국은 직접적 조선 침략을 포기한다. 그러나 아시아 침략과 그 관문인 조선을 포기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을 앞세운 대리침략으로 노선을 변경한다. 일본이 조선 침략과 전쟁에 나설 수 있도록 미국이 지원·엄호하면서 일본의 후견인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국이 챙길 수 있는 막대한 정치·경제적 이익은 빠짐없이 챙겼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는 이러한 역사를 왜 알지 못할까? 막후 공작을 하면서 침략성을 감추는데 능한 미국의 간교함 탓이다. 미국은 자신들의 침략적 본성을 감추기 위해 온갖 공작과 허구적 이데올로기를 다양한 방식으로 유포해왔다. 당시에도 고종은 미국의 속내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는 마지막 순간까지 미국에 의지하여 나라와 왕권을 유지하려 했다.

태평양전쟁 기간을 제외하고 아시아에서 미국이 패권을 유지하는 비결이었던 미·일 결탁을 제대로 알아야 미국의 침략적 본질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해방된 지 75년이 넘도록 일본은 반성과 사과조차 없는데, 미국은 왜 일본 자위대를 다시 한반도로 끌어들이려 이리 난리를 치는지 알 수 있다. 일본 근대화의 추진력은 그들의 개혁성이 아니라, 미국에 빌붙어 조선을 침략한 군국주의라는 것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설마 국권까지 빼앗기랴 안일하게 생각했던 조선 말기 위정자들의 잘못을 되풀이할 수는 없다.

조선 시대 대일 교린 외교

조선이 일본과 교린 외교를 시작한 중요한 이유는 왜구의 잦은 침략과 노략질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조선이 막부와 여러 다이묘(지방영주)들에게 직접 인부(조선 국왕이 발부한 도장)를 주고, 인부가 찍힌 서류만 접수하는 방식의 교류였다. 일본 사신들은 대장경을 얻어가거나 사찰건립비용 마련, 무역 등을 위해 수시로 조선을 왕래했다. 조선으로서는 왜구의 해안 침탈을 줄이려는 의도가 컸기 때문에, 왜인들의 귀순을 장려하고 회유책을 썼지만, 왜구의 침략은 끊이지 않았다. 일본은 참으로 골치 아픈 이웃이었지만, 조선은 왜구토벌과 함께 살길을 열어주는 평화 <교린 외교>가 최선이라고 여겼다.

교린(交隣)

가까운 이웃과 친교를 맺는다는 뜻으로, 조선 시대 교린의 대상은 일본, 여진 등 주변국들에 대한 외교정책이다. 조선은 명나라에 대해서는 사대, 주변국에 대해서는 교린을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설정했다.

이같은 교린 정책에 근거하여 조선과 일본의 관계는 부침을 반복하였다. 1426년부터 3곳(진해의 제포, 부산의 부산포, 울산의 염포)을 열어 무역을 허락하였다. 1443년 매해 정기 무역선을 50척으로 하고 쌀 200석을 일본에 하사하는 『계해약조』를 맺기도 했다. .그러나 1510년 삼포왜란으로 3포가 폐쇄되고 조일 무역이 중단되었다.

1512년 『임신약조』를 체결하여 교린정책은 재개되는데, 3포 중 제포만 개항하고, 쓰시마 도주에게만 교역권을 주고 그 외 선박과 왜인들은 왜구로 간주해 처벌하는 등 보다 엄격한 교린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으로 중단됐던 조·일 관계는 1609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간청으로 복구되어 『기유약조』를 맺는다.

이 때부터 조일 정부간 접촉은 두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일본 막부의 새 쇼군이 취임할 때마다 조선이 축하사절단을 파견하는 방식이었다. 일본 막부의 외교 사절단은 조선 한성에 올 수 없었다. 조선 민중의 대일 적개심이 극도에 달했고 사절단의 한양 진입로가 임진왜란 때 침략 경로로 사용된 전철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일본 막부가 조선 조정과 의논할 일이 생기면, 부산 초량왜관에서 협의하는 방식이었다. 새 막부 취임 축하사절단 일본 방문 외의 일상적인 조-일 국가 간 교섭은 오직 부산 초량왜관을 통해서 쓰시마 도주만 진행할 수 있었다.

▲ 초량왜관도
▲ 초량왜관도
이 왜관은 조선 정부가 설치하여 매년 쌀 100석의 운영자금을 주었으며 관리만 일본인에게 맡겼다. 일본은 초량왜관을 통하여 막부의 서계(일본과 주고받는 공식 문서)와 명목적인 헌사 예물을 전달하며 답례로 후한 희사품을 받아갔다. 모든 서계는 조선 국왕이 준 관인을 찍은 쓰시마 도주의 문인을 사용해야만 했다. 조선이 에도에 파견한 막부 취임사절단(조선통신사: 조선왕의 뜻을 전달한다는 의미가 담겨져있다)는 1811년까지 총 19회였다.

반면 일본사절단(일본국왕사: 막부의 장군이 조선과 교린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조선의 왕 앞으로 보낸 사절단)이 조선 초량왜관에 온 것은 70회이다. 조선과 일본이 대등한 관계임에도 파견된 사절의 횟수의 횟수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은 조선의 사절단 파견은 교린 외교를 유지하는 형식이었음에 비해 일본국왕사의 목적은 경제적 욕구와 대장경을 얻어가는 것이 절절했기 때문이다.

▲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 행렬
▲ 일본에서의 조선통신사 행렬
조선통신사들은 대략 사오백 명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다. 통신사 대열이 쓰시마섬에 도착하면 일본은 무려 1,400여 척의 배에 1만여 명이 영접을 나와서 마중하였다. 통신사 접대비가 일본 막부의 1년 예산과 같았다고 하니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알 수 있다.

일본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통신사를 접대했던 이유는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다. 1600년 도쿠가와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승리하여 막부를 세우고 쇼군이 되었지만, 일본 각 지역의 모든 다이묘와 낭인들의 불만을 모두 평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정황에서 도쿠가와 막부의 국제적 위상과 힘을 과시하려는 것이 조선통신사 초청의 가장 큰 이유였다.

일본 막번 체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권력을 잡은 후 에도에 막부(사령부라는 의미를 갖지만 중앙통치기구로 이해하면 된다)를 세우고 쇼군(막부의 대장, 즉 최고권략자)이 된다. 막부는 직할지역만 직접 다스리고, 번(지역행정단위)에 대해서는 다이묘(지역을 다스리는 영주)에게 일임하고 간섭하지 않았다. 이렇듯 일본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주-번으로 이뤄지는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제를 갖고 있었고, 이를 막번 체제라고 부른다.

다만, 막부는 조선통신사 행렬이 일본에 조공하러 온 복속 사절이라고 자국 정치세력들에게 설명했다. 막대한 접대비를 분담해야 했던 다이묘의 불만이 높아지자, ‘조선멸시론’으로 불만을 잠재우려 했던 것이다. 조선의 ‘교린정책’을 자기 입맛대로 재단하고 국내정치에 악용하는 일본의 교활성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일본의 위기와 메이지 정권의 탄생

19세기 일본은 상업의 발달로 자본주의가 싹트기 시작했으며 도쿠가와 막부 최고의 문화적 번성을 누린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집권 세력의 사치와 빈부의 차가 극심하여, 봉건제로서는 해결할 수 없는 사회모순이 쌓여갔다.

특히 1830년대 중반, 홍수와 냉해 등 수년간 기근이 이어졌다. 수확량이 반도 되지 않자 도시 상인들은 쌀을 매점했고, 쌀값이 폭등했다. 가장 번화했던 오사카에서도 하루 100명 이상이 굶어죽을 정도로 전국 곳곳에서 아사자가 속출했다. 1837년 일본 막부의 관리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난을 일으키기도 했다.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관리의 반란은 일본에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 곳곳에서 반란이 발생한다.

▲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
▲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
일본의 위기를 더욱 앞당긴 것은 미국 페리 제독의 일본 침략이었다. 미국이 중국 동북지방을 신식민지로 개척하려면 먼저 조선과 일본을 차지할 필요가 있었다.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는 1853년 6월과 다음 해 2월 두 번에 걸쳐 일본 도쿄만을 침입하여 함포를 쏘는 등 무력시위를 벌인다. 부패하고 무능했던 일본 정부는 페리 함대의 협박용 함포 소리에 굴복하여, 1854년 3월 <일미화친조약(가나가와 조약)>을 맺었다. 이 조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태평양 횡단 기항지로서 시모다, 하코다테를 개항하고 영사주재권, 최혜국대우권을 강탈당한다.

미국은 일본에 <일미수호통상조약(1858년 7월)>을 강요하였고, 같은 해에 일본은 미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 영국 등 5개나라와 <안세이조약>을 체결하면서 유럽 국가들에게 문호를 개방했다. 서양의 값싼 상품이 대량으로 유통되면서, 서양에 대한 일본인의 감정은 갈수록 나빠졌다. 1864년 사쓰마, 조슈번이 양이(서양 배척) 운동을 일으키자 미국·영국·프랑스·네덜란드는 17척의 군함으로 시모노세키를 침공하였으며 1866년 <개세약서>로 관세권을 장악하였다. 일본은 서양 열강의 반식민지로 빠져들면서 대량의 금이 국외로 유출되어 경제가 혼란해지고, 백성들의 생활이 나락에 빠져들었다.

일본 경제가 심각해지자, 막부를 중심으로 한 개국파와 막부에 불만을 품은 개국 반대파로 나누어진다. 개국 반대파가 천황에게 정권을 돌려주어야 한다며 막부 타도를 주장하자, 두 세력 간의 싸움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개국 반대파는 천황을 중심으로 서양세력을 물리치자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운동을 전개했다. 1866년 막부의 조슈번 정벌이 실패로 끝나자, 조슈번과 사쓰마번 등이 막부 타도 운동이 흐름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막부를 지지하는 군대는 곳곳에서 패배했고, 사쓰마번과 조슈번 군대가 에도성에 입성하면서 천황 정부를 수립한다.

다급해진 막부는 1868년 1월 10일 영국·프랑스·미국·네덜란드·이탈리아·프러시아 6개국 대표와의 회담에서 양이(洋夷)를 내세운 천황 정부의 불법성을 강조하고, 기존의 조약체제 준수를 약속하면서 열강의 지지를 호소하였다. 아직 전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확인할 수 없었고, 또 천황 정부가 양이(攘夷) 구호를 내리지 않은 조건에서 서양 열강은 막부가 정통 정권임을 인정하였다. 막부는 1월 17일 미국에 <에도-요코하마> 철도부설권을 내주면서 서양 열강의 지지를 호소한다. 막부와 천황 정권의 대립은 곧 전국적인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제 내전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되기 위하여 양이(洋夷)를 기치로 봉기하였던 천황 정권은 태도를 돌변한다. 1월 17일 불평등 조약 체제의 유지를 보장함으로써 외국과의 화친을 국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그러자 열강의 입장이 누그러진다. 서양 열강은 내전의 추이를 지켜보면서, 내전 이후 자국의 이익 확보를 위해 국외 중립을 선언하고 불간섭의 자세를 취하였다.

1869년 5월 막부 세력이 모조리 섬멸되자, 새로 성립된 메이지 정부는 ‘막부 정권이 서양과 맺었던 조약을 이행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서양 열강의 지지를 받게 된다. 이것이 메이지 유신이 성립되는 과정이며 정상적인 서양과 달리 서양 열강의 과도한 수탈 속에서 일본의 근대화가 처음부터 군국주의의 길을 걷게 되는 과정이다. 우리는 메이지 유신이 일본의 근대를 열었다고 평가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일본의 근대화는 자체적 자본주의 발전 과정이 아니었다. 미국을 등에 업은 근대화였으며, 그 결과 미국과 결탁하여 군국주의적 조선 침략을 모색하게 된다.<계속>

신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한미일 군사협력이 더욱 강화되고 있다. 얼마 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발표된 프놈펜 성명은 한미일 군사협력을 사실상 군사동맹수준으로 격상시킨 것이었다.

미국과 일본은 19세기 때부터 한반도 침략을 위해 결탁해왔다. 서세동점의 구한말 시대, 냉전이 시작되던 시대 등 국제질서와 아시아 질서 변동기 때마다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와 아시아 침략과 지배를 위해 결탁했으며 그 결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결국 한미일 군사협력과 군사동맹은 미일 침략 세력에게 침략의 문을 더 크게 열어주고 있는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위한 미일 결탁의 역사를 돌아보는 것은 현재 한미일이 추진하는 군사동맹의 본질과 성격, 그 목적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그것을 막는 투쟁을 조직하는 데서 반드시 필요한 작업이다. 이에 본지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가 작성한 소중한 원고를 연재한다. 연재는 다음과 같은 순서도 게재될 것이다.<편집자주>



조선의 대일 교린 외교와 19세기 일본의 위기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1

메이지 정권의 정한 외교와 조일 국교단절 - 메이지 정권의 정한론 2

조선 침략을 위한 미국의 국가정책 - 미국의 조선침략 1

1860년대부터 시작된 미국의 조선침략 - 미국의 조선침략

1871년 조미 전쟁(신미양요) - 미국의 조선침략 3

미일 결탁의 필연성과 미일의 조선침략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1

음융한 계책으로 조미통상조약 맺은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2

갑오농민전쟁부터 청일전쟁까지의 미국의 역할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3

러일전쟁 전후 일본의 조선강점 후원한 미국 - 조선 침략을 위한 미일결탁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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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조일 관계와 일본 메이지 정권의 탄생

연재를 시작하며
한반도의 전쟁위기가 가속화되면서, 한미군사훈련으로도 모자라 한미일 군사훈련까지 국가적 기정사실로 만들려는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국민적 반일정서를 잘 알면서, 이렇게 자위대까지 한반도에 다시 끌어드리는 것은 역시 미국의 압력 때문이다.일본이 미국의 아시아 침략정책에 달라붙어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일본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의 아시아 침략에 없어서 안 될 전략적 동맹자였다. 왜 미국은 아시아 침략에서 굳이 일본과 동맹할 수밖에 없었을까? 그것은 놀랍게도 조선이 미국의 직접

미일 침략사 김이경 2022.11.24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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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멤버’, 단순한 복수극 아닌 청산 못한 친일에 총구 겨눈 영화
11월 6일 열리는 일본 해상자위대 창설 70주년 기념 국제 관함식에 우리 해군 함정이 참가하는 문제로 시끌벅적한데, 이런 정세에서 볼만한 좋은 영화가 나왔다. 10월 26일 전국 상영관에서 일제히 개봉된 영화 ‘리멤버’이다.이 영화는 뇌종양을 앓는 80대 알츠하이머 노인이 기억이 완전히 상실되기 전, 60년간의 숙원이었던 가족들의 원수를 처단하는 복수극이다. 그러나 단순한 개인 복수극이라기보다는 청산되지 못한 친일세력에 총구를 겨누는 영화다.이 영화는 가볍지 않은 소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함께 일하는 8

사회문화 김이경 남북역사교류협회 상임이사 2022.11.01 18:35



개화파가 꿈꾼 새로운 세상
1. 총론으로서의 혁신 정강 14개조갑신정변 다음날 조보에 공식적으로 발표했던 정강정책은 갑신정변이 역모로 몰리면서 소실되어 김옥균이 정변 이후에 집필한 ≪갑신일록≫에 밝혀놓은 내용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 김옥균은 ≪갑신일록≫에서 자신들이 지향했던 사회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려 하였다.① 대원군을 며칠 안에 돌려보낼 것. 조공하는 허례의 행사를 폐지할 것②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리를 제정하고, 사람의 능력으로써 관직을 택하게 하지 관직으로써 사람을 택하지 않을 것③ 전국의 지조법을 개혁하여 간사한 관리들을 근절하고 백성의 곤란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7.16 14:42

갑신정변! 드디어 거사를 감행하다
1. 마침내 새날을 열 거사를 감행하다10월 17일 낙성식이 거행될 우정국 청사에는 미국공사 후트, 서기관 스커더, 영국영사 아스톤, 청국영사 진수당, 서기관 담갱요, 일본공사 서기관 시마무라, 묄렌돌프와 홍영식, 박영효, 김홍집, 김옥균, 서광범, 민병석, 윤치호, 신락균 외 친군영 지휘관(한규직, 민영익, 이조연) 등 18명이 참가하였다.김옥균은 이날 오후 4시에 우정국으로 가서 홍영식과 함께 정변 준비사항을 점검하고 집에 돌아오니 고종시위 변수가 와서 ‘국왕께서는 오후 2시쯤에 취침하였다’고 알려주었다. 전날 변수는 김옥균의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7.03 10:49

평화적인 개혁이 아닌 (갑신)정변을 선택한 배경
1. 1884년 긴박했던 한반도 정세개화파는 수구파를 척결하기 위한 본격적인 무장정변 준비에 들어간 것은 1884년 봄이었다. 왜 이 시기였을까? 임오군란 진압을 핑계로 조선에 군사력을 몰고 들어온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극에 달하여 조선이 독립국가로서의 존립까지 위기로 몰리고, 청나라와 결탁한 집권 수구세력의 부패는 극에 달하던 상황이었다. 집권 수구파들에게는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던 개화파들의 애국적인 개혁 활동에 대한 경계심과 방해가 극에 달하였다. 미국과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를 적대시하고 바라지 않았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청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18 13:59

우리 다시 꿈꿀 수 있을까?
문재인 대통령의 '9월평양공동선언' 당시 평양시민 앞에서 한 연설로 널리알려진 북한(조선)의 대집단체조. 2005년 남쪽 관광객 1만여 명이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평양 현지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김이경 당시 ‘겨레하나’ 사무총장의 기고를 싣는다.[편집자](1) 아라랑 관람의 성사 비결(2) 1만명 방북의 주체적 요인(3) 민간교류를 위한 과제13일 김여정 조선로동당 제 1부부장이 ‘확실하게 남조선 것들과 결별할 때가 된 듯하다’ 면서, ‘멀지 않아 쓸모없는 북남(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보

칼럼/기고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18 10:35

‘아리랑’ 공연보러 1만명이 평양 간 사연
문재인 대통령의 '9월평양공동선언' 당시 평양시민 앞에서 한 연설로 널리알려진 북한(조선)의 대집단체조. 2005년 남쪽 관광객 1만여 명이 ‘아리랑’ 공연을 관람할 수 있게 평양 현지에서 실무를 총괄했던 김이경 당시 ‘겨레하나’ 사무총장의 기고를 싣는다.[편집자](1) 아라랑 관람의 성사 비결(2) 1만명 방북의 주체적 요인(3) 민간교류를 위한 과제북이 아리랑 공연에 남쪽 관광객을 초청하겠다는 제안을 받은 것은 2005년 9월 13일 평양 양각도 호텔에서였다. 우리 모두 이 제안을 받고 무척 놀랐다. 2003년 ‘아리랑’ 공연이

칼럼/기고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15 10:46

개화파의 평화적인 개혁, 한계에 다다르다
1. 개화파가 부딪친 장벽, 청,일과 손잡고 자신들의 기득권만 노리는 조선의 수구파 낡은 제도를 새로운 제도로 교체하기 위한 부르주아 개혁이 순조로울 수는 없다. 서양에서도 힘든 과정이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자본주의의 싹이 자라나기도 전에 서양 열강의 수탈을 당해야 하는 조건에서 외세와 결탁한 수구파의 반대와 탄압은 서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치열하였다. 처음에는 수구파들은 근대화를 그저 신식 서양문물을 도입하려는 것 정도로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개화파가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나타내고 그들의 지향이 봉건제도의 청산이라는 것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6.04 15:37

개화파의 다양한 근대화를 위한 노력
1. 개혁적인 정권기관의 설치 임오군란 후 대원군이 청군에게 납치되고 민씨 일족이 다시 집권하는 혼란스러운 시기에 개화파들은 국가정치기구의 설립을 서둘렀다. ≪통리기무아문≫은 대원군이 잠시 집권하자마자 바로 해산시켜 버린바, 수구 정권이 안정되기 전에 개혁을 추진할 기구부터 서둘러 설치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1882년 7월 25일 새로운 국가기구인 ≪기무처≫가 경복궁 내에 설치된다. ≪기무처≫의 성원 7명 중 5명이 개화파로 협의제 기관이면서도 개혁에 관한 사안을 개화파의 의도대로 결정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기무처≫는 개혁과제를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5.21 15:27

임오군란 이전의 개화파들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
1) 근대화를 위한 국가정치기구, ≪통리기무아문≫의 설치조선은 ‘절대 왕정의 신분제 사회- 봉건국가’였다. 조선 시대는 언론과 기록이 투명했던 것으로 유명했지만, 모든 정책이 국왕을 정점으로 한 봉건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지 백성의 삶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국정을 토의 결정하는 ≪의정부≫가 있지 않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의정부≫는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관에 불과했으며 국왕의 결정을 집행하는 곳도 인・의・예・병・형・공의 6조였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의 국내외 정세가 복잡해지자 전쟁, 외교 등의 상황 대책기구로서 ≪비변사≫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5.07 17:14

갑신정변 이전 개화파들의 근대화를 위한 노력
1. 임오군란을 계기로 일본을 견제하여 조선에 대한 예속을 강화하려는 청나라 우리는 일본에 대한 분노가 너무 크다 보니 1880년대 조선에서 벌린 청나라의 만행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본은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을 본격화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조선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외세는 집권세력인 민비 일족과 결탁한 청나라였다.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적 수탈이 노골화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청나라는 전통적으로 유지되어오던 사대관계를 악용해 조선을 예속화하려고 했다.이렇게 청나라의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4.24 17:50

본격적인 민족의 위기에서 자주권을 지키기위한 개화파의 노력
1)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우리 부르주아 혁명사를 쓰면서 김옥균을 탁월한 혁명가로 규정한 지난번 칼럼에 대하여 반론을 제기하는 분들이 있다. 김옥균을 일본의 앞잡이로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반역자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다. 또 김옥균이 친일파는 아니더라도 일본을 믿고 정변을 일으킨 순진하고 무모한 청년개혁가라고 아는 사람들도 많다. 사실 ‘김옥균 친일파 운운’은 일본이 날조해낸 음모이다. 일본은 김옥균을 친일파로 만들어 조선의 부르주아 혁명을 자신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날조하려 했다. 조선총독부는 일제 강점기 시절부터 우리나라가 자체적으로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4.10 15:16

갑신정변의 사상과 주체의 형성 과정에 대한 이해
1. 김옥균의 성장갑신정변이라는 조선 부르주아 변혁을 주도하여 대한제국까지, 근대개혁의 흐름을 형성한 이는 김옥균이다. 김옥균은 1851년 충청남도 공주의 가난한 양반가정에서 태어났다. 5살 때 오촌 당숙 김병기의 양자가 되어 서울에서 살다가 11살 때부터 16살까지 강릉 부사로 부임한 양아버지와 함께 강릉에서 조국의 아름다운 정취를 느끼며 자랐다.16살 되던 1866년, 미국 ≪제너럴 셔먼호≫와 프랑스 함대의 침입 사건은 그에게 큰 영향을 주게 되었다. 서구 열강의 침입에 반대하는 격렬한 민족적 투쟁을 보면서 조국에 불어닥친 위기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3.26 17:42

조선의 근대 사상가들의 갑신정변, 무엇을 지향하였나?
앞의 연재 글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에서 조선 후기로 들어오면서 봉건제의 기초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사회관계를 요구하는 객관적 토대가 이미 형성되고 있음을 서술하였다. 살펴본 바와 같이 일본이나 서구열강의 자본침투 없이도 조선이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물적인 토대는 서서히 갖춰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봉건제의 토대가 무너져 내린다고 해서 곧장 근대사회가 오는 것은 아니다. 봉건제라는 낡은 생산 관계를 청산하고, 생산력을 더욱 높여, 부국강병을 달성하려면 부르조아 개혁이 필요하다. 조선에 근대를 준비하는 사상가들이 나타나기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3.12 12:31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조선이 자생적으로 근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을까? ▷ 『식민지 근대화론』 비판 우리나라 역사 관련 대표적 논점 중 하나가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 공장을 지어주고, 경부선을 부설하면서부터 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했으니, 우리나라 근대화는 1876년 조-일 강화도 조약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주장이다. 이 『식민지 근대화론』은 조선 만이 아니라. 아시아 전반에서 부르조아 혁명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자체적으로 근대화를 실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그 이유를 대략 세 가지로 들고 있다. 첫째는 철학적, 과학적 기초가 제대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20.02.28 08:10

임오년 군인들의 투쟁이 외세 개입의 명분을 준 것에 불과했을까?
1882년 군인 투쟁의 성격임오년 군인 투쟁은 부패한 민비 권력을 뒤엎은 반봉건 투쟁이었으며 또한 청일침략자들을 반대한 반침략 투쟁이었다. 당시 민중의 분노는 민비 일당과 일본에 집중되어 있었다. 민비 일족은 국정을 농간해 원성이 자자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일본과 굴욕적인 수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나라를 망쳐 먹었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다. 일본 공사관 공격은 일본의 수탈로 경제적 빈곤이 가중됐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전개했던 명백한 반외세투쟁이었다. 또 군인들에 대한 최소한의 급료미 마저 주지 않는 부패한 조선 봉건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9.01.17 12:31

1882년 청나라 조선침략과 대원군 납치의 진상
◎ 군인들의 애국적 투쟁을 자신의 권력복귀에만 활용한 대원군투쟁에 나섰던 군인들은 대원군이 집권하자, 대원군을 믿고 더 이상 투쟁을 확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군인들 투쟁 덕분에 권력을 잡은 대원군의 행적은 어땠을까? 대원군은 권력을 잡자마자 제일 먼저 민비의 죽음부터 선포하고 민가일당의 재집권을 막는 일부터 착수한다. 일본과 청나라의 간섭에 대처하기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대신에, 나라의 운명을 결정하는 귀중한 시간을 민비 장례문제와 같은 사기극에 써버린 것은 조선과 그 자신의 운명을 망쳐버린 중대한 실수였다.대원군은 일본의 조선침략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9.01.03 13:43

일본의 조선침략에 큰 타격 준 군인들의 반외세반봉건투쟁(임오군란)
◎ 민비 집권 후 나날이 약화되는 조선의 방위력1876년 《강화도 조약》 이후, 조선은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적극적인 대책을 세워야 했다. 1866년 미국의 함대 《제너럴셔먼》호가 들이쳐도 버티며 승리했던 조선. 1871년 신미양요를 겪으면서도 미국에 굴하지 않았던 조선이 5년 만에 일본 운요호의 함포사격 몇 번에 굴욕외교를 맺는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쇄국을 강행했던 대원군을 쫒아내고 1873년 권력을 잡은 민비일당이 딱 3년 만에 나라의 국방력을 거덜 냈다는 것도 통탄할 일이지만, 굴욕적인 《강화도 조약》 이후에도 민비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2.26 10:01

우리민족 근대의 시작을 어떻게 볼 것인가
몇 달 동안 ‘다시 정리해보는 미일침략사’를 중심으로 서술했던 칼럼을 1882년 이후 새로운 접근법으로 이어가려 한다. 외세의 침탈이 전면화 되는 조건에서 우리 민족의 반외세 항전사로 시각의 중심을 바꾸어야만 당시 역사를 균형감 있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우리의 근대사의 시작을 무엇으로부터 보아야 하는가의 논점과도 연관이 있다.유럽에서는 근대의 시작을 봉건제의 해체와 근대국가 수립으로 본다. 봉건제가 토지에 얽힌 신분제 사회라면, 자본주의 시작과 함께 근대국가가 탄생되었고, 신분제 대신 ‘자유, 인권’이 시대 이념으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2.11 14:39

‘조일수호조규’는 조선을 어떻게 와해시켰는가?
1882년은 조선과 미국이 통상조약을 맺고 서구 열강의 조선 침탈이 본격화되기 시작하는 해이지만 1876년 강압적 조일수호조규로 이미 조선의 경제는 기초부터 허물어지고 민중들의 반외세투쟁은 점점 격렬해지는 상황이었다. 조선이 일본 식민지로 전락하는 흐름을 이해하려면 이 6년 동안의 일본의 조선약탈의 실상부터 알아야 한다. 일본이 메이지유신으로 일찍 근대화하여 강국이 되었다고 아는 분들이 많다. 그러나 앞의 칼럼에서 말했듯이 일본은 자체적으로 청과 러시아를 이기고 조선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미국의 전폭적인 군수물자 지원과 정치적 뒷배

지난 연재모음 김이경 남북역사문화교류협회 상임이사 2018.11.22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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